얼마 전, 아버지가 헛간을 열고 안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정리할 때 일이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달라붙어 있더니, 저녁 무렵에는 거실에 잡동사니를 산처럼 쌓아두고 옛 추억에 젖어 있었다.
헌 옷에 옛날 앨범, 도자기 인형...
그런 것들 사이, 문득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소파에 앉아 있는 젊은 시절 아버지와, 웬 백인 여자가 함께 찍혀 있었다.
아버지는 약간 야위어 있고, 당시 유행한 듯한 어중간하게 긴 머리카락 때문에 이상해 보였다.
여자는 약간 턱이 각진 편이었지만, 그래도 미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 사진을 손에 들고 아버지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대학교 3학년 때,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방랑할 무렵 사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사람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뭔가 뒷사정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혹시 하룻밤 함께 보내기라도 한 것인가 싶어 흥미가 동해 캐물었다.
[영 기분이 나쁜 이야기라 말이지.]
[뭔데, 뭔데? 무서운 이야기야?]
[그게 그러니까...]
아버지가 유럽에 오고 한달 반 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북유럽으로 향했다.
핀란드로.
우선 수도인 헬싱키로 향했지만, 너무 물가가 비싸 하루만에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라 불리는 지역으로 향했다.
지명은 잊었지만 작은 마을에서 사흘 가량 머물렀다고 한다.
도시보다 물가도 쌀 뿐더러, 워낙 외진 곳이라 동양 사람이 찾아온 일 자체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도 처음 보는 동양인에 신기해하며, 아버지를 무척 환영했다고 한다.
현지 신문에 기사까지 실렸다고 하니, 오죽했을까.
신이 난 아버지는 곧 서부 시골로 향했다.
해안가 마을이었다.
거기 역시 동양인이 오는 일은 드물어, 온갖 질문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가 묵은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던 여자아이가 일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대학에서 동양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던가.
그 아이는 여름방학을 맞아 호텔에서 묵으며 숙박비 대신 일하고 있던거라, 일이 끝나면 아버지를 찾아와 수다를 떨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영 모자란 영어로도 어떻게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원나잇 스탠드를 노리는 흑심도 품었다니.
뭐, 말은 그렇다해도 정작 그 때까지 헌팅 한 번 해본 적 없었기에,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정도였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심지어 재정적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일주일 정도 묵을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사흘째 밤.
그 날 역시 아버지는 저녁을 먹은 후 로비에서 잠시 그녀와 이야기하고 방으로 돌아왔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금새 잠에 빠지곤 했지만, 그날은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아 침대에 누워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여자 비명소리다.
[앗, 앗!] 하는.
아버지는 깜짝 놀라 시계를 봤다.
새벽 2시 반이었다.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았다.
핀란드는 한밤 중이라도 백야현상 때문에 꽤 밝다.
호텔 앞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앞에 깔린 돌계단이 아름다운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비명을 지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창을 열어 왼편 길을 보았다.
희미하게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아무래도 이리 오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다시 비명이 들렸다.
아까 전보다 크고, 몸 안 구석구석까지 울리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였다.
이리로 오는 사람 그림자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버지는 창문을 닫았다.
하지만 커튼 그늘에 숨어 계속 밖을 바라보았다.
비명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미 비명이라기보다는 울음에 가까운 듯한 소리였다.
꽤 시끄러웠지만, 주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인지 불 켜진 집 하나 없었다.
그리고 그 불쾌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사이, 결국 사람 그림자가 광장에 들어섰다.
네글리제를 입은 여자였다.
마구 고개를 흔들어 흑갈색 긴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광장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광경에, 아버지는 계속 바라봤다.
저 여자는 무엇일까.
왜 아무도 나오지 않는걸까.
설마 이 세상 것이 아닌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문득 여자가 멈춰섰다.
광장 한가운데.
어느새인가 정적이 새벽을 지배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아버지는 온몸에 강렬한 한기가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몸을 숨겨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덮은 순간,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한밤 중에 도대체 누가...
어쩔 줄 모르고 있자니 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강하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조심스레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친해진 여종업원이었다.
무슨 일인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아버지는 문을 열었다.
그녀는 뭔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목덜미를 잡아끌더니 귓속말로 말했다.
[절대 밖을 보면 안 돼. 조용히 하고 있어.]
그리고는 순식간에 방에서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안이벙벙해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절규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몸이 튀어올랐고, 무심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버지는 침대로 뛰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절규는 계속 이어졌다.
마치 이 방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는 것처럼.
게다가... 기분 탓인지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 같았다.
여긴 5층인데.
2층, 3층, 4층...
그리고 마침내 창문 바로 앞에서...
쾅쾅쾅!
쾅쾅쾅!
아버지는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늦게서야 눈을 떴다.
그런 일을 겪은 것에 비해서는 이른 시간이었고, 세수를 하고 나니 꿈을 꾼게 아닌가 싶었다고 한다.
사람 드문 레스토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자니, 그녀가 물을 따르러 왔다.
어젯밤과는 다른, 웃는 얼굴로.
어제 일을 물으려 했지만, 그녀는 미소만 지은채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을 마시려니, 컵 옆에 작게 접힌 종이조각이 놓여 있었다.
이건 혹시... 러브레터?
드디어 금발미녀와 썸이 생긴건가 싶어 아버지는 기대에 부풀었다고 한다.
종이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식사를 마친 후 방에 돌아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펼쳤다.
[당신 산제물이 될거야. 빨리 도망쳐.]
뭐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산제물이 된다는 것인가.
머리가 혼란했다.
그녀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인상 좋은 호텔 지배인이었다.
[손님, XX일까지 묵을 예정이셨죠?]
[네.]
[조금 더 묵으시죠? 저희도 일본에 관해 더 배우고 싶어서요. 방값은 싸게 해드릴테니.]
[아... 저, 그게...]
[우리 종업원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던데요? 하하.]
그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아뇨, 죄송합니다만 더는 시간을 끌 수가 없을 거 같습니다. 친구하고 합류하기로 약속을 했던 걸 깜빡해서 오늘 나가려구요.]
지배인은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만류했지만, 아버지가 끝끝내 거절하자 의외로 시원스레 물러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곧바로 짐을 싸서 오전 중에 호텔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작별인사도 하고 싶었지만, 도통 눈에 띄질 않았다.
호텔 로비에도, 길거리에도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날 바로 헬싱키에 돌아와 핀란드를 떠났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도대체 무슨 일이었던건지... 그 후 덴마크에서 만난 핀란드 사람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줬었지만, 그 사람도 도통 이해를 못하더군. 나한테 그 여자가 장난친 게 아니냐고 했지만... 그 시골 동네 사람이 나한테 장난이나 쳐서 뭐가 이득이라고.]
[그 절규하는 여자가 그 지방에 나타나는 괴물이라, 한 번 나타나면 누군가 산제물을 바쳐야 하는 건 아닐까?]
[나도 그 생각은 해봤지만, 그 핀란드 사람은 그런 괴물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말이지.]
아버지는 가만히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아, 그 절규하던 여자 얼굴은 봤어?]
[아니. 이상하게 얼굴은 기억이 안 나네.]
아버지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더 이상한 건... 이 여자야. 호텔 종업원.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떠오르질 않아. 안 들었을리는 없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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