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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나홀로 도쿄 여행 4박 5일 - 2일차

잡동사니 2017. 11. 3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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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두번째 날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커피를 한잔.

숙소가 참 좋았던게, 라운지에서 커피랑 차를 맘대로 타먹을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먹고 나서 설거지는 꼭 해놓아야 하지만요.

7시 반쯤 되서 출발했습니다.

숙소 근처 자판기에서 캔 단팥죽을 팔길래 하나 사봤는데, 맛은 그냥 우리나라에서도 파는 레토르트 단팥죽 맛이더라고요.

근데 엄청 달아요 으으...


둘째날 첫번째 행선지는 신사인 칸다묘진.

그런데 가는 도중에 신사가 하나 보이길래 여기도 잠깐 들렀습니다.

배불뚝이 너구리가 인상적이었어요.





칸다 강을 건너가면 바로 앞에 보이는 건 아키하바라!

여기서 직진하면 아키하바라입니다만, 아키하바라는 나흘째 하루를 통으로 써서 돌아볼 예정이었기에 여기서는 왼쪽으로 꺾어서 갑니다.

쭉 걸어가다보니 왼쪽 멀리 도쿄대 의대가 보이더군요.

일본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있는 건물!

그리고 숙소에서 한 30분 정도 걸은 끝에 칸다묘진에 도착했습니다.





칸다묘진은 일본 3대 축제 중 하나인 칸다 마츠리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5월달에 열리는 축제라서 이번 여행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도쿄 전체를 총괄하는 신사로, 일본에 있는 어지간한 유적이 그렇듯 지진과 전쟁통에 다 무너졌다가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저 사자탈은 점괘를 뽑아주는 자판기인데, 사자가 춤추고 소리를 내더라고요.

신기하긴 했는데 굳이 점을 볼 생각은 없었기에 구경만 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건 칸다묘진 3대 신 중 하나인 다이코쿠텐, 한국 발음으로는 대흑천(大黒天)입니다.

칠복신 중 하나로, 재물과 가정의 행복, 남녀의 인연을 담당하는 신이라는군요.





2000년대 들어 세운 사자상, 그리고 망한 점괘를 뽑은 이들의 한이 담긴 조형물입니다.

흉한 점괘를 뽑으면 저기다 묶어서 액운을 떨쳐내는거죠.


왼쪽 아래에 있는 건 칸다묘진 3대 신 중 하나이자, 칠복신 중에서도 인기 있는 에비스입니다.

어업과 풍년을 담당하는 신으로, 유명한 에비스 맥주가 바로 이 신의 이름을 따왔죠.

칸다묘진 3대 신 중 나머지 하나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인데, 이건 실존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거라 굳이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건 신사에서 키우는 조랑말이에요.

신마(神馬) 아카리쨩이라고 이름도 붙여놨더라고요.

귀여웠습니다.





칸다묘진은 아키하바라 근처이기도 하고, 러브라이브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한 덕에 오타쿠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곳입니다.

러브라이브의 경우 등장 캐릭터 중 한명이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람에 팬들 사이에서는 성지로 자리잡았다네요.

그래서인지 걸려있는 에마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뒷면에 러브라이브 캐릭터들이 인쇄되어 있는 게 꽤 보였습니다.

애니메이션 흥행을 관광업에 잘 활용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군요.





칸다묘진을 다 돌아봤으니, 이제 다음 행선지는 도쿄 돔입니다.

칸다묘진에서 도쿄 돔까지도 걸어서 한 20분 정도 걸려요.

천천히 걸어가는 사이, 일본에서 최초로 의과대학을 설립한 준텐도 대학이 눈에 들어옵니다.

현대에도 의학 쪽에 강세를 보이는 학교죠.


도쿄 돔에 도착해서, 우선 도쿄 돔 호텔에 티켓 수령차 들렀습니다.

안에는 벌써부터 예쁜 트리가 우뚝 서 있고, 울트라맨도 있더라고요.

나와보니 도쿄 돔 아니랄까봐, 자판기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도쿄 돔!

일본 야구의 심장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가 준우승을 차지한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도 바로 이곳에서 개최됐었죠.

하지만 야구 시즌도 다 끝난 겨울, 왜 도쿄 돔을 왔느냐...


그것은 바로 도쿄 돔 시티라는 놀이공원이 옆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쿄에는 요미우리 랜드나 후지큐 하이랜드, 디즈니랜드나 하나야시키 같은 놀이공원이 잔뜩 있지만, 여기만큼 도심 중심에 자리잡은 규모 있는 놀이공원이 또 없습니다.

중심 바큇살이 없는 관람차 빅-오와, 그 관람차를 뚫고 지나가는 롤러코스터 썬더돌핀이 이 놀이공원의 상징입니다.

이거 타려고 한국에서 이미 티켓도 끊어왔었습니다.

30,000원 정도 가격에 놀이기구 4번 탑승과 우주박물관 관람이 가능한 티켓이죠.





그런데 너무 일찍 왔어요...

놀이동산 개장이 10시부터인데, 아직 30분 정도 남은 시점에 도착해버렸거든요.

어쩔 수 없이 주변을 좀 돌아다녔습니다.

분수대도 보이고, 난데없이 카드캡처 사쿠라 전문점도 있고...

야구장답게, 야구 박물관이랑 야구 관련 메가스토어도 눈에 들어오더군요.





근데 이놈의 놀이공원이 10시를 넘겨서도 문을 안 열더라고요.

결국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먼저 문을 연 메가스토어랑 야구 박물관이나 먼저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메가스토어는 기본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메인으로 삼고, 곁다리로 일본 야구 대표팀이나 여타 프로팀 물품을 판매하고 있더군요.

대만 출신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 중인 양다이강, 일본 발음으로 요 다이칸 선수의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본인 메이저리거 코너도 흥미롭더군요.

마에다 켄타, 다나카 마사히로, 다르빗슈 유 세 선수 모두 올해 만만치 않은 시즌을 보냈는데, 내년에는 더 좋은 모습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이어서 들어간 야구 박물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은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본은 프로야구 역사가 길다보니 어르신들이 옛 추억을 돌아볼겸 많이 찾아오시는 것 같아요.

윗줄은 작년 오릭스 버팔로즈의 크리스 마레로가 기록한 일본 프로야구 통산 100,000번째 홈런볼과 배트, 일본시리즈 우승컵입니다.


각 구단별 유니폼과 선수 용품, 감독 메세지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 두개가 아랫줄 물건들입니다.

닛폰햄 파이터즈 소속으로, 현재 일본 야구의 신성인 오타니 쇼헤이 선수의 글러브와 스파이크.

그리고 이승엽 선수의 기록을 깨고, 아시아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작성했던 야쿠르트 소속 블라디미르 발렌틴의 56호 홈런볼입니다.





일본 프로야구 전설들 속에서, 하리모토 이사오라는 이름으로 걸려 있는 장훈 선수를 발견했습니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 속에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일본 프로야구에서 전설을 써 나갔던 위대한 선수죠.

오른쪽 위 사진 중, 두번째 배트가 바로 장훈 선수의 3,000 안타 기록 배트라고 합니다.


아래쪽 사진은 장훈 선수와도 절친했던 오 사다하루, 왕정치의 일본도입니다.

타격 연습을 위해 저 일본도로 볏짚을 베면서 훈련했다고 하는데, 지금 와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훈련법이죠.

그야말로 낭만과 전설의 시대였던 셈입니다.





야구 박물관에는 일본을 거쳐간 한국인 선수들의 물품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타자의 경우 이종범, 이승엽, 이대호 세 선수의 배트가 있더라고요.

이종범 선수는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이승엽 선수는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이대호 선수는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배트입니다.





투수는 선동렬, 박찬호, 오승환 세 선수의 글러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선동렬 선수는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박찬호 선수는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오승환 선수는 한신 타이거즈 시절 글러브네요.

해외에서 한국 선수들 물건을 보니까 새삼 더 반가웠습니다.





일본 야구가 낳은 대스타, 스즈키 이치로 코너도 한켠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 3,000 안타, 미일 통산 4,359 안타...

국적을 떠나, 그저 대단한 선수입니다.


그 너머에는 WBC 우승 기념 코너가.

일본은 초대 WBC와 2회 WBC를 연속 우승했죠.

우리나라도 충분히 우승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기에 더욱 아쉬웠던 대회들입니다.

일본도 우승이 정말 기뻤던지, 당시 선발 멤버 유니폼, 트로피 뿐 아니라 우승하고 나서 뿌렸던 색종이까지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좀 샘나더라고요 ㅠㅠ





도쿄 돔은 우리나라 동대문 운동장처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고라쿠엔 야구장을 밀어버리고 지은 구장입니다.

그래서 고라쿠엔 야구장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 잔뜩 옮겨져서 전시 중이었어요.

일본 어르신분들은 이런 거 하나하나 보면서 추억에 젖으시더라고요.

지금 와서 봐도 불펜 투수를 실어나르던 카트는 참 귀엽고 센스 있는 디자인입니다.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장훈 선수.

아래에 있는 배트 박스는, 실제로 스폰지 배트를 들고 프로 투수의 공을 쳐볼 수 있는 체험형 코너입니다.

저도 시도해서 안타를 하나 쳤어요!

유쾌한 코너였습니다.


일본 야구 박물관은 입장료 600엔을 받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공식 어플을 설치하면 100엔을 할인해주는 행사가 진행 중이라 저는 500엔만 냈고요.

야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쯤 방문할 법 하긴한데, 한국어 팜플렛이나 가이드가 없다는 점은 참고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어 소개문도 없기 때문에, 일본어 소개문을 어느 정도 이해하실 정도는 되어야 더 쉬운 관람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튼 이렇게 야구 박물관을 돌아보고 다시 놀이공원으로 갔는데...

아이고 맙소사.

바람이 너무 세게 부는 통에 썬더돌핀이 운행 중지 중이었습니다 ㅠㅠ

이거 하나 타려고 한국에서 왔는데!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하지만 별 수 있겠어요, 날씨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신 옆에 있는 관람차, 빅-오를 타기로 했습니다.

여기 관람차는 독특하게 안에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관람차를 타는 동안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한류 열풍 덕에 한국 가수가 부른 노래도 꽤 있으니, 찾아가시면 일본 하늘 위에서 한국 노래를 신나게 부르시는 것도 좋을 거 같네요.

저도 판타스틱 베이비랑 TT를 부르고 왔습니다 너무해 너무해.





빅-오는 80m 높이까지 올라갑니다.

도쿄돔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게 아니죠!

혼자 타서 우울했지만, 날도 맑고 풍경은 참 좋았습니다 흑흑...





내린 뒤 지나가다 봤던 바이킹.

저는 바이킹은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사실 이 놀이공원이 썬더돌핀 빼면 성인 남성이 혼자 탈 놀이기구가 마땅치가 않아요...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쌩쌩 불더라고요 ㅠㅠ





어쩔 수 없이 또 방황하다 발견한 점프샵.

일본 최고의 만화잡지 소년 점프 관련 상품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루피랑 나루토를 만났긴 했는데, 딱히 제 취향에 맞는 물건은 없어서 구경만 하고 나왔습니다.

벽에는 만화가들 싸인이 쫙 걸려있더라고요.





하지만 바람은 멈추지가 않습니다...

바람아 멈추어다오 ㅠㅠ

방황하다 마주친 메이저리그 카페, 에비스, 슈퍼전대 포스터.



그리고 하도 심심해서 스카이 플라워라는 놀이기구를 하나 더 탔습니다.

이것도 바람이 세서 운행 중지였는데, 마침 근처에 가니까 딱 운행 시작하더라고요.

일종의 곤돌라인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가 뚝 떨어지는걸 2번 반복합니다.

60m 까지 올라가는데, 고라쿠엔 시절부터 있던 유서 깊은 놀이기구라고 하더라고요.

좀 춥긴 했지만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서 인상 깊었습니다.





어느덧 점심때.

점심은 회전초밥을 먹었습니다.

해선 미사키코라는 프랜차이즈 회전초밥집인데, 마침 놀이공원 바로 옆에 있더라고요.

이거저거 해서 9 접시 먹었는데, 맛있었습니다.

1,780엔 나왔던걸로 기억하네요.





밥을 먹고 나와도 바람이 멈추질 않더랍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티켓에 포함되어 있는 코스, 우주박물관 TenQ로 향했습니다.

입장하면 상영하는 영상이 있는데, 영상 시작 시간을 맞춰 들어가야 해서 잠시 대기했습니다.

우주박물관답게 기념품점에서는 우주식을 판매하고 있더군요.

일본인 우주인의 싸인이나 UFO 모양의 조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기껏 들어간 우주 박물관은... 그저 그랬어요.

저는 일본어 안내문이라도 읽을 수 있지만, 아예 일본어를 모르신다면 진짜 별 거 없이 걷다가 나오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저처럼 결합 티켓을 구매하셨다면 들릴만 하겠습니다만, 아니면 따로 가시는 건 별로 추천할 일이 못되는 거 같아요.

여기 단독 입장 티켓은 무려 1,800엔입니다.

우주를 정말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면, 단독 입장은 지양하고 다른 데 돈을 쓰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네요.





우주박물관을 나섰는데 아직도 바람이... 응?

바람이 잦아든데다 갑자기 썬더돌핀이 시운전을 시작합니다!

신나서 달려가서 맨앞에 줄을 섰습니다.

시운전 결과에 따라 운행 시작 여부가 결정된다는 직원의 말을 믿고, 30여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운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9시 30분에 도쿄 돔에 도착했는데, 6시간 기다린 끝에 3시 30분에 마침내 맨처음으로 썬더돌핀에 탑승했습니다 흑흑.

썬더돌핀은 정말 끝내주는 롤러코스터였습니다.

360도 회전만 없을 뿐, 틸팅 노선에 급강하, 폭포수 커브에 놀이기구와 건물 관통까지 롤러코스터에 넣을 수 있는 재미는 다 우겨넣은 느낌이에요.

2번 탔는데, 지금도 또 타고 싶습니다.

롤러코스터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거 하나를 위해서라도 도쿄 돔 한번 찾아가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썬더돌핀의 한을 풀었으니, 이제 마음 편히 다음 목적지로 이동합니다.

다음 목적지는 일본 축구 박물관!

그렇습니다, 저는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히히.


가는 길은 20분 정도 걸린다고 나오는데, 언덕길을 끼고 있어서 실제로는 그보다 더 걸립니다.

도중에 지장보살님이 여섯분 계시더라고요.

아무튼 겨우겨우 도착한 일본 축구협회!

축구협회 건물 지하로 일본 축구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에 들어서니 우선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들 기념품이 맞이하더라고요.

인터밀란에서 뛰는 나가토모 유토,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는 하세베 마코토의 A매치 100 경기 기념 유니폼.

그 아래에는 도르트문트에서 뛰는 카가와 신지의 축구화입니다.

일본은 프로리그가 3부까지 구축되어 있는데, 개중 이미 완전히 자리를 잡은 J1과 J2는 각 팀 유니폼과 마스코트, 구단 용품이 한자리에 전시되어 있더라고요.

국내 프로축구보다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자리잡은 걸 보면 참 부럽다는 생각 뿐입니다.





일본 축구 박물관 티켓은 재미있게도 뒷면이 2002 한일 월드컵 티켓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별리그 일본과 러시아 경기 티켓인데, 일본에서도 2002 한일 월드컵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작은 재미이지만 이런 것 하나하나가 참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입장료는 500엔이에요.





박물관 안에도 이것저것 구경할 게 많았습니다.

왼쪽 위에 있는 건 J리그 우승 트로피입니다.

우승컵 형태인 K리그와는 다르게 쉴드 형태인데 크기가 상당하더라고요.

그 옆에는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일본 선발 베스트 일레븐입니다.

저기 빈 자리에 직접 들어가 선수들과 어깨동무하고 파이팅을 다질 수 있도록 만들어뒀더라고요.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들의 축구용품도 전시 중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간판이었던 데이비드 베컴의 축구화, 그리고 이 대회 MVP를 수상했던 골키퍼 올리버 칸의 장갑.





4강 신화를 써내려간 전설의 유니폼을 일본 와서 보니까 감회가 새롭더군요.

한일 월드컵 우승팀 브라질, 1998년 처음 월드컵에 진출했던 일본 국가대표팀 유니폼도 있었습니다.

오른쪽 아래는 일본 국가대표팀이 각급 대회에서 수상한 페어플레이 트로피래요.





축구 박물관이니만큼 일본 국가대표팀이 따온 트로피도 잔뜩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개중 윗줄 두개가 참 묵직한 대회들인데, 왼쪽은 2011년 여자 월드컵 우승, 오른쪽은 2014년 17세 이하 여자 월드컵 우승 트로피입니다.

우리나라도 17세 이하 여자 월드컵은 2010년 우승한 적이 있지만, 아직 성인 대표팀에서는 그만한 성적이 나오지 못하고 있어 아쉽네요.

언젠가 성인 대표팀에서도 월드컵 제패를 꿈꿔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아랫줄 왼쪽은 아시안컵, 오른쪽은 곧 개최를 앞둔 동아시안컵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번 대회에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르며 아시안컵 우승을 또 미루게 되었는데,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성적을 내온 일본이 참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시안컵을 우승해야 컨페드레이션즈 컵도 나가보고 그럴텐데 ㅠㅠ

다음달 동아시안컵에서는 대표팀이 간만에 우승컵 드는 모습이 보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축구 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던 일본 대표 선수들의 발자국입니다.

왼쪽 위는 미우라 카즈요시, 오른쪽 위는 나카무라 슌스케, 왼쪽 아래는 엔도 야스히토, 오른쪽 아래는 다카하라 나오히로.

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일본 대표팀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던 이름들인데, 모두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더라고요.

개중 마흔 넘은 나이에도 축구 선수로 뛰고 있는 미우라 카즈요시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이렇게 축구 박물관 감상이 끝났으니 이제 또 이동할 때가 됐습니다.

롯폰기 힐즈로 갈 생각이었는데, 근처 지하철이 롯폰기로 바로 가는게 없어서 결국 노기자카역까지 간 다음 걸어서 이동하기로 합니다.

근데 노기자카는 이름에 고개라는 뜻의 사카(坂)가 들어가는만큼 경사가 좀 있더라고요...

차라리 환승을 해서라도 롯폰기로 바로 갔어야 했습니다 ㅠㅠ


가는 길에 자판기를 봤는데, 자판기 한정으로 팔리는 메론소다가 무과즙이더라고요.

우리나라는 해당 재료가 들어가지 않으면 상품명에 표기를 못하는데, 일본은 또 다른 모양입니다.

결국 수상한 무과즙 메론소다는 거르고 탄산수를 마셨는데, 탄산이 어마어마하게 세더라고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른쪽 아래는 노기자카역에 내려서 걸어가다 마주친 국립신미술관.

여기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별전을 하고 있어서 가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스케쥴을 짜봐도 시간이 안 맞더라고요.

화요일날 쉬고 10시부터 6시까지만 운영하는, 여행객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운 시간대의 전시였습니다 ㅠㅠ





또 20분 가량 걸어서 겨우 도착한 롯폰기 힐즈.

롯폰기는 긴자와 더불어 도쿄의 대표적인 부촌 중 하나인데, 그 중심에 있는 롯폰기 힐즈는 문화예술과 온갖 비싼 가게들이 모여있는 복합단지입니다.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모리 빌딩에는 미술관과 전망대가 유명한데, 저는 이번에 그걸 보러 온 게 아니라 밑에서 사진만 한장.

저 멀리 도쿄 타워가 빛납니다.


왼쪽 아래에 있는 거미는 마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롯폰기 힐즈의 랜드마크입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거미를 밀어주더라고요.

저거 밑에 들어가보면 안에 알까지 배고 있어서 더 징그러워요.





천천히 걸어내려오면 TV 아사히가 보입니다.

계획에는 없지만 또 안 들어가 볼 수가 없죠.

60년 역사의 방송국으로, 특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강세를 보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먼저 맞이해주는 건 TV 아사히의 마스코트, 고엑스팬더, 그리고 밝게 빛나는 거대한 트리.


아래쪽에 있는 건 배우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40년 넘게 진행 중인 전설적인 토크쇼, "테츠코의 방" 스튜디오를 재현한 것입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 옆에 있는 버튼들을 누르면 육성이 흘러나오더라고요.

쿠로야나기 테츠코는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창가의 토토" 를 쓴 바로 그 분입니다.

책은 유명한데 정작 일본에서 유명한 배우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가 않더라고요.





TV 아사히의 간판 애니메이션 쌍두마차, 짱구와 도라에몽.

두 작품 모두 작가 사후에도 애니메이션이 이어지며,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롯폰기 힐즈에 왜 왔느냐 하면, 바로 이걸 보러 왔던 겁니다.

매년 삼성 갤럭시에서 주최하는 일루미네이션 행사가 있거든요.

도쿄타워와 롯폰기 힐즈 사이, 케야키자카를 전부 빛으로 물들이는 "롯폰기 힐즈 케야키자카 일루미네이션" 입니다.

길 전체가 빛으로 확 물들어 있는데,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하루 종일 걸어서 지친 와중에도, 저 거리를 걸어 올라갈 때는 참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하얀 불빛이 빨갛게 변하는 것까지 구경한 뒤, 모리빌딩을 통해 롯폰기 힐즈를 빠져나옵니다.

롯폰기 힐즈는 워낙 비싼 가게들 밖에 없어서, 저처럼 가난한 여행자는 뭘 사먹을 수가 없어요.

결국 나와서 한참을 방황하다가, 우리나라에서 소문이 자자한 라멘 프랜차이즈, 이치란 라멘에 들어갔습니다.


이치란 라멘은 중앙에 뿌려져 있는 저 매운 소스로 유명한데, 확실히 저 소스 덕분에 돈코츠 라멘 특유의 느끼한 맛이 좀 잡히는 느낌이더군요.

다른 라멘 프랜차이즈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맛있게 먹었어요.





소화도 시킬겸, 천천히 롯폰기를 걸어다니다 서점이 보이길래 쓱 들어가봤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알고 책도 좋아하니 서점은 보이면 들어가보고 싶더라고요.

괴담 번역을 취미로 하고 있다보니 괴담 관련 서적부터 뒤적거려 보고, 잡지나 문고본도 천천히 돌아봤습니다.

개중 특이한 게 바로 저 노기자카 46 문고였어요.

노기자카 46은 일본 아이돌 그룹인데, 롯폰기 근처 노기자카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올해 들어 코단샤 문고와 제휴를 맺어, 책 표지를 아이돌 멤버들이 장식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동네 아이돌이라고 롯폰기 쪽 서점에서 코너를 크게 내준 걸 보니 뭔가 유쾌한 마음에 사진도 찍어왔습니다.





롯폰기역에서 숙소까지는 또 지하철 한방에 가더랍니다.

이번 여행은 참 숙소가 교통이 편리해서 좋았어요.

오는 길에 패밀리마트에 들려서 야식을 사왔습니다.

겨울 한정으로 나온 귤맛 호로요이랑 우유 푸딩, 그리고 슈크림!

맛있게 또 잘 먹고, 사흘째 여행을 위해 지친 몸을 침대에 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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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2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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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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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지난밤이었다. 잠옷 바람을 한 우리 막내 딸아이가 서재(나 홀로 그렇게 부르는 골방)로 종종 달려와 그림책 한 권을 쑥 내밀곤 물었다. 그 그림책은 '헨젤과 그레텔'이었는데 아마 제 엄마가 월마트에서 사줬나 보다.



"아빠, 마녀가 진짜 있는 거야?"


"..뭐라고 했니?"


"마녀. 이렇게 코가 기-다랗고 손톱이 뾰족해."



딸아이가 펼친 페이지에는 흉측한 형상의 마녀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너 그것도 몰랐냐? 우리 앞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마녀야. 그 할멈, 지난번 니 뒷다리 보면서 군침 좀 흘리더라. 넌 이제 다 살았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놈이 딸아이에게 이죽거렸다.



"저리 가!"



딸아이가 아들놈 쪽을 향해 팔을 허공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자, 그만. 너희 둘 그렇게 자꾸 싸우고 그러면.. 진짜 마녀가 나타나서 잡아간다!"



내가 딸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사방으로 흔들어대자 딸아이는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연신 내뱉었다. 한편, 아들놈은 그저 멀뚱히 서서 입꼬리만 씰룩이고 있었다. 고개도 같이 삐딱하게 돌려 젖히고는 말이다. 도대체 저런 표정과 제스쳐를 아이들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아빠, 세상에 마녀가 어딨어요."



아들놈이 내게 점잖이 핀잔을 주었다. 맙소사, 마치 세상 다 살아본 사내의 눈빛이로군.



"얘야, 마녀는 진짜 있을지도 모른단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말이지. 그러니까 어서 양치하고 엄마한테 굿나잇 인사하렴. 마녀는 잠들어있는 아이에겐 관심이 없거든."


"하지만 아빠, 정말 마녀가 있다면 이미 유튜브에 올라왔을걸요?"



도대체가, 인터넷이 애들한테 도움되는 꼴을 못 봤다니까.



"그래? 덕분에 새로운 걸 알게 됐구나. 마녀는 카메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자, 어서 양치하러 가렴."



나는 두 아이를 돌려보내곤 다시금 모니터 속 문서창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얘들아, 마녀는 존재한단다.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에는 말이지."



 



그렇다. 마녀는 존재한다. 어딘가에그래, 마녀는 존재한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그리고 생각보다 젊고 평범한 모습으로. 어쩌면 당신도 살면서 한 번쯤 마주쳤을지 모른다.


이건 오래된 이야기이다. 1991년 당시의 이야기이니까. 만약 딸아이가 마녀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았다면 더 오래오래 잊고 지냈을 거다. 그러고 싶었고 말이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 중에서 형제자매의 전 애인 만큼 잊고 사는 관계가 또 있을까? 이건 오래된 이야기인 동시에 내 누이의 전 남친이었던 새미토퍼 체이스의 이야기이다.


먼저 새미에 대해 좀 말해보겠다. 엄밀히 말해 새미는 썩 어울리고 싶은 부류의 남자는 아니었다. 술, 담배, 메리앤제인이나 약어로 된 알약은 물론이고 심지어 농지거리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남자였으니까. 그는 살면서 군것질 서리 한 번 안 해봤을 텐데, 이 모든 건 아마 그의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일 거다. '새미, 아가. 도둑질은 나쁜 거란다. 술, 담배도 하지 마렴. 쟤들이랑 놀지 말고. 엄마 말 듣지 않으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없단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새미는 그런 남자였다. 너무도 착실해서 감히 놀릴 마음조차 들지 않는. 그런데도 여자들은 그를 썩 좋아하곤 했다. '그는 샌님이라서가 아니라 삶에 진지한 거야.'라나? 세상에 마상에, 가끔 보면 정말 여자들은 이해하기가 힘들다니까.


어쨌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야기 자체는 제법 짧다.


그, 그러니까 새미가 내 누이와 진지한 만남을(오, 아무렴. 새미인데) 이어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새미는 한 음악 회사의 아티스트 매니저 겸 일종의 음악 프로듀서였다. 그즈음 새미는 평소 동경하던 음악 장르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완전히. 새미가 빠져있던 건 바로 '고대 이집트 음악'이었다. 아마 고대 이집트 음악이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유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보다 정확히는 그저 그 장르에 꽂혀버린 것일 테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도 이 고대 이집트 음악은 철저하게 비주류였다. 하여, 새미는 해당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백방으로.


그 과정에서 새미는 한 여인과 접촉하게 된다. 여인 쪽에서 먼저 어떻게 알고서 연락을 취해왔는데 분명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고 연락해온 건 아닐 거다. 그녀는 자신을 고대 이집트 음악 전문가로 소개했다. 곧 저녁 식사 약속을 잡은 새미는 그녀가 거주하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녀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티셔츠와 재킷, 진 차림에다 아무리 봐도 대학생 정도로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곳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 동안 둘은 고대 이집트 음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시종 심도 있는 고견을 내놓았다. 그녀의 고대 이집트 음악에 대한 조예는 새미 이상이었고 이에 새미는 그녀와 진부한 표현 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서 새미는 그녀에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는데(아주 조심스럽게), 시종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는 그 질문에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선언하듯 대답했다.



"제 직업은 마녀랍니다, 체이스 씨."



직업이 마녀라.. 정말이지, 세무서 직원이 좋아할 만한 대답 아닌가? 허나 새미는 새미인지라 그러한 대답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조소를 보내지 않았다. '마녀'를 단어 그대로의 마녀가 아닌 일종의 삶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 반, 그리고 상대의 말에 섣불리 비아냥으로 화답하는 건 그의 인생 철학에 위배된다는 게 반이라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새미는 그녀에게 조소를 보냈어야 했다. 그건, 일종의 테스트였으니까.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선 직후 그녀는 대놓고 새미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왔다. 문지방에서 몇 발자국이나 떨어졌을까. 그녀가 새미의 팔짱을 부드럽게 끼고선 말했다.



"체이스 씨, 저희 집에서 한잔하면서 더 이야기해요."



이럴 경우 새미는 상당히 단호한 편이다. 새미는 즉시 팔짱을 푸르곤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럴 수 없겠노라고 대응했다. 그때였다. 시종 어른스럽고 고고한 태도로 일관했던 그녀가 갑자기 인도 한복판에서 새미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핏대 서린 얼굴로 새미를 힐난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계속해서 호의를 보내와 놓곤 갑자기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새미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인생에서 대부분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곤 하는 법이다. 그녀는 끝내 화를 풀지 않고서 뒤돌아 가버렸다. 마지막으로 새미에게 거칠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새미토퍼 체이스, 넌 나를 모욕했어. 망신을 주었다고. 두고 봐. 네게 저주를 내릴 테다!"



아무리 매사에 진지한 새미일지라도 그녀의 '저주'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 순간 민망함에 화가 났던 것이라고만 여겼다. 처음 며칠간은 말이다. 며칠 후, 새미의 꿈에 나타난 탁한 쇳소리가 말했다.



"사악한 눈의 딸이 너를 찾아갈 거야. 어린 그녀, 지금의 그녀, 그리고 미래의 그녀가."



그 주부터였다. 체이스의 꿈에 웬 흐릿하고 검은 형체가 나타난 게. 꿈임에도 그 형체로부터 설명 못 할 두려움을 느낀 새미는 매번 집을 뛰쳐나오곤 했다. 허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코너를 도는 순간 어째서인지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 있었고 몇 번이나 도망치다가 절규하며 꿈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그리고 마침내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형체가 드러낸 모습은 소녀였다. 소녀는 손에 쥔 칼을 앙칼지게도 흔들어대며 새미를 노려봤다. 소녀는 단지 멀찍이서 칼을 흔들어댈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새미에겐 충분한 고통이었다. 며칠간 새미를 괴롭히던 형체는 이번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그녀 자신의 모습으로.


또 며칠간 시달리는 날이 이어지고 이번엔 중년의 여인으로 나타난 형체가 새미의 손톱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꼼꼼하게 빼먹지 않고서. 물론, 잠에서 깬 새미의 손톱들은 모두 멀쩡했다. 다만 환장하겠는 건 꿈속에서 하나하나 뜯어먹힐 때마다 절로 비명을 자아냈던 그 아픔들이 꿈을 깬 후에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온전히 붙어있는 손톱들, 그 자리로 계속해서 욱신거리는 고통들. 더 무서운 거? 매번 꿈에서 손톱들을 모두 뜯어먹은 여인이 눈을 까뒤집은 채 새미의 가슴팍을 더듬으며 말한다는 거다.





"심장이 어느 쪽이지? 이쪽이지? 아닌가? 괜찮아, 두 군데 다 파보면 되니까."



여기까지가, 나와 누이가 새미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어찌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지 새미는 눈에 띄게 빠진 머리와 깊은 골짜기로 박힌 눈, 내 누이만큼 가늘어진 손목을 한 채 하소연했다. 이따금 입술 가장자리로 끈적한 침을 새어가며.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딱히 도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는 대학에서도 배운 적이 없으니까.


며칠 후, 누이는 새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지역 경찰에 신고했다. 왜냐하면 그가 누이의 전화에다 평소 같지 않은 음성을 남긴 이래 연락이 되지 않았거든.



"이제 나는 이대로 죽을지도 몰라. 너무나 두려워. 그래도! 그래도! 절대로 그 개년이 날 이기게 두지는 않을 거야!"



꽤나 오래전 일인지라 새미가 정확히 개년이라고 했는지는(맞는다면 아마 태어나서 처음 한 욕일 거다) 모르겠다만 어쨌든 충분히 흥분하고 있던 건 확실했다. 한편 새미네 집을 찾아간 경관은 소득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아무리 현관문을 두드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다음 날 나와 누이는 직접 새미네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지역 경관 둘과 함께 새미네 집을 찾아갔다. 집은 전날과 달리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경관은 우리에게 문밖에 있을 것을 지시한 뒤 권총을 꺼내 들고선 거실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누이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새미의 이름을 외쳤다. 나는 그런 누이를 말리려고 뛰어들어갔다가 깨달았다. 현관문에서부터 집 사방으로 소금이 흩뿌려져 있다는 걸. 또, 욕실 문이 잠긴 채로 닫혀있다는 걸.



"경관님! 여기 욕실 문이 잠겨 있어요! 와보세요!"


"새미! 새미, 거기 있어?"


"물러나세요. 체이스 씨, 안에 계십니까? 체이스 씨, 계시면 대답하세요."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자 경관 둘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거실에 비치된 싸구려 2단짜리 장식장에서 얼굴만 한 크기의 파라오 석상을 가져온 누이가 그걸로 욕실 문손잡이를 냅다 후려갈기기 시작했고

나와 경관 둘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손잡이가 맥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실에서 나는 평생 못 잊을 장면을 보게 된다. 아마, 나 외에 셋도 마찬가지리라.


욕탕 안에는 새미가 누워있었다. 새미는 잠옷 차림으로 빈 욕탕 안에 누워있었고 머리카락은 두피가 온전히 드러날 정도로 다 빠져 있었다. 새미는 참으로 얌전하게도 가지런히 누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그 옛날의 파라오상 같았다.


우리 넷은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새미의 몸은 마치 방금 샤워를 끝낸 양 깨끗해 마지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엔 눈물마냥 죽음이 그렁하게 걸려있었다. 허나 우리는 놀랄 정신도 슬퍼할 정신도 없었다. 파라오상과 같은 모습으로 욕탕에 안장된 새미, 집 안과 마찬가지로 온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소금, 욕탕 주변으로 마치 바리케이드마냥 펼쳐진 양초떼, 그 안으로 조심스레 정렬된 가지각색의 십자가상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오컬트 관련 서적(펼쳐진 페이지는 모두 '저주'에 관한 것들이었다)들. 이와 같은 기괴한 하모니가 전달하는 이질적 공포감에 꼼짝없이 전염되어버린 것이다. 궁극적인 공포 앞에선 그 무엇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마치 묵시록적인 예술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 앞에서 잠시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 묵시록적 예술작품. 한낮의 인간세계로 재림한 사탄과 종말, 바로 그걸 캔버스 소재로 한. 한편 사방으로 보이는 소금, 양초떼, 십자가상들, 오컬트 관련 서적들이 인간 새미가 마지막까지 얼마나 처절하게 대항했는가를 짐작게 했다.


그러나.. 새미는 패배했다. 정확히 무엇과 그리 사투를 벌였는지 감히 짐작이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새미는 떠났다는 걸. 보름 후, 나와 누이는 신문을 통해 새미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지난달, 마녀로부터 표적이 되었다며 두려워하던 남자가 자신의 자택 욕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여자친구에 의하면 남자의 이름은 사무엘 체이스(35)로, 자신을 마녀라고 밝힌 신원 미상의 한 여성으로부터 애정 표시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4월 18일, 체이스 씨의 여자친구로부터 신고를 받은 경찰은 노스 킹 카운티 북부 152번가 1300 블록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킹 카운티 경찰에 의하면 당시 현장에선 범죄, 폭력, 강도와 관련한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조사 결과 현장 주변으로 소금, 양초, 십자가상이 발견되었다.


한편, 킹 카운티 검시관 리치 가너는 체이스 씨의 몸에서 그 어떠한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인에 대해선 급성 심근염이라 결론 내렸다.


- 1991년 5월 4일 자 <시애틀 타임즈>



새미의 사인은 급성 심근염이었다. 하나 말해주자면 말했듯 새미는 생전 술, 담배, 약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비타민을 챙겨 먹었고 가족친지 중 심장 병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본인 역시 생전 심장과 관련한 질환을 앓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새미는 사방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선 욕탕 안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무언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잠긴 욕실로 침입한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 아마, 흔적이란 게 남을 수 없었던 존재였겠지. 그리고 그 무언가로 인해 새미의 심장이 갑작스레 멈추고 말았다. 그 무언가를 보고 너무도 놀라서인지, 아니면 그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심장을 멈추게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자기, 안 잘 거야? 뭐 한다고 그렇게 오래 있어?"


"아.. 여보. 애들은 다 잠들었어?"


"진즉에."


"마무리하고 금방 갈게."


"그래, 하고 와."



나는, 내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한번 짚고는 뒤돌아 나가는 아내에게 나도 모르게 물었다.



"여보?"


"응?"


"..혹시, 살면서 마녀 본 적 있어?"



아내는 난데없는 질문에도 일말의 당황한 표정 없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는 곧 대답했다.



"자기, 내가 바로 그 마녀야."



오히려 내가 잠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내는 머리를 푸는 동시에 장난스레 엉덩이를 양옆으로 흔들며

한껏 꾸며낸 목소리로 말했다.



"잊었어, 자기? 내가 밤마다 못된 마녀가 된다는 걸?"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내보이고는 예전 내가 청혼했을 때 지었던 그 미소를 띤 여인네에게 금방 가겠노라고 조아렸다. 그렇게 엉덩이를 과장스레 씰룩대며 돌아나가는 그녀를 끝까지 지켜본 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fin-




















후기


해당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 속 <시애틀 타임즈>는 있는 그대로 옮긴 것이라 보면 된다.


실제 모델인 크리스토퍼 케이스는 공포에 잠식된 나날을 보낸 끝에 숨이 멎고야 말았다.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저마다 품에 안고 사는 것이다. 사실 그 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일는지 모른다.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5143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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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도쿄 여행 4박 5일 - 1일차

잡동사니 2017. 11. 2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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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부터 24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 도쿄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혼자서는 처음 가는 해외 여행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정작 가보니까 별 문제 없이 계획대로 잘 돌아보고 온 것 같네요.

일정도 어디 갈까 고민하면서 이거저거 넣고 빼고했었는데, 그럭저럭 일정 세웠던대로 잘 돌아다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첫날, 공항 리무진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이동했습니다.

비행기가 8시 10분 출발이라, 4시 40분 첫차를 타고 이동하면 넉넉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7시쯤 도착했는데 그날 따라 출국심사 줄이 끝도 없이 서 있더라고요.

조금만 늦게 왔어도 비행기 못 탈 뻔 했습니다.





아무튼 사전에 대여 신청해놨던 포켓 와이파이도 수령하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일본까지 가는 길은 반쯤 졸면서 갔던 거 같네요.





나리타 공항에 착륙하니 공항 절대 반대라는 플래카드가 보이더라고요.

사진 상으로는 잘 안 보입니다만.

나리타 공항 건설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보상 문제 등으로 인해 엄청 싸웠다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제주항공을 타고 가서 3 터미널에 내렸는데, 이동 수단은 죄다 2 터미널에 있습니다.

3 터미널이 저가 항공사 전담 터미널인데, 우리나라 항공사 중에는 제주항공만 그쪽으로 배정이 됐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공항 내 셔틀 버스를 타고 2 터미널로 이동한 뒤, 교통카드를 사고 지하철에 탑승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스카이라이너나 스카이엑세스 같은 전용 철도를 타는데, 저는 마침 지하철 타고 가면 숙소 근처 역이 나오더라고요.


아무튼 도착한 숙소.

IRORI라고 써 있는 저 곳입니다.

호스텔인데, 기숙사처럼 2층 침대로 배정됩니다.

게스트 하우스 같은 곳이랑은 달리 다들 잠만 자고 나오는 스타일이라 조용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잘 맞았습니다.

체크인은 4시 이후라서 일단 짐만 맡겨놓고 나왔습니다.

니혼바시 근처라서 아사쿠사, 아키하바라는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 거리라 참 좋았어요.





아사쿠사 가는 길의 풍경들입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 옛날 문방구 마냥, 오래된 장난감 파는 가게들이 많더라고요.

저런 가게가 한 5곳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은 반다이 제 2 빌딩입니다.

원래 이 쪽이 반다이의 발상지라, 옛 본사랑 2 빌딩까지 여기에 모여 있더라고요.

지금은 시나가와 거쳐서 롯폰기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만.





한 30분 정도 걸어가는 사이, 이런저런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신사 옆에서 전통 혼례 사진을 찍고 있는 커플이 인상 깊었네요.

강 건너 보이는 스카이트리.

옆에 있는 아사히 맥주 본사는 공사 중인지, 유명한 황금 거품 조형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곳은 점심을 먹으러 온 우나테츠라는 장어 덮밥 전문점.





돈이 없는 관계로 런치 메뉴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우나동을 시켰습니다 흑흑.

장어 0.5마리지만 1,890엔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에요.

하지만 장어는 장어니만큼 맛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면서 기대하는만큼의 딱 그 맛이에요!

나오니까 슬슬 바람이 불기에 자판기에서 따뜻한 코코아를 하나.

자판기 대국이라는 별명만큼 정말 자판기가 아무데나 있었습니다 도쿄...





이제 메인 관광지인 아사쿠사로 또 걸어갑니다.

중간에 길을 헷갈려서 할아버지한테 여쭤봤더니 이거저거 지도 팜플렛까지 안겨주시면서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근데 카미나리몬 쪽이 아니라 센소지 바로 앞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탓에 카미나리몬 사진 찍는 걸 깜빡했어요 흑흑.

아무튼 탁발승을 지나쳐 이천문으로!


센소지는 절입니다만, 그 옆에 센소지 신사도 따로 붙어 있습니다.

규모가 작아서 저도 슬쩍 구경만 하고 지나왔지만요.

아사쿠사의 상징과도 같은 절입니다만,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봉은사처럼 도심 한가운데에 있어서 유명한 절일 뿐입니다.

일본 전통 느낌을 받고 싶어도 관동대지진과 도쿄대공습 거치면서 폭삭 무너진 걸 다시 지은 것 뿐이라 그리 큰 감명 받기는 힘들더라고요.

아예 문화권이 다른 서양 사람들이라면 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작 불상은 절 밖에 더 많드라고요.





아무튼간에 온 만큼 여기저기 구경은 열심히 했습니다.

저 커다란 짚신은 야마가타현에서 꼬아서 공물로 바친 거라고 하더라고요.

향 피우는 곳에서는 피운 향의 연기를 맞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여기저기 기모노 입고 다니는 분들이 계셨는데,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들이더라고요.

우리나라도 광화문 가면 한복 빌려입고 경복궁 가는 관광 코스가 있듯, 여기도 비슷하겠지요.





센소지 앞으로 쫙 펼쳐져 있는 나카미세도리가 참 유명합니다만, 거기 말고 옆쪽으로도 상업 지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다니다 닌자랑 부엉이를 만났어요.

지금 와서 보니까 부엉이 카페에는 부엉이 말고도 다른 동물들도 많나 보네요.

닌자 옷 입으신 분은 외국인 상대로 닌자 코스프레 세트를 판매하는 직원인데, 사진 찍으려니까 포즈를 잡아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닌자 코스프레 세트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드라고요...


쇼와 20년, 그러니까 1945년부터 장사를 해왔다는 카게츠도, 화월당이라는 빵집에서 메론빵을 샀습니다.

200엔이었는데,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갓 구운 빵이라 참 맛있었어요.

메론빵은 생긴게 메론처럼 겉이 갈라진 모습이라 메론빵이고, 실제 메론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간식도 먹었으니 다음 행선지는 스카이트리!





센소지에서 스카이트리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립니다.

비싼 교통비를 아끼려면 가난한 여행자는 열심히 걸어야죠.

스미다 강을 건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더랍니다.

고작 오후 3시 15분인데.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남쪽이라 그런지, 훨씬 따뜻한 대신 해가 진짜 빨리 지더라고요.

스카이트리 근처로 다가가니 마리오가 보이길래 부탁해서 사진 한장 찰칵.


스카이트리는 높았습니다.

전망대는 올라가지 않았기에 밑에서만 봤지만요.

2012년 완공 이래 현재까지도 도쿄 최고 높이의 건물로 자리잡고 있는, 634m의 초고층 건물입니다.

내부 기념품점에서 흥미로웠던 건 사진에 나와있는 이름 스탬프였어요.

흔한 이름들을 히라가나로 적어서 스탬프를 만들어 팔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여길 왜 찾아갔느냐 하면 포켓몬 센터 때문입니다.

스카이트리 지점은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점에 착안해, 천공의 지배자 레쿠쟈가 이미지 캐릭터더군요.

점내에도 그냥 레쿠쟈와 메가 레쿠쟈 조형물이 모두 있습니다.

시리즈 최신작 울트라썬/울트라문 출시 직후라서 관련 상품들이 열심히 팔리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노린 인형들과 모바일게임 튀어올라라! 잉어킹 관련 상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들이라 참 여러모로 탐이 나더라고요 ㅠㅠ

특히 봉제인형들은 상대적으로 마이너하다고 느껴지는 포켓몬들도 잔뜩 만들어놔서 그저 부러웠습니다.

아케이드로 돌아가는 폿권, 나아아아아아시 몬코레...

1997년부터 연재되고 있는 만화 포켓몬스터 스페셜도 20주년을 맞이했더군요.





3DS용 게임 소프트들과 포켓몬 GO 배지, 꼬리선 인형과 따라큐 인형...

따라큐는 7세대 간판이자 최고 인기 포켓몬답게, 혼자 특별한 색 인형도 따로 만들어놓은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작 제가 산 거는 나노블록이랑 나노비즈 뿐이지만요 ㅠㅠ

방문 기간에는 울트라썬/울트라문 대상으로 인-게임 아이템 배포도 시행 중이었는데, 다행히 로컬 배포라서 한국어판 3DS로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뭔가 득 본 기분이더라고요.





다시 나와서 스카이트리를 다시 한번 올려다봅니다.

아래에는 노점들이 열려 있는데,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있더라고요.

일본 사람들은 축제나 예쁜 걸 참 좋아하는 거 같더라고요.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도 아니고, 기독교 인구가 많은 나라도 아닌데 가는 곳마다 트리가 보이는 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일본에서 볼 줄이야.





아무튼 해도 졌겠다, 또 예쁜 걸 보러 이동했습니다.

신주쿠 근처 상점가인 테라스 시티에서 일루미네이션을 개최하고 있었거든요.

여기저기 보랏빛으로 물들어서 거리가 참 예뻤습니다.

일본 가서 참 인상 깊은 것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은 일루미네이션 행사가 여기저기서, 큰 규모로 열리고 있더라고요.





이제 저녁을 먹어야겠죠.

신주쿠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봅니다.

가수 생활 25주년을 맞아 은퇴를 선언한 아무로 나미에 광고판도 보이고,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그려놓은 타이토 오락실도 보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밥집이 보이길래 그냥 들어갔어요.

주문은 돼지고기 생강구이 정식.

밥은 오오모리 공짜로 된다길래 덥썩 주문했더니 고기에 비해 밥이 너무 많았습니다...

레몬사와도 한잔 시켜서 와구와구 집어먹었습니다.





먹고 또 소화도 시킬겸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롯데리아 보니까 묘하게 반갑더라고요.

물론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만.

신주쿠역 동쪽 출구에서 서쪽 출구로 넘어간 뒤, 다음 행선지는 도쿄도청.





왜 도쿄까지 와서 난데없이 도청을 찾아가느냐, 그것은 도청이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일본 거품 경제에서 착공한 탓에, 무려 243m라는 높이의 건물이거든요.

워낙 높다보니 전망대로 기능하는데, 일반 입장이 무료라는 게 포인트입니다.

다만 워낙 일본에 전망대로 유명한 곳이 많다보니까 여길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덕분에 참 편하게 야경을 봤습니다.





온 김에 스탬프도 쾅!

개인적으로 이런 스탬프 찍는 걸 좋아해서, 이번에는 아예 스탬프를 찍어갈 노트를 한 권 들고 왔습니다.





이제 굵직하게 돌아볼 곳은 다 돌아봤으니, 천천히 신주쿠에서 돌아다녔습니다.

커다란 북오프가 있길래 잠깐 들어가봤죠.

북오프는 중고 서점으로 시작한 체인점인데, 지금은 음반, 게임, 취미용품 등으로 발을 넓힌 프랜차이즈입니다.

아예 취미 용품만 다루는 하비 오프, 가전제품 전문 매장 하드 오프 등으로 분화된 매장이 따로 있을 정도죠.

우리나라에도 잠깐 들어왔습니다만, 매입가도 약한데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밀려버렸고, 가게 들어가면 "이랏샤이마세" 하고 일본어로 인사하는 게 오그라들던 탓에 망했습니다.

원서 살 때 신촌점이 참 좋았는데 흑흑...


아무튼간에 책을 좀 살펴보기는 했는데, 본토라서 그런지 상태 좋은 책들은 상당히 비싸더라고요.

세로쓰기 문고본을 300엔 이상 주고 사기에는 제가 너무 거지라서 과감히 구경만 했습니다.

윗층에는 게임이나 취미용품 판매도 하고 있었는데, 제가 산거는 왼쪽 상단의 아이돌마스터 히비키 피규어 하나였습니다.

중고라는 점을 감안하면 피규어나 음반 같은 거는 건질만한 게 꽤 있는 편이더라고요 그래도.

돈이 많고 취미가 있더라면 꽤 샀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둘 다 아니라서...





신주쿠역 주변을 잠시 돌아보는 것으로 이날 일정은 마무리했습니다.

유명한 쇼핑몰 돈키호테도 들어가보고, 가부키쵸도 앞에만 슬쩍 돌아보고.

가부키쵸의 경우 일본에서도 손에 꼽히는 환락가입니다.

파칭코, 술집, 풍속점 등 온갖 밤놀이로 유명한 곳이죠.

용과 같이나 사채꾼 우시지마 같은 매체에서도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니 익숙한 분도 있으실 거 같네요.





신주쿠에서 숙소까지는 환승 없이 지하철 한번에 가서 참 좋았어요.

오다가 세븐 일레븐에서 사 온 돈베 키츠네 우동이랑 슈크림을 야식으로 먹었습니다.


키츠네 우동은 요시오카 리호랑 호시노 겐이 출연한 CF로 유명한데, 맛도 있더라고요.

우리나라 튀김우동 같은 느낌인데, 위에 올려진 유부가 국물을 머금어서 푹신푹신하고 정말 맛있었습니다.

슈크림도 생크림이랑 커스타드 크림이 반반 들어가 있는데 만족스러웠어요.





지금 와서 3DS 발자취 수첩을 켜봤는데, 이날 23,617 걸음을 걸었네요...

여행 내내 이렇게 무식하게 걸어다녔습니다 흑흑.

여행기는 2일차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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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공지사항 2017. 11. 1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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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부터 24일까지 일본 도쿄로 여행을 갑니다.

다녀와서 다시 글 열심히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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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괴담][102nd]기어오는 군인

실화 괴담 2017. 11. 1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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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이나 vkrko91@gmail.com 으로 직접 겪으신 기이한 이야기를 투고받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메일로 김민기님이 투고해주신 이야기를 각색 / 정리한 것입니다.



2014년, 제가 군 복무할 무렵 이야기입니다.


저는 가평에 있는 부대에서 복무했었습니다. 


이 사건은 제가 일병 5호봉이던 시절, 탄약고 경계초소근무를 서던 전번초 근무자, 후임 김일병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야, 일어나. 근무 가야지.] 


김일병은 불침번 근무자이자 고참인 신상병이 깨워 잠에서 일어났답니다. 


밖에서는 비 내리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었 날이었지요. 




근무 시간은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가장 피곤하고 졸린 시간대. 


네 소대가 번갈아가며 한달에 1번씩 서는 탄약고 근무였습니다.




탄약고는 언덕쪽에 위치해 있었기에 투입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야 했죠.


그런 탓에 다들 탄약고 근무를 서는 날이면 매우 싫어했었습니다. 


거기다 비까지 오는 날이니, 그야말로 최악의 근무였습니다. 




김일병은 서둘러 환복을 하고, 단독군장을 차고 방탄헬멧을 쓴 뒤, 행정반에 가서 시건된 총기를 꺼내고, 대검을 받은 뒤 보고를 했습니다.


[당직사관님. 보고드립니다. 탄약고 근무 투입하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라.]




졸고 있다 막 잠에서 깬 당직사관은 졸음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대대 실장에게 보고 후, 팀장에게 공포탄을 받아 검사 후 출발을 했습니다. 


비오는 날이면 우비를 써야하는데, 김일병은 계급에서 밀리다보니 찢어진 우비를 받았더랍니다. 




그걸 쓰고 가니 비는 새고 옷은 젖어, 잠이 금세 확 깼다네요. 


그렇게 올라올라 탄약고에 도착해, 근무에 투입했습니다. 


고참과 같이 서는 근무.




고참은 초소 안에 들어가 쉬고, 짬이 안되는 후임은 밖에 서서 감시하는 당연스러운 전개로 흘러갔습니다. 


십분, 삼십분, 한시간... 


시간은 흘러가고, 김일병은 그저 멍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탄약고 언덕길을 보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2시간 근무 중 1시간 20분 가량이 흘렀을 때, 김일병은 그 언덕길에서 보면 안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비가 흘러내리는 언덕을, 무언가가 꾸물꾸물거리며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찰박... 스윽... 찰박... 스윽... 찰박... 스윽...]



 

웅덩이를 짚는 짙은 소리와, 무엇인가 끌고 오는 소리. 


그렇습니다. 


그것은 기어오고 있던 것이었죠. 




김일병은 이때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골이 오싹해짐과 동시에, 제대로 된 사고가 마비됐다고 합니다.


극도의 공포와 마주치면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고들 하죠. 


입도 마비되어, 같이 근무 들어온 염상병을 부를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숨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졸고 있는지 자고 있는지, 초소 안 기둥에 기대어 있을 염상병을 불렀지만, 들리지 않는지 그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오고, 기어오는 것은 언덕길 중간에 파놓은 배수로를 지나오고 있었습니다. 


[철벅... 스윽... 철벅... 스윽... 철벅... 스윽...]  




짙게 들리는 물을 짚는 소리와 더불어, 그것의 형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허리 아래부분은 날아간건지 절단된건지 없었고, 찢어진 상의 옷가지만 끌려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오는 날, 검은 형체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기어오고 있는 것만으로도 졸도할 지경인데, 김일병을 더 미치게 만든건 그것의 얼굴이었습니다.


두 눈구멍은 뻥 뚫려 눈알은 보이지 않고, 턱은 찢어져 간신히 붙어있는 채 덜렁거리고 있었답니다. 


그런 녀석이 말라 비틀어진 팔로 기어오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정신이 나갈만도 하죠.




김일병은 자기도 모르게 공포탄 장전을 하고. 비명을 지르며 한발을 쏜 뒤 기절했다고 합니다. 


이후 총소리를 듣고서야 잠에서 깬 염상병의 긴급보고로, 거품 물고 실신한 김일병이 대대 팀장 및 오분대기조에게 실려 내려왔습니다. 


그 탓에 당시 졸고 있던 염상병은 진급이 누락당했고요. 




김일병은 쓰러진 이유를 대대 실장 및 대대장, 중대장, 주임 원사, 탄약관에게 죄다 보고했지만, 군대라는 곳이 어디 귀신봤다고 넘어가주는 동네겠습니까.


결국 군의관에게 "정신착란으로 인한 극도의 공포에 의한 발포" 라는 길고 얼토당토않은 판정을 받고 나서, 휴가도 잘리고 진급도 누락당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이 이야기의 진상을 알게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염상병도 전역을 하고, 저와 김일병 모두 상병 계급장을 달고나서야 이야기 해주더군요. 


[김상병님, 제가 그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응? 뭔데?]




김일병이 공포탄을 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 기어오는 질척한 소리가 가까워 올수록,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처음엔 [....줘 ...놔줘...] 하고 들렸는데,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오니 겨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쏴줘" 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러니까. 그 낡은 군복을 입고 기어오는 게 낮은 목소리로 "쏴줘" 라고 하더란 말입니다.]




아마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하반신을 잃고 숨을 거둔 군인의 혼령이었을까요.


이유를 알고나니 마음이 착잡해지더군요.


6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다니며 자신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군인의 혼령이라니. 




군 복무하는 도중,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금 뼈에 새겼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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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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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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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살아남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도망친 것이다. 내 품에 싸인 이 '물건'을 맡아야 하니까. 나는 이 '물건'을 맡으라는 명을 하달받았다. 그 명을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탈출로를 선점 받았다. 그러니 조금은 내 비겁함을 변호해야겠다. 나는 명에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을 맡은 다음은, 그다음엔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같이 평생을 명에 따랐던 군인에게 있어

은퇴란 그런 거다. 계획된 것이든, 계획되지 않았던 것이든 간에. 앞으론 군복 대신 셔츠 쪼가리 하나만 걸칠 것이다. (어차피 군복도 모두 처분한 지 오래다) 그리곤 이 따뜻한 곳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겠지.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어쨌건, 그렇게라도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이 끝까지 사는 거다.


히틀러 씨(그분은 항시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바랐다)가 이 '물건'을 처음 접한 건 빈에 거주하며 미술에 몸담고 있던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그것은, 1912년 합스부르크 가의 보물을 전시하던 박물관에서였다. 처음 히틀러 씨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그게 2시간 전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 평소 조용하고 수줍음 많았던 히틀러 씨는 이야기 내내 핏발에 광기를 띠고 있었다. 히틀러 씨는 마치 다른 세상을 엿보고 있는 양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선 그날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온 유럽이 기독교인 만큼 나 또한 가톨릭교도였네. 그래서 처음 그 '창'에 어떤 신성함 같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실제로 본 순간 모든 게 날아가 버렸네. 그때 내가 느낀 건 신성함이 결코 아니었어. 곧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비명 지르는 게 느껴졌지. 때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잖나. 그리곤.. 이건 농담이 아닐세. 그 '창'이 내게 말을 건네왔어.


'아디, 아디. 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옛날, 네가 태어나기도 전 네가 날 손에 넣었을 무렵부터. 아디, 내게로 오렴.'"



그 뒤, 히틀러 씨는 1차 세계 대전 참전 후로부터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계와 대중의 총아가 되었다. 그렇게, 방랑하던 미술가는 1934년 독일의 총통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 씨와 '창'과의 인연(?)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자 비밀스러운 심복이었던(그리고 친구였던) 나는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 임무를 일임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임무의 첫 수행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창'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창'은 여러 주인의 손을 탔던 것 같다. 아리마태아의 요셉 자손들이 차례로 보관해오다 오랜 세월 예루살렘에 묻혀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이 찾아낸 이래로.


그렇게 로마 황제들의 손에 번갈아 들어갔던 '창'은 그들을 패권의 길로 인도했다. 허나 손을 벗어난 '창'은

그들을 곧바로 패망의 길로 밀어뜨렸다. 이후 십자군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창'은

원정 승리로써 그에 보답한다.


그 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창'은 그들에게 유럽 제일의 패권을 가져다주었다. 천하에 위세를 떨치던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빛나는 승전보를 올리나 끝내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창을 가로채는 데엔 실패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600년 가깝도록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배하며 1914년 세계 대전을 선포한다.


그리고 1938년. 히틀러 씨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병합한다. 동시에 히틀러 씨는 친위대 앞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들을 압수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물론, 그전에 미리 비밀명령을 하달받은 나로 인해 '창'은 아무도 모르게 가짜로 대체된다. 뉘른베르크의 교회로 옮겨진 게 바로 그 가짜였다.


마침내 히틀러 씨는 '창'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망했었던 그 '창'을. 지금에 와 보면 가난한 미술가가 독일의 총통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합병한 게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1939년. 히틀러 씨는 폴란드 침공을 전개했고 곧 두 번째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창'을 손에 넣은 히틀러 씨는 곧 전 세계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마침내 이곳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내가 아무도 모르게 친위대 중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안전하게 탈출로를 선점 받았던 것은 히틀러 씨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씨는 확신했다. '창'이 수중에 있는 한 운명은 다시금 자신의 편에 서리라고. 하여, 첩보를 입수하고선 전설의 '창'을 손에 넣으려 호시탐탐 침을 흘려대는 개떼(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에 대비해 내가 움직인 것이다.





머저리 놈들. 가짜를 두고서 서로 물어뜯기나 하라지. 말했듯, 히틀러 씨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창'만 있다면야 언젠간 전황이 바뀔 거라고. 그러나 쑥밭으로 둘러싸인 벙커 안에서 히틀러 씨는 마침내 낙담하며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창'의 보관 임무에 실패한 거라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히틀러 씨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낯선 땅에 홀로 남겨졌다. 말했듯,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나는 이제 안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직감하고 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창'은 신성한 피가 닿은 성유물이 아니었다. '창'은 패권으로 인도하는 제왕의 유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창'은 기다렸다. 로마 제국 시절 발견된 이래 황제들의 손을 거치며 그들을 부추겼다. 그들을 움직였다.


'창'은 그들론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차례로 그들을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허무한 몰락을 맞이했고 '창'은 십자군 원정을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로 도착했다. (십자군 역시 끝내 버림받으며 비참한 끝을 맞이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대로 된 대상자를 찾은 것이다.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세계 대전이 끝나자 '창'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버렸다. 지난 '그들'이 그러했듯 합스부르크 왕가는 몰락했고 '창'은 히틀러 씨를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이제는 안다. '창'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제 안다. '창'은 피를 원한다. 우리 인간의 피를. 더 많은 우리 인간의 피를. '창'에는 그 옛날 두 번째 인간을 유혹했던 사탄이 깃들여 있는 거다. 사탄은 광야에서 나사렛 사람에게 세 가지 유혹을 거절당하곤 잠시간 자취를 감췄다. 사탄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건 '그날'이었다. 사탄은 스스로를 '창' 속에 구속한 것이다. 인간의 피를 부르기 위해. 나사렛 사람을 평등과 사랑을 전파한 개혁가가 아닌, 오로지 신의 아들로만 만들고자. 그러기 위해 '장치'를 자처했다.


'창'이 마침내 두 번째 인간이 탄생했던 곳을 찔렀다. 사탄은 스스로를 구속시키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에 성공한 거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이 신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두고서 신의 이름을 빌린 자들에 의해 쏟아진 헤아릴 수 없는 피들이 아마 땅속을 스며들어 저 아래 지옥에까지 닿았을 것이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창'은 끝없이 피를 갈구하며 대상자를 찾아왔다. '창'은, 사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창'이 더는 인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오, 하늘에 계신 분이시여. 이 사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땅에 가라앉히든, 물에 가라앉히든, 가라앉은 건 언제고 떠오르는 법이 아닌가. 나는 대상자들이 사탄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최소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러도록 할 것이다. 사탄을 항시 품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오래지 않아.. 그래, 머지않아서. 대상자들이 다시금 사탄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개 무리는 늑대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 법이니까. 그때까지 우리 인간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오래도록 지금의 피에 만족하길. 그래서 가능한 한 늦게 대상자를 불러들이길.



 



"meos tuosque, huc ades"





-fin-


















후기


대표적인 성유물 '운명의 창'을 두고서 실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 종교 소재만큼 영감을 자극하는 게 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색채를 입히면 제 아무리 덜떨어진 수준의 창작물이라도 일견 봐줄만해지는 법 아닌가.


어쨌건, 나 역시 성(聖)을 향한 관음 욕구를 기꺼이 소비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이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의 역할이 종래 다른 창작물들과 다른 노선을 띠고 있는 것에 기꺼워하는 편이다. 그건, 성(聖)스러움을 확립코자 쌍스러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그것을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이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36313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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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생각했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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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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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생각했다



 



도르르


도르르


도르르르


오늘도 실타래는 풀려 간다.


역사라는 이름의 실타래가.


다음 실타래를 위하여.





그건 1914년 여름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정해 놓은 것처럼, 그저 순서가 되었기에 찾아온 것처럼, 그렇게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젊은이인 시몬도 전장에 발을 딛게 되었다. 과거의, 또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1918년 가을, 프랑스 최북단에 위치한 노르 주. 이곳의 한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해당 전투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본인의 마지막 세계 대전을 치르는 셈이었다. 시몬은 바로 이 전장 한복판에 있었다.


허나, 마지막 전장이라고 위안 삼기엔 일렀다. 시몬이 속한 소대는 부대와 고립된 채 적군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내내 그 망할 놈의 기관총으로 참호 밖으로 내미는 머리통을 쏴 재끼고 있었다. 당연히, 그러한 머리통은 모두 시몬의 전우 것이고 말이다.


아직 머리통이 달려 있는 것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시몬은 이미 한참 전부터 죽음의 내음을 맡고 있었다. 그 내음은 땅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포도밭 향 따윈 진즉에 사라진 이곳 토양, 절망과 손을 맞잡고 춤추던 전우들, 그 전우들을 영양분 삼는 구더기 떼, 세상의 끝과 마주한 채 곳곳에서 꺼뜨리는 비릿한 한숨들. 그러한 것들이 한데 묶인 향이 계속해서 시몬의 콧속을 찔러 대며 유혹을 가해 오고 있었다. '포기'라는 유혹을.


하지만 시몬은 그 유혹과 결코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용감하기 때문에? 아니, 그렇지 않다. 새 떼에게 쪼인 눈알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목이 덜렁덜렁한 시체에서 새어 나온 배설물들의 악취가 공포라는 것을 전염시키는 와중에 용기라니? 그러한 상황을 두고서 용기 운운하는 것들은 필경 지붕 밑에서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그 상스러운 주둥이를 흔들어 대는 치들뿐이다.


시몬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건 바로 무섭기 때문이었다. 시몬 옆의 전우들, 그 전우들의 동태 눈에서 하나 같이 새어 나오는 죽음의 예언. 그게 매 순간 시몬을 두려움에 젖게 하며 포기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 내몰린 시몬은 참호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고막을 찌를 듯한 소리들이 공기를 가르고 시야를 흩트리는 동안에도 시몬은 어쩐지 턱 끝까지 다다른 찬 내음만을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찬 내음에만 집중하고선 달린 끝에 시야로 기관총을 붙들고 서 있는 적군이 들어왔다. 시몬의 시야는 전에 없을 만큼 선명했다. 하얗게 질린 채 한쪽 입이 살짝 뒤틀려선 기관총에다 자신의 운명을 떠넘긴 적군의 모습, 그자의 치켜진 눈썹 위로 난 주름살 개수마저 가늠될 정도였다.


시몬은 품에 쥐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 전방으로 내던졌다. 마치 여적 그것을 위해 살아왔던 것처럼, 그러라고 신이 세상에 내보낸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신속하고 절묘한 투척이었다. 이어 시몬은 적군 진지 내 좁다란 통로에서 달려드는 적군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검을 내질렀다. 아무런 철학도 없는 본능적인 행위였기에 그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시몬 뒤로 광기에 붙들린 눈을 한 전우들이 같은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몬은 살아남았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적군의 단말마가 시몬에게 고향에 돌아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고 있었다. 곧이어 시몬이 활로를 연 덕택에 합류한 본대가 적군에게 응징을 가했다. 한편, 시몬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전우들을 대신하여 잔당 색출 작업에 참여했다. 본대의 배려를 받아 후방에 남아서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시몬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온 것은. 그 남자는 뼈대만 흉물스레 남은 벽담에 한 팔을 기댄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시쳇더미 속에서 죽음을 위장한 채 화를 피했던 것인지 얼굴과 온몸에 핏물 어린 진흙덩이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남자는 적군이었다. 시몬과 비슷한 나잇대의.


잠시 후,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시몬과 눈이 마주쳤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어 사격 자세를 취했고 이에 남자는 심장이라도 떨군 듯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몬은 남자의 눈에서 익숙한 것을 보았다. 죽음에서 빠져나갈 희망 따윈 모두 내팽개친, 그 익숙한 눈빛을. 그렇다. 남자는 죽음을 각오한 게 아니라 희망을 포기한 것이었다.


너무도 뜻밖의,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부닥친 시몬은 그 남자처럼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그저 총부리만을 겨눌 뿐이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재빨리 사방을 확인해 보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군 한 명은 이미 저 멀찍이서 소피를 보고 있었다. 시몬은 다시 총구로 고개를 돌려 남자를 조준했다.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그런 절망감 어린 눈으로.


영겁과 같은 찰나의 그 순간, 시몬의 머릿속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다.



"이봐, 전쟁영웅 씨. 뭘 망설이시나? 쏴, 쏘라고! 뭐야? 왜 그러고 선 거야? 사람 처음 쏴 봐? 잠깐, 지금 사람 처음 쏴 보냐는 농담 제법 괜찮았지?"



전장에 몸을 비비며 이미 씻을 수 없는 피를 온몸에 끼얹은 시몬이지만 그래도 버리지 말아야 할 신념이 있었다. 부상당한 적군과 항복하는 적군을 사살하지 말자는 것 말이다.



"아아, 휴머니티! 이 친구야, 항상 모든 문제의 대다수는 그거 때문에 일어난다고. 전쟁이 다 끝난 거 같지? 네가 보낸 저놈이 언젠가는 네 어미, 네 누이, 그리고 네 아내를 겁탈할 거다. 아니, 어쩌면 이미 네 친척이나 이웃 중 하나를 겁탈했을는지 모르지. 모르는 거야. 요컨대, 저놈은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그럴 거라는 거다. 이봐봐, 너는 자기만 아는 그런 이기적인 놈이었나? 주변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치 않는, 그런 놈팡이였나?"



시몬에겐 무저항의 적군을 사살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건, 불가피하게 살육의 지옥터에 내던져진

처지에 있어 그래도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위안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얼씨구! 이 친구야, 그건 비겁한 자기기만일 뿐이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고작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싶다는 어리광에 불과한 거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저 위의 대리자를 참칭하는 자들로부터 한마디 위로받으면 모두 해소될 것에 불과한 거라고. 네 그 비열함이 나를 악마의 형상으로 만든 건 알지? 어떤 선택을 하든 '악마의 말을 듣지 않았어.', '악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라고 도망가려고 말이야."



시몬에겐 신념이 있었다.



"대단하시군.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난 사람을 죽였지만 신념을 지켰어.'라고 자위할려고? 그런 저열한 위로에 기댄 채 살아갈 건가? 여보, 친구. 이건 기회라고. 저놈을 쏘고서 다시 태어나게. 그럼 너는 네 가족이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마무리를 지은 게 되는 거지. 그 전에 네가 쏘아 죽였던 적군들에서처럼. 그러니 당겨, 방아쇠를 당겨! 너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 되라고! 저놈을 쏘고 완전한 승리를 취해! 명심해,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하면 넌 그저 살인자가 될 뿐이야! 하지만 승리자가 된다면 영웅이 되는 거다! 스스로를 떳떳하게 여기며 평생을 승리자로 살아야 할 거 아냐! 쏴! 쏘라고!"



쏠 것인가, 보낼 것인가. 곧 저기서 아무 고민도 없이 소피를 보고 있는 아군이 돌아오면 그 아군에 의해 남자는 사살되고 말 것이다. 저 아군은 같은 고향 출신의 전우가 죽은 사실을 자신의 모든 행위에 정의를 부여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 그러니 남자를 포착하는 순간 자신의 철학을 완성코자 필경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러므로 시몬은 남자의 운명을 남의 손에 떠넘겨 훗날 후회하는 대신 죽일지 살릴지 직접 결정키로 했다.



"싯팔! 난 인간이라고!"



외마디 내뱉음과 함께 시몬은 총부리를 내리고서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시몬의 심중을 알아차리고선 절도있는 본새로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곤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시몬은, 남자의 뒷모습을 쫓으며 중얼거렸다. 악마야, 입 다물어.


전쟁이 끝나고 시몬은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영웅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남자 역시 전쟁이 끝나고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국가로부터 훈장은 수여받지 못했지만 삶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좋은 거 하나를 얻으면 좋은 거 하나를 잃는 거.


세월이 흘러 1925년 11월 4일.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는 이날 한쪽 발을 저는 남자와 만났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둘은 서로에게 매료됨과 동시에 인정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 이날을 기점으로 그 남자가 한쪽 발을 저는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역사의 실타래는 본래보다 빠르게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만나게 되는 한쪽 발을 저는 남자가 역사의 기점이었던 것이다. 한쪽 발을 저는 이 남자의 이름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





도르르르르





-fin-




















후기


이 이야기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영웅이었던 영국군 헨리 텐디의 일화를 그 모델로 하고 있다.


1918년 9월 28일, 프랑스 노르 주 마르코잉 마을. 영국군 소대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 채 기관총 견제를 받는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국군 병사였던 헨리 텐디가 기관총 진지를 일순 무너뜨려 아군에게 퇴로를 확보하는가 하면 이후 소수의 아군과 포박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총검술로 앞장서 독일군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한편, 이후 상황이 역전되어 영국군이 독일군 잔당을 소탕할 시 헨리 텐디는 도망 중이던 한 독일군 병사와 마주한다. 여기서 헨리 텐디는 '부상당했거나 항복하는 적군은 사살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에 따라 그 독일군 병사를 그대로 도망가도록 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히틀러는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과의 회동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그날 헨리 텐디는 나를 죽이기 한없이 가까운 곳에 있었소.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독일을 볼 수 없겠구나 생각했소. 하지만 신의 섭리는 영국군들이 내게 겨누던 사악한 총부리로부터 나를 구해내 주었소."


최근의 전문가들은 역사적 사료를 들어 히틀러의 이러한 언급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당시 영국군의 전쟁영웅이었던 헨리 텐디가 문제의 전투에서 도망치고 있던 독일군 병사 하나를 신념에 따라 보내 주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서 자신의 존재 당위성과 신화 구성을 위한 일종의 선전으로 그같은 창작을 했다고 본다. 헨리 텐디는 이에 대해 1939년 당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쩌면 내가 놓아 주었던 독일군 병사가 히틀러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그 독일군 병사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삶에 있어 사람에게 보다 중요한 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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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데스데이, 2017

호러 영화 짧평 2017. 11. 9.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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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공포영화가 아니다" 라는 카피를 대놓고 들고 나왔고, 정말 정직하게 그 말이 맞았습니다!

슬래셔 장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슬래셔의 요소를 빌려온 호러 코미디 영화라고 정의하는 게 옳을 거 같네요.

아마 슬래셔 영화나 호러 영화에 약하신 분들이라도, 이 작품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감상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잔인한 장면도 딱히 나오질 않고, 점프 스케어도 별로 없을 뿐더러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영화는 예고편에서부터 밝히듯, 타임루프를 기반으로 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매일 생일날을 반복하며 똑같은 하루 속, 베이비 페이스 가면을 쓴 살인범에게 죽게 됩니다.

과연 살인범의 정체는 무엇인지, 죽음을 피하고 무사히 다음날을 맞는 게 목표가 되는거죠.

전체적으로 긴장감을 적절히 가져가면서도 유쾌한 편이라, 보는 내내 시간이 훅 지나갑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아주 제격인 셈이죠.





다만 그렇다고 다 좋은 영화는 또 아닙니다.

살인범이 쓰고 나오는 베이비 페이스 가면 자체는 나름대로 친근함과 섬찟함 그 어딘가를 잡아내긴 했는데, 정작 진범과 살해동기가 납득하기 미묘합니다.

물론 사람이 사람 미워하는데 뭐 그리 대단한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만, 그래도 타임루프까지 하면서 사람을 죽여대는데는 좀 그럴듯한 동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사용한 트릭과 타임루프의 원인까지 죄다 빈틈 투성이입니다.

생일은 물론 누구에게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특별한 날입니다만, 타임루프의 당위성까지 마련해주는 날은 아니잖아요.

영화 보는 도중에는 대충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딱히 건질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 트리 역을 맡은 제시카 로테는 그야말로 극을 하드캐리했습니다.

유쾌하고 똘끼 있는 주인공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낼 뿐 아니라, 예쁜 장면에서는 예쁘고 망가지는 장면에서는 망가져주더라고요.

영화 나머지 등장인물이 다 별로였지만, 주인공 하나만큼은 확실히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좋았습니다.

이런 류 코미디 작품이 그렇듯, 멘탈이 정말정말 단단합니다!





정리해보자면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벼운 킬링 타임으로 나쁘지 않은 영화입니다.

타임루프물의 고전 사랑의 블랙홀 포맷에, 슬래셔 요소를 적절히 잘 끌어온 게 잘 먹힌 거 같아요.

저예산 영화인데, 미국 흥행이 대박이 나면서 이미 속편 제작이 확정났다고 하네요.

제작비가 5백만 달러도 안 들었는데 미국 흥행만 5천만 달러를 넘겨서 10배 장사에 성공했습니다.

여세를 몰아 다음편에서는 좀 더 납득할만한 핍진성을 보여준다면, 더욱 매력적인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제 점수는 6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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