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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카니발 - 피의 만찬, 2013

호러 영화 짧평 2017. 12. 2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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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광신과 카니발리즘, 그리고 가스라이팅.

무겁고 독특한 소재를 다뤘는데, 나름대로 깔끔하게 잘 뽑아낸 영화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의 대물림과, 강제로 이루어지는 세뇌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수입판 제목에서 나타나 있듯, 식인에 대한 내용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과거 미국 개척시대, 극한의 상황에서 식인을 시작한 가문이 그 전통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을 기반으로 삼고 있죠.

사실 이런 자연에 의한 극단적 상황, 근본주의 기독교 느낌이 풍기는 남부 백인을 다룬 작품들은 우리나라 정서에서는 100% 이해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미국 정서를 감안하고 본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 내내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으로 가득 찬 영화입니다.

희생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살인과 식인의 행사는 이미 몇대 전부터 지속된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 오랜 세월, 모든 가족 구성원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보면, 이 체제가 유지되는데 얼마나 큰 폭력과 억압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가부장적 체제 위에 만들어진 단 하나의 선택지.

여기에 동의하면 그 체제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잡아먹혔겠죠.


부모는 이미 지속된 식인으로 인한 쿠루병에 걸려 제대로 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와중.

자녀들은 그런 부모 아래, 강제로 식인과 살인에 동참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강요된 체제를 거부하는 순간, 칼끝은 방향을 바꿔 돌아설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욱 오싹해지는거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통과 의례 부분입니다.

이 부분의 충격은 직접 보시는 게 더 인상적일테니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영화 내내 울려퍼지는 노래, It Was Me That Made Her Bad 도 그런 충격을 설명하는 연장선에 있는 거겠죠.


대단히 매력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토리의 얼개적인 측면에서 왜 이런 선택이 나왔는지 의아해지는 부분들이 분명 있거든요.

분위기를 위해서 서사를 희생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명확한 설명을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꽤 답답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폐쇄적인 사회와 광신의 조합은 늘 매력적입니다.

더불어 이 작품의 엔딩 또한 꽤 의미심장하고요.

조금 더 어두운 분위기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남기는 하지만요.

괴물을 미워하다 그 스스로 똑같은 괴물이 되는 이야기는 우울하면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말부만 생각하면 영화의 원제, We Are What We Are 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겁니다.


제 점수는 7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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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2ch괴담][908th]방과 후 음악실

괴담 번역 2017. 12. 23.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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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이야기.


유키에짱과 나, 그리고 미치요짱은 방과 후에 전람회 전시 준비 때문에 학교에 남아 있었다.


미치요짱은 차분하고 어른스럽지만, 몸이 약해서 학교를 자주 쉬었다.




그 탓에 전람회에 출품할 전시물 만드는 것도 늦어졌던 것이다.


우리 반에서는 나와 유키에짱이 가장 진도가 빨랐기에, 둘이 같이 남아 미치요짱을 도와주게 되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자 슬슬 그만하기로 하고 정리를 하던 와중, 나는 유케이짱을 겁주려고 무서운 이야기를 꺼냈다.




[4시 44분에 음악실 피아노가 멋대로 울린다나? 가볼까?]


유키에짱은 통통하지만 운동신경이 좋은 여장부였다.


나는 장난꾸러기지만 유키에짱은 우등생이었기에, 걸핏하면 유키에짱에게 심술을 부려 장난을 쳐대곤 했다.




[그러지말자.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잖아.] 라고 미치요짱은 겁에 질린 듯 했지만, 유케이짱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바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을리가 없잖아. 가고 싶으면 맘대로 해.]


별로 반응이 안 오니까 재미없다 싶어 정리나 마저 하고 미술실을 나오는데, 3층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유키에짱을 보며, [지금 몇시야?] 하고 물었다.


유키에짱은 [그럴리가 없잖아... 분명 누가 있는거야!] 하고 말하면서도, 얼굴은 새파랗고 꽤 겁에 질린 듯 했다.


나는 재미있어서 [가보자고!] 하면서 계단을 뛰어올랐다.




[기다려! 두고 가지 마!] 라며, 유키에짱이 따라 달려온다.


[얘들아, 어디 가는거야? 기다려.] 라며 미치요짱도 따라온다.


피아노 소리는 제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기에, 확실히 누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음악실 앞에 서서 유키에짱이 오기를 기다렸다.


[뭐야, 선생님이 있잖아.]


음악실 안에는 타카하시 선생님이 피아노 앞에 앉아계셨다.




타카하시 선생님은 다른 학년 담임이라 잘 아는 분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있는 걸 알아차리자 [어서 집에 가렴. 안녕!] 하고 음악실 안에서 인사를 건네셨다.


[안녕히 계세요!]


우리가 떠나려고 하자, 그제야 미치요짱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왔다.




[뭐야뭐야... 기다리라니까...]


[그러니까 누가 있는 거라고 했잖아! 타카하시 선생님이었어. 돌아가자!]


유키에짱이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을 두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유키에짱이 따라서 달려오고 있고, 미치요짱은 음악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고 가버린다!]




살짝 어두워진, 인기척 없는 학교가 섬뜩했기에, 유키에짱이 겁에 질리면 좋겠다 싶었지만, 맨뒤에 혼자 있는 미치요짱이 불쌍하다 싶어 계단 앞에서 순순히 기다려줬다.


2층으로 내려와, 미술실 열쇠를 갖다주러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 선생님한테 열쇠를 건네고, [안녕히 계세요.] 하고 인사를 하자, 남아있는 선생님 중 몇분이 [그래, 잘 가렴.] 하고 인사해주셨다.




[어라?]


유키에짱이 깜짝 놀란 듯 말해 시선을 따라가보니, 타카하시 선생님이 계셨다.


음악실에 있을 터인 타카하시 선생님이.




[타카하시 선생님, 아까 음악실에 계시지 않으셨어요?]


내가 물었지만, 타카하시 선생님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응? 아니, 간 적 없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을거야.]




교실 열쇠가 걸려있는 선반에는, 음악실 열쇠도 있었다.


여기 있다는 건 분명히 음악실 문이 잠겨 있다는 뜻인데...


나랑 유키에짱은 얼굴을 마주보고, [타카하시 선생님이 아니었다는거네?] 라고 말하며 학교를 나왔다.




[그럼 누구였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미치요짱이 [뭐야뭐야? 음악실에 아무도 없었잖아. 피아노 소리도 안 들렸었는데.] 하고 말하는게 아닌가.




미치요짱은 농담 같은 걸 할 아이도 아닌데다, 그 표정과 목소리 톤을 봐서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유키에짱은 서로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나, 들렸고 봤는데...], [나도...] 하면서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다음날 나와 유키에짱은 열이 나서 둘다 학교를 쉬었다.




그 후, 딱히 음악실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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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갓집은 어느 산기슭 온천 마을에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산인데, 온천에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하이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길이 깔린 곳은 어린아이 혼자서도 어렵잖게 다닐 정도지만, 길을 조금만 벗어나도 포장조차 안되어 있죠.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짐승이나 다닐법한 산길이 숲속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외갓집에 놀러왔던 나의 놀이터였습니다.


어느날, 내가 강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걷다보니, 길 옆에 오래된 사당이 덩그러니 하나 있는 게 보였습니다.




멋대로 자라난 풀들에 뒤덮여, 지금이라도 썩어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당 안에는 작은 지장보살님이 한분, 자리를 틀고 앉아계셨습니다.


이끼로 뒤덮여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지갑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지장보살님 발밑에 바쳤습니다.


당시만 해도 딱히 믿음 같은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주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재밌게 느껴지던 시절이었지요.


그래도 그날 역시, 손을 모아 무언가를 빌지도 않고 돈만 놓아둔채 자리를 떠나려 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내 손을 움켜잡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손을 잡고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분 뿐이었겠지요.


거기에는 나밖에 없었으니.




집으로 돌아온 나는, 현관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할아버지는 무시하고 부엌으로 쪼르르 갔습니다.


그리고는 식사 준비를 하던 할머니에게 슬쩍 산 속 사당에 관해 물어봤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소부터 그 사당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었거든요.




엄한 할아버지에게 사당에 갔다는 걸 들키면 한참 동안 설교를 들을 게 뻔했습니다.


다행히 할머니는 산에 갔다는 걸 혼내지 않고, 깔깔 웃으며 사당의 유래에 관해 말해주셨습니다.


옛날, 하지만 그렇게 오래 전은 아니고, 막 전쟁이 끝났을 무렵.




아직 제대로 길도 닦이지 않은 산속에서 한 여자아이가 실종됐답니다.


산기슭 마을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산을 수색했지만, 결국 여자아이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산신님 전설이 내려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아이는 분명 하느님 눈에 들어 이 산의 산신님이 된 걸게야. 앞으로 우리를 지켜줄걸세.] 라며, 여자의 부모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또 그 산에서 실종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남자아이가 두 명.




그 중 한명은 무사히 산을 내려와 발견되었지만, 다른 한명은 골짜기 물에 떠내려가 하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살아난 아이 말하길, 길을 잃고 벼랑 근처를 헤매다 서로 누군가에게 손을 잡혔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아이는 골짜기 반대편으로 잡아당겨졌습니다.




하지만 죽고 만 다른 아이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끌려가듯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골짜기로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습니다.


전날까지 비가 내렸으니 지반이 약해져 무너져서 실족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말을 믿었습니다.


살아남은 남자아이 오른손목에, 손자국이 하나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니까요.


마치 누군가 온힘을 다해 잡았던 것 같은 손자국이...




그리고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산에 갔다 아이가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지거나 물살에 휩쓸리고, 끝내 목숨을 잃고 마는 사고가요.


다들 죽은 것은 아니고, 산 속을 헤매다 무사히 돌아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같은 말을 하더랍니다.


[산 속을 걷다가 누군가한테 손을 잡혔어요.]


그리고 아이들의 오른손목에는 으레 손자국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맨 처음 사라졌던 여자아이의 저주는 아닐까?]


마을에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소문이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민 끝에 처음 희생자가 나왔던 절벽 근처에 작은 사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지장보살님을 모셔 원한을 달래려고 했죠.


[그렇지만 아직도 원한은 남아있을거야. 지금도 나쁜 아이가 있으면 손을 붙잡고 산으로 데려간단다?"


할머니는 익살스럽게 이야기하셨지만, 나는 무서워서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사당에 관해 물었을 뿐, 누가 내 손을 잡았다고는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기분이 나쁜 탓인지,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애써 겁에 질린 것을 숨기고 태연한 척 했습니다.




[그 후 누가 끌려간 적 있었어?] 라던가, [끌려간 아이들은 나쁜 아이들이었어?] 라고 끈질기게 할머니에게 물어봤습니다.


할머니는 웃으며 대답해주셨습니다.


[그렇게 궁금하면 오늘 밤 연회에 와서 큰아버지한테 물어보려무나. 너희 큰아버지는 옛날 산에서 손을 잡힌 적이 있으니까.]




그날 밤.


친척들이 모두 모인 연회니, 큰아버지도 오셨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들은대로, 큰아버지에게 "손을 잡혔던 것" 에 관해 물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게 잘못이었습니다.


큰아버지는 그런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는지, 정말 구성지고 무섭게 이야기를 풀어놓았거든요.


[알겠냐. 저 사당에 가까이 가면 안돼. 저 산에서 조난당한 여자랑, 그 여자한테 잡혀간 아이들의 저주를 받는단 말이다. 다들 네 손을 꽉 잡고 산까지 끌고가서는, 죽은 아이들한테 둘러싸일거야. 그리고 결국 너도 그 아이들의 동료가 되고 마는거지. 산에서 도망친대도 소용 없어. 그놈들은 네가 잘 때 몰래 다가와서 널 잡아갈테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산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려는 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이야기가 너무도 무서운 나머지, 저는 불이 환한 연회장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가자, 어머니는 [이제 가서 자렴.] 하며 저를 잠자리로 이끄셨습니다.




나는 혼자 침실로 쓰던 방에 들어갔습니다.


외갓집은 지역에서 소문난 명가라, 집도 대궐 같이 넓습니다.


저택에는 연회 때 취한 손님들을 재우기 위한 방도 여럿 있는데, 내가 침실로 쓰는 방도 그런 방 중 하나였습니다.




평소에는 넓은 방을 혼자 독점하는 게 즐거웠지만, 겁에 질리고 나는 그것마저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모두 닫았습니다.


그리고 불을 켜 둔채 할머니가 깔아둔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문득 나는 눈을 떴습니다.


집 안은 고요하고 인기척 하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연회가 끝나고 다들 잠자리에 든 모양입니다.


평소라면 새벽에 눈을 뜨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누가 깨어서 시끄럽게 소리라도 내지 않는 한 말이죠.




하지만 지금처럼 다들 자고 있는 조용한 집 안에서, 소리를 낼 사람 같은건...


[끼익...]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아마 미닫이문 너머, 마루를 지나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거겠죠.


누군가 걸어오듯,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였습니다.


부모님이나 다른 친척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 집의 화장실은 배수 설비 문제로 모두 집 북쪽이나 서쪽에 있었으니까요.


내가 있는 침실은 집 동쪽입니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맨끝.




누구도 이 새벽에 복도를 지나 이리로 올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있는 이 방에 오려는 걸 빼면요.


[끼익...]




갑자기 소리가 멎었습니다.


나는 복도로 이어지는 미닫이문을 등진채 누워 있었습니다.


슥, 하고 나무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이어 다다미를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뺨에 바람이 닿는 것 같는 기분이 느껴져, 누군가 바로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눈을 꽉 감고, 뒤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깨울 것이라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덜덜 떨리는 어깨에, 깨어있다는 게 들킬까봐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와 동시에, 뒤에 있는 것은 누구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큰지, 덩치는 큰지, 무서운 꼴은 아닐지 너무나도 신경 쓰였죠.


두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적어도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고 싶어서 슬쩍 실눈을 뜨고 훔쳐보기로 했습니다.




최대한 시야를 움직이면 머리 끝 정도는 보일 터입니다.


상대방 얼굴까지는 안 보이니 알아차리지도 못할 테고요.


그렇게 생각한 나는, 살짝 눈꺼풀을 열어 시야를 등뒤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내 위에 몸을 들이밀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던거죠.


그것은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음을 띄고 있었습니다.




나는 엉겁결에 눈을 감고서, 떨리는 온몸을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언뜻 보인 얼굴은 여자아이로,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 어깨까지 늘어진 긴 머리, 그리고 기모노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본 것은 그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역시 여자아이 귀신이 나를 잡으러 왔구나, 하고 확신을 갖기에 말이죠.


소리를 질러야 하나?


그러면 괜히 자극하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




이대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오른손을 쑥 잡아당겨졌습니다.


굉장히 강한 힘이라 팔이 빠질 것 같이 쑤셨습니다.


참을 수 없어, 나는 [으악! 으아악!] 하고 외치며 손을 빼내려 발버둥쳤습니다.




하지만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힘도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목에도 뭐가 걸린 것처럼,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몸부림치고 몸부림치며, 몸부림칠 뿐이었습니다.




문득 나는 눈을 떴습니다.


집 안은 고요하고 인기척 하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연회가 끝나고 다들 잠자리에 든 모양입니다.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그 여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은 꼭 닫혀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내가 닫았을 때와 똑같이.




마치 한번도 열린 적 없었다는 듯이.


나는 황급히 일어나 불을 켰습니다.


방 안에는 나말고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를 봐도,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나말고 다른 누구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나는 얼이 빠져서 이불 위로 주저 앉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었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이마의 땀을 닦아냈습니다.


자기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탓에 꿈에 나온 거겠죠.


다 큰아버지 탓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왠지 화가 치밀었습니다.


불을 그대로 켜놓은채 누워, 밉살스러운 큰아버지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큰아버지가 그렇게 겁만 안 줬어도 이상한 꿈은 안 꿨을텐데.




큰아버지 때문에 이상한 꿈을 꾼 거야!


이런 기분 나쁜 꿈을...


그래, 분명 꿈이었을텐데...




하지만 나는 보고 말았습니다.


이마의 땀을 훔치던 오른손.


얼핏 보기에는 변한 것 하나 없는, 평상시 그대로인 내 오른손.




그 손목에 분명히 손자국 모양의 멍이 남아있었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 멍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냥 손 모양으로 생긴 멍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하나 끝까지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진짜 손자국입니다.


그다지 크지 않아, 내 손하고 비슷한 정도 크기였습니다.


나는 혹시 자고 있을 때 내가 내 손목을 꽉 잡았던 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오른손 손목을 한번 잡아보세요.


지금 잡은 손은 당연히 왼손이겠죠?




하지만 내 손목에 남아있는 손자국은 틀림없는 오른손이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세수를 하러 약수터에 갔을 때, 화장실에 갔을 때...




혼자 있을 때는 무조건 걱정에 사로잡혀 주위를 둘러보고, 누군가와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마치 지금도 그 여자가 곁에 있어서, 손을 잡히는 건 아닌가 하고.


이렇게 된 것도 다 큰아버지가 들려준 무서운 이야기 때문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그 사당에 다가간 탓에, 여자아이의 저주를 받은 거겠죠.


이미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어쨌든 사당에 별 생각 없이 접근했던 걸 사과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후가 되자 혼자 산으로 향했죠.


사당에 가서 사과하기 위해, 다시 한번 사당을 향해 걸어나섰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순된 행동이지만, 당시 내게는 그것말고 다른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포장된 하이킹 코스를 벗어나, 풀로 덮인 길을 강 따라 걷습니다.


이윽고 길은 강 수면보다 높아지기 시작해, 조금 더 가다보면 물이 10m는 아래에 있는 계곡이 됩니다.




그 절벽을 따라 더 깊은 산속으로, 두어시간은 걸었을까요?


나는 사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사당은 전에 왔을 때와 다른 것 하나 없이, 무척 낡아있었습니다.




양쪽 여닫이 문은 떨어져 나가있고, 안에 있는 지장보살님은 이끼가 가득입니다.


집을 나설 때는 하늘이 맑았는데, 지금은 하늘 가득 무거운 구름이 끼어 주변이 어둡습니다.


그 탓에 황폐한 사당의 모습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제사 때 조상님께 올리던 과자를 지장보살님 발밑에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모은 채, 마음 속에서 사과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어제 큰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리 한켠을 스쳐지나갑니다.




손을 모으는 동안, 저는 계속 눈을 감은 채였습니다.


눈을 뜨면 거기 나를 둘러싼 아이들이 보일 거 같았으니까요.


나를 둘러싸고 둥글게 선 채, 손을 잡고 주변을 맴도는 아이들이.




그리고 그 원 안에는, 나, 그리고 내 손을 잡으려 하는 여자가.


[...찰박.]


갑자기 목덜미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아,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가빠 다리를 멈춰세우고 나서야, 나는 목덜미에 닿은 게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렸습니다.


어느덧 주위에는 엄청난 기세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공물로 무얼 바칠지, 저주는 어떻게 할지만 걱정했기에, 나는 우산도 우비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를 피할 나무그늘을 찾아 주저앉고 잠시 뒤.


이대로는 완전히 날이 저물어, 하산은 고사하고 여기서 움직일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비는 내리고 빛도 없는데, 모기에게 물어뜯기며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죠.




슬슬 비를 맞으면서라도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나는 큰맘 먹고 비 내리는 숲속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은 본 적 없는 경치가 펼쳐져 있어, 나는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강을 목표로 걸었습니다.


강변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면, 오솔길이 하이킹 코스까지 이어져 있을 터입니다.


잘 포장된 산책로로 몇십분만 걸으면, 산기슭의 마을이 나옵니다.




강은 사당 서쪽에 있고, 북에서 남으로 흐릅니다.


그렇다면 서쪽으로 나아가는 한, 언젠가는 강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날은 저물고 있었지만, 내가 온 방향을 되짚어 보면 대략적인 방위는 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서쪽이라고 생각한 방향으로, 한결같이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좀처럼 강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방향은 틀림없을텐데.




이제 주변은 칠흑 같이 어둡습니다.


빗발은 약해지기는커녕 더욱 거세져만 가고, 긴 시간을 계속 걸어왔기에 이미 몸의 피로도 한계였습니다.


그쯤 되자 이미 내 마음 속에서는 사당이나 저주에 대한 공포는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 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금방이라도 내 몸을 파먹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건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무언가에게 발을 잡혀, 앞에 있는 웅덩이에 크게 얼굴을 박고 말았습니다.




모래와 자갈이 눈가에 들어가, 아픈데다 눈도 못 뜰 지경이었습니다.


눈을 비벼봐도 두 손 역시 진흙과 모래투성이라 그것 또한 쉽지가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비와 어둠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는데, 더 심해져버렸으니.




옷과 신발은 물을 빨아들이다 못해 폭삭 젖어 축축 늘어지고, 무거운 손발은 피로로 인해 돌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나는 웅덩이에 주저앉아 움직일 기력도 없이, 다만 몸에 쏟아지는 빗방울에 몸을 맡기고 힘없이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오른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옆에서 추어올려줬습니다.


내가 그 힘을 받아 일어서자, 그 손은 내 손을 잡은 채 어딘가로 데려가듯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거스르지 않고, 나아가는대로 따라갔습니다.


향하는 곳은 내가 걷던 것과 같은 방향.


강과 계곡, 절벽이 있는 방향이었습니다.




나는 생각조차 반쯤 마비된 채, 그저 어쩐지 계곡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저 손이 이끄는대로,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 그것을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꽤 걸어갔는데도, 좀처럼 절벽을 넘어가는 느낌은 나지가 않았습니다.




내 손을 이끄는 누군가는, 도중에 몇번 방향을 바꾸면서도 계속 걸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뛰다시피 걸으며, 중간에 머뭇거리거나 멈춰서지도 않았습니다.


도중에 몇번 넘어질 뻔 했을 때도, 그 손은 내 손을 꽉 쥔 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나를 일으키듯 강하게 손을 당겨 쓰러질 듯한 몸을 지탱해주며, 하지만 그럼에도 멈춰서지 않으며.


한참을 걷는 사이, 나는 어느새 내 발 밑의 길이 흙바닥에서 포장된 도로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아무래도 하이킹 코스에 접어든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산기슭 마을까지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손은 계속 내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나도 눈을 감은 채, 그 손을 따라 계속 걸어갔습니다.




이윽고, 그것은 갑자기 내 손을 놓았습니다.


주위에서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어느샌가 앞이 보이게 된 눈을 천천히 떴습니다.




주위에서 우산을 쓴 어른이 몇명 달려옵니다.


아무래도 나는 하이킹 코스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와 있는 듯 했습니다.


달려오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옛날, 하지만 그렇게 오래 전은 아니고, 막 전쟁이 끝났을 무렵.


아직 제대로 길도 닦이지 않은 산속에서 한 여자아이가 실종됐답니다.


산기슭 마을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산을 수색했지만, 결국 여자아이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산에 갔다 아이가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지거나 물살에 휩쓸리고, 끝내 목숨을 잃고 마는 사고가요.


다들 죽은 것은 아니고, 산 속을 헤매다 무사히 돌아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같은 말을 하더랍니다.


[산 속을 걷다가 누군가한테 손을 잡혔어요.]


그리고 아이들의 오른손목에는 으레 손자국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맨 처음 사라졌던 여자아이의 저주는 아닐까?]


마을에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소문이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민 끝에 처음 희생자가 나왔던 절벽 근처에 작은 사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지장보살님을 모셔 원한을 달래려고 했죠.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것은, 손자국은 무사히 돌아온 아이들에게만 남아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죽은 채 발견된 아이들의 손목에는 손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산에서 처음 사라졌던 여자아이는 정말로 저주를 내리고 있던 걸까요?


나는 그때, 달려온 부모님에게 안긴 채 누가 나를 여기로 데려다줬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 모두가 같은 말을 할 뿐이었습니다.




[너는 혼자 돌아왔잖니. 함께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나는 문득,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는 분명 하느님 눈에 들어 이 산의 산신님이 된 걸게야. 앞으로 우리를 지켜줄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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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할아버지에게 들은, 무섭지는 않지만 기이한 이야기.


아직 나와 형이 태어나기 전 일이라고 한다.


시기는 6월 말에서 7월 초.




장마가 온 터라, 그날은 아침부터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농사일도 못 나갈 지경이라, 할아버지는 대낮부터 화로 옆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단다.


따로 뭘 할 것도 없고 담배나 태울 뿐.




점심은 진작에 먹었지만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도 꽤 남은 터였다.


자연히 술이 당길 수 밖에 없지만, 술병에 남은 게 별로 없었더란다.


사둔 술도 없기에 이걸 다 마시면 사러 나가야 할 터.




하지만 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할아버지는 시간을 안주 삼아 천천히 한잔씩 기울였다고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술기운이 슬슬 돌아 잠시 누울까 싶던 무렵,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쾅쾅!]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누가 찾아왔나 싶었다.




[누구야?] 라도 물었다.


그러자 문 두드리는 소리는 뚝 그치고, 빗소리만 들리더란다.


문을 열고 누가 들어오는 기척도 없었다.




뭔가 싶어 당황해하고 있자, 잠시 있다가 또 [쾅쾅쾅!]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기도 귀찮아서, 안쪽 방에 있을 할머니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잘 들리지가 않는지 대답이 없었다.




[이봐, 할멈.] 하고 불러봐도 대답이 없다.


그 사이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잠도 못 자겠다 싶어, 할아버지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현관에 나섰다.




약간 비틀거리면서도 현관까지 나온 할아버지는, 샌들을 신고 [쾅쾅쾅!] 소리가 나는 문에 손을 댔다.


[그렇게 세게 두드리면 문 다 부서지겠다.] 하고 문 너머 상대를 질책하며, 단숨에 문을 열었다.


[...어?]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바로 전까지 그렇게 문을 두드려댔는데, 정작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리 없다 생각한 할아버지는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아무도 없다.


다만 처마 밑에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듯, 문앞이 흠뻑 젖어 있었다.


별다른 일도 없었기에, 할아버지는 문을 닫고 화로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누웠다.


그러자 또 [쾅쾅쾅!]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역시 아무도 없다.


이번에는 바깥까지 나가 살폈지만 마찬가지다.


다만 처마 밑에 있는 젖은 흔적이 아까보다 더 커진 듯 했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며 생각하다, 현관 앞에 있는 우산을 하나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처마 끝에 살짝 기대어 세워두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다시금 할아버지는 화로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또 [쾅쾅쾅!] 하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거기 우산 있으니까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문 두드리는 소리는 뚝 그쳤다.


할아버지는 귀찮다 싶으면서도, 다시 한번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처마 끝에 기대어 뒀던 우산이 사라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앓는 소리를 내며 화로 곁으로 돌아오자, 할머니가 있었다.


[어디 있던게야?] 하고 묻자, [방안에 있었는데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아무래도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할아버지 목소리가, 할머니에게는 하나도 안 들렸던 모양이다.


[누가 왔었어요?] 하는 할머니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대답했다.


[뭐가 왔나봐. 하도 문을 두드리길래 우산을 줘버렸지 뭐요.]




할머니는 멍하니 있다가, [새 우산을 사야겠구만.] 하고 한마디 했다고 한다.


며칠 뒤, 장마가 그치고 맑은 날이 며칠 이어졌다.


산에 일을 나갔던 할아버지는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발견했다.




큰 나뭇가지에, 우산이 펼쳐진 채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누가 우산을 저런데다 놨나 하고 그냥 지나갔지만, 계속 걸어가는데 보이는 나무마다 우산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우산을 내려보니, 비가 쏟아지던 날 기대어 뒀던 우리 집 우산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가져갔던 놈이 갚으러 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우산을 다시 나무 위에 올려뒀다.


[이놈아, 너한테 준거야! 가져도 되니까 다시 가져가!]


큰소리로 외치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로는 나무 위에 우산이 보이지 않더란다.


나는 [뭐 다른 답례 같은 건 없었어?] 하고 물어봤지만,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하고는 [그런 거 없지 뭐냐.]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뭐, 돌려주러 돌아온 건 가상하구나.] 하고, 쓴웃음을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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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2ch괴담][905th]어느 온천여관

괴담 번역 2017. 12. 1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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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현 어느 온천마을에 갔을 때 이야기다.


여자친구네 집에 큰 제사가 있다길래, 온천여행도 할 겸 따라가기로 했다.


근처에 어느 온천마을이 있었거든.




갑작스럽게 일정이 잡히다보니 숙소도 겨우 잡았다.


저녁과 아침 식사를 합해서 1박에 26,000엔.


인터넷으로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간 거라서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안내 받은 방은 뜻밖에도 크고 훌륭한 곳이라 깜짝 놀랐다.




거실이 다다미 12장 넓이에, 따로 문으로 구별된 다다미 8장 넓이 침실도 있었다.


방에 딸려있는 목욕탕도 노송나무 욕조로 된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엄청 싸게 잡았다. 방도 고풍스럽고 위엄 있어서 멋있는데!]




우리는 당장 대욕장으로 달려가 한가히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어 저녁식사가 나왔다.


방으로 대령된 식사는 무척이나 호화스러웠다.




신선한 생선회에 소고기 철판구이, 곁들여서 술도 몇병 나왔다.


[여기 진짜 좋다. 완전 좋은 방을 잡았어. 대성공이네.]


둘이서 신나서 연회를 벌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뒤, 둘이서 욕조에 들어가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방문 안쪽 침실로 들어가, 늘어선 이불에 누워 불을 끈 채 TV를 봤다.


그러는 사이 여자친구도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고, 나도 TV를 보다 어느샌가 잠들고 말았다.




문득 눈을 떴다.


아마 한밤 중이리라.


문 창호지를 통해 어스름한 달빛이 비칠 뿐, 주변은 거의 어둠 속이다.




어라?


꺼짐 예약을 해뒀던 것도 아닌데, TV가 꺼져 있었다.


여자친구가 끈 걸까?




지금 몇시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 머리맡을 더듬었다.


무슨 소리일까, [훅, 훅!] 하고 거친 숨결 같은 게 들렸다.




여자친구가 코라도 고는 걸까 생각하며 휴대폰을 집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2시 조금 넘은 무렵이었다.


아직 잘 때구나 생각하며, 휴대폰에 비친 여자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자친구는 일어나 있었다.


휴대폰 불빛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 얼굴.


눈을 부릅뜬 채, 이를 보이며 웃고 있었다.




아까 그 거친 숨결은 이 사이로 샌 그녀의 숨소리였다.


나는 여자친구가 왜 그러나 싶어, 패닉에 빠졌다.


겨우 [괜찮아? 왜 그래?] 하고 말을 걸려 하는데, 여자친구가 움직였다.




얼굴은 나를 바라보는 채,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목만 천천히 그쪽으로 돌려보니, 어느새 문이 열려 있었다.


거실이 더 안쪽에 있기에, 문 너머는 더욱 어두웠다.




여자친구가 가리킨 쪽으로 휴대폰 불빛을 비추자, 천장에서 유카타 띠 같은 게 고리 형태를 하고 드리워져 있었다.


이게 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머릿 속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따라가지 못해 완전히 패닉 상태였다.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여자친구는 여전히 눈을 번뜩이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 얼굴 그대로, 입만 움직여 말하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로.




[저걸 써, 저걸 써, 저걸 써, 저걸 써, 저걸 써, 저걸 써...]


나는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잠시 뒤, 희미하게 들리는 아침방송 진행자 목소리에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몹시 두려웠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꿈 같지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천장에는 띠도 드리워 있지 않았다.


TV도 그대로 켜져 있고.




역시 꿈이겠지.


여자친구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표정이 잔뜩 구겨진 채다.




나는 여자친구를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일어난 여자친구는, 두려움과 불신이 섞인 듯한 시선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왜 그래? 괜찮아?] 하고 묻자, 조심스레 여자친구는 입을 열었다.




[어젯밤, 너무 무섭고 이상한 꿈을 꿨어...]


밤중에 문득 눈을 떴더니 내가 없더란다.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를 켜봤더니, 어두운 방 안, 내가 천장에서 드리운 띠에 목을 걸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목을 맬 준비를 하듯.


여자친구가 놀라서 [뭐하는거야?] 라고 물었더니, 내가 쓱 돌아보며 말하더란다.


[봐, 준비 다 됐어. 이걸 쓰면 돼.]




그 말을 듣고 나는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굳이 내 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둘이서 같은 꿈을 꾸었다는 걸 알면, 뭔가 주술적인 힘이 작용해 그게 진짜 일어나기라도 할까봐 두려웠으니까.




여자친구를 애써 달래고, 일단 아침식사를 하러 방을 나섰다.


둘 다 이상한 꿈 때문에 입맛이 없어 깨작대다 식당을 나섰다.


나는 도중에 카운터에 들러 물었다.




[실례지만 저희가 묵는 방에서 누가 목 매달아 자살한 적 있지 않습니까?]


종업원은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체크 아웃 때 확인해보니 숙박료가 6,000엔 깎여 있었다.


여러분도 시즈오카현 온천마을을 찾을 때, 멋진 방으로 안내 받으면 억지로 자살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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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2ch괴담][904th]친구가 본 것

괴담 번역 2017. 12. 14.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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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친하게 지내는 회사 동료가 어째서인지 바다에 가는 것만큼은 한사코 거절한다.


이유를 물어봤지만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색이었고.


궁금해서 같이 술 한잔하면서 취한 다음에 캐물었다.




그가 아직 학생일 무렵,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었단다.


기말고사 끝난 다음이랬으니 한겨울이었을 것이다.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어딜 정해놓고 가는 건 아니고, 친구네 개까지 셋이서 차를 타고 정처없이 달려가는 마음 편한 것이었다.




며칠째였나, 어느 바닷가 한적한 마을에 접어들 무렵, 해가 저물어 버렸다.


곤란하게도 휘발유가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해안가 오솔길을 달리며 내비게이션으로 찾아보니 금방 주유소를 발견했지만, 가게 문이 닫혀있었다.




뒷문 쪽으로 돌아가보니, 문에 큰 소쿠리가 매달려 있더란다.


그걸 밀고 초인종을 누른다.


[실례합니다. 휘발유가 다 떨어져서 그러는데요.]




잠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대답은 없었다.


[무시하나본데.]


동료는 왠지 화가 뻗쳐서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소리쳤다.




[실례합니다!]


끈질기게 소리치자 현관 불이 켜지면서 유리창 너머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누구야?]




[휘발유가 다 떨어져서...]


[오늘은 쉬는 날이야.]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화난 것 같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어떻게 좀 안될까요...]


[안돼. 오늘은 벌써 장사 접었어.]


어쩔 도리도 없이, 동료는 친구와 차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래서 시골은 안된다니까.]


[어쩔 수 없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에 문 열면 보란듯 찾아가서 바로 기름 넣고 뜨자고.]


차를 세울만한 곳을 찾아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주유소 뿐 아니라 모든 가게와 집이 다 문을 닫고 있더란다.


자세히 보면 어느 집이고 처마 끝에 바구니나 소쿠리를 매달고 있다.


[무슨 축제라도 하나?]




[그런거 치고는 너무 조용한데.]


[바람이 너무 세서 안되겠는데. 야, 저기 세우자.]


그곳은 산기슭에 있는 작은 신사였다.




바다를 향해 쭉 뻗어 있는 돌계단 아래에다 차를 세웠다.


작은 주차장처럼 울타리가 있어, 바닷바람을 막아줄 듯 했다.


신사 기둥문 그늘에 차를 세우자, 주변은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할일도 없겠다, 동료는 친구와 이야기나 좀 나누다 모포를 덮고 운전석에서 잠을 청했다고 한다.


몇시간이나 지났을까, 개가 으르렁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강렬한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개는 바다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친구도 눈을 떴는지, 어둠 속에서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바다는, 낮에 본 것과는 달리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했다.




살풍경한 콘크리트 암벽에 꿈틀거리는 파도가 비친다.


[뭐야, 저거.]


친구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처음 그것은, 바다에서 기어나오는 굵은 파이프나 통나무 같이 보였다.


뱀처럼 몸부림치며, 천천히 뭍에 올라왔지만 이상하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놈의 몸 자체가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 덩어리 같아, 실체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대신, "우우우..." 하는 귀울림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구역질 나는 비린내는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그 녀석의 끄트머리는 해안가 길을 가로질러 건너편 집까지 닿고 있었다.


아직 반대편은 바다에 잠긴 채였다.


집 처마를 들여다보는 듯한 그 끄트머리에는,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얼굴 같은 게 분명히 있었단다.




두 사람 모두 담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을 본 순간부터 "불길하다" 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해 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고 한다.


마치 심장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것은 처마에 매단 소쿠리를 계속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움직여 다음 집으로 향했다.




[야, 시동 걸어.]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에, 동료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간신히 들어 키를 돌리자, 적막한 가운데 엔진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것이 천천히 이쪽을 돌아본다.


"위험하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눈을 마주치면 안되는 직감이 들더란다.




앞만 바라보며 액셀을 밟아 급발진했다.


뒷좌석에서 미친 듯 짖던 개가 훅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타로!]




무심코 돌아본 친구도 히익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그대로 굳었다.


[멍청아! 앞을 봐!]


동료는 친구의 어깨를 강제로 잡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친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고 한다.


동료는 정체 모를 공포에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 액셀을 밟았다.


그나마 남은 연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달려간 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았다고 한다.




친구는 의식이 불명확한 상태로 근처 병원에 입원했고, 일주일 가량 고열에 시달렸다고 한다.


회복된 뒤에도 그 일에 관해서는 결코 입을 열려 하지 않았고, 이야기만 꺼내려 해도 불안해했다고 한다.


결국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들을 수 없었고, 졸업한 뒤에는 그대로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개는 심한 착란 증세를 보인 끝에, 가까이 오는 사람은 누구에게든 거품 물고 달려들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안락사시켰다고 한다.


그것이 뭔지, 동료는 아직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바다에는 결코 가까이 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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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에서 일하던 시절 이야기다.


집을 팔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이야기도 들어보고 물건도 확인할 겸 직접 찾아갔다.


현관 앞에는 쓰레기가 나뒹굴고, 정원도 잡초투성이라 한눈에 봐도 사람 손 닿지 않는 폐가 같은 모양새였다.




초인종을 누르다 문득 시선을 돌리니, 마당에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아이는 급히 달아났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 다를 게 없었다.




여기저기 옷가지와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부엌에는 술병이 굴러다닌다.


그런 풍경 와중, 창가에 놓인 새빨간 책가방과 노란 모자만은 오히려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집주인인 남자는 30대 후반 정도로, 목욕도 한참을 안했는지 지독한 체취와 술냄새를 펄펄 풍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아내가 도망을 쳤는지, 아내에 대한 푸념이 대부분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각 방 상태를 확인하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발을 옮겼다.


2층에서 아까 그 여자아이가 나를 내려다봤다.




[아빠, 괜찮았어?]


뭐가 괜찮냐고 물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괜찮아.]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안심한 듯, [다행이다. 아빠가 기운 없어서 걱정했어.] 라며 활짝 웃었다.




[방 좀 보여줄 수 있니?] 라고 묻자,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복도를 후다닥 달려가더니,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2층으로 올라가 여자아이가 들어간 듯한 방으로 향했다.




거기는 다른 방과는 달리, 다른 여자아이들 방처럼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무리 저런 아버지라도, 자기 딸 방만큼은 더럽히지 않는구나 싶어 묘하게 감탄했다.


자세히 보니 그 방과 연결된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아이보다 더 어린 아이를 위한 방 같이 보였다.


아버지가 혼자 아이 둘을 키우는 건가 싶어 의아해진 나는, 여자아이에게 물어보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다른 방으로 가버린 것인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2층을 대충 돌아보고, 나는 다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러갔다.


문득 생각나서, [아이는 두 명인가요?] 하고 물었다.


[아, 어린 것은 아내가 데리고 갔습니다. 큰 아이 위패도 가져가버려서, 저한테는 이게 위패 대신입니다.]




그러면서 창가에 놓인 새빨간 책가방을 가리켰다.


큰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새로 사 놓은 책가방 한번 메어보지 못하고 사고로 세상을 떠났단다.


아내는 정신에 문제가 생겨 어린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떠났고, 남자는 그저 술로 속을 달래고 있더란다.




아버지가 걱정되서 딸이 성불도 못하고 있잖아요, 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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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생긴 일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1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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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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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생긴 일




나는 지금 고등학생을 흥분케 하는 3요소와 함께하고 계시다. 그것도 셋을 동시에.


첫째, 하우스 파티 장소로 향하고 있다. 분명 그곳에서 제대로 된 리큐어를 찾을 수가 있을 거다. 하다못해 럼이라도. 둘 다 없더라도 문제없다. 내가 하나 가지고 있거든.


둘째, 당장 인접한 주(州)로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기름이 채워져 있는 오픈카. 말이 필요하랴! 비록, 10년 넘은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이긴 하지만.


셋째, 옆자리의 골 때리는 친구 놈. 이놈은 옆집에 사는 애런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바보짓을 할 때면 항상 함께였다. 사실 이 세브링도 이놈 거다. 제 큰아빠한테 물려받은 건데 웃기게도 아직 면허가 없어 이렇게 내가 매번 운짱을 맡는다.


애런은 불룩 나온 배 때문에 서 있는 상태에선 자기 발을 못 볼 정도의 뚱땡이에다 흑갈색 곱슬머리를 한 대단히 웃기는 놈이다. 동시에 애런은 학교 제일의, 아니, 카운티 내 최고의 색골로 만약 물어만 본다면 심지어 아무 여학생의 사타구니 털 개수까지도 척척 대답할 놈이시다.


그리고 나, 개빈. 평범한 가정환경, 중하위권 성적,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6피트를 넘는 키(이모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매번 왜 이렇게 컸느냐며 야단이다)에다 제법 멋들어진 컬의 모질과 고르고 하얀 치아를 지니고 있어 향후 20년간은 외모 덕을 톡톡히 볼 십 대다.



"그나저나, 개빈. 우리 오늘 몇 시까지 있을 수 있는 거냐?"


"못해도 11시. 아니, 12시. 우리 꼰대들 오늘 할머니 댁에 갔다가 오거든."


"오, 개빈이 엄마아빠를 꼰대라고 부른대요. 오늘 또 땡깡 부렸다고 엉덩이 맴매라도 맞았나 보지?"


"닥쳐, 똥돼지. 그나저나 확실해? 진짜 괜찮은 애들로 산을 이루고 있다고?"


"이봐, 개빈. 그거 알아? 난 가끔 너한테 했던 말을 또 해야 할 때마다 네 입 구멍에 우리 할아버지가 사용한 기저귀를 쑤셔 넣고 싶은 거? 너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냐? 야시엘네 대저택이라고! 그 야시엘!"


"..나도 알아, 야시엘이 누군지. 지나가다 본 적 있어. 네 똥차 값보다 비싼 타이어를 4개씩이나 박아놓은 차를 몰고 가던 거. 그래.. 그 야시엘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그 멕시코 놈 집안은 뭐 하길래 그렇게 돈이 많은 거야?"


"이런, 이런. 선생, 멕시칸이 여기 와서 그렇게 떵떵거리고 산다면 뭐겠어?"


"뭐? 뭔데?"



애런은 대답 대신 검지를 치켜들어 자신의 코밑에 바짝 대고는 바깥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에 콧숨을 한 차례 훅 소리 내어 들이마셔 보였다.



"뭣?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당신의 상식 머리시네요, 선생."


"상관 안 해. 여자들만 많다면야."


"걱정 마시게, 형제여. 성경에도 나와 있어요. 마약이 있는 곳에 여자가 꼬이는 법일지니."



애런과 내가 파티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분위기가 한창으로 접어들었는지 저마다 짝을 지어 서로 음탕한 눈길을 건네고 있었고, 패배자들은 외곽에 띄엄띄엄 자리한 채 포기를 모르는 질척한 눈빛으로 사방을 내리훑고 있었다. 우리? 물론 도착과 동시에 애런과 나도 미친 듯이 주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삼 빠떼루지! (애런이 제 큰아빠한테서 배워온 유행어다)


그리고 그때였다. 시야에 한 여자애가 들어온 게. 그 애는 동그랗고 작은 반원의 이마가 돋보이도록 연한 다갈색 머리를 야무지게 묶어 올렸으며, 키는 작지만 긴 다리가 부각되도록 딱 알맞은 길이감의 청바지를 입고서, 흰 티 밖으로 친오빠 옷장에서 꺼내온 듯한 검정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아니, 실은 내가 왜 그런지 확실히 알지만) 나는 그 애에게 감히 눈을 떼지 못하고선 시종 가슴팍 어딘가가 애리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그 애만이.. 젠장, 이런 진부한 표현을 할 줄이야. 마치 그 애만이 주변보다 더 또렷히 보이는 듯했다.



"선생,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누구야?"


"쟤를 몰라? 아.. 그렇지. 미안. 할아버지 병상이랑 장례 때문에 최근 학교에 잘 못 나왔었지.. 여하튼 이름 킴벌리 로렌, 뉴저지에서 얼마 전 이사 옴, 무남독녀, 성적은 중상위권, 아직 어울리는 그룹 없음, 피우는 담배 브랜드는.."


"좋았어!"


"어..? 잠깐, 개빈. 잠깐, 잠깐. 너.. 쟤한테 들이대려고?"


"당삼 빠떼루지, 인마!"


"포기하는 게 좋을걸? 쟤가 깐 남자애들만 모아도 카운티를 형성할 수 있을 거다. 그 안에서 곧 선거인단도 발족할 수 있겠고. 우리 학교의 자랑 쿼터백 왕자님께서도 2초 만에 까이셨다니까!"


"..왜?"


"..왜라니? 너 지금 왜냐고 물은 거냐? 너도 가끔은 네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해보는 게 어때? 왜긴 왜겠냐, 레즈니까 그렇지. 아니고서야 쿼터백 왕자를 쳐다도 안 보고 까버리겠냐? 봐봐! 이러는 동안에도 저기 한 명 더 까였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뭐, 다른 이유 뭐?"


"아마 아직 마음에 차는 남자를 발견하지.."


"오, 야훼시여! 돌아가시겠네! 개빈이 또 똥 잡수시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내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개빈, 아빠 말 잘 들으렴. 널 위해 충고 하나 해줘야 할 시간이구나. 잘 들어, 얼빵아. 네가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는 건 나와 함께 있어서야. 알아들어? 여기 이 2-300파운드짜리 유대인 놈 옆에 서서 미소를 보내기 때문에 여자애들이 받아주는 거라고! 개빈, 아빠는 네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다물어, 개빈. 그건 부족한 놈들이 스스로를 기만할 때나 외우는 주문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 자, 정신 차리고 빨리 다른 여자를 찾아봐. 기왕이면 두 명으로. 난 정말 아무나 괜찮으니까."


"..좋아, 이 꼬부랑 털 돼지 놈아. 너 만약 내가 저 여자애와 함께 여기 저택 문을 나서면 어쩔래?"


"..네 말은, 지금 쟤를 꼬셔서 같이 나갈 수 있다고?"


"어이, 가는 귀가 먹으셨나? 왜 했던 말을 또 하게 만들지? 입 구멍에다 너네 할아버지 기저귀를 쑤셔 넣어 줄까? 자, 내가 저 여자애와 그러면 어떻게 할래? 대답해보시지, 선생."


"좋아! 네가 성공하면, 내가 네 꺼 한 번 빨아준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마치 마상시합에 출전하는 앙리 2세마냥(뭐, 비록 그는 시합 중에 뒈졌지만) 당당한 보무로 그 애에게 다가갔다. 뒤편으로 '개빈, 그냥 아빠 품으로 돌아오렴.'이라고 조롱하는 애런을 무시하고서. 그렇게 나는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서 그 애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용기 있다고? 아니, 사실 나는 엄밀히 말해 겁쟁이에 속하는 편이다. 애런의 도발에 적잖게 흥분해선 반발심에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 그건 그저 핑계이며 사실 나는 뭐든 상관없으니 그저 그 애와 한순간만이라도 눈을 맞춰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그 단편적인 기억조차도 내게는 두고두고 환희로 박제될 게 분명하리란 직감해서였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안녕, 킴벌.. 로렌."


"..안녕."


"아, 나는 개빈이야. 개빈 마틴."


"술 이름 같네. 근데 너 나 아니?"


"어.. 응, 우리 같은 학교야. 그리고.. 사실 네 이름은.. 저기 돼지 몸통에다 사람탈 올려놓은 애 보여? 쟤가 알려줬어. (애런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마디로 정보통이지.. 너도 학교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쟤한테 물어보면 돼."


"그래, 고맙다."



마뜩잖아하는 그 애를 앞에 두고서 발작해대는 심장이 내게 유혹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인마, 당초 소원을 풀었잖아. 이제 돌아가자. 꼭 한 발 더 내디뎌야 늪인 걸 아는 게 아니니까.' 허나 나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서(사실 순간 넘어갈 뻔했다) 크게 양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이고는 다시 그 애에게 말을 붙였다.



"좋아. 로렌, 지금 나한테 1쿼터만 시간을 내줄래? 어쩌면 지금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고작 1쿼터야, 15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레미 마틴?"



사실, 그 순간 내 몸의 모든 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에 휩싸였었는데.. 동시에, 우습게도 내 입은 스스로 움직여 말을 내뱉고 있었다.



"15분이야. 너 혼자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어도 어차피 15분은 흘러."



그리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애의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더니 곧 삐딱하던 몸을 풀어 완전히 내 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반가워, 개빈. 나는 로렌이야. 킴벌리 로렌. 어.. 지금 공 울렸어."



그다음?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원래 중요한 순간이란 건 그런 거다. 그저 나는.. 1쿼터 동안 나 자신을 기꺼이 내던졌고..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는데..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난 존재 같았다. 그건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쿼터 버저가 채 울리기도 전에

그 애는 나를 받아주었다.


뭐.. 이후 한 차례 실수를 하긴 했다. 무슨 실수냐 하면,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그때껏 팽팽하던 긴장이 풀리면서

흔히 저지르곤 하는 '말실수' 말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그 실수가 우리의 관계를 극적으로 끌고 가기는 했다만.



"사실 너한테 말 걸기까지 많이 걱정했거든."


"왜?"


"네가 지금까지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고 들어서. 그래서 네가.. 아.. 음.."


"레즈라고?"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 순간, 그 애가 까치발을 들어 내게 기대는가 싶더니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말했다.



"지금 증명이 된 거지?"



이제 우리는 시끄러운 곳을 벗어나 좀 더 사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나는 그 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애런에게 돌아갔다. (그때까지 애런은 나를 마치 두 발 자전거에 처음 도전하는 자식을 지켜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애런."


"믹 재거 선생께서 오셨군. 그래, 알았어. 지금 빨면 돼?"


"아니, 괜찮아. 대신 정말 미안한데.. 그.. 차 좀 빌릴 수 있을까?"



애런은 잠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내게 건넸다.



"당삼 빠떼루지, 인마! 걱정 말고 쓰게나, 친구. 시트 더럽히지만 말고. 나는 마약왕이랑 코카인이라도 하다가 카풀할 테니까."



애런은 정말 멋진 놈이다!




 



나는 그 애에게 우리 마을 최고의 야경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며 야경보다도 빛나는 시간을 공유했다. 그렇게 자정 즈음..


있지 말이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종종 허세를 떨어야 하는 가련한 동물인 법이다. 나는 그 애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을 할 엄두조차 내지 않고선 집에 데려다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애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고 절대 찌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그 애가 시선은 정면에 둔 채 나지막이, 그러나 명료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서 조금 더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지 몰라. 사실.. 우리 부모님이 오늘 집을 비우셨거든."



그 말에 나는 제한속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링컨이 운전대를 잡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코너가 연속해서 나오는 좁다란 진입로에서 차선에 걸쳐 돌던 중 마주 오는 차량과 가까스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젠장! 애런은 집 나간 전조등 하나를 도통 교체할 생각을 안 한다) 우리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숨넘어가듯 웃어 젖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다면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사랑은 종종 사람을 비상식으로 몰고 가는 법이다.


그렇게 마지막 코너에서 차선을 걸친 상태로 가속 페달을 밟았고, 커브 길을 빠져나온 순간 채 인식을 하기도 전에 번쩍거리는 빛이 시야를 온통 채워버렸다. 신경을 긁어 대는 경적음과 함께. 그리고 나는 찰나였지만 내 시야가 뒤집힌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추억을 공유하던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겠다.



"저런 후레자식 같으니!"



나는 가까스로 핸들을 꺾어 마주 오던 차량을 피하고는 외쳤다. 옌병할, 안 봐도 뻔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십 대 놈이겠지. 십 대 놈들은 정말이지, 대관절 무슨 배짱으로 자기에겐 불운 따윈 찾아올 리가 없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조심성이라도 부리면 사탄이 거시기라도 쥐어뜯어 가는 줄 아는 족속들.


나는 잠시 막 스쳐 지나간 차량이 전조등 불량이란 것을 떠올렸지만 지금 시각까지 보안관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서 집에 가서 몸뚱어리에다 따뜻한 물을 뒤엎고선 마누라와 함께 딸애가 보낸 손자놈 영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마누라가 슬쩍 먼저 봤을지도 모르겠군. 마누라는 그런 면에선 일견 뻔뻔스럽거든)


그때였다. 내 뒤편으로 날카로운 경적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차를 세우곤 잠시 눈을 껌뻑인 뒤(옌장, 늙으면 무언가를 깨닫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 부리나케 차를 돌려 충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곧장 경찰과 구급대에 신고를 한 나는 사건 현장을 5초 정도 둘러보고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경찰만 불러도 될 뻔했군.'



현장을 모두 둘러본 후 널브러진 두 차량 저 너머로 누군가가 쓰러져있는 것을 목도했다. (아마 컨버터블 차량에서 튀어나간 거겠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고, 나는 쓰러져있는 사람이 바로 개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은 지나가다 마주칠 때나 인사를 나누던 개빈이지만 어릴 때는 종종 주말이면 우리 집을 찾아와 보안관 놀이 따위를 하다가 마누라가 만들어준 쿠키를 먹곤 했다. 또, 방학 때는 잔디밭을 깎아주고선 수고비를 받아 가기도 했었다. 개빈은 아주 훌륭한 일꾼이었다. 정해진 돈만을 타 갔고 건강보험을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나를 보안관 아저씨라 부르던 개빈, 그 애는 커서 나 같은 보안관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아니, 그건 우리 딸애였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점점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져 간다.



"얘야, 개빈! 내 말 들리니?"


"..보안관 아저씨.."


"그래, 보안관 아저씨란다. 개빈, 세상에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제가.. 바보같이.. 사고를.. 아저씨.. 제 옆에 탄 애는요..?"


"누구 말이니, 개빈?"


"..제 옆에.. 킴버가 타고 있었어요.. 아주 좋은 애예요.. 무사한가요..?"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그저 개빈의 얼굴 여기저기를 손으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킴버.. 좋은 아이인데.. 나 때문에.."


"개빈, 이건 사고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우리 차랑.. 충돌한 차.. 그 사람은 괜찮나요..?"


"..개빈,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개빈.. 오, 신이시여!"



부품이 어지럽게 헤쳐진 차량마냥 개빈의 몸 또한 그러했다. 나는 개빈의 온전한 손 한쪽을 두 손으로 움켜쥐느라 흐르는 눈물들을 그저 밑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아저씨..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해요.."


"그래.. 그래.. 게빈, 그러마."


"..킴버.. 킴벌리 로렌네 부모님에게.. 정말 정말.. 죄송하다고.. 그리고 다른 운전자.. 가족에게도.. 너무 죄송하다고.. 애런에게는 차를.. 걔는 아마.. 벌써 용서했을 거예요.."


"그래.. 게빈.. 아저씨가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하마."


"..그리고.. 보안관 아저씨.. 약속해요.. 우리 엄마 아빠한테.. 그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 좀 내버려 둬요.'예요.. 그분들께.. 꼭 전해주셔야 해요.. 개빈이 너무나 사랑한다고.. 다시.. 다시.. 엄마 아빠 자식으로 태어나면 안 되냐고.."


"..그래. 개빈, 보안관 아저씨가 반드시 약속하마. 약속하마."


"..아저씨.. 나 때문에.. 죽었어요.. 나는 지옥에 갈 거예요.."


"개빈, 그렇지 않아. 사고였다. 누구한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너무 추워요.."


"..개빈, 신이 곧 너를 따뜻하게 품어주실 거다."


"..아니요..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그러지 않으실 거예요.. 그분은 나를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서.. 가.. 멀리 가거라.. 여긴 네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실 거예요.."


"오, 개빈.. 절대 그렇지 않단다.... 개빈? 얘, 개빈아. 개빈? 개빈?"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세상의 아이러니와 마주한다는 거다. 만약 개빈이 1-2초만 늦게 코너에 진입했다면, 만약 개빈이 가속 페달을 1파운드만큼만 덜 밟았다면, 만약 개빈이 핸들을 몇 인치만 덜 돌렸다면.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신의 뜻을 찾으란 말인가? 오늘 밤,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나는 경찰 차량과 구급대 차량 사이로 구급대원이 시신 네 구를 옮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그 옛날 잔디밭을 깎으면 수고비를 주겠다던 나에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에요.'라고 외치던 꼬맹이 개빈이 떠올랐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일면식인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예리하게 뜬 달 너머로 칠흑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부디, 이 사과가 개빈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개빈, 얘야.. 미안하다. 네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구나."





-fin-




















후기


본 이야기의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온전히 교감하기 위해선 짧은 글 안에다 개빈, 애런, 그리고 로렌 간의 무고한 천진함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러니까, 읽는 이들이 이 셋을 그전부터 잘 알던 사이로 느껴야 했다는 뜻이다.


내 의도가 어느 정도나 들어먹혔는지는 모르겠으나(살면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치는 법이니까), 만약 제대로 전달받은 이라면 '독자의 바람이 담긴 그릇'에다 뱉어놓은 내 환희의 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5869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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