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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들의 동창회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6. 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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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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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들의 동창회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 조지 고든 바이런





세상엔 우리를 싫어하는 치들이 제법 있는데,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IRS를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건 바로 우리의 직업 때문이겠다.


우리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준다. 우리는 때론 성경 속 인물이 되어준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일 것 같은가? 맞춰 보시라!


내 이름은 제라드 윌헬름, 직업은 초능력자다.


사건은 일리노이주에서 벌어졌다. 일리노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 물론, 그들도 나를 사랑하고. 깡촌 것들만큼 우리 초능력자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또 어디 없다. 어쨌건 사건은 일리노이주에서 벌어졌다. 어느 곳이라고 콕 짚어 말하진 않겠다. 하여튼 시카고는 아니다. 엿 먹을 여피족.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Parapsychological Association과 American Society of Psychical Research 측의 기념비적인 합동 컨벤션에 참석하고서 얼마 전 새로 뽑은 메르세데스의 차 문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정전기와도 같은 불쾌한 감촉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믿을 수 없는 일이자 믿고 싶지 않은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9평대 헛간(아마도 지하로, 임시 저장고 역할을 위해 지어진 곳인 듯했다)에 남자 둘, 여자 둘이 모두 빤스 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던 거다. 아, 물론 나도. 그러니까.. 남자 셋, 여자 둘.. 모두 다섯이지, 맞지? 우리가 빤스 바람(양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완벽하군!)이라는 거 말고도 재미있는 사실은 또 있었다. 그건 우리 모두 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상대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는 거였다.


안나 파크스, 점성술사. 과테말라의 고대 무덤에서 발견했다던 수정 해골(그 해골이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왔다나?)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한다. 해골은 그녀에게 자신을 론다라고 소개했다는데 중남미 출신인 그녀가 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는 미스터리시다.


샘 버캐넌, 사이코메트러. 특정인 또는 특정 사물과 접촉(손을 대거나 그런)해 그와 연결된 과거의 기억을 읽어낸단다. 좋은 능력이지 않은가.


피터 브루너, 전도사. 오순절 교회 목사인 그는 환자의 질병을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그 자리에서 낫게 하는데 그게 모두 신앙의 힘을 빌려서란다. 아 윌 팔로 힘!


실비아 젠슨..은 나중에 소개하지.


그리고.. 나, 현재 미국 여성에게 가장 사랑받는 투시 능력자.


자, 이렇게 평소엔 바쁘기 그지없는 동종업자 다섯이 컨벤션에서의 동창회를 끝내고서 그 피로연으로 빤스 바람 채 헛간에서 조우하게 되었으니(게다가 모두들 살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중년이다).. 운명은 정말이지 희극을 좋아하는 것 같다. 헛간 안의 빤스 바람 초능력자 다섯이라.. 더 시적일 수도 없겠네.


아, 한 명 소개를 잊었다. 우리 앞에 멀쩡한 옷차림을 한 채 사냥용 엽총을 두르고선(어찌나 그 모습이 어울리던지 원래부터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것 같았다) 상석에 앉아있는 거구의 남자. 보아하니.. 옥수수나 호밀 따위의 관리를 맡으면서 담배 전문점에 들러 할인된 말보로 사 피우는 전형적인 깡촌놈이 분명했다. 그리고 짐작건대 이렇게 동창회 자리를 마련한 게 바로 이 양반이겠지.



"마지막 사람까지 전부 깼나 보군."



남자가 중얼거리더니 사냥용 엽총을 다른 쪽 어깨에다 옮겨 기대고선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네들을 아주 잘 알지만 당신들은 나를 알지 못할 거요. 나는 데이브 하트만이요. 보다시피.. 농장일을 하고.. 당신들의 팬이기도 하지. 강연회를 쫓아다니고 통신판매용 킷들을 몇 개씩 구입하기도 했으니까. 이정도면 팬으로 인정할법 하지 않소? 그건 그렇고.. 먼저.. 이런 상황을 만든 내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하지만 내가 지금 희망을 걸 사람은 당신들뿐이라는 걸 이해해줘야 해요. 정말.. 이해해줘야 합니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울먹임을 참으려는 필사적이고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손아귀로 온 얼굴을 거듭 쓸어내렸다.



"이해를 바랍니다. 이해를.. 이제 당신들뿐이에요.. 제기랄! 육시랄! 망할!"






발작적인 욕설과 함께 남자가 어깨의 엽총을 꼬나 들었기에 우리는 모두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쭈그려선 머리를 감싸는 민둥숭이들. 처음 불을 목도한 원숭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남자가 애써 자신을 다스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선생님들. 그리고.. 당신들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나와.. 내 아들을."



끝내 마지막에 가서 흐느끼던 남자는 뒤편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커다란 나무궤짝을 자신의 앞으로 힘겨이 끌어다 놓았다. (한 손으론 그 망할 엽총을 어찌나 단단히 쥐었던지 투박한 손등 너머 핏줄들이 울룩불룩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봐도 관짝으로 보이는 저건.. 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가 궤짝 문을 열어젖혔고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놀랄 겨를도 없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마 빤스 바람인지라 진짜 얼어붙었을는지도 모른다)


궤짝, 아니 관짝엔 전형적인 검은 양복이 안치되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카라 쪽으로 울퉁불퉁한 원형의 덩어리가.. 누가 초능력자 아니랄까 봐.. 내 예상이 맞았다. 이건 관짝이었다. 제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남자는 가장 좌측에 자리하던 안나 파크스를 향해 엽총을 치켜들고선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의 발음으로 울부짖었다.



"안나 파크스 씨! 앞으로 나오세요!"



갑작스러운 명령에 우리는 모두 안나 파크스를 쳐다볼 뿐이었고 안나 파크스는 엽총과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어서!'라는 남자의 짧은 호령에 어기적 일어났다. 그리곤 그녀는 교탁으로 끌려가는 초등학생이 되어 주춤주춤 남자, 아니 관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안나 파크스가 몸을 어정쩡하게 가리며 어물어물 물었다.



"안나 파크스 씨, 그리고 선생님들 모두. 제 부탁은 하나입니다. 여기 앞의 시신은 죽은 제 아들입니다. 얼마 전 장례를 치른.. 아들은 보다시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길가 한복판,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죠.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누군가, 즉 범인을 여러분들께서 밝혀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마치, 며칠간 준비한 대본을 읽어내리듯이. 그러니까.. 미해결 사건의 범인을.. 우리보고 찾아내라는 건가? 다른 이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지 입을 헤 벌리고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한편 남자는 구석에 놓여있던 페인트 자국 투성의 싸구려 천 가방에서 수정 해골을 꺼내와 힘차게 외쳤다.



"자, 안나 파크스 씨! 당신이 첫 번째입니다. 평소처럼 수정 해골을 사용해 범인을 비춰주세요. 여기 론다는 제가 잘 챙겨왔습니다."



오, 안나.... 우리 모두는 한마음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이내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걱정하느라 심히 똥 씹은 표정들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잃고 또라이가 된(아니지, 보아하니 애초 우리들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것 같으니 100% 정상이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남자에게 시험을 받게 될 줄이야..



"시작하세요."



안나 파크스에게 수정 해골을 건네주고선 수갑을 풀어준 뒤 엽총 머리를 까딱거리며 남자가 말했다. 안나 파크스는 당연히 우리보다 더 당혹스러워했으나 그녀 역시 장사밥 하루 이틀을 먹은 게 아니었던지라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선 평소처럼 수정 해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제가 범인에 대해 알아내면 풀어주는 거죠?"



수정 해골에 시선을 둔 채로 안나 파크스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단서만이라도 좋습니다. 선생님들 모두 단서 하나씩이라도 좋습니다. 그럼 무사히 집으로 보내드리겠다고 여기 데이브 하트만이 약속드립니다."



남자가 한결 진정된 어투로 우리에게 답했다. 그리곤.. 한참 동안 수정 해골을 쓰다듬던 안나 파크스가 입을 열었다.



"하트만 씨, 당신네 아들을 해친 사람이 지금 잠깐 보였어요. 이런! ..한 명이 아니에요. 순간이었지만 그들이 폭행을 가한 것처럼 보이네요. 그중 하나는 금발이고.."



그 순간, 남자는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안나 파크스의 가슴팍에 엽총 머리를 들이밀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파악할 새도 없이 남자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어 우악스러운 총포음과 함께 안나 파크스가 눈을 감는 것도 잊고서 발라당 점프하듯 뒤로 나자빠졌다. 그녀의 목 안으론 위압적인 거품 소리가 잠시 새어 나오더니 이내 헛간 안은 관짝이 하나 더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경기를 일으키듯 외쳐댔다.



"이 여편네야! 내 아들은 폭행으로 죽은 게 아니야! 내 아들은 차에 치여 죽었다고! 뺑소니 사고! 이 거짓말쟁이!"



또라이인데 영악한 또라이라.. 이제 론다의 말은 누가 들어주지..



철컥



둔탁한 장전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시 말했다.



"다음! 샘 버캐넌 선생!"



사이코메트러 샘 버캐넌. 백발에다 잘 어울리는 길이감의 곱슬머리를 한 그가 말없이 남자 앞으로 걸어가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내밀었다. 수갑을 해제하며 남자는 다소 흥분한 듯 말했다.



"선생 덕분에 지역사회와 세계 각국의 미제 사건들이 해결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번 일본 방송사에 출연해 능력을 발휘하면서 실종된 여아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 아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부디 제 아들내미의 사건 당시 모습을 읽어주십시오. 여기, 사이코메트리에 필요한 것들도 모두 준비해두었습니다."



자.. 초능력 탐정 선생, 신도 앞에서 당신은 어떤 기적을 행할 것인가? 주의해야 할 거야, 샘 버캐넌. 당신의.. 그리고 우리의 목숨이 달려있으니까. 샘 버캐넌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피 묻은 의복과 관짝 안의 짜부라진 덩어리들을 연신 손으로 헤아리듯 쓰다듬었다.



"..끔찍하군요. 뺑소니예요. 당신 아들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는데.. 너무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차량의 자세한 모습은 알 수가 없네요. 다만, 운전자의 모습으로 보이는 형상이 잠시 비쳤는데.. 백인이고 3-40대 남성인 것 같습니다. 아드님의 순간적인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도 커 그 외에 다른 부분은 읽을 수가 없네요. 오로지 그 감정에만 모든 게 집중되어 있어서 말이죠."



그 말에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아선 마치 아이처럼 작고 높은 울음소리를 연신 내뱉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모두 내 잘못이에요! 그날 저는 지미가 하는 바에서 컵스팀 경기를 보고 있었어요. 저는 아들을 집에 혼자 둘 수가 없어 바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도록 했죠. 종종 그랬거든요. 그 애는 그날.. 내가 생일날 사준 8단 자전거(사내애들끼리는 다들 갖고있는 걸 갖고 있지 않으면 업신여기는 법이잖습니까)를 타고서.. 오, 그 애는 그 자전거를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리고.. 바닥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나길래 달려가 보니.. 우리 애가 죽어있었어요. 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샘 버캐넌은 조용히 남자에게 다가가 등을 어루만져댔다. 마치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듯. 그러나 남자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고(맙소사, 그 큰 덩치가 콧물 소리에 맞춰 상반신을 흔들대는 모습은 가히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어 샘 버캐넌이 타이르듯 말했다.



"하트만 씨, 아드님에게는 미처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찰나의 고통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 후로는 신께서 곧장 따뜻하게 안아주었거든요. 나는 알 수 있습니다. 아드님은 절대 괴로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축축한 얼굴을 위로 기울여 샘 버캐넌을 바라보던 남자가 대단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엽총을 듦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짧은 천둥음과 함께 가슴팍 이곳저곳을 쥔 샘 버캐넌이 그대로 발라당 엉덩방아를 찧으며 드러누웠다. 남자가 샘 버캐넌의 가슴팍을 그 우악스러운 발로 연신 짓이기며 외쳤다.



"이 버러지 같은 자식아! 얼빠진 놈 같으니라고! 내 아들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세상을 떠났어! 내가 911 신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 그 애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 '아빠, 못 참겠어. 어떻게 좀 해봐.'였어! 그런 자식에게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비의 마음을 알아? 이런 엠병할!"



남자는 채 감지 못한 샘 버캐넌의 눈이 더는 깜빡이지 않음에도 한참 동안 가슴팍을 짓이겨댔다. 그래도 울분이 채 풀리지 않았는지 우리를 향해 엽총을 꼬나 들곤 남은 분통을 밀어내듯 용광로가 끓는 듯한 외침을 내뱉었다.



"다음! 피터 브루너! 젠장할! 귀먹었어? 피터 브루너, 나오라고!"



거듭된 외침에 피터 브루너는 마치 고해성사실로 끌려가는 죄인처럼 어기적어기적 남자 앞으로 기어나갔다. 오, 헐벗은 채 재판대에 선 신의 대리자를 참칭한 죄인이여. 남자 앞에 엉거주춤 선 채 피터 브루너가 심히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하트만 씨, 뭔가 잘못 아신 겁니다. 저는.. 제 능력은 범인을 알아낸다든지 같은 게 아닙니다. 저는.. 저는 목사에요."



"입 닥쳐!"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두 발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바지춤을 올려붙이고선 이어 웃통 역시 어깻죽지까지 말아 올린 채 말했다.



"너는 내 아들을 위해 데려온 게 아니야. 나를 위해 데려온 거지.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해오다 보니까 병이 생기더라고. 잘나 빠진 의사양반께서 뭐라고 했더라.. 척추관협.. 뭐라더라.. 우리 아버지도 앓았던 병이지. 여하튼, 이놈의 농부병 때문에 허리를 똑바로 곧추세우지도 못하고 자다가도 다리가 욱신거려 깨게 된다고. 그러니까 피터 브루너 목사, 당신이 나를 치료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전도회에서 앉은뱅이들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말이야."



불쌍한 피터 브루너는 두 눈에 공포가 새겨진 눈물을 그렁하게 단 채로 남자의 다리 한쪽을 두 손으로 쥐고선 무릎 꿇은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은 마치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필연적인 죄악을 고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던지라 어쩐지 숙연한 기분마저 감돌게 했다.


남자는 곧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추켜든 엽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방으로 잘게 튄 핏방울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피터 브루너의 허리춤이었는데 그로 인해 남자는 자신의 통증이 잠시나마 사라진 듯한 기분에 휩싸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헛간 안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처지가 되었다. 남자가 요란한 손동작과 함께 과장된 어투로 외쳤다.



"실비아 젠슨 씨! 전미 최고의 심령술사! 앞으로 나오시죠."



실비아 젠슨, 미국 최고로 꼽히는 심령술사. 그녀는 역시 그녀였던지라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주변(곳곳에 송장이 널브러진)이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남자 앞에 꼿꼿이 섰다. 그리곤 수갑을 막 해제하려는 남자에게 대뜸 말했다.



"당신 아들이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요."



수갑을 해제하려다 말고 남자가 눈만 살짝 치켜들어 물었다.



"..왜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남자는 행동을 멈춘 채 실비아 젠슨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실비아 젠슨은 잠시간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는 완전히 분위기를 제압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좋았어, 실비아 젠슨. 초능력자의 가장 큰 덕목은 기세지. 초능력자 측, 공격 시작!



"그 아이는 자기 아빠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걸 내내 보고 있었답니다. 바로, 저기에 서서."



그 말과 동시에 실비아 젠슨이 관짝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고 남자는 화들짝 놀라선 가리킨 방향과 실비아 젠슨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하트만 씨, 오늘 당신이 저지른 일이 아들을 위한 것이었나요?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었나요? 당신 아들이 무척이나 궁금하다네요. 대답해주시겠어요?"



남자가 금세 울먹이더니 마치 투정 부리듯 대꾸했다.



"젠장! 물론 아들을 위해서였죠! 내 아들을 위해서였다고요! 아들을 죽인 놈을 찾아 그놈의 사지를 찢어놓는 게 아비 된 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못한 겁니까? 예?"


"아니요, 하트만 씨, 아니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리고 당신 아들이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죠."


"그럼요? 그럼 뭔데요! 젠장할!"


"당신 아들은 지금 슬퍼하고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게 당신의 행위로 인한 거라는 거죠. 당신 아들은 죽은 직후부터 가야 할 곳 대신에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이건 결코 당신 아들에게 좋은 게 아니랍니다. 날 믿어요. 이런 쪽으로는 내가 전문가니까."


"..내가 아빠니까 당연히 나를 잊지 못하고서 따라다니려는 거겠죠. 그게 뭐가 문젠가요?"


"아니에요. 아들의 죽음 직후 아들은 당신이 걱정되어 지금까지도 따라다니는 거랍니다. 당신의 분노가 당신의 아들이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리고 있는 거죠. 농부시라니까 모든 것엔 시기가 있다는 걸 아시겠군요. 자칫 잘못하다간 당신 아들이 시기를 놓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이제 당신 아들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아무 곳도 아닌 곳을 떠돌게 되는 거죠. 지금은 당신을 바라볼 수라도 있다지만 당신이 죽고 나면요? 그때 가서 아이인 당신 아들은 홀로 무얼 의지해야 하나요?"



눈썹 모두가 흠뻑 젖은 채로 관짝에 시선을 고정시킨 남자가 물었다.



"제가.. 제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뭡니까?"


"모든 이기심을 내려놓으세요. 지금 당신이 품은 분노는 아들이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한 게 되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하트만 씨. 반면 당신 아들은 순리에 따라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답니다. 아들이 당신을 걱정하느라 해야 할 일을 그르치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그건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랍니다."


"제가.. 경찰에 자수하고서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그럼 아들이 안심하고서 제시간에 맞춰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트만 씨."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전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젠슨.. 아니, 실비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데이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네, 정확히 실비아 당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감옥에 가고 나면 더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내 아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다음 생애에 다시 한번 아버지가 되도록 허락해줄 수 있느냐고.. 그렇게.. 좀 전해주세요."


"그럼요, 물론이죠. 내가 책임지고 전하겠습니다, 데이브."


"오.. 내 아들.. 지금 저기에 있는 게 맞나요?"


"그래요, 관 바로 옆에서 당신을 보고 있네요."


"실비아."


"네, 데이브."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내 아들, 내 아들놈 홍채 색이 뭡디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실비아 젠슨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관짝으로 향했다. 허나.. 설령 관짝 안 시신으로 시야가 미쳤다 해도 저 뭉개진 덩어리 사이로 어찌 홍채 색을 확인한단 말인가. 남자가 엽총 장전하는 소리와 동시에 이죽거렸다.



"실비아, 무슨 색이냐니까? 아주 간단하잖아! 그저 보고 내게 말해주면 되는 거야. 자, 나와 같은 헤이즐색이야? 아니면, 녹색? 회색일 수도 있지. 파란색은 어떨까? 오, 하지만 생물학이 뭔지 안다면 추천하진 않겠어. 파란색 눈은 열성이니까."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는 게 이미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대로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콰당



송장 다섯, 사람 둘. 이제 실질적으로 헛간 안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 자신이 질문할 대상은 단 한 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남자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절망감도 엿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처음으로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왜일까?



"드디어, 마침내, 제라드 윌헬름 씨의 차례군요! 윌헬름 씨, 제가 뭐 하나 알려드릴까요?"



뭐, 총을 쥔 건 그쪽이니까.



"윌헬름 씨, 저는 평소 초능력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사람입니다. 물론, 진지하게요."



그럴 것 같았다. 아, 이건 초능력이 아니라 그냥 내 예상이었지만.



"초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초능력은 피를 타고 내려오는 거죠. 밀에서 밀알이 나오는 것처럼요. 그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발현되느냐 발현되지 않느냐가 관건인 거고요. 여기 널브러져 있는 년놈들 모두가 말할 가치도 없는 것들입니다. 초능력자가 아니에요! 허풍쟁이들! 비열한 사기꾼들! 하지만! 당신은 달라! 이 치들 모두 혹여나 모를 내 판단 미스에 대비하고자 구색 맞추기 식으로 뽑은 쭉정이이지만(언제나 스페어가 중요한 거거든. 나는 농부라 그걸 잘 알지) 당신은 달라! 젠장할, 그래도 이 중 진짜 하나는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여하튼 지건 당신이야말로 진짜 미국의 초능력자요! 이 위대한 미국의 나 홀로 초능력자란 말이요!"


"..그렇군요."


"나는 당신 아버지를 잘 알아.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서 봤지. 7-80년대, DIA(그땐 그렇게 불렸지)는 초능력을 보유한 사람들을 비밀리에 끌어모아 실험을 진행했어. 이름하여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그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인 사람이 바로 당신 아버지였어."



망할 스토커 자식. 방송에서도 말 안 한 내 치부를.



"당신 아버지는 그야말로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였어. 그 점을 알아야 돼. 그는 고대 화성에서 일부 협곡 중 거대홍수가 형성되어있던 것을 투시했지. 또 목성의 고리도 보이저 1호보다 먼저 보고 있었고. 그뿐이 아니야! 염력 능력 또한 지니고 있었어. 그거 알아? 당신 아버지는 초당 400프레임으로 촬영되고 있는 현장에서 밀봉된 투명 유리병 안의 알약을 자기 손 위로 이동시켰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말이야! 상상해봐! 알약이 병을 통과해 손 위로 이동하는 게 단 1프레임 안에서 발생한 거라고!"


"내 아버지 소개를 꽤나 거창하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무얼 원하는 거죠?"


"윌헬름 씨, 내가 말했지. 초능력은 유전력이라고. 비록 당신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신은 분명 투시력을 유전 받았어. 나는 그걸 알 수가 있단 말이야! ..내 아들을 뺑소니친 범인을 투시해 줘.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일이 끝나면 내 아들놈의 명예를 걸고서 약속하지. 당신을 풀어줄게."


"..좋아요, 내가 범인에 대해 투시했다고 칩시다. 그걸 어떻게 당신에게 증명받을 수가 있죠?"


"실로 간단해. 그날 내 아들을 뺑소니친 차량을 내가 봤거든."


"뭐요?"


"다만 어두웠고 워낙 순식간이었던 데다.. 내가 조금 취해있어서 모든 걸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어느 회사 차량인지, 그리고 번호판 앞자리 세 자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 정도면 경찰에게 맡기는 게 훨씬 빠를 겁니다, 데이브 하트만 씨."


"아니! 나는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어! 말하지 않을 거야! 그 일을 경찰에게 떠넘길 수야 있나! 윌헬름 씨, 나는 말이야. 내 손으로 범인을 잡으려는 거라고. 그놈이 먹을 때 먹고 잘 때 자면서 가석방으로 기어 나오는 꼴을 나는 못 봐, 알겠어? 내 손으로 잡아서 똑같이, 아니, 더 심한 고통을 줄 거야. 나는 아비니까!"


"..좋습니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당신 아들의 일이니까. 어쨌건 약속해줘야 합니다. 만약 내가 제대로 투시를 한다면 당신은 나를 손끝 하나 대지 않고서 풀어줘야 해요."


"물론,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맙소사! 언제나 그런 법이죠. ..뭡니까, 그 조건이."


"어중간한 정보로는 안돼. 범인이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적어도 내가 혼자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줘야 돼. 그렇지 않겠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풀어주겠어. 아니면? 정보를 알아낼 때까지 나와 함께 여기서 지내야겠지."



나를 송장으로 만들려는 놈과 송장이 된 것들과의 잠 못 드는 밤이라, 낭만적이군.



"..좋아요. 약속 꼭 지켜요. 그나저나 이거 옷 좀 입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대체 왜 벌거벗겨놓은 겁니까?"


"윌헬름 씨, 미안하지만 당신이 투시를 마칠 때까지는 안 돼. 이건.. 우리 아버지가 고안한 방법이야. 내가 어릴 때 우리 가족들은 잘못한 게 있으면 여기 이 헛간으로 끌려와선 벌거숭이로 대답해야 했어. 아버지가 묻는 말들에 말이야. 우리는 벌거숭이가 되면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어. 태초의 모습에서 인간은 순수해질 수밖에 없는 거거든. 비록 내 아버지가 썩 훌륭한 치는 못되었지만 이 방법만은 언제나 옳았지."



나는 남자가 내 손에 걸린 수갑을 해제하는 동안 남자의 아버지가 벌거숭이 상태로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남자를 혁대로 후려갈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남자 역시 벌거벗겨진 자기 아들을 혁대로 후려갈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폭력은 대물림이 아니겠는가.



"자, 진짜배기가 뭔지 보여봐!" 



남자가 그 우악스러운 손바닥으로 내 등을 후려갈기며(혁대로 맞는 게 더 나을뻔했다) 쾌활하게 말했고 나는 정장 차림새의 덩어리와 그 옆으로 펼쳐진 피 묻은 의복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곤 그 앞에서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뒤편의 남자가 조심스레 '아직인가?'라고 물을 때까지)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 정리가 필요했다.



"..하트만 씨, 보입니다. 당신 아들이 쓰러져있는 게 보여요. 아들을 친 차량이.. 잠시 멈췄다가 곧바로 급발진하네요. 차량은.. 테일 라이트가.. 캐딜락.. 이번 신형.."


"맞아! 맞아, 캐딜락!"


"근데 너무 어둡고 빠르게 지나가서 색깔은 잘 모르겠어요. 밝은색이나 대비되는 색상 계통은 아니고.."


"다시 접속해서 돌려봐!"


"뭐라고요?"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 아버지처럼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해서 보는 거잖아!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우주 속 도서관, 아카식 레코드!"



정말 모르는 게 없는 양반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건 진짜다. 요즘은 노동자나 10대 애들이 제일 똑똑한 세상이다. 그 망할 놈의 인터넷 때문에.



"그러려던 참이었어요. ...보인다!"


"뭐? 뭐가?"


"번호판 숫자는..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4, 1, 6.."


"그래, 맞아! 맞아, 4! 1! 6!"


"번호판 형식이랑 색상으로 보아.. 워싱턴, 일리노이 둘 중 하나겠군요."


"이럴 줄 알았어! 당신이 진짜배기일 줄 알았다고!"


"이 이상은 볼 수가 없어요. 내 능력이 모든 걸 포착하진 못해요. 원하는 방향 모두를 가져올 순 없으니까. 그저 특정 시점의 한 방향과 마주하는 거죠. 마치 꿈속 장면처럼요." 


"..끝이라고? 번호 세 개가? 이봐, 번호 세 개는 나도 알고 있던 거라고!"



나는 남자를 등진 자세 그대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어 조용히 해줄 것을 종용했다. 새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이번엔 다행히도 남자가 재촉해오지 않았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정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좋았어, 찾았다.



"..지금 차 안으로 들어갔어요. 차 안을 보고 있어요."


"운전사! 운전사가 어떻게 생겼지? 신형 캐딜락이니까 분명 중년의 백인 놈이겠지?"


"하트만 씨, 생긴 걸 말해봐야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그린 몽타주 한 장 쥐어 들고서 워싱턴과 일리노이 전역을 돌아다니려고? 나를 여기다 가둔 채?"


"젠장, 당신 말이 맞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당신 말도 맞군요. 중년의 백인 남성이에요. 이제.. 남자 주머니 안, 그리고 지갑 속으로 들어갈 겁니다." 



남자가 뱀 같은 미소를 흘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윌헬름, 그놈의 운전면허를 보는 거야. 제기랄,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내가 했던 말 취소할게. 네가 네 아버지 보다 뛰어나!"



그리고.. 자, 이제 모든 게 정리되면서 명확해졌다.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하트만 씨! 주소가 보여요! 빨리! 펜이랑 종이!"



내 외침에 남자는 제자리에서 잠시 몸을 도리질하더니 더 커다란 외침으로 화답했다.



"이런 망할! 둘 다 없어! 위에 가서 바로 가져올게!"


"그렇게 몇 번이나 접속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내 슈트 윗도리 안주머니에 펜이 있으니 가져와요!"



남자는 어찌나 다급했던지 시종 부러져라 쥐고 있던 엽총도 내던지고선 벌게진 얼굴로 슈트 상의를 주워들어 내게 달려오는 동시에 찢어져라 안주머니를 쑤셔댔다. (아마 조금 찢어졌을 거다)



"여기! 여기, 펜!"


"종이는요?"


"..위에 가서 가져올게!"


"손 내밀어요! ..두 개 다!"



나는 앞으로 내민 두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양손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선 다른 손으론 펜 뚜껑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열린 뚜껑 자리로 모습을 드러낸 날카로운 또 하나의 펜 촉. 300달러짜리 택티컬 펜의 숨겨진 발톱. 그 티타늄 발톱을 바로 치켜들곤 자기 양손을 뚫어져라 지켜보는 남자의 허리통 반만 한 목덜미를 향해 지체 없이 쑤셔 넣었다. 동시에 손 너머로 심히 기분 나쁜 감촉이 풍겨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불쾌한 남자의 꺼져가는 눈 떼기. (맙소사, 뿌예 터진 게 마치 만들다 만 레트로 수프 속 고깃덩어리를 보는 것 같다)


남자는 그 육중한 몸 전체를 고꾸라뜨리기 직전 나를 향해 무어라 입을 움직였지만 이미 그의 성대는 그 기능을 다 한지라 급작스러운 유언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오, 만약 실비아가 살아있었다면 남자의 영혼에게 물어볼 수 있었으련만)


자.. 오래된 송장 하나, 새로운 송장 다섯. 모두 일곱.. 아니, 이 경운 하나가 맞겠다.



"..네, 그 주소 맞아요. 네. 네, 헛간에 갇혀있고요.. 네, 맞아요. 신고자인 저만 살아있습니다. 그거 꼭 좀 전달해주세요. 겨우 죽다 살아났는데 또 죽을 뻔할 수는 없잖습니까. 네. 네, 제라드 윌헬름이요. 아니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더는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왜 다들 그럴 때가 있잖습니까. 저는 그게 지금이네요. 네,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나는 한 손으로 주섬주섬 남은 옷가지를 마저 끼워 매며 다른 한 손으로 쥐어 들고 있는 남자의 속이 드러난 지갑에다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데이브 하트만.. 그냥 경찰에게 말했어야지..


헛간을 둘러보았다. 경찰이나 보안관이 이 깡촌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다. 또 한 번 헛간을 둘러보았다. 인생은 복불복이라더니, 죽을 뻔한 위기인 줄 알았건만 그게 내 미래를 구할 줄이야.


나는 널브러진 송장들을 차례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그리고 빨리, 최대한 빨리, 나는 술이 필요하다. 어서 빨리 취해있고 싶었다. 허나 집에 도착하고서야 그럴 것이다. 싯팔. 이제 두 번 다시 음주운전 하지 않으리.





-fin-




















후기


나는 '이상한 옴니버스'라는 이름으로 수년간 웹, 출판물, SNS 앱, 방송 등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이비 지식들을 파헤쳐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걸출하게 이름난 (자칭)초능력자들의 사기 행각을 다루기도 했는데, 해당 이야기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 모두(주인공 제라드 윌헬름 을 제외하곤) 바로 이런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한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안나 파크스와 론다: 안나 미첼 헤지스와 수정해골이 모델이다. 모두들 인디아나 존스의 수정해골을 잘 알 거다. 대표적인 오파츠인 이 수정해골은 안나 미첼 헤지스가 17살무렵 탐험가였던 부친과 함께 마야문명 유적을 발굴하던 중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전설은 안나 미첼 헤지스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실은 1943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400파운드에 구매한 현대의 금속 공예품에 불과하다. 그녀의 수정해골로 인해 한동안 세계 각지에서 수정해골이 어떤 영험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도시괴담이 폭넓게 퍼지게 된다.

샘 버캐넌: 어떤 물체를 만지는 것만으로 그 물체에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능력, 사이코메트리. 아마 초능력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가히 낯설지 않을 거다. 그런 능력을 보유한 이를 사이코메트러라고 칭하는데, 샘 버캐넌의 모델이 바로 역사상 최고의 사이코메트러로 꼽히는 제라드 크로이셋이다. 그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초능력자이자 60-70년대에 세계 각지를 돌며 미해결 사건을 해결한 초능력 탐정으로 불리는데.. 물론 이 역시 모두 사기와 거짓전설에 불과하다. 그는 다른 모든 (자칭)초능력 탐정들이 그러했듯 방송과 자기 홍보를 통해 자신이 미해결 사건들을 해결하거나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주장하나.. 경찰 측의 수사기록을 확인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었던 거로 드러났다. 아, 당연히 사이코메트리라는 개념 역시 전 세계 적으로 초심리학이 학문의 일환으로 유행하던 40-50년대에 탄생한 유사과학에 불과하다.

피터 브루너: 실제 모델은 피터 포포프다. 독일 태생의 오순절 교회 목사였던 그는 80년대에 TV 매체 등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치유한다며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사기 전도극을 일삼던 자였다. 그는 전도회 전에 미리 참석할 사람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점쟁이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초능력 사냥꾼 제임스 랜디에 의해 그 진실이 폭로되면서 모습을 감추게 되지만.. 이후 통신판매를 통해 기적의 샘물과 같은 사기물품을 판매하면서 고급저택에 슈퍼카를 모는, 여전한 리치가이로 인생을 보낸다.

실비아 젠슨: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심령술사 실비아 브라운을 모델로 했다. 그녀는 생전 20분간의 전화 상담료로 700달러를 받았으며 그마저 예약이 2년 치는 찰 정도였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언젠가 CNN 래리 킹 라이브 쇼에서 분위기에 휩쓸린 나머지 제임스 랜디에게 도전하겠다고 입방정을 떨었다가 이후 죽을 때까지 제임스 랜디의 전화와 이메일을 회피해야 했다.

이들 모두 생전 분명 과분하고 불로소득격인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 비난받아야 할 주체는 언론과 미디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이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조장하고 선전해왔다. 그래야 광고주들이 좋아하니까. 결론적으로 세상만사가 그렇듯 이것 역시 돈에 관련된 문제이다.

나는 이상한 옴니버스를 통해 초능력자들을 죽여왔고, 이번 창작에서도 그들을 죽이게 되었다. 그게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1. 방문자 2018.06.11 08:43
    잘 읽겠습니다!
  2. 아기기린 2018.06.12 16:04
    오랜만에 올라온 괴담 잘읽었습니다
  3. 흑요석 2018.06.12 19:34
    와우.. 멋진 글이네요. 오랫만에 글이라서 그런건지도ㅋㅋ 주인장님 항상 고생하십니다.
  4. 오오 좋아요 이런 소재!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새글이 있어서 반갑네용
    잘 읽었습니당^_^
  5. 김깔깔 2018.06.13 17:13
    와 꿀잼 갓잼 대잼 ㄷㄷㄷ 단편영화나 티브이시리즈 본 기분이에요. 넘나릥 재밌네요.
  6. 가나다 2018.06.18 01:25
    앞으로 꾸준히 많이 써주세요! 재미있네요
  7. 사실 창작단편이라고 해서 아무런 기대감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예상을 벗어나는 글이었네요. 플롯이나 결말이 참신하다기 보다는 얘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독자를 끝까지 붙들어놓는 힘이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매끄럽게 술술 읽히고 소재도 재미있고.. 평가하려고 단 댓글은 절대 아닌데 뉘앙스가 왜이렇게 되어버렸는지ㅋㅋㅠ 그냥 감사히 잘 읽었고 더 읽고싶어졌다는 말씀을 드리고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