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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존재한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7. 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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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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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존재한다




나는 미래에 대해 결코 생각하는 법이 없다.

어차피 곧 현실로 다가올 거니까.


- 알버트 아인슈타인





장례식 절차만큼이나 사람 진을 빼놓는 게 또 없다. 특히나 유족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목사의 손짓에 따라 무덤가 앞에 선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장갑 위로 쌓은 흙 한 줌을 관 위로 흩뿌렸다. 이어 목사의 말에 따라 조문객들 모두 고개를 떨구곤 묵상기도에 동참했다. 올리비아만 빼놓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무덤가를 감싸 안고 있는 묘비와 눈을 맞췄다.



에단 피츠패트릭 

MAY. 28. 1985

NOV. 7. 2016



절차가 모두 끝나고 올리비아는 같이 있어야겠노라 바득바득 우겨대는 부모님과 친구들을 한사코 마중 보내고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잠시간 거실에 놓여진 비취색상의 가죽소파를 훑어내리고서 곧 그곳으로 무너지듯 몸을 내실었다. 가죽소파는 군데마다 해져선 하얗고 거친 속살을 들이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속살을 쓰다듬으며 손끝으로 감촉을 연신 느껴댔다.


가죽소파는 에단의 좋은 파트너였다. 고된 일과를 거쳐 밥 먹을 여력도 없이 쓰러졌을 때, 컵스 경기를 보다 맥주 비우는 것도 잊고선 졸아버릴 때(에단은 그럴 때마다 TV를 향해 "정말 똥들을 푸고 있군."하고 중얼거렸다), 일요일 햇살에 맥을 못 출 때.. 그럴 때마다 에단은 새우등을 하고선 가죽소파의 품에 안겨 마치 세상을 벗어난 사람인 양 새근거렸다.


올리비아는 쓰다듬을 멈추고 가만히 하얀 속살의 내음을 들이켰다. 집안에서 에단의 외침이 다시금 울리는 것만 같았다. 으레 외치곤 하던 그 말이.



"리비! 밖에 갔다 왔으면 손부터 씻어!"



올리비아는 천천히 한 손을 내려 자신의 배를 연신 사뿐히 쓸어내렸다. 에단이 남기고 간 아직 여물지 않은 그의 유산을.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언제나 흐른다. 최근 올리비아는 그걸 새삼 느꼈다.


간신히 잠든 베서니를 복고풍 모델의 목제 아기침대에다 조심스레 눕히고선 올리비아는 숨돌림과 함께 생각했다.



'걷게 되는 날부터는 더 죽어 나가겠군.'



올리비아는 잠시 베서니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새우등을 한 에단의 감긴 눈이 절로 떠올라서였다. 올리비아는 픽 하고 웃었다. 이제 문득 에단의 기억이 떠올라도 그렇게 행복한 웃음이 나온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비록 인생의 의미 반이 사라진 채였지만.


에단이 있었다면 아마 이것보다 곱절은 훌륭한 목제 침대를 손수 만들어냈겠지.. 그러다 퍼뜩 정신을 돌린 올리비아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까치발로 방문을 나섰다.



'마지막 회를 놓치나 했더니 이렇게 시간이 남을 줄이야!'



계단을 내려온 올리비아는 거실로 가 절도있는 본새로 TV를 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가죽소파로 향하려다 문득 가죽소파 뒤편에 자리한 참나무 책장으로 시선을 놓았다. 그건 에단이 만든 수제 책장이었다. 책장으론 책들(대부분, 실은 거의 다가 에단의 것들이었다)이 틈도 안 주고서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빳빳한 색상의, 이제는 누렇게 바래진, 절판되어 다시는 구할 도리가 없는, 그런 책들이 서로 몸을 의지한 채 꼿꼿이 고개를 뻗치고들 있었다.


에단과 올리비아는 서로 책을 읽는 방식이 영 딴판이었다. 에단이 한 번 책을 들면 끝을 봐야 하는 식이었다면 올리비아는 조금씩 조금씩 날을 두고서 읽어내리는 식이었다. 에단이 하나의 큰 감정선으로 책을 대하는 거라면 올리비아는 날마다 다른 감정선으로 대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간 올리비아는 전혀 책을 대하지 않아 왔다. 베서니의 탄생과 육아로 정신적인 여력이 없기도 했었지만

사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가죽소파에 새우등을 하고 누워 있노라면 책장이 자신을 부드러이 감싸 안아 속삭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마치 에단처럼. 그래서 그 모양새들을 감히 흩트리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올리비아는 달랐다. 지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에단을 굳건히 쌓아 올릴 수 있었고 (에단이 생전 근사하고 훌륭한 목수였던 것마냥 그녀 역시) 오히려 더 깊어진 사랑은 이제 대체물이 필요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서야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세상의 순리가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어쨌건.


그 순간 올리비아는 갑자기 책이 읽고 싶어졌다. 에단이 읽던 책을 읽고 싶어졌다. 어차피 드라마 시작 전까지 시간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날마다 조금씩'이 아니던가. 잠시 검지 하나를 뻗어 책들을 헤아리던 올리비아는 한 책에 다다라 손을 멈췄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이었다. 올리비아는 에단과 처음 영화를 보러 갈 때 들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본 게 쥬라기 공원이야. 부모님이 데리고 갔었지. 끝나고 나와서 가판대에 전시된 랩터 장난감을 사달라고 얼마나 졸랐었는지 몰라. 그리고..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받은 선물이 됐지."



에단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읜 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을 땐 외톨이가 되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정말 외톨이였다. 에단은 누구와도 관계를 쌓지 않았다. 사실 올리비아가 에단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혼자였다. 올리비아는 에단과 만나면서도 그의 가족이나 친구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에단이 생전 친구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 친구들 모두 본래는 올리비아의 친구들이었지만.



"내 쪽엔 하객도 들러리도 없어. 가족도, 그리고 친구도."



결혼식을 준비하며 에단이 수줍게 말을 꺼냈고 초여름에 있었던 야외 결혼식에서 신랑 측 하객과 들러리는 올리비아 측 절반이 맡았다. 그렇다고 에단이 괴팍한 심보의 소유자라던가 성격 어디 한구석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올리비아의 가족과 친구들이 때때로 에단을 더 좋아하는 걸 노골적으로 표하면서 가끔은 질투가 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에단은 묘한 사람이었다. 말주변이 특출나게 좋다거나 뻔뻔한 얼굴로 금세 친해지는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단과 마주할 때면 모두들 마치 부모 품에 안긴 아이마냥 포근함을 느꼈다. 막 처음 본 그에게서 누구보다도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건 마치 자신의 추억을 함께 공유한 가족에게서 느끼는 그것과도 같았다.


올리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감히 사랑에 빠졌노라 말할 수 있으니까. 둘은 다음날 한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즉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올리비아는 발을 힘껏 뻗어 에단의 무릎에 뉘었고 그럴 때면 에단은 남는 손으로 올리비아의 발을 연신 쓰다듬었다.


흰색 페이퍼백으로 이뤄진 쥬라기 공원엔 표지 이곳저곳으로 쭈글한 금이 가 있었다. 마치 가죽소파의 속살마냥. 올리비아는 꼬맹이 에단이 랩터 장난감을 부여잡고서 만면에 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올리비아의 양 입꼬리로도 어느새 미소가 걸렸다. 오, 나의 엔. 오, 우리의 베티.


올리비아가 쥬라기 공원의 속살을 펼쳤다. 그러자 동시에 그 속살은 종이 하나를 토해냈다. 전형적인 접이식으로 접혀진 종이 하나를. 잠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 종이를 들쳐 올렸다. 그리고 종이를 접기 순서에 따라 차례로 푸는 와중 뜻 모를 심장 고동을 느껴야 했다.


이윽고 펼쳐진 종이 맨 위의 글자조합을 읽은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을 이마로 갖다 대곤 나지막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종이 맨 위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안녕, 내 사랑 리비



올리비아는 들고 있던 종이에서 잠시 눈을 떼야 했다. 어느새 흐르고 있던 양 눈가의 그리움과 사무침을 닦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음 문장을 읽으려면 말이다.



자기한테 하려는 이 말, 어떤식으로든 꼭 했어야 하는 이 말, 그걸 혹시 자기는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에 대해 원망을 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리비, 나는 그저 '시간'에 따랐을 뿐이야.


리비, 이제 자기는 내 얘기를 알게 될 거야. 지금 자기가 이 글을 읽어내리는 순간이 바로 그 때이니까.


자, 리비. 우리 베티는 세상 단잠에 빠졌고 드라마 마지막 회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야. 드라마는 결말보다 그 과정에서의 감정들이 중요한 거니까. 그러니까, 움직여!



올리비아는 꼬맹이 에단이 랩터에게 그랬듯 한동안 종이를 꼭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에단은 생전 자신의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물론이요, 당연히 자신이 지어준 이름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베서니의 단잠과 드라마 마지막 회라니..


그러나 종이 위로 남아있는 글씨는 분명 에단의 필체였다. 그리고.. 움직이라고? 움직이라니? 올리비아는 여전히 종이를 손에 쥔 채 그대로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서있어야 했다. 움직여! 에단의 외침이 들리는듯 했다.


그런 올리비아의 눈에 책장 맨하단으로 DVD 케이스 뭉텅이들이 들어왔다. 주말이면 올리비아와 에단의 밤을 밝혀주던 DVD들. 올리비아는 홀리듯 종이를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뻗어 DVD 케이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꺼내든 DVD 케이스를 앞면으로 돌리자 거기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문구가 있었다. 올리비아가 에단을 졸라 같이 몇번이고 돌려봤었던 DVD였다.


올리비아는 케이스를 열어 그곳에 있던 또 하나의 접혀진 종이를 봤고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그 종이가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종이를 펼치자 거기엔 빼곡하게 글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레카, 리비!


나는 자기가 첫 번째 종이를 본 뒤 곧바로 이 종이를 찾아내리란 걸 알고 있었어. (드라마 따윈 내팽개치고서!) 정말이야. 나는 자기한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


리비, 지금부터 이 글을 빠짐없이 잘 읽어야 해. (물론 난 자기가 그랬단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자기도 알다시피 난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어. 교통사고였지. 그분들이 부디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셨길. 그즈음부터였어. 그러니까, '시간'은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게. 아니, 실은 그걸 진정으로 깨닫는 데엔 훨씬 더 오랜 나날이 걸렸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나는 부모님을 볼 때면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되었어. 그건 부모님이 탑승한 차량과 몇 대의 차량들이 뒤엉켜 사고를 일으키는 거였지. 나는 그게 뭔지 몰랐어. 왜 그런 '장면'이 보이는지, 그리고 그게 뭔지도 말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서 나는 그게 미래를 본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감당하기 버거운 죄악감에 휩싸이게 되었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말리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친구들에게서도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있었어. 그래서 다툼, 사고, 불행처럼 나쁜 것들이 보일 때마다 그걸 막아보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모두 실패였어. 언제나 모든 미래의 순간들은 결국엔 '장면'대로 벌어졌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말이야.


리비, 내가 느껴왔던 그 무력감을 자기는 헤아릴 수조차도 없을 거야. 사실 자기가 헤아리지 않았으면 싶지만 말이야. 그건.. 슬픈 거니까. 나한테도, 자기한테도.


그러다 나는 '장면'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어.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꼈던, 그리고 느끼게 되는 강렬한 감정선, 바로 그 순간을 엿보는 게 '장면'이라는 걸. 내가 갖게 된 그 능력은 대체 무얼까? 우주에서 발생하는 먼지만 한 틈새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왜 내게 그런 능력이 생긴 걸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부터 나는 사람들과 일절 관계를 맺지 않았어. 더는 '장면'에 시달리고 싶지가 않았어.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나는 과거와 미래에만 존재하게 되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거든. 그래서 그냥 고통받지 않는 외톨이가 되기로 했던 거야.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어. 무력감보다 두려움이 더 컸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로부터 미래의 내 모습을 보게 될까 너무나 무서웠어. 거기엔 분명 나쁜쪽으로의 모습도 포함될 테니까.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나서 하나 깨달았어. 나는 그때까지 누구로부터도 그때 이후의 내 모습을 '장면'에서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래, 자기. 나는 애초부터 그들 모두와 평생 등을 지고 사는 거였던 거야.


그렇게 나는 외톨이로 살았어. 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게서부터 말이야. 그러다 리비, 자기와 만났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나는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어. 내 생에 가장 행복했고, 행복하고, 행복할 순간이었으니까.


자기와 맨처음 세상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그 순간 나는 '장면'을 보게 되었거든.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눈만 마주친 건데 말이야. 나는 그 찰나의 순간 보았어. 자기와 내가 다음날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거,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거, 초여름 야외에서 열린 환상적인 결혼식(자기의 말에 따르길 잘했어), 우리가 매순간 사랑하는 거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보였지만 나는 찰나 동안 그걸 모두 볼 수가 있었어. 자기가 손 위로 놓인 흙더미를 조심스럽게 내 무덤가에 바치는 것도, 베티가 첫 음성을 세상에 공표하던 것도, 드라마 마지막 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 베티를 재우던 것도, 지금 당신이 내가 남긴 이 글을 읽는 것까지도. 그리고, 자기와 베티의 삶도.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시간'은 경사로를 따라 흘러가는 돌멩이가 아니라 경사로 그 자체였다는 걸. 그 찰나의 순간이 끝나던 순간 나는 알게 되었어. 나는 리비 자기를 사랑해왔고 사랑하고 사랑할 거라는 걸. 그 순간이 처음으로 운명이 내 편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지.


그리고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라고. '시간'은 존재하는 거라고. 그러니 리비, 자기. 더는 나를 그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 없어. 나는 지난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이 다음에도 당신과 베티와 같은 순간에 함께 있는 거니까. '시간'은 존재하는 거니까.


리비, 자기. 자기가 아직 손댈 엄두도 못 낸 차고 지하의 내 공간, 그곳 한가운데 바닥을 보면 나무 바닥이 들리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거기엔 자기와 베티에게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주는 편지가 있어. 왜 그런 데다 숨겨놨냐고 화내진 마. 난 그저 '시간'에 따랐을 뿐이니까.


편지는 정확히 베티가 성인이 될 때까지에 해당하는 것들만 있어. 왜 그때 것까지만 썼냐고 아쉬워하지는 마. 자기랑 베티가 죽을 때까지의 편지를 쓰고 싶은 게 내 마음이라지만, 드라마의 묘미는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감정에 있는 거니까.


그러니 리비, 인생을 즐겨! 그게 바로 내가 당신 덕분에 알아낸 우주의 진실이야.


추신. 편지 말미에 날짜를 기입하지는 않을게. 나는 자기와 베티, 둘 모두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같은 순간 함께 있는 거니까.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에단이, 어떤 순간.



편지를 모두 읽어내린 올리비아는 눈물을 떨구지도 또 전혀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아주 깊이.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니까. 그녀는 자신과 에단, 그리고 베티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같은 순간 모든 모습으로 같이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녀의 몸 속 모든 세포가 그걸 깨닫고 있었다.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조심스레 접어 DVD 케이스에 넣으면서 올리비아는 에단을 만난 이래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자신의 취미이자 마음을 채워주곤 했던 일, 홀로 바에서 여유롭게 한잔하는 일, 그 일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꼈다. 인생은 즐겨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시간은 존재한다. 언제나 존재한다. 올리비아는 이제 그걸 안다.



"맥캘란 12.. 아니, 18 더블 온더락으로 부탁해요."



바텐더로부터 한 잔 받아든 올리비아는 구석으로 걸어가 자리를 트고서야 입을 축였다. 저마다 무리를 지어 저마다의 감정으로 부딪혀가는 모습들을 몰트를 홀짝이며 보고 있는 건 가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기분이 꽤나 좋았다. 올리비아는 무리 지은 군중들 사이로 이방인이 되는 걸 꽤나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군중을 안주 삼아 홀짝이던 중 근처에서 자신처럼 홀로 서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올리비아는 이내 시선을 거뒀으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다시금 눈을 돌리자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살그머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우리들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자 내는 그런 표정이 아니라 즐거움에 겨워 얼굴 밖으로 새어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이었다. 올리비아는 필시 남자가 어린 시절의 웃는 얼굴 그대로를 가지고서 자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안돼. 지금은 정말 남자를 만나고 싶지가 않아. 그럴 때가 아니야.'



그 순간 어느새 올리비아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여전한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정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와 같은 미소를 지은 채로 한 손을 쭉 뻗으며 말했다.



"올리비아예요.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리비라고 불러요."



남자는 역시 한 손을 쭉 뻗어 올리비아의 손을 아주 부드럽고 깊이 움켜쥐고선 말했다. 올리비아는 남자의 음성이 마치 자신을 품에 안은 듯 자상하다고 생각했다.



"안녕, 리비. 전 에단이에요. 에단 피츠패트릭. 엔이라고 불러도 돼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모를 거예요."








-fin-




















후기


그저 글을 쓰고 싶어 쓰는 사람이든 인세를 받고 글을 쓰는 사람이든 창작 분야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책상에 죽어라 앉아선 이야기를 짜맞춰가는 방식, 자신이나 타인의 경험을 모델로 이야기를 구상해가는 방식, 독자로 하여금 의도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자 시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 등등.


내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고 할 수가 있겠다. 나는 이 창작 분야에 도통 재능이라곤 없다. 정말이지 우스울 정도로 없다. 다만 가끔씩 잠이 들던 찰나의 와중, 잠이 든 순간에서의, 그리고 잠이 막 깨려는 찰나의 와중 간혹씩 어떤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그 순간은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순식간의 찰나이다. 짧으면 수 초, 길면 1분. 그리고 과정에서 간혹 접하게 되는(전달받게 되는, 더 정확히는 꿈꾸듯 느끼게 되는) 이야기 구조가 있다. 말로 더 자세히 설명하긴 어려우나 어쨌건 그렇다.


어떤 이야기인지를 떠나 그 순간 어떤 긴 행복보다도 농밀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 또 그런 이야기를 더듬고 더듬어 미약한 글재주로나마 끄적일 수가 있어 더할 나위가 없다.


내가 지금껏 끄적여 온 창작 단편물 모두가 이런 식으로 탄생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 노출됨에 따라 부끄러운 한편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혹시 이런 방식이 너무도 편하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건 어찌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말인즉슨, 이런 방식은 마치 스팸 전화와도 같아서 지가 원할 때만 걸어온다는 거겠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간과 관련한 SF적 이야기를 원했고 2018년 7월 11일 새벽간 잠자리에서 찰나에 전달받았으므로 이렇게 이날 이른 오후 작성을 마치는 바이다.


아, 에단의 말마따나 2018년 7월 11일이 아니겠다. 어떤 순간 찰나에 전달받았으므로 이렇게 어떤 순간 작성을 마치는 바이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320349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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