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ground
320x100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더는 혼자 담아두기 힘들어 토해내 본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그 때부터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아버지와 조부모님, 그리고 아버지와 재혼한 의붓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15살 차이 나는 배다른 남매 동생들도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정말 싫었던 아버지 곁에서 벗어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없을 때를 틈타 종종 조부모님께는 인사를 하러 갔었고, 18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생긴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사이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다 세상을 떠나셨고, 이윽고 뒤를 잇듯 할머니도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그 후 10년 가까이 나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


그리고 몇년 전, 나 혼자 사는 아파트에 갑자기 의붓어머니가 찾아왔다.




솔직히 놀랐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니 사는 곳이 찾으면 금방 찾겠지만, 이제 와서 나한테 무슨 용무가 있는걸까.


현관 앞에 서서 무슨 일인지 묻자, 의붓어머니는 도와달라고 말했다.




돈 문제인가 싶었지만, 아버지는 회사 사장이다.


나 따위한테 돈이 필요해 손을 벌릴 일은 없을 터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의붓어머니를 방에 들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의붓어머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아버지 대신 사과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부모님이 이혼한 원인은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었다.


상대는 재혼한 의붓어머니.




하지만 나는 딱히 의붓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찾아온 탓에 오래된 상처가 벌어지는 것 같아 불안했을 뿐이었다.


[할 말이 그것 뿐이면 돌아가 주실래요?]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의붓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의붓어머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동생들을 좀 도와주렴.] 이라고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병 때문에 장기 이식이 필요한건가 싶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니었다.


의붓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집에 조부모님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정도라 무서워도 그러려니 하고 가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귀신이 나타나는 횟수가 많아지더니, 점차 조부모님의 형상마저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표정했던 얼굴은 한냐처럼 비뚤어지고, 평범했던 옷도 어느새 소복으로 변했다.


절에 공양을 부탁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개월 전, 잠을 자던 남동생이 울기 시작해 상태를 보러 갔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이 방에서 괴로운 듯 신음을 냈다고 한다.


당황해 방에 가보니, 이제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정도로 변모한 그것이 여동생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고 한다.


의붓어머니가 필사적으로 달려들자 그것은 사라졌다고 한다.




아버지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는 귀신이 전혀 보이지 않아 헛소리로 치부했다 한다.


그 후, 귀신은 여동생과 남동생이 자고 있을 때 근처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 남동생의 낙서장을 아무 생각 없이 살피던 의붓어머니는 내 이름을 발견했다고 한다.




18살이나 차이가 날 뿐더러 내가 집을 나간 후 태어났으니, 그 아이는 내 존재조차 모른다.


흔한 이름도 아니라 우연히 썼을 것 같지는 않고, 남동생이 갓난아기일 때 집도 새로 이사했었으니 도췌 알 방도가 없었다.


당황한 의붓어머니는 이 이름을 어디서 들었냐고 남동생에게 캐물었다고 한다.




[한밤 중에 누가 계속 이 이름을 중얼거려... 너는 A가 아니야. A는 어디 있느냐 하고...]


이대로는 아이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의붓어머니는 내 주소를 알아내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한 번만 집에 와 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의붓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했다.




아버지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오만하고 불쾌한 주제에 겉모습만은 멀쩡하게 생긴 아버지...


성인이 되면 언젠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묘는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조부모님 묘가 있는 장소와 연락처를 받고 의붓어머니를 돌려보냈다.




다음 휴일, 나는 조부모님 무덤에 참배를 갔다.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조부모님은 첫 손자였던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상냥한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향을 바치고 손을 모으자 눈물이 나왔다.


돌아가려고 물을 담은 통과 국자를 정리하고 있는데, 눈 앞에서 향이 뚝 끊어졌다.


바람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기분 나쁜 예감에 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절에서 빌려온 물통을 가져다 주려 가자, 스님이 [어느 분 참배 오셨나요?] 라고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성함을 대자, [잠깐 와서 차라도 한 잔 드시지요.] 라고 권해오셨다.


금방 전 향이 꺾인 것도 마음에 걸려, 나는 절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차를 마시며 여러 일들을 물었다.


의붓어머니가 여러번 공양을 부탁했던 탓에, 스님도 걱정하고 있었던 듯 했다.


나는 의붓어머니에게 들은 것들을 그대로 전했다.




스님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랬습니까.] 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돌아가는 길에 부적을 한 장 주셨다.


나는 의붓어머니에게 전화해 성묘하고 왔다는 걸 전했다.




그날 밤, 꿈에 조부모님이 나왔다.


넝마가 된 소복을 입고, 백발은 흐트러지고 눈은 핏발이 선 채, 입이 쫙 찢어진 그 모습은 귀신 같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어린 아이가 되어 어딘가에 숨어 있고, 조부모님은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어디에선가 [찾았다..], [아니야...], [죽어... 죽어...] 하는 낮은 목소리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자 온몸은 땀에 젖어 한기가 감돌았고, 몸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다음날, 일을 쉬고 스님이 된 동창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 녀석은 영감이 있는 놈이라, 고야산에서 스카우트 되서 스님이 된 녀석이었다.


그 친구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가 끝나자 무심한 듯 말했다.


조부모님은 나를 너무 아껴서, 다시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 한으로 남은 것 같다고.




그리고 그게 영혼이 된 후에도 이어져, 점점 유감이 원망으로 바뀌어 미쳐간 것일거라고.


의붓어머니와 동생들이 죽으면 정식 후계자인 내가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 없어, 그저 액을 끼치는 귀신이 된 것 같다고, 그 녀석은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라고 물었다.


[너는 괜찮아. 피는 이어져 있다지만 어머니 쪽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외가 쪽 선조 분들이 너를 지키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복 동생들은... 나도 모르겠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이었다.




[...손을 대지 않는다면 너에게는 동티가 내리지 않을거야.]


망연자실해서 내가 할 말을 잃자, 그 녀석은 경을 읊어주겠다고만 하고 가 버렸다.


그 후, 일 때문에 나는 이사했고, 의붓어머니와도 다시 연락이 끊겼다.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공감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