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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

천생연분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9. 3. 3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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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우스운 건, 어떤 기억은 과거의 것이 더 선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간혹 주관에 의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게 바로 기록이다.

내 경우에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다. 다만 문제는 기록적인 부분에서 구멍이 있다는 거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 모두 나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럼 결론은 내 기억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됐다는 건데 도통 내 입장에선 인정도 납득도 안 된다는 게 또 문제겠다. 보통, 아니 거의 대부분이 이런 경우엔 그 기억이 당사자에게 인상 깊게 남아있거나 혹은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내 경우엔 후자였다.

90년대였다. 어린 나는 일요일 늦은 오후를 맞아 차량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건 주말마다 으레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엄마 아빠는 토요일이면 오후가 되기 무섭게 부랴부랴 차를 몰고선 여행을 떠났고, 아직 혼자 집을 볼 수 있을 만큼 자라지 못한 나는 일요일이면 지루한 기분과 육체적 피로에 몰려 파김치가 된 상태로 귀갓길 내내 뒷좌석 전체를 뒹굴거려야 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우리 가족을 태운 차량이 평소보단 조금 이르게 귀갓길에 오를 때였다. 인적이 드문 여행로를 타던 중 엄마 아빠가 창문 너머의 한 여성을 대화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아 배낭여행을 나선 거라느니, 친구랑 싸웠는지 뭔지 왜 여자 혼자서 걷고 있는 거냐는 지 따위를 말이다. 엄마 아빠는 곧 그 여성을 태우기로 빠르게 합의를 도출했다. 오지랖이라고? 히치하이킹은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한 나라에서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뿌리 박히게 된 문화일 뿐이라고? 글쎄다. 우리나라도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여행지에서 대학생들이 히치하이킹을 구걸하면 기꺼이 태워다 주는, 그런.

제의를 받은 여성은 잠시간 주저하는듯하다 이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으로 자리했다. 쏟아지는 엄마의 질문에 여성은 그저 자신은 대학생이고 택시가 다닐만한 곳까지만 태워다주길 부탁했다. 엄마 아빠는 애초 자신들의 생각대로 대학생이 친구와 여행지에서 싸우고선 뛰쳐나와 홀로 귀갓길에 오르는 거라고 확신했는지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여성은 자신의 등을 거의 다 덮고 있던 커다란 검정 백팩을 앞으로 안고서는 이따금 숨을 몰아쉬었다. 또 시선은 줄곧 고정되지 않은 채 창밖 풍경 이곳저곳을 훑느라 분주했고 주기적으로 눈을 감은 채 안에서 눈알을 격렬히 흔들어대느라 눈꺼풀 바깥으로 그 떨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본래 싹싹한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여성의 행동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인 것인지라 어쩐지 무서워져 앉은 거리가 멀어지도록 조금씩 티가 나지 않게 몸을 옮겼다.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떨어졌다고 생각해 다시금 여성을 훔쳐보자 어느새 여성의 손엔 내 교과서가 들려 있었다. 당시 나는 금요일 숙제를 해결하고자 주말마다 차량 뒷좌석을 책상 삼아야 했다. 문제는 그런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주로 일요일 귀갓길에야 불씨에 콩 볶듯 해결한다는 거고, 이제 문제는 여성에게 감히 교과서를 달라고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성은 교과서 페이지를 거칠게 넘겨가며 무언가 끼어맞추려는 듯 이따금 얼굴을 살짝 치켜세우곤 미간을 찌푸린 채 먼 곳을 응시했다. 나는 한층 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째서인지 그런 여성의 행동을 가만히 탐구하듯 응시하게 됐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린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여성은 이번엔 관심사를 나로 바꿨는지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이곳저곳 관찰하는 눈치였다. 이어 여성은 교과서를 덮고는 표지 위로 큼지막하고 조금은 삐뚤게 적혀진 내 이름을 보는 듯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성에게 내 이름을 들킨 거다. 어쩐지 나는 한층 더 두려워져 여성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감히 거두려고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버렸다. 내 얼굴로 시선을 옮긴 여성은 대뜸 든 자신의 오른손을 내 얼굴로 향했다. 그리곤 무척이나 부드럽고 기품있는 움직임으로 내 왼쪽 앞머리를 들어 올리듯 쓸어올린 뒤 그대로 귀 쪽까지 아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여성은 다분히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인 듯 경직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든 나는 그 쓰다듬 한 번으로 완전히 진정을 되찾았다. 그제서야 여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얼굴에 시선을 맞춘다고 고개를 숙이느라 풍만한 머리숱 사이로 얼굴 전체가 드러났는데, 왼쪽 이마 관자놀이 부근 손톱보다 조금 더 긴 모양새의 얄따란 하얀 흉터가 한 치 오차도 없는 피부결 사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발작적으로 치켜진 여성의 얼굴이 다시 처음 차량으로 올라설 때의 그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치켜진 얼굴은 운전석 앞유리창을 향하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여성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조심해!'라고 소리 질렀다.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성은 백팩으로 내 앞을 덮고는 또 그 위를 자신의 몸 전면부로 감싸 안았다. 한편 흡사 포식자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여성의 외침에 아빠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돌림과 함께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량은 가드레일에 아슬하게 붙여진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어 엄마 아빠의 '어어' 하는 숨넘어가는 듯한 외마디 말이 들려왔고 나는 내 몸이 좌우로 빠르게 요동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그날 내 기억의 마지막이다.

눈을 떴을 땐 침대였다. 내 방 침대. 목조 프레임으로 제작된. 양옆 끝으로 가드레일마냥 차단막이 있는 어린이용 침대. 나를 깨운 건 여느 날처럼 엄마였다. 엄마는 빨리 나와서 밥 먹고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일상이 이어졌고 내가 그날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토요일이었는데도 언제나처럼 여행을 가지 않고서 엄마 아빠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날이었다. 늦은 점심식사 동안 엄마 아빠의 이어지던 수다를 귀동냥 하면서 나는 그날 우리 가족이 추돌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나를 눈치챘는지 엄마는 내게 너는 기억이 잘 안 날 거라고 했다. 아이들은 놀라면 그러기도 한다면서.

당시 2차선 국도 커브 길을 들어서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차선을 점령하며 갑작스레 튀어나온 관광버스가 우리 차량을 거의 덮치듯 스쳐 지나갔다고, 아빠가 재빨리 핸들을 꺾은 뒤 관광버스가 지나감과 동시에 다시 반대로 핸들을 돌리며 브레이크를 밟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그 직후 내가 울음을 터뜨리더니 곧 잠들었고 다음 날 멀쩡해 보여서 괜히 놀랄까 봐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엄마의 설명이었다. '그럼 그 누나는?' 내 말에 엄마와 아빠는 무슨 누나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나는 히치하이킹부터 사고 직전 여성이 내 몸을 덮던 거까지를 얘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나를 당혹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엄마 아빠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내게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 한다며 핀잔을 줬다. 쟤는 가끔 보면 엉뚱한 말을 한다고. 네가 꿈꾼 걸 착각하는 거라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그날 사고에 대해 히치하이킹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엄마 아빠의 잡담에 등장하는 놀림감 소재가 되면서부터 나는 그 여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다만 그날 일은 여전히 내 머릿속 앞 좌석에 자리하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성인 이후에도 가끔씩 불쑥 왕래하는, 그런 오랜 친구로 말이다.

물론 그동안 그날 일에 대해 되짚어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게을리 한 건 아니다. 나는 어린애가 겪은 발작적인 사고와 그에 더해져 이후 꾼 꿈과의 혼동과 혼합 속에서 마치 비슷한 퍼즐 조각을 억지로 꿰맞추듯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그건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추론이었다.

초여름이 되었다. 초여름의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29살이었고 서울로 올라와 있었다. 올라와 있었다고 표현한 건 이유가 있다. 당시 나는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이주한 부모님(이른 은퇴와 함께)을 따라 몇년간이나 한량생활을 영위하던 와중이었다. 밤낮으로 새소리 따위나 들어가며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써보고 싶은 글을 끄적여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내가 쓰던 글이 제법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결국은 업체들과 상업적인 계약을 맺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날 나는 또다시 어느 업체와 미팅을 가진 자리에서 그대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간만에 서울 여행을 와 일까지 따냈으니 프로 한량께서 할 게 뭐겠는가. 오랜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은 나는 붕 떠버린 시간을 축내고자 해가 막 저무는 가운데 환락스러운 도심 중심을 목적 없이 거닐며 사람 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골목에서였다. 유행을 좇아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도배된 상가 거리를 거의 끝에서 끝까지 둘러봤을 때였다. 그럴듯한 외국어 이름의 펍이 나타났고 그 테라스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친구와 테라스 자리에 마주 앉아 앞에 맥주잔 하나를 두고선 은근한 미소와 함께 조잘거리고 있었다. 살구색에 전면으로 화려하면서도 어지러이 조각형태로 수놓아진 긴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수다 도중 웃음을 흘릴 때마다 귀로 깡총히 달린 같은 살구색상의 태슬 귀걸이 숱이 우아하게도 하늘거렸다. 또 어깨로는 짙고 세련된 네이비 색상의 얇은 밀리터리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 그런 옷매무새들은 그녀의 더 없이 보기 좋은 테를 간신히 뒤쫓느라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으며 동시에 지극히 트렌디한 옷차림임에도 굉장히 기품있는 모양새로 이채로움이 발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녀를 본 100명이 모두 그녀에게 반할 정도라고 확신은 할 수 없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조형에서 다시 없을 찬미의 욕구를 느꼈다. 그저 첫눈에, 그리고 한눈에 대책 없이 반해버린 걸 누가 글쟁이 아니랄까 봐 요란하게도 늘어놓는다고 조소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서 어떤 신념에 가까운 애절함을 느낄 정도였다. 맹세코 그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오늘 말을 걸지 못한다면 그냥 강바닥에 뛰어들어 가라앉는 게 나을 거라며 스스로 다짐하고 독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 전부를 던져놓은 채 미친놈이 된 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친구가 자리를 비울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여자에게 말을 걸 땐 그 여자의 동행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하라는 게 성경에도 나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목덜미를 노리는 이리마냥 가만히 숨죽이곤 기다렸다. 일단 물게만 되면 결코 놓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품고서.

사람들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만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녀의 친구가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십중팔구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고 나는 그녀의 친구가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유추하고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놀라지 않을 만큼의 가까운 거리로(하지만 내 훤칠한 키가 제대로 파악될 만큼은 멀게), 그리고 사선으로 비스듬한 위치까지 걸어 나간 나는 아주 정중하고 느릿한 묵례를 하고는 말을 꺼냈다. 안녕하냐고, 계속 보고 있다가 온 거라고, 반했다고, 하지만 외형만 보고 반한 거라서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해보고 싶다고, 어차피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시간은 흐르는 거 아니냐고.

안다, 굉장히 뻔하고 뻔뻔하고 저질스럽기까지 한 말이란 거.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표정, 목소리, 말투, 제스쳐다. 오히려 메시지는 유치하고 직설적일수록 효과적인 법이다. 그래서 나는 정중하고 진심 어리며 동시에 따분하진 않은 사람으로 주지시키고자 내 모든 행동거지를 컨트롤하랴 비지땀이 나는 걸 숨겨야 했다. 정말이지 똥 새도록 노력했다. 그녀의 테를 뒤쫓는 옷매무새들마냥.

그녀는 다소 놀란 듯 입을 조금 벌리더니 수초간이나 내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무섭도록 고운 그 얼굴 한가운데로 박힌 그녀의 눈이 내 머리, 얼굴, 짙은 데님 소재에 가운데로 격자무늬가 수놓아진 셔츠 상의, 왼손으로 셔츠 색상과 같은 밴드가 채워진 시계, 복숭아뼈가 온전히 드러나는 기장의 하계용 검정 슬랙스 하의, 그리고 흰 가죽에 베이지색 패턴으로 스웨이드가 자리한 스니커즈까지를. 나는 어쩐지 그녀의 눈이 나를 투과해 저 멀리까지 보고 있는 것 같아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 한층 더 노력해야 했다. 시선을 거두고서도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녀는 이내 자기 친구에게 보였던 그 미소를 흘리며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쳐보였다.

나는 대책 없이 천박한 미소가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단속하고는 너무 급하게 보이지 않도록 차분히 그녀의 옆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리곤 다시 한번 안녕하냐고, 반갑다고, 내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29살이라고 처음 목소리를 힘겨이 유지한 채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굉장히 느릿하고 부드럽게 이목구비 전부로 아주 깊은 미소를 짓더니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동안이네.'라고 말하면서. 나는 곧장 몸을 반쯤 일으켜 다소 장난스레 '고맙습니다.'하고 두어차례 꾸벅였고, 그녀는 그게 마음에 찼는지 입도 가리지 않고 고개를 젖혀 깔깔거리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28살.'

그녀와 채 1분도 말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나는 무섭도록 내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미 그녀의 어떤 모습과 행동을 보더라도 내 자신의 이상향 그대로라고 굳게 믿어버릴 아찔함이 느껴져서 말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제대로 수행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친구가 돌아와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이게 어느 곳 어느 때에서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흔하디 흔한 모습으로 남겨지길 원치 않는다고. 그러니 그전에 어서 전화번호를 받고서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그녀 또한 내 말에 공감했는지 잠금 풀린 핸드폰을 내 손 위에 올려놨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 건 1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화였다. 짐짓 꾸며낸 목소리로 '여보세요.'라며 가식적으로 말을 뱉는 내게 그녀는 다짜고짜 지금 어디냐고, 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면전에 천재지변 같은 일이 생겨 약속을 깨야겠으며 불가피한 사정이니 다음에 술을 산다든지는 안 할 거라고 쏘아붙이곤 그녀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어깨로 재킷을 걸친 그녀와 밤 거리를 나아갔다.

저물었던 해가 다시금 그 얼굴을 들이 미려 하고 있었고 이제 나와 그녀는 그녀가 사는 고층 오피스텔 옆으로 이어진 정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적어도 수십시간은 쉬지 않고 이어갈 자신과 바람이 있었으나 어쨌든 빌어쳐먹게도 아침이 되고 있었고 그건 곧 오늘은 이만 빠빠이라는 암묵적인 룰의 환기였다. '이제 너 그만 집에 들어가야지.'라고 한숨 뱉듯 말하는 내 얼굴 한편으로 어떤 일말의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 게 그대로 읽혀졌는지, 그게 우습고도 조금은 귀여워 보였는지 그녀는 어깨로 걸쳐진 재킷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사뿐한 움직임으로 내 무릎팍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가만히 아무런 말과 표정도 없이 내 얼굴을 응시했고 나는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팍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왜 허리를 감싸지?'라고 물으며 미처 참지 못한 미소를 새어 보냈다. 나는 '너 몸이 뒤로 젖혀지면 재킷이 떨어지니까'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처음 내 무르팍에 앉았을 때의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기다란 머리 끝단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부드럽게 매만졌다. 세상 진귀한 비단이 손에 쥐어진 것 마냥. 이어 그녀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한 채로 응시하더니 곧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살며시(그러나 확실하게) 마치 잠시 올려놓듯 맞췄다. 그건 어쩐지 신성한 의식으로 느껴질 만큼 내 마음을 경건함으로 물들게 한 행위였다.

그녀는 꽃잎 끝에서 조심스레 박차 오르는 나비처럼 내 무르팍에서 날아올라 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미소엔 애정어림과 함께 단호함 또한 새겨있었으므로 나는 그 뜻을 받들어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그녀가 좀전의 입맞춤보다도 부드러이 느껴지는 음색으로 말했다. '이제 너가 하려는 일을 해.' 나는 그러겠노라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오늘 내가 너에게 한 말들은 모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것이었다고, 다시 만날 날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곤 뒤돌아 최대한 느릿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멀어지면서도 서너차례 연신 뒤를 돌아봤고, 그때마다 그 자리 그대로에서 그 서정적인 눈매로만 살짝 미소짓고 있는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술은 조금만 취한 상태였으나 분위기에는 있는 대로 취해버린지라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릴 심산으로 그녀의 동네를 거닐기 시작했다. 동네는 신도시의 전형인듯한 외국풍의 아케이드가 펼쳐져 있었고 나는 아무도 없는 그 거리 골목마다를 구경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평소 돌아다니는 장소가 아니던가. 따라서 충분히 볼만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골목까지 도착해선 이제 택시를 잡으러 큰길 쪽으로 향하고자 골목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내 앞으로 이국적인 정취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신도시 아케이드로부터 이국적인 말이다.

군데군데 전신주가 위용을 뽐내고 있고 그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분간이 불가능한 서로 같은 모습의 연립주택들이 사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남은 취기마저 한순간에 말끔히 씻겨 내려진 나는 발작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동네는 없었다. 좌우앞뒤 사방이 처음 보는 주택단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빠지는 호흡 속에서 침착하게 현재의 상황을 이론적으로 풀어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추론을 도출했다. 블랙아웃이 된 상황에서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제대로 말하지 않아 엉뚱한 곳에서 내려진 거구나 하는. 하지만 이 완벽한 추론에는 오류가 하나 존재했다. 내 손목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으론 그런 일이 벌어지기에 충분한 여유가 없었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선 연신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리고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애 하나가 언제 왔는지 내 쪽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등교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여기가 어느 동네인지, 그리고 택시를 잡으러 큰길로 나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을 요량으로 그 아이를 불러세웠다. 그러자 아이는 인적없는 거리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낯선 성인 남성이 경계되는지 몸을 뒤로 움찔거리며 동시에 나를 파악하려는 듯 위아래로 훑어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나는 어떤 명백한 확신에 차게 되었다. 그건 마치 진리로 통하는 숨겨진 오솔길을 우연히 발견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깨달음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괴력을 발휘해 양손을 쭉 뻗어 아이를 거의 들어 올리듯 밀쳤다. 아이의 몸이 한참을 붕 떠져선 저 멀리 땅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제 튀어나왔는지 오토바이 하나가 그 굉음보다 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와 아이 사이를 가로질렀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였다. 나는 황급히 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심장이 본분을 잊고서 가슴팍을 제멋대로 흔들어대고 긴장감으로 혀가 바싹 말라 목 전체가 따끔거렸다. 아이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열린 책가방 사이로 빠져나온 교과서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교과서 표지 위론 큼지막하고 조금은 삐뚤게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멈췄던 발을 조심스레 떼고는 다시 아이 쪽으로 한 발 내디뎠다.

해가 막 저물고 있었다. 유행을 좇아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도배된 상가 거리 골목이었다. 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난 이국적인 정취를 따라 길을 걸었다. 그럴듯한 외국어 이름의 펍이 나타났고 그 테라스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친구와 테라스 자리에 마주 앉아 앞에 맥주잔 하나를 두고선 은근한 미소와 함께 조잘거리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나아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롯이 그녀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소 놀란 듯 입을 조금 벌리더니 수초간이나 나를 훑었다. 무섭도록 고운 그 얼굴 한가운데로 박힌 그녀의 눈이.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왼쪽 앞머리를 들어 올리듯 쓸어올린 뒤 그대로 그 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겼다. 그녀의 풍만한 머리숱 사이로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왼쪽 이마 관자놀이 부근 손톱보다 조금 더 긴 모양새의 얄따란 하얀 흉터가 한 치 오차도 없는 피부결 사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엄지로 그 흉터를 아주 부드럽게 매만졌다.

우스운 건, 어떤 기억은 과거의 것이 더 선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간혹 주관에 의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게 바로 기록이다.

내 경우에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다.

-fin-








후기

고백하자면, 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떠한 미스터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501547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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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죽을 준비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9. 3. 9.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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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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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죽을 준비

변기 물로 참방하게 잠긴 흑갈색 똥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월트 벨은 생각했다.

좋아. 잘 나왔군. 최고의 시작이야.

월트 벨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의 가장 큰 난관이라 여긴 일이었는데 전날 밤 뒤척이며 꿈꾼 이상보다도 나은 결과가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아침식사를 신경 썼다지만 노인성 변비가 이토록 시원하게 해결되다니.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입꼬리로 새어 나오는 망측한 웃음소리를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저린 다리 때문에(일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자 평소보다 오래 앉아 있었다) 잠시간 변기 옆 벽면으로 설치된 보조손잡이를 잡고 있어야 했으나 그 지옥 같은 시간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어정쩡하게 굽혀진 무르팍 아래론 잠옷 바지와 트렁크 팬티가 포개져 있었다. 기저귀 따윈 없었다. 기저귀는 어제 모두 처분했다. 더는 기저귀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똥을 잘 싸야 했는데 뜻대로 됐다. 설사도 아니고 나오다 만 조각들도 아니고 된 똥이었다. 설사면 매시간 지리느라 시간을 축냈을 테고 나오다 만 조각들이었다면 거북함 때문에 온종일 신경을 빼앗겼을 거다. 그런데 된 똥이라니. 이제 하루를 마음먹은 대로 마무리 지을 수가 있다.

월트에겐 명확한 철학이 있다. 모든 일에 앞서서 성사를 좌우하는 건 똥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라는 게 그렇다. 게티즈버그에서 링컨이 사람들의 영혼을 투과한 건 연설 덕택이었다. 하지만 똥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면 어땠겠는가? 그 연설은 역사 속 기록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서너 시간이나 이어진 행사 동안 악다구니로 똥을 참으면서 찬바람은 쉬지 않고 아랫배를 때리는데 이미 죽은 놈들이 뭐가 대수겠는가. 매가리 없고 거북해 보이는 목소리와 초조한 표정, 링컨은 역시 교양 머리 없는 켄터키 촌놈이고 게티즈버그엔 에버레트의 이름만 남았을 거다. 또 모르지. 연설 도중 못 참고 흘렸다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민주당이 당시 불던 反링컨 바람을 지피며 다음 해 선거에서 탄핵시켰을지도. 세상만사는, 특히나 큰일을 앞두고선 똥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똥의, 똥에 의한, 똥을 위한 시작이 필요한 거다.

잘 가게, 친구. 월트는 마지막 작별 인사와 함께 변기물을 내리고는 똥 덩어리들이 휴지 더미와 뒤덥혀 휘몰아치는 걸 묵묵히 바라봤다. 주섬주섬 아랫도리를 추켜올린 뒤엔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자신과 마주했다. 얼굴 전체로 새겨진 주름은 세는 게 무의미했고 이마 위로 덮여진 검버섯 주변으론 정전기 맞은 듯 곤두선 백색의 색실들이 새싹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누구도 사려고도 또 원하지도 않는 땅 위로 무의미하게 남겨진 새싹들. 하지만 그 밑의 양 옹이구멍으론 막 벌려진 독수리의 부리마냥 불꽃이 튀고 있었다. 월트는 탁하고 잠긴 목소리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소화하듯 힘 있게 중얼거렸다. 시작해보자, 월트.

태양이 꼭대기로 위치한 가운데 월트는 집의 가장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4평짜리 지하 창고는 채워져있는 짐보다 퀴퀴한 냄새와 먼지 덩이들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짐들은 죄다 가지런히도 정렬돼 있었는데 그 때문에 실지보다 더 양이 적어 보였다. 하지만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정반대였었다. 그간 월트는 이 창고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분류했다. 필요한 것들을 격식에 맞게, 소중한 것들은 순서에 따라 차곡히, 그렇지 못한 것들은 기저귀 떼와 함께 처분하면서. 남의 인생사에 훈수 둘 때처럼 참으로 야무지게도 해낸 것이다.

월트는 짐들이 각각 자기 자리에 맞도록 배열되었는지를 눈으로 훑으며 동시에 짐을 이루고 있는 상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다 짐들 가장 위에 자리한 베이지 색상의 상자로 향한 손으로 조심스레 그 누렇게 바랜 뚜껑을 열어젖혔다. 상자에서 흑백사진 더미들을 집어 든 월트는 의식적으로 한 차례 훅하고 숨을 내쉬곤 사진으로 시야를 고정시켰다. 그것은 며칠 전부터 지하 창고 대정리를 펼치며 가장 마지막에 할 일로 점찍어둔 일이었다.

첫 번째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한 장씩 넘기며 이 사진으로 돌아오면 이제 지하 창고에서의 업무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 사진엔 고만고만한 키의 세 아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셋 모두 제각각의 앞니들이 훤히 드러나도록 웃고 있었고 옷매무새 밖으론 똥배가 볼록하고 솟아 있었다. 사진 속 월터의 형은 파일럿을 꿈꿨었다. 그 시대 남자애들 누가 안 그랬겠냐마는. 아쉽게도 월터의 형은 평생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배만 실컷 타고서 두 번째 세계 대전지들을 돌아다니느라 말이다. 월터의 여동생은 좀 더 소박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던지라 자기 이름으로 된 옷 가게를 가지는 게 꿈이었다. 비록 그 꿈도 이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 늘 그랬듯 손자 손녀들을 위해 스웨터를 뜨던 와중 세상을 떠났으니 영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소파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더욱 그렇겠다.

사진을 넘기니 이번엔 젊은 청년이 처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자기보다 어린 부모의 사진을 본다는 건 언제나 이상한 순간이다. 이제는 사진을 들여다보는 순간에만 얼굴이 기억나는 부모의 사진을 보며 월트는 혀를 찼다. 아버지, 어머니 전부 이렇게 젊었단 말이야? 사진을 또 한 번 넘기자 젊은 월트의 얼굴이 나왔다. 주름은 어디에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고 하얗게 드러난 건치들은 모두 진짜 자신의 이였다. 활짝 웃고 있는 젊은 월트는 옆의 아리따운 여인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내는 평생을 새침데기 여인네였다. 이제는 십 년이 다 돼가는 어느 날, 면회 종료 시간을 코앞에 두고는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 앞에서 월트는 긴장으로 연거푸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날 월트의 몸속은 사랑으로 충만해 어디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월트는 아내의 손등에 입 맞춰야겠노라고 계속해서 다짐했다. 하지만 쉬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애꿎은 주름들만 미간에 가득 잡히고 월터의 아내는 이 양반이 또 뭐 맘에 안 드는 게 있나 해 물끄러미 월터를 훑었다. 그러다 마치 연극이라도 시작하듯 월터는 뻣뻣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선 그대로 아내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월터의 아내가 웃음을 간신히 참는 얼굴로 올려다보곤 내뱉었다. 월터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멈춰 섰던 손을 다시 움직였고, 월터는 아내는 날다람쥐처럼 민첩하게도 그 손을 빼내들어선 자신의 입을 막고 깔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전쟁에서 다친 몸 하나 없이 돌아와선 가장 큰 역경을 보냈다는 생각에 평생 함께 살고 싶다고 떠듬떠듬 말을 했을 때에도 월터의 아내는 그렇게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깔깔깔 웃어댔었다. 그날 월터의 아내는 월터의 손을 감싸 쥐고는 말했다. 자기 전에 또 맥주 마시거나 그러지 마요. 소피 땜에 깨서는 잠을 설친다고, 이 양반아. 월터는 그날 집에 돌아가 물 반잔만으로 입을 축이고는 단잠에 빠졌고, 도중에 한 번 설침도 없이 다음날 일어나서 마저 물 반 잔을 마시던 중 병원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아야 했다.

사진을 다시 한 장 넘기자 이번엔 웃통을 깐 채 뽀빠이처럼 이두박근을 들어 보이고 있는 두 소년이 나왔다. 한날한시에 월터 부부에게로 왔었던 쌍둥이. 둘은 어찌나 서로가 각별했는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디 스친 곳도 없이 베트남에서 무사히 돌아와놓곤 자동차를 몰다가. 쌍둥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월터는 안타까움보다 화가 치솟았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빨리 왔다 간 건지. 쯧하고 혀를 차고선 사진을 넘겼다. 그리고 또 넘겼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의 사진, 아내와의 사진, 쌍둥이와의 사진, 친구들과의 사진, 남한의 격전지에서 유독 친했던 분대원 둘과 찍은 사진.. 젊은 청년이 처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사진.

깡총히 달린 창문으론 굵다란 빛줄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줄기로 먼지가 사방에서 올라오고, 그리고 내려가고, 또 올라오고들 있었다. 월트는 손을 들어 휘이하고 빛줄기를 저어보았다. 먼지가 손짓을 따라 올라왔다, 내려가고, 올라갔다. 월트는 먼지들이 임무에 따라 각자의 위치로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휘몰아 광풍에 이는 나선들이여.

집안 곳곳을 누비며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내려 확인 작업을 끝낸 월터는 마지막 하나 남은 레트로 고기 수프로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최후의 만찬 치고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할 수 있겠으나 월터의 생각은 달랐다. 괜히 소화라도 안되거나 해서 남은 시간을 엉뚱한 데에 몰두하고 싶지 않았다. 요기만 없애면 그만이었다. 예수라는 양반도 그랬잖은가. 자기 먹을 걸 나눠주면서 말이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그렇지만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똥이란 중대한 거다.

첫 격전지에서였다. 갑작스러운 출전에서 월트는 만 이틀 동안 똥 묻은 팬티(팬티 묻은 똥이 더 맞겠다)에 궁둥짝이 짓뭉개진 채로 사경을 헤매야 했다. 멀쩡히 두 눈 뜨고 움직이는 사경을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전쟁터에서였다. 똥을 지린 게 월터뿐만도 아니었고 말이다.

월터는 제대로 준비를 하려 한다. 아내가 떠난 후 한 번도 종합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 최근엔 각혈과 피똥이 일상이었다. 몸도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심장도 지가 원하는 대로 뛰어댔다. 그러다 요새 며칠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도 세졌다. 월터는 안다. 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고. 제집마냥 병원을 들락거리며 산송장이 되어 걸어 다니지도, 리타이어 커뮤니티에 들어가 흘러감의 공포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생판 남들과 나눠갖지도 않은, 그저 주어진 몸뚱이로 길을 걸어가 총알이 날아올 그곳에 우뚝 선 채로 앞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말이다. 월터는 안다. 자신에게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라고. 평생 이 몸뚱이만 사용해왔다. 이 정도면 가히 최우수 고객이 아니겠는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 사용일이다. 월터는 제대로 죽을 준비를 하려 한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절도있게 식사를 마친 월터는 현관문을 열고 앞마당에 나가 입속에 잔뜩 머금은 채 가글 하던 물 한 바가지를 그대로 투하했다. 그리곤 몇차례 마저 침을 주륵 내보내고선 고개를 들어 무심코 옆을 보자 이웃집 꼬마 놈이 시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벨 할아버지."

꼬마가 목청껏 인사했다. 몇 달 전 이사 온 이래 늘상 월터만 보면 저리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며 인사한다. 망할 것, 누굴 귀머거리로 아나. 월터는 평소대로 고개만 한 번 까닥하고는 하늘로 시야를 돌렸다. 어느새 태양은 잔뜩 취한 양 뻘건 빛으로 세상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벨 할아버지."

월터는 깜짝놀라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웃집 꼬마 놈이 어느새 다가왔는지 바로 앞에서 월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치켜올려 쓴 야구 모자는 군데군데 땀 때문인지 하얗게 바래있었고 손으론 형형색의 찍찍이 캐치볼 세트가 쥐어있었다. 꼬마는 잠시간 눈을 내리깐 채 찍찍이 공을 주물 거리더니 발작적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데이비드 그레이프예요. 벨 할아버지.. 벨 할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들었어요."

"뭣?"

데이비드가 거의 소리 지르듯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월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내저어야 했다.

"이놈아! 뭐라고 했냐고가 아니라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이냐는 거다! 귀 안먹었으니 작게 작게 말해!"

월터의 노성에 데이비드는 그냥 뒤로 내빼야하나를 잠깐 고민했는지 몸을 쭈뼛거리다 입을 뗐다.

"죄송해요. 평소에 인사를 해도 반응이 없으시길래 할아버지가 소리를 잘 못 듣는지 알았어요."

"..용건이 뭐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들었어요. 학교에서 친구들한테요."

옌장할. 월터는 구태여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서 혀를 쯧하고 찼다. 불 보듯 물 보듯 뻔한 거 아닌가. 저 또래 남자애들이 다 죽어가는 영감을 앞에 두고서 눈을 뒤집는다면 그다음 나올 질문은 하나다. '진짜 사람 쏴봤어요? 몇이나 죽였어요? 히틀러 본 적 있어요?' 월터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짐을 느꼈다. 자신과 관련 없는 것에 단 1초도 신경을 기울이기가 싫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래도 되는 거 아닌가.

"난 지금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렴."

월터의 냉랭한 어조에 데이비드는 눈을 내리깔아 애꿎은 캐치볼만 손안에서 굴려댔다. 캐치볼은 이미 땅바닥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왔는지 간신히 본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분명 저 찍찍이 캐치볼 세트로 인해 데이비드가 또래들로부터 심심찮게 조롱거리가 되어왔으리라 월터는 확신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같은 사내끼리는 분명 알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이다. 월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데이비드는 찍찍이 글로브에 고정되어있던 손을 황망히 빼들고는 입을 열었다.

"버즈 형이 진짜 소가죽으로 된 근사한 글러브랑 야구공을 사준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했어요. 전부 중고가 아니라 새 걸로 사주겠다고요. 근데 언제 돌아올지를 모르겠어요. 형은 지금 멀리 가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옆집 큰아들 놈이 언제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다. 덥수룩한 머리에다 코와 턱으론 양 새끼마냥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수염보단 여드름 자국이 더 많을 정도로 애송이였다. 아마 그 애도 성인이 되고서 미주리의 변변찮은 사내놈들처럼 한 가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월터는 생각했다. 남의 목장 봐주기 따위를 해오다 자신은 다른 치들과 다르다며 집을 떠나서는 결국 살충제 공장들을 뺑뺑이 돌거나 아니면 노상에서 컨트리 음악을 믹싱한 CD를 관광객에게 팔거나 말이다.

"형은.. 지금 이라크에 있어요."

어이쿠. 그래, 그게 남아있었지. 약 팔고 마트 털던 놈들까지 끌어모으는 판국에 이런 미주리 촌놈은 더할 나위 없는 재원이지. 이 나라는 여적 변한 게 없다. 진짜 명예란 게 뭔지도 구별할 줄 모르는 애들에게 총을 쥐여주고는 죽음의 골짜기를 타도록 한다. 이 나라는 모른다. 똥 지리는 공포가 무엇인지를. 그저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가장 악독한 개새끼가 되도록 가르칠 뿐이다. 가르치는 건 누구나가 할 수 있다. 그럴듯하고 이치에 맞아 보이는 말을 떠벌리면 되는 거다. 하지만 똥 지리는 건 다른 문제다. 똥은 지려본 놈만 아는 거다. 더 큰 문제는 똥을 지릴 놈들이 태생적으로 정해져있다는 거겠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게 뭐니?"

"전쟁에 나가면.. 그러니까.. 열 명 중에 몇 명이 무사히 돌아오나요?"

오, 신이 있다면 이런 빌어처먹을.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내가 뭐라고 대답해줘야 한단 말이오. 네 형은 무사히 돌아올 거다.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하니까. 우리의 신념이 더 고귀하니까. 우리는 신의 수호를 받고 있는 나라니까. 이러면 되오? 변변찮은 곳의 촌놈이 최전선에서 총포로부터 모두 빗겨나도록 당신이 힘이라도 써주는 게요? 월터는 잠시간 그저 데이브를 묵묵히 내려다봐야만 했다. 그 침묵에 데이브가 막 불안감을 느끼려던 찰나 월터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뱉고선 지하 창고를 향해 뛰듯이 걸어나갔다. 허벅지 근육은 나흘 전 전부 사용한 줄 알았는데 아직 여분이 좀 남아있었는가 보다.

다시 돌아왔을 때 월터의 손에는 투명한 아크릴 플라스틱제 키링이 하나 들려 있었다. 월터는 그 키링을 데이비드에게 쥐여주고는 말했다.

"자, 얘야. 받으렴."

"이게 뭐예요?"

"이건 내가 전쟁에 나갈 때 아내가 가지고 있던 부적이란다. 이 투명한 플라스틱 말고.. 여기 안에 보이지? 네잎클로버란다. 원래 클로버는 잎이 세 개뿐인데 이건 네 개지. 그거 아니? 만 개의 클로버 중 한 개만이 이렇게 잎이 네 개란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가져온단다. 나폴레옹이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서 허리를 굽히자 그 위로 총알이 지나갔지. 또 항상 네잎클로버를 지니고 다니던 링컨도 깜빡하고서 빼먹은 날에 극장에서.."

"알아요! 머리에 총을 맞았어요! (데이비디는 공갈 총을 한 자신의 손을 머리에 대고는 푸슝하고 소리냈다)"

"그래, 그만 네잎클로버를 까먹었던 게지. 하지만 내 아내는 그러지 않았단다. 내가 전쟁에 나간 날부터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어. 덕분에 나는 다친 데 하나 없이 돌아올 수 있었고 말이다. 이걸 너에게 주마. 나는 이제 아무래도 전쟁에 나갈 일이 없을 것 같구나."

데이비드는 마치 마크 맥과이어의 사인볼이라도 거머쥔 양 입꼬리를 있는 대로 올려 미소를 지었다. 옌장, 대체 어떤 쾌변을 하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 거람.

"데이브!"

어느새 집 밖으로 나왔는지 옆집 현관문 앞에서 데이비드의 엄마가 이쪽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윽고 월터와 시선이 마주쳐진 그녀는 짧게 목례를 해왔다. 월터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근심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데이비드에게 이만 엄마에게 가보라고 재촉했다. 호시탐탐 애들 엉덩이를 후리려는 치들이 사방에 놓여져있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죽고 나면은 그런 오해를 설명할 기회도 없어지는 법이다. 이미 죽고 나면 뭔들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호색한 영감쟁이로 마녀사냥 당하는 것만은 사양이올시다. 그 대상이 자기만 아니라면야 마녀사냥만큼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또 없지 않은가.

데이비드는 연신 미소 지어진 얼굴을 한 채 한 손으로 키링을 치켜들어선 월터를 향해 '꼭 품에 지니고 있을게요!'라고 외치고는 제 엄마를 향해 뛰어갔다. 월터는 모자가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까지를 지켜본 후 다시 하늘로 시야를 돌렸다. 뻘건 빛을 내뿜던 태양은 이제 취기에서 돌아왔는지 장막 속으로 그 부끄러움을 막 숨기려 하고 있었다. 얼마 후엔 달이 자리를 대신하겠지.

문득 월터는 정말로 데이비드의 형이 무사히 돌아오리란 확신이 들었다. 미주리맨에겐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중요하다지만, 그리고 비록 네잎클로버 키링 자체가 실은 아내가 언젠가 길거리 히피에게서 적선하듯 구입한 거였지만 말이다. (그 히피 놈이 곧장 떨을 사 피웠을 거라고 전 재산을 배팅할 수 있었지만 그날 월터는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오는 법이다. 우리는 이 나선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빤스가 벗겨지지 않도록 잘 붙들어매고 있어야 할 따름이다.

하늘로 시선을 두고 있던 월터는 한 마디 읊조려 주고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내가 뻥 좀 쳤수다. 당신네 십계명은 거진 엉터리야. 처음부터 잘 좀 만들지 그랬수."

이제 마지막 의식으로 월터는 정성스레 샤워를 했다. 이미 쭈글쭈글한 손이 더욱 쭈글탱해질 때까지. 그리곤 준비한 잠옷(월터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잠옷으로, 곤색에 가로와 세로로 빗금이 새겨진 상하의 세트였다)을 입고선 주방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 최전선에는 미첼롭 앰버박 한 병과 지퍼팩으로 봉해진 소고기 육포 한 점이 열을 맞추고 있었다.

침실로 가 침대에 걸터앉은 월터는 병따개로 맥주병을 두 번, 세 번에 걸쳐 간신히 딴 후 한 모금, 두 모금, 그리고 세 모금 쉬지 않고 기울였다. 이어 지퍼팩 위로 놓인 육포도 손으로 한 점 잘게 찢어선 입으로 가져갔다. 최상의 파인컷. 작은 미소와 그보다 더 작은 중얼거림을 내뱉은 월터는 따진 맥주 뚜껑으로 조심스레 맥주병 아가리를 닫은 뒤 역시 남은 육포를 지퍼팩에 안치하고는 꼼꼼히 봉했다.

월터는 침대 옆 소형 탁자로 자리한 맥주병과 지퍼팩 옆의 봉투를 집어서는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무늬라곤 가로줄이 전부인 편지지에는 몇 줄 안되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건 자신 명의로 된 소박한 재산들을 어디 앞으로 남기는가 하는 따위의 글이었다. 월터는 만약 아내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에게 종용했을 선택지인, 그리고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던 본인을 위해 격주마다 봉사단원을 보내 잡일을 봐주면서 생전 개근생인 아내의 부탁을 지금껏 실천해온 마을 교회로 그 대상을 정했다. '할렐루야! 월터 벨 씨가 마지막에 회개하시어 주님 곁으로 떠났습니다.'라며 호들갑 칠 교인들을 떠올리면 배알이 꼴리는 감도 있었으나 어쨌든 유일하게 남은 호의는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살아있는 동안 받은 호의를 모두 갚아온 월터에게 있어(갚기도 전에 죽어버린 자들의 호의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뭐, 어떠랴. 본디 나이가 들면 까먹고 싶은 건 까먹으며 사는 거다) 마지막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장례절차에 대한 것까지(죽을 놈이 지 묻히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모두 확인한 월터는 편지지를 넣은 봉투를 소형 탁자 가장 앞줄 가운데로 자리시켰다.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는 자신을 몇 차례 흔들어보던 봉사단원의 시야에 최대한 잘 들어오도록. 이어 월터는 찬찬히 고개를 돌아보며 주변을 덮고 있는 어둠 너머를 차례로 훑어내렸다. 총알이 날아올 그 자리임을 재차 확인하면서.

침대에 몸을 뉘인 월터는 가슴팍까지 이불을 올리고선 끙 하는 숨내움과 함께 눈을 껌뻑이기 시작했다.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아내로부터 신을 두고 살아왔던 월터 벨이 이제 마지막 신으로 삼았던 그 자신의 육신을 벗어나고자 하고 있었다. 껌뻑이는 눈과 숨소리의 간격이 아주 부드럽게 늘어나면서 월터는 자신의 모든 게 땅으로 땅으로 점차 동화되는 느낌에 침식당했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월터의 눈은 완전히 감겨졌고 입은 헤 하고 조금 벌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무아의 순간으로 빠지는 와중 월터는 지금 이미 자신의 모습이 누가 보더라도 송장일 거라는 생각에 피식하고 찰나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날을 위한 하루, 하루를 위한 모든 날. 월터는 제대로 죽을 준비를 했다.



-fin-

후기

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시오.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시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48373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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