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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운명의 창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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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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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살아남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도망친 것이다. 내 품에 싸인 이 '물건'을 맡아야 하니까. 나는 이 '물건'을 맡으라는 명을 하달받았다. 그 명을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탈출로를 선점 받았다. 그러니 조금은 내 비겁함을 변호해야겠다. 나는 명에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을 맡은 다음은, 그다음엔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같이 평생을 명에 따랐던 군인에게 있어

은퇴란 그런 거다. 계획된 것이든, 계획되지 않았던 것이든 간에. 앞으론 군복 대신 셔츠 쪼가리 하나만 걸칠 것이다. (어차피 군복도 모두 처분한 지 오래다) 그리곤 이 따뜻한 곳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겠지.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어쨌건, 그렇게라도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이 끝까지 사는 거다.


히틀러 씨(그분은 항시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바랐다)가 이 '물건'을 처음 접한 건 빈에 거주하며 미술에 몸담고 있던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그것은, 1912년 합스부르크 가의 보물을 전시하던 박물관에서였다. 처음 히틀러 씨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그게 2시간 전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 평소 조용하고 수줍음 많았던 히틀러 씨는 이야기 내내 핏발에 광기를 띠고 있었다. 히틀러 씨는 마치 다른 세상을 엿보고 있는 양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선 그날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온 유럽이 기독교인 만큼 나 또한 가톨릭교도였네. 그래서 처음 그 '창'에 어떤 신성함 같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실제로 본 순간 모든 게 날아가 버렸네. 그때 내가 느낀 건 신성함이 결코 아니었어. 곧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비명 지르는 게 느껴졌지. 때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잖나. 그리곤.. 이건 농담이 아닐세. 그 '창'이 내게 말을 건네왔어.


'아디, 아디. 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옛날, 네가 태어나기도 전 네가 날 손에 넣었을 무렵부터. 아디, 내게로 오렴.'"



그 뒤, 히틀러 씨는 1차 세계 대전 참전 후로부터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계와 대중의 총아가 되었다. 그렇게, 방랑하던 미술가는 1934년 독일의 총통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 씨와 '창'과의 인연(?)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자 비밀스러운 심복이었던(그리고 친구였던) 나는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 임무를 일임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임무의 첫 수행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창'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창'은 여러 주인의 손을 탔던 것 같다. 아리마태아의 요셉 자손들이 차례로 보관해오다 오랜 세월 예루살렘에 묻혀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이 찾아낸 이래로.


그렇게 로마 황제들의 손에 번갈아 들어갔던 '창'은 그들을 패권의 길로 인도했다. 허나 손을 벗어난 '창'은

그들을 곧바로 패망의 길로 밀어뜨렸다. 이후 십자군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창'은

원정 승리로써 그에 보답한다.


그 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창'은 그들에게 유럽 제일의 패권을 가져다주었다. 천하에 위세를 떨치던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빛나는 승전보를 올리나 끝내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창을 가로채는 데엔 실패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600년 가깝도록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배하며 1914년 세계 대전을 선포한다.


그리고 1938년. 히틀러 씨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병합한다. 동시에 히틀러 씨는 친위대 앞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들을 압수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물론, 그전에 미리 비밀명령을 하달받은 나로 인해 '창'은 아무도 모르게 가짜로 대체된다. 뉘른베르크의 교회로 옮겨진 게 바로 그 가짜였다.


마침내 히틀러 씨는 '창'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망했었던 그 '창'을. 지금에 와 보면 가난한 미술가가 독일의 총통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합병한 게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1939년. 히틀러 씨는 폴란드 침공을 전개했고 곧 두 번째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창'을 손에 넣은 히틀러 씨는 곧 전 세계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마침내 이곳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내가 아무도 모르게 친위대 중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안전하게 탈출로를 선점 받았던 것은 히틀러 씨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씨는 확신했다. '창'이 수중에 있는 한 운명은 다시금 자신의 편에 서리라고. 하여, 첩보를 입수하고선 전설의 '창'을 손에 넣으려 호시탐탐 침을 흘려대는 개떼(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에 대비해 내가 움직인 것이다.





머저리 놈들. 가짜를 두고서 서로 물어뜯기나 하라지. 말했듯, 히틀러 씨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창'만 있다면야 언젠간 전황이 바뀔 거라고. 그러나 쑥밭으로 둘러싸인 벙커 안에서 히틀러 씨는 마침내 낙담하며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창'의 보관 임무에 실패한 거라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히틀러 씨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낯선 땅에 홀로 남겨졌다. 말했듯,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나는 이제 안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직감하고 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창'은 신성한 피가 닿은 성유물이 아니었다. '창'은 패권으로 인도하는 제왕의 유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창'은 기다렸다. 로마 제국 시절 발견된 이래 황제들의 손을 거치며 그들을 부추겼다. 그들을 움직였다.


'창'은 그들론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차례로 그들을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허무한 몰락을 맞이했고 '창'은 십자군 원정을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로 도착했다. (십자군 역시 끝내 버림받으며 비참한 끝을 맞이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대로 된 대상자를 찾은 것이다.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세계 대전이 끝나자 '창'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버렸다. 지난 '그들'이 그러했듯 합스부르크 왕가는 몰락했고 '창'은 히틀러 씨를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이제는 안다. '창'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제 안다. '창'은 피를 원한다. 우리 인간의 피를. 더 많은 우리 인간의 피를. '창'에는 그 옛날 두 번째 인간을 유혹했던 사탄이 깃들여 있는 거다. 사탄은 광야에서 나사렛 사람에게 세 가지 유혹을 거절당하곤 잠시간 자취를 감췄다. 사탄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건 '그날'이었다. 사탄은 스스로를 '창' 속에 구속한 것이다. 인간의 피를 부르기 위해. 나사렛 사람을 평등과 사랑을 전파한 개혁가가 아닌, 오로지 신의 아들로만 만들고자. 그러기 위해 '장치'를 자처했다.


'창'이 마침내 두 번째 인간이 탄생했던 곳을 찔렀다. 사탄은 스스로를 구속시키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에 성공한 거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이 신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두고서 신의 이름을 빌린 자들에 의해 쏟아진 헤아릴 수 없는 피들이 아마 땅속을 스며들어 저 아래 지옥에까지 닿았을 것이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창'은 끝없이 피를 갈구하며 대상자를 찾아왔다. '창'은, 사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창'이 더는 인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오, 하늘에 계신 분이시여. 이 사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땅에 가라앉히든, 물에 가라앉히든, 가라앉은 건 언제고 떠오르는 법이 아닌가. 나는 대상자들이 사탄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최소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러도록 할 것이다. 사탄을 항시 품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오래지 않아.. 그래, 머지않아서. 대상자들이 다시금 사탄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개 무리는 늑대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 법이니까. 그때까지 우리 인간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오래도록 지금의 피에 만족하길. 그래서 가능한 한 늦게 대상자를 불러들이길.



 



"meos tuosque, huc ades"





-fin-


















후기


대표적인 성유물 '운명의 창'을 두고서 실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 종교 소재만큼 영감을 자극하는 게 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색채를 입히면 제 아무리 덜떨어진 수준의 창작물이라도 일견 봐줄만해지는 법 아닌가.


어쨌건, 나 역시 성(聖)을 향한 관음 욕구를 기꺼이 소비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이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의 역할이 종래 다른 창작물들과 다른 노선을 띠고 있는 것에 기꺼워하는 편이다. 그건, 성(聖)스러움을 확립코자 쌍스러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그것을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이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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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생각했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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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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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생각했다



 



도르르


도르르


도르르르


오늘도 실타래는 풀려 간다.


역사라는 이름의 실타래가.


다음 실타래를 위하여.





그건 1914년 여름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정해 놓은 것처럼, 그저 순서가 되었기에 찾아온 것처럼, 그렇게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젊은이인 시몬도 전장에 발을 딛게 되었다. 과거의, 또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1918년 가을, 프랑스 최북단에 위치한 노르 주. 이곳의 한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해당 전투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본인의 마지막 세계 대전을 치르는 셈이었다. 시몬은 바로 이 전장 한복판에 있었다.


허나, 마지막 전장이라고 위안 삼기엔 일렀다. 시몬이 속한 소대는 부대와 고립된 채 적군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내내 그 망할 놈의 기관총으로 참호 밖으로 내미는 머리통을 쏴 재끼고 있었다. 당연히, 그러한 머리통은 모두 시몬의 전우 것이고 말이다.


아직 머리통이 달려 있는 것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시몬은 이미 한참 전부터 죽음의 내음을 맡고 있었다. 그 내음은 땅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포도밭 향 따윈 진즉에 사라진 이곳 토양, 절망과 손을 맞잡고 춤추던 전우들, 그 전우들을 영양분 삼는 구더기 떼, 세상의 끝과 마주한 채 곳곳에서 꺼뜨리는 비릿한 한숨들. 그러한 것들이 한데 묶인 향이 계속해서 시몬의 콧속을 찔러 대며 유혹을 가해 오고 있었다. '포기'라는 유혹을.


하지만 시몬은 그 유혹과 결코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용감하기 때문에? 아니, 그렇지 않다. 새 떼에게 쪼인 눈알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목이 덜렁덜렁한 시체에서 새어 나온 배설물들의 악취가 공포라는 것을 전염시키는 와중에 용기라니? 그러한 상황을 두고서 용기 운운하는 것들은 필경 지붕 밑에서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그 상스러운 주둥이를 흔들어 대는 치들뿐이다.


시몬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건 바로 무섭기 때문이었다. 시몬 옆의 전우들, 그 전우들의 동태 눈에서 하나 같이 새어 나오는 죽음의 예언. 그게 매 순간 시몬을 두려움에 젖게 하며 포기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 내몰린 시몬은 참호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고막을 찌를 듯한 소리들이 공기를 가르고 시야를 흩트리는 동안에도 시몬은 어쩐지 턱 끝까지 다다른 찬 내음만을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찬 내음에만 집중하고선 달린 끝에 시야로 기관총을 붙들고 서 있는 적군이 들어왔다. 시몬의 시야는 전에 없을 만큼 선명했다. 하얗게 질린 채 한쪽 입이 살짝 뒤틀려선 기관총에다 자신의 운명을 떠넘긴 적군의 모습, 그자의 치켜진 눈썹 위로 난 주름살 개수마저 가늠될 정도였다.


시몬은 품에 쥐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 전방으로 내던졌다. 마치 여적 그것을 위해 살아왔던 것처럼, 그러라고 신이 세상에 내보낸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신속하고 절묘한 투척이었다. 이어 시몬은 적군 진지 내 좁다란 통로에서 달려드는 적군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검을 내질렀다. 아무런 철학도 없는 본능적인 행위였기에 그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시몬 뒤로 광기에 붙들린 눈을 한 전우들이 같은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몬은 살아남았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적군의 단말마가 시몬에게 고향에 돌아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고 있었다. 곧이어 시몬이 활로를 연 덕택에 합류한 본대가 적군에게 응징을 가했다. 한편, 시몬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전우들을 대신하여 잔당 색출 작업에 참여했다. 본대의 배려를 받아 후방에 남아서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시몬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온 것은. 그 남자는 뼈대만 흉물스레 남은 벽담에 한 팔을 기댄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시쳇더미 속에서 죽음을 위장한 채 화를 피했던 것인지 얼굴과 온몸에 핏물 어린 진흙덩이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남자는 적군이었다. 시몬과 비슷한 나잇대의.


잠시 후,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시몬과 눈이 마주쳤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어 사격 자세를 취했고 이에 남자는 심장이라도 떨군 듯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몬은 남자의 눈에서 익숙한 것을 보았다. 죽음에서 빠져나갈 희망 따윈 모두 내팽개친, 그 익숙한 눈빛을. 그렇다. 남자는 죽음을 각오한 게 아니라 희망을 포기한 것이었다.


너무도 뜻밖의,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부닥친 시몬은 그 남자처럼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그저 총부리만을 겨눌 뿐이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재빨리 사방을 확인해 보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군 한 명은 이미 저 멀찍이서 소피를 보고 있었다. 시몬은 다시 총구로 고개를 돌려 남자를 조준했다.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그런 절망감 어린 눈으로.


영겁과 같은 찰나의 그 순간, 시몬의 머릿속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다.



"이봐, 전쟁영웅 씨. 뭘 망설이시나? 쏴, 쏘라고! 뭐야? 왜 그러고 선 거야? 사람 처음 쏴 봐? 잠깐, 지금 사람 처음 쏴 보냐는 농담 제법 괜찮았지?"



전장에 몸을 비비며 이미 씻을 수 없는 피를 온몸에 끼얹은 시몬이지만 그래도 버리지 말아야 할 신념이 있었다. 부상당한 적군과 항복하는 적군을 사살하지 말자는 것 말이다.



"아아, 휴머니티! 이 친구야, 항상 모든 문제의 대다수는 그거 때문에 일어난다고. 전쟁이 다 끝난 거 같지? 네가 보낸 저놈이 언젠가는 네 어미, 네 누이, 그리고 네 아내를 겁탈할 거다. 아니, 어쩌면 이미 네 친척이나 이웃 중 하나를 겁탈했을는지 모르지. 모르는 거야. 요컨대, 저놈은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그럴 거라는 거다. 이봐봐, 너는 자기만 아는 그런 이기적인 놈이었나? 주변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치 않는, 그런 놈팡이였나?"



시몬에겐 무저항의 적군을 사살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건, 불가피하게 살육의 지옥터에 내던져진

처지에 있어 그래도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위안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얼씨구! 이 친구야, 그건 비겁한 자기기만일 뿐이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고작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싶다는 어리광에 불과한 거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저 위의 대리자를 참칭하는 자들로부터 한마디 위로받으면 모두 해소될 것에 불과한 거라고. 네 그 비열함이 나를 악마의 형상으로 만든 건 알지? 어떤 선택을 하든 '악마의 말을 듣지 않았어.', '악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라고 도망가려고 말이야."



시몬에겐 신념이 있었다.



"대단하시군.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난 사람을 죽였지만 신념을 지켰어.'라고 자위할려고? 그런 저열한 위로에 기댄 채 살아갈 건가? 여보, 친구. 이건 기회라고. 저놈을 쏘고서 다시 태어나게. 그럼 너는 네 가족이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마무리를 지은 게 되는 거지. 그 전에 네가 쏘아 죽였던 적군들에서처럼. 그러니 당겨, 방아쇠를 당겨! 너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 되라고! 저놈을 쏘고 완전한 승리를 취해! 명심해,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하면 넌 그저 살인자가 될 뿐이야! 하지만 승리자가 된다면 영웅이 되는 거다! 스스로를 떳떳하게 여기며 평생을 승리자로 살아야 할 거 아냐! 쏴! 쏘라고!"



쏠 것인가, 보낼 것인가. 곧 저기서 아무 고민도 없이 소피를 보고 있는 아군이 돌아오면 그 아군에 의해 남자는 사살되고 말 것이다. 저 아군은 같은 고향 출신의 전우가 죽은 사실을 자신의 모든 행위에 정의를 부여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 그러니 남자를 포착하는 순간 자신의 철학을 완성코자 필경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러므로 시몬은 남자의 운명을 남의 손에 떠넘겨 훗날 후회하는 대신 죽일지 살릴지 직접 결정키로 했다.



"싯팔! 난 인간이라고!"



외마디 내뱉음과 함께 시몬은 총부리를 내리고서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시몬의 심중을 알아차리고선 절도있는 본새로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곤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시몬은, 남자의 뒷모습을 쫓으며 중얼거렸다. 악마야, 입 다물어.


전쟁이 끝나고 시몬은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영웅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남자 역시 전쟁이 끝나고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국가로부터 훈장은 수여받지 못했지만 삶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좋은 거 하나를 얻으면 좋은 거 하나를 잃는 거.


세월이 흘러 1925년 11월 4일.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는 이날 한쪽 발을 저는 남자와 만났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둘은 서로에게 매료됨과 동시에 인정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 이날을 기점으로 그 남자가 한쪽 발을 저는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역사의 실타래는 본래보다 빠르게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만나게 되는 한쪽 발을 저는 남자가 역사의 기점이었던 것이다. 한쪽 발을 저는 이 남자의 이름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





도르르르르





-fin-




















후기


이 이야기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영웅이었던 영국군 헨리 텐디의 일화를 그 모델로 하고 있다.


1918년 9월 28일, 프랑스 노르 주 마르코잉 마을. 영국군 소대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 채 기관총 견제를 받는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국군 병사였던 헨리 텐디가 기관총 진지를 일순 무너뜨려 아군에게 퇴로를 확보하는가 하면 이후 소수의 아군과 포박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총검술로 앞장서 독일군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한편, 이후 상황이 역전되어 영국군이 독일군 잔당을 소탕할 시 헨리 텐디는 도망 중이던 한 독일군 병사와 마주한다. 여기서 헨리 텐디는 '부상당했거나 항복하는 적군은 사살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에 따라 그 독일군 병사를 그대로 도망가도록 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히틀러는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과의 회동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그날 헨리 텐디는 나를 죽이기 한없이 가까운 곳에 있었소.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독일을 볼 수 없겠구나 생각했소. 하지만 신의 섭리는 영국군들이 내게 겨누던 사악한 총부리로부터 나를 구해내 주었소."


최근의 전문가들은 역사적 사료를 들어 히틀러의 이러한 언급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당시 영국군의 전쟁영웅이었던 헨리 텐디가 문제의 전투에서 도망치고 있던 독일군 병사 하나를 신념에 따라 보내 주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서 자신의 존재 당위성과 신화 구성을 위한 일종의 선전으로 그같은 창작을 했다고 본다. 헨리 텐디는 이에 대해 1939년 당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쩌면 내가 놓아 주었던 독일군 병사가 히틀러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그 독일군 병사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삶에 있어 사람에게 보다 중요한 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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