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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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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사또 아무개는 나이가 60이 되도록 아들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외아들을 지나치게 아끼고 글조차 가르치지 않아 아이가 13살이 되었는데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수준이었다.

그러던 도중 전부터 사또와 친하게 지내던 해인사의 큰 스님 한 분이 관청에 찾아와 수령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가 이미 다 자랐는데 아직도 글조차 못 읽으니 나중에 크면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글을 가르치려고 해도 워낙 건방져서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매를 들기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후회가 막심합니다.]

[사대부 집안의 자제는 어릴 적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세상에서 버림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저 오냐오냐 하면서 공부조차 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옳은 것입니까? 아드님의 사람됨을 보니 어떤 일이든 하기만 하면 할 수 있을 터인데 이처럼 포기하시다니 안 될 일입니다. 소승이 가르쳐 볼테니 사또께서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스님의 뜻을 몰라 부탁할 엄두를 못 냈지, 전부터 원하던 일입니다. 스님께서 만약 그 아이를 깨우쳐 지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면 그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스님의 마음대로 하시고, 무조건 엄하게 공부를 시키십시오." 라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은 뒤 소승에게 주십시오. 또 일단 절로 데려간 후에는 결코 집에서 연락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옷과 먹을 것은 소승이 마련할테니 만약 아이에게 보낼 것이 있다면 제 제자들이 오갈 때 저에게 직접 보내서 제 허락을 받도록 하십시오. 알아 들으시겠습니까?]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사또는 즉시 스님이 말한대로 문서를 만들어 주고, 그 날로 아이를 절에 보낸 뒤 연락을 끊었다.

아이는 버르장머리가 없어 절에 간 후에도 이리저리 쏘아다니며 늙은 중들을 멸시하고, 욕을 하며 뺨까지 때리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하지만 큰 스님은 이를 보면서도 마치 못 본 것처럼 아이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4, 5일이 지난 어느 아침, 큰 스님은 고깔과 도포를 차려 입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았다.

그 앞에 제자 3, 40명이 경전을 펴고 앉아 있는데 예절과 몸가짐이 가지런하고 엄숙했다.

큰 스님이 스님 한 분에게 아이를 잡아오라 시켰더니, 아이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다.



[한갓 너희 같은 중놈들이 어떻게 양반을 모욕하는거냐! 내가 집에 돌아가면 아버님께 아뢰어 너희들을 때려죽일테다! 원수 대머리 중놈들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일테다!]

아이는 계속 욕을 하며 한사코 오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큰 스님은 아이를 꾸짖으며 여러 스님들에게 아이를 묶으라고 시켰다.



스님들이 아이를 묶어서 큰 스님 앞에 데려다 놓으니, 큰 스님이 이전에 사또가 썼던 문서를 내보이며 말했다.

[너희 아버님께서 이것을 써서 내가 주셨으니, 이제부터 너의 생사는 오직 내 손에 달려 있다. 너는 양반집 아들이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 채 온갖 나쁜 짓만 골라서 하니 살아서 어디다 쓰겠느냐? 이대로 가다가는 너희 집안까지 말아먹고 말테니 잔말 말고 내가 주는 벌을 받아라.]

큰 스님은 말을 마치고 송곳 끝을 불에 달구어 시뻘겋게 만든 후 그것으로 아이의 넓적다리를 찔렀다.



아이는 너무 아파 기절했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큰 스님이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송곳으로 다시 찌르려 하자, 아이는 애걸하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큰 스님 말씀만 듣겠습니다. 제발 다시 찌르지 마세요.]



큰 스님이 송곳을 손에 든 채 아이를 꾸짖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묶인 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아이를 책상 앞으로 데려와 천자문을 가르치고, 그 다음날부터 일과를 정해서 조금도 쉬지 못하게 하고 공부만 시켰다.

아이는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데다 원래 머리가 좋았던지라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달았고, 열을 배우면 백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4, 50일만에 천자문과 역사책을 모두 떼서 훤히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공부를 쉬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으며 성실히 하니 1년여 만에 학문이 크게 진전되었고, 3년만에 공부에 도가 텄다.

아이는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내가 양반이면서도 산 속의 중들에게 이런 치욕을 당한 것은 모두 공부를 안 해서이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면 꼭 이 중놈들을 때려 죽여서 이 한을 씻고 말테다.]

아이는 오직 이 생각을 하며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기를 쓰고 공부를 했던 것이다.

큰 스님은 아이에게 과거 공부까지 시킨 후, 아이를 불러 말했다.



[이제 그대의 글은 과거에 합격할 만하오. 과거에 합격하여 큰 벼슬을 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고, 남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소승은 이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겠소.]

그 말을 마친 뒤 큰 스님은 아이를 돌려보내고 떠났다.

집에 돌아간 아이는 그제야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한 뒤 서울로 올라가 과거 시험에 도전한지 3년만에 드디어 과거에 합격했다.



그리고 벼슬 자리에 오른지 수십년만에 드디어 경상도 관찰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경상도 관찰사가 되자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드디어 해인사의 중놈들을 때려죽여서 젊은 날의 한을 갚으리라.]



관찰사는 경기도의 각 읍을 돌아다니며 처벌 도구를 잘 챙기게 했다.

그리고 곤장을 만들고, 곤장을 잘 치는 사람 3, 4명을 골라서 자신을 따라오게 했다.

절에 도착하면 바로 중들을 때려 죽이려는 생각에서였다.



관찰사의 행차가 홍류동에 이르자, 큰 스님이 스님들을 데리고 길가에 나와 관찰사를 맞이했다.

관찰사는 큰 스님 일행을 보더니 곧 가마에서 내려 큰 스님의 손을 잡고 정성스레 인사 했다.

큰 스님이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다행히 죽지 않고 사또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말을 마치고 함께 절에 들어가는데 큰 스님이 말했다.

[소승이 자는 방은 바로 사또께서 지난날 공부하시던 그 방입니다. 오늘 밤은 방을 옮겨 소승과 같이 나란히 누워 주무시지요.]



관찰사가 흔쾌히 허락하여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큰 스님이 물었다.

[사또께서는 어려서 제게 공부를 배울 때 소승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과거에 급제해서 관찰사가 되시고도 그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실은 절에 올 때만 해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때려 죽이지 않으시고 가마에서 내려 인사를 하신 것입니까?]

[원한을 한시도 마음 속에서 잊은 적이 없었는데, 스님의 얼굴을 뵙자 마자 원한이 눈 녹 듯 사라지고 기쁜 마음만 남았습니다.]

[소승이 예상한 대로 입니다. 사또는 높은 자리까지 오르실 분이십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사또께서 평양 감사가 되실 터인데, 그러면 소승이 스님 한 분을 보내겠습니다. 사또께서는 잊지 말고 반드시 예우해 주십시오. 마치 소승을 본 것처럼 생각하고 이렇게 한 방에서 같이 주무십시오. 꼭 이 말을 잊지 말고 지키셔야 합니다.]



관찰사가 알겠다고 하니 큰 스님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은 소승이 사또를 위해 평생 운수를 연도 별로 적어둔 것입니다. 언제 돌아가실 지, 몇 품의 지위까지 오를지 환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금방 말씀드렸던 평양 감사가 된 후의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관찰사는 감사한 마음에 모두 기억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관찰사는 다음 날 쌀, 베, 돈, 나무 등을 절에 한껏 시주하고 절을 떠났다.

그 후 몇 년이 지날 무렵, 과연 관찰사는 평앙 감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지기가 아뢰었다.



[경상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왠 스님이 와서 감사님을 뵙겠다고 합니다.]

감사는 문득 큰 스님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그를 즉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까이 오게 한 후 큰 스님의 안부를 물었다.



상을 같이 두고 저녁밥을 먹은 뒤, 밤이 되자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방 구들이 너무 뜨거워서, 감사는 스님과 자리를 바꿔 눕게 되었다.

잠에 빠져 정신이 몽롱한데, 갑자기 비린 악취가 났다.



놀란 감사가 손으로 스님을 더듬어 보니, 스님이 있던 곳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바로 아랫 사람을 불러 촛불을 들고 살펴보니 스님의 배가 칼에 찔려 내장이 모두 튀어 나와 있고, 피가 흘러 방바닥이 온통 피 투성이였다.

감사는 깜짝 놀라 급히 시체를 수습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철저히 조사해보니, 그것은 감사가 아끼던 기생 때문이었다.

그 기생은 어느 관노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 때문에 관노가 감사에게 원한을 품고 자는 사이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관노는 당연히 감사가 아랫목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죽였으나, 거기 있던 것은 스님이었다.



감사는 관노와 기생을 법으로 엄히 다스리고, 스님의 시체를 수습해서 해인사로 보냈다.

이것은 큰 스님이 이러한 횡액을 미리 알아서 일부러 스님을 보내 감사가 받을 횡액을 대신 받게 했던 것이었다.

그 후 감사의 인생은 모두 큰 스님이 주셨던 종이에 적힌 것과 똑같았다고 한다.

 
원문 및 번역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3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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