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ground

경상도

320x100



퇴계 이황 선생의 외할아버지는 경상도 상주에 살았다.


집이 부유하고 그의 사람됨이 후덕하여 조화를 이루었으니, 고을에서는 그를 영남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이 몹시 불고 눈이 많이 내린 엄동설한이었다.




퇴계 선생의 외할아버지 댁 문 밖에서 한 아병을 앓는 여자가 남루한 옷을 입고 하룻밤 재워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녀의 모습과 행동거지가 어찌나 흉악하고 추하던지, 사람들은 모두 코를 막고 얼굴을 돌렸다.


온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내저어 그녀를 몰아 쫓아내고, 문 밖에서 한 발자국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퇴계 선생의 외할아버지가 말하였다.


[그 여자를 쫓아내지 말거라. 저 여자가 비록 안 좋은 병을 앓고 있다지만, 날이 저문데다 이런 엄동설한에 어찌 사람을 내쫓는단말이냐? 만약 우리 집에서 이 사람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느 집에서 받아주겠느냐.]


밤이 깊어지자 그 여자는 추워 죽겠다고 울부짖었다.




노인은 차마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그녀를 자신의 방 안으로 들여 윗목에서 자게 하였다.


그 여자는 노인이 잠든 틈을 타 조금씩 아랫목으로 내려오더니, 발을 노인의 이불 속에 넣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노인은 잠에서 깨어나 양손으로 조심스레 그 여자의 발을 들어 이불 밖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서너차례 이어졌다.




날이 밝자 그 여자는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가버렸다 며칠 뒤 다시 왔다.


하지만 노인은 조금도 안 좋은 기색은 내비치지 않고 여전히 여자를 자신의 방에서 재웠으니, 온 집안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몹시 걱정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여자가 다시 찾아왔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전에 문둥병 걸리고 남루한 차름새는 온데간데 없었다.




노인 역시 놀라서 물었더니 여자가 대답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천상의 선녀입니다. 잠시 선생님 댁에 들러 선생님의 마음가짐을 시험해 보았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노인이 놀라서 선녀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니 여자가 말했다.




[저번에 며칠 밤을 이불 속에서 손과 발이 마주쳤는데 어찌하여 제 얼굴도 제대로 못 보십니까? 저는 이미 선생님과 전생에 인연이 있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노인과 선녀는 함께 동침하였다.


이렇게 열흘 정도를 지내자 온 집안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고, 혹자는 여자가 도깨비가 아니냐는 말을 했으나 노인은 동요되지 않고 한결 같이 성심껏 대하였다.




그러다 하루는 여자가 말했다.


[오늘 나는 선생님과 헤어져야만 합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인간 세계에 귀양 온 기한이 다 차기라도 했소? 아니면 나의 정성과 예의가 처음만 못해서요?]


여자가 말했다.


[모두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정을 말씀 드릴 수는 없으니 한 가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반드시 이를 지켜주셔야만 합니다.]




다짐을 받은 뒤 여자가 말했다.


[안뜰에 산을 등지고 집을 한 칸 지어 정결하게 도배한 뒤, 굳게 자물쇠를 채워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선생님과 같은 성씨의 임산부가 아이를 낳으려 할 때 그 자물쇠를 열고 산실로 사용하게 하십시오.]


여자는 말을 마치고 문을 나섰는데,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노인은 이 일을 기묘하게 여기고 그녀의 말을 따라 안뜰에 산을 등지고 집을 한 칸 지었다.


비록 급하거나 절박한 일이 있어도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자손 중 임신하여 해산에 임박한 사람이 있으면 그 안에 들어가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어김없이 몹시 고통스러워 하며 아이를 낳지 못했고, 다른 방으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를 낳았다.




노인은 여자의 말이 맞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럼에도 그 집을 마음대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노인의 사위는 경상도 안동 사람이었다.


노인의 딸이 처음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을 때쯤, 사위는 아내를 데리고 처가로 왔다.




노인은 그들을 맞아 집 안에서 거처하게 하였는데, 아이를 낳을 때가 되자 갑자기 딸의 몸에 병이 생겨 앓아 누웠다.


온갖 약을 써서 치료하려 하였으나 효과가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온 집안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런데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제가 어릴 때 들었는데, 선녀가 우리 집에 내려왔을 때 산실을 하나 지어 놓으라고 했다면서요? 지금 제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됐지만 병에 걸려 살 도리가 안 보입니다. 하지만 혹시 그 방에 들어가면 살아날 길이 있는 건 아닐까요? 저를 그 방으로 옮겨주세요, 아버지.]


노인이 곰곰히 생각해보니 선녀가 옛날에 말했던 [선생님과 같은 성씨의 임산부]란 바로 자기 딸이었다.


비록 며느리와 손자 며느리일지라도 그들은 모두 자신과는 성이 달랐기 때문에 그 산실에 들어가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고 고통에만 시달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은 비록 다른 집에 시집을 갔더라도 본래 성이 자신과 같으니, 분명 효험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제야 노인은 선녀의 말이 바로 딸을 가리켰던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딸을 마당의 산실로 옮기니, 들어간지 며칠 만에 몸의 병이 나았다.




또 순산하여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인 것이다.


퇴계 선생은 동양의 위대한 유학자가 되어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위대한 현인이 태어날 때는 이처럼 평범한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73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
320x100


문경새재 산마루에 온갖 잡신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그 효험이 꽤 영험했다.

산 주변 마을을 다스리는 이들이 이 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가마에서 내려 절을 한 뒤, 돈을 모아 신들에게 굿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나중에 이상한 재앙을 맞곤 했다.



그러던 와중 한 관찰사가 새재 너머의 마을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성품이 강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무슨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가 새재를 넘다 사당 앞에 도착하니, 아전들이 몰려들어 예전 사또들의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관찰사는 그런 요사스러운 짓은 말도 안 된다고 물리친 뒤 말을 타고 한달음에 그 곳을 지나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갑자기 바람이 세게 휘몰아치더니, 난데없이 비가 관찰사가 탄 가마에만 집중적으로 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주변 사람들은 귀신의 소행이라며 몹시 두려워했다.



관찰사는 마부에게 명령해 사당에 불을 지르라고 시키고, 명령을 거르스는 자들을 죽였다.

아랫 사람들이 마지못해 그 명령을 따라 사당을 태우니, 곧 사당은 싸늘한 재가 되었다.

관찰사는 그대로 새재를 내려와 문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관찰사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새재의 신이오. 새재 사당에서 제삿밥을 먹은지 100년이 넘었소. 그런데 당신은 예도 올리지 않은데다 내 집까지 태워버렸으니, 나는 당신의 맏아들을 죽여버릴 것이오.]

관찰사가 노인을 꾸짖으며 말했다.



[요망한 귀신이 사당에 눌러 앉아 사람을 괴롭히니, 내가 왕명을 받들어 요사한 것을 제거했다. 이것은 내 직분인데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해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느냐!]

귀신은 화를 내며 가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관찰사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큰 아드님께서 여행의 피곤함 때문에 병이 드셨는데, 갑자기 위독한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관찰사가 가서 아들을 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관찰사는 곡을 하고 아들의 염을 한 뒤, 곧 관청에 들어섰다.



그 날 밤 귀신이 또 관찰사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내 사당을 불태운 것을 회개하고 새로 사당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당신의 둘째 아들이 죽을 것이오.]

관찰사는 여전히 의연한 모습을 지키며 지난 번처럼 귀신을 꾸짖어 물리쳤다.



아침이 되자 관찰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집안 사람이 와서 둘째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고했다.

관찰사는 매우 슬퍼하며 아들의 장례를 치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사의 꿈에 귀신이 또 나타나 말했다.



[첫째를 죽이고 또 둘째를 죽였으니 당신의 자식은 점점 줄어갈 것이오. 이번에는 셋째 아들이 죽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불쌍해서 내가 기회를 주려하니, 빨리 내 사당을 지어주면 셋째 아들의 목숨은 살려주겠소.]

하지만 관찰사는 이 말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귀신은 점점 화를 내며 온갖 협박을 하고, 끝내 좋은 말로 달래기까지 했다.



관찰사는 화가 나서 칼을 빼어들고 귀신을 베려고 했다.

그러자 귀신은 뒤로 물러나더니 뜰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했다.

[저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오직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어르신의 두 아드님은 수명이 다하여 돌아가실 예정이었기에 제가 그것을 알고 어르신을 협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셋째 아드님은 그 지위가 높이 오르고 오랫동안 건강하실테니 제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르신께 온갖 공갈 협박을 한 것이었지만, 어르신께서는 끝내 올바름을 지키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르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관찰사가 딱히 여기며 말했다.

[네가 오랫동안 황폐한 사당에 살면서 지냈는데, 내가 어찌 네 집을 마음대로 부수고 싶었겠느냐? 네가 너에게 화가 났던 것은 요망한 술수로 사람들을 희롱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네가 그것을 자백하니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구나. 내가 새로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지만 만약 네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면 당장 부숴버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귀신은 감동하여 흐느끼며 절하고 돌아갔다.



관찰사는 다시 사당을 세우고 그가 꿈에서 본 귀신의 모습을 흙으로 빚어 세워 두었다.

그 이후에 문경새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은 귀신에 대한 근심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관찰사의 셋째 아들은 오랫동안 살면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 갔으니, 귀신의 말이 과연 맞았다.



Illust by 엥비(http://blog.naver.com/junknb)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
320x100


인조 병자년때 초봄에 초시를 치루고, 복시는 나라에 일이 있어서 다음해 봄으로 미뤄졌다.

이 때 초시에 합격한 유생 네 명이 북한산에 모여 같이 공부 모임을 만들고 공부했다.

그런데 하루는 웬 스님이 와서 선비들에게 말했다.



[이 곳에 신통하신 큰스님이 계시니 선비님들은 과거 문제와 향후 운세에 관해 여쭤보시지요.]

네 선비가 같이 모여 큰스님에게 물었더니 큰스님이 말했다.

[소승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관상에 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한 분씩 천천히 살펴보고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네 선비가 그 말에 따라서 한 명씩 큰스님의 방에 들어가서 관상을 보고 나왔다.

서로 모여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물어보자 한 선비가 말했다.

[나는 자손이 천명이 넘을거래!]



다른 선비가 말했다.

[나는 도적들의 장수가 될거래!]

또 다른 한 선비가 말했다.



[나는 신선이 될거래!]

마지막 선비가 말했다.

[나는 과거에 합격해서 반드시 너희 셋을 만날거래!]



네 선비는 각자의 점괘에 한바탕 웃고 떠들며 정신 나간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 없이 그 해 말에 청나라 오랑캐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강화도를 함몰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네 선비는 각자 달아나서 목숨만 겨우 건졌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마저 끊겼다.



그 중 한 선비는 정말로 과거에 급제해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봄에 경상도를 순찰하면서 안동에 도착했는데, 안동에서 떠나려는 와중에 문 밖에 한 손님이 소를 타고 와서 명함을 내밀고 만나기를 청했다.

그렇지만 관찰사는 명함을 받아봐도 그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들어오게 해서 만나보았더니, 평소 알지 못하던 사람인데 다 떨어진 도포에 망가진 삿갓을 쓴 가난한 선비였다.

인사를 나눈 뒤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그는 바로 지난날 북한산에서 함께 공부했던 선비 중 한 명이었다.

큰 전쟁이 있은 후 각자 생사도 알지 못하고 살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관찰사가 사는 곳을 물었더니 순찰 경로 근처였다.

선비가 말했다.

[영감의 행차가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깝습니다. 옛 정을 생각하여 부디 와 주셔서 가난한 집이나마 빛내주시지 않겠습니까?]



관찰사는 관복을 벗고 평범한 옷을 입은 다음 혼자 말을 타고 선비를 따라갔다.

한 골짜기에 도착하자 높고 큰 누각이 온 계곡에 가득했는데, 마치 궁궐 같았다.

자리에 앉고 보니 소를 타고 왔던 선비는 장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관찰사가 놀라서 물었다.

[자네의 모습을 보니 자네는 도적 수령이 아닌가?]

[그렇소.]



[어쩌다 이렇게 된거요?]

[북한산에서 관상을 봐 주었던 스님의 말을 기억하시지요? 당시에는 비웃었는데 세상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더군요. 전쟁통에 가족들은 모두 죽고 나만 혼자 살아남아 도망치다 이 산에 도착했습니다. 나말고도 피난하여 온 사람들이 산 속에 모여 살다가, 내가 공부를 좀 했다고 나를 두목으로 뽑았습니다. 나는 약탈해 온 물건들을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 인심을 얻었지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여기 남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님이 말했던 우리 관상은 역시 정해져 있던 운명이었나 봅니다. 나는 이 곳에서 부귀를 누리고 있으니 당신이 조금도 부럽지 않소. 마침 그대가 이 곳 근처를 지나간다기에 내가 일부러 불러서 이 곳을 보게 한 것이오. 당신이 비록 관찰사라도 병사는 아마 나보다 적을 것입니다. 돌아가서 나를 잡으려는 생각은 하지 말고, 나를 보았다는 이야기도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닥 좋은 일은 없을게요.]

관찰사는 무서워서 [알았네, 알았네.] 라고 말하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그 후 관찰사는 경상북도를 순찰하다 어느 군에 도착하였다.

일을 마치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어느 선비가 만나기를 청해왔다.

그를 만나보니 역시 옛날 북한산에서 같이 공부하던 선비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선비가 말했다.

[영감께서 이 곳까지 오셨는데, 제가 사는 곳이 이 근처입니다. 부탁컨대 잠시 들렀다 가시지요.]

관찰사는 지난 번에 당한 것을 생각하고 이번에는 관찰사답게 큰 행렬을 거느리고 갔다.



그 집에 도착하니 집이 매우 컸고, 주변에 집이 거의 수백개가 넘게 있어서 마을 하나 정도 크기였다.

그 선비는 많은 하인을 데리고 나와서 관찰사를 맞이했다.

그 예의와 대접이 왠만한 도시에서 받는 것보다 더 대단할 정도였다.



관찰사가 놀라서 물었다.

[시골에서 살면서 어떻게 이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있으며, 이렇게나 부유하게 살고 있단 말이오?]

선비가 말했다.



[당신도 옛날 북한산에서 스님이 우리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요? 병자년 전쟁 이후 집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이 곳 영남에 흘러 들어왔소. 마친 한 산골에 들어갔더니 피난 온 여자들이 모여 살고 있더군요. 남자인 내가 그 곳에 도착하니 여자들이 크게 기뻐하며 다들 나와 함께 살자고 하더군요. 여자들은 밭을 갈고 베를 짜서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떠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같이 여기서 살아서 이미 여러해가 지났습니다. 내가 낳은 남자아이가 거의 백 명 가까이 되는데, 그 아이들이 각각 결혼해서 또 아이들을 낳았으니 늘그막에 자식들, 손자들 재롱에 편히 살고 있소. 이렇게 행복하니 나는 관찰사 영감이 그닥 부럽지도 않구려.]

이야기를 다 들은 관찰사는 망연자실했다.

그 후 또 순찰을 하다가 하동 경계에 도착해서 지리산 자락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관찰사의 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찰사가 의아해하면서 가마에서 머리를 내밀었더니, 그 소리는 산 위에서 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 절벽 위에 앉아 관찰사를 부르고 있었다.

관찰사가 행렬을 멈추고 누구냐고 물으니 산 위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소? 나는 아무개요.]

관찰사가 생각해보니 그 역시 옛날 북한산에서 같이 공부했던 선비였다.

관찰사가 손을 들어 그를 부르며 말했다.



[이리로 내려 오시오.]

[그대가 올라오시지요.]

잠시 후 푸른 옷을 입은 동자 두 명이 내려와서 관찰사의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산을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매우 험한 산길인데다 마치 맨땅을 걷는 듯 편안했다.

옛 친구와 만난 관찰사는 악수를 나눴다.

친구가 말했다.



[당신은 북한산 스님이 우리들의 관상을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그 때 나에게 신선이 될 것이라 말해서 나는 비웃고 넘어갔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분이 정말 신통하신 분입니다. 지난번 전쟁 때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나는 산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굶주리고 피곤해도 먹을 것이 없었지요. 그런데 물가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풀이 통통하고 색깔이 먹음직스럽더군요. 먹어보니 달고 씁쓸해서 맛있는지라 모두 캐 먹었다오. 그 이후로 나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입지 않아도 따뜻하며, 산길을 가다 거기서 그냥 자도 아프지 않고 한 번 걸어서 천리를 갈 수 있더이다. 내 몸이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며 걱정이 없고, 이익을 따지지 않으니 관찰사가 사는 것보다 내가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소? 내가 먹은 것은 장생초였으니 관찰사의 식사보다 결코 꿀리지 않을 것이오.]

신선은 말을 마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위로 던져 학의 등에 올라 탔다.

시동 두 사람도 좌우에서 함께 서서 공중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관찰사는 망연자실해서 자신이 관찰사라는 것도 잊어 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이는 모두 하늘이 정한 것이다.

또한 지나가던 스님의 말이 모두 맞아 떨어졌으니 그 스님 역시 이인이로다!



원문 및 번역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18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
320x100


합천 사또 아무개는 나이가 60이 되도록 아들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외아들을 지나치게 아끼고 글조차 가르치지 않아 아이가 13살이 되었는데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수준이었다.

그러던 도중 전부터 사또와 친하게 지내던 해인사의 큰 스님 한 분이 관청에 찾아와 수령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가 이미 다 자랐는데 아직도 글조차 못 읽으니 나중에 크면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글을 가르치려고 해도 워낙 건방져서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매를 들기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후회가 막심합니다.]

[사대부 집안의 자제는 어릴 적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세상에서 버림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저 오냐오냐 하면서 공부조차 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옳은 것입니까? 아드님의 사람됨을 보니 어떤 일이든 하기만 하면 할 수 있을 터인데 이처럼 포기하시다니 안 될 일입니다. 소승이 가르쳐 볼테니 사또께서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스님의 뜻을 몰라 부탁할 엄두를 못 냈지, 전부터 원하던 일입니다. 스님께서 만약 그 아이를 깨우쳐 지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면 그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스님의 마음대로 하시고, 무조건 엄하게 공부를 시키십시오." 라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은 뒤 소승에게 주십시오. 또 일단 절로 데려간 후에는 결코 집에서 연락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옷과 먹을 것은 소승이 마련할테니 만약 아이에게 보낼 것이 있다면 제 제자들이 오갈 때 저에게 직접 보내서 제 허락을 받도록 하십시오. 알아 들으시겠습니까?]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사또는 즉시 스님이 말한대로 문서를 만들어 주고, 그 날로 아이를 절에 보낸 뒤 연락을 끊었다.

아이는 버르장머리가 없어 절에 간 후에도 이리저리 쏘아다니며 늙은 중들을 멸시하고, 욕을 하며 뺨까지 때리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하지만 큰 스님은 이를 보면서도 마치 못 본 것처럼 아이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4, 5일이 지난 어느 아침, 큰 스님은 고깔과 도포를 차려 입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았다.

그 앞에 제자 3, 40명이 경전을 펴고 앉아 있는데 예절과 몸가짐이 가지런하고 엄숙했다.

큰 스님이 스님 한 분에게 아이를 잡아오라 시켰더니, 아이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다.



[한갓 너희 같은 중놈들이 어떻게 양반을 모욕하는거냐! 내가 집에 돌아가면 아버님께 아뢰어 너희들을 때려죽일테다! 원수 대머리 중놈들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일테다!]

아이는 계속 욕을 하며 한사코 오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큰 스님은 아이를 꾸짖으며 여러 스님들에게 아이를 묶으라고 시켰다.



스님들이 아이를 묶어서 큰 스님 앞에 데려다 놓으니, 큰 스님이 이전에 사또가 썼던 문서를 내보이며 말했다.

[너희 아버님께서 이것을 써서 내가 주셨으니, 이제부터 너의 생사는 오직 내 손에 달려 있다. 너는 양반집 아들이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 채 온갖 나쁜 짓만 골라서 하니 살아서 어디다 쓰겠느냐? 이대로 가다가는 너희 집안까지 말아먹고 말테니 잔말 말고 내가 주는 벌을 받아라.]

큰 스님은 말을 마치고 송곳 끝을 불에 달구어 시뻘겋게 만든 후 그것으로 아이의 넓적다리를 찔렀다.



아이는 너무 아파 기절했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큰 스님이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송곳으로 다시 찌르려 하자, 아이는 애걸하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큰 스님 말씀만 듣겠습니다. 제발 다시 찌르지 마세요.]



큰 스님이 송곳을 손에 든 채 아이를 꾸짖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묶인 몸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아이를 책상 앞으로 데려와 천자문을 가르치고, 그 다음날부터 일과를 정해서 조금도 쉬지 못하게 하고 공부만 시켰다.

아이는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데다 원래 머리가 좋았던지라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달았고, 열을 배우면 백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4, 50일만에 천자문과 역사책을 모두 떼서 훤히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공부를 쉬지 않고, 게으름 피우지 않으며 성실히 하니 1년여 만에 학문이 크게 진전되었고, 3년만에 공부에 도가 텄다.

아이는 매번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내가 양반이면서도 산 속의 중들에게 이런 치욕을 당한 것은 모두 공부를 안 해서이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면 꼭 이 중놈들을 때려 죽여서 이 한을 씻고 말테다.]

아이는 오직 이 생각을 하며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기를 쓰고 공부를 했던 것이다.

큰 스님은 아이에게 과거 공부까지 시킨 후, 아이를 불러 말했다.



[이제 그대의 글은 과거에 합격할 만하오. 과거에 합격하여 큰 벼슬을 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고, 남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소승은 이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겠소.]

그 말을 마친 뒤 큰 스님은 아이를 돌려보내고 떠났다.

집에 돌아간 아이는 그제야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한 뒤 서울로 올라가 과거 시험에 도전한지 3년만에 드디어 과거에 합격했다.



그리고 벼슬 자리에 오른지 수십년만에 드디어 경상도 관찰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경상도 관찰사가 되자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드디어 해인사의 중놈들을 때려죽여서 젊은 날의 한을 갚으리라.]



관찰사는 경기도의 각 읍을 돌아다니며 처벌 도구를 잘 챙기게 했다.

그리고 곤장을 만들고, 곤장을 잘 치는 사람 3, 4명을 골라서 자신을 따라오게 했다.

절에 도착하면 바로 중들을 때려 죽이려는 생각에서였다.



관찰사의 행차가 홍류동에 이르자, 큰 스님이 스님들을 데리고 길가에 나와 관찰사를 맞이했다.

관찰사는 큰 스님 일행을 보더니 곧 가마에서 내려 큰 스님의 손을 잡고 정성스레 인사 했다.

큰 스님이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늙은이가 다행히 죽지 않고 사또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말을 마치고 함께 절에 들어가는데 큰 스님이 말했다.

[소승이 자는 방은 바로 사또께서 지난날 공부하시던 그 방입니다. 오늘 밤은 방을 옮겨 소승과 같이 나란히 누워 주무시지요.]



관찰사가 흔쾌히 허락하여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큰 스님이 물었다.

[사또께서는 어려서 제게 공부를 배울 때 소승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과거에 급제해서 관찰사가 되시고도 그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실은 절에 올 때만 해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때려 죽이지 않으시고 가마에서 내려 인사를 하신 것입니까?]

[원한을 한시도 마음 속에서 잊은 적이 없었는데, 스님의 얼굴을 뵙자 마자 원한이 눈 녹 듯 사라지고 기쁜 마음만 남았습니다.]

[소승이 예상한 대로 입니다. 사또는 높은 자리까지 오르실 분이십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사또께서 평양 감사가 되실 터인데, 그러면 소승이 스님 한 분을 보내겠습니다. 사또께서는 잊지 말고 반드시 예우해 주십시오. 마치 소승을 본 것처럼 생각하고 이렇게 한 방에서 같이 주무십시오. 꼭 이 말을 잊지 말고 지키셔야 합니다.]



관찰사가 알겠다고 하니 큰 스님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은 소승이 사또를 위해 평생 운수를 연도 별로 적어둔 것입니다. 언제 돌아가실 지, 몇 품의 지위까지 오를지 환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금방 말씀드렸던 평양 감사가 된 후의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관찰사는 감사한 마음에 모두 기억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관찰사는 다음 날 쌀, 베, 돈, 나무 등을 절에 한껏 시주하고 절을 떠났다.

그 후 몇 년이 지날 무렵, 과연 관찰사는 평앙 감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지기가 아뢰었다.



[경상도 합천군 해인사에서 왠 스님이 와서 감사님을 뵙겠다고 합니다.]

감사는 문득 큰 스님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그를 즉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까이 오게 한 후 큰 스님의 안부를 물었다.



상을 같이 두고 저녁밥을 먹은 뒤, 밤이 되자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방 구들이 너무 뜨거워서, 감사는 스님과 자리를 바꿔 눕게 되었다.

잠에 빠져 정신이 몽롱한데, 갑자기 비린 악취가 났다.



놀란 감사가 손으로 스님을 더듬어 보니, 스님이 있던 곳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바로 아랫 사람을 불러 촛불을 들고 살펴보니 스님의 배가 칼에 찔려 내장이 모두 튀어 나와 있고, 피가 흘러 방바닥이 온통 피 투성이였다.

감사는 깜짝 놀라 급히 시체를 수습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철저히 조사해보니, 그것은 감사가 아끼던 기생 때문이었다.

그 기생은 어느 관노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 때문에 관노가 감사에게 원한을 품고 자는 사이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관노는 당연히 감사가 아랫목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죽였으나, 거기 있던 것은 스님이었다.



감사는 관노와 기생을 법으로 엄히 다스리고, 스님의 시체를 수습해서 해인사로 보냈다.

이것은 큰 스님이 이러한 횡액을 미리 알아서 일부러 스님을 보내 감사가 받을 횡액을 대신 받게 했던 것이었다.

그 후 감사의 인생은 모두 큰 스님이 주셨던 종이에 적힌 것과 똑같았다고 한다.

 
원문 및 번역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3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