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ground

정조

320x100



피재길은 의원집 아들이다.


아버지는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이었는데, 온갖 재료를 섞어 용한 약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피재길은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보고 들었던 것으로 여러 방법을 피재길에게 가르쳐 주었다.


피재길은 의서를 읽은 적이 없고 다만 약재를 모아 달여서 고약 만드는 방법만 알 뿐이었다.


아는 것이 없다보니 모든 부스럼과 상처에 이 약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피재길이 마을에서 의술을 행하기는 해도 감히 의사 축에 끼지는 못했다.


사대부들이 피재길의 고약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 약을 써 보니, 효험이 자뭇 훌륭했다.


1793년 여름, 정조 대왕께서 머리에 부스럼이 나셨다.




온갖 침과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오랫동안 효과를 보지 못하고 끝내는 얼굴과 목의 여러 부분까지 점점 부스럼이 퍼지게 되었다.


그 때는 한여름이라 왕의 심기가 편치 못하였다.


모든 궁중의 의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조정의 신하들은 날마다 줄을 지어 왕의 처소에 문안하였다.




그런데 신하 중 피재길의 약의 효험을 본 이가 있었기에 임금께 그 사실을 알렸다.


임금께서는 분부를 내려 피재길을 대궐에 불러 들여 물으시니, 피재길은 천한 사람인지라 임금님 앞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며 땀을 흘리느라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를 보며 좌우의 여러 의원들은 모두 남몰래 비웃었다.




임금께서 피재길에게 앞으로 다가와 진찰하여 보라고 하시며 말씀하셨다.


[두려워 할 것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술을 모두 내가 발휘해 보거라.]


피재길이 대답했다.




[소인에게 다른 재주는 없으나, 딱 한가지 시험해 볼 처방이 있나이다.]


임금께서 피재길에게 물러나서 약을 지어오라고 명하셨다.


피재길은 웅담을 여러 약재와 섞은 뒤 볶아서 고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임금님의 환부에 붙여 드렸다.


임금께서는 며칠이면 병이 치유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피재길이 대답했다.




[하루가 지나면 통증이 잦아 들 것이고, 사흘이 지나면 부스럼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그의 말대로 되었다.


임금께서는 글을 지어 의원들에게 널리 알리셨다.




[고약을 붙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증이 씻은 듯 없어졌다. 놀랍게 요즘 세상에도 이런 숨겨진 기예와 비방을 가진 의원이 있었으니, 가히 명의라 부를 만하고, 이 약은 신이 내린 약이라 할 만 하구나! 피재길의 노고를 어떻게 치하해야 할 지 의논해 보거라.]


의원들은 우선 피재길을 내침의로 임명한 뒤, 6품복을 내리고 정직을 제수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시고 곧 피재길을 나주의 감목관으로 임명하셨다.




이에 조정의 모든 의원들이 다들 놀라 탄복하였고, 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히 서서 피재길의 의술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피재길의 명성이 나라 안에 가득 퍼지게 되었으며, 웅담 고약은 마침내 천금의 비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59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
320x100


정조 대왕 때 1782년에서 1783년 사이에 영남 안찰사 김아무개가 가을에 순시를 하다가 함양에 도착해 위성관에 머물렀다.

안찰사는 심부름꾼들과 기생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방에서 혼자 잠을 잤다.

한밤 중 인적이 고요한데, 침실의 문이 슬쩍 열렸다가 닫히더니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김공이 잠에서 깨어나 물었다.

[너는 누구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저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깊은 밤에 다른 사람 하나 없는데 어찌 이렇게 수상하게 움직이는가? 혹시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간절히 아뢸 일이 있나이다.]

김공이 일어나서 사람을 불러 불을 켜려고 하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만약 제 모습을 보신다면 안찰사께서 틀림없이 놀라고 두려워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라도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김공이 말했다.

[그대는 얼마나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불도 켜지 못하게 하는가?]




[제 온 몸이 털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가면 갈 수록 그 사람의 말이 괴이하였기에 김공이 다시 물었다.

[그대가 과연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온 몸에 털이 나게 되었단 말인가?]



[저는 원래 상주에 살던 우씨 성의 주서입니다. 중종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벼슬을 얻은 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제자가 되어 여러해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기묘사화 때 목숨을 잃으시고 여러 유생들이 잡혀갔지요. 저는 한양에서 도망쳤는데 만약 고향집으로 간다면 바로 잡혀들어갈 것 같아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여러 날을 굶주리고 피곤한데다 난생 처음 골짜기에 들어갔기에 먹는 것마저 힘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물가변에 혹시 풀이라도 있으면 뽑아 먹었고, 산과일이 있으면 따 먹었습니다. 먹을 때는 배가 좀 부르는 것 같더니, 똥을 눌 때면 모두 설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6개월 정도를 지냈더니 점차 온 몸에 털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길이가 몇 마디가 될 정도였습니다. 걸음걸이도 빨라져 마치 나는 것 같아, 천길 절벽도 뛰어넘을 수 있어 무슨 원숭이 같이 되었지요. 나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면 괴물로 몰려 죽을 것 같아 산에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목동을 보더라도 몸을 숨겼지요.]



그 사람은 목이 메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깊은 계곡, 겹겹이 쌓인 바위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살며 혹시 달이 밝게 뜨면, 혼자서 지난날 배웠던 경서를 암송하곤 했습니다. 제 신세를 생각하니 너무나도 한심하여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향의 부모와 처자가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을 알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사나운 호랑이나 독사도 무섭지 않고, 단지 사냥꾼이 무서워 낮에는 숨어다니고 밤에만 나다녔습니다. 이렇게 괴물의 꼴이 되어버렸지만 마음 속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언제나 세상 사람을 한 번 만나, 세상일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괴상한 모습으로는 차마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어르신의 행차가 이 곳에 오신다는 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뵙는 것일 뿐입니다. 저에게 다만 조광조 선생의 자손이 몇이나 되는지, 선생이 돌아가신 뒤 그 명예가 회복되고 결백함이 밝혀졌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합니다.]

김공이 말했다.

[정암 선생은 인조 때 명예가 회복되어 종묘에 그 신위가 배향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액서원도 여러 곳에 있고 그 댁 자손들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조정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니 걱정 마십시오.]



김공은 내친김에 기묘사화 당시의 일에 관해 물었다.

그 사람은 하나라도 빠트리거나 잊어버린 것 없이 모든 사실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또 처음 도망칠 때 그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서른 다섯이었습니다.]

[그럼 기묘년으로부터 지금까지 300여년이 흘렀는데, 그렇다면 그대의 나이는 거의 400살에 가깝겠구려!]

[저는 그 동안 깊은 산에서 세월을 보내서 나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그대는 지리산에 산다고 하셨지요. 그대가 사는 굴과 이 곳의 거리는 상당히 멀텐데 어찌 그렇게 빠르게 오신 것이오?]

[기운이 날 때는 아무리 험한 절벽이라도 원숭이가 뛰어 놀듯 넘어다닙니다. 한순간에 몇십 리를 달릴 수 있지요.]



김공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라며 음식을 대접하려 하자 그가 말했다.

[음식은 필요 없습니다. 굳이 주시려거든 과일이나 좀 주시지요.]

하지만 하필 방 안에 과일이 없었다.



밤중에 과일을 구해오라고 하기도 힘들었기에 김공이 말했다.

[지금 하필이면 과일이 없구려! 내일 밤 그대가 다시 온다면 그 때 과일을 준비해 놓겠소. 내일 오실 수 있겠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즉시 방을 나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공은 그가 다시 온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하루 더 위성관에서 머물렀다.

그 날 아침과 점심 식사에 나온 과일을 모두 챙겨놓고 그 사람을 기다렸다.



과연 밤이 깊어지자 그가 다시 왔다.

김공이 일어나 그를 맞이하고, 과일을 내어주니 그가 크게 기뻐하며 과일을 모두 다 먹었다.

[덕분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지리산 안에 과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대는 먹을 걱정은 없는 것이오?]

[매년 가을 낙엽이 질 때면 밤중에 주워 모아둔 과일이 서너 무더기는 되는데, 그것으로 먹고 삽니다. 처음 풀만 먹을 때의 괴로움은 이제 극복했습니다. 과일만 먹어도 기력이 펄펄 넘칩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바로 앞에 있더라도 손발로 때려 잡을 수 있습니다.]



김공과 그 사람은 기묘년 사건에 대해 한바탕 이야기를 더 하고 헤어졌다.

김공이 평생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죽기 전에야 비로소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옛날에 털이 난 여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명하여 이 일을 글로 써서 알리게 하였다.

지금 세상에 모인의 이야기가 퍼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Illust by 엥비(http://blog.naver.com/junknb)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
320x100


이경류가 병조좌랑이던 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당시 이경류의 둘째 형은 나라를 위해 붓을 내던지고 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방장 변기가 전쟁에 나서면서 이경류의 둘째형을 종사관으로 삼기 위해 임금님에게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하필 이름을 잘못 써서 이경류의 이름이 올라가고 말았다.

둘째 형이 이경류에게 말했다.

[내가 전쟁에 나서야 하는데, 이름이 네 이름으로 잘못 올라갔구나. 하지만 당연히 내가 전쟁에 나가야 옳을 것이다.]



그러자 이경류가 말했다.

[이미 제 이름을 보고 임금님이 허가를 하셨으니 제가 가야합니다.]

이경류는 무구를 챙겨 어머님께 인사를 올리고 전장으로 나섰다.



하지만 변기가 영남에서 크게 패하고 죽어버려서, 장군을 잃은 진중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경류는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그 곳으로 가서 윤섬, 박호와 함께 이일의 밑에서 머물렀다.

이일의 군대가 전투를 치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진이 함락되고 윤섬과 박호도 크게 다쳤다.



이경류가 진 밖으로 나가니 시종이 말을 끌고 이경류를 기다리고 있다 흐느끼며 아뢰었다.

[주인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서둘러서 이 말을 타고 서울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경류가 웃으며 말했다.



[나라가 이렇게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내가 죽지 않고 욕되게 살라고 하느냐?]

그리고 지필묵을 꺼내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써서 도포자락 속에 감춘 뒤, 시종에게 그것을 전하라고 시켰다.

이경류가 말을 타고 적진 가운데로 향하려고 하자, 시종은 그를 껴안고 울면서 놓아주지를 않았다.



이경류가 말했다.

[너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내가 네 말을 따라 서울로 돌아가겠다. 그런데 내가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니 밥을 좀 구해왔으면 좋겠구나.]

시종이 그 말을 믿고 주변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차려 돌아와보니 이경류는 이미 적진으로 향한 뒤였다.



시종은 적진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이경류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경류는 적진에서 맨손으로 왜구를 쳐 죽이다 결국 상주 북문 밖 평야에서 죽었으니, 그 때 24살이었다.

시종이 말을 끌고 서울로 돌아가니, 집안 사람들이 그제야 이경류의 죽음을 알았다.



편지를 쓴 날을 기일로 삼고 장례를 치뤘다.

시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말 또한 먹이를 먹지 않더니 굶어 죽었다.

가족들은 이경류가 남긴 물건들을 거두어 관에 넣어 경기도 광주에 장사 지내고, 그 옆에 시종과 말의 무덤도 만들어주었다.



상주의 선비들은 제단을 지어서 이경류의 제사를 지내 주었고, 조정에서는 도승지를 추서했다.

을묘년에는 정조 임금께서 친히 충신의사단이라는 글을 써서 북평에 사당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경류는 죽은 후 매일 밤 집에 왔는데, 그 목소리와 웃는 모습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다.



부인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나 음식을 마련하여 올리면 먹고 마시는 것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는데, 나중에 보면 음식은 그대로 있었다.

이경류는 매일 날이 저물면 왔다가 닭이 울면 문을 나섰다.



부인이 이경류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의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알 수 있다면 고향으로 모셔와 제대로 장례를 치루겠습니다.]

이경류가 슬피 울며 말했다.



[그 수많은 백골이 쌓여 있는 곳에서 어떻게 내 몸만 찾을 수 있겠소? 그냥 두는 게 더 좋을 것이오. 게다가 내 몸이 묻힌 곳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곳이오.]

죽은지 1년이 지나자 이경류는 이틀에 한 번씩 오기 시작했다.

죽은지 2년이 지나자 이경류는 말했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오.]

그 때 이경류의 아들 제는 나이가 겨우 4살이었다.

이경류는 제를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이 아이는 과거에 급제하겠으나, 그 후 불행해질 것이오. 그 때가 오면 내가 다시 오겠소.]

그 말을 남긴 뒤 이경류는 사라졌는데, 그 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윽고 20여년이 흘러 광해군 때에 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사당에 알현할 때, 공중에서 신참의 신고식을 하라고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경류의 늙은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그 때가 5월 즈음이었다.

노모가 목이 말라 시종에게 말했다.



[어떻게 귤 하나만 구할 수 없을꼬? 그걸 먹으면 갈증이 싹 가실 것 같은데...]

며칠 뒤 하늘에게 이경류가 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뜰에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 보니 구름 속에서 이경류가 귤 3개를 던지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귤 생각을 하시기에 제가 동정호에서 귤을 얻어왔습니다. 이것을 드리면 어머님의 병이 곧 나을 것입니다.]

도암 이재가 신도비에 [공중에서 귤을 던지니 정신이 황홀하구나.] 라고 쓴 것이 바로 이 광경을 뜻하는 것이다.

이경류의 제삿날이 되면 언제나 병풍 뒤에서 밥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종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계집종이 실수를 해서 머리카락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제사가 끝난 뒤 바깥채에서 시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들었더니 그 소리는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시종이 사랑방에 들어가자 이경류의 목소리가 떡을 만든 계집종을 잡아오게 하고 분부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머리카락을 꺼린다. 너희는 어째서 머리카락이 있는지 잘 살피지 않았느냐? 그 죄는 매를 맞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계집종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릴 것을 명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는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감히 후손들이 이경류의 제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