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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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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 밖에 사는 권진사는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공부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놀러다니기만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사마천처럼 세상을 유람하는 풍취가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는 전국을 두루 돌아다녀 안 가본 곳이 없었으며, 명산대천과 경치 좋고 조용한 곳은 모조리 찾아갔고 어떤 곳은 두세번 가기도 하였다.




그가 어느날 춘천 기린창에 갔는데, 그 날은 마침 장날이었다.


권진사가 주막에 앉아 있는데 약립을 쓰고 소를 탄 어떤 사람이 주막에 오더니 그 곳의 주모에게 물었다.


[저 방 손님은 어떤 양반이오?]




주모가 말하였다.


[저 분은 서울에 사시는 권진사님입지요. 전국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저희 집에도 3번이나 오셨기에 편히 지내고 계십니다.]


[저 양반이 잘 아는 게 있소?]




[풍수지리학에 꽤 통달하셨지요.]


[그럼 내가 혹시 저 분을 좀 모셔갈 수는 없겠소?]


[아마 괜찮을 겁니다.]




잠시 뒤 주모가 방에 들어가 권진사에게 고했다.


[어느 마을에 사는 첨지가 진사님의 재주를 듣고 지금 진사님을 모셔가겠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진사님께서는 의심하지 마시고 잠시 다녀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권진사는 주막에만 며칠을 있어 심심했기에 바로 대답했다.




[이 곳에서 멀지만 않으면 한 번 놀고 오는 것을 내 어찌 마다하겠소?]


이에 첨지라는 자가 와서 권진사를 뵙고 말하였다.


[제가 진사님의 명성을 들은지 오래입니다. 제가 지금 소를 타고 왔으니 잠시 누추한 제 집으로 가시는 게 어떠실지요?]




권진사가 물었다.


[첨지의 집이 이 곳에서 몇 리나 되오?]


[이 곳에서 30리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같이 소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 첨지는 고삐를 잡고 뒤에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정오 무렵이었다.


타고 있던 소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었다.




대략 3, 40리쯤 갔을 때 권진사는 첨지에게 물었다.


[영감께서 사시는 마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려.]


[제가 사는 곳은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몇 리쯤 온 것이오?]


[80리 정도 왔습니다.]


권진사는 몹시 이상히 여기며 말했다.




[지금 이곳까지 거의 100리를 왔는데도 마을이 아직도 멀리 있다니요? 그럼 어째서 처음에 30리라고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영감은 나를 속여 데려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막 주인은 내가 30리쯤 되는 마을에 산다고만 알지, 내가 진짜 사는 곳은 알지 못합니다.]


권진사는 마음 속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와버린터라 그냥 가기로 했다.




마을로부터 30리 정도 나오자 그 후에는 계속 깊은 산과 골짜기였다.


낙엽은 사람 정강이까지 차올라 있는데, 그 사이에 단지 작은 길 하나만 나 있었다.


오후 세네시쯤 되자 첨지가 소를 멈추며 말했다.




[잠시 내려서 요기나 하고 가시지요.]


권진사는 소에서 내려 물가에 가서 앉았다.


미리 가져온 도시락을 먹고 물을 떠서 마신 뒤 다시 소를 타고 갔다.




해는 이미 서산에 지고 시간은 황혼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뒤 멀고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나자 첨지가 [왔네!] 라고 크게 소리쳐 대답했다.


권진사가 소의 등 위에서 보니 수십명이 횃불을 들고 고개를 넘어오는데,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횃불을 가지고 권진사와 첨지 가는 길을 인도했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자 어렴풋한 가운데 한 큰 마을이 있고, 닭과 개 짖는 소리,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곧 어떤 집에 도착해 소에서 내려 문 안으로 들어가니, 방과 창이 정교하고 깨끗하였으며 용마루와 처마가 앞이 탁 트여 널찍하였으므로 산골 촌사람들이 사는 곳 같지 않았다.




그 다음날 마을을 두루 살펴보니, 인가는 200여호 되는 것 같았고 앞에 펼쳐진 평야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모두가 기름진 땅이었다.


그 둘레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자 20여리라고 하였으니, 이 곳은 사람들이 모르는 세상 밖 무릉도원이었다.


또 벽을 사이에 둔 대여섯간의 방에서는 밤마다 책 읽는 소리가 들려 물어보니, 마을의 젊은이들이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며 놀지 않고 주경야독하며 모여서 공부한다는 것이었다.




권진사가 팔도를 두루 유람하면서 소원이 무릉도원을 한 번 보는 것이었기에 너무 기쁜 나머지 첨지에게 무릎을 꿇고 물었다.


[주인께서는 신선이십니까, 귀신이십니까? 이 마을은 무슨 마을입니까?]


첨지가 놀라서 말했다.




[진사님! 어째서 갑자기 존댓말을 하십니까! 나는 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대에는 경기도 고양에 살았는데, 우리 증조부께서 마침 이 곳을 찾아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때 친가 외가 친척을 통틀어 따라오고 싶어했던 30여호가 따라왔지요. 일단 이 곳에 온 후에는 세상과 연을 끊기로 하고 경서 몇 권과 소금, 양념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땅을 개간하고 논을 만들어 먹을 것을 해결하였고, 결혼은 이 안에서 해결해서 우리끼리 살고 있습니다. 자손이 번성하여 이제 마을에 집만 200채 가까이 됩니다.]


[먹고 입는 것이여 이 안에서 농사 짓고 베 짜는 것으로 한다고 하여도, 소금 같은 것은 어찌 하십니까?]


[진사님께서 어제 타셨던 소는 하루에 200여 리를 갑니다. 저희 증조부께서 이 곳에 오실 때 데려온 소가 새끼를 낳은 것인데, 이처럼 잘 걷는 소가 매년 한 마리씩 태어납니다. 이웃 마을에 다닐 때는 이 소를 타고가서 소금을 사옵니다. 산에 노루, 사슴, 멧돼지, 산양이 있으니 그 고기를 먹고, 산 주변에 벌꿀통 300여개를 치고 있는데 주인이 없이 서로 양보하며 쓰고 있습니다.]




하루는 첨지가 소년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권진사님을 모시고 물고기나 좀 잡아오거라.]


그 소년들 중 어떤 소년은 겨와 쭉정이를, 어떤 소년은 뾰족하게 깎은 막대기를 가지고 일제히 한 연못에 모였다.




물 속에 겨를 풀어 넣고 그것이 아래로 가라앉자, 소년들은 일시에 몽둥이를 가지고 수영하며 내리쳤다.


조금 지나니 한 자나 되는 물고기들이 물 위로 떠올랐다.


무슨 고기냐고 묻자 [목멱어] 라고 하였는데, 붕어와 비슷하였으나 흰 비늘이 있었다.




권진사는 한 달 가량 그 마을에 머물며 모든 것을 구경하였다.


그 마을을 떠날 때 첨지는 거듭 부탁했다.


[이 마을은 춘천도, 또 낭천도 아닙니다. 이 너른 들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는데다 사람들이 이곳에 온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진사님이 이 곳에 오셨던 것도 다 인연이니, 이 산을 나가신 후에도 다른 사람에게 이를 알리지 마십시오.]




권진사가 말했다.


[나도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첨지가 말했다.




[쉽지 않을 것이오. 쉽지 않을 것이오.]


권진사는 산을 나온 이후 늙도록 집에서 머물며 매일 탄식하였다.


[내 평생에 한 번 진짜 무릉도원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만 속세일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까닭에 집안 사람들을 데리고 그 곳에 가지 못하였구나!]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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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조하 최규서가 젊을 적에 용인에 살았는데, 한 민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이 모두 놀러가고 최규서만 혼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동과 모습이 뛰어나게 훌륭한 한 관인이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들어오더니 상석에 가서 앉았다.




최규서가 그의 옷을 보니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옷이었다.


몹시 괴이하게 여긴 최규서가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고려 때의 선비라오. 실은 내 집이 이 민가의 서쪽 방 밑에 있는데, 이 집 주인이 아침저녁으로 내 집 위에서 불을 때서 견딜 수가 없구려. 손자 한 놈은 그만 한 쪽 허벅다리가 다 타 버렸을 정도라오. 그대가 나를 위해 이 집을 옮겨서 우리 집안을 도와주지 않겠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비록 죽은 넋이나 반드시 결초보은 하리다.]




최규서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친구들과 내가 함께 있을 때 말하지 않고 하필 나 혼자 있을 때 찾아온 것이오?]


[다른 사람들은 정신력이 약하여 말하기가 어려웠소. 그대는 다른 이들보다 재주가 훨씬 뛰어난 까닭에 그대가 혼자 있는 틈에 이렇게 찾아온 것이오.]




최규서가 흡족해하며 말했다.


[내 한 번 해보리다.]


이 말을 들은 관인은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최규서는 주인을 불러 물었다.


[혹시 네가 이 집을 지을 때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지 않았느냐?]


주인이 대답했다.




[서쪽 방 아래가 무덤이 아닌가 의심이 갔습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 무덤 위에 방을 만들면 심신이 안정된다길래 그대로 방을 만들었습니다.]


최규서가 말했다.


[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만약 자네가 서둘러 이사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큰 화를 입을 것이네.]




주인이 이사갈 돈이 없다고 하자, 최규서는 곧 엽전 15 꿰미를 빌려와서 그 날로 이사를 가게 했다.


그 후 관인이 밤을 틈타 최규서의 집으로 찾아와 감사하는데, 몹시 기뻐하며 감격하였다.


관인이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큰 귀인이 되어 오복을 두루 얻을 것이오. 다만 지위가 판서에 이르렀을 때는 반드시 사퇴해야만 제대로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에게 닥칠 화 또한 어마어마할 것이외다.]


최규서는 이 말을 항상 마음 속에 담아두다가, 관인의 말에 따라 판서가 되자 곧 사퇴하였다.


그리고 은퇴하여 용인에서 즐거이 살았다고 한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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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의 동생이자 명나라의 제독이었던 이여매의 후손 아무개는 힘이 장사였고 검술이 뛰어났다.


일찍이 전라도 완산 진영에 부임되어 가게 되었는데, 금강에서 한 부인과 같은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다.


강 중류에 이를 무렵 어떤 중이 강둑에 도착하여 뱃사공을 부르며 말했다.




[어서 이리와 배를 대시오.]


뱃사공이 중을 태우기 위해 배를 돌리려고 하자, 아무개는 화를 내며 뱃사공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중이 하늘로 뛰어 오르더니 공중을 날아 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부인의 가마가 있는 것을 보고는 안을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제법 예쁜데?]


중이라는 사람이 부인을 희롱하며 온갖 방자한 말을 늘어놓는 꼴을 보자 아무개는 한 주먹에 중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금방 중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본 터라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어 내심 참고 있었다.


이윽고 배에서 내려 육지에 도착하자, 아무개는 중을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비록 하찮은 중이지만, 엄연히 중과 속인이 다르고 남녀가 유별하다. 그런데 어찌 감히 부인을 희롱하느냐!]




그리고 아무개가 가지고 있던 철편으로 온 힘을 다해 때리자 중이 그 자리에서 죽어 나자빠졌다.


아무개는 중의 시체를 강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개는 전주에 도착해 감사를 알현하고, 금강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 뒤 영내에 머물렀다.




몇개월이 지나자 성문 밖이 떠들썩하는데 그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감사가 의아해하며 그 까닭을 묻자, 문지기가 들어와 아뢰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어떤 중이 들어와 사또를 뵙자고 합니다. 저는 말리려고 했지만 제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드옵니다.]




이윽고 중이 들어오더니 마루 위로 올라와 감사에게 인사했다.


감사가 말했다.


[너는 어디 사는 중이며,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느냐?]




중이 말했다.


[소승은 강진 사람인데, 비장 이아무개가 지금 이 곳에 있습니까?]


감사가 말했다.




[어찌하여 그것을 묻느냐?]


[이비장이 때려 죽인 스님은 바로 소승의 스승님입니다. 그렇기에 소승은 원수를 갚으러 왔습니다.]


[이비장은 지금 서울에 갔다네.]




[언제 돌아옵니까?]


[한 달을 기간으로 잡고 갔으니, 다음달 10일쯤에는 돌아오겠지.]


[소승은 그 때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그가 재주를 부려 도망칠지라도 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니,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러더니 중은 즉시 작별 인사를 하고 갔다.


감사는 이비장을 불러 중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대는 그 중과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이비장이 말했다.


[소인은 집안이 가난하여 고기를 먹는 일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 탓에 기력이 허합니다. 만약 하루에 큰 소 한 마리씩 한 달간 30마리만 먹을 수 있다면 저 중 따위가 어찌 두렵겠습니까?]


감사가 말했다.




[그거라면 천금 정도의 돈만 쓰면 될텐데 어려운 일도 아니구나!]


감사는 즉시 고기를 관리하는 아전에게 분부하여 날마다 이비장에게 소 한마리어치 고기를 주게 했다.


이비장은 또 황색 비단으로 좁은 소매를 댄 자주색 비단 전투복을 만들어 줄 것을 청하니, 감사가 그렇게 해 주었다.




이비장은 또 대장간에 찾아가 쌍검을 만들게 했는데, 백번이나 단련해서 만든 검이었기에 쇠도 자를 정도로 예리하고 단단했다.


이비장이 10일 동안 열마리 소를 먹자 살이 엄청 찌더니, 20일 동안 20마리의 소를 먹자 몸이 다시 수척해졌다.


그리고 한 달 동안 30마리의 소를 먹자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아 보통 사람과 똑같았다.




이비장이 힘을 기르며 기다리니, 중이 약속한 날짜에 다시 와서 감사를 알현하고 말했다.


[이비장이 왔습니까?]


[이제 막 돌아왔네.]




이비장은 마침 옆에 서 있다가 중을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네놈이 어찌 그리 당돌하냐!]


곧바로 중이 말했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오늘 나와 어디 누가 죽나 겨루어보자!]


중은 뜰로 내려가더니 바랑 속에 말아 넣어 두었던 검을 꺼내 손으로 그것을 폈는데, 그 검이 바로 상장검(霜長劒)인 듯 했다.


이비장 역시 뜰로 내려가 전투복을 입고, 손에는 한 쌍의 백련검(百鍊劒)을 든 채 송곳 신발을 신었다.




서로 상대하여 싸우기를 몸을 뒤척였다가 춤을 추기도 하고, 서로 물러났다 다시 달라 붙었다.


이윽고 검광이 번쩍번쩍 하다가 마침내는 은 항아리 모습을 이루더니, 두 사람이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뜰에 모여 앉았던 구경꾼들은 모두 혀를 차며 승패가 갈리기만을 기다렸다.




날이 저물자 하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더니, 곧이어 중의 몸뚱이가 선화당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성문 밖에 중의 머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이비장이 이겼다는 것을 알았으나, 날이 어두워지도록 이비장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의심하게 괴이하게 여겼다.


이비장은 저녁 늦게서야 검을 짚고 내려왔다.


감사가 일의 연유를 물으니 이비장이 대답했다.




[다행히 사또 어르신의 은혜를 입어 고기를 먹어 원기를 보충하고, 전투복을 입어 중의 눈을 어지럽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끝장 났을 것입니다.]


감사가 물었다.


[중의 머리가 땅에 떨어진지 오래 되었는데 그대는 왜 이리 늦게 왔는고?]




이비장이 말했다.


[소인이 검을 쓰며 싸우다 보니 기분이 들떴습니다. 문득 조상님들이 계신 고국산천이 그리워져 농서성의 선영에 가서 한바탕 통곡하고 왔습니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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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의 조광일이라는 사람이 옛날 홍주에 잠시 살았었다.


그는 옛부터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부잣집에는 가본 적이 없고, 조광일의 집에도 잘 사는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소탈하고 정직해서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직 병을 고치는 것을 취미로 삼았는데, 그의 의술은 옛 방식인 탕약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작은 가죽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안에는 철침 수십개가 들어 있었다.


긴 것, 짧은 것, 둥근 것, 모난 것 등 모양이 다른 여러 침을 써서 종기를 터트리고, 부스럼과 혹을 치료하고, 피가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중풍을 고치며 늙은 이에게 기력을 되찾게 하는 등 그 효과가 매우 뛰어났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침은"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침술에 정진하여 답을 얻은 자라는 뜻이었다.


어느날 맑은 새벽, 조광일이 일찍 일어났더니 남루한 옷을 입은 노파가 엉금엉금 기어와서 집의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아무개입니다. 어느 마을에 사는 백성 아무개의 어머니인데, 제 아들놈이 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니 그 놈 목숨 좀 살려주세요!]




조광일이 바로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서 앞장서세요. 따라가겠습니다.]


즉시 일어나 노파의 뒤를 따라가는데, 조광일이 당황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렇듯 조광일은 다른 이들의 병을 돌보느라 바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하루는 비가 내려 길이 진흙탕이었는데, 조광일이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바삐 길을 가자 어느 사람이 물었다.


[선생님,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조광일이 말했다.


[어느 마을에 사는 아무개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서 내가 지난 번에 침을 한 번 놓아주었소. 그런데 효과가 없기에 오늘 다시 침을 놓기로 했지요. 그래서 지금 가서 침을 놓으려는 것이오.]


그 사람이 물었다.




[선생님께 그것이 무슨 이익이 된다고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십니까?]


조광일이 웃으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같다.


그의 사람됨이 이와 같았다.




어느 사람이 조광일에게 물었다.


[의술이라는 것은 천한 기술이고 마을은 비천한 자들이 사는 곳이오. 어찌하여 당신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서도 귀하고 잘 사는 사람들과 지낼 생각은 하지 않고 천한 백성들이나 쫓아 다니는 것이오? 왜 그렇게 사는 것입니까?]


조광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아가 정승이 되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의사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정승은 정치로서 사람을 구하지만, 의사는 의술로 사람을 살려냅니다. 그 지위는 엄청나게 다르지만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정승은 때와 운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또, 임금님의 녹을 받으며 책임을 맡기 때문에 하나라도 잘못이 있으면 바로 벌을 받게 되지요.]


조광일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의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술로 자신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뜻을 이루지요. 설령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라면 그냥 두고 가도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의술을 즐기는 것입니다. 내가 의술을 행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귀천을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나는 세상의 의사들이 자신의 의술만 믿고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굴고,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여러번 청을 해야 겨우 왕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광일이 말했다.


[또 그렇게 가더라도 귀하고 권세 있는 집이나 부잣집일 뿐이지요. 만약 가난하고 권세 없는 자는 병들어도 거절당하고, 백 번을 청해도 일어나지조차 않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할 도리입니까? 내가 오로지 마을에서만 있으며 귀한 이들을 만나지 않는 것은 저런 간악한 의사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함입니다. 저 귀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어찌 우리보다 힘들겠소? 하지만 마을의 백성들은 불쌍하고 가난합니다. 내가 침을 놓으며 사람을 고친 것이 10여년입니다. 어느 날은 대여섯 사람을 치료하기도 하여 한 달이면 열댓명을 살려냈고, 온전히 건강을 되찾게 해 준 사람만 수천명은 될 것이오. 내가 올해 40살이니 앞으로 수십년을 더하면 만명은 살릴 수 있겠지요. 그 정도는 해야 내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 조광일은 뛰어난 의술을 가졌으면서도 부귀공명을 바라지 않았고, 널리 베풀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위급한 자에게는 반드시 달려갔고, 언제나 가난하고 미천한 이들을 먼저 치료했으니 그 어질음이 다른 이보다 훨씬 크도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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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 때 1782년에서 1783년 사이에 영남 안찰사 김아무개가 가을에 순시를 하다가 함양에 도착해 위성관에 머물렀다.

안찰사는 심부름꾼들과 기생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방에서 혼자 잠을 잤다.

한밤 중 인적이 고요한데, 침실의 문이 슬쩍 열렸다가 닫히더니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김공이 잠에서 깨어나 물었다.

[너는 누구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저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깊은 밤에 다른 사람 하나 없는데 어찌 이렇게 수상하게 움직이는가? 혹시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간절히 아뢸 일이 있나이다.]

김공이 일어나서 사람을 불러 불을 켜려고 하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만약 제 모습을 보신다면 안찰사께서 틀림없이 놀라고 두려워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라도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김공이 말했다.

[그대는 얼마나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불도 켜지 못하게 하는가?]




[제 온 몸이 털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가면 갈 수록 그 사람의 말이 괴이하였기에 김공이 다시 물었다.

[그대가 과연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온 몸에 털이 나게 되었단 말인가?]



[저는 원래 상주에 살던 우씨 성의 주서입니다. 중종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벼슬을 얻은 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제자가 되어 여러해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기묘사화 때 목숨을 잃으시고 여러 유생들이 잡혀갔지요. 저는 한양에서 도망쳤는데 만약 고향집으로 간다면 바로 잡혀들어갈 것 같아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여러 날을 굶주리고 피곤한데다 난생 처음 골짜기에 들어갔기에 먹는 것마저 힘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물가변에 혹시 풀이라도 있으면 뽑아 먹었고, 산과일이 있으면 따 먹었습니다. 먹을 때는 배가 좀 부르는 것 같더니, 똥을 눌 때면 모두 설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6개월 정도를 지냈더니 점차 온 몸에 털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길이가 몇 마디가 될 정도였습니다. 걸음걸이도 빨라져 마치 나는 것 같아, 천길 절벽도 뛰어넘을 수 있어 무슨 원숭이 같이 되었지요. 나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면 괴물로 몰려 죽을 것 같아 산에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목동을 보더라도 몸을 숨겼지요.]



그 사람은 목이 메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깊은 계곡, 겹겹이 쌓인 바위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살며 혹시 달이 밝게 뜨면, 혼자서 지난날 배웠던 경서를 암송하곤 했습니다. 제 신세를 생각하니 너무나도 한심하여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향의 부모와 처자가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을 알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사나운 호랑이나 독사도 무섭지 않고, 단지 사냥꾼이 무서워 낮에는 숨어다니고 밤에만 나다녔습니다. 이렇게 괴물의 꼴이 되어버렸지만 마음 속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언제나 세상 사람을 한 번 만나, 세상일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괴상한 모습으로는 차마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어르신의 행차가 이 곳에 오신다는 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뵙는 것일 뿐입니다. 저에게 다만 조광조 선생의 자손이 몇이나 되는지, 선생이 돌아가신 뒤 그 명예가 회복되고 결백함이 밝혀졌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합니다.]

김공이 말했다.

[정암 선생은 인조 때 명예가 회복되어 종묘에 그 신위가 배향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액서원도 여러 곳에 있고 그 댁 자손들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조정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니 걱정 마십시오.]



김공은 내친김에 기묘사화 당시의 일에 관해 물었다.

그 사람은 하나라도 빠트리거나 잊어버린 것 없이 모든 사실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또 처음 도망칠 때 그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서른 다섯이었습니다.]

[그럼 기묘년으로부터 지금까지 300여년이 흘렀는데, 그렇다면 그대의 나이는 거의 400살에 가깝겠구려!]

[저는 그 동안 깊은 산에서 세월을 보내서 나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그대는 지리산에 산다고 하셨지요. 그대가 사는 굴과 이 곳의 거리는 상당히 멀텐데 어찌 그렇게 빠르게 오신 것이오?]

[기운이 날 때는 아무리 험한 절벽이라도 원숭이가 뛰어 놀듯 넘어다닙니다. 한순간에 몇십 리를 달릴 수 있지요.]



김공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라며 음식을 대접하려 하자 그가 말했다.

[음식은 필요 없습니다. 굳이 주시려거든 과일이나 좀 주시지요.]

하지만 하필 방 안에 과일이 없었다.



밤중에 과일을 구해오라고 하기도 힘들었기에 김공이 말했다.

[지금 하필이면 과일이 없구려! 내일 밤 그대가 다시 온다면 그 때 과일을 준비해 놓겠소. 내일 오실 수 있겠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즉시 방을 나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공은 그가 다시 온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하루 더 위성관에서 머물렀다.

그 날 아침과 점심 식사에 나온 과일을 모두 챙겨놓고 그 사람을 기다렸다.



과연 밤이 깊어지자 그가 다시 왔다.

김공이 일어나 그를 맞이하고, 과일을 내어주니 그가 크게 기뻐하며 과일을 모두 다 먹었다.

[덕분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지리산 안에 과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대는 먹을 걱정은 없는 것이오?]

[매년 가을 낙엽이 질 때면 밤중에 주워 모아둔 과일이 서너 무더기는 되는데, 그것으로 먹고 삽니다. 처음 풀만 먹을 때의 괴로움은 이제 극복했습니다. 과일만 먹어도 기력이 펄펄 넘칩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바로 앞에 있더라도 손발로 때려 잡을 수 있습니다.]



김공과 그 사람은 기묘년 사건에 대해 한바탕 이야기를 더 하고 헤어졌다.

김공이 평생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죽기 전에야 비로소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옛날에 털이 난 여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명하여 이 일을 글로 써서 알리게 하였다.

지금 세상에 모인의 이야기가 퍼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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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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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이여송은 평양에서 왜구를 정벌했다.

그 때 이여송은 김씨 성을 가진 역관을 총애하였다.

김역관은 나이가 겨우 20세로, 꽃다운 용모에 미색이 흘러 넘쳤다.



이여송은 밤낮으로 그를 가까이 하며 잠시도 놓아주지 않으니, 임금이 왕비를 사랑하는 것도 그것만 못할 정도였다.

김역관이 무슨 말을 하던 반드시 들어주었으니, 그의 소원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여송은 군대를 철수하여 명으로 돌아갈 때도 김역관을 데리고 갔다.



만주 봉황성 책문에 이르렀는데, 군량이 약속된 기일이 되도록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여송은 크게 노하여 요동 통제사를 군법으로 다스리려 했다.

요동 통제사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첫째는 시랑 벼슬이고 둘째는 서길사였으며, 막내 아들은 신묘한 승려였다.



황제가 그 셋째 아들을 스승으로 모셔 대궐 안에 별관을 세워 그 곳에서 거하게 했다.

그 융숭함이 마치 당나라 숙종이 이필을 대하는 것 같았다.

요동 통제사가 군법으로 처벌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들은 세 아들들은 모두 요동까지 달려와 아버지를 구할 방법을 의논했다.



그 때 셋째 아들이 말했다.

[형님들, 제가 소문을 들어보니 조선의 김씨 성을 가진 역관이 제독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역관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들어준다고 하니 그 역관을 만나 간곡하게 빌어봅시다.]

그리하여 세 아들은 함께 제독의 병영으로 가서 김역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역관은 그 사실을 이여송에게 아뢰었다.

[요동 통제사의 세 아들이 소인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여송이 말했다.



[분명 자기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려는 것일게다. 하지만 저 셋은 명나라에서 벼슬 자리에 오른 귀한 이들이니, 외국의 하찮은 일개 역관인 네가 안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 어서 나가 보거라.]

김역관이 나가자 세 아들은 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아버님이 변을 당하셔서 이대로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부디 그대가 우리를 위해 제독에게 잘 아뢰어서 목숨이나마 살려주시면 평생의 은혜로 삼겠습니다.]



김역관이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외국인인 제가 어떻게 군법을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세 분의 정성이 이렇게 간곡하니 제가 거절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독께 여쭈어 볼테니 여기서 제독의 결정을 기다리십시오.]

김역관이 바로 막사로 들어가니 제독이 물었다.



[저들이 찾아온 이유가 요동 통제사 때문이더냐?]

[그렇습니다.]

이어서 김역관은 세 아들과 주고 받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이야기 했다.



제독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평생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지금까지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그르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네가 귀인들에게 부탁을 받다니,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겠구나. 내가 너를 이 명나라 땅으로 데리고 온 후 너를 위해 해 준 것이 없으니, 군법이 지엄하다지만 이번 한 번만은 내가 너를 위해 한 번 도와주마.]

김역관이 밖으로 나가 세 아들에게 제독이 한 말을 전하니, 세 사람은 함께 절을 하며 말했다.



[그대의 은혜 덕분에 아버님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소.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바다와 같이 넓습니다. 어떤 것으로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깃털, 사아, 가죽, 금, 은, 옥, 비단 등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리다.]

[저희 집안은 원래 청렴하고 검소합니다. 보배로운 패물이나 진귀한 노리개 같은 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조선 사람이니, 우리 임금님께 청해 그대를 조선의 재상으로 삼게 하면 어떻겠소?]

[우리나라는 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중인이니 제가 정승이 되어봐야 사람들은 '중인 정승' 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놀려댈 것입니다. 차라리 정승이 되지 않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를 명나라에서 높은 관직에 임명하여, 유명한 가문의 양자로 들이면 어떻겠소?]

[저희 부모님은 아직 모두 살아계십니다. 지금 조선을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어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은혜는 꼭 갚아야겠소. 그대는 원하는 바를 말하시오. 만약 지극히 귀한 물건이어서 들어주기 힘든 것이라 해도 반드시 들어주겠소.]

세 아들이 너무나 애걸하니, 김역관이 엉겁결에 경솔히 말하고 말았다.

[제가 딱히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만, 소원이라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보는 것입니다.]



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서로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셋째 아들인 신승이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은 김역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김역관은 안으로 들어가 제독을 만났다.

제독이 물었다.



[그 세 사람이 반드시 너에게 은혜를 갚으려 할텐데, 너는 무엇을 달라고 했느냐?]

김역관이 말했다.

[저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독은 번쩍 일어나 김역관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가 소국의 사람인데 어찌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도 원대하느냐? 그들이 허락했느냐?]

[허락하였습니다.]



제독이 말했다.

[그들이 어디서 그런 여자를 구해올꼬? 황제 폐하라 하더라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찾기 힘들 것인데!]

김역관이 이여송을 따라 명나라 수도 북경에 들어섰다.



그러자 세 아들이 와서 김역관을 데리고 어느 집으로 들어섰다.

그 곳은 세로 지은 큰 누각이었는데, 크기가 크고 시원했으며, 금색의 벽은 휘황찬란했다.

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세 아들이 말했다.



[돌아가지 말고 오늘 밤은 이 곳에서 자고 가도록 하시오.]

조금 있으니 온 집안에 향 냄새가 가득했다.

안쪽 문이 열리더니 곱고 짙게 화장한 미인 수십 명이 나왔다.



어떤 이는 향로를 들고, 어떤 이는 붉은 보자기로 싼 상자를 들고 줄을 서서 마루 앞에 섰다.

김역관이 그들을 보니 모두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없었다.

미인들을 본 뒤 김역관이 떠나려 하니, 세 아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가려는 것이오?]

[제가 이미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들을 보았으니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세 아들은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고작 시녀일 뿐이오. 어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 할 수 있겠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이제 나올 것이오.]

잠시 뒤 안쪽 문이 활짝 열리며 난초와 사향 향기가 진하게 퍼져 나왔다.

그리고 시녀 십여명이 천하일색의 여인을 데리고 나와 마루 위에 올라 앉으니 마치 의자 위에 곱게 화장한 열 손가락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세 아들과 김역관 역시 차례로 의자 위에 앉았다.

세 아들이 김역관에게 물었다.

[이 여자야말로 진정 김역관이 보기 원했던 천하 제일의 미녀입니다. 어떻습니까?]



김역관이 그 여자를 보니, 온 몸에 장식된 구슬과 보석들에서 비추는 빛 때문에 정작 사람은 보이지가 않았다.

세 아들이 말했다.

[오늘 밤에 그대는 반드시 이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야 합니다.]



김역관이 말했다.

[저는 그저 한 번 보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대가 천하일색을 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발이 닳도록 여자를 찾아 헤멨소. 천하에서 두번째, 세번째 아름다운 여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황제 폐하의 힘을 빌려도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소.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베트남 왕의 원수를 갚아준 적이 있었소. 베트남 왕이 우리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가 말만 하면 뭐든 들어줄 기세였는데, 마침 그 베트남 왕의 딸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지 뭐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소원을 말한 그 날 바로 베트남 왕에게 사람을 보내 부탁했더니 왕이 흔쾌히 허락했소. 그대가 북경에 들어서는 날에 맞춰 이 여자를 데려오기 위해 천리마 세 필을 썼으니, 그 돈만 수만 은이 넘었소. 베트남과 북경이 삼만리가 넘는 먼 길이었기 때문이오. 오늘 서로 만났는데 그대는 남자가 저 사람은 여자이오. 만약 한 번 보기만 하고 헤어질 것이었다면 어찌 국왕의 딸이 함부로 움직이겠소? 사람은 이치를 따라야 하오. 다시는 사양하지 마시오. 오늘은 길일이니 혼례를 치루기도 딱 좋지 않소?]

김역관은 어쩔 수 없이 그 곳에서 묵기로 하고, 여자와 결혼했다.

마침내 침실에 들었는데, 밀랍으로 만든 촛불이 휘황찬란하고 사향 냄새가 풍겼다.



김역관은 눈빛이 몽롱해지고 심신이 황홀해져 미녀를 바라봐도 놀라고 당황하기만 할 뿐, 남자가 여자를 덮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니 방 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세 아들이 문 밖에서 엿보다가 김역관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내 말했다.

[남녀가 한 잠자리에 드는데 어찌 이렇게 조용합니까? 아무래도 당신은 제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구려.]



그리고 접시를 김역관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 먹어보시오. 이것은 촉땅에서 가져온 홍삼이오.]

김역관이 홍삼을 먹고 방에 들어가니, 눈이 밝아지고 정신이 상쾌해져서 그 미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꽃 같은 얼굴에 달 같은 자태로,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잠자리를 같이 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니 세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김역관을 보고 물었다.



[저 미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외국인이 졸지에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대가 우연히 기이한 만남으로 인해 이 천하일색을 얻었는데, 사람이 한 번 만나면 헤어지는 일은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대는 외국인이라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도 어려울 것이고, 가족들을 본국에 두고 이 곳에 사는 것도 힘들 것이오. 하지만 우리 세 사람이 이미 그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그대의 일을 소홀히 하겠소? 그대가 역관의 임무를 맡았으니, 매년 사신들이 명을 찾을 때마다 반드시 수행 역관으로 따라 오시오. 그렇게 일년에 한 번씩 마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것처럼 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 우리가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리다.]

김역관은 그 후 평생 역관으로 매년 한 번씩 명나라로 들어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곤 했다.

마침내 그녀와 김역관 사이에는 몇 명의 아들이 생겼는데, 김역관의 후예들은 중국에서 부귀공명을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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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산마루에 온갖 잡신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그 효험이 꽤 영험했다.

산 주변 마을을 다스리는 이들이 이 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가마에서 내려 절을 한 뒤, 돈을 모아 신들에게 굿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나중에 이상한 재앙을 맞곤 했다.



그러던 와중 한 관찰사가 새재 너머의 마을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성품이 강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무슨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가 새재를 넘다 사당 앞에 도착하니, 아전들이 몰려들어 예전 사또들의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관찰사는 그런 요사스러운 짓은 말도 안 된다고 물리친 뒤 말을 타고 한달음에 그 곳을 지나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갑자기 바람이 세게 휘몰아치더니, 난데없이 비가 관찰사가 탄 가마에만 집중적으로 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주변 사람들은 귀신의 소행이라며 몹시 두려워했다.



관찰사는 마부에게 명령해 사당에 불을 지르라고 시키고, 명령을 거르스는 자들을 죽였다.

아랫 사람들이 마지못해 그 명령을 따라 사당을 태우니, 곧 사당은 싸늘한 재가 되었다.

관찰사는 그대로 새재를 내려와 문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관찰사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새재의 신이오. 새재 사당에서 제삿밥을 먹은지 100년이 넘었소. 그런데 당신은 예도 올리지 않은데다 내 집까지 태워버렸으니, 나는 당신의 맏아들을 죽여버릴 것이오.]

관찰사가 노인을 꾸짖으며 말했다.



[요망한 귀신이 사당에 눌러 앉아 사람을 괴롭히니, 내가 왕명을 받들어 요사한 것을 제거했다. 이것은 내 직분인데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해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느냐!]

귀신은 화를 내며 가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관찰사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큰 아드님께서 여행의 피곤함 때문에 병이 드셨는데, 갑자기 위독한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관찰사가 가서 아들을 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관찰사는 곡을 하고 아들의 염을 한 뒤, 곧 관청에 들어섰다.



그 날 밤 귀신이 또 관찰사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내 사당을 불태운 것을 회개하고 새로 사당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당신의 둘째 아들이 죽을 것이오.]

관찰사는 여전히 의연한 모습을 지키며 지난 번처럼 귀신을 꾸짖어 물리쳤다.



아침이 되자 관찰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집안 사람이 와서 둘째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고했다.

관찰사는 매우 슬퍼하며 아들의 장례를 치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사의 꿈에 귀신이 또 나타나 말했다.



[첫째를 죽이고 또 둘째를 죽였으니 당신의 자식은 점점 줄어갈 것이오. 이번에는 셋째 아들이 죽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불쌍해서 내가 기회를 주려하니, 빨리 내 사당을 지어주면 셋째 아들의 목숨은 살려주겠소.]

하지만 관찰사는 이 말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귀신은 점점 화를 내며 온갖 협박을 하고, 끝내 좋은 말로 달래기까지 했다.



관찰사는 화가 나서 칼을 빼어들고 귀신을 베려고 했다.

그러자 귀신은 뒤로 물러나더니 뜰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했다.

[저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오직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어르신의 두 아드님은 수명이 다하여 돌아가실 예정이었기에 제가 그것을 알고 어르신을 협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셋째 아드님은 그 지위가 높이 오르고 오랫동안 건강하실테니 제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르신께 온갖 공갈 협박을 한 것이었지만, 어르신께서는 끝내 올바름을 지키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르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관찰사가 딱히 여기며 말했다.

[네가 오랫동안 황폐한 사당에 살면서 지냈는데, 내가 어찌 네 집을 마음대로 부수고 싶었겠느냐? 네가 너에게 화가 났던 것은 요망한 술수로 사람들을 희롱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네가 그것을 자백하니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구나. 내가 새로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지만 만약 네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면 당장 부숴버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귀신은 감동하여 흐느끼며 절하고 돌아갔다.



관찰사는 다시 사당을 세우고 그가 꿈에서 본 귀신의 모습을 흙으로 빚어 세워 두었다.

그 이후에 문경새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은 귀신에 대한 근심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관찰사의 셋째 아들은 오랫동안 살면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 갔으니, 귀신의 말이 과연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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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류가 병조좌랑이던 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당시 이경류의 둘째 형은 나라를 위해 붓을 내던지고 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방장 변기가 전쟁에 나서면서 이경류의 둘째형을 종사관으로 삼기 위해 임금님에게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하필 이름을 잘못 써서 이경류의 이름이 올라가고 말았다.

둘째 형이 이경류에게 말했다.

[내가 전쟁에 나서야 하는데, 이름이 네 이름으로 잘못 올라갔구나. 하지만 당연히 내가 전쟁에 나가야 옳을 것이다.]



그러자 이경류가 말했다.

[이미 제 이름을 보고 임금님이 허가를 하셨으니 제가 가야합니다.]

이경류는 무구를 챙겨 어머님께 인사를 올리고 전장으로 나섰다.



하지만 변기가 영남에서 크게 패하고 죽어버려서, 장군을 잃은 진중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경류는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그 곳으로 가서 윤섬, 박호와 함께 이일의 밑에서 머물렀다.

이일의 군대가 전투를 치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진이 함락되고 윤섬과 박호도 크게 다쳤다.



이경류가 진 밖으로 나가니 시종이 말을 끌고 이경류를 기다리고 있다 흐느끼며 아뢰었다.

[주인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서둘러서 이 말을 타고 서울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경류가 웃으며 말했다.



[나라가 이렇게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내가 죽지 않고 욕되게 살라고 하느냐?]

그리고 지필묵을 꺼내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써서 도포자락 속에 감춘 뒤, 시종에게 그것을 전하라고 시켰다.

이경류가 말을 타고 적진 가운데로 향하려고 하자, 시종은 그를 껴안고 울면서 놓아주지를 않았다.



이경류가 말했다.

[너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내가 네 말을 따라 서울로 돌아가겠다. 그런데 내가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니 밥을 좀 구해왔으면 좋겠구나.]

시종이 그 말을 믿고 주변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차려 돌아와보니 이경류는 이미 적진으로 향한 뒤였다.



시종은 적진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이경류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경류는 적진에서 맨손으로 왜구를 쳐 죽이다 결국 상주 북문 밖 평야에서 죽었으니, 그 때 24살이었다.

시종이 말을 끌고 서울로 돌아가니, 집안 사람들이 그제야 이경류의 죽음을 알았다.



편지를 쓴 날을 기일로 삼고 장례를 치뤘다.

시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말 또한 먹이를 먹지 않더니 굶어 죽었다.

가족들은 이경류가 남긴 물건들을 거두어 관에 넣어 경기도 광주에 장사 지내고, 그 옆에 시종과 말의 무덤도 만들어주었다.



상주의 선비들은 제단을 지어서 이경류의 제사를 지내 주었고, 조정에서는 도승지를 추서했다.

을묘년에는 정조 임금께서 친히 충신의사단이라는 글을 써서 북평에 사당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경류는 죽은 후 매일 밤 집에 왔는데, 그 목소리와 웃는 모습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다.



부인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나 음식을 마련하여 올리면 먹고 마시는 것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는데, 나중에 보면 음식은 그대로 있었다.

이경류는 매일 날이 저물면 왔다가 닭이 울면 문을 나섰다.



부인이 이경류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의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알 수 있다면 고향으로 모셔와 제대로 장례를 치루겠습니다.]

이경류가 슬피 울며 말했다.



[그 수많은 백골이 쌓여 있는 곳에서 어떻게 내 몸만 찾을 수 있겠소? 그냥 두는 게 더 좋을 것이오. 게다가 내 몸이 묻힌 곳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곳이오.]

죽은지 1년이 지나자 이경류는 이틀에 한 번씩 오기 시작했다.

죽은지 2년이 지나자 이경류는 말했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오.]

그 때 이경류의 아들 제는 나이가 겨우 4살이었다.

이경류는 제를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이 아이는 과거에 급제하겠으나, 그 후 불행해질 것이오. 그 때가 오면 내가 다시 오겠소.]

그 말을 남긴 뒤 이경류는 사라졌는데, 그 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윽고 20여년이 흘러 광해군 때에 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사당에 알현할 때, 공중에서 신참의 신고식을 하라고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경류의 늙은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그 때가 5월 즈음이었다.

노모가 목이 말라 시종에게 말했다.



[어떻게 귤 하나만 구할 수 없을꼬? 그걸 먹으면 갈증이 싹 가실 것 같은데...]

며칠 뒤 하늘에게 이경류가 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뜰에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 보니 구름 속에서 이경류가 귤 3개를 던지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귤 생각을 하시기에 제가 동정호에서 귤을 얻어왔습니다. 이것을 드리면 어머님의 병이 곧 나을 것입니다.]

도암 이재가 신도비에 [공중에서 귤을 던지니 정신이 황홀하구나.] 라고 쓴 것이 바로 이 광경을 뜻하는 것이다.

이경류의 제삿날이 되면 언제나 병풍 뒤에서 밥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종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계집종이 실수를 해서 머리카락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제사가 끝난 뒤 바깥채에서 시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들었더니 그 소리는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시종이 사랑방에 들어가자 이경류의 목소리가 떡을 만든 계집종을 잡아오게 하고 분부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머리카락을 꺼린다. 너희는 어째서 머리카락이 있는지 잘 살피지 않았느냐? 그 죄는 매를 맞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계집종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릴 것을 명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는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감히 후손들이 이경류의 제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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