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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집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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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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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집




우리 자매가 어릴 적 할머니는 종종 뽐내듯 말하곤 했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말거라.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간단다."



뭐, 요즘은 할머니도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지 오래라서.


어쨌건 결과적으로 나는 할머니의 말을 따랐다. 불행을 두려워하지도,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굳이 둘러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아니었다. 동생은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했고 잔뜩 웅크린 채 불행이 오지는 않았나 항상 사방을 살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흠, 이번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을 말해줘야겠군.


어릴 때부터 동생은 내 껌딱지였다. 두 살 터울인 동생은 심약하기가 그지없는 아이였다. 사람 얼굴을 3초 이상 쳐다보면 얼굴이 벌게져서 터져버릴지 모르는, 그런. 동생이 가족을 제외한 사람에게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한 건(실상 가족들에게조차 늘 기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바로 이웃집 참전용사 지미 할아버지에게 한 인사였을 것이다.


어느 날 엄마는 동생의 성격을 고쳐보겠다며 이웃집 지미 할아버지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오지 않으면 평생 집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마 전날 어디서 시답잖은 자녀훈육계발서 따위를 읽었을 거다. 아니면 동네에서 방귀 좀 뀌는 아줌마에게 귓동냥을 받았거나.


그날 마당에 나와 팔짱을 낀 채 노려보는 엄마 앞에서 동생은 얼굴이 눈물 반이 된 채로 몇 번이고 지미 할아버지(비만 오지 않으면 매일 현관 앞 오크나무 의자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글쎄, 지미 할아버지에게 그 인사가 제대로 전달됐을는지 모르겠다. 그 양반 원체 가는 귀가 먹어서 말이다.


물론 그런 발작적인 훈육은 당연히 장기적인 효과가 없었고, 엄마는 이내 손을 떼고 말았으며, 아빠는 사춘기가 지나면 자연히 성격이 바뀔 거라며 태평을 부렸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각종 심부름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옆집의 다 죽어가는 영감쟁이에게도 말 한마디 못하는 동생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동생이 염치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심부름을 도맡는 게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서 동생은 매번 나를 따라나서선 아무리 가벼운 짐이라도 나누어 들곤 했다. 그렇게, 내가 사는 오하이오 주 시골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나와 내동생을 '껌딱지 자매'라고 불렀다.


자, 그럼 시간을 이번 여름방학으로 돌려볼까?


내가 사는 마을에선 차라도 끌고 나가지 않는 이상 10대가 즐길 수 있을 만한 게 도통 없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중학생이라 면허증이 없었고 후져 터진 6단 기어 자전거로는 어디 멀리 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 숲(사실 숲이라고 표현하기에 민망할 정도의 규모지만)으로 가 꼬불쳐 둔 떨 따위를 피우는 게 최고의 여가였다.


당연히 항상 옆에는 내 껌딱지도 있었다.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시간을 보내던 동생을 나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같이 있어 줘야 했고 그건 방학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학마다(꼭 방학이 아니더라도) 숲으로 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 동생도 수다를 떨었냐고? 그렇다. 동생은 나와 있을 때면 제법 명랑했다. 말도 곧잘 했고. 사실 동생은 말주변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어쨌건, 내가 하려는 말은 이렇게 볼 것 없는 시골 마을에선 으레 도시 괴담 하나둘 정도는 나돈다는 거다. 당연히 우리 마을에도 도시 괴담이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숲 가장자리의 귀신 들린 집과 관련된 것이었다.


숲 가장자리에는 녹을 띤 허름한 울타리 안쪽으로 오래된 목조 집 하나가 있었다. 그 목조 집에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얌전하고 상냥하기만 하던 그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모습이 존재했다. 그녀는 지독한 카니발리즘 소유자로, 몰래 꾀어낸 동네 여자애들을 집으로 데려가 한 점 한 점 음미하며 뜯어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 끝에 유죄를 선고받곤 죄수들이 가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 이후 법적인 소유 문제로 인해 덩그러니 남아버린 목조 집 주변으로 철조망이 설치됐고, 정신병원에 수용된 그녀는 며칠이고 식사를 게워내더니 어느 날 알몸인 채로 입이 닿는 곳의 자기 살점들을 모조리 뜯어먹어 과다출혈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이지, 그녀는 죽어서 이 목조 집으로 돌아와 여자애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대."


"..언니, 근데 왜 여자애들이야? 그 여자는 여자애들만 잡아먹는 거야?"


"그건 말이야.. 아이들의 살점에서 누린내가 덜 나고 여자가 씹는 맛이 더 부드러워서래. 그녀는 산채로 사람을 잡아먹는 주의거든. 그래서 먼저 혓바닥과 목구녕을 칼로 헤집는 거지."


"..언니는 그 이야기를 믿어?"


"글쎄다. 사실은 상관 안 해. 중요한 건 지금 이거보다 재미있는 게 우리한테 있느냐는 거지. 자, 나 먼저 간다."



나는 철망 하단으로 흉하게 뚫린 구멍을 기어 통과한 뒤 동생이 따라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문이 열려있는데?"


"..언니, 그냥 돌아가자."


"안에 잠깐만 들어갔다가 가자. 전리품은 챙겨가야지."


"..그냥, 가자. 느낌이 안 좋아."


"너 겁먹은 거야? 그녀에게 잡아먹힐까 봐?"


"...."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딛는 거야. 그리고 전리품을 챙기면 넌 이제 학교에서 적어도 두 달간은 인기스타가 되어있을 거라고."



한참을 주춤이던 동생은 결심한 듯 내 얼굴을 올려다봤고, 그렇게 우리는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환장하겠네, 있는 거라곤 거미줄뿐이고. 뭐 챙겨갈 만한 것 좀 보여?"





아무 대답이 없어 동생 쪽을 돌아보니 동생은 그야말로 분칠한 듯한 얼굴색으로 굳어있었다. 동생의 시선은 어느 바닥에 머물러있었는데 그곳엔 자그마한 뼛조각들과 함께 아무렇게나 떨구어진 듯한 핏자국들이 아직 선명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미친 사람마냥 뛰쳐나가는 공포영화 속 클리셰는 모두 엉터리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날, 나와 동생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망각한 채 자빠지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비틀비틀 오두막을 빠져나오곤 울타리를 기어 나와서도 한참을 기어댔다.


그리고, 그날부터였다. 동생은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는지 밤마다 '그날' 못 질렀던 비명을 지르느라 분주했다. 허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동생은 이따금 발작적으로 어떤 음식이든 게워내기 일쑤였다. 원래부터 마른 몸이었던 동생은 곧 삐쩍 마른 형상으로 변해갔다.


엄마 아빠는 손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의사는 동생의 몸에 특별한 이상을 찾을 수가 없으며 아마 심리적인 문제로 보이는데 식이장애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병원 측은 가정에서 좀 더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하면서 만약 상황이 지속될 경우엔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아빠가 직장에서 의료보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마을의 신부님에게 주기적인 가정방문과 기도식을 간곡히 부탁했고(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기 싫어 갖은 핑계로 내빼곤 하던 아빠도 마지못한 얼굴로 동의했다. "그래, 뭐. 와서 기도만 하는 거라면야, 뭐."), 그 열의와 신앙심에 감복한 신부님은 매일마다 저녁 식사 전 우리 집에 들러 다정한 음성으로 동생 앞에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러나 동생의 발작적인 증상은 그대로였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그리고 또 새로워졌다. 어느 날부턴가 동생의 팔 주변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물어뜯은 듯한 상처였는데 정작 동생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했다. 병원에선 사람의 치아로 인한 상처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이 신고를 한 탓에 엄마와 아빠는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동생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또 늘어났다. 다양한 부위들로. 더불어 그에 비례해 악몽으로 인한 비명 또한 더욱 거세져 갔다. 이제 엄마, 아빠는 매일 밤마다 동생을 당장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하니 말아야 하니로 싸워댔다.


그렇게 그날이었다. 언제나 보다 조금 이른 새벽녘. 평소와는 달리 마치 짐승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에 우리는 반사적으로 깨어나 동생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자 어둠 속임에도 동생이 침대 앞에 우뚝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켜자(아마 아빠였을 거다) 우리는 동생의 모습과 행동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동생은 만면에 웃음꽃이 핀 얼굴을 하고서 이제는 하얀 뼈가 드러나기 시작한 한쪽 팔의 살코기를 게걸스레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압도적인 광경에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수 초 후에나 아빠가 나와 엄마를 살짝 감싸 안은 채 동생을 향해 말했다.



"마리아, 너 지금 뭐하는 거니? 가만히 있으렴. 아빠가.."



그러자 동생이 정말 미친 사람처럼, 마치 고장 난 인형마냥 얼굴을 격렬하게 흔들며 웃어 젖혔고 곧 덜렁거리는 살코기 한 점이 동생의 입에서 툭 떨어졌다. 동생이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쾌활하고 명료한, 그리고 탁한 음성으로.



"난 마리아가 아니야. 사람 잘못 봤수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온몸이 굳어버려 그저 꼼짝도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고, 그런 우리를 재미있다는 듯이 훑어보던 동생이 다시 덧붙였다.



"자빠지겠네! 니들은 지금 내가 마리아로 보이는 거니?"



여기까지가, 내 동생이 여름방학 중에 결박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일련의 이야기이다. 동생은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했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불행이 오지는 않았나 항상 사방을 살핀 끝에 불행과 눈이 마주쳐졌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강력했다.


동생은 여름방학이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금에도 여전히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다. 종종 음식물을 게워내고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집중 감시를 받으며 종종 악몽을 겪은 후에나 하루를 시작하면서 말이다.


자, 이야기 끝이다. 나? 나는 문제없다. 나는 불행이라는 놈을 다룰 줄 안다. 무엇보다도 나는 '목조 집의 그녀' 이야기를 결코 믿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낸 거니까.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성가시기는 했지만 효과는 내 예상 밖이었다. 덕분에 말이지, 나는 학교에서 같이 노는 친구들이 생겨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 그저 좀 놀래켜서 여름방학만이라도 껌딱지에서 해방된 채 홀로 바깥에서 호사를 좀 누리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나 자유의 몸이 되다니!


그리고 지금 나는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않는다.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가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내 동생은 오래도록 입원해있을 것이다.





-fin-




















후기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 중 하나를 꼽자면 '사람의 마음'을 들 수 있겠다. 특히나 '상대방의 마음'이. 그래서 뻔뻔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잘 사는 거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말거라.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간단다."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5428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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