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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존재한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7.18 22:04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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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존재한다




나는 미래에 대해 결코 생각하는 법이 없다.

어차피 곧 현실로 다가올 거니까.


- 알버트 아인슈타인





장례식 절차만큼이나 사람 진을 빼놓는 게 또 없다. 특히나 유족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목사의 손짓에 따라 무덤가 앞에 선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장갑 위로 쌓은 흙 한 줌을 관 위로 흩뿌렸다. 이어 목사의 말에 따라 조문객들 모두 고개를 떨구곤 묵상기도에 동참했다. 올리비아만 빼놓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무덤가를 감싸 안고 있는 묘비와 눈을 맞췄다.



에단 피츠패트릭 

MAY. 28. 1985

NOV. 7. 2016



절차가 모두 끝나고 올리비아는 같이 있어야겠노라 바득바득 우겨대는 부모님과 친구들을 한사코 마중 보내고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잠시간 거실에 놓여진 비취색상의 가죽소파를 훑어내리고서 곧 그곳으로 무너지듯 몸을 내실었다. 가죽소파는 군데마다 해져선 하얗고 거친 속살을 들이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속살을 쓰다듬으며 손끝으로 감촉을 연신 느껴댔다.


가죽소파는 에단의 좋은 파트너였다. 고된 일과를 거쳐 밥 먹을 여력도 없이 쓰러졌을 때, 컵스 경기를 보다 맥주 비우는 것도 잊고선 졸아버릴 때(에단은 그럴 때마다 TV를 향해 "정말 똥들을 푸고 있군."하고 중얼거렸다), 일요일 햇살에 맥을 못 출 때.. 그럴 때마다 에단은 새우등을 하고선 가죽소파의 품에 안겨 마치 세상을 벗어난 사람인 양 새근거렸다.


올리비아는 쓰다듬을 멈추고 가만히 하얀 속살의 내음을 들이켰다. 집안에서 에단의 외침이 다시금 울리는 것만 같았다. 으레 외치곤 하던 그 말이.



"리비! 밖에 갔다 왔으면 손부터 씻어!"



올리비아는 천천히 한 손을 내려 자신의 배를 연신 사뿐히 쓸어내렸다. 에단이 남기고 간 아직 여물지 않은 그의 유산을.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언제나 흐른다. 최근 올리비아는 그걸 새삼 느꼈다.


간신히 잠든 베서니를 복고풍 모델의 목제 아기침대에다 조심스레 눕히고선 올리비아는 숨돌림과 함께 생각했다.



'걷게 되는 날부터는 더 죽어 나가겠군.'



올리비아는 잠시 베서니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새우등을 한 에단의 감긴 눈이 절로 떠올라서였다. 올리비아는 픽 하고 웃었다. 이제 문득 에단의 기억이 떠올라도 그렇게 행복한 웃음이 나온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비록 인생의 의미 반이 사라진 채였지만.


에단이 있었다면 아마 이것보다 곱절은 훌륭한 목제 침대를 손수 만들어냈겠지.. 그러다 퍼뜩 정신을 돌린 올리비아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까치발로 방문을 나섰다.



'마지막 회를 놓치나 했더니 이렇게 시간이 남을 줄이야!'



계단을 내려온 올리비아는 거실로 가 절도있는 본새로 TV를 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가죽소파로 향하려다 문득 가죽소파 뒤편에 자리한 참나무 책장으로 시선을 놓았다. 그건 에단이 만든 수제 책장이었다. 책장으론 책들(대부분, 실은 거의 다가 에단의 것들이었다)이 틈도 안 주고서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빳빳한 색상의, 이제는 누렇게 바래진, 절판되어 다시는 구할 도리가 없는, 그런 책들이 서로 몸을 의지한 채 꼿꼿이 고개를 뻗치고들 있었다.


에단과 올리비아는 서로 책을 읽는 방식이 영 딴판이었다. 에단이 한 번 책을 들면 끝을 봐야 하는 식이었다면 올리비아는 조금씩 조금씩 날을 두고서 읽어내리는 식이었다. 에단이 하나의 큰 감정선으로 책을 대하는 거라면 올리비아는 날마다 다른 감정선으로 대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간 올리비아는 전혀 책을 대하지 않아 왔다. 베서니의 탄생과 육아로 정신적인 여력이 없기도 했었지만

사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가죽소파에 새우등을 하고 누워 있노라면 책장이 자신을 부드러이 감싸 안아 속삭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마치 에단처럼. 그래서 그 모양새들을 감히 흩트리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올리비아는 달랐다. 지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에단을 굳건히 쌓아 올릴 수 있었고 (에단이 생전 근사하고 훌륭한 목수였던 것마냥 그녀 역시) 오히려 더 깊어진 사랑은 이제 대체물이 필요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서야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세상의 순리가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어쨌건.


그 순간 올리비아는 갑자기 책이 읽고 싶어졌다. 에단이 읽던 책을 읽고 싶어졌다. 어차피 드라마 시작 전까지 시간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날마다 조금씩'이 아니던가. 잠시 검지 하나를 뻗어 책들을 헤아리던 올리비아는 한 책에 다다라 손을 멈췄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이었다. 올리비아는 에단과 처음 영화를 보러 갈 때 들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본 게 쥬라기 공원이야. 부모님이 데리고 갔었지. 끝나고 나와서 가판대에 전시된 랩터 장난감을 사달라고 얼마나 졸랐었는지 몰라. 그리고..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받은 선물이 됐지."



에단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읜 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을 땐 외톨이가 되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정말 외톨이였다. 에단은 누구와도 관계를 쌓지 않았다. 사실 올리비아가 에단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혼자였다. 올리비아는 에단과 만나면서도 그의 가족이나 친구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에단이 생전 친구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 친구들 모두 본래는 올리비아의 친구들이었지만.



"내 쪽엔 하객도 들러리도 없어. 가족도, 그리고 친구도."



결혼식을 준비하며 에단이 수줍게 말을 꺼냈고 초여름에 있었던 야외 결혼식에서 신랑 측 하객과 들러리는 올리비아 측 절반이 맡았다. 그렇다고 에단이 괴팍한 심보의 소유자라던가 성격 어디 한구석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올리비아의 가족과 친구들이 때때로 에단을 더 좋아하는 걸 노골적으로 표하면서 가끔은 질투가 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에단은 묘한 사람이었다. 말주변이 특출나게 좋다거나 뻔뻔한 얼굴로 금세 친해지는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단과 마주할 때면 모두들 마치 부모 품에 안긴 아이마냥 포근함을 느꼈다. 막 처음 본 그에게서 누구보다도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건 마치 자신의 추억을 함께 공유한 가족에게서 느끼는 그것과도 같았다.


올리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감히 사랑에 빠졌노라 말할 수 있으니까. 둘은 다음날 한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즉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올리비아는 발을 힘껏 뻗어 에단의 무릎에 뉘었고 그럴 때면 에단은 남는 손으로 올리비아의 발을 연신 쓰다듬었다.


흰색 페이퍼백으로 이뤄진 쥬라기 공원엔 표지 이곳저곳으로 쭈글한 금이 가 있었다. 마치 가죽소파의 속살마냥. 올리비아는 꼬맹이 에단이 랩터 장난감을 부여잡고서 만면에 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올리비아의 양 입꼬리로도 어느새 미소가 걸렸다. 오, 나의 엔. 오, 우리의 베티.


올리비아가 쥬라기 공원의 속살을 펼쳤다. 그러자 동시에 그 속살은 종이 하나를 토해냈다. 전형적인 접이식으로 접혀진 종이 하나를. 잠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 종이를 들쳐 올렸다. 그리고 종이를 접기 순서에 따라 차례로 푸는 와중 뜻 모를 심장 고동을 느껴야 했다.


이윽고 펼쳐진 종이 맨 위의 글자조합을 읽은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을 이마로 갖다 대곤 나지막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종이 맨 위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안녕, 내 사랑 리비



올리비아는 들고 있던 종이에서 잠시 눈을 떼야 했다. 어느새 흐르고 있던 양 눈가의 그리움과 사무침을 닦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음 문장을 읽으려면 말이다.



자기한테 하려는 이 말, 어떤식으로든 꼭 했어야 하는 이 말, 그걸 혹시 자기는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에 대해 원망을 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리비, 나는 그저 '시간'에 따랐을 뿐이야.


리비, 이제 자기는 내 얘기를 알게 될 거야. 지금 자기가 이 글을 읽어내리는 순간이 바로 그 때이니까.


자, 리비. 우리 베티는 세상 단잠에 빠졌고 드라마 마지막 회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야. 드라마는 결말보다 그 과정에서의 감정들이 중요한 거니까. 그러니까, 움직여!



올리비아는 꼬맹이 에단이 랩터에게 그랬듯 한동안 종이를 꼭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에단은 생전 자신의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물론이요, 당연히 자신이 지어준 이름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베서니의 단잠과 드라마 마지막 회라니..


그러나 종이 위로 남아있는 글씨는 분명 에단의 필체였다. 그리고.. 움직이라고? 움직이라니? 올리비아는 여전히 종이를 손에 쥔 채 그대로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서있어야 했다. 움직여! 에단의 외침이 들리는듯 했다.


그런 올리비아의 눈에 책장 맨하단으로 DVD 케이스 뭉텅이들이 들어왔다. 주말이면 올리비아와 에단의 밤을 밝혀주던 DVD들. 올리비아는 홀리듯 종이를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뻗어 DVD 케이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꺼내든 DVD 케이스를 앞면으로 돌리자 거기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문구가 있었다. 올리비아가 에단을 졸라 같이 몇번이고 돌려봤었던 DVD였다.


올리비아는 케이스를 열어 그곳에 있던 또 하나의 접혀진 종이를 봤고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그 종이가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종이를 펼치자 거기엔 빼곡하게 글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레카, 리비!


나는 자기가 첫 번째 종이를 본 뒤 곧바로 이 종이를 찾아내리란 걸 알고 있었어. (드라마 따윈 내팽개치고서!) 정말이야. 나는 자기한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


리비, 지금부터 이 글을 빠짐없이 잘 읽어야 해. (물론 난 자기가 그랬단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자기도 알다시피 난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어. 교통사고였지. 그분들이 부디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셨길. 그즈음부터였어. 그러니까, '시간'은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게. 아니, 실은 그걸 진정으로 깨닫는 데엔 훨씬 더 오랜 나날이 걸렸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나는 부모님을 볼 때면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되었어. 그건 부모님이 탑승한 차량과 몇 대의 차량들이 뒤엉켜 사고를 일으키는 거였지. 나는 그게 뭔지 몰랐어. 왜 그런 '장면'이 보이는지, 그리고 그게 뭔지도 말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서 나는 그게 미래를 본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감당하기 버거운 죄악감에 휩싸이게 되었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말리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친구들에게서도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있었어. 그래서 다툼, 사고, 불행처럼 나쁜 것들이 보일 때마다 그걸 막아보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모두 실패였어. 언제나 모든 미래의 순간들은 결국엔 '장면'대로 벌어졌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말이야.


리비, 내가 느껴왔던 그 무력감을 자기는 헤아릴 수조차도 없을 거야. 사실 자기가 헤아리지 않았으면 싶지만 말이야. 그건.. 슬픈 거니까. 나한테도, 자기한테도.


그러다 나는 '장면'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어.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꼈던, 그리고 느끼게 되는 강렬한 감정선, 바로 그 순간을 엿보는 게 '장면'이라는 걸. 내가 갖게 된 그 능력은 대체 무얼까? 우주에서 발생하는 먼지만 한 틈새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왜 내게 그런 능력이 생긴 걸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부터 나는 사람들과 일절 관계를 맺지 않았어. 더는 '장면'에 시달리고 싶지가 않았어.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나는 과거와 미래에만 존재하게 되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거든. 그래서 그냥 고통받지 않는 외톨이가 되기로 했던 거야.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어. 무력감보다 두려움이 더 컸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로부터 미래의 내 모습을 보게 될까 너무나 무서웠어. 거기엔 분명 나쁜쪽으로의 모습도 포함될 테니까.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나서 하나 깨달았어. 나는 그때까지 누구로부터도 그때 이후의 내 모습을 '장면'에서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래, 자기. 나는 애초부터 그들 모두와 평생 등을 지고 사는 거였던 거야.


그렇게 나는 외톨이로 살았어. 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게서부터 말이야. 그러다 리비, 자기와 만났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나는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어. 내 생에 가장 행복했고, 행복하고, 행복할 순간이었으니까.


자기와 맨처음 세상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그 순간 나는 '장면'을 보게 되었거든.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눈만 마주친 건데 말이야. 나는 그 찰나의 순간 보았어. 자기와 내가 다음날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거,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거, 초여름 야외에서 열린 환상적인 결혼식(자기의 말에 따르길 잘했어), 우리가 매순간 사랑하는 거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보였지만 나는 찰나 동안 그걸 모두 볼 수가 있었어. 자기가 손 위로 놓인 흙더미를 조심스럽게 내 무덤가에 바치는 것도, 베티가 첫 음성을 세상에 공표하던 것도, 드라마 마지막 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 베티를 재우던 것도, 지금 당신이 내가 남긴 이 글을 읽는 것까지도. 그리고, 자기와 베티의 삶도.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시간'은 경사로를 따라 흘러가는 돌멩이가 아니라 경사로 그 자체였다는 걸. 그 찰나의 순간이 끝나던 순간 나는 알게 되었어. 나는 리비 자기를 사랑해왔고 사랑하고 사랑할 거라는 걸. 그 순간이 처음으로 운명이 내 편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지.


그리고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라고. '시간'은 존재하는 거라고. 그러니 리비, 자기. 더는 나를 그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 없어. 나는 지난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이 다음에도 당신과 베티와 같은 순간에 함께 있는 거니까. '시간'은 존재하는 거니까.


리비, 자기. 자기가 아직 손댈 엄두도 못 낸 차고 지하의 내 공간, 그곳 한가운데 바닥을 보면 나무 바닥이 들리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거기엔 자기와 베티에게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주는 편지가 있어. 왜 그런 데다 숨겨놨냐고 화내진 마. 난 그저 '시간'에 따랐을 뿐이니까.


편지는 정확히 베티가 성인이 될 때까지에 해당하는 것들만 있어. 왜 그때 것까지만 썼냐고 아쉬워하지는 마. 자기랑 베티가 죽을 때까지의 편지를 쓰고 싶은 게 내 마음이라지만, 드라마의 묘미는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감정에 있는 거니까.


그러니 리비, 인생을 즐겨! 그게 바로 내가 당신 덕분에 알아낸 우주의 진실이야.


추신. 편지 말미에 날짜를 기입하지는 않을게. 나는 자기와 베티, 둘 모두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같은 순간 함께 있는 거니까.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에단이, 어떤 순간.



편지를 모두 읽어내린 올리비아는 눈물을 떨구지도 또 전혀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아주 깊이.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니까. 그녀는 자신과 에단, 그리고 베티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같은 순간 모든 모습으로 같이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녀의 몸 속 모든 세포가 그걸 깨닫고 있었다.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조심스레 접어 DVD 케이스에 넣으면서 올리비아는 에단을 만난 이래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자신의 취미이자 마음을 채워주곤 했던 일, 홀로 바에서 여유롭게 한잔하는 일, 그 일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꼈다. 인생은 즐겨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시간은 존재한다. 언제나 존재한다. 올리비아는 이제 그걸 안다.



"맥캘란 12.. 아니, 18 더블 온더락으로 부탁해요."



바텐더로부터 한 잔 받아든 올리비아는 구석으로 걸어가 자리를 트고서야 입을 축였다. 저마다 무리를 지어 저마다의 감정으로 부딪혀가는 모습들을 몰트를 홀짝이며 보고 있는 건 가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기분이 꽤나 좋았다. 올리비아는 무리 지은 군중들 사이로 이방인이 되는 걸 꽤나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군중을 안주 삼아 홀짝이던 중 근처에서 자신처럼 홀로 서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올리비아는 이내 시선을 거뒀으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다시금 눈을 돌리자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살그머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우리들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자 내는 그런 표정이 아니라 즐거움에 겨워 얼굴 밖으로 새어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이었다. 올리비아는 필시 남자가 어린 시절의 웃는 얼굴 그대로를 가지고서 자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안돼. 지금은 정말 남자를 만나고 싶지가 않아. 그럴 때가 아니야.'



그 순간 어느새 올리비아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여전한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정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와 같은 미소를 지은 채로 한 손을 쭉 뻗으며 말했다.



"올리비아예요.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리비라고 불러요."



남자는 역시 한 손을 쭉 뻗어 올리비아의 손을 아주 부드럽고 깊이 움켜쥐고선 말했다. 올리비아는 남자의 음성이 마치 자신을 품에 안은 듯 자상하다고 생각했다.



"안녕, 리비. 전 에단이에요. 에단 피츠패트릭. 엔이라고 불러도 돼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모를 거예요."








-fin-




















후기


그저 글을 쓰고 싶어 쓰는 사람이든 인세를 받고 글을 쓰는 사람이든 창작 분야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책상에 죽어라 앉아선 이야기를 짜맞춰가는 방식, 자신이나 타인의 경험을 모델로 이야기를 구상해가는 방식, 독자로 하여금 의도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자 시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 등등.


내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고 할 수가 있겠다. 나는 이 창작 분야에 도통 재능이라곤 없다. 정말이지 우스울 정도로 없다. 다만 가끔씩 잠이 들던 찰나의 와중, 잠이 든 순간에서의, 그리고 잠이 막 깨려는 찰나의 와중 간혹씩 어떤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그 순간은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순식간의 찰나이다. 짧으면 수 초, 길면 1분. 그리고 과정에서 간혹 접하게 되는(전달받게 되는, 더 정확히는 꿈꾸듯 느끼게 되는) 이야기 구조가 있다. 말로 더 자세히 설명하긴 어려우나 어쨌건 그렇다.


어떤 이야기인지를 떠나 그 순간 어떤 긴 행복보다도 농밀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 또 그런 이야기를 더듬고 더듬어 미약한 글재주로나마 끄적일 수가 있어 더할 나위가 없다.


내가 지금껏 끄적여 온 창작 단편물 모두가 이런 식으로 탄생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 노출됨에 따라 부끄러운 한편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혹시 이런 방식이 너무도 편하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건 어찌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말인즉슨, 이런 방식은 마치 스팸 전화와도 같아서 지가 원할 때만 걸어온다는 거겠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간과 관련한 SF적 이야기를 원했고 2018년 7월 11일 새벽간 잠자리에서 찰나에 전달받았으므로 이렇게 이날 이른 오후 작성을 마치는 바이다.


아, 에단의 말마따나 2018년 7월 11일이 아니겠다. 어떤 순간 찰나에 전달받았으므로 이렇게 어떤 순간 작성을 마치는 바이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320349339

Double Down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6.25 11:03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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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Down





어둠 깔린 2성급 호텔 창문 앞에서 나는 서 있었다. 어찌 이런 색을 골랐을까 싶은 연고동 색상의 커튼 자락을 한 손으로 툭툭 쳐대면서. (그럼 그 자락은 계속해서 열심히도 돌아왔다) 저 아래 호텔 정문으로 자리한 싸구려 인조야자수 잎 끝자락 자락 갈라진 개수를 세며 나 마이클 켐블은 서 있었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멈추고서 욕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기분 나쁜 쇳음과 함께 벌거숭이 모습으로 나온 레스터가

불알을 수건으로 털어대며 외쳤다.



"이런 싯팔.. 미키!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왜 말 안 했냐! 불알 터질뻔했잖냐!"



걸쭉한 웃음과 함께 내 뒤로 바싹 다가온 레스터가 쥐고 있던 수건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어 수건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목덜미를 힘주어 잡고선 조용하게, 또 마치 동요를 부르는듯한 억양으로 말했다. 이건 레스터가 어릴 때부터 나를 안심시킬 때면 쓰던 방법이었다.



"괜찮아, 미키. 다 잘될 거다. 행운은 필요해질 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거든.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고."


"..만약 내가 진다면?"


"그럼 계속해서 패를 돌려. 더 많이 패를 돌리는 거야. 완전히 질 때까지."


"..그러고서 완전히 진다면?"


"걱정 마, 따샤. 승부는 너 혼자서 하지만.. 뒈질 땐 내가 네 앞에 있을 테니까." 



내 머리 위에다 수건을 올려다 놓고선 레스터는 알몸 그대로 침대 커버 속으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비벼댔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들의 갖은 정액 덩어리가 새겨진 커버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레스터가 다시 말했다.



"인마, 뭣하면 스트립걸이나 부를까? 아까 카지노들 둘러보는데 웬 비너가 명함을 주더라고. '핫 베이브가 호텔 방에서 보여드립니다. 696-9696' 옌병할, 이 번호 죽을 때까지 못 잊어먹을 거 같지 않냐?"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레스터는 황망히 웃음기를 거두어 크게 숨을 내뿜곤 재차 말했다. 마치 사과는 빨간색이라는 걸 설명하는 것처럼.



"걱정 마라. 켐블家 남자는 필요할 때가 되면 승부에서 이긴단다. 그리고 내일이 바로 그 때고."


"..하지만 모두들 자기 여자가 뒈질 땐 손도 쓰지 못했지."



내 말에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던 레스터는 한 차례 픽 하고 자조 섞인 콧방귀와 함께 '네 말이 맞아, 천재 양반.'하고 대꾸했다. 그리곤 이어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살려야 할 거 아냐. 한 번쯤 역사를 거슬러보라고, 따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가지고 있는 게 거의 없다. 그저 남아있는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얼굴 하나를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내 친형 레스터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어머니는 우리가 철이 제대로 들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촌부였다. 뉴멕시코주 남동부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놈 중의 촌놈이었고 우리 또한 그랬다. 우리는 어릴 적 마을(학교가 있는) 외곽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고 아버지는 양을 치기 위해 30마일은 떨어진 목장에서 해가 떠 있는 동안을 보냈다. 그곳에 있을 때면 별채에 마련된 라디오와 전화기가 아버지의 마누라요, 자식놈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우리 형제가 매번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일요일이었다. 그날이면 우리는 엄마의 전매특허인 칠리소스가 조금 들어간 '크리스마스(우리 지역의 전통음식이다)'를 먹고 아버지의 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점심때까지 함께 양을 쳤다.


그 이후부터가 중요한데, 우리 세 남자는 별채 원탁에 둘러앉아 엄마가 싸준 팬케이크를 목구멍에다 들이밀며 카드를 쳤다. 우리가 치던 카드 게임은 언제나 블랙잭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딜러를, 배팅액은 1게임당 1쿼터 상한이 룰이었다.


그렇게 우리 세 남자는 일요일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대통령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름의 주일예배를 실천했다. 아버지의 목장 별채는 우리 형제에게 있어 신의 안식처였던 셈이다. 일요일은 우리 남자들에게, 또 엄마에게도 말썽쟁이 세 놈에게 벗어나 한숨 돌리는 안식일이었다.


아버지는 유능한 딜러인 동시에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매일의 절반을 외로움과 싸우며 우리 가족을 뒤에서 보필한 신이 내린 양치기였다. 그는 불평 따윈 도통할 줄을 모르던(적어도 우리 형제가 태어난 이후로는), 매번 생색 없이 일용한 양식과 따뜻한 옷가지를 내려주던 진정한 사내였다.


물론 이런 사내도 약해질 때가 있었다. 엄마가 난소암으로 손쓸틈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내는 거의 두 달 내내 우울해 있었다. 평소보다 목장 별채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일요일마다 운영되던 주일 예배당도 중단됐다.


이 무렵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왠지 평소처럼 대하면 어느 순간 툭 하고 아버지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우리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더 사랑했다는 걸 느꼈기에 그걸 알 수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까지 묵묵히 외로운 싸움을 견디던 아버지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형제를 불러세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마당에 놓인 가로로 길쭉한 오동나무 의자(아버지가 엄마를 위해 직접 만들었었던 의자였다)에 앉아있었다. 우리 형제는 서로 눈치를 보다 쭈뼛거리며 아버지 양옆으로 자리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한 번씩 훑고는 멜빵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곤 나와 레스터 입에다가도 하나씩 물리고는 차례로 불을 붙여줬다. 그렇게 세 남자는 시외 담배 전문점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말보루를 꼬나물고는 사내의 딜러 복귀를 미리 축하했다.


아버지는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우리 형제가 성인이 되도록 해주었으며, 나와 레스터에게 각각 싸구려 중고차를 내려 어디든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내가 아내와 결혼하고 딸을 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내는 갑작스레 간암으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위해 살았다. 우리 형제는 신을 믿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믿었다. 아버지는 신이 내린 양치기였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우리 형제는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게 됐다. 레스터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자신의 첫사랑 사만다와 앨버커키에서 살림을 차렸다. 나는 본래 살던 집을 처분하고 아버지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 여전히 양 치는 일(정확히는 그 일이 더 확장되어 젖소들도 생겼다)을 했다.


나와 레스터가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된 건 둘 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면서였다. 내 아내 샤롤르트는 감기를 심하게 앓는가 싶더니 심근염으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레스터의 연인 사만다는 약물중독치료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호텔방에서 약어로 된 가루를 거하게 빨고는 난간에서 노래 부르며 율동을 하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그나마 위안인 건 샤롤르트와 달리 행복한 기분으로 생을 마감했을 거라는 거겠다.


그리고 이제 내 딸 클로이는 급성 백혈병이라는 원인도 알 수 없는 아주 악독한 병 때문에 2차 골수 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두 차례의 항암치료와 골수 이식 후에 1주년 기념 파티를 하기 직전 병이 재발해서 말이다.


클로이마저 암에 걸리면서 이제 나는 완전히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선 내가 신의 대리인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한편 이 저주받은 켐블家를 돕고자 내 형 레스터가 돌아왔다. 레스터는 기꺼이 나와 함께 신의 대리인이 되기로 해주었다. 항암치료와 골수이식 비용 등으로 이미 내 똥꼬가 털려버리자 자기 똥꼬를 내놓으러 레스터가 고향으로 복귀한 거다.


곧 레스터는 자기가 알던 날건달을 통해 이탈리아 이민자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 시칠리아 태생의 남자 앞에서 서약을 하는 신세가 됐다.



"둘 다 잘 들어, 이 모래밭 촌양키들아. 기한일에서 1초라도 지나면 곧장 우리 애들이 잡으러 갈 거야. 그리고 마리아께 맹세컨대 너희 형제를 다른 얼치기 놈들의 반면교사로 삼고 말겠어. 너넨 살아있는 채로 소장과 대장이 어떻게 그렇게 길었을까 하고 보게 될 거다. 도망갈 수 있으리라 생각지 마. 그러니까 내 말은, 네 딸을 두고서 말이야."



"으아아어어어어!"



곯아떨어진 레스터의 입에서 날숨이 뒤범벅된 끔찍한 웅얼거림이 새 나왔다. 아마 꿈속에서 자기 소장과 대장을 보던 중이었나 보다. 그걸 방해하면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최대한 조용하게 자세를 바꾸고는 재차 잠을 재촉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와 양을 칠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미키, 양의 털은 깎고 깎고 또 깎을 수가 있단다. 하지만 껍질은 아니야. 껍질은 한 번밖에 벗길 수가 없거든."



도박 또한 그렇다. 도박에서 승리하는 법은 간단하다. 여러 번 이기는 게 아니라 단 한 번 이겨야 할 때 이기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좋지 않은 패가 들어오면 뒈져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날 가장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껍질을 벗겨내는 거다.


아버지는 주일 예배당에서 우리 형제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블랙잭만큼 신사다운 카드게임이 또 없지. 플레이어가 승리할 가능성이 49.72%나 되거든."



늘 그랬듯 아버지 말이 맞다. 블랙잭은 신사들의 게임이다. 딜러가 이기거나, 플레이어가 이기거나. 하지만 이 신사들의 게임에서조차 언제나 승리하는 건 딜러들이다. 간단하다. 플레이어들은 돈을 따려고 하지 않고 꿈을 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행에 환희를 보내고 잃었을 때를 추억한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부도덕한 거지 결코 블랙잭이 부도덕한 게 아니다. 승리하고자 노력해 본 적 없는 쪽이 돈을 따는 거, 그거야말로 부도덕한 거 아니겠는가.


그래, 물론 세상은 부도덕한 일로 넘실댄다. 문제는 어리석게도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에게도 그런 부도덕한 불로소득이 올 거라고 기대한다는 거다.



"딜러 퀸, 딜러 버스트.. 플레이어 윈입니다."



내 주변으로 '와'하고 탄성이 이어졌다. 옆의 처음 보는 양복쟁이는 얼굴이 시뻘게져선 내 어깨를 연신 움켜쥐며 환호했다. 그러곤 자기 옆 여성(좀 전까지 마치 런웨이이를 걷다가 온 듯한)의 허리춤을 거칠게 안아채고는 침을 튀겨대며 외쳤다.



"봤어? 봤어?"


"그래, 자기야. 저 사람이 이긴 거지?"


"그래! 벌써 8만 달러라고! 이봐, 형씨! 좋았어! 이렇게 된 거 10만 달러 채우라고!"



양복쟁이가 다시금 내 어깨를 쥐고선 흔들어댔다. 재수 없는 것들. 저 치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자기 경주마인 양 행동한다. 마치 운명이란 놈이 늘상 궁핍하고 불운한 것들을 찾아내어선 쥐고 흔들려는 것처럼. 나는 양복쟁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입꼬리만 힘겨이 올려 보이고선 테이블의 칩을 내 쪽으로 끌어모았다. 맞은편의 생선 대가리를 닮은 딜러가 반쯤 벗겨지고 없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겨우 중얼거렸다.



"..축하드립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일순 내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모두가 나를 주시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눈만 살짝 돌려선 조금 떨어져 자리한 레스터를 바라봤다. 빨대가 꽂힌 프루트 주스잔(얼음이 녹을 대로 녹아 밖으로 수증기가 맺힌)을 들고선 우두커니 서 있던 레스터는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다시 눈을 돌려 이번엔 내 앞의 딜러를 쳐다봤다. 딜러는 나처럼 빌린 돈으로 카드라도 치는 것처럼 저 너머의 핏보스(얼굴테로 개기름이 낀)를 흘끗 바라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재차 얼마 없는 소갈머리를 정돈했다. 오, 생선 대가리. 그래도 너는 게임이 끝나도 네 안에서 나온 창자 더미가 손 위에 올려질 일은 없을 거 아니냐.


카드판은 양치기와 여러모로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엔.. 너무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보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놓치기 마련이다. 그런 내 속내를 어느새 읽었는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군중(이미 한참 전부터 테이블엔 나와 딜러뿐이었다)이 발을 구르며 합창하기 시작했다.



"위너, 위너, 치킨디너! 위너, 위너, 치킨디너!"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군중을 한 번, 레스터를 한 번, 핏보스를 한 번, 딜러를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앞에 쌓인 칩 더미를 봤다. 딜러가 말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배팅하죠. 한도만큼"



내 말에 군중은 재차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딜러는 체념한 듯 카드를 정리해 셔플마스터에다 정성스레 투입하기 시작했다. 나는 칩 더미 속에서 반무퉁이 가량을 떼 앞으로 밀어젖혔다. 도박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그날 가장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껍질을 벗겨내는 거다. 지금 이 시각 이 생선 대가리의 맞은편 자리는 패가 들어오는 자리다. 그리고 나는 아직 필요한 껍질이 한참이다. 관광와서 스트립걸들 팁이나 벌어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레스터? 그 자리 그곳에 서 있던 레스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 번 숨을 크게 내쉬는 입 모양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딜러가 말했다.



"딜하겠습니다."



첫 번째 플레이어 카드, 숫자 9. 첫 번째 딜러 카드, 숫자 10. 두 번째 플레이어 카드, 스페이드 잭. 그리고 두 번째 딜러 카드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졌다. 딜러가 입술을 오므린 채 내 손동작을 기다렸다. 나는 가만히 내 앞에 놓인 카드 두 장을 번갈아 봤다. 먼저 숫자 9를, 그리고 이어 스페이드 잭을. 그다음 딜러 앞에 놓인 오픈된 숫자 10을. 나는 나도 모르게 절로 중얼거렸다.



"..그날과 똑같아."



그날과 마찬가지로 스페이드 잭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인마, 내가 네 램프의 지니가 되어줄게. 나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애꾸눈 잭이니까."



고등학생 무렵 동네에서 형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카드 말이다. 특히나 블랙잭을. 형은 그야말로 애어른 할 거 없이 동네 남자들의 주머닛돈을 모두 긁어모았고 또래 여자들은 돈 대신 유방을 보여주느라 가슴이 남아나질 않았다. 이건 정말이다. 상대방 동행인과 함께 번갈아 딜러 역할을 해야 하느라 항상 형 옆에 있었으니까.


당시 마땅한 오락거리 하나 없던 시골이었던지라 주말이면 동네에 혼자 사는 프랭키 아저씨네 집에서 카드판이 벌어졌다. (프랭키 아저씨는 모두에게 입장료를 받았고 추가 요금을 내면 식을 대로 식은 크래프트 병맥주도 내왔다) 그리고 간혹 대승부가 벌어지는 날엔 대관료를 받고서 집을 비워주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주말마다 신성한 카드판의 집정관 노릇을 했다. 카드판이 벌어지는 날마다 집 앞 흔들의자 위에 몸을 뉘어 크래프트 병맥주와 싸구려 담배(간혹 입장료가 없는 사람은 대신에 담배를 냈다)를 했는데 그때마다 어깨 한편으로 엽총이 자리하고 있어 카드판에 끼는 사람들은 카지노에 온 양복쟁이들 마냥 지극히 예의가 바르고 순순했다.


이런 카드판에 전설로 남은 명시합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레스터가 낀 판이었다. 그리고 그 시합은 레스터의 십 대 마지막 시합이기도 했다. (이 시합 이후 도박사실을 아버지에게 들키면서 코피가 두 번이나 나야 했으니까) 레스터가 동네 남자들의 돈을 휩쓸면서 아무도 함께 카드를 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번 돈은 중고로 포드 픽업트럭을 살 정도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레스터는 엄마를 잃고 나서부터 언제라도 가족이 아프면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돈을 모으려 했단다)


물론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돈 욕심에 덤비는 자들이 몇 있었으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이윽고 레스터가 카드 카운팅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엔 다들 촉새 레스터가 무슨 수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겠냐며 웃어넘겼지만 불알 두 짝까지 쫙쫙 털리는 이들이 속출하면서 모두들 레스터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건 현명한 처사였다. 레스터는 진짜 레인맨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현명치 못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어느 날 '더 크레이지' 크루즈가 형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크루즈는 그 애칭답게 정신이 좀 돈 놈이었다. 레스터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성격이 그렇게 포악해 학교는 일찌감치 퇴학당하고 동네 어른들도 길을 가다가 마주치면 눈을 피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그런 크루즈가 도전장을 내밀었고 레스터는 자기가 무슨 챔피언 벨트라고 두르고 있는 양 호기롭게 그 도전을 수락했다.


그건 레스터에게 꿍꿍이가 있어서였는데 그 꿍꿍이란 다름 아닌 크루즈의 여동생 사만다였다. 사만다는 동네 또래 여자애들 중, 아니 동네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다. 하지만 사만다와 데이트를 한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눈이 높아서였는데.. 엄밀히 말해 사만다가 아니라 크루즈의 눈이 높아서였다.


사만다에게 집적거린 남자애들은 다음날이면 작살이 나도록 얻어맞고 발가벗겨진 채로 길가에서 발견되기 일쑤였는데 어떨 때 보면 크루즈가 코피 터뜨리는 일을 즐기려고 자기 동생을 이용하는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레스터 또한 사만다를 흠모했으나 자기 코피 색을 확인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던지라 가끔 마주치면 캣콜링을 날리며 윙크를 하는 게 다였다.



"얼빵아, 룰을 좀 바꿔야겠어. 고 잔대가리를 돌려대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날 크루즈는 테이블 위에 카드덱 4벌을 올려놓고서 말했다.



"바뀐 룰은 이거야. 룰 하나, 여기 내 동생만 카드를 딜한다. 둘, 매경기마다 이 4벌을 셔플한다. 셋, 카드를 딜할 땐 동일한 카드덱이 아니라 각각의 카드덱에서 돌아가며 돌린다."



그건 훌륭한 묘안이었다. 그런 방식으론 레스터는 물론이고 조니 모스, 도일 브런슨 같은 양반일지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을 테니까. 사만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테이블 위의 카드덱을 차례로 셔플하기 시작했다. 나와 레스터는 마르스에게 지혜를 빌려준 게 이 사랑스러운 미네르바였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가 있었다.


나는 레스터를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댔다. 대관료는 버린 셈 치고 망신살 한번 당한 뒤 나가는 게 상책이었으니까. 레스터는 내게 윙크를 날리고는 크루즈에게 말했다.



"좋아. 찬성이야."


"좋아. 하지만 아직 몇 가지 더 있어, 얼빵아. 마저 들어봐."


"..좋아."


"룰은 동일해. 다만 딜러 역할은 번갈아 가면서, 그리고 배팅은 텍사스홀덤 식으로, 자기 턴마다 배팅 가능, 상한가 없음, 한쪽이 전부 잃을 때까지."


"..좋아. 하지만 상한선을 정하지 않았다가 만약 진 쪽 쩐이 부족하면?"


"그럼 오늘은 그 부족한 만큼 흠씬 두들겨 맞고서 차용증을 남겨야 겠지."


"..알겠어. 네 룰에 따를게. 다만 이쪽도 요구사항이 있어. 그걸 들어주지 않겠다면 게임은 여기서 종료야."


"그래, 한 번 지껄여봐."


"두 가지야. 하나, 나는 돈을 걸겠어. 전부 잃게 되면 당연히 그건 네 거야. 지불액보다 많이 잃으면 기꺼이 얻어맞고서 차용증도 남기겠어. 단, 너는 돈을 모두 잃어도 그 돈을 주지 않아도 돼."


"..그건 또 무슨 잡소리야?"


"네가 가진 돈을 다 잃으면.. 돈 대신 네 여동생이랑 데이트하게 해 줘."



레스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루즈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위압적으로 생긴 각진 턱으로 마치 레스터의 얼굴을 빵꾸라도 내려는 듯 밀착시켰다. 크루즈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만다를 한 번 흘끗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선 레스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좋다구. 그렇게 하자. 네가 오늘 두 발로 집에 갈 수 있을지 정말 기대된다, 얼빵아."



비열한 웃음과 함께 크루즈가 테이블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판돈 대신 여자애들의 가슴을 보는 데다 사만다를 걸라는 요구를 그 오빠가 받아들이는 게 남성 우월적으로 보였다면 사과한다. 변명하자면 그땐 그런 시대였다. 국기의 불명예 사건이 채 잊혀지기도 전이었으며 지나가는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당연한 권리이자 미덕인 시대였다.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턱을 까딱거리는 크루즈를 앞에 두고서 레스터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 이 게임은 나 대신 여기 내 동생 미키가 끝까지 한다."



그 말에 크루즈는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 대신 너네가 가진 돈 보다 더 많이 잃으면 둘 모두 손봐주는 거다. 어이, 거기 샌님! 빨리 앉아. 게임 시작이다.'라고 외쳤다. 레스터는 눈만 똥그랗게 뜨고 있는(그래, 이번엔 내가) 내 목덜미를 힘주어 잡고선 조용하게, 또 마치 동요를 부르는 듯한 억양으로 귓속에다 말했다.



"괜찮아, 미키.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내 돈 다 잃어도 돼. 혹시 돈이 부족해서 맞게 되더라도.. 승부는 네가 하지만 뒈질 땐 내가 네 앞에 서 있을게. 뭐.. 그럴 일도 없겠지만. 너도 알지? 카드 카운팅 없인 네가 나보다 잘하는 거. 그리고 카드 카운팅이 있어도 결정적인 게임에선 항상 네가 이기는 거."



내 앞으로 미니멈 배팅액인 2달러 치 칩이 올려지고 크루즈가 딜러로, 곧이어 사만다가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플레이어 카드, 숫자 9. 첫 번째 딜러 카드, 숫자 10. 두 번째 플레이어 카드, 스페이드 잭. 그리고 두 번째 딜러 카드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졌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원아이드 잭을 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크루즈에게 말했다.



"..더블다운."



크루즈가 피식하고 웃더니 대꾸했다.



"지금 상황에서 더블다운을 하겠다고? 그래, 맘대로 해봐라. 나야 감사히 따라가 주지. 야, 형 쪽 켐블. 네 동생 정신머리 멀쩡한 거냐? "



나는 내게 놓여진 칩 전부를 앞으로 밀어젖히고는 다시 말했다.



"..우리가 가진 돈 전부를 베팅하겠어."



크루즈는 내가 내민 2천 달러가 조금 안 되는 칩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샌님놈이.. 지금 여기서 장난이나 하자는 줄 아냐?"



레스터가 황급히 다가와 내 어깨를 짚고는 '얌마, 미키!'라고 작게 웅얼거렸다. 나는 그런 레스터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려 포개고선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아, 레스터. 내가 이기는 게임이야."



내가 그렇게 득의양양하게 첫판부터 더블다운으로 올인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날 이 승부를 두고 나는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새벽 늦게야 선잠에 들었다. (레스터는 진작부터 코를 골아대며 자빠졌었지만) 그리고 그런 선잠 와중 꿈을 꿨다. 블랙잭 게임이 진행 중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플레이어였다. 딜러가 내게 카드를 2장 줬는데 하나는 숫자 9였고 다른 하나는 스페이드 잭이었다. 그리고 딜러의 오픈 카드는 숫자 10이었다. 스페이드 잭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친구. 더블다운을 걸어.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 전부 베팅해."


"하지만.. 2 이상이 나오면 내가 지는 거잖아."


"그래, 너 똑똑하다. 잔말 말고 전부 베팅해!"


"그렇지만.."


"인마, 내가 네 램프의 지니가 되어줄게. 나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애꾸눈 잭이니까."


"..좋아. 내게 승리를 줘."



그리곤.. 베팅과 함께 내게 마지막 카드 한 장이 들어왔다. 에이스였다! 총합 20. 내 앞의 스페이드 잭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봤지? 이젠 딜러 차례다. 오래 끌 거 없이 한큐에 끝내줄게."



이어 딜러 측 남은 카드 한 장이 오픈되었고.. 그 카드는 숫자 7이었다. 언 럭키 세븐! 딜러 측 총합 17. 딜러가 숫자 17 이상이므로 스테이가 되어 내가 승리했다.



"..야, 내 동생이 더블다운으로 전부 건다잖아. 어쩔 거야? 받을 거야, 죽을 거야?"



레스터의 도발 섞인 어조에 크루즈가 재차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좋아. 좋다, 이 얼빵한 형제야. 사만다! 카드 돌려!"



크루즈의 외침에 경기라도 일으키듯 일순 놀랐던 사만다가 조심스레 카드덱 중 한 곳에서 꺼내 든 카드를 내 앞으로 펼쳤다. 에이스였다. 레스터가 비명 같은 외침을 날렸고 크루즈는 똥그래진 눈으로 나와 내 앞의 에이스를 계속해서 번갈아 봤다. (사만다는 참으로도 귀여운 딸꾹질을 했다) 내가 말했다.



"자, 크루즈. 내가 네 카드를 맞춰볼까? 네 카드는 불운하게도 숫자 7일 거야. 언 럭키 세븐인 셈이지. 총합 17, 강제 스테이, 플레이어 승."



크루즈가 마치 내 팔 한 짝을 뽑아버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곤 자신 앞에 놓인 덮어진 카드를 오픈했다. 숫자 7이었다. 레스터가 외쳤다.



"싯팔! 미키! 네가 뭘 했는지 봐봐!"


"이건 말도 안 돼!"



크루즈가 테이블 위의 칩들을 손으로 거칠게 쓸어버리며 외쳤다. 그리곤 이어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쥐어틀었다.



"비열한 쥐새끼 같으니라고!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내가 간신히 호흡을 끊어가며 '카드는 네 여동생이 돌렸잖아'라고 말했고 크루즈는 '입 닥쳐!'라는 말과 함께 내 멱살 채로 나를 반쯤 들어 올렸다. 레스터가 현관을 향해 다급하게도 외쳤다.



"프랭키! 프랭키! 문제가 생겼어요!"



거의 동시에 쾅 하고 문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프랭키가 모습을 나타냈다. 프랭키는 마치 지옥 불에서 숙면을 취하던 중 억지로 지상으로 끌어올려 진 악마마냥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테이블 앞으로 느릿느릿 큰 걸음으로 다가온 프랭키가 입을 열었다.



"애송이들아. 내가 대관료를 받고 자리를 빌려준 거지.. 여기가 너네들 학교라도 되냐? 조용히 카드나 치라고."



레스터가 나와 크루즈를 가리키면 숨넘어갈 듯 조아렸다.



"우리가 이겼는데 이 자식이 행패를 부리잖아요! 프랭키, 당신 카지노에서 감히 멋대로 굴 수 있는 건가요?"



나와 크루즈 쪽으로 고개를 돌린 프랭키가 바로 앞까지 와서는 다시 입을 뗐다.



"그건 안되지. 내 카지노에선 룰을 지켜야 하고말고. 룰 하나, 졌으면 돈을 뱉어내. 룰 하나, 싸움은 바깥에서. 룰 하나, 행패 부리는 놈은 내가 엉덩이를 까준다."



이번엔 내 멱살에서 손을 뗀 크루즈가 프랭키 쪽으로 한발 다가가 얼굴을 치켜들곤 말했다.



"그래서.. 어쩔 건데. 거기 그 낡아빠진 엽총으로 날 쏘기라도 할려고? 쏴보시지, 그래?"



나, 레스터, 사만다가 침 삼키는 것도 잊고 상황을 주시하는 가운데 프랭키가 얼굴을 한층 더 내리깔고선 말했다. 그 거대한 키에다 오히려 위압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깡마른 몸매, 그리고 잔주름 곳곳으로 팬 서늘함을 뿜어내며.



"아니, 그렇지 않아. 널 쏘다니. 당치도 않지. 내가 산 거의 반만큼도 살지 않은 널 쏴봐야 무슨 명예가 남겠어.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내 룰을 지키지 않겠다면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너와 나, 우리 둘 모두 이제부터 아주 재미없는 시간이 될 거다. 약속하지."



그 말에 잠시 프랭키의 얼굴을 훑던 크루즈는 이내 귀까지 시뻘게져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곤 현관 쪽으로 걸어 나가면서 도중에 레스터를 거칠게 밀고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해 지기 전까지 사만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맹세컨대 너네 형제를 산송장으로 만들어 강둑에다 거꾸로 처박아 줄 거다."



"..손님? 스탠드 하실 겁니까?"



내 앞의 생선 대가리 딜러가 말했다. 내가 대꾸했다.



"아뇨.. 더블다운이요."



주변의 군중이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 언제 왔는지 레스터가 내 바로 뒤로 자리하고 있었다. 딜러가 말했다.



"..지금 더블다운이라고 하셨나요? 확실하신 건가요?"


"그래요. 더블다운. 그리고.. 저기 핏보스도 좀 불러주고요. 여기 있는 칩을 전부 걸 거거든요."


"..손님, 상한선은 5만 달러까지입니다. 그건 인정되지 않아요."


"네, 똑똑하시군요. 그래서 제가 핏보스좀 불러 달라고 한 겁니다."



딜러는 오므린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핏보스 쪽을 바라봤다. 한편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핏보스가 그 개기름 낀 몸뚱일 마침내 움직여 딜러 옆으로 와 섰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제안할 게 있습니다. 더블다운을 걸고서 제 칩을 전부 베팅하고 싶어요."


"..선생님, 저희 카지노 블랙잭은 상한선이 5만 달러입니다."


"나도 내 칩이 전부 얼만지는 알아요. 하지만.. 자, 보세요. 어차피 이 테이블 구멍도 전부 내 차지고.. 그리고 나랑 딜러 카드도 좀 보시고요."



핏보스가 내 카드와 딜러 카드를 힐끔 확인하고는 말했다.



"안됩니다, 선생님. 테이블 상한선은 5만 달러입니다."


"이봐요, 라스베가스 최고의 상한가 테이블을 보유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 그 호텔의 핏보스가 너무 겁이 많은 거 아닙니까? 그쪽 재량으로 가능하단 거 다 알아요. 내 카드를 보세요, 난 맨몸으로 내 모든 걸 다 걸고 있다고요. 겨우 상한가의 2배예요. 아니면, 내가 계속해서 상한가 베팅으로 게임을 해도 날 끌어내리지 않을 거라고

여기 사람들 앞에서 약속해줄 수 있어요?"



핏보스는 내 카드와 딜러의 카드를 다시 한번, 그리고 더 많아진 주변 군중을 살짝 둘러보고선 말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이번 베팅 한 번뿐입니다."



핏보스의 말에 군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편 내 뒤로 레스터는 한 손으론 내 어깨를 짚고는 말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그런 손 위로 내 손을 포개고는 레스터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레스터. 내가 이기는 게임이야."



딜러가 빠르게 여러 번 앞머리를 추켜올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플레이어 더블다운. 남은 카드 한 장 딜하겠습니다."



다시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해진 가운데 딜러가 일순 머뭇거리는 손 움직임으로 카드를 꺼내어 내 앞으로 오픈했다. 에이스였다.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군중들이 미친년놈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레스터도 벌게진 얼굴로 내 어깨를 쥐고선 흔들어대며 '부야!'라고 외쳤다. 딜러는 내가 본 가장 애처로운 눈빛으로 옆의 핏보스를 힐끔 쳐다봤다. 핏보스는 그 옛날 크루즈가 지었었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어깨를 짚은 레스터의 손을 두어 차례 쓰다듬고는 핏보스를 향해 말했다.



"이제 제가 딜러 측 카드가 뭐일지 말해볼까요? 숫자 7일 겁니다. 그리고 총합 17로 스테이가 되는 거죠. 언 럭키 세븐."



내 말에 핏보스는 양 허리로 손을 짚고는 귀까지 벌게져선 나를 노려봤다. 그 중간에서 딜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딜러 카드 오픈하겠습니다.."



이어 딜러가 자기 앞의 뒤집어진 카드를 오픈했다. 그리고 군중들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픈된 딜러 측 카드는 에이스였다.



"....미키, 아직 끝난 게 아냐. 돌릴 수 있을 때까지 패를 돌리는 거야. 아직 내일까지 하루 시간이 더 있잖냐. 오늘 너무 빠르게 벌었던 거야."



카지노 한복판에서 다 쓰러져가는 나를 한 손으로 지탱하며 레스터가 말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달리 레스터 특유의 낙관학개론도 내 귀에 머물질 못했다.



"레스터..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주머니에 있던 50센트 뭉텅이를 꺼내 레스터의 손에 올려놨다.



"이게 지금 우리 전부야.."



나는 레스터 손 위로 케네디 얼굴과 함께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새겨진 동전들을 잠시 멍하니 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건 목적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레스터와 떨어지기 위함이었다. 그 옛날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가 또한 우리 형제를 피하던 것처럼.


그 순간 내가 신을 믿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을 믿는다면, 그러면 그 작자가 어디 있든 찾아내선 흠씬 두들겨줄 테니까. 그럼 사람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불로 태우겠지. 빌어처먹을 놈의 신, 신, 신! 아! 라스베가스여! 사막 한가운데로 솟은 오아시스! 신기루인지도 모르고 목구멍에다 모래를 퍼넣는 도피자들!


나는 재차 찾아온 현기증에 한쪽 무릎과 한쪽 손을 땅바닥에다 짚어야 했다. 마침 내 옆을 지나가던 노부부가 내 쪽으로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디밀고는 걱정스레 말했다.



"이봐요, 괜찮은 게요? 사람을 불러줄까?"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노부부는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저 노인네들보다도 빨리 뒈지게 생겼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내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여러 것들이 떠올랐다.


이제 어째야 할까.. 레스터.. 먼저 레스터에게 사과해야겠다. 날 위해 자기 목숨도 내놓다니.. 젠장, 그 시칠리아 놈이 분명 우릴 죽일 거야. 레스터에게 그놈을 소개시켜준 크루즈가 그걸 도울 거고. 그 자식은 사만다가 죽으면서 레스터에게 더더욱 원한을 가졌으니까. 시칠리아 놈은 우리 장기를 시험용기에다 절여놓고선 한쪽 방에다 전시하겠지. 그럼 돈을 빌리러 오는 놈들마다 거기로 데리고 가선 이러는 거야. '이거 보여? 여기 용기 앞에 붙인 사진 속 놈들 몸 안에서 꺼낸 거야. 내가 직접. 자, 이게 주는 교훈이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으면 내가 알려주지. 돈과 관련된 약속은 절대로 지킬 것!'


그러다 문득 양치기 목장 별채에다 보관하는 사냥용 엽총(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로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총이 나가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차피 은행직원은 그걸 그리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이번엔 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포옹하던 그 순간이. 그 애의 다 빠진 머리에다 입 맞추던 순간 풍기던 두피의 살 내음. 그 애의 눈가에 키스하던 순간 입술로 느껴지던 눈썹의 무게. 입원실을 나가는 나를 가만히 새겨놓던 그 눈매.


나는 헛구역질이 올라와 다시금 땅바닥에다 손과 무릎을 짚고는 입을 가려야 했다. 사실은 입보다 눈가를 먼저 훔쳐야 했지만. 그러다 내 머릿속으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깨달았다.


그건 기도쟁이들이 평생 손을 맞잡아봐야 결코 깨우칠 수 없는 진리였다. 신이 내린 양치기란 없다. 신의 대리인은 없다. 오로지 신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신은 저 위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신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로 존재하고 있다.


신은, 가족이다.


내 머릿속으로 울리기 시작하던 요란한 경고음이 카지노 전체를 뒤덮었다. 곧이어 이번엔 레스터의 째지는 비명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미키! 미키! 내가 잭팟을 잡았어! 아아아! 싯팔!"




-fin-
























후기


이 이야기의 마지막 씬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티븐 킹 단편 <Luckey Quarter>를 오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제목인 Double Down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궁금하면 찾아보시라!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300384421

  1. 정신읽고 글을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 주인공은 포기했지만 형은 더블 다운해서 행운을 잡았다는 얘긴가요? 잘 이해가..
  3. 혹시 이제 번역은 안하시나요..?

그대 커피숍 창가로 악마를 보거든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6.16 15:52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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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커피숍 창가로 악마를 보거든




나는 그날을 처음부터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날은 5월 24일이었어요. 그날 난 커피숍 창가 너머의 악마와 만났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비유나 은유, 시적인 표현으로써의 악마를 말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그자는 일견 악마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말인즉슨 헐벗고 벌그죽죽한 몸뚱이도, 제멋대로에 날 선 치열도, 막 자라 굽어진 손발톱의 모습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악마는 못 봐줄 몰골로 음험하게 나타나는 족속이 아니었던 거죠.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성미 급한 당신이 지금쯤 몸을 들썩이며 지루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2015년 5월 23일. 나는 본가가 있는 경기도 외곽으로 향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고 실질적으론 두 번째 이유로 인한 방문이었다.


이유 첫 번째,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할아버지(늘 사냥감을 막 놓친 호랑이마냥 날이 서 있었다던)는 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 급성 심장정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냥반은 갈 때도 뒤 한번 안돌아보고 갔지.' 아빠가 한 말이다.


이유 두 번째, 독립한 지 4년 반 만에 돈이 다 떨어졌다. 하여 본가에 들러 내가 똬리를 틀만 한 둥지가 있는지 정세를 살펴야 했다. 이유 두 번째에 대한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말하자면, 내 직업은 글쟁이다. ('돈이 떨어졌으면 일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잖아?'라고 중얼거렸었다면 이 대목에서 조금은 납득이 갔겠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글쟁이 직업에 대한 이야기 좀 해볼까 한다. 글쟁이가 직업적으로 갖는 단점이야 모두들 알고도 넘칠 터이니(돈! 돈! 돈!) 남들이 언뜻 모를 수도 있는 장점을 말해보겠다.


먼저, 어느 곳에서든 살 수가 있다. 서울 밖은 물론 도심이 아닌 어느 교외 지역에서든. 이건 어디서건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적 배경에 있어 무척이나 편리한 부분이다. (베개와 책만 주시라!) 글쟁이를 생계수단으로 삼으려는 치들(왜 굳이 이 짓을 하려는 거지?)에게 유경험자로서 하나 조언하자면 가장 좋은 거주지는 부모님 둥지라는 거다. 일단 들어가라. 그리고 골방에서 조용히 지내라. 그럼 해결되리라. (베개와 책 외에는 원하지 마시라!)


하나 첨언하자면, 특히 이 직업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에게 그야말로 감당 못 할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헛된 망상을 붙들지 말 것. 그 재능은 어떻게 파악하느냐고? 경험을 토대로 말해주자면 파악할 시도를 해본 적이 있다면 이미 재능이 없는 거다.


또 하나 장점은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든 좋은 첫인상을 줄 수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이런 식이겠다.



"실례지만, 지금 하시는 일이 뭔가요?"


"아, 글을 쓰고 있어요."


"작가시구나!"



그러면 상대는 이제 밑도 끝도 없는 호감을 보내온다. 당연히 인간적인 호감 부문에 한정해서. 물론 그러한 호감은 내가 무언가를 이룩해서가 아니다. 사실 상대는 내가 어떠한 글쟁이인지 크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호기심에 무슨 종류의 글을 쓰는지야 묻겠다만. 이건 정말이다. 그들이 근본 없는 호감을 품는 원천엔 숱하게 많은 글을 남긴 '오래된 작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신 작가'를 줄줄이 꿰고 있는 괴짜는 거의 없다)


즉, 그들은 나를(혹은 글쟁이인 당신을) 바로 그 옛날 굶주린 주둥이로도 아편은 빨아 재끼며 작품을 완성해간 예술가들로 투영해 보는 것이다. 그네들은 아편 빤 예술가를 삼위일체처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 얼마나 우스운 불로소득인지. 그러니 만약 당신이 글로 돈을 벌고 있다면 이 예술가 선생들이 쌓은 다리 위에서 기꺼이 춤추길. 참고로 나는 앞뒤로 신나게도 흔들어댔다. 끝이 언제 올지 모를 땐 격렬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본가로 향했다. 5-6년 전 유명 작가의 이름을 딴 공모전에서 입상, 내 이름이 딸린 글이 출간, 단군 이래 호황이었던 적이 아직 없다는 출판계에서 신입 작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세를 기록(물론 액수를 본 월급쟁이들은 '그거 정말 못 해먹을 직업이구나'라고 자기 위안이 담긴 동정을 보내겠다만), 인세로 서울에 반전세 집을 장만.


그리고 지금은 글쟁이의 직업으로써 장점인 '어디에서나 살 수 있다'와 '가장 좋은 곳은 부모님 둥지'라는 절대 명제를 깨고서 서울 생활을 만끽하던 이 늙어버린 청춘은 아직 자신의 둥지가 남아있나 확인을 하러 가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별수 있으랴, 사람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결코 현명해질 수가 없는 법 아니던가. 언제든 또 다른 글로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글쓰기 재주가 어디로 떠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모르고 있었던 거다. 그 재능은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내게 남겨진 길은 두 개였다. 사형선고를 받들어 아사할 때까지 미련에 매달리거나, 유배지로 쫓겨나 부자유 속 자유를 누리거나. 4년 반 내내 별 볼 일 없는 연재처들에 궁둥짝을 빌어대며 월세로 보증금을 바람 빼먹듯 구멍 내던 나는 그렇게 본래의 둥지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허나 '최소한 글은 계속 쓸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위안을 위해 부모님께 사실을 전하고 혈정(血情)에 매달려야 했거늘 결국 제사 다음 날까지 끝내 체면치례하던 입속에다 점심밥을 밀어 넣던 나는 민망함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선 황망히 시외버스터미널로 나섰다. 그렇게 집을 나와 시내까지 걸었다. 십수 년 전 등교하던 때처럼 그저 그래야하는 거니까 발을 끌어가며 걸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걸 제외하곤 이제 목적지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시내엔 제법 많은 수의 가게가 존재했다. 헌데 우습게도 몇 년 새 군청 지휘 아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만 그 좁다란 시내에서 보이는 거라곤 커피숍뿐이었다. 그곳엔 내가 아는 대형 커피 체인점과 내가 모르는 대형 커피 체인점이 모두 있었다. 두 걸음 뗄 때마다 커피숍이 나타나곤 했는데 아마 이곳 커피숍 주인들은 매번 자기 옆집 커피숍에 잘못 들어가 한숨을 푹 내쉬곤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킬 게 틀림없었다.


덕분에 내 기분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둥지만 되찾는다면야 어느 커피숍이곤 굽히고 들어가 한자리 차지하고 말 테다. 그럼 본가에 눌러앉아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면책권이 생기리라.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금세 사치와 안락, 그리고 자축을 누리고파 마땅한 커피숍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글쟁이들은 본디 현실감각을 거부하며 사는 법이다)


바로 그때였다. 가게명으로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간판명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긴 조합의 글자로 이루어진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 조합은 외국의 인명 내지 지명 같기도 했는데 간판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이질감'이었다. 입구의 간판명 밑으로 나무 계단이 위로 늘어져 있기에 그것이 2층의 가게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게의 건물 외관 역시 간판명만큼이나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너머의 그 가게를 한동안 넋이 빠져라 보고 있었는데 만약 누가 내게 다가와 저 건물은 아직 나라가 독립한 사실을 몰라 숨어 사는 투사들의 아지트라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만큼 건물의 외관은 너무도 오래된 풍의 양식을 띠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2층 창가로 보이는 높다란 테이블로 보아(그리고 지역색으로 미루어) 그곳이 분명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것을. 허나 가게 안으로 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게는 마치 현지인들의 터부이거나 혹은 너무도 형편없어 찾는 이라곤 옆의 2층짜리 대형 커피 체인점 사장뿐인 것 같았다. 그 사장은 아마 오늘도 계단을 올라 그 가게에 들어섰다가 '아, 제발!'이라는 한탄과 함께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겠지.


나는 곧 내 안의 충동이 무책임하게 설득해오는 것을 느꼈다. 혹시 모르지, 저곳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일지. 보통 그렇잖아? 내가 장담하는데 구약에 나오는 사탄은 바로 이 '혹시 모르지'로 둔갑해선 우리들 속에 똬리 틀고 있다.


그 순간 그 2층 가게의 창가로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손에 컵을 든 남자였다. 내 나이대의(당시 나는 고작 서른하나였다) 사람이 이렇게 표현하는 게 조금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는 젊은이였다. 헤어스타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는 절대로 단정한 옆머리를 하지 않으니까. 옆머리를 단정하게 치면 길거리 공무원들로부터 딱지를 끊는 줄 알거든.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자 마음먹었던 게 그를 보기 전이었는지 아니면 본 후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건 당시 그를 통해 앞으로 있을 도전에 대비해 일종의 평온을 맛본 것만은 확실했다. 설령 저 가게에 들어가더라도 주인이나 손님이 나를 쏘아보며 '대관절 저렇게 어린 놈이 여긴 왜 오는 거야?'라고 중얼거릴 일은 없을 테니까. 노인네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 모두 미덕을 지키지 않는 얼뜨기에겐 조소를 보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비법이니까.


계단에 올라서자 그 끝엔 나무로 된 구식 출입문이(열쇠 하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왔다. 나는 순간 너무도 클래식한 모양새에 기가 죽어선 잠시 문이 자동으로 열리길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문은 제 모습을 유지했고 나는 맥없이 싸구려 도색의 손잡이를 돌렸다.


가게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생각 이상으로 정상이었다. 지나침 없이 정갈한 원목 바닥재, 실용성을 강조한 심플한 디자인의 테이블, 천연화산재로 마감된 벽면, 바닥재를 자연스레 비춰주는 색상의 조명등들(부검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조명이 아니라), 사방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관엽식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책들.


다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건 바로 내 쪽으로 향해 선 노인이었다. 노인은 아내를 떠나보낸 지 족히 20년은 되어 보이는 차림새였다. (이 나이대의 남자들은 결코 아내 없인 사람 많은 곳으로 나서지 않으며 아내가 새로 사주지 않는 이상 마음에 드는 옷만을 주야장천 입어댄다) 비닐 재질의 얇은 단색 재킷과 그 안으로 피케이 티셔츠(본래 색상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는) 차림을 한 노인은 내 쪽을 향해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처음 가게를 두고 했던 고민에 이어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여섯 발자국 앞의 노인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하는. 그냥 자연스레 지나쳐가면 될까? 그러기엔 이 노인이 너무 가까이 있는 데다 테이블 사이의 통로 또한 극적으로 비좁았다. 비켜달라고 할까? 안 돼, 아직 이곳이 노인들의 텃밭이 아니라곤 장담할 수 없으니까. 같은 요청이라도 자기 집 현관문에서 들으면 기분 나빠지는 법이 아닌가.


그렇게 우뚝 서 있던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에(그가 입은 잿빛 기지 바지만큼이나 싸구려로 보이는, 그러나 깃털 같은 몸을 지탱하기엔 충분히 단단해 보이는) 의지해 겨우 눈치챌 만한 느릿한 발동작으로 출입문 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2시간도 전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했던 듯싶다.


나는 이내 문 안쪽 좁다란 옆 공간으로 비켜섰다. 노인은 신중하게 지팡이질을 해가며 경사진 계단을 내려갔고 그 노인으로 인해 그때까지 고민 중이던 내 마음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적어도 이 집 커피엔 저 노인네가 목 부러질 각오로 올 만큼 특별한 게 있으리라.


밝아진 기분으로 다시 눈을 가게 내부로 돌리자 이번엔 창가의 그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는 내가 유령이라도 되는 양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선 노인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팔목까지 어설프게 걷어 올린 진한색상의 데님 셔츠에 검정 슬랙스 밑단으론 복숭아뼈가 깡총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책장 바로 옆에 위치한 테이블 아래에다 짐가방을 끌어다 놓은 뒤 조금은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카운터를 향했다. 가게엔 손님이 나 하나뿐이었으며(주인인지 직원인지도) 카운터 바로 앞 우측의 목제 기둥에는 벽걸이용 블랙보드 메뉴판과 스피커가 자리하고 있었다.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즈풍 노래가 흐르던 90년대풍 싸구려 스피커에서 글렌 밀러의 '문라이트 세레나데' 전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남자가 싱거운 어조로 내뱉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내 눈에다 시선을 맞춘 상태에서(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정확한 발음의 저음을 내놓았기에 무뚝뚝함보단 정중함에 가깝게 느껴졌다. 남자의 본새가 제법 멀끔했기에 긴장과 더불어 의구심도 풀렸던 나는 그러나 시외교통비만 한 가격표를 확인하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우라질, 커피값 받는 거로 건물 외관을 뜯었어도 열두 번은 했겠네. 그래도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영 손해는 아닐 것이다. 저 많은 책 중 봐줄 만한 거 하나는 있을 테니까. 


남자는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주며 커피는 자리로 갖다 주겠노라고(거, 참. 편리하군) 했다. 나는 손님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굉장히 상투적인 목 돌림으로 가게 이곳저곳을 채점하고는 이내 책장 앞으로 갔다.







남자가 테이블에 프러시안 블루색(그럴듯하게 들리지?) 컵을 내려놓고는 쌩하고 돌아갔다. 나는 <목수들이여,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란 책을 마저 꺼내 든 뒤 의자를 바짝 붙여 앉았다. 컵 안엔 진한 색상 위로 하얀 하트가 사무적이게도 수놓여 있었다. 어쨌건 맛은 좋았다. 그건 인정해야겠다. 내 취향에 거의 근접한 달콤쌉싸름이었다. 에스프레소가 영 저질은 아니었나 보다.


커피 맛도 괜찮고, 손님도 들지 않아 평화롭고, 친근한 척 말 건네는 가게 주인도 없고, 모든 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다. 그렇게 절로 콧소리를 내며 잔을 반쯤 비우곤 책 속 주인공이 결혼 당사자가 불참한 결혼식장에 당도한 부분을 읽어내려 갈 때였다.



"커피 맛은 괜찮나요?"



어느새 맞은편으로 자리를 차지한 남자가 꼭 짐짓 꾸며내는 듯한 어조로 쾌활히 물었다. 마치 투덜대며 눈 치우러 나왔다가 이웃집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나는 어설픈 미소로 그렇다고 대답함과 동시에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남자는 내 완곡한 의사 표시에도 아랑곳 않고선 어느새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친근한 척 말 건네는 가게주인도 없고'는 정정해야겠다)



"..임대료가 좀 부담이 돼야죠. 이럴 거면 뭐 한다고 이런 깡촌까지 내려왔는지.. 사실 여기 목도 내 입장에선 힘에 부치거든요. 세상에 귀신보다 무서운 게 부동산이라더니. 잘하는 거 없는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세상이 개만도 못하니 개 같은 것들만 판을 치고."


어느새 나는 책장을 덮고선 남자를 향해 적당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자는 내 또래로 보였으나 분명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인 듯했다. 상대에게 사적인 불평을 털어놓으면서도 묘한 카타르시스와 유쾌함을 느끼게 하려면 천성적인 말재주 외에 남이 하지 못한 경험이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가게 문 열고서 처음으로 온 손님이 아까 그 노인네였다니까요. 환장하겠는 건 매번 이런식 이라는 거거든요. 노인네 냄새 가까이서 맡아본 적 있으세요? 죽음의 냄새가 뒤엉킨 찌릉내. 그런 사람들이 여기 손님의 다라니까요. 아, 내가 뭐 나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던가 그런 건 아닌데요.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은 도통 원하는 게 없다는 거예요. 마음속에 '바라지 않는 것들'만 가득 차 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그런 사람들 싫어요. 아주 질색이거든요. 사람이라면 자고로 원하는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죠. 언제 어느 때라도요. 그래서 난 노인네들이 여기 오는 거 싫어요. 그 사람들은 '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여기 깡촌 것들도 죄다 마음에 안 들어요. 실은 도시 것들도 그렇지만요. 사람들이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알아요? 아침 되면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노인정에 갔다가 밤이면 집으로 기어가고. 자기 일 외에는 모든 게 스스로 굴러간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워낙 등신들인지라 정치라면 대통령 인기투표가 전분지 알죠. 사내새끼들은 그저 쑤셔댈 곳 없나만 생각하고 기집들은 TV에다 인생을 허비하고요.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것들이에요. 서서 싸냐 앉아 싸냐만 빼고 죄다요. 거짓말 아녜요. 남자든 여자든 하는 거라곤 마냥 배부를 때까지 입속에다 뭐든 쳐넣는 거라니까요. 지가 뭘 원하는지도 몰라요. 잊어버리기로 했거든요. 먹고 자기 위해 사는 주제에,

그것밖에 생각하는 게 없으면서 겉으론 지들이 어찌나 괜찮은 사람인 척들을 하는지! 그거 범죄예요. 우리끼리 법전에다가만 써놓지 않기로 한 거지 범죄라니깐요.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모든 범죄가 나쁜 놈이 저지르는 게 아니라고요. 담배만 몸에 해로운 게 아니라고요. 하긴 어쩌겠어요. 인간이 본래 죄 많은 동물로 살아야 하는 법이잖아요. 그래야 구원받거든요. 성경에 나온 것처럼요."



나는 식어버린 컵을 의미 없이 돌려대며 적당한 웃음으로 계속해서 반응해주었다. 남자가 무슨 말을 더할지 사뭇 궁금했기 때문이다. (본디 극단적인 게 재미있는 법이다) 비록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있더라도 어쨌건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남자의 말본새를 보고 있자니 적잖이 유쾌했다.



"손님, 책 아주 좋아하나 보네요?"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실은 글 쓰는 일 하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한 나 자신에게 적잖이 놀랐다. 상대가 끈덕지게 물어오지 않는 이상(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다. 빌어처먹을 세무원 같은 것들) 글을 쓰는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 이후의 뻔한 레퍼토리들('책도 냈나요?', '뭐에 대한 거예요?')이 언제나 나를 꽤나 우울하게 만들어서였다. 그들은 뻔한 질문을 하고 뻔한 표정과 뻔한 생각으로 나를 본다. 마치 광대를 광대로만 바라보는 것처럼.



"오, 작가님이셨네."



남자가 한 차례 입꼬리를 양옆으로 길게 늘어뜨리곤 말했다.



"사실 그쪽이 가게에 왔을 때부터 알았어요. 작가님한테 원하는 게 있다는 걸요. 그래서 작가라는 대답에 별로 놀라지 않았지."



잠시 이게 무슨 말인고 눈알을 굴리고 있자니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그쪽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는 작게 '그렇군요.'라고 대꾸하고는 좌우로 컵을 돌려대는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쟁이이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언제나 환영이지만 그 주제가 나를 향할 경우엔 정말이지 사양이다. 더구나 그게 훈계조라면. 차라리 얼굴에 침을 맞는 게 낫지.



"저기요, 의미 없는 짓 좀 그만 해요. 이미 사는 동안 충분히 그랬을 거 아녜요."



잔을 돌려대던 내 손목을 짓누름과 동시에 남자가 쇳소리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의 손 마디 마디는 보기 좋은 것을 떠나 다소 괴상할 만큼 기다랗고 가늘었다. 그리고 손목에 느껴지는 감촉은 그 옛날 초등학교 과학 시간 개구리 배때지를 갈라보라는 선생님의 엄포에 떠밀려 쥐었던 메스 손잡이를 떠올리게 했다.



"내 얘기했으니까 이제 작가님 얘기도 해봐요. 토요일 대낮부터 쫓겨난 행색으로 젊은 사람이 다 무너져가는 외벽 안으로 기 들어온 이유요."



손목에서 손을 뗀 남자가 재차 쇳소리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동시에 내 머릿속에선 성난 눈알로 개구리 배때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쏘아대며 '그어! 그으라고!' 명령하던 과학 선생의 음성이 떠올랐다. 나는 짐짓 꾸며낸 동작으로 허리를 반쯤 추켜세우곤 카운터 너머의 벽시계를 훑는 척했다.





2시 19분에서 20분으로 가기 직전.



"..이제 가봐야 돼서, 시외버스 타야 하거든요."



나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짧게 내뱉고는 고개를 떨군 채 짐가방을 챙기기로 했다. 맞은편의 남자와 같은 부류들을 꽤나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이유를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사유로 탈바꿈하는 치들. 시비를 걸어도 될법한 상대에게라면야 뭐든 시도하는 치들. 그러한 분노로만이 스스로를 가치평가 할 수 있는 치들. 세상의 대다수가 그와 같은 얼치기들이기에 나는 그런 부류를 꽤나 잘 안다고 확신한다. 내가 컵을 돌려대서? 호응이 시원찮아서? 웃는 게 비웃는 것처럼 보여서? 뭐든 좋다. 어떤 것이든 이유가 될 수 있으니까. 임대료만큼 손님이 들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남자에게 있어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남자가 이유 두세 개를 더 만들어내기 전에 적당히 둘러대곤 도망치는 꼴로 피해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몸을 숙여 테이블 밑을 사방으로 둘러봐도 짐가방이 보이질 않았다. 짐가방은 남자의 옆자리에 놓여있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양손(손가락이 거의 손목뼈에 닿을 정도였다)을 하고 있었다.



"시외버스 타러 가야 한다니까요.. 지금 안 가면 시간을 제때 못 맞춰요."



내 목소리가 어쩐지 애원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들려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왔다. 남자는 내 말에 과장스레 감탄과 웃음소리를 꾸며내고는 답했다.



"작가님이라서 그런지 말을 재밌게 하시네. 저기요, 그렇게 시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행색으로 이런 싸구려 건물을 왔다 갔다 하는 처지가 됐을까요? 도대체 그 티셔츠랑 신발은 뭐예요? 어디 가면 돈 주고 살 수 있는 거예요? 옌병, 그 바진 차라리 아까 나간 노인네 쪽이 더 세련됐네."



순간 발가벗겨진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황급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벗겨진 치부들을 그나마 가릴 수 있도록. 남자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사뭇 인자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름 대신에 작가님이라고 계속 불러도 되죠? 언제나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요즘 글은 잘 써져요?"



나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소가 아닌 웃음을 터뜨린 건 거진 1년하고 3개월 만이었다. 내 눈가는 순식간에 불그스레 물들었다. 글이 잘 써지냐는 물음을 들은 것 역시 1년하고 3개월 만이었으니까.



"4,506자, 4년 동안 내가 쓴 차기작 단편의 글자 수예요. 남들 하는 거 따라 하며 살려고 쓴 연재 글의 글자 수는

그 수십 수백 배가 되겠지만요."



내 목소리가 마치 쥐 새끼가 구녕으로 꽁무니를 뺄 때 낼법한 요상한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그거참.. 힘들었겠네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음성, 눈빛, 표정에는 어떠한 불순물도 첨가물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콧잔등까지 벌게져선 연신 콧물을 먹어댔다.



"4년 동안 혼자 그렇게 싸운 거예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당시 내 또래들이 그랬듯 동네 태권도 도장에 다닌 적이 있다. 본래 태권도가 끝나면 봉고차에 태워져 집 앞에서 내려야 하거늘 언젠가는 같이 다니던 친구 놈 집 앞에서 내린 적이 있다. 그놈의 오락기 있다는 말에. 친구 집에서 놀고선 집에 가기 위해 차도 하나를 건넌 적이 있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 엉엉 짜면서 엄마한테 말했었다. 친구 집에서 놀고 혼자 차도를 건너왔다고. 적잖이 혼날 걸 각오했었던 나를 엄마는 살짝 안아주고는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혼자서 차도도 건너고 대단하다면서. 마치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가 나를 감싸 안듯 물어온 게. 그러자 우습게도 나는 여지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이들 앞에선 스스로를 만들어내느라 감히 할 필요가 없었던 내 사생활에 대해서 말이다.



"그걸 다 말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테이블 위로 냅킨을 집어 들어 흘러내리는 콧물만 살짝살짝 닦아내며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여긴 올라오는 계단이 많아서 노인네들이 오려면 입구에서 안쪽까지 족히 1시간은 걸릴 거거든요. 그거 보단 길지 않죠? 그럼 좀 곤란해서."



웃음보가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나는 웃음보를 참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예요. 그러니까 국민학교 때죠. 학교에 검프라고 불리는 애가 있었어요.."



이어 작당을 모의하는 소년들처럼 서로를 마주 보던 중 내가 말했다.



"야, 포레스트 검프!"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소리가 난다 싶으면 그곳엔 항상 검프가 있었다. 학교의 공식 지정 바보였던 검프. 뭔가 짜증이 난다거나 재밌는 게 보이지 않을 땐 남자애들은 검프 뒤로 살그미 다가가 참으로 호쾌하게도 뒤통수를 갈기곤 했다. 여자애들은 눈만 마주쳐도 앙칼지게 쏘아붙여 댔는데 그래도 그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단 나았으므로 검프는 주로 여자애들 근처를 서성였다.


나? 나는 아마 유일하게 학교 남학생 중에서(동급생 중에서) 검프의 뒤통수를 갈기지 않는 애였을 것이다. 그건 정의감에서가 아니라 쑥스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철부지에다 까불이인 동시에 어떤 부분에선 기벽이라고 할 만큼 애어른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있어 검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건 마치 반 애들 앞에서 춤을 춰대는 것과도 같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괴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쨌건 앞장서서 검프를 놀려대거나 뒤통수를 갈기지 않으면서 남자애들끼리의 암묵적 증표를 마다한 나였으나 다행히 그걸 꼬투리 잡는 애들은 없었고 따라서 내 뒤통수도 무사할 수 있었다. 애들은 철부지 까불이 또는 괴짜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검프는 바보였는데 당시 우리끼리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 바보'는 아니었다. 반에서 꼴찌는 도맡았지만 그 앞의 녀석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말이 어눌하고 행동거지가 둔했지만(물론 이따금 침도 주르륵 흘리고) 그것 빼곤 사실 특별하게 우리들과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무렵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미 바뀌었었다) 때였다. 우리는 달마다 짝꿍을 바꾸곤 했는데 그 날은 짝꿍 바꾸는 날 전일이었다. 종례시간이 모두 끝나고 떼 지어 나가는 애들 틈에서 나를 끄집어낸 담임선생님이 살며시 말했다.



"잠깐 남아서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할래?"



본디 반 남자애들과 곧장 축구시합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나는 남자들끼리의 신뢰를 그 자리에서 팽개치곤 얌전히 선생님을 따라 다시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선생님은 학교에서 가장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보기 좋게 각진 얼굴 가운데로 진하고 얇은 눈썹에다 항시 구불거리는 풍만한 머리채를 단정히 치켜 묶고 다녔으며 가끔씩 청바지를 입기도 했다. (당시 선생님이, 특히나 여선생님이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온다는 건 애들에게 있어 쇼크에 가까웠다.)


또, 선생님에게선 늘 좋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그래서 우리 반 여자애들은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다. 비록 내색하지 않느라 애들을 써댔지만 그건 남자애들도였다. 학교 최고의 덩치이자 말썽꾼이었던 녀석도 선생님 앞에선 곧잘 생글거렸을 정도였다. (우리는 녀석의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오싹함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 선생님이 반장도 부반장도 아닌 나를 따로 불러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선생님은 교실 한 가운데 자리에 나를 앉히고는 자신은 그 앞자리 의자에 몸을 거꾸로 돌려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어른이 우리처럼 그렇게 의자에 앉는다는 게 참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뭐든 들어줄게요!) 재욱이 있잖니. (아, 검프 놈이 왜요?) 내일이 짝꿍 바꾸는 날인데 재욱이랑 여기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



나는 선생님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그 깨끗하고 반질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평소처럼 '이달의 불행한 아이'가 나올 때까지 종이 뽑기로 짝꿍을 정하거나(그렇게 불행한 아이가 된 여자애는 책상에 금을 긋곤 검프 놈이 움직일 때마다 기겁하기 일쑤였고 남자애가 짝꿍이 된 날엔 이따금씩 퍽 하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아니면 안경잽이 반장 부반장 중 하나를 시키면 될 일 아닌가?



"선생님은 네가 재욱이 짝꿍이 돼서 선생님이 말한 것들을 해줬으면 좋겠어."



선생님이 내 카라 한쪽을 바로 잡아주며 말했다.



"왜요?"



억울한 마음을 감추느라 다소 괴상해진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뒤통수를 갈기지 않는 것과 짝꿍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건 비밀인데.. 선생님은 너를 제일 좋아하거든. 이 학교에서 제일로. 다들 재욱이를 싫어하지? 그래서 너희들에겐 이게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잖아. 그러니까 선생님은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선생님은 제일 좋아하는 애를 제일로 믿거든. 선생님 부탁 들어줄래?"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생님이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팔을 움직일 때마다 말도 안 되게 좋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이어 선생님은 나를 똑바로 향한 채 눈과 입으로 환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날 조회 시간. 종이 뽑기를 하기도 전에 나는 검프 놈 옆자리에다 가방을 폈다.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검프 놈의 짝꿍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애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 일제히 나를 둘러싸고선 위로를 건네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나는 위로를 받을 만큼 슬프지가 않았다. 아니, 실은 기쁘기까지 했다. 선생님이 누구를 제일 좋아하는지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검프 놈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때마다 점잖게 꾸지람을 놓았고 급식 시간에는 반찬을 남기지 않도록 감독관 역할도 수행했다. 그리고 남은 학기 내내 검프 놈과 짝꿍을 자처했으며 졸업식 날 선생님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얼굴로 나를 꼭 안았다.


짝꿍을 정하는 날 전일, 선생님은 내게 가장 완벽한 미소를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게 주었던 건 하나가 더 있었다.


짝꿍을 정하는 날, 저마다 위로를 건넨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갔을 무렵. 한 여자애가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와선 무섭도록 깨끗한 눈동자를 한 채 또렷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너 진짜 멋지다. 정말로."



그 애의 이름은 김초현이었다. 하지만 남자애들은 그 애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그 애를 '로보캅'이라고 불렀다. 그 애는 5학년 때 전학 왔다. (그때도 같은 반이었다) 처음 그 애가 교실에 나타났을 때 우리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우뚱 기우뚱



그녀는 선생님을 따라 좌우로 양어깨를 갸웃거리며 한 발 한 발 큰 걸음으로 교탁까지 나아갔다. 교통사고가 그녀에게서 너무 빨리도 커다란 걸 앗아간 셈이었다. 애들은 그 애를 놀려대지 않았다. 적어도 앞에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맘 편히 놀려 먹을 수 있는 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검프 놈 놀리기에도 지칠 때면 남자애들은 지나가는 그 애 뒤를 쫓아가 걸음걸이를 흉내 내곤 키득거리기 일쑤였다. 더불어 남자애들끼리 그 애를 입에 올릴 때면 반드시 '로보캅'이라는 지칭으로 불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애를 사랑하는 거로 간주되었고 그건 초등학생 남자애에게 있어 너무도 큰 형벌이었다.


물론 여자애들은 그러한 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가 결코 인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애는 집이 가까운 둘 셋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친구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물론 그 애의 신체적 특성으로 인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어른스러우면서도 깐깐한 성격 또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검프 놈 건으로 그 애가 내게 말을 건네기 전까진 나는 그 애와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으면서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인상 깊은 기억 두 개는 가지고 있었다. 남자애들이 자기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걸 분명히 알아차렸음에도 그 애는 뒤돌아본다든지 자리에 멈춰 울음을 터뜨린다든지 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 애는 언제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갈 뿐이었다. 고개 전방, 힘차게. 기우뚱 기우뚱


다른 하나는 그 애가 친구 둘과 함께 하교할 때의 일이었다. (사실 그 애는 우리 아파트 뒷동으로 이사를 왔었다) 그날 난 같이 하교하던 친구 놈이 청소 당번이었던지라 홀로 가던 중 우연찮게 동행 아닌 동행을 하게 되었다. (물론 여자애들이랑 같이 가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충분히 거리를 두고서) 동네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커다란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서 그 애 옆의 한 여자애가 지극히 꾸며낸 듯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초현아, 찻길 건너고 할 때 무섭거나 그러지 않아? 그러면 말해. 우리가 손잡아 줄게."



그러자 그 애는 여전히 맞은편 신호등에다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마치 엄마가 자식의 물음에 답하는 듯한 어조로.



"교통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들 중에서 자주 일어나는 거에 포함되는 게 아니야. 나는 이미 한 번 겪었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어. 게다가 다리 한쪽만 저는 정도라 나쁜 일 중에서도 좋은 일이었던 거고. 살면서 있을 나쁜 일을 이렇게 미리 운 좋은 수준으로 끝냈으니 다행이지."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애와 또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 된 거였다.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일은 학기 초 담임 선생님의 주관으로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급격한 변화와 새로운 만남을 맞닥뜨리게 된 아이들은 저마다 터질 듯 불안한 마음을 감춘 채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소개 발표 시간을 소화해야 했다. 여기엔 난관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과 함께 자신의 별명을 소개하는 게 그것이었다. 아마 구시대적 발상에 매인 담임은 그게 더할 나위 없는 친교의 역할을 하리라 믿었던 듯싶다. (아니면 그저 생각 없이 전통을 따르던 거던가)


나는 그 시간 내내 가슴 한편이 짓눌러지듯 불편했다. 그건 그 애의 발표 때문이었다. 그 애가 걱정스러워서라기보단 그러한 난감한 상황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게 영 껄끄러워서였다. 그래서 속으로 담임을 어찌나 욕했는지 모른다. 그 애의 차례가 되고, 그 애는 자리에서 삐딱이 일어나 교탁으로 걸어 나갔다. 고개 전방, 힘차게. 기우뚱 기우뚱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 애의 다리 쪽으로 쏠렸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도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배가 땅겨와 잠시 상반신을 수그려야 할 정도였다. 기우뚱 기우뚱


그 애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별명을 발표(?)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였다. 1, 2초간 반 아이들을 좌우로 훑고는 그 애가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제 별명은 로보캅입니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든요. 아마 이 별명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다친 쪽 다리가 더 이상 좋아질 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의사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면서 겪을 큰 고통을 미리 겪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걸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남이 주는 것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저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든 저 스스로를 보는 눈은 변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연이어 박수 소리를 내는 가운데 쑥스러운지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선 잰 보폭으로 자리로 돌아가던 그 애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 연설(난 그게 감히 연설이었노라고 생각한다)로 그 애가 인기스타가 되었던 건 아니었다. (학교에선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법이다) 그 애는 여전히 여자애 둘 셋하고만(그중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 같이 다니던 애였다) 어울려 다녔다. 다행히 그 애를 로보캅이라고 놀려대거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남자애들도 없었지만 그건 그날의 연설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도 이젠 연민이라는 감정을 학습하게 되는 시기여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건 그날의 연설을 가슴 속에 품게 된 아이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나와 그 애가 학교에서 어울리는 일은 여전히 없었지만 같은 학원에서 만나게 된 걸 계기로

이따금 동네에서 마주칠 때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애는 한마디로 말이 통하는 동지였다. 어떤 주제로든 우리는 즐겁게 대화를 이어갈 수가 있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동네에서 마주쳤을 때 우리는 동네 청과점에서 맥주 한 캔씩을 사 예전처럼 놀이터 구석 벤치에 앉아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재미있는 건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마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꽤나 가치있게 생각했던 것 같고 그럴 때의 감정을 잃게 되는 게 싫었나 보다.


군 입대를 이틀인가 남겨두었을 때 그 애와 마주쳤던 게 기억이 난다. 그 애는 내 밤톨 머리를 보곤 모든 걸 깨닫게 되었는지 꽤나 오랜만에 마주쳤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중학교 때 자기소개 시간에 자신의 차례가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일순 지었던 그 표정과 똑같았다. 그날 헤어지던 때 그 애는 마치 지가 내 어미라도 되는 양 양손으로 내 얼굴을 살며시 감싸고는 힘주어 말했다.



"가서 잘 지내야 돼."



나는 그 애가 한 말을 지켰다. 다친 데 없이 제날짜에 제대했으니까.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공모전에서 입상 후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날 오랜만에 고향의 동네를 거닐다가였다. (내 부모님은 내가 군대에 있을 당시 전원생활을 위해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했었다) 은행원 같은 차림새의 여자가 저 멀리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기우뚱 기우뚱 나는 정말 발작적으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고 뒤를 돌아본 그 애는 언제나처럼 큰 보폭으로 갸웃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고개 전방, 힘차게.


그녀는 고향 동네에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놀이터 벤치에서 몇 캔이고 맥주를 깠다.


얼마 후 내 첫 책이 제법 히트를 치고, 나는 고향 동네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곳에다 반전세 집을 구해 들어갔고,

그 애는 이따금, 아니 종종 내 집을 방문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됐다. 그 애는 내 어미였으며, 내 아비였고, 내 누이였으며, 즐거운 벗이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어루만져주고픈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애는 내 청춘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즐거운 것에는 그 끝이 더 빨리 있는 법이다. 4년간 어떠한 창작도 해내지 못한 내게 어느 날 그 애가 걱정을 억누르지 못하고서 글이 잘 써지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걸 공식적인 내 사망 진단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 책과 같은 것을 몇 개는 만들어낼 줄 알았다. 결코 자만도 과신도 아니었다. 재능이란 어디로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결국,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지금 그 애와 헤어진다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자가 속 좁게도 여자를 몰아세우곤 헤어지게 되는 꼴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 그 애와 헤어진다면 여자는 헤어진 연유를 자신에게로 몰아세울지도 모른다.


시간이 되기 전 첫 번째만큼의 작품 몇 개를 더 내놓고 금전적 여유를 잡을 수 있었다면 아무 걱정 없이 그 애와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고개 전방, 힘차게. 하지만 이제 금전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고스란히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건 '행복'이었지 '만족'이 아니었다. 우리 둘이 스스로와 서로를 기만하며 시간 바깥에서 숨죽여 지내길 결코 원하지 않았다. 끝내 시간에게 들켜 다시 안쪽으로 끌려와 비참한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인간다운 게 아니니까. 그럴 바엔 강바닥에다 몸을 던지는 게 낫다.


그녀를 앙칼지게 밀어낸 지 1년 3개월. 그간 나는 지리한 미련을 감히 떨쳐내지 못하고선 매일 점심시간 그 애가 일하는 우체국 앞으로 향했다. 그리곤 식사 후 돌아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10여 초가 내 변하지 않는 일과였다. 그녀 역시 매일같이 돌아가는 길에서 나와 10여 초간 눈을 마주치는 게 일과였다.


그렇게 우리 둘은 무언의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는 그게 그녀 또한 내가 그녀를 밀어낸 연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도 내 재능이 다시금 세상에 팔리기 시작하면 끊겨진 시간을 이어붙일 수 있으리라 생각할 거라고 직감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허나 나는 이제 곧 그녀를 실망시키게 되리라. 나는 시간 바깥으로 줄행랑을 치고자 마음먹었으니까. 나 하나뿐이라면 언제까지고 바깥에서 숨죽인 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미련을 모두 저버린다면 말이다.



"..참, 현실적이라 더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침 삼키는 걸 이제야 떠올렸는지 남자가 목젖을 한 차례 상하로 흔들고는 말했다.



"본래 뻔한 게 제일 안타깝고 슬프고.. 그렇더라고요." 



거의 바깥까지 흘러내린 한쪽 코를 냅킨으로 훔치고는 내가 말했다.



"작가님, 내 생각에요.. 만약 금전적인 상황이 괜찮은 수준이었다면 작가님은 아주 행복할 수 있었겠죠?"



잠시간 뜸을 들이곤 남자가 말했다.



"그렇겠죠. 그 애랑 같이 있으면서.. 또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엄청 행복할 수 있었겠죠."



잠시간 뜸을 들이곤 내가 말했다.



"덤으로 그 여자분 다리도 멀쩡했다면 더 좋겠고요. 그쵸?"



남자가 말했다.



"덤이 너무 커요."



내가 말했다.



"작가님, 만약에요. 내가 그 두 가지를 이뤄주면 어쩔 건가요?"



남자가 말했다.



"좋죠, 그러면."



내가 미소를 참지 못하고선 말했다.



"'어떻겠습니까'가 아니라 '어쩌겠습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면 어쩌겠습니까?"



남자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그쪽이 원하는 걸 해야겠죠."



나도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뭐로 받아가야 하나.. 분명 경쟁업체가 이런 걸 급여에서 10% 떼가는 형식으로 일하곤 하는데.. 사실 나는 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시간'이죠. 좋아요. 역시 시간이 좋겠어요. 작가님의 행복한 시간, 그 시간을 아주 조금만 나눠주세요. 약속하면 작가님에게 아까 말한 걸 이뤄줄게요."


남자가 미소를 거두곤 말했다. 나는 장난스레 그러겠노라고 맞장구치곤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아 몇 차례 흔들어댔다. 무언가를 털어놓으니 그래도 잠시간은 후련했고 이 모든 불행이라 생각했던 게 고작 세 치 혀로 설명이 가능하단 걸 깨달으니 깊은 곳에서 힘이 솟구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 애 생각이 났다. 오늘 내가 갑자기 모습을 안 보인다면 걱정할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럼 그 애는 내 의중을 판단하고 존중하느라 끝내 쥐고 있던 가느다란 실뭉치를 그대로 놓아버릴지 모른다. 비록 그게 단 하루뿐일지라도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그 애가 단 하루라도 슬퍼지는 게 더는 싫었다.


카운터 너머로 시간을 확인했다. 서두른다면 시외버스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그럼 퇴근 시간 전에 우체국에 모습을 비출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말하리라.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기다려보라고. 너와라면 언제 어디서든 춤을 춰도 쑥스럽지 않다고.


나는 남자에게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덕분에 즐거울 수 있었다고, 지금 당장 시외버스를 잡으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말 없이 옆자리의 짐 가방을 번쩍 들어 테이블 위로 사뿐히 내려놓았다. 나는 짐 가방을 낚아채듯 쥐어 들고선 그대로 달려나갔다. 고개 전방, 힘차게.


택시까지 잡아타고선 내리자마자 숨도 돌리지 않고 뜀박질을 했건만 매표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차량 출발 시간을 5분은 넘긴 때였다. 나는 막연한 기대를 붙들고선 표를 끊어 플랫폼으로 내달렸다. 드센 숨을 몰아쉬며 손에 들린 표가 그 너풀거림을 멈췄을 때 본디 없었어야 할 차량이 태연히 그 자리에 정차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량 바로 옆에는 전형적인 운전사 복장을 한 남자가 가느다란 담배 하나를 입에 물어 연신 자신의 생명줄을 뿜어내고 있었다. 표를 보인 나는 허겁지겁 차 안으로 기어들어 가 자리에 날리듯 몸을 던졌다.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있나. 내게서 발작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몇 차례 터져 나왔고 가짜 구찌백을 동여맨 옆옆 자리의 아줌마가 그런 나를 흘기듯 쳐다보았다. 아줌마,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있을까요.


이내 둔탁한 엔진음과 함께 덜컹거리며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이 빠져버린 나는 몇 분 안 있어 꾸벅꾸벅 졸아대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번은 몸을 크게 들썩이며 얕은 잠에서 깨어났던 나는 마침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나는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다는 걸 느꼈다.


다음 순간. 눅눅한 느낌이 전해지는 눈꺼풀을 한 번, 두 번 들어 올리자 그곳엔 낯선 풍경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낯익은 풍경이 들어왔다.


낯선 풍경, 어느 모로 둘러봐도 병원이었다. 개인 입원실. 군데군데 색이 다소 바랜 흰색 벽지, 전형적인 색상의 목재 사물함, LCD 텔레비전, 가정용 절반 크기만 한 냉장고,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볕,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바짝 붙어있는 간이침대.


그리고 낯익은 풍경. 그 애였다. 그 애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 내 쪽으로 날듯이 뛰어와선 너스콜인지 뭔지를 미친 여자마냥 두드려댔다. 손을 쫙 펴선 인정사정없이 퍽. 그래 맞다, 남자애들이 검프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때도 저렇게 손을 쫙 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 애가 뛰어왔을 때, 그 애는 전혀 기우뚱거리지 않았다. 내 얼굴 위로 자꾸만 눈물 덩어리를 떨구며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는 순간에도 그 애는 전혀 갸웃거리지 않았다. 청바지 너머로 그 애의 탐스러운 허벅지 탄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영문을 몰라 그 애를 위아래로 훑고는 그저 따라서 눈물만 떨궈댈 뿐이었다. 이게 무어냐. 이게 무슨 운수 좋은 날이냐.


그렇게 수 초간 정신을 못 차리고서 뜻 모를 감탄음만 내뱉던 때였다. 웬 조그마한 여자애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양손으로 내 손목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선 손등에다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놀라서 한차례 숨을 훅하고 들이마시며 내가 쳐다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눈과 코를 한 그 여자애가 오물오물 입을 놀리며 말했다.



"아빠가 일어났어."



낯익은 얼굴들. 엄마, 아빠, 누나, 그 애, 그 애의 부모님, 그 애의 여동생. 처음 보는 얼굴. 좀체 내 손을 놓으려 하지 않는 조그마한 여자애.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런 모두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 흰색 가운 물결들을 꼬리처럼 달고 온 소갈머리 희끗한 의사. 의사가 내 초점에다 시선을 맞춘 채로 뜻 모를 말을 이어나갔다.



"환자분,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죠?"


"2015년 5월이고.."


"네, 그리고요?"


"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을 말해볼래요?"


"..5월 24일, 버스를 타고 있었어요. 시외버스요. 거기서 잠깐 졸았는데.. 근데 깨보니까 여기고.. 옷차림들을 보니까 겨울인 것 같고.."


"네, 환자분. 보호자분들 동의가 있었으니까 지금 상황을 모두 말해드릴게요. 오늘은 11월 7일입니다. 근데 2015년이 아니고 2017년이에요."



평소 많이 자는 편이긴 하지만 2년 반은 조금 너무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이 하나둘 방정맞게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 의사 말이 사실인가 보다.



"..교통사고가 나서 2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있었던 거네요."


"아니요. 환자분,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오늘이 9일째예요. 환자분 2017년 10월 29일 자택에서 저녁 식사 도중

의식 잃고 쓰러져서 여기로 입원하신 거예요."



무슨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건가 싶어 기가 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둘러싼 이들은 여전히 코만 훌쩍이고 있었다. 여자애는 '아빠가 갑자기 넘어져서 엄마랑 119 불렀어.'라고 오물거렸다.



"환자분, 환자분 병명은 뇌동정맥 기형입니다. 아마 들어본 적 없을 거예요. 0.1% 미만에게서만 나타나는 희귀병이거든요."



희귀병이라는 말에 일순 오금이 저린 나는 여자애에게 붙잡혀있던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쉽게 말씀드릴게요. 우리 몸은 동맥, 모세혈관, 정맥의 혈관을 거쳐서 피가 공급돼야 합니다. 그런데 환자분 뇌 뒷부분에서 손톱 반만 한 크기의 혈액이 응고해버린 거예요. 굳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자,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쪽이 막히니까 뇌에서 모세혈관을 거치지 않고 동맥에서 정맥으로 그대로 연결되면서 문제가 생기겠죠? 이게 뇌동정맥 기형입니다. 왜 이런 병이 생기는지는 현대 의학에서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아서 원인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여기까지 이해가 가셨죠? 이 병 때문에 환자분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지금 혼동하고 계신 거예요. 환자분 혼수상태에 있던 게 2년이 아니라 9일이에요. 뇌가 잠시 손상을 입어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에

이제 쉽게 말해 컴퓨터처럼 오류가 났다가 덮어씌워진 거죠. 환자분 지금 수술이 아주 잘 됐어요. 합병증 증세도 없고요. 한두 달 입원하면서 추이 좀 보다가 퇴원하면 일상생활 가능합니다. 다만, 한 번 뇌 기능이 중단돼서 기억이 손상된 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왜 컴퓨터도 지워진 공간에다 새로 파일 만들어지고 하면 예전 파일은 쓸 수가 없게 되죠? 그거랑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의사가 기계적인 어투로 내 보호자를 찾았고 곧이어 흰색 가운 물결들을 따라 그 애와 우리 가족이 병실 문을 나갔다.


자, 9일을 자면서 2년 반 동안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단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여자애의 단풍잎 같은 두 손을 뿌리치고는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아무도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능하다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싶었다.


그 애와 그 여자애(얘가 내 딸이란다. 세상에 마상에!)는 다음 날부터 내내 내 옆에 붙어 내가 자느라 잊어먹은 과거의 일들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노벨 문학상은 누가 탔어?"


"여자 작간데.. 그.. 이름이 길고 어려워. <체르노빌의 목소리> 썼던 사람."


"..2016년은?"


"밥 딜런."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나 보다.



"미국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어."


"그게 누군데?"


"도널드 트럼프."


"그 부자?"


"더 놀란 거 말해줘?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중간에 탄핵됐어."


"어? 왜?"


"그리고 감옥소에 있어, 지금."


"뭔 말이야, 그게? 쿠데타라도 일어났어?"



그 애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싯팔..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진짜 큰일이 일어났나 보다.


잠에서 깨어 한 달 반. 그간 나는 바깥에서 일어난 2년 반의 공백을 그럭저럭 메울 수 있었다. (가끔 그 애가 잘못된 정보를 주고는 신나하느라 시간이 좀 더 소요되긴 했지만) 그리고 나와 그 애 사이의 공백 또한.


나와 그 애는 내가 공모전에 당선되고 책이 나온 해에 결혼했단다. 속도를 위반해서라고 하는데 누가 신호를 지키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단다. 그 직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8평이 채 안 되는 월셋집을 신혼집으로 구해선 나머지 돈과 대출금을 탈탈 털어 장사를 시작했단다.


그렇게 그 애는 만삭 중에도 모든 것을 프로듀싱하며 동네 골목 가에다 희한한 가게를 오픈했다. 그 가게는 좌석이 그리 많지 않은 테이크아웃 위주로, 아시아 각국의 주전부리들을 한데 모아 인스턴트식으로 쉽고 빠르게 제공하는(손님이 직접 그 자리에서 취향에 맞게 조리할 수 있는) 가게였다. 그리고 1년 만에 체인점을 내더니 지금에 와선 2개의 체인점(그중 하나는 대학가 주변에 입점한)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점은 임대 가게가 아닌 자가 건물이 되었단다. ("바깥에 나가보면 요즘 죄다 우리 꺼 따라 하느라 비슷한 가게들뿐이야." 그 애가 덧붙였다)


우리 딸 애는 올해 미운 네 살로, 얼마 전까진 그림 그리기에 환장하다시피 하더니 요즘은 놀이학교에서 배운 영어 노래를 밤낮으로 염불 외듯 중얼거린단다. 나는 이제 딸 애가 병원에 오면 종일 업고 다니며 제 엄마를 빼닮은 눈꺼풀과 콧방울에다 하염없이 입을 맞춘다.



"..너, 다리는?"



어느 날, 참다못한 내가 그 애에게 슬며시 흘리듯 물었다.



"다리가 뭐?"


"다리가 불편하다든지.. 예전에 다친 적이 있다든지.."


"그런 적 없는데?"



그 애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과거의 기억 중 몇몇이 잘못 보존되거나 하여 틀린 기억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남들처럼 걸어 다녔다. 나는 커피숍의 남자와 악수를 하던 게 떠올랐다. 그건 그저 9일간의 꿈이었을까? 아니, 꿈이란 건 꾸고 있을 땐 몰라도 깨어난 뒤에는 아는 법이다. 그게 꿈이었는지 아닌지. 남자는 내게 말했었다.



"작가님의 행복한 시간, 그 시간을 아주 조금만 나눠주세요."



그리곤 말했었다.



"약속하면 작가님에게 아까 말한 걸 이뤄줄게요."



크리스마스가 있던 주에 나는 퇴원했다. 병원 문을 나서며 나는 양손으로 두 여자의 손깍지를 꼭 쥐고선 중얼거렸다.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차례네."



그 주는 내내 너무도 행복했다. 살면서 가장. 높고 넓은 전셋집에서 딸애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엔 그 애와 트리 아래로 선물 꾸러미를 가득히 채워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 아주 이른 아침. 나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발광하듯 뛰어다니는 딸애와 장난감 칼싸움을 하며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빠, 이제 선물 풀어봐도 돼?"



칼에 찔려 죽는시늉을 하는 내 모습에 이젠 질렸는지 딸애가 칭얼거리며 물었다.



"엄마 곧 일어날 거야. 그럼 다 같이 산타가 뭘 놓고 갔는지 확인해보자, 알았지?"



그때였다. 일순 집 안으로 가스 냄새 같은 게 풍겨왔다. 가스 밸브에는 문제가 없었다. 냄새는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과학 시간 때 알코올램프에서 나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과학실에서 과학 선생은 항상 눈을 부라리며 외쳤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열고 닫았었는지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열었다, 닫았다!"



방 안에서 그 애가 아직 꺼벙한 눈을 한 채로 걸어나왔다.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가스 냄새 같은 거."



내가 물었다.



"아니, 안 나는데."



그 애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애는 나를 지나쳐 딸 애의 뒤편에 우뚝 서더니 내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의미 없는 건 그만 물어봐."



영문을 몰라하는 내게 그 애는 장난감 칼을 쥐고 있는 내 한쪽 손을 가리키며 외치듯 명령했다.



"그어! 그으라고!"



이어 딸 애가 장난감 칼을 바닥에 거세게 부딪혀대며 자지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그 순간 한층 강해진 가스 냄새와도 같은 게 내 코를 덮으면서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여전히 그 냄새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내 귓가엔 글렌 밀러의 '문라이트 세레나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콧속으론 다소 미약해진 가스 냄새가

여전히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눈동자론 맞은편으로 의자 뒤에 한껏 등을 기댄 커피숍의 남자가 들어왔다.


가스 냄새의 정체는 유황 내음이었다. 남자는 포만감과 권태로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약속대로, 행복한 시간 조금을 나눠 가졌다."



남자 뒤편 카운터, 그 카운터 너머로 벽시계의 긴 바늘이 숫자 '4'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fin-
























후기


누구나 인상에 남는 꿈 한 두 가지쯤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자면서 보는 꿈. 나 또한 그렇다. 꿈 중엔 분명 다른 꿈들과는 다른 성질의 것들이 존재한다. 주제나 내용을 떠나 꿈꾸는 중에 어떤 특별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들 말이다. 그런 특별한 감정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농밀한 감정선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런 꿈들을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잊지 않고 떠올린다.


해당 이야기는 바로 이런 꿈들 중 하나를 베이스로 한 거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296758075











  1. 너무 좋네요
    제목부터 취향이었는데 잘 읽고갑니다🤗
  2. 지나가다가 2018.06.16 20:37 신고
    그럼 글쓴이는 그 카페주인이 꿈을 꾸게 해서 1분동안 꿈을 꿨던건가요
  3. 행복한 시간을 조금만 가져갈것같은 뉘앙스더니.. 행복한 시간을 조금만 남겨두는군요. 악마들의 셈법보소
  4. 달콤한 꿈의 결말을 조금더 달달하게 하면 카페 단골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초능력자들의 동창회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6.10 21:05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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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들의 동창회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 조지 고든 바이런





세상엔 우리를 싫어하는 치들이 제법 있는데,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IRS를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건 바로 우리의 직업 때문이겠다.


우리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준다. 우리는 때론 성경 속 인물이 되어준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일 것 같은가? 맞춰 보시라!


내 이름은 제라드 윌헬름, 직업은 초능력자다.


사건은 일리노이주에서 벌어졌다. 일리노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 물론, 그들도 나를 사랑하고. 깡촌 것들만큼 우리 초능력자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또 어디 없다. 어쨌건 사건은 일리노이주에서 벌어졌다. 어느 곳이라고 콕 짚어 말하진 않겠다. 하여튼 시카고는 아니다. 엿 먹을 여피족.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Parapsychological Association과 American Society of Psychical Research 측의 기념비적인 합동 컨벤션에 참석하고서 얼마 전 새로 뽑은 메르세데스의 차 문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정전기와도 같은 불쾌한 감촉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믿을 수 없는 일이자 믿고 싶지 않은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9평대 헛간(아마도 지하로, 임시 저장고 역할을 위해 지어진 곳인 듯했다)에 남자 둘, 여자 둘이 모두 빤스 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던 거다. 아, 물론 나도. 그러니까.. 남자 셋, 여자 둘.. 모두 다섯이지, 맞지? 우리가 빤스 바람(양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완벽하군!)이라는 거 말고도 재미있는 사실은 또 있었다. 그건 우리 모두 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상대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는 거였다.


안나 파크스, 점성술사. 과테말라의 고대 무덤에서 발견했다던 수정 해골(그 해골이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왔다나?)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한다. 해골은 그녀에게 자신을 론다라고 소개했다는데 중남미 출신인 그녀가 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는 미스터리시다.


샘 버캐넌, 사이코메트러. 특정인 또는 특정 사물과 접촉(손을 대거나 그런)해 그와 연결된 과거의 기억을 읽어낸단다. 좋은 능력이지 않은가.


피터 브루너, 전도사. 오순절 교회 목사인 그는 환자의 질병을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그 자리에서 낫게 하는데 그게 모두 신앙의 힘을 빌려서란다. 아 윌 팔로 힘!


실비아 젠슨..은 나중에 소개하지.


그리고.. 나, 현재 미국 여성에게 가장 사랑받는 투시 능력자.


자, 이렇게 평소엔 바쁘기 그지없는 동종업자 다섯이 컨벤션에서의 동창회를 끝내고서 그 피로연으로 빤스 바람 채 헛간에서 조우하게 되었으니(게다가 모두들 살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중년이다).. 운명은 정말이지 희극을 좋아하는 것 같다. 헛간 안의 빤스 바람 초능력자 다섯이라.. 더 시적일 수도 없겠네.


아, 한 명 소개를 잊었다. 우리 앞에 멀쩡한 옷차림을 한 채 사냥용 엽총을 두르고선(어찌나 그 모습이 어울리던지 원래부터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것 같았다) 상석에 앉아있는 거구의 남자. 보아하니.. 옥수수나 호밀 따위의 관리를 맡으면서 담배 전문점에 들러 할인된 말보로 사 피우는 전형적인 깡촌놈이 분명했다. 그리고 짐작건대 이렇게 동창회 자리를 마련한 게 바로 이 양반이겠지.



"마지막 사람까지 전부 깼나 보군."



남자가 중얼거리더니 사냥용 엽총을 다른 쪽 어깨에다 옮겨 기대고선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네들을 아주 잘 알지만 당신들은 나를 알지 못할 거요. 나는 데이브 하트만이요. 보다시피.. 농장일을 하고.. 당신들의 팬이기도 하지. 강연회를 쫓아다니고 통신판매용 킷들을 몇 개씩 구입하기도 했으니까. 이정도면 팬으로 인정할법 하지 않소? 그건 그렇고.. 먼저.. 이런 상황을 만든 내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하지만 내가 지금 희망을 걸 사람은 당신들뿐이라는 걸 이해해줘야 해요. 정말.. 이해해줘야 합니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울먹임을 참으려는 필사적이고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손아귀로 온 얼굴을 거듭 쓸어내렸다.



"이해를 바랍니다. 이해를.. 이제 당신들뿐이에요.. 제기랄! 육시랄! 망할!"






발작적인 욕설과 함께 남자가 어깨의 엽총을 꼬나 들었기에 우리는 모두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쭈그려선 머리를 감싸는 민둥숭이들. 처음 불을 목도한 원숭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남자가 애써 자신을 다스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선생님들. 그리고.. 당신들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나와.. 내 아들을."



끝내 마지막에 가서 흐느끼던 남자는 뒤편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커다란 나무궤짝을 자신의 앞으로 힘겨이 끌어다 놓았다. (한 손으론 그 망할 엽총을 어찌나 단단히 쥐었던지 투박한 손등 너머 핏줄들이 울룩불룩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봐도 관짝으로 보이는 저건.. 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가 궤짝 문을 열어젖혔고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놀랄 겨를도 없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마 빤스 바람인지라 진짜 얼어붙었을는지도 모른다)


궤짝, 아니 관짝엔 전형적인 검은 양복이 안치되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카라 쪽으로 울퉁불퉁한 원형의 덩어리가.. 누가 초능력자 아니랄까 봐.. 내 예상이 맞았다. 이건 관짝이었다. 제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남자는 가장 좌측에 자리하던 안나 파크스를 향해 엽총을 치켜들고선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의 발음으로 울부짖었다.



"안나 파크스 씨! 앞으로 나오세요!"



갑작스러운 명령에 우리는 모두 안나 파크스를 쳐다볼 뿐이었고 안나 파크스는 엽총과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어서!'라는 남자의 짧은 호령에 어기적 일어났다. 그리곤 그녀는 교탁으로 끌려가는 초등학생이 되어 주춤주춤 남자, 아니 관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안나 파크스가 몸을 어정쩡하게 가리며 어물어물 물었다.



"안나 파크스 씨, 그리고 선생님들 모두. 제 부탁은 하나입니다. 여기 앞의 시신은 죽은 제 아들입니다. 얼마 전 장례를 치른.. 아들은 보다시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길가 한복판,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죠.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누군가, 즉 범인을 여러분들께서 밝혀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마치, 며칠간 준비한 대본을 읽어내리듯이. 그러니까.. 미해결 사건의 범인을.. 우리보고 찾아내라는 건가? 다른 이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지 입을 헤 벌리고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한편 남자는 구석에 놓여있던 페인트 자국 투성의 싸구려 천 가방에서 수정 해골을 꺼내와 힘차게 외쳤다.



"자, 안나 파크스 씨! 당신이 첫 번째입니다. 평소처럼 수정 해골을 사용해 범인을 비춰주세요. 여기 론다는 제가 잘 챙겨왔습니다."



오, 안나.... 우리 모두는 한마음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이내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걱정하느라 심히 똥 씹은 표정들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잃고 또라이가 된(아니지, 보아하니 애초 우리들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것 같으니 100% 정상이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남자에게 시험을 받게 될 줄이야..



"시작하세요."



안나 파크스에게 수정 해골을 건네주고선 수갑을 풀어준 뒤 엽총 머리를 까딱거리며 남자가 말했다. 안나 파크스는 당연히 우리보다 더 당혹스러워했으나 그녀 역시 장사밥 하루 이틀을 먹은 게 아니었던지라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선 평소처럼 수정 해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제가 범인에 대해 알아내면 풀어주는 거죠?"



수정 해골에 시선을 둔 채로 안나 파크스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단서만이라도 좋습니다. 선생님들 모두 단서 하나씩이라도 좋습니다. 그럼 무사히 집으로 보내드리겠다고 여기 데이브 하트만이 약속드립니다."



남자가 한결 진정된 어투로 우리에게 답했다. 그리곤.. 한참 동안 수정 해골을 쓰다듬던 안나 파크스가 입을 열었다.



"하트만 씨, 당신네 아들을 해친 사람이 지금 잠깐 보였어요. 이런! ..한 명이 아니에요. 순간이었지만 그들이 폭행을 가한 것처럼 보이네요. 그중 하나는 금발이고.."



그 순간, 남자는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안나 파크스의 가슴팍에 엽총 머리를 들이밀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파악할 새도 없이 남자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어 우악스러운 총포음과 함께 안나 파크스가 눈을 감는 것도 잊고서 발라당 점프하듯 뒤로 나자빠졌다. 그녀의 목 안으론 위압적인 거품 소리가 잠시 새어 나오더니 이내 헛간 안은 관짝이 하나 더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경기를 일으키듯 외쳐댔다.



"이 여편네야! 내 아들은 폭행으로 죽은 게 아니야! 내 아들은 차에 치여 죽었다고! 뺑소니 사고! 이 거짓말쟁이!"



또라이인데 영악한 또라이라.. 이제 론다의 말은 누가 들어주지..



철컥



둔탁한 장전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시 말했다.



"다음! 샘 버캐넌 선생!"



사이코메트러 샘 버캐넌. 백발에다 잘 어울리는 길이감의 곱슬머리를 한 그가 말없이 남자 앞으로 걸어가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내밀었다. 수갑을 해제하며 남자는 다소 흥분한 듯 말했다.



"선생 덕분에 지역사회와 세계 각국의 미제 사건들이 해결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번 일본 방송사에 출연해 능력을 발휘하면서 실종된 여아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 아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부디 제 아들내미의 사건 당시 모습을 읽어주십시오. 여기, 사이코메트리에 필요한 것들도 모두 준비해두었습니다."



자.. 초능력 탐정 선생, 신도 앞에서 당신은 어떤 기적을 행할 것인가? 주의해야 할 거야, 샘 버캐넌. 당신의.. 그리고 우리의 목숨이 달려있으니까. 샘 버캐넌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피 묻은 의복과 관짝 안의 짜부라진 덩어리들을 연신 손으로 헤아리듯 쓰다듬었다.



"..끔찍하군요. 뺑소니예요. 당신 아들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는데.. 너무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차량의 자세한 모습은 알 수가 없네요. 다만, 운전자의 모습으로 보이는 형상이 잠시 비쳤는데.. 백인이고 3-40대 남성인 것 같습니다. 아드님의 순간적인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도 커 그 외에 다른 부분은 읽을 수가 없네요. 오로지 그 감정에만 모든 게 집중되어 있어서 말이죠."



그 말에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아선 마치 아이처럼 작고 높은 울음소리를 연신 내뱉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모두 내 잘못이에요! 그날 저는 지미가 하는 바에서 컵스팀 경기를 보고 있었어요. 저는 아들을 집에 혼자 둘 수가 없어 바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도록 했죠. 종종 그랬거든요. 그 애는 그날.. 내가 생일날 사준 8단 자전거(사내애들끼리는 다들 갖고있는 걸 갖고 있지 않으면 업신여기는 법이잖습니까)를 타고서.. 오, 그 애는 그 자전거를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리고.. 바닥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나길래 달려가 보니.. 우리 애가 죽어있었어요. 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샘 버캐넌은 조용히 남자에게 다가가 등을 어루만져댔다. 마치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듯. 그러나 남자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고(맙소사, 그 큰 덩치가 콧물 소리에 맞춰 상반신을 흔들대는 모습은 가히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어 샘 버캐넌이 타이르듯 말했다.



"하트만 씨, 아드님에게는 미처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찰나의 고통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 후로는 신께서 곧장 따뜻하게 안아주었거든요. 나는 알 수 있습니다. 아드님은 절대 괴로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축축한 얼굴을 위로 기울여 샘 버캐넌을 바라보던 남자가 대단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엽총을 듦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짧은 천둥음과 함께 가슴팍 이곳저곳을 쥔 샘 버캐넌이 그대로 발라당 엉덩방아를 찧으며 드러누웠다. 남자가 샘 버캐넌의 가슴팍을 그 우악스러운 발로 연신 짓이기며 외쳤다.



"이 버러지 같은 자식아! 얼빠진 놈 같으니라고! 내 아들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세상을 떠났어! 내가 911 신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 그 애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 '아빠, 못 참겠어. 어떻게 좀 해봐.'였어! 그런 자식에게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비의 마음을 알아? 이런 엠병할!"



남자는 채 감지 못한 샘 버캐넌의 눈이 더는 깜빡이지 않음에도 한참 동안 가슴팍을 짓이겨댔다. 그래도 울분이 채 풀리지 않았는지 우리를 향해 엽총을 꼬나 들곤 남은 분통을 밀어내듯 용광로가 끓는 듯한 외침을 내뱉었다.



"다음! 피터 브루너! 젠장할! 귀먹었어? 피터 브루너, 나오라고!"



거듭된 외침에 피터 브루너는 마치 고해성사실로 끌려가는 죄인처럼 어기적어기적 남자 앞으로 기어나갔다. 오, 헐벗은 채 재판대에 선 신의 대리자를 참칭한 죄인이여. 남자 앞에 엉거주춤 선 채 피터 브루너가 심히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하트만 씨, 뭔가 잘못 아신 겁니다. 저는.. 제 능력은 범인을 알아낸다든지 같은 게 아닙니다. 저는.. 저는 목사에요."



"입 닥쳐!"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두 발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바지춤을 올려붙이고선 이어 웃통 역시 어깻죽지까지 말아 올린 채 말했다.



"너는 내 아들을 위해 데려온 게 아니야. 나를 위해 데려온 거지.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해오다 보니까 병이 생기더라고. 잘나 빠진 의사양반께서 뭐라고 했더라.. 척추관협.. 뭐라더라.. 우리 아버지도 앓았던 병이지. 여하튼, 이놈의 농부병 때문에 허리를 똑바로 곧추세우지도 못하고 자다가도 다리가 욱신거려 깨게 된다고. 그러니까 피터 브루너 목사, 당신이 나를 치료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전도회에서 앉은뱅이들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말이야."



불쌍한 피터 브루너는 두 눈에 공포가 새겨진 눈물을 그렁하게 단 채로 남자의 다리 한쪽을 두 손으로 쥐고선 무릎 꿇은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은 마치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필연적인 죄악을 고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던지라 어쩐지 숙연한 기분마저 감돌게 했다.


남자는 곧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추켜든 엽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방으로 잘게 튄 핏방울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피터 브루너의 허리춤이었는데 그로 인해 남자는 자신의 통증이 잠시나마 사라진 듯한 기분에 휩싸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헛간 안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처지가 되었다. 남자가 요란한 손동작과 함께 과장된 어투로 외쳤다.



"실비아 젠슨 씨! 전미 최고의 심령술사! 앞으로 나오시죠."



실비아 젠슨, 미국 최고로 꼽히는 심령술사. 그녀는 역시 그녀였던지라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주변(곳곳에 송장이 널브러진)이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남자 앞에 꼿꼿이 섰다. 그리곤 수갑을 막 해제하려는 남자에게 대뜸 말했다.



"당신 아들이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요."



수갑을 해제하려다 말고 남자가 눈만 살짝 치켜들어 물었다.



"..왜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남자는 행동을 멈춘 채 실비아 젠슨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실비아 젠슨은 잠시간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는 완전히 분위기를 제압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좋았어, 실비아 젠슨. 초능력자의 가장 큰 덕목은 기세지. 초능력자 측, 공격 시작!



"그 아이는 자기 아빠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걸 내내 보고 있었답니다. 바로, 저기에 서서."



그 말과 동시에 실비아 젠슨이 관짝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고 남자는 화들짝 놀라선 가리킨 방향과 실비아 젠슨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하트만 씨, 오늘 당신이 저지른 일이 아들을 위한 것이었나요?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었나요? 당신 아들이 무척이나 궁금하다네요. 대답해주시겠어요?"



남자가 금세 울먹이더니 마치 투정 부리듯 대꾸했다.



"젠장! 물론 아들을 위해서였죠! 내 아들을 위해서였다고요! 아들을 죽인 놈을 찾아 그놈의 사지를 찢어놓는 게 아비 된 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못한 겁니까? 예?"


"아니요, 하트만 씨, 아니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리고 당신 아들이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죠."


"그럼요? 그럼 뭔데요! 젠장할!"


"당신 아들은 지금 슬퍼하고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게 당신의 행위로 인한 거라는 거죠. 당신 아들은 죽은 직후부터 가야 할 곳 대신에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이건 결코 당신 아들에게 좋은 게 아니랍니다. 날 믿어요. 이런 쪽으로는 내가 전문가니까."


"..내가 아빠니까 당연히 나를 잊지 못하고서 따라다니려는 거겠죠. 그게 뭐가 문젠가요?"


"아니에요. 아들의 죽음 직후 아들은 당신이 걱정되어 지금까지도 따라다니는 거랍니다. 당신의 분노가 당신의 아들이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리고 있는 거죠. 농부시라니까 모든 것엔 시기가 있다는 걸 아시겠군요. 자칫 잘못하다간 당신 아들이 시기를 놓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이제 당신 아들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아무 곳도 아닌 곳을 떠돌게 되는 거죠. 지금은 당신을 바라볼 수라도 있다지만 당신이 죽고 나면요? 그때 가서 아이인 당신 아들은 홀로 무얼 의지해야 하나요?"



눈썹 모두가 흠뻑 젖은 채로 관짝에 시선을 고정시킨 남자가 물었다.



"제가.. 제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뭡니까?"


"모든 이기심을 내려놓으세요. 지금 당신이 품은 분노는 아들이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한 게 되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하트만 씨. 반면 당신 아들은 순리에 따라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답니다. 아들이 당신을 걱정하느라 해야 할 일을 그르치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그건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랍니다."


"제가.. 경찰에 자수하고서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그럼 아들이 안심하고서 제시간에 맞춰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트만 씨."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전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젠슨.. 아니, 실비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데이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네, 정확히 실비아 당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감옥에 가고 나면 더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내 아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다음 생애에 다시 한번 아버지가 되도록 허락해줄 수 있느냐고.. 그렇게.. 좀 전해주세요."


"그럼요, 물론이죠. 내가 책임지고 전하겠습니다, 데이브."


"오.. 내 아들.. 지금 저기에 있는 게 맞나요?"


"그래요, 관 바로 옆에서 당신을 보고 있네요."


"실비아."


"네, 데이브."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내 아들, 내 아들놈 홍채 색이 뭡디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실비아 젠슨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관짝으로 향했다. 허나.. 설령 관짝 안 시신으로 시야가 미쳤다 해도 저 뭉개진 덩어리 사이로 어찌 홍채 색을 확인한단 말인가. 남자가 엽총 장전하는 소리와 동시에 이죽거렸다.



"실비아, 무슨 색이냐니까? 아주 간단하잖아! 그저 보고 내게 말해주면 되는 거야. 자, 나와 같은 헤이즐색이야? 아니면, 녹색? 회색일 수도 있지. 파란색은 어떨까? 오, 하지만 생물학이 뭔지 안다면 추천하진 않겠어. 파란색 눈은 열성이니까."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는 게 이미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대로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콰당



송장 다섯, 사람 둘. 이제 실질적으로 헛간 안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 자신이 질문할 대상은 단 한 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남자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절망감도 엿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처음으로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왜일까?



"드디어, 마침내, 제라드 윌헬름 씨의 차례군요! 윌헬름 씨, 제가 뭐 하나 알려드릴까요?"



뭐, 총을 쥔 건 그쪽이니까.



"윌헬름 씨, 저는 평소 초능력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사람입니다. 물론, 진지하게요."



그럴 것 같았다. 아, 이건 초능력이 아니라 그냥 내 예상이었지만.



"초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초능력은 피를 타고 내려오는 거죠. 밀에서 밀알이 나오는 것처럼요. 그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발현되느냐 발현되지 않느냐가 관건인 거고요. 여기 널브러져 있는 년놈들 모두가 말할 가치도 없는 것들입니다. 초능력자가 아니에요! 허풍쟁이들! 비열한 사기꾼들! 하지만! 당신은 달라! 이 치들 모두 혹여나 모를 내 판단 미스에 대비하고자 구색 맞추기 식으로 뽑은 쭉정이이지만(언제나 스페어가 중요한 거거든. 나는 농부라 그걸 잘 알지) 당신은 달라! 젠장할, 그래도 이 중 진짜 하나는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여하튼 지건 당신이야말로 진짜 미국의 초능력자요! 이 위대한 미국의 나 홀로 초능력자란 말이요!"


"..그렇군요."


"나는 당신 아버지를 잘 알아.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서 봤지. 7-80년대, DIA(그땐 그렇게 불렸지)는 초능력을 보유한 사람들을 비밀리에 끌어모아 실험을 진행했어. 이름하여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그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인 사람이 바로 당신 아버지였어."



망할 스토커 자식. 방송에서도 말 안 한 내 치부를.



"당신 아버지는 그야말로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였어. 그 점을 알아야 돼. 그는 고대 화성에서 일부 협곡 중 거대홍수가 형성되어있던 것을 투시했지. 또 목성의 고리도 보이저 1호보다 먼저 보고 있었고. 그뿐이 아니야! 염력 능력 또한 지니고 있었어. 그거 알아? 당신 아버지는 초당 400프레임으로 촬영되고 있는 현장에서 밀봉된 투명 유리병 안의 알약을 자기 손 위로 이동시켰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말이야! 상상해봐! 알약이 병을 통과해 손 위로 이동하는 게 단 1프레임 안에서 발생한 거라고!"


"내 아버지 소개를 꽤나 거창하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무얼 원하는 거죠?"


"윌헬름 씨, 내가 말했지. 초능력은 유전력이라고. 비록 당신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신은 분명 투시력을 유전 받았어. 나는 그걸 알 수가 있단 말이야! ..내 아들을 뺑소니친 범인을 투시해 줘.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일이 끝나면 내 아들놈의 명예를 걸고서 약속하지. 당신을 풀어줄게."


"..좋아요, 내가 범인에 대해 투시했다고 칩시다. 그걸 어떻게 당신에게 증명받을 수가 있죠?"


"실로 간단해. 그날 내 아들을 뺑소니친 차량을 내가 봤거든."


"뭐요?"


"다만 어두웠고 워낙 순식간이었던 데다.. 내가 조금 취해있어서 모든 걸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어느 회사 차량인지, 그리고 번호판 앞자리 세 자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 정도면 경찰에게 맡기는 게 훨씬 빠를 겁니다, 데이브 하트만 씨."


"아니! 나는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어! 말하지 않을 거야! 그 일을 경찰에게 떠넘길 수야 있나! 윌헬름 씨, 나는 말이야. 내 손으로 범인을 잡으려는 거라고. 그놈이 먹을 때 먹고 잘 때 자면서 가석방으로 기어 나오는 꼴을 나는 못 봐, 알겠어? 내 손으로 잡아서 똑같이, 아니, 더 심한 고통을 줄 거야. 나는 아비니까!"


"..좋습니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당신 아들의 일이니까. 어쨌건 약속해줘야 합니다. 만약 내가 제대로 투시를 한다면 당신은 나를 손끝 하나 대지 않고서 풀어줘야 해요."


"물론,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맙소사! 언제나 그런 법이죠. ..뭡니까, 그 조건이."


"어중간한 정보로는 안돼. 범인이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적어도 내가 혼자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줘야 돼. 그렇지 않겠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풀어주겠어. 아니면? 정보를 알아낼 때까지 나와 함께 여기서 지내야겠지."



나를 송장으로 만들려는 놈과 송장이 된 것들과의 잠 못 드는 밤이라, 낭만적이군.



"..좋아요. 약속 꼭 지켜요. 그나저나 이거 옷 좀 입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대체 왜 벌거벗겨놓은 겁니까?"


"윌헬름 씨, 미안하지만 당신이 투시를 마칠 때까지는 안 돼. 이건.. 우리 아버지가 고안한 방법이야. 내가 어릴 때 우리 가족들은 잘못한 게 있으면 여기 이 헛간으로 끌려와선 벌거숭이로 대답해야 했어. 아버지가 묻는 말들에 말이야. 우리는 벌거숭이가 되면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어. 태초의 모습에서 인간은 순수해질 수밖에 없는 거거든. 비록 내 아버지가 썩 훌륭한 치는 못되었지만 이 방법만은 언제나 옳았지."



나는 남자가 내 손에 걸린 수갑을 해제하는 동안 남자의 아버지가 벌거숭이 상태로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남자를 혁대로 후려갈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남자 역시 벌거벗겨진 자기 아들을 혁대로 후려갈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폭력은 대물림이 아니겠는가.



"자, 진짜배기가 뭔지 보여봐!" 



남자가 그 우악스러운 손바닥으로 내 등을 후려갈기며(혁대로 맞는 게 더 나을뻔했다) 쾌활하게 말했고 나는 정장 차림새의 덩어리와 그 옆으로 펼쳐진 피 묻은 의복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곤 그 앞에서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뒤편의 남자가 조심스레 '아직인가?'라고 물을 때까지)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 정리가 필요했다.



"..하트만 씨, 보입니다. 당신 아들이 쓰러져있는 게 보여요. 아들을 친 차량이.. 잠시 멈췄다가 곧바로 급발진하네요. 차량은.. 테일 라이트가.. 캐딜락.. 이번 신형.."


"맞아! 맞아, 캐딜락!"


"근데 너무 어둡고 빠르게 지나가서 색깔은 잘 모르겠어요. 밝은색이나 대비되는 색상 계통은 아니고.."


"다시 접속해서 돌려봐!"


"뭐라고요?"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 아버지처럼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해서 보는 거잖아!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우주 속 도서관, 아카식 레코드!"



정말 모르는 게 없는 양반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건 진짜다. 요즘은 노동자나 10대 애들이 제일 똑똑한 세상이다. 그 망할 놈의 인터넷 때문에.



"그러려던 참이었어요. ...보인다!"


"뭐? 뭐가?"


"번호판 숫자는..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4, 1, 6.."


"그래, 맞아! 맞아, 4! 1! 6!"


"번호판 형식이랑 색상으로 보아.. 워싱턴, 일리노이 둘 중 하나겠군요."


"이럴 줄 알았어! 당신이 진짜배기일 줄 알았다고!"


"이 이상은 볼 수가 없어요. 내 능력이 모든 걸 포착하진 못해요. 원하는 방향 모두를 가져올 순 없으니까. 그저 특정 시점의 한 방향과 마주하는 거죠. 마치 꿈속 장면처럼요." 


"..끝이라고? 번호 세 개가? 이봐, 번호 세 개는 나도 알고 있던 거라고!"



나는 남자를 등진 자세 그대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어 조용히 해줄 것을 종용했다. 새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이번엔 다행히도 남자가 재촉해오지 않았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정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좋았어, 찾았다.



"..지금 차 안으로 들어갔어요. 차 안을 보고 있어요."


"운전사! 운전사가 어떻게 생겼지? 신형 캐딜락이니까 분명 중년의 백인 놈이겠지?"


"하트만 씨, 생긴 걸 말해봐야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그린 몽타주 한 장 쥐어 들고서 워싱턴과 일리노이 전역을 돌아다니려고? 나를 여기다 가둔 채?"


"젠장, 당신 말이 맞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당신 말도 맞군요. 중년의 백인 남성이에요. 이제.. 남자 주머니 안, 그리고 지갑 속으로 들어갈 겁니다." 



남자가 뱀 같은 미소를 흘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윌헬름, 그놈의 운전면허를 보는 거야. 제기랄,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내가 했던 말 취소할게. 네가 네 아버지 보다 뛰어나!"



그리고.. 자, 이제 모든 게 정리되면서 명확해졌다.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하트만 씨! 주소가 보여요! 빨리! 펜이랑 종이!"



내 외침에 남자는 제자리에서 잠시 몸을 도리질하더니 더 커다란 외침으로 화답했다.



"이런 망할! 둘 다 없어! 위에 가서 바로 가져올게!"


"그렇게 몇 번이나 접속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내 슈트 윗도리 안주머니에 펜이 있으니 가져와요!"



남자는 어찌나 다급했던지 시종 부러져라 쥐고 있던 엽총도 내던지고선 벌게진 얼굴로 슈트 상의를 주워들어 내게 달려오는 동시에 찢어져라 안주머니를 쑤셔댔다. (아마 조금 찢어졌을 거다)



"여기! 여기, 펜!"


"종이는요?"


"..위에 가서 가져올게!"


"손 내밀어요! ..두 개 다!"



나는 앞으로 내민 두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양손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선 다른 손으론 펜 뚜껑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열린 뚜껑 자리로 모습을 드러낸 날카로운 또 하나의 펜 촉. 300달러짜리 택티컬 펜의 숨겨진 발톱. 그 티타늄 발톱을 바로 치켜들곤 자기 양손을 뚫어져라 지켜보는 남자의 허리통 반만 한 목덜미를 향해 지체 없이 쑤셔 넣었다. 동시에 손 너머로 심히 기분 나쁜 감촉이 풍겨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불쾌한 남자의 꺼져가는 눈 떼기. (맙소사, 뿌예 터진 게 마치 만들다 만 레트로 수프 속 고깃덩어리를 보는 것 같다)


남자는 그 육중한 몸 전체를 고꾸라뜨리기 직전 나를 향해 무어라 입을 움직였지만 이미 그의 성대는 그 기능을 다 한지라 급작스러운 유언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오, 만약 실비아가 살아있었다면 남자의 영혼에게 물어볼 수 있었으련만)


자.. 오래된 송장 하나, 새로운 송장 다섯. 모두 일곱.. 아니, 이 경운 하나가 맞겠다.



"..네, 그 주소 맞아요. 네. 네, 헛간에 갇혀있고요.. 네, 맞아요. 신고자인 저만 살아있습니다. 그거 꼭 좀 전달해주세요. 겨우 죽다 살아났는데 또 죽을 뻔할 수는 없잖습니까. 네. 네, 제라드 윌헬름이요. 아니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더는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왜 다들 그럴 때가 있잖습니까. 저는 그게 지금이네요. 네,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나는 한 손으로 주섬주섬 남은 옷가지를 마저 끼워 매며 다른 한 손으로 쥐어 들고 있는 남자의 속이 드러난 지갑에다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데이브 하트만.. 그냥 경찰에게 말했어야지..


헛간을 둘러보았다. 경찰이나 보안관이 이 깡촌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다. 또 한 번 헛간을 둘러보았다. 인생은 복불복이라더니, 죽을 뻔한 위기인 줄 알았건만 그게 내 미래를 구할 줄이야.


나는 널브러진 송장들을 차례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그리고 빨리, 최대한 빨리, 나는 술이 필요하다. 어서 빨리 취해있고 싶었다. 허나 집에 도착하고서야 그럴 것이다. 싯팔. 이제 두 번 다시 음주운전 하지 않으리.





-fin-




















후기


나는 '이상한 옴니버스'라는 이름으로 수년간 웹, 출판물, SNS 앱, 방송 등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이비 지식들을 파헤쳐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걸출하게 이름난 (자칭)초능력자들의 사기 행각을 다루기도 했는데, 해당 이야기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 모두(주인공 제라드 윌헬름 을 제외하곤) 바로 이런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한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안나 파크스와 론다: 안나 미첼 헤지스와 수정해골이 모델이다. 모두들 인디아나 존스의 수정해골을 잘 알 거다. 대표적인 오파츠인 이 수정해골은 안나 미첼 헤지스가 17살무렵 탐험가였던 부친과 함께 마야문명 유적을 발굴하던 중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전설은 안나 미첼 헤지스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실은 1943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400파운드에 구매한 현대의 금속 공예품에 불과하다. 그녀의 수정해골로 인해 한동안 세계 각지에서 수정해골이 어떤 영험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도시괴담이 폭넓게 퍼지게 된다.

샘 버캐넌: 어떤 물체를 만지는 것만으로 그 물체에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능력, 사이코메트리. 아마 초능력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가히 낯설지 않을 거다. 그런 능력을 보유한 이를 사이코메트러라고 칭하는데, 샘 버캐넌의 모델이 바로 역사상 최고의 사이코메트러로 꼽히는 제라드 크로이셋이다. 그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초능력자이자 60-70년대에 세계 각지를 돌며 미해결 사건을 해결한 초능력 탐정으로 불리는데.. 물론 이 역시 모두 사기와 거짓전설에 불과하다. 그는 다른 모든 (자칭)초능력 탐정들이 그러했듯 방송과 자기 홍보를 통해 자신이 미해결 사건들을 해결하거나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주장하나.. 경찰 측의 수사기록을 확인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었던 거로 드러났다. 아, 당연히 사이코메트리라는 개념 역시 전 세계 적으로 초심리학이 학문의 일환으로 유행하던 40-50년대에 탄생한 유사과학에 불과하다.

피터 브루너: 실제 모델은 피터 포포프다. 독일 태생의 오순절 교회 목사였던 그는 80년대에 TV 매체 등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치유한다며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사기 전도극을 일삼던 자였다. 그는 전도회 전에 미리 참석할 사람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점쟁이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초능력 사냥꾼 제임스 랜디에 의해 그 진실이 폭로되면서 모습을 감추게 되지만.. 이후 통신판매를 통해 기적의 샘물과 같은 사기물품을 판매하면서 고급저택에 슈퍼카를 모는, 여전한 리치가이로 인생을 보낸다.

실비아 젠슨: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심령술사 실비아 브라운을 모델로 했다. 그녀는 생전 20분간의 전화 상담료로 700달러를 받았으며 그마저 예약이 2년 치는 찰 정도였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언젠가 CNN 래리 킹 라이브 쇼에서 분위기에 휩쓸린 나머지 제임스 랜디에게 도전하겠다고 입방정을 떨었다가 이후 죽을 때까지 제임스 랜디의 전화와 이메일을 회피해야 했다.

이들 모두 생전 분명 과분하고 불로소득격인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 비난받아야 할 주체는 언론과 미디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이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조장하고 선전해왔다. 그래야 광고주들이 좋아하니까. 결론적으로 세상만사가 그렇듯 이것 역시 돈에 관련된 문제이다.

나는 이상한 옴니버스를 통해 초능력자들을 죽여왔고, 이번 창작에서도 그들을 죽이게 되었다. 그게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1. 잘 읽겠습니다!
  2. 오랜만에 올라온 괴담 잘읽었습니다
  3. 와우.. 멋진 글이네요. 오랫만에 글이라서 그런건지도ㅋㅋ 주인장님 항상 고생하십니다.
  4. 오오 좋아요 이런 소재!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새글이 있어서 반갑네용
    잘 읽었습니당^_^
  5. 와 꿀잼 갓잼 대잼 ㄷㄷㄷ 단편영화나 티브이시리즈 본 기분이에요. 넘나릥 재밌네요.
  6. 앞으로 꾸준히 많이 써주세요! 재미있네요

[번역괴담][2ch괴담][920th]샛보라

괴담 번역 2018.03.20 23:57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확실히 그 이야기 엄청 무섭지만, 진짜 있던 일이야?] 하고 반문하곤 한다.


차라리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가 오히려 현실감 있게 느껴질 정도기 때문이겠지.


이것은 내가 실제로 체험한, 기묘한 이야기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어느 아침.


평소처럼 집 근처에 사는 친구 둘과 함께, 등교길을 걷고 있었다.


한동안 이야기하면서 걷고 있는데, 시야에 앞에서 걸어가는 여자아이 2명이 들어왔다.




한명은 나와 같은 반 아이고, 다른 한명은 다른 반 여자아이였다.


나는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시선이 못박혔다.


"온몸이 샛보랗게" 물들어 있었니까.




"새빨갛다" 거나, "새파랗다" 거나, "샛노랗다" 는 말은 있지만, "샛보라색이다" 라는 말은 없을 터이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말하자면, 머리카락 끝부터 온몸에 걸친 옷, 신발까지 그야말로 온몸이 보라색 페인트라도 뒤집어 쓴 양 샛보랬다.


평소 그런 괴상한 꼴을 하는 아이도 아니고, 평범한 여자아이다.




평소였다면 [우와, 저것 봐!] 하고 친구들에게 말을 꺼냈을텐데, 어째서인지 그날은 왠지 말해서는 안된다고 할까,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가는 나도 모르는 공포가 덮쳐올 것 같은, 마치 가볍게 가위에 눌린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와 함께 걷고 있던 친구 두명도, 확실히 그 샛보란 여자아이가 시야에 들어올 터였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리키거나 하지도 않는다.


평범하게 게임 이야기 같은 걸로 신을 내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앞에서 걷고 있던 그 아이들을 따라잡을만큼 가까워졌다.




친구들은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상하다.


스쳐지나가는 순간,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졸도할 뻔 했다.


피부색까지 샛보랬다.


얼굴 피부, 팔 피부, 다리 피부, 모두 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여자아이 두 명은 [안녕.] 하고 인사를 해왔다.


[어어.] 하고, 같이 걷던 친구들이 대답을 해준다.


나만 혼자 오그라든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역시 너무 이상하다.


누구 하나 저 여자아이가 온몸이 샛보랗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너 왜 놀라는거야?]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몰래카메라인가 싶을 정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까지 정성을 들여 몰래카메라를 할 이유가 없다.


그 순간 처음으로, 나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라고 깨달았다.




몰래카메라가 아니라는 건 교실에 들어서자 더욱 확실해졌다.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가 보라색이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평범하게 대화하고 있었으니까.


출석을 부를 때나 수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담임 선생님조차도 그것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확신했다.


그날 내 머릿속에는 종일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수업 중에도 전혀 집중을 할 수 없었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 아이는 왜 보라색일까, 하고 다른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될텐데 싶겠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럴 수가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이것에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는 본능적인 꺼리낌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당사자인 여자아이에게 직접 물어보겠다는 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리고 하교 직전, 청소시간.


그룹으로 나뉘어 학교 이곳저곳을 청소하게 된다.




우리 그룹이 담당한 곳은, 학교 건물 뒤뜰 쪽 어스름한 구석이었다.


그 보랏빛 여자아이도 같은 그룹이었다.


내 눈앞에, 온몸이 보라색인 그 아이가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담는 뒷모습이 보인다.




주변에는 나와 그 아이밖에 없었다.


물어보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


[어, 어째서, 어...]




형언할 수 없는 꺼림칙한 기분이 말을 막아세워, 질문을 건네려해도 입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호기심이 공포심을 넘어섰다.


과감히 그 여자아이에게 다가가서, [어째서 오늘 온몸이 보라색이야?] 하고 물었다.




그 순간, 여자아이가 몸 전체를 나에게 돌리더니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치켜뜬 채,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절규했다.


평소 그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귀신 같은 모습으로, 샛보란 절규를 내뱉는다.


나도 그만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빗자루를 내던지고 교실로 도망쳤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청소시간이 끝나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그 사이 교실에서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종례가 끝나고, 하교시간이 되자 나는 어떻게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매일 함께 하교하는 친구는 그날 동아리 활동이 있어서, 나 혼자 하교하는 날이었다.


신발장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걷고 있는데, 앞에서 그 보라색 여자아이가 친구 두명과 함께 걷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아이도 동아리 활동을 하러 가는지, 체조복을 입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데, 스쳐지나가는 순간 그 아이가 나직이 말했다.


[이제 더는 물어보지 마.]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감정이나 억양이 실린 게 아니라, 마치 외계인이나 로봇이 말하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제 더는 물어보지 마.] 하고.




나는 달려서 학교를 뛰쳐나왔다.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는 게임을 하고, 그 일에 관해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나름대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불에 들어가 잠을 청하려하자, 다시 공포감이 엄습했다.


만약 내일도 그 아이가 보라색이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 학교에 가는 생각만 해도 우울해졌다.




부모님에게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우울한 기분인 채, 그날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평소처럼 등교를 했다.


또 그 여자아이와 친구가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여자아이는 평범하게 돌아와 있었다.




안도하는 순간, 어쩐지 눈물이 쏟아졌다.


같이 등교하던 친구들에게 놀림 받으면서도, 기뻐서 한동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여자아이와 지나치는 순간, 아직도 조금 무서워하며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피부색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녕.], [안녕.] 하고 평범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 후 졸업할 때까지, 그 아이가 다시 온몸이 샛보랗게 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날 일도 두번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도대체 그날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것은, 적어도 그 아이 자신은 보라색이 됐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그 말은 생각만 해도 트라우마가 될 정도라, 그 이후에도 가끔 꿈에서 나오곤 했다.




겨우 최근 들어서야 환경과 가치관이 변하고 시간도 흘러, 그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다 꺼내놓을 수 있게 된 이야기다.


보라색이 되었던 그 친구도, 지금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다른 친구에게 전해들었다.


지금도 거리를 걷다 가끔 흰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할머니를 보거나 하면 깜짝깜짝 놀란다.




엑스맨 영화가 나왔을 때도 미스틱인가 하는 온몸이 새파란 여자 캐릭터를 본 순간 그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결국 중간에 영화관을 뛰쳐나왔을 정도다.


내게는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이야기였다.



  1. 오늘의 괴담은 등교길, 갑자기 샛보랗게 물든 친구에 관한 이야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라색이 죽은자의 색깔로 일컫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더 오싹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친구는 어째서 보라색이었을지, 그리고 왜 절규했던 것일지.
    스스로 보랏빛으로 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게 더 소름끼치네요.
  2. 뭔가가 씌었던게 아닐까요
    •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죄송하지만 티스토리 초대장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iquantum@daum.net
  3. 그친구 본인도 알고있었으니 뭔가 이유가 (사정이) 있는거같네요 집안에 마가씌었나
  4. 오오 정말 특이한 이야기네요~~ 오싹한 이야기 감사드려요!
  5. 텍스쳐가 깨졌나?
  6. 그대모습은 ~ 보라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정말 무서운 이야기인데 수지누나덕분에 살았다 ㅠㅠ
  7. 지나갑니다 2018.03.30 17:31 신고
    예전부터 찾아와서 읽고 가곤 했는데 댓글은 처음 남기네요
    늘 잘 읽고 갑니다 주인분께 감사드려요 ^_^
  8. 항상 감사합니다 2018.04.02 22:40 신고
    요즘은 바쁘시거나 의욕이 떨어지셨나 보네요 몇달 전부터 읽었는데 이번 이야기는 진짜 특이한것같아요
  9. 노래가사대로 누군가가 진짜 보랏빛으로 다가오면 ,,,,실제로는 겁나게 무섭게되는듯
  10. 옛날에 이곳에서 본 괴담인데요
    어떤 아이들 세명이 폐가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고 두 친구들은 미쳐버리는
    괴담 혹시 아시나요?
    너무 임팩트 있었던 괴담이라 몰입해서 봤는데
    몇번을 정주행해도 찾을수가 없어서요 ㅠㅠ
  11. 항상 고맙습니다
  12. 폐가에서 3명이갔다가 한명 욕조있는 화장실에서 갇힌거 말씀하신건가
  13. 요즘 글이 안 올라오는게 무슨 일 있으신게 아니라 바쁘셨던거네요 ㅎㅎ 다행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스팸필터에 걸릴까요 이상한 말도 안 썼는데

[번역괴담][2ch괴담][919th]소녀원

괴담 번역 2018.03.19 23:59



지금은 사라진 히로시마의 심령 스폿, 소녀원에서 내가 10대 시절 겪은 이야기다.


소녀원이라는 건 사용하지 않게 되어 폐허가 된 여자형무소의 별명이다.


10여년 전에는 히로시마에서 유명한 심령 스폿 중 하나였다.




당시 면허를 막 따서 운전에 맛을 들인 젊은이들은 밤이면 밤마다 심령 스폿을 돌아다니곤 했거든.


코이 언덕이니, 우오키리 댐이니, 나바라 계곡이니 여러 곳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녀원은 차에서 내려 폐가가 늘어선 넓은 부지를 돌아다니는 분위기 사는 곳이었다.




그날은 꽤 사람이 몰렸다.


남자 셋, 여자 셋.


친구네 아버지 승합차를 타고, [소녀원에서는 살해당한 왕따 수감자 귀신이 나온대!] 라는 둥, 지어낸 이야기로 여자애들을 겁주고 있었다.




좁은 길을 조금 올라가 소녀원에 도착한다.


입구 앞에 차를 세웠다.


세단이 한대 서 있다.




여기에 차를 세워놓고 다른 데를 갈 리도 없으니, 누가 먼저 왔다는 거겠지.


에이, 분위기 팍 죽네.


먼저 온 차가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따라 차를 세워두고, 소녀원에 들어섰다.




평소에는 연결로와 교차되는 중앙 통로를 따라 들어가지만, 누가 먼저 와 있을터다.


우연히 마주치면 재미없으니, 좀 옆으로 돌아서 건물 뒤쪽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뒤라고는 해도 골목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니, 산길로 오르듯 가서 건물 창문으로 들어간다.




남자놈들끼리는 신선하다느니 떠들었지만, 여자애들은 좀 가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결국 역시 앞으로 가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바뀌어, 창문으로 다시 나가는게 아니라, 현관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서 딱 먼저 온 사람들과 마주친 것이다.




깜짝 놀라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6명 모두 비명을 질렀지만, 곧 안도의 웃음이 쏟아졌다.


상대는 4, 5명 정도.




여자가 둘 있는 것 같았다.


다들 [깜짝 놀랐네!] 라느니, [완전 쫄았어!] 라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점점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상대가 전혀 반응이 없는 것이다.


정말 아무 말 한마디 없이, 우리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향해 갔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잔뜩 위축되서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뭐야, 저거...], [무섭잖아.] 하고 떠들어대며, 그 건물에서 사람들이 다시 나오기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건물에서 나와,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 누군가 [어쩔거야? 기분 나쁜데 이만 돌아갈까?] 하고 말을 꺼냈다.




여자아이 중 한명이 엄청 무서워하면서 싫다고 계속 되뇌이고 있었지만, 원래 겁쟁이인데다 안까지는 갔다가 돌아오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가버렸다.


결국 거기서 안까지 들어갔다가 입구에 돌아올 때까지, 먼저 간 사람들과는 만나지 못했다.


[안 만났네.] 하고 말해대면서 밖으로 나오자, 그 사람들이 입구 앞에 세워둔 세단 근처에 있었다.




[우와, 벌써 나와있잖아.]


[돌아갈까... 아니, 근데 저 녀석들 뭐하는거지?]


4명이 각각 문 앞에 서 있는데, 차에 타려는 것도 아니고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 쪽을 보면서 서 있었다.




우리 차로 돌아오려면 그 사람들 옆을 지나가야만 하는데, 그 동안에도 계속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내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째려보는 것 같은 느낌도 나서 기분 나쁜 분위기가 가득했다.


친구 중 한놈이 그걸 견디지 못했는지, [너희들 뭘 보고 있는거야!] 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웠기에 다들 움찔했는데, 정작 상대는 전혀 주눅드는 기색 없이 가만히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정말 기분이 나빠서, 어서 가자고 그 사람들을 무시하며 차에 올라탔다.


차를 출발시켰지만, 그 녀석들은 계속 우리를 보고 있었다.




다들 [뭐야, 저게... 기분 나빠.], [짜증나네, 진짜.] 하고 투덜거렸다.


서부 순환도로를 달리면서 한바탕 짜증을 늘어놓다가, 문득 [그래도 귀여운 여자애 한명 있었지 않았냐.] 하고 이야기가 나왔다.


[너 잘도 보고 있었네. 누구?]




[머리 짧은 애.]


[그런 애가 있었나?]


[있었어.]




[완전 별로다, 너.]


운전하던 녀석이 [아니 그건 그렇고, 여자가 있었다고?] 하고 말하자, [그건 좀 심하지 않냐?]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제대로 안 봤었나... 아니, 여자애가 있던 거 같지가 않은데...]




그러는 사이 이야기가 바뀌었다.


[그건 그렇고 그 녀석들 차는 어떻게 타고 왔지?]


[뭔 소리야, 자기네 차 타고 왔지.]




[그 차에는 다 못 탈거 아냐.]


[트렁크에라도 타나 보지.]


[엥? 뭔 소리야?]




[아니, 그거 한 대에 다 못 탈 정도였잖아.]


[어라, 5명이면 탈 수 있잖아.]


어? 그렇게 사람이 많았었나?




장난치는 건가 싶었지만, [4명 아니었어?], [아니, 일고여덟명은 됐는데.], [진짜? 어디? 차 안에 타고 있었어?], [있었잖아, 다들 차 주변에!] 하고 다들 의견이 갈렸다.


나도 거기서 한마디 보탰다.


[차 주변에는 네명 밖에 없었어. 너희가 말하는 주변이라는 건 어디 이야기냐.]




[아니... 차 주변이라고, 차...]


말이 맞던 여자아이에게도 물었다.


[봤어?]




[응, 나도 일고여덟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라?]


[나... 4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4명밖에 못 봤어. 문마다 한명씩.]




[그렇지? 나도 그랬는데.]


차 안에 정적이 감돈다.


[아니아니, 8명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4명은 확실히 아니야.]




[그러면 다 어디 있었다는건데?]


[차 주변에...]


[4명 밖에 없었다니까!]




말싸움같이 되어갈 무렵, 운전하던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두명 밖에 못 봤어.]


결국 제대로 답은 나오지 않고, 다들 등골만 오싹해졌다.




그 후 여자아이들은 다 집까지 데려다 주고, 남자 3명만 남았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싶어, 다시 한번 소녀원에 가보기로 했다.


소녀원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새벽 아무도 없는 길을 달려 도착했다.




시간도 꽤 흘렀기에, 솔직히 이미 없을거라는 생각이었다.


소녀원에 접어드는 길, 입구가 보이는 코너를 돈 순간.


운전하던 녀석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직 있어.]


[거짓말... 진짜로?]


보니까 차 주변에... 4명이 있었다.




[4명이지...?]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1, 2, 3, 4... 4명이지...?]




[너... 어디 보고 있는거야?]


다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보다 저 녀석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거지?




갑자기 무서워진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는지, 운전하던 녀석은 급히 후진했다.


다들 입을 다문채, 그 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난 뒤, 다른 친구들과 소녀원에 갈 일이 있었다.




정말 다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무섭다고 말하면 겁쟁이 취급 당할 것 같아 말도 못 꺼냈다.


소녀원의 입구가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느껴본 적 없는 한기가 나를 덮쳤다.


그날 봤던 세단이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처음에는 비슷한 다른 차인가 싶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역시 그때 그 차였다.


그때부터 계속 거기 있었다는 듯, 먼지투성이에 주변에 풀이 무성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만약 그 사람들을 다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죽을 것 같았기에, 그날은 소녀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소녀원은 담력시험이 시끄러워 주변에 민폐라는 민원 때문에 헐렸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안심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걸리는 것이 남아있다.


소녀원 앞에 차가 있는한, 언젠가 어디선가 그 녀석들과 갑자기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1997년 전후해서, 하얀색 오래된 카롤라였다.




그게 언제까지 있었는지 신경 쓰이기도 하지만, 역시 모르고 사는게 더 좋을 거 같다.

  1. 오늘의 괴담은 히로시마의 심령스폿에서 겪은 소름끼치는 체험에 관한 이야기.
    과연 차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서로 본 사람의 인원이 다른 것도 신경쓰입니다.
    많이 본 사람들과 적게 본 사람들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었을지.
    이미 사라진 곳에 관한 이야기지만, 여전히 오싹하군요.
  2. 수퍼뚱땡이 2018.03.20 00:12 신고
    이번 이야기는 정말 소름돋네요 누구 말이 맞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람이 아닌것만은 확실하겠죠??
  3. 소녀원이었는데 남자귀신들이 있다니 이상하군요
  4. 아 근래들어 제일 소름돋게봤던글이네요
  5. 귀신닌잨ㅋㅋㅋㅋㅋㅋㅋ
  6. 처음뵙겠습니다 2018.04.02 11:10 신고
    쌈무이 유툽 채널을 통해 흘러 들어왔는데 정말 수고가 많으세요. 가끔 여유 생길때 마다 후원 하겠습니다~

[번역괴담][2ch괴담][918th]낙인

괴담 번역 2018.03.07 19:13



도쿄로 상경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친구는 깊은 산속 마을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마을에서는 대지주인 집안이 권력을 잡고 있어, 일부에서는 "님" 이라고 불릴 정도로 숭배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친구는 그 집안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완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흥미가 생겨, [왜 그런데?] 라고 묻자, 친구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친구네 집은 마을에서 평균보다 조금 괜찮은 정도 위치였다고 합니다.


마을 노인들은 누구나 지주 집안을 숭상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친구는 "마음에 안 들지만, "저 녀석들은 다들 상당히 실력이 있어. 시험에서 다들 만점 가까이 맞으니까 성적도 좋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서 마라톤을 뛰어도 거의 1등이지. 하지만 뭔가 이상해. 적어도 30년간 저런 완벽한 사람들만 이어져 왔다는건데. 지주 집안은 아이가 많이 태어나는데, 어떻게 모자라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거지?" 하고 의문을 품고 있었답니다.




나는 [사실 어디서 뛰어난 아이들만 모아온 거 아닐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지주 집안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작게나마 잔치를 벌여. 확실히 스무살쯤 되서 도시로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도 연말연시에는 다들 귀성을 하거든. 오히려 집에 남아있는 녀석들이 더 이상했어. 거의 얼굴도 비추지 않고, 연말연시에도 그늘 사이에서 슬쩍 보이는 정도였으니까... 집안에서 마을 관련된 중요한 일들을 맡아보는 사람들일텐데, 아무리 봐도 정작 마을을 떠난 사람들보다 무능해보인단 말이지. 뭐... 나는 봐버리고 말았지만.]




친구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친구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주 집안에서 죽은 사람이 나와서 장례식을 치루던 날이었어. 나는 아직 미성년자였지만 술을 얻어마셨다가 곯아떨어졌지. 그래서 그 집에 하룻밤 묵게 됐는데, 밤중에 문득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갔어.]


지주네 집은 넓고 어두웠습니다.


친구는 처음 오는 집인데다 술기운도 남아있었던 탓에, 길을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화장실이 어딘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데, 뒤쪽에서 [터벅... 터벅... 터벅...] 하고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니, 발소리라기에는 걷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할까, 튀어오르고 있는 것 같은 소리랄까.




그게 점점 다가오고 있었답니다.


터벅... 스륵... 터벅... 스륵... 터벅...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무언가를 끄는 듯한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워진 친구는 가까이 있던 벽장에 들어가 문틈으로 바깥을 살폈습니다.


소리의 정체는 사람이었습니다.


안심하고 화장실이 어딘지 물어보려던 순간, 친구는 공포에 사로잡혀 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채, 얼굴에는 가면 같은 걸 쓰고 있었습니다.


다리는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손에 다리 하나가 들려있더라는 겁니다.




너무 충격적이라, 친구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덕인지, 검은 옷을 입은 것은 친구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외발로 터벅터벅, 아무런 말없이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친구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이불 속에서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날이 밝은 뒤, 어젯밤 일을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지, 친구는 고민했습니다.


결국 호기심이 동해, 지주네 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정말이냐! 조금 기다려다오.] 라고 말한 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서는 5분 정도 있다 돌아왔습니다.


[미안하구나. 봐버렸구나... 가능하면 잊어줬으면 좋겠지만, 직접 그걸 봐 버렸으니 그것도 무리겠지. 오늘은 그만 돌아가거라.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트라우마는 적을 수록 좋을테니.]


이틀 뒤, 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것은, 대대로 지주 집안에 씌어있는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녀석이 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조건에 맞는 사람에게 씌어서 어느 조건에 맞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한다고 합니다.


그 조건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지만,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귀신은 집안의 "낙오자" 에게 씌이는 거겠죠.


그리고 "낙오자" 후보에게, "낙오자의 낙인" 을 찍는 겁니다.


낙오의 조건은 스펙이 모자란 자.




그들에게 검은 옷을 입은 놈이 낙인을 찍어버리는 겁니다.


그 탓에 지주 집안 사람들은 모두 우수했던 겁니다.


다들 필사적으로 노력했겠죠.




살아남은 사람들은 집을 떠나고, 낙오당한 이들은 집에 남게됩니다.


집에서 도망친 사람들과, 낙인을 찍혀 집에서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


낙오자들은 집안에 숨겨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으니, 자연히 사람들은 지주 집안에 우수한 사람들만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죠.


[마을 노인들은 다들 알고 있다고 하더라.] 하고, 친구는 덧붙였습니다.


나는 [그걸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괜찮은거야?] 하고 물었습니다.




[말하더라도 그걸 보지 않은 사람은 못 믿겠지. 게다가 지주 집안은 여기저기 연줄이 닿아있다고. 지방 선거도 지주 집안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무조건 당선되고 말이야. 얼마 전에 "낙오자" 후보로 보이던 놈 중 하나가 죽었어. 젊었으니까 아마 정신이 나갔던 거 아닐까. 말해준 사람도 얼굴이 상처투성이였으니까.  나라도 엘리트에서 낙오당해 외톨이 신세가 되면 정신줄을 놓을 거 같아. 게다가 그 집 동쪽에는 아무도 못 가는데, 가끔씩 작게 비명이 들려오니까... 그걸로 모두 연결이 되더라고. 우리 반에 지주 집안 셋째 아들이 있었는데, 마라톤을 죽어라 뛰고 나서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갔던 적이 있었어.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거 같다.]


친구는 그 후에도 그 집안의 무용담 비슷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놨습니다.


스스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말투는 마치 그 집안을 숭상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적으로 우러러보게 되는 카리스마가 있는 건지, 아니면 영적으로 세뇌당한 것일지...


내게는 어쩐지 후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친구는 지금까지도 지주 집안과 교류가 있어, "매번 많은 도움만 받고 있다" 고 말할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친구가 말할 때, 낙오당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걸 본 순간부터, 그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 라고 말하며 웃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그 순간 친구 역시 귀신에 씌인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새삼 소름 끼치더랍니다.



  1. 오늘의 괴담은 어느 마을 지주 집안에 내려오는 기괴한 빙의에 관한 이야기.
    낙오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사지를 하나씩 뜯어먹히기라도 하는 걸까요.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유능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니, 모든 일에는 앞과 뒤가 있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됩니다.
  2. 사회에서도 무한경쟁해야 하는데 집안에서부터 그러다니 너무 슬프네요ㅜ
  3. 노오오력이 부족했군요
  4. 사람살곳이못되네요 저나라도
  5. 먼 선조때... 뛰어난 형제들 사이에서 유달리 평범했던 한 사람이, 형제들의 멸시("저건 사람도 아니야";) 속에서 원한을 품고 죽어서 저주가 되버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6. 그리고... 그 동네사람들의 지주집안에 대한 리스펙은... 탁월한 지주집안의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아무 노력도 없이 뛰어난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일매일 피를 말리는 노력의 결과물임을 알기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요?
  7. 노력에 대한 존경심은 그렇다 쳐도, 우수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낙오자 신세가 되어 귀신에 들리는 이들을 구제해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해요. 그 사람들도 한 가족이고 식구일 텐데도 귀신 덕분에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고 여겨서 오히려 귀신을 쫓아보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건지... 소를 희생하고 다를 얻는다고 생각한 걸까요? 집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본인이 우수해졌더라도 본인이 원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니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자신과 같은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뭔가 조치를 취했을 법도 한데 그러질 않은 것 같고, 마을 노인들도 전말을 알면서도 문제 의식 없이 그저 존경심만 가지고 우러러 봤다니 의아하기도 해요. 물론 남의 집안 일이니 어찌할 수 있겠냐만은... 집안 덕택에 구성원들이 누린 것도 많으니 그냥 하나를 잃는 대신 다른 것을 얻는다고 생각한 건지도... 낙오자들이 가엾게 느껴지네요. 가문의 번영을 위한 욕심이 어쩌면 그런 귀신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8. 마치 일본의 정치 축소판을 보는듯합니다...
  9. 許諾は担当し、小説を翻訳しましたか?
    • 基本的にはまとめブログ通じて話を選びますので、匿名の著作がほどんどです。
      もし著作權の問題があったり、掲載内容に問題がある場合はvkrko91@gmail.comにご連絡下さい。
  10. 이런얘기는 비유적인것이거나 숨겨진뒷얘기들이더있을듯요.윗님 댓글도 맞는말. 저집에사는인간들이 수상쩍은데..
  11. 이건 괴담보다는 현대사회 그 자체에 대한 우화 같네요. 경쟁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또 더욱 끔찍하겠지만.

사다코 대 카야코, 2016

호러 영화 짧평 2018.02.25 22:00



20세기 말,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일본발 호러 무비 두편이 있었으니, 링과 주온이 그것입니다.

각자 야마무라 사다코와 사에키 카야코라는 소름 끼치는 원혼을 중심으로,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저주와 그 순환에 대해 다룬 호러계의 명작입니다.

그 인기에 힘입어 수도 없는 속편, 세계 각국에서의 리메이크가 이어지기도 했죠.

그 탓에 오히려 시리즈의 위명은 점차 빛을 잃고 땅으로 내려온 느낌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두 시리즈가 콜라보레이션이라니!

서양에서 프레디 VS. 제이슨을 내놓았다면, 이것이 동양의 대답이겠죠!

하지만 여러분도 다 예상하다시피, 이런 게 멀쩡한 영화일리가 없습니다...





애시당초 가장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관객들은 이제 사다코건 카야코건 질릴만큼 봐왔다는 점이겠죠.

이 작품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하려면, 링과 주온 두 시리즈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기나긴 세월 수많은 작품을 다 따라왔으면 이 두 사람이 별로 안 무서워요.

모든 호러 프랜차이즈가 그렇듯, 처음에는 소름 끼치던 귀신도 눈에 익으면 아는 친구처럼 반가워지거든요.

생전에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고, 죽어서도 참 오랜 세월 힘겹게 구르고 있는 두 귀신에 대한 연민의 정이 피어오를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또 시리즈에 이해가 없는 관객이 단발성으로 이 영화만 봤을 때 무섭느냐!

그게 또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애시당초 발상부터가 양 시리즈의 고인물 팬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니만큼, 상당히 뻔한 클리셰들이 반복되거든요.

딱히 무섭지도 않고, 설정도 납득이 안 가면 그게 재미있을리가 없겠죠.





게다가 영화 스스로도 스스로를 우습게 만듭니다.

저주에 맞서다 죽는 연구자의 모습인데, 박치기 당해서 얼굴이 짜부가 되었습니다.

이걸 보고 무서워하라는 건지 웃으라는 건지...


제목에서는 사다코랑 카야코가 박터지게 싸울 거 같이 써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비디오를 봐서 걸린 사다코의 저주를 카야코의 저주로 상쇄하겠다는 이이제이의 발상인데...

양쪽 다 보시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사실 사다코가 훨씬 세서 그냥 1:1로 싸우면 승패는 이미 갈리거든요.

실제로 둘이 나와서 대면하고 싸우는 장면은 기껏해야 5분이 채 안될 겁니다.

그나마도 별 이상한 마무리로 실소를 자아내고요.


그나마 좋게 봐줄만한 거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유투브로 저주의 비디오를 뿌리는 장면 정도입니다.

이거는 할리우드판 링스에서도 나왔던 장면인데, VHS 복사 떠서 저주를 뿌리던 시절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죠!

유투브로 퍼져나가는 사다코를 보아라!





정말 괴상한 영화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감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겨냥하는 수요층에게는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일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한테도 무섭기보다는 반갑고 재밌는 경험일 거에요.

사실 이 두 시리즈 오랫동안 보아온 분들이라면, 애처롭고 웃기고 씁쓸하고 온갖 감정이 다 들 겁니다.


얘네 둘 다 첫 영화에서는 진짜 무서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온갖 속편에 리메이크에 리부트 거치는 동안 그 후광이 사라지고 이제는 조소의 대상이 되어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

국내 개봉도 한번 취소됐다가 배급사가 바뀌고 다시 나올 정도로 험난했었는데, 아무쪼록 이제 둘 다 그냥 편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점수는 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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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로 링크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괴담을이나 호러무비를 좋아해서
  2. 개인적으론 이런 vs 영화 안 나왔으면 좋겟음... 하나같이 공포보다는 코미디 느낌
  3. ㅋㅋㅋㅋㅋ쉬었으면 좋겠다는말 정말 공감합니다...저친구 둘다 이젠 좀 안식에 들때가 왔어요
  4. 진심 두 분 다 성불하셔서 이런 고초를 겪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햇수로 몇 년인데 아직도 이런 영화로 고통을 받고 있나...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