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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 3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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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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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4년여 전 즈음의 일인 것 같다. 아니, 5년? 어쨌건 망아지처럼 날뛰지만 않는다면야 비교적 좋은 날씨라 취급할 수 있는 그런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도심 생활을 마무리 짓고선 경기도 외곽 산허리에서 똬리를 틀던 차였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싶으면 읽고 글을 쓰고 싶으면 쓰는 신선놀음 짓에 기꺼워하고 있었다.


한밤중, 산허리를 맨 소나무 끝 가지 위 애처로이 두 발을 디딘 뻐꾸기의 울음 새로 책장을 넘긴 일이 당신은 있는가? 아직 없다면 앞으로도 그러길. 그건 보다 적은 이들이 누렸으면 하는 이기적인 기쁨의 하나이니까.


그날 해가 꺼져가는 오후 녘. 툇마루에 놓인 원목 흔들의자 위로 궁둥짝을 방정맞게 도리질하다 중간 즈음 읽던 책을 잠시 덮고선 맞은편의 산마루를 똥폼스레 바라보던 때였다.



냐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던 공간과 시간 복판에서 자그마한 얼굴을 치켜든 고 씨가 잘록하게 빠진 허리를 네 다리로 이며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는(남자는 언제든 상대가 여자인지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마치 한 동작인 양 툇마루로 깡총하게 올라서선 내 바로 앞 장판 떼기 위로 사뭇 교양 머리 있는 차림새의 앉음 모양을 취했다.



..누구니?



그녀는 올바른 대답 대신 두어 차례 내 언어를 모방한 울음을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한층 빳빳이 추켜세웠다. 그 모방이 적잖이 출중했던지라 나는 그 뜻을 받들어 곧 주방에서 뒤져온 마른 멸치 움큼과 냉수 한 잔을 정중히 그녀 앞으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제 내가 자기에게 빠졌다는 것(실은 첫눈에 그랬다만)을 과신한 양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묵묵히 주안상을 비워댔다.


용무를 마친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진 내 얼굴을 흘끗 훑더니(남자의 미소는 그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법이다) 엎드린 자세로 주저앉아선 고개를 꾸벅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한 나는 낮잠이 이어진 1시간여 동안 그녀의 몸을 탐할 수가 있었다. 그날 졸음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휑하고 일어나 우아한 발놀림으로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숨겼다.


다행히 그녀 또한 내가 제법 마음에 찼는지 그러한 입궐은 밤공기가 제법 싸늘해질 때까지 매일같이 이루어졌다. 서늘해질 때까지. 계절이 넘어가던 무렵 그녀는 갑작스레 발길을 끊었고, 이제 툇마루엔 실의에 찬 남자 하나가 의자 위로 하릴없이 그 몸뚱어릴 흔들어 젖히며 공허히 산마루를 응시하매 연정을 달랠 뿐이었다.


그러던 의자 위로 남자의 옷차림이 달라졌을 무렵이었다.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그녀가 다시금 툇마루를 찾았다. 그 꽁무니로 자신의 서늘한 눈매를 똑 닮은 새끼 둘을 동반하고서.


이제 우리 둘은 달라진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그녀는 두 아이가 서로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동안 서둘러 밥상을 비우곤 잠시 구석에서 짧은 낮잠으로 고단함을 쫓아야 했고,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놀다 지쳐 의자 위로 고꾸라진 아이들을 재우랴 조심스레 의자 머리를 흔들어대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한낮 동안 내게 탁아를 부탁하곤 외출을 할 수가 있었으니 그녀에겐 퍽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몇 달간 이를 몹시도 못마땅해하던 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인접한 마당의 진도(잡종) 씨였다. 그는 본디 대단히 순박했던 이였으나 언젠가 줄을 풀고서 산 아래 동네의 닭 따위를 해한 연유로 짧아진 쇠줄 아래에서 고 씨 가족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허나 그의 목줄을 다시금 늘어뜨릴 수만도 없었다. 이미 그가 한 차례 피 맛을 본 뒤였기 때문이겠다. 그는 이제 사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 짓는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다. (핏속에 새겨진 기호 위에서 누군들 자유로우랴) 물론, 난데없이 사랑방을 꾀고 앉은 고 씨네 새댁이 그의 마음에 찰리 만무했다.


어느 날이었다. 마당을 나온 나는 진도 씨네 집안이 텅 빈 것을 보곤 그의 행방을 쫓아 사방팔리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끝내 그의 행방을 포기하고선 떨어지는 태양을 따라 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잡초더미 사이로 마치 땅바닥에서 뜯겨 나온 듯한 사체 두 구를 보았으니, 둘은 내게 탁아의 책임이 있던 그 아이들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나는 내 안에 이는 감당 못 할 회한들의 크기로 인해 끝끝내 아무런 감정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그저 두 아이를 조심스레 사뿐히 안아 들고는 마당과 인접한 부지(敷地)로 향할 뿐이었다. 그렇게 둘을 부지 내 툇마루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다 묻고는 며칠이나 지났을 무렵에도 진도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 씨 또한.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고서였다. 대낮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 툇마루로 나서니 그곳엔 돌아온 탕아가 반쯤 사라진 목줄을 한 채 집 주변을 촐싹대며 돌아댕기고 있었다. (범행은 어렵지가 않다. 도망가는 게 힘들지)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콧김을 한차례 불어 젖히더니 요기할 게 없느냐며 재촉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뻔뻔스러움에 재차 이는 분통을 뒤로하고선 엊저녁 먹고 남긴 찬밥을 국에다 말아 한 사발 차려 주었다.


접싯물에 코 박은 채 숨 쉴 새도 없이 쩝쩝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예뻐해 하고 이름을 붙여주고 옷을 입혀주며 어쩌고저쩌고해도 개는 개라는 것을. 그런 내 마음은 미처 사라지질 못한 분노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던 또 어느 날이었다. 채 넘기지 못한 책장에 못내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던 나는 잠결에 무슨 낌새래도 차렸는지 여적 어둑하던 꺼먼 새벽녘 눈을 떴다. (못다 한 일이 있으면 잠귀가 밝아지는 법이다)





창문에 바람이 새는듯한 소리에 나는 홀리듯 그 근원지로 졸린 발을 끌었다.



톡 톡



그 소리는 툇마루와 연결된 서재 통유리에서 나고 있었다. 서재로 발을 디딘 나는 점차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그것이 무슨 연유로 인한 소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나는 황급히 주저앉아 문을 열어젖히고선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는 예의 그 품위 어린 앉음새로 나를 살그머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재차 엄습함과 동시에 그 이상으로 그녀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던 묵은 감정이 쏟아지면서 결국 나는 몇 번이나 한풀이하듯 넋두리했다.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그녀는 말없이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그저 한스러운 그 넋두리를 목도할 뿐이었다. 그리곤 잠시 후 몸을 돌려 하늘한 걸음새로 저 건너 어둠과 동화되어갔다. 나는 꼭 다른 사람의 발로 걷는듯한 걸음걸이로 다시금 잠자리로 향했다. 마치 그러한 행위가 꿈속을 빠져나와 현실로 되돌아가는 의식인 것만 같았다.


다음날, 간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툇마루로 나온 나는 끔찍한 산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건 어떤 잔혹한 표현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을 광경이었다. 진도 씨가 죽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풍경이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공포를 느끼잖는가)


진도 씨네 바로 앞으로 나 있던 정자(널찍한 바위), 그 정자로 세워져 있던 아이만 한 크기의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진도 씨가 목매달려 있던 것이다. 그건 교수형의 그것과 동일한 모양새였다. 나는 만져보지 않아도 진도 씨의 몸이 이미 뻣뻣하게 굳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또 설명할 길 없는 그 죽음에, 나는 한동안 슬퍼하거나 시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소나무와 그 소나무로 매달린 목줄을 살펴보았다.


사유는 명백했다. 소나무 한가운데 굵은 가지 사이로 고정된 목줄로 인해 진도 씨는 뒷발을 땅에 디딜 수가 없었고 그게 바로 사인이었다. 허나 그런 '어떻게'에는 분명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진도 씨는 어떻게 그 사이로 목을 맬 수가 있었단 말인가?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 주변을 반복해서 돌아 밑기둥에 목줄이 반 정도 감기게 한 뒤, 바로 옆 바위를 타고 집 지붕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남은 목줄이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통과해 고정되도록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가 빠져있었다. 도대체 왜? 어찌하여? 소나무야, 너는 무얼 알고 있니?


나는 목줄에 걸린 진도 씨를 빼내어(예상대로 그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마당과 인접한 부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땅을 막 파던 찰나 나는 생각했다. 두 아이와 너무 가까이에 자리하면 그 애들에게 또다시 못 할 짓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한참 흙을 파내던 중 나는 묘한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작은 언덕 위로 그녀가 앉아 있었다. 예의 그 품위 있는 앉음새로.


나는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금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가끔씩 고개를 돌릴 때면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자리의 정당한 입회인이라는 듯이.


마침내 진도 씨의 매장을 모두 마치고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없었다. 그녀는 아마 기품있는 걸음으로 몸을 돌려 나아갔을 것이다. 들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모두 씻겨 내리게 만드는 그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처음 내 앞으로 정중히 다가오던 그 날처럼.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fin-

















후기


사실 나는 요크셔파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86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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