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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 김아무개가 젊었을 때, 친한 친구 서너명과 함께 백연봉 아래에 있는 영월암에서 공부를 했다.

하루는 친구들이 다 집에 돌아가서 깊은 밤에 혼자 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인이 곡하는 소리가 원망하는 듯 하소연하는 듯 영월암 뒤쪽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곡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와 창 밖에 와서 멈췄다.

공은 괴이하게 여겼지만 똑바로 앉아 흔들리지 않고 물었다.

[밖에 있는 것은 귀신이오, 사람이오?]



그러자 밖에서 여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귀신입니다.]

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귀신 주제에 감히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느냐?]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제가 살아 있을 때 해결하지 못해 한이 된 것이 있는데, 어르신이 아니면 그 한을 풀어주실 분이 없을 것 같아 하소연하려고 왔습니다.]



공이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여인은 보이지 않고 공중에서 휘파람 소리만 나면서 말소리가 들렸다.

[제 모습을 드러내면 공께서 놀라실까 두렵습니다.]

공이 말했다.



[일단 네 모습을 드러내 보거라.]

공이 말을 마치자 눈 앞에 한 젊은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공이 말했다.



[그대는 무슨 원통한 일을 겪어서 내게 하소연하려는 것인가?]

[저는 조정 관리의 딸로 아무개의 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요망한 계집에게 홀려서 저를 꾸짖고 때리더니 결국 그 여자의 꾀임에 넘어가 한밤 중에 저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영월암 절벽 사이에 버린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남편은 우리 부모님에게마저 제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도 슬픈데, 죽어서 오명까지 뒤집어 쓰니 이 원한은 저승에서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공이 말했다.



[네 사정이 비록 딱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냥 선비일 뿐이다. 무슨 방법으로 원한을 풀어줄 수 있겠느냐?]

여인이 말했다.

[공께서는 어느 해에 과거에 급제하실 것이고, 어느 해에는 이러한 관직에 올랐다 어느 해에 형조참의가 되실 것입니다. 형조는 형벌을 다루는 곳이니 그 관직에 오르시면 제 원통함을 풀어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여인은 하직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공이 몰래 절벽 사이를 살펴 보았더니, 과연 한 여인의 시체가 있었는데 바로 어제 봤던 그 여인이었다.

여인의 시체는 피에 흠뻑 젖어 있어 마치 금방 전에 죽은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공은 돌아와 책을 읽으며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후 공은 귀신의 말대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게 되었다.

공은 귀신의 하소연을 기억하고 곧장 관아에 달려가 그 여자의 남편을 잡아들여 신문했다.



[너는 영월암에서 억울하게 죽은 네 아내를 기억하겠지?]

하지만 그는 변명을 하며 범행을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그를 영월암으로 끌고 가서 시체를 보여주었다.



그는 말문이 막혀 한참을 멍하니 있다 곧 모든 사실을 시인하였다.

공은 여자의 부모를 불러서 장례를 치루게 하고, 그녀의 남편은 사형에 처했다.

밤에 공이 다시 영월암에 들어가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있으니,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창 밖에서 울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그 여자는 전과는 다르게 머리를 쪽지어 단정히 하였고, 옷도 깨끗하게 입고 있었다.

공은 그녀를 가까이 불러 자신의 운세를 물었더니 여인이 대답했다.

[공께서는 어느 해에 어느 직급에 올라가시고, 결국에는 대관의 지위에 이르실 것입니다. 어느 해에 나라를 위해 일하시다 돌아가실텐데, 죽은 후에도 그 명성이 전국에 자자할 것입니다. 자손도 크게 번창할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하직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공은 여자가 읊어 준 운세를 평생 기억했는데, 역시 모든 것이 그녀의 말처럼 이루어졌다.

공은 말년에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순국하였으며, 그 명성이 후대에까지 아름답게 기억되었다고 한다.

 

Illust by 엥비(http://blog.naver.com/junknb)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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