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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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살아남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도망친 것이다. 내 품에 싸인 이 '물건'을 맡아야 하니까. 나는 이 '물건'을 맡으라는 명을 하달받았다. 그 명을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탈출로를 선점 받았다. 그러니 조금은 내 비겁함을 변호해야겠다. 나는 명에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을 맡은 다음은, 그다음엔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같이 평생을 명에 따랐던 군인에게 있어
은퇴란 그런 거다. 계획된 것이든, 계획되지 않았던 것이든 간에. 앞으론 군복 대신 셔츠 쪼가리 하나만 걸칠 것이다. (어차피 군복도 모두 처분한 지 오래다) 그리곤 이 따뜻한 곳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겠지.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어쨌건, 그렇게라도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이 끝까지 사는 거다.
히틀러 씨(그분은 항시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바랐다)가 이 '물건'을 처음 접한 건 빈에 거주하며 미술에 몸담고 있던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그것은, 1912년 합스부르크 가의 보물을 전시하던 박물관에서였다. 처음 히틀러 씨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그게 2시간 전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 평소 조용하고 수줍음 많았던 히틀러 씨는 이야기 내내 핏발에 광기를 띠고 있었다. 히틀러 씨는 마치 다른 세상을 엿보고 있는 양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선 그날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온 유럽이 기독교인 만큼 나 또한 가톨릭교도였네. 그래서 처음 그 '창'에 어떤 신성함 같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실제로 본 순간 모든 게 날아가 버렸네. 그때 내가 느낀 건 신성함이 결코 아니었어. 곧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비명 지르는 게 느껴졌지. 때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잖나. 그리곤.. 이건 농담이 아닐세. 그 '창'이 내게 말을 건네왔어.
'아디, 아디. 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옛날, 네가 태어나기도 전 네가 날 손에 넣었을 무렵부터. 아디, 내게로 오렴.'"
그 뒤, 히틀러 씨는 1차 세계 대전 참전 후로부터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계와 대중의 총아가 되었다. 그렇게, 방랑하던 미술가는 1934년 독일의 총통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 씨와 '창'과의 인연(?)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자 비밀스러운 심복이었던(그리고 친구였던) 나는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 임무를 일임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임무의 첫 수행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창'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창'은 여러 주인의 손을 탔던 것 같다. 아리마태아의 요셉 자손들이 차례로 보관해오다 오랜 세월 예루살렘에 묻혀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이 찾아낸 이래로.
그렇게 로마 황제들의 손에 번갈아 들어갔던 '창'은 그들을 패권의 길로 인도했다. 허나 손을 벗어난 '창'은
그들을 곧바로 패망의 길로 밀어뜨렸다. 이후 십자군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창'은
원정 승리로써 그에 보답한다.
그 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창'은 그들에게 유럽 제일의 패권을 가져다주었다. 천하에 위세를 떨치던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빛나는 승전보를 올리나 끝내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창을 가로채는 데엔 실패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600년 가깝도록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배하며 1914년 세계 대전을 선포한다.
그리고 1938년. 히틀러 씨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병합한다. 동시에 히틀러 씨는 친위대 앞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들을 압수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물론, 그전에 미리 비밀명령을 하달받은 나로 인해 '창'은 아무도 모르게 가짜로 대체된다. 뉘른베르크의 교회로 옮겨진 게 바로 그 가짜였다.
마침내 히틀러 씨는 '창'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망했었던 그 '창'을. 지금에 와 보면 가난한 미술가가 독일의 총통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합병한 게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1939년. 히틀러 씨는 폴란드 침공을 전개했고 곧 두 번째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창'을 손에 넣은 히틀러 씨는 곧 전 세계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마침내 이곳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내가 아무도 모르게 친위대 중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안전하게 탈출로를 선점 받았던 것은 히틀러 씨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씨는 확신했다. '창'이 수중에 있는 한 운명은 다시금 자신의 편에 서리라고. 하여, 첩보를 입수하고선 전설의 '창'을 손에 넣으려 호시탐탐 침을 흘려대는 개떼(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에 대비해 내가 움직인 것이다.
머저리 놈들. 가짜를 두고서 서로 물어뜯기나 하라지. 말했듯, 히틀러 씨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창'만 있다면야 언젠간 전황이 바뀔 거라고. 그러나 쑥밭으로 둘러싸인 벙커 안에서 히틀러 씨는 마침내 낙담하며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창'의 보관 임무에 실패한 거라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히틀러 씨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낯선 땅에 홀로 남겨졌다. 말했듯,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나는 이제 안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직감하고 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창'은 신성한 피가 닿은 성유물이 아니었다. '창'은 패권으로 인도하는 제왕의 유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창'은 기다렸다. 로마 제국 시절 발견된 이래 황제들의 손을 거치며 그들을 부추겼다. 그들을 움직였다.
'창'은 그들론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차례로 그들을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허무한 몰락을 맞이했고 '창'은 십자군 원정을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로 도착했다. (십자군 역시 끝내 버림받으며 비참한 끝을 맞이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대로 된 대상자를 찾은 것이다.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세계 대전이 끝나자 '창'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버렸다. 지난 '그들'이 그러했듯 합스부르크 왕가는 몰락했고 '창'은 히틀러 씨를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이제는 안다. '창'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제 안다. '창'은 피를 원한다. 우리 인간의 피를. 더 많은 우리 인간의 피를. '창'에는 그 옛날 두 번째 인간을 유혹했던 사탄이 깃들여 있는 거다. 사탄은 광야에서 나사렛 사람에게 세 가지 유혹을 거절당하곤 잠시간 자취를 감췄다. 사탄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건 '그날'이었다. 사탄은 스스로를 '창' 속에 구속한 것이다. 인간의 피를 부르기 위해. 나사렛 사람을 평등과 사랑을 전파한 개혁가가 아닌, 오로지 신의 아들로만 만들고자. 그러기 위해 '장치'를 자처했다.
'창'이 마침내 두 번째 인간이 탄생했던 곳을 찔렀다. 사탄은 스스로를 구속시키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에 성공한 거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이 신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두고서 신의 이름을 빌린 자들에 의해 쏟아진 헤아릴 수 없는 피들이 아마 땅속을 스며들어 저 아래 지옥에까지 닿았을 것이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창'은 끝없이 피를 갈구하며 대상자를 찾아왔다. '창'은, 사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창'이 더는 인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오, 하늘에 계신 분이시여. 이 사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땅에 가라앉히든, 물에 가라앉히든, 가라앉은 건 언제고 떠오르는 법이 아닌가. 나는 대상자들이 사탄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최소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러도록 할 것이다. 사탄을 항시 품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오래지 않아.. 그래, 머지않아서. 대상자들이 다시금 사탄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개 무리는 늑대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 법이니까. 그때까지 우리 인간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오래도록 지금의 피에 만족하길. 그래서 가능한 한 늦게 대상자를 불러들이길.
"meos tuosque, huc ades"
-fin-
후기
대표적인 성유물 '운명의 창'을 두고서 실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 종교 소재만큼 영감을 자극하는 게 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색채를 입히면 제 아무리 덜떨어진 수준의 창작물이라도 일견 봐줄만해지는 법 아닌가.
어쨌건, 나 역시 성(聖)을 향한 관음 욕구를 기꺼이 소비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이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의 역할이 종래 다른 창작물들과 다른 노선을 띠고 있는 것에 기꺼워하는 편이다. 그건, 성(聖)스러움을 확립코자 쌍스러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그것을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이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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