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ground

모인

320x100


정조 대왕 때 1782년에서 1783년 사이에 영남 안찰사 김아무개가 가을에 순시를 하다가 함양에 도착해 위성관에 머물렀다.

안찰사는 심부름꾼들과 기생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방에서 혼자 잠을 잤다.

한밤 중 인적이 고요한데, 침실의 문이 슬쩍 열렸다가 닫히더니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김공이 잠에서 깨어나 물었다.

[너는 누구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저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깊은 밤에 다른 사람 하나 없는데 어찌 이렇게 수상하게 움직이는가? 혹시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간절히 아뢸 일이 있나이다.]

김공이 일어나서 사람을 불러 불을 켜려고 하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만약 제 모습을 보신다면 안찰사께서 틀림없이 놀라고 두려워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라도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김공이 말했다.

[그대는 얼마나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불도 켜지 못하게 하는가?]




[제 온 몸이 털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가면 갈 수록 그 사람의 말이 괴이하였기에 김공이 다시 물었다.

[그대가 과연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온 몸에 털이 나게 되었단 말인가?]



[저는 원래 상주에 살던 우씨 성의 주서입니다. 중종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벼슬을 얻은 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제자가 되어 여러해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기묘사화 때 목숨을 잃으시고 여러 유생들이 잡혀갔지요. 저는 한양에서 도망쳤는데 만약 고향집으로 간다면 바로 잡혀들어갈 것 같아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여러 날을 굶주리고 피곤한데다 난생 처음 골짜기에 들어갔기에 먹는 것마저 힘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물가변에 혹시 풀이라도 있으면 뽑아 먹었고, 산과일이 있으면 따 먹었습니다. 먹을 때는 배가 좀 부르는 것 같더니, 똥을 눌 때면 모두 설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6개월 정도를 지냈더니 점차 온 몸에 털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길이가 몇 마디가 될 정도였습니다. 걸음걸이도 빨라져 마치 나는 것 같아, 천길 절벽도 뛰어넘을 수 있어 무슨 원숭이 같이 되었지요. 나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면 괴물로 몰려 죽을 것 같아 산에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목동을 보더라도 몸을 숨겼지요.]



그 사람은 목이 메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깊은 계곡, 겹겹이 쌓인 바위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살며 혹시 달이 밝게 뜨면, 혼자서 지난날 배웠던 경서를 암송하곤 했습니다. 제 신세를 생각하니 너무나도 한심하여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향의 부모와 처자가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을 알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사나운 호랑이나 독사도 무섭지 않고, 단지 사냥꾼이 무서워 낮에는 숨어다니고 밤에만 나다녔습니다. 이렇게 괴물의 꼴이 되어버렸지만 마음 속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언제나 세상 사람을 한 번 만나, 세상일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괴상한 모습으로는 차마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어르신의 행차가 이 곳에 오신다는 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뵙는 것일 뿐입니다. 저에게 다만 조광조 선생의 자손이 몇이나 되는지, 선생이 돌아가신 뒤 그 명예가 회복되고 결백함이 밝혀졌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합니다.]

김공이 말했다.

[정암 선생은 인조 때 명예가 회복되어 종묘에 그 신위가 배향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액서원도 여러 곳에 있고 그 댁 자손들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조정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니 걱정 마십시오.]



김공은 내친김에 기묘사화 당시의 일에 관해 물었다.

그 사람은 하나라도 빠트리거나 잊어버린 것 없이 모든 사실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또 처음 도망칠 때 그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서른 다섯이었습니다.]

[그럼 기묘년으로부터 지금까지 300여년이 흘렀는데, 그렇다면 그대의 나이는 거의 400살에 가깝겠구려!]

[저는 그 동안 깊은 산에서 세월을 보내서 나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그대는 지리산에 산다고 하셨지요. 그대가 사는 굴과 이 곳의 거리는 상당히 멀텐데 어찌 그렇게 빠르게 오신 것이오?]

[기운이 날 때는 아무리 험한 절벽이라도 원숭이가 뛰어 놀듯 넘어다닙니다. 한순간에 몇십 리를 달릴 수 있지요.]



김공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라며 음식을 대접하려 하자 그가 말했다.

[음식은 필요 없습니다. 굳이 주시려거든 과일이나 좀 주시지요.]

하지만 하필 방 안에 과일이 없었다.



밤중에 과일을 구해오라고 하기도 힘들었기에 김공이 말했다.

[지금 하필이면 과일이 없구려! 내일 밤 그대가 다시 온다면 그 때 과일을 준비해 놓겠소. 내일 오실 수 있겠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즉시 방을 나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공은 그가 다시 온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하루 더 위성관에서 머물렀다.

그 날 아침과 점심 식사에 나온 과일을 모두 챙겨놓고 그 사람을 기다렸다.



과연 밤이 깊어지자 그가 다시 왔다.

김공이 일어나 그를 맞이하고, 과일을 내어주니 그가 크게 기뻐하며 과일을 모두 다 먹었다.

[덕분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지리산 안에 과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대는 먹을 걱정은 없는 것이오?]

[매년 가을 낙엽이 질 때면 밤중에 주워 모아둔 과일이 서너 무더기는 되는데, 그것으로 먹고 삽니다. 처음 풀만 먹을 때의 괴로움은 이제 극복했습니다. 과일만 먹어도 기력이 펄펄 넘칩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바로 앞에 있더라도 손발로 때려 잡을 수 있습니다.]



김공과 그 사람은 기묘년 사건에 대해 한바탕 이야기를 더 하고 헤어졌다.

김공이 평생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죽기 전에야 비로소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옛날에 털이 난 여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명하여 이 일을 글로 써서 알리게 하였다.

지금 세상에 모인의 이야기가 퍼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Illust by 엥비(http://blog.naver.com/junknb)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 글을 읽으신 후 하단의 손가락 버튼 한 번씩 클릭 해주시면 번역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