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ground

2017/05

[번역괴담][2ch괴담][869th]인어

괴담 번역 2017. 5. 12. 23:53
320x100



매년 여름이 되면 아버지 고향에 내려가곤 했다.


시골은 섬이라, 대부분 사람들이 어업에 종사하거나 김 양식을 하며 살아가는 어촌이었다.


할아버지 댁은 산 근처라서, 자주 사촌들이랑 산에 오르거나 바다에서 놀곤 했다.




산 바로 앞에 강이 흐르고,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에는 게가 많아서 자주 잡으러 가곤 했다.


그날은 추석이었다.


어른들은 [추석날 헤엄치면 상어가 나오니까 절대 물에 들어가면 안된다!] 라고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사촌동생과 둘이서 게를 잡으러 갔다.


게를 잡으러 가는 길, 강을 건너가는데 다리 위에서 사촌동생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형! 저기 사람이 있어.]




다리 아래는 게가 잘 잡히는 곳이었기에, 먼저 온 사람이 있나 싶어 내려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잖아.] 


[거기 말고. 강 속에. 여자가 있잖아.]




강물 속을 바라보자, 확실히 긴 머리의 여자가 옆모습을 드러낸채 서서히 강 상류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어? 뭐지? 어떻게 거꾸로 흘러갈 수 있는거지?




그 순간, 그 여자가 몸을 휙 뒤집어서 내 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히익!]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한동안은 무서워서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잠시 뒤 눈을 뜨자, 사촌동생은 가만히 강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촌동생은 무서워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내가 바짓자락을 잡아끌자, [저기, 형. 저 사람 진짜 예쁘다. 인어일까? 아니면 강의 여신님?] 하고 한가하게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끔찍한 모습일 뿐이었다.


어떤 옷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구불구불하고 긴 머리카락에 마른 몸.


그리고 나를 째려본 무시무시한 얼굴만 생각날 뿐.




기묘하게도 사촌동생에게는 그 모습이 아름답고 신처럼 보일 정도였던 것 같다.


같은 것을 보았는지, 다른 것을 보았는지, 아니면 서로에게 다른 모습이 보였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촌동생은 그로부터 2년 뒤, 바다에서 사고로 죽었다.




그 여자와 관련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 한번도 헤엄을 치지 않고 있다.



320x100

귀담백경, 2015

호러 영화 짧평 2017. 5. 11. 22:04
320x100



잔예와 마찬가지로 오노 후유미 원작에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 작품.

원작은 괴담 신미미부쿠로 시리즈처럼, 100편의 짧은 괴담이 담겨있는 괴담집이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 100개의 이야기 중, 어떤 걸 걸러내고 어떤 걸 담아낼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잔예 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원작에 너무 매달렸습니다.

솔직히 귀담백경은 아마 여러분이 읽으시면 시시하다고 느끼고 넘어갈 정도의 괴담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노 후유미의 작품들을 좋아하고, 귀담백경 책도 가지고 있지만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100편의 괴담 중 소름끼치는 건 솔직히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영화로 만든다고 달라질까요?

영화는 10편의 에피소드를 뽑아내서 만들었지만, 원작 이야기를 그대로 영상에 담는데에만 치중했습니다.

당연히 원래부터 안 무서웠던 이야기인데 영상으로 바뀌었다고 심각하게 무서워지지는 않습니다.

근데 그나마도 뭔가 진지하게 공포에 빠지기 애매해요.


지금 여러분이 보고계신 귀신의 자기부양 움짤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솔직히 이거부터가 하나도 안 무섭고 오히려 웃기지 않습니까.

잔예의 경우에는 차라리 괴담의 기원을 파고드는 다큐멘터리 같은 맛으로 보는 매력이라도 있었지만, 귀담백경은 도저히 뭐 커버가 안 쳐지는 수준이었습니다.

10개 중에서 제 기준으로 그나마 어떻게든 팬심 동원해봐도 건질만한 에피소드는 1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굳이 안 보셔도 될 작품이라는 겁니다.

솔직히 시간과 돈을 위해서는 아예 안 보시는게 나을 거 같고요.

제 평가는 3점입니다.

나름 기대했던 작품인데 이 정도까지 말아먹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죠 흑흑...


320x100
320x100



그간 트위터에서 호러 영화를 보면서 짧게짧게 개인적인 소감과 평가를 남겨왔습니다.


140자 제한이 있는 트위터에서, 서너개 트윗으로 영화를 정리하다보니 그야말로 짧은 평가, 짧평이 되더라고요.


나름대로 본 영화들이 쌓이고 있고, 개인 취미라서 호러 영화 감상은 평생 할 거 같습니다.


블로그에도 가끔씩 영화 감상을 남기고, 여러분들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트위터보다 조금 정제된 리뷰를 올려보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트위터에 올린 짧평의 합본이 되겠습니다만, 거기서 약간 더 다듬어진 리뷰가 올라오게 될 것 같네요.


괴담의 중심,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320x100
320x100



며칠 전, 성인식 끝난 뒤 있었던 동창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친구 T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지내왔다.


T는 그런 가정환경에도 주눅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학급위원도 하고, 축구부 주장도 하면서 공부와 운동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멋진 학창생활을 보냈다.


T의 어머니 또한 아들바보인데다 뒷바라지에 힘써, 종종 휴일이면 T랑 친구들을 데리고 수족관도 가고, 축구 경기 때는 응원도 오시곤 했다.


지금도 T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만, 작년 T가 칸사이 쪽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집을 나와 자취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도 아들의 독립을 응원해주며, [열심히 공부하고 오렴!] 하고 배웅해주셨단다.


집을 떠나는 날에는 [외로워지거나 힘들면 이걸 엄마라고 생각하고 기운 내렴.] 이라며 손수 만든 작은 고양이 인형을 주셨단다.


T는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는 녀석이거든.




낯선 지방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T.


자취를 시작하고 한달 정도 지난 어느날 밤, 잠을 자다 갑자기 깨어났단다.


의식이 뚜렷해짐과 동시에, 가슴 위에 누군가 앉아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도 닫힌채 열리질 않는다.


이게 가위눌림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고 한다.


단지 가슴 위에 누름돌이라도 올려져 있는 듯, 무겁고 괴로웠다고 한다.


한동안 끙끙대고 있는 사이, 어느새 또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고 한다.


방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그날부터 T는 종종 한밤 중에 가위에 눌리게 되었다.




그 탓에 잠을 자도 피로는 쌓이고, 몸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어느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머니한테 받은 그 고양이 인형을 손에 쥐고 잤다고 한다.


부적 대신 삼을 생각으로 말이지.




하지만 그날 밤도 가위에 눌렸다.


T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손에 있는 인형을 꽉 잡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꽉 닫혀 뜰 수가 없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T의 눈에 비친 것은, T의 가슴 위에 정좌한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잠옷 입은 여자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른 뒤, T는 기절했다.


날이 밝고 나자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오른손은 고양이 인형을 꽉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한달 정도 지나서부터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익숙하지 않은 환경인데다 첫 자취라서, 정신적으로 좀 쫓기고 있었던 거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T는 웃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좋은 이야기네. 어머니가 주신 인형이 널 지켜준 거 아니야?] 라고 물었다.


하지만 T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글쎄, 그건 어떨지 모르겠네. 왜냐하면 내 위에 앉아있던 그 여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어머니였단 말이야.]



320x100
320x100


동아시아 나라 간 얽히고 얽힌 수많은 관계 중에서도,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 3국의 관계는 정말 복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이라는 현대사의 큰 곡절을 넘어오면서, 이 세 나라는 서로 적대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음알음 협력하는 관계를 이어왔죠. 

그런데 이런 세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사랑 받고, 또 금지되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임진강이라는 노래입니다.



fAadsb3.png 


익히 아시겠지만 임진강은 황해도와 경기도를 가로지르는, 남북의 자연경계선 중 하나입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갈려져 있는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경기도 출신의 월북시인 박세영은 이런 임진강을 주제로 한편의 시를 쓰게 됩니다. 

1950년대 쓰여진 이 시는, 북쪽에서 임진강 너머 남한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 1957년, 고종한이 작곡을 해 노래가 만들어지면서 북한 사회에서 큰 히트곡이 됩니다.





림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땅 가곺아도 못 가니 
림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 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 고향 남쪽땅 가곺아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허나 이 시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시를 쓴 작가 박세영이 공산주의 찬양에 앞장서던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박세영은 일제 강점기 시절 KAPF 소속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공산주의 관련 시를 써냈던 인물입니다. 

해방 후에는 월북해서 북한 문단의 거물로 자리잡았고, 현재까지도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북한판 애국가의 작사 또한 맡았습니다. 

그 공으로 북한 공훈예술가의 자리에도 올랐죠. 



이런 그의 사상적 기반은 임진강의 2연에도 드러납니다.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데, 들판이 메말라 풀뿌리나 캐먹고 있습니다. 

북쪽은 협동벌에 이삭이 가득해 바다물결 춤추듯 하는데 말이죠. 

이는 당시 천리마 운동으로 한참 북한이 남한보다 잘 나갈 무렵이라는 걸 돌려 표현한 셈입니다. 



그리하여 이 체제 찬양적인 노래가 북한에서 히트를 친 건 좋은데... 

정작 시대가 변하면서 북한 정권에서는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처리하게 됩니다. 

남한에 두고온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감상적인 내용이, 체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음에 따라서였죠. 

결국 북한에서는 60년대 후반부터 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가 어떻게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 전래되게 되었을까요? 

일본에서 처음 임진강 노래를 취입한 그룹은 포크 그룹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입니다. 

1960년대를 풍미한 포크송 그룹으로, 긴 휴지기가 있었지만 현재도 활동 중인 전설적인 그룹이죠. 

당시 이들에게 가사를 써주던 작사가 마츠야마 타케시가 이 노래를 추천해주고 일본어로 가사를 번안해주었다고 합니다.



96IJrMm.jpg



마츠야마 타케시는 교토 출신인데, 당시 교토에서는 일본인과 재일 한국인 간의 사이가 극단적으로 나빴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사이에도 패싸움이 줄을 이었다고 하고요. 


그래서 1961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마츠야마 타케시는 이런 갈등을 스포츠로 해결하고자, 조총련계 학교와의 축구 친선전을 학교에 제의했다고 합니다. 


친선전은 성황리에 치뤄졌는데, 당시 이 경기에서 조총련계 학생들이 응원가로 불렀던 노래가 바로 임진강이었습니다. 


이 노래를 감명깊게 들은 마츠야마 타케시는 오랫동안 그 곡조를 기억하고 있다가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에게 전해주게 된 것이죠.




 



임진강은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두번째 싱글로 1968년 2월 21일 발매됩니다. 


하지만 공연에서 워낙 호평을 받았던 곡임에도, 임진강 싱글은 곧 판매중지 조치를 받게됩니다. 


조총련 측에서 원곡이 북한 노래임을 알리고, 작사자와 작곡가를 명확히 할 것, 그리고 원곡의 번역을 그대로 살릴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츠야마 타케시는 가사를 번역하면서 2연의 정치적 내용을 들어내고, 그 부분에 민족의 아픔을 담아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총련 측의 항의로 인해, 북한 체제의 찬양적 내용이 있다는 게 드러나자 결국 정치적 이유로 이 곡은 일본에서도 금지곡이 됩니다. 


막 한일협정으로 국교를 정상화한 터였기에, 북한 노래가 널리 불리는 것을 한국 정부에서 원치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이후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는 임진강의 멜로디를 역재생해서 너무 슬퍼 참을 수 없다라는 곡을 싱글로 내기도 했습니다. 


일본 학생운동에서도 자주 부르던 노래였지만, 학생운동 바람이 잦아들면서 임진강 또한 잊혀져 갔죠. 


이 노래가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 이후에서였습니다. 


2002년 재발매 된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의 임진강 싱글은, 2002년 오리콘 순위에서 연간 14위를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국내에 이 노래가 알려지게 된 것은, 또 한참 후의 일입니다. 


군사정권 내내 북한 체제 찬양을 이유로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제대로 임진강이라는 노래가 알려지게 된 것은, 90년대 들어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몰았던 김연자 덕분이었습니다. 


김연자는 이 노래를 2001년 홍백가합전에서도 부르며,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노래를 발굴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죠. 


김연자 버전은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와 다르게, 남북분단 현실을 직접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더 절절하게 가사를 번안하기도 했고요.




 



더불어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 노래는 2004년작 영화 パッチギ!(박치기!)의 OST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판 임진강의 작사가, 마츠야마 타케시가 쓴 소년 M의 임진강(少年Mのイムジン河) 이라는 작품입니다. 


60년대 재일 한국인의 삶을 담아낸 영화 안에서, 임진강은 그 애환을 그대로 드러내는 매개체로 나타납니다. 


한일 양국에서 다시 한번 이 노래가 조명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오랜 세월 한국, 북한, 일본 세 나라에서 참 고초도 많았고 사랑도 받았던 노래입니다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모두가 하나였을 겁니다. 


남에서는 북을, 북에서는 남을, 일본에서는 이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고국을. 


그 시절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노래라고 생각하면,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곤 합니다. 


음악으로나마 그 마음들이 하나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320x100
320x100



정년퇴직 후, 할아버지는 취미로 유화를 그렸다.


인물화에 풍경화까지 딱히 가리는 것 없이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셨다.


그림들은 집에서 약간 떨어진 작업장에 장식해뒀고.





할아버지 댁에 가면 매번 새로운 그림들을 구경하곤 했다.


하지만 그 중 풍경화 한장이, 어릴 때부터 보기 두려웠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산 속을 흐르는 작은 강이 그려진 풍경화다.




나무들 사이를 발목 정도 찰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어찌보면 마음이 놓이는 그림이다.


하지만 내가 무섭다고 느낀 부분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묘하리만치 풍경화에는 사람을 그려넣지 않았다.




풍경화에는 풍경만을 담곤 했는데, 이상하게 그 그림에는 앞에서 흘러오는 강 안쪽에, 한 여자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지인을 일부러 그렸나 싶기도 했지만, 어쩐지 물어보질 못했다.


그저 그 여자가 무섭다고 여기며, 그 그림은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 애썼을 뿐.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또 할아버지 댁에 묵으러 갔었다.


문득 함께 있던 형에게 [그 그림에 있는 강가의 여자 무섭지 않아?] 라고 물어봤다.


형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대답해, 같이 그 그림을 보러 가게 되었다.




작업장에 도착해, 이 그림이라고 형에게 가리켰지만 [사람 같은 건 안 그려져 있잖아.]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세히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손가락을 뻗어 [여기 말이야, 여기.] 라고 직접 가리켰다.


하지만 형은 [너, 놀래키려고 이상한 장난 치는구나?] 라며 농담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 무렵에는 형이 보이면서도 일부러 안 보이는 척 장난 치는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후 그 그림을 봤더니, 여자가 그림에서 사라져버린게 아닌가.


여자를 마지막으로 봤던 건 중학교 3학년 때 여름이었다.




그때는 아직 그림 속에 여자가 있었다.


몇번이고 봤었기에, 단순한 착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때 그림 속에 보이던 여자를 떠올리면 묘하게 두려워진다.



320x100
320x100



내가 고등학생일 때 이야기.


그날은 확실히 점심시간 끝나고 1시간 반 정도 있다가 체육관에서 전교생이 모일 예정이었다.


나는 점심시간 내내 친구와 교실에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문득 어쩐지 조용하다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른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같은 걸 느꼈는지 주변을 돌아보다 깜짝 놀라 외쳤다.


[어, 왜 벌써 2시지?]




변명이고 뭐고, 당황해서 체육관을 뛰어갔다.


다른 반 아이가 체육관 문 앞에서 선생님한테 혼나고 있었다.


아, 쟤도 늦었나보다 싶었다.




나와 친구도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온거야!] 라고 잔뜩 혼이 났지만,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선생님은 더 화를 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반에서도 지각한 아이들이 달려왔다.




그것도 몇명씩 연달아서.


최종적으로는 30명 가까이 됐던 것 같다.


늦게 온 아이들은 모두 [왜 늦게 왔는지 모르겠어요.] 라던가, [정신을 차리니까 집합시간이 한참 지나있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와 친구처럼 다들 자기 교실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지경이 되니 화가 잔뜩 나 있던 선생님도 늦게 온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당황했던 것 같다.


결국 어영부영 다들 체육관으로 들여보내는 걸로 그 자리는 마무리가 됐다.




상당히 많은 인원이 빠졌는데도 담임 선생님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전교생이 모이는 집회 때는 전원이 모였는지 꼭 세어보곤 했었는데.


종종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도대체 무슨 조화였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카미카쿠시라는 건 이렇게 시간을 벗어난 뒤,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일이 아닐까.



320x100
320x100



이제 꺼내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결혼을 앞두고 이야기 해보려 한다.


우리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지는 자장가가 있다.


"들은 사람이 악몽을 꾸게 되는 자장가" 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겠지.


시에 가락을 붙인 느낌으로, 라디오 체조 정도의 짧은 노래다.


글로 써놓으면 [아~ 시이~ 훗히~~ 잇타하아가아아아앗.] 정도의 느낌이다.




어찌 되었든 무척 독특한 노래다.


대대로 집안 사람들만 알고 있는 노래다.


전국시대, 우리 집안이 섬기던 영주를 죽인 무사의 집에 들어가 유모가 된 뒤 후계자를 죽였다는 애매한 전설도 따라붙어 있다.




사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어릴 때는 정말 무서웠었다.


부모님이 [자장가를 불러줄거야!] 라고 겁을 주면 울 정도로.


내게는 대학에 들어온 뒤 25살이 될 때까지, 4년 정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프로포즈를 받고, 상견례까지 마친 뒤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던 게 들통났다.


게다가 그걸 들켜놓고서는 같잖은 개그로 얼버무리려 들었다.


그 무렵에는 반쯤 동거하고 있다시피 했기에 대충 얼버무리고 술에 취해 잠든 그를 보니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처음으로 그 자장가를 내 입에 담았다.


3번 정도 되풀이 했을 것이다.


그랬더니 남자친구가 갑자기 눈을 딱 뜨더니 그 자리에서 막 토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지만, 토하고 나서 또 토투성이 이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길래 그냥 버리고 돌아왔다.


자장가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그때는 분간도 되지 않았고.


그 후, 상대 쪽 부모님에게 위자료도 받고 제대로 헤어졌다.




그의 친구에게 근황을 전해들었는데, 악몽을 매일 꾸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죽어서 썩어가는 꿈만 계속.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순식간에 야위었다고 한다.




게다가 1년 정도 지나자 회사를 그만두고 입원치료를 받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나는 그 이후 고향으로 내려왔기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자장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최대한 그 노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무서우니까.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