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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 3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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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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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4년여 전 즈음의 일인 것 같다. 아니, 5년? 어쨌건 망아지처럼 날뛰지만 않는다면야 비교적 좋은 날씨라 취급할 수 있는 그런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도심 생활을 마무리 짓고선 경기도 외곽 산허리에서 똬리를 틀던 차였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싶으면 읽고 글을 쓰고 싶으면 쓰는 신선놀음 짓에 기꺼워하고 있었다.


한밤중, 산허리를 맨 소나무 끝 가지 위 애처로이 두 발을 디딘 뻐꾸기의 울음 새로 책장을 넘긴 일이 당신은 있는가? 아직 없다면 앞으로도 그러길. 그건 보다 적은 이들이 누렸으면 하는 이기적인 기쁨의 하나이니까.


그날 해가 꺼져가는 오후 녘. 툇마루에 놓인 원목 흔들의자 위로 궁둥짝을 방정맞게 도리질하다 중간 즈음 읽던 책을 잠시 덮고선 맞은편의 산마루를 똥폼스레 바라보던 때였다.



냐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던 공간과 시간 복판에서 자그마한 얼굴을 치켜든 고 씨가 잘록하게 빠진 허리를 네 다리로 이며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는(남자는 언제든 상대가 여자인지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마치 한 동작인 양 툇마루로 깡총하게 올라서선 내 바로 앞 장판 떼기 위로 사뭇 교양 머리 있는 차림새의 앉음 모양을 취했다.



..누구니?



그녀는 올바른 대답 대신 두어 차례 내 언어를 모방한 울음을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한층 빳빳이 추켜세웠다. 그 모방이 적잖이 출중했던지라 나는 그 뜻을 받들어 곧 주방에서 뒤져온 마른 멸치 움큼과 냉수 한 잔을 정중히 그녀 앞으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제 내가 자기에게 빠졌다는 것(실은 첫눈에 그랬다만)을 과신한 양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묵묵히 주안상을 비워댔다.


용무를 마친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진 내 얼굴을 흘끗 훑더니(남자의 미소는 그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법이다) 엎드린 자세로 주저앉아선 고개를 꾸벅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한 나는 낮잠이 이어진 1시간여 동안 그녀의 몸을 탐할 수가 있었다. 그날 졸음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휑하고 일어나 우아한 발놀림으로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숨겼다.


다행히 그녀 또한 내가 제법 마음에 찼는지 그러한 입궐은 밤공기가 제법 싸늘해질 때까지 매일같이 이루어졌다. 서늘해질 때까지. 계절이 넘어가던 무렵 그녀는 갑작스레 발길을 끊었고, 이제 툇마루엔 실의에 찬 남자 하나가 의자 위로 하릴없이 그 몸뚱어릴 흔들어 젖히며 공허히 산마루를 응시하매 연정을 달랠 뿐이었다.


그러던 의자 위로 남자의 옷차림이 달라졌을 무렵이었다.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그녀가 다시금 툇마루를 찾았다. 그 꽁무니로 자신의 서늘한 눈매를 똑 닮은 새끼 둘을 동반하고서.


이제 우리 둘은 달라진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그녀는 두 아이가 서로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동안 서둘러 밥상을 비우곤 잠시 구석에서 짧은 낮잠으로 고단함을 쫓아야 했고,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놀다 지쳐 의자 위로 고꾸라진 아이들을 재우랴 조심스레 의자 머리를 흔들어대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한낮 동안 내게 탁아를 부탁하곤 외출을 할 수가 있었으니 그녀에겐 퍽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몇 달간 이를 몹시도 못마땅해하던 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인접한 마당의 진도(잡종) 씨였다. 그는 본디 대단히 순박했던 이였으나 언젠가 줄을 풀고서 산 아래 동네의 닭 따위를 해한 연유로 짧아진 쇠줄 아래에서 고 씨 가족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허나 그의 목줄을 다시금 늘어뜨릴 수만도 없었다. 이미 그가 한 차례 피 맛을 본 뒤였기 때문이겠다. 그는 이제 사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 짓는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다. (핏속에 새겨진 기호 위에서 누군들 자유로우랴) 물론, 난데없이 사랑방을 꾀고 앉은 고 씨네 새댁이 그의 마음에 찰리 만무했다.


어느 날이었다. 마당을 나온 나는 진도 씨네 집안이 텅 빈 것을 보곤 그의 행방을 쫓아 사방팔리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끝내 그의 행방을 포기하고선 떨어지는 태양을 따라 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잡초더미 사이로 마치 땅바닥에서 뜯겨 나온 듯한 사체 두 구를 보았으니, 둘은 내게 탁아의 책임이 있던 그 아이들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나는 내 안에 이는 감당 못 할 회한들의 크기로 인해 끝끝내 아무런 감정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그저 두 아이를 조심스레 사뿐히 안아 들고는 마당과 인접한 부지(敷地)로 향할 뿐이었다. 그렇게 둘을 부지 내 툇마루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다 묻고는 며칠이나 지났을 무렵에도 진도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 씨 또한.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고서였다. 대낮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 툇마루로 나서니 그곳엔 돌아온 탕아가 반쯤 사라진 목줄을 한 채 집 주변을 촐싹대며 돌아댕기고 있었다. (범행은 어렵지가 않다. 도망가는 게 힘들지)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콧김을 한차례 불어 젖히더니 요기할 게 없느냐며 재촉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뻔뻔스러움에 재차 이는 분통을 뒤로하고선 엊저녁 먹고 남긴 찬밥을 국에다 말아 한 사발 차려 주었다.


접싯물에 코 박은 채 숨 쉴 새도 없이 쩝쩝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예뻐해 하고 이름을 붙여주고 옷을 입혀주며 어쩌고저쩌고해도 개는 개라는 것을. 그런 내 마음은 미처 사라지질 못한 분노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던 또 어느 날이었다. 채 넘기지 못한 책장에 못내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던 나는 잠결에 무슨 낌새래도 차렸는지 여적 어둑하던 꺼먼 새벽녘 눈을 떴다. (못다 한 일이 있으면 잠귀가 밝아지는 법이다)





창문에 바람이 새는듯한 소리에 나는 홀리듯 그 근원지로 졸린 발을 끌었다.



톡 톡



그 소리는 툇마루와 연결된 서재 통유리에서 나고 있었다. 서재로 발을 디딘 나는 점차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그것이 무슨 연유로 인한 소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나는 황급히 주저앉아 문을 열어젖히고선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는 예의 그 품위 어린 앉음새로 나를 살그머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재차 엄습함과 동시에 그 이상으로 그녀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던 묵은 감정이 쏟아지면서 결국 나는 몇 번이나 한풀이하듯 넋두리했다.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그녀는 말없이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그저 한스러운 그 넋두리를 목도할 뿐이었다. 그리곤 잠시 후 몸을 돌려 하늘한 걸음새로 저 건너 어둠과 동화되어갔다. 나는 꼭 다른 사람의 발로 걷는듯한 걸음걸이로 다시금 잠자리로 향했다. 마치 그러한 행위가 꿈속을 빠져나와 현실로 되돌아가는 의식인 것만 같았다.


다음날, 간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툇마루로 나온 나는 끔찍한 산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건 어떤 잔혹한 표현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을 광경이었다. 진도 씨가 죽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풍경이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공포를 느끼잖는가)


진도 씨네 바로 앞으로 나 있던 정자(널찍한 바위), 그 정자로 세워져 있던 아이만 한 크기의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진도 씨가 목매달려 있던 것이다. 그건 교수형의 그것과 동일한 모양새였다. 나는 만져보지 않아도 진도 씨의 몸이 이미 뻣뻣하게 굳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또 설명할 길 없는 그 죽음에, 나는 한동안 슬퍼하거나 시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소나무와 그 소나무로 매달린 목줄을 살펴보았다.


사유는 명백했다. 소나무 한가운데 굵은 가지 사이로 고정된 목줄로 인해 진도 씨는 뒷발을 땅에 디딜 수가 없었고 그게 바로 사인이었다. 허나 그런 '어떻게'에는 분명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진도 씨는 어떻게 그 사이로 목을 맬 수가 있었단 말인가?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 주변을 반복해서 돌아 밑기둥에 목줄이 반 정도 감기게 한 뒤, 바로 옆 바위를 타고 집 지붕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남은 목줄이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통과해 고정되도록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가 빠져있었다. 도대체 왜? 어찌하여? 소나무야, 너는 무얼 알고 있니?


나는 목줄에 걸린 진도 씨를 빼내어(예상대로 그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마당과 인접한 부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땅을 막 파던 찰나 나는 생각했다. 두 아이와 너무 가까이에 자리하면 그 애들에게 또다시 못 할 짓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한참 흙을 파내던 중 나는 묘한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작은 언덕 위로 그녀가 앉아 있었다. 예의 그 품위 있는 앉음새로.


나는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금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가끔씩 고개를 돌릴 때면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자리의 정당한 입회인이라는 듯이.


마침내 진도 씨의 매장을 모두 마치고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없었다. 그녀는 아마 기품있는 걸음으로 몸을 돌려 나아갔을 것이다. 들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모두 씻겨 내리게 만드는 그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처음 내 앞으로 정중히 다가오던 그 날처럼.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fin-

















후기


사실 나는 요크셔파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86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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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 2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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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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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이름은 할랜드 베일이다. 통칭, 구원자 베일. 직업은 LA에서 제일 잘나가는(그리고 악명 높은) 변호사이고. 내게는 세 가지 룰이 있다.


첫째,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엄마가 내게 '사랑한다 아들아.'라고 한다면 먼저 그 말을 의심할 것. 둘째, 돈 많은 것들의 말을 믿어줄 것. 셋째, 두 번째 룰을 첫 번째 룰보다 우선시할 것.


말했듯, 나는 이 거리에서 '구원자 베일'로 통한다. '이 거리'란 당연히 할리우드를 뜻한다. 세상에서 악명을 떨치기 가장 적합한 곳. 그러니까 이 몸은 돈맛에 눈 돌아가 카메라 렌즈에 중독된 이 거리 종자들의 뒤를 닦아주고 계신다 이 말씀이다. 물론 돈 많은 비치(Beach)년놈들의 엉덩이도.


코카인 빨고서 뺑소니? 내게로 와. 술 자시고 운전하다 차량 서너 대쯤 박았다고? 그 정도는 귀엽지.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다? 뭐, 어때. 건강에 좋다며 아침마다 비타민 대신 섭취하는 놈들도 있는데. 여자 친구 얼굴에 난 멍 자국 좀 어떻게 해달라고? 사흘 안에 여자 친구가 찍소리 못하도록 약점을 물어다 주지.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약속하지, 남편 똥꼬까지 털어주겠노라고.


자, 이쯤 되면 내가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파악이 갈 거다. 그래, 맞다. 철딱서니 없는 할리우드 셀럽, 졸부년놈들의 악어새. 그게 바로 나, 구원자 베일이올시다. ..뭐라는 거야? 악어새가 악어와 공생 관계라는 건 사실 잘못 알려진 상식이라고? ..이봐, 자신 있으면 법정에서 증명해보라고. 어쨌거나.



"싯팔! 이게 웬 거야?"



초장부터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온 연유는 업무용 계좌에 뜬금없이 50만 달러가 꽂혀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50만 달러의 출처는 당일에 밝혀졌다.



"베일 씨, 베일 씨 전화 맞죠?"


"네, 누구시죠?"


"클라이언트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쪽이신가요? 아니면.."


"오늘 착수금을 보내드렸죠."


"..어디 관계자이시죠?"


"저는 그냥.. 민간인입니다."


"..내 개인 번호와 계좌는 어떻게 알아낸 거요? 당신 누구야?"


"그걸 궁금해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베일 씨. 안 그래도 오늘 만나서 말씀드릴까 했거든요."


"..여전히 내 질문에는 답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오늘 왜 만나?"


"오늘 오후부터는 스케줄이 있다고 손 쳐도 모두 사적인 걸 테니까요. 제가 약속드리죠. 오늘 저와 만나는 게

분명 당신 와이프 대신 애인과 루크스에서 식사하는 일보단 값어치 있을 거라고."


"뭐라고? 당신.."


"그러니 루크스에는 당신 애인 대신 제가 합류하도록 하죠. 베일 씨가 예약한 시간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하여.. 나는 금요일 오후 웬 처음 보는 40대 여성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40대. 그래, 맞다. 그녀는 분명 40대였을 것이다.


매끈하고 굴곡 없는 피부 결(하루가 멀다 하고 셀럽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내가 장담하는데 시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좁다래한 얼굴 넓이로 더없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역시, 모두 수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강렬한 대비의 홍채색. 분명, 외모만으로는 대학원생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지만..


클래식 스타일로 감아올려 묶은 금발, 마찬가지로 클래식 스타일로 음영 없는 분칠에다 눈썹과 입에만 얇게 포인트를 준 화장법, 고풍스러운 실루엣의 민무늬 원피스 룩(소매가 팔뚝 반을 가리는), 다소 와이드하고 높지 않은 굽에다 전체적으로 심플한 라운드 셰이프의 단색 구두.


무엇보다 사람의 눈을 바르게 응시하며(요즘은 다들 구린 의도를 감추느라 이러질 못한다) 어절마다 조용하지만 명쾌하게 강약세를 보이는 그녀는 분명 젊은이가 결코 지닐 수 없는 기품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지극히도 이국적인 이채로움을 가만히 내뿜고 있었는데, 마치 수녀원에 평생을 갇혀있다가 일주일 전에 탈출했든지 아니면 과거 조사를 게을리한 채 가이드북에 의지해 타임머신을 타고서 2017년 이곳 루크스로 식사를 하러 온 미래인인 것만 같았다.



"오소부코를 추천해드릴게요. 본토 맛에는 따라갈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실패가 없는 메뉴죠."


"좋아요, 당신은 뭘 주문하시겠어요? 미스.. 미세스.."


"그냥 질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플레절렛 수프, 리코타와 과일을 섞은 샐러드면 되겠네요.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서로의 식사가 모두 끝난 후(그녀는 이파리 하나 남기지 않았다) 디저트를 기다리던 중 그녀가 말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 50만 달러는 착수금이었어요."


"..저보고 뭘 하라는 거죠? 아니, 아니. 아직 맡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요. 이런 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보다 내 번호랑 계좌는 어떻게.."


"말은 착수금이지만 정식 착수금은 아니에요."


"..옌장, 도통 모를 말들만 내뱉으시네."


"정식 착수금이 아니란 말은, 지금부터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제 말을 잠자코 경청해주는 대가라는 의미예요."


"..그 뒤에 내가 일을 맡지 않겠다면?"


"그건 당신 자유입니다. 당신 계좌로 들어간.. 물론, 깨끗한 50만 달러 또한 당신의 자유이고요. 당연히 정식 착수금 100만 달러 역시 당신의 자유겠지요? 오, 빼먹을 뻔했네.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도요."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이라 하면.. 소송 서비스를 말하는 게 아니겠군요."


"바로 그렇답니다, 베일 씨. 그리고 성공 보수금이 아니므로 종래의 성공 보수금 수준보다 더 높은 퍼센티지를 적용하도록 하죠. 물론, 정식 착수금을 기준으로요."


"..몇 퍼센트요?"


"20퍼센트."


"25퍼센트. 그 밑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무슨 일이든 간에 법적 테두리 안에서

범죄 불성립으로 해석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어야 합니다. 범죄 불성립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에요, 베일 씨. 무슨 의미인지 안답니다. 그리고 안심하세요, 베일 씨. 당신에게 맡기는 일은 완벽하게 합법적인 일이랍니다."


"..좋아요, 질. 무슨 일이죠?"


"베일 씨, 제안을 하나 더 해도 될까요?"


"..그럽시다."


"말씀드렸듯, 분명 합법적인 일입니다. 당신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캘리포니아 내에선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어요. 물론 그 말은 가장 높은 악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죠. 만약 자세한 걸 묻기 전에 계약부터 해준다면 추가적으로 10만 달러를 더 지불하죠."


"15만 달러."


"..좋아요."


"단, 계약서에 이 한 줄만 추가합시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가 필요할 경우 언제든 중도에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수임료는 전액 반환하지 아니한다.'"


"거기에 한 줄만 더 추가합시다, 베일 씨. '어떠한 사유로도 상기 항목에 위배되지 않음에도 도중에 계약을 파기할 시 수임료 반환을 2배로 산정한다.'"


"..좋수다! 바로 사무실로 갑시다! 아, 이 셔벗은 마저 먹고서."



우리는 정중히 악수를 한 뒤 사무실로 가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녀가 명시한 변호사 서비스 의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할랜드 베일은 밥 스미스와 캐서린 스미스(질 가라사대, '나는 밥의 친가 쪽 사람이에요. 그리고 둘은 내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죠.')의 모든 법적 대리 임무를 위임받아 그들의 요청에 따라 모든 가능한 법률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법률적 서비스 지원은 계약일로부터 60일이 되는 자정까지로 기한한다.



다음 날. 나는 질, 밥 스미스의 아내 캐서린 스미스와 함께 LA의 대표적인 부촌인 퍼시픽 파리세데스로 향했다. (캐서린 스미스 역시 독특한 분위기의 이국적인 여성으로 분명 여러 나라의 피가 섞였으리라 여겨졌다. 아마 질과 마찬가지로 메인은 게르만 계통?) 그리곤 둘의 안내에 따라 어느 공용 주차장 내 캐딜락 차량으로 인도되었다.



"베일 씨, 트렁크 좀 열어주시겠어요?"



캐서린 스미스가 시동을 걸고선 트렁크 버튼을 누르자 질이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왜요? 뭐 꺼낼 게 있나요?"



질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인자한 웃음을 보냈고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이런 싯팔!"



트렁크 안에는 부패하기 시작한 한 중년 남성의 시신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뒤로 잰걸음을 치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막 운전석에서 걸어 나온 캐서린 스미스가 질의 바로 뒤편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헌데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놀라 나자빠진 내 입 한쪽으로 찐득한 침이 새는 동안, 열린 트렁크 사이로 죽음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구린내가 탈출하는 동안, 두 여성은 그저 가만히 서선 조용히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이런, 싯팔! 여기 시체가 있다고! 안 들려?"



질이 걸어와 트렁크 안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쭈그려 앉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길 가다 만난 동네 아이를 타이르듯이.



"베일 씨,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스미스 부부는 당신에게 재산관리에 대한 모든 법적 서비스의 대행을 맡기려고 했어요. 둘의 재산은 아주 방대하고.. 동시에 복잡하고.. 무슨 말인지 당신도 충분히 알겠죠. 그런데 사실 밥은 지난주 외출한 후에 갑자기 연락이 끊긴 상태예요. 차량과 여권은 그대로 휴대전화와 지갑만 챙기고서요. 오늘은 일단 밥의 차량등록증을 챙기려던 거였는데.."


"엿 까는 소리 하고 계시네! 내가 중고차 딜러요?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시오! 이봐.. 이.. 년들아! 나는 돈에 움직이는 사람이야. 당연히 지불받은 돈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내 의무고! 그렇다고 이런 개수작에 나를 끌어들여? 계약종료야, 이.. 살인자들아!"


"그렇지 않아요, 베일 씨."


"가까이 오지 마!"


"진정하세요. 우리도 무척이나 놀랐답니다. 다만 너무도 놀라서라고 설명해두죠. 물론 우리는 밥의 죽음과 무관하고요."


"거짓말! 내가 당신 같은 것들을 한두 번 보는지 알아? 이런 지긋지긋한 치정극은.. 이게 법적으로 알리바이나 유리한 증언이 될 거라고 생각해?"


"베일 씨, 일단은 신고부터 해주세요. 우리가 살인자인지 아닌지는 먼저 경찰이 와야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손이 떨려서 못하시겠다면 제가 하죠. 대신 가서 캐서린을 보살펴 주겠어요? 남편의 시체를 막 발견한 참이잖아요."



나는 잠시 두 여자를 번갈아 둘러본 뒤 크게 한두 차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신고하죠. 당신과 캐서린 스미스 씨는 떨어져 있어요. 설령 시체에 손댈 생각일랑 하지 말고."



잠시 후 도착한 경찰에게 최대한 간략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들의 동태를 주시했는데 어쩐지 묘한 위화감 같은 게 들었다. 그녀들의 만면엔 분명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에게서 나타나는 상실감이 박혀있었다. 그런데 반면에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레 잃었을 때의 당혹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갔고(적어도 이곳 LA는 말이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녀들과의 접촉은 없었으며, 나는 하릴없이 일상으로 복귀했다. '베일 씨, 계약은 언제든 중도에 파기해도 됩니다. 위약금은 계산해보니까 200만 달러네요.' 질이 마지막으로 내게 건넸던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간의 일은 LA 타임스 기사로 대신하는 게 나을지 싶다.



지난주 퍼시픽 팰리세이즈 내 차량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과 관련하여 LAPD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LAPD는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미루고 있으나 사망자 배우자 측의 대변인인 변호사 할랜드 베일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지역의 60세 밥 스미스라고 한다.


형사법원은 시신에 대해 현재 LAPD가 조사 중이므로 관련 사항은 일부 비공개이나 익명을 요구한 법집행기관 내의 인사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밥 스미스가 맞으며 아직 사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타살은 아니라고 전했다.


피아니스트인 모친과 미생물학자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밥 스미스는 1980년대 UCLA에 입학하며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 과학자가 되고자 했었다고 한다. 허나 UCLA의 대변인에 따르면 밥 스미스는 중도에 자퇴했으며 그의 생전 요청에 따라 세부적인 사항들은 모두 열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후 밥 스미스의 행적과 직업에 대해서는 외부로 알려진 게 전혀 없다. 심지어 LAPD는 그가 직업을 가졌었다는 기록이나 세금신고서 제출 내역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한편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저택수색 과정에서 드러났다. 해당 수사 책임관인 윌리엄 하비 경감은 밥 스미스의 저택에서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했으며 모두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또, 밥 스미스의 명의로 등록된 차량이 수륙양용 SUV만 14대이며 이러한 차량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 보관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LAPD 청장은 본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밥 스미스 씨가 어떠한 마약상 및 총기거래에도 연루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또 그의 재산과 관련하여 어떠한 범죄 수익과도 연관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한 끝에 우리는 그를 단순한 개인 총기 수집가로 결론 내렸다.'


밥 스미스의 시체를 발견하고서 최초로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지역의 변호사 할랜드 베일로, 그는 스티븐 시걸과 같은 여러 할리우드 셀럽들의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그로부터 한 달하고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들과의 계약 종료를 코앞에 둔 바로 그때였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예고도 없이 질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베일 씨, 잔금을 계산할 때네요. 정식 착수금의 25퍼센트니까 25만 달러. 그리고 루크스에서 약속한 15만 달러. 총 40만 달러를 그 계좌로 보내드리죠. 베일 씨와 계약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직접 만납시다."


"네?"


"직접 만나서 계약을 마무리 짓자는 말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베일 씨는 계약을 완수하셨으니 약속된 돈만 받으시면 됩니다."


"질, 이 계약을 탈 없이 끝내고 싶죠? 그쵸?"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이 모든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은 거냐고 묻는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직접 만난 자리에서 계약을 끝내야겠습니다. 그거 아시죠? 지금 캘리포니아 말고도 전역에 밥 스미스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 걸요. 내 말대로 하지 않겠다면 언론과 인터뷰를 할 생각입니다. 법적 해석에 위반되지 않는 사항 내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한 비하인드 이야깃거리에 대해 말이죠. 사건에 이어 이 황당무계한 법률 서비스 건도 뜨거운 감자가 되겠군요."


"좋아요, 좋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들었습니다. 알겠어요. 이번 주 금요일 오후 3시 사무실에서.."


"오후 3시에 당신네 댁에서 보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어째서.."


"단순히 변덕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어요. 그냥, 당신이 클라이언트치고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통은 제 일이란 게 입장이 그 반대거든요. 한마디로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심지어 나는 의뢰주인 스미스 부부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중간에서 모든 걸 움켜쥐고서 컨트롤했기 때문.."


"그건 알다시피 밥에게 변고가 생겨서.."


"바로 이겁니다. 네, 그래요. 바로 이걸 말하는 겁니다. 이미 며칠이나 지난 시신을 가지고서 나를 엿먹였다는 거! 경찰에게 들었습니다. 암이라고 하더군요, 말기 암. 밥 스미스는 암으로 병사한 거죠. 젠장, 대관절 무슨 수작입니까! 암으로 죽은 사람을 가지고서 2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들여 나를 이 광대극에 끌어들인 이유가 뭐냐 말입니다. 광대라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 고용됐는지 아는 법입니다. 당신은 눈먼 돈을 먹여 나를 얼간이 천치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액수란 게 나를 내내 물 먹였죠. 이 바닥 최고였던 나를 무력감과 모욕감의 골짜기로 자빠뜨린 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어릴 때 말이죠, 학교에 칼 맥칼라니라는 애가 있었어요. 우리 중 가장 덩치가 컸고 또 제일 포악한 놈이었죠. 그놈은 우리 코피를 터뜨리는 게 취미였는데.. 몸이 근질근질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애가 그날의 희생양이었어요. 물론 그건 저라고 예외가 아니었죠. 어느 날은 제가 코피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집에 가 질질 짜니 아버지가 화를 내며 저를 쫓아내더군요. 가서 똑같이 때린 놈 코피 터뜨릴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면서요.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어요. 사실은 그놈 반경으로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 했죠. 당시 그놈 주먹 크기는 이미 제 얼굴만 했거든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잘나가는 변호사가 된 저는 그놈 와이프로부터 의뢰를 받았죠. 그놈과 그놈 와이프 또한 동창이었거든요. 간단했습니다. 폭력성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쳤고 위자료, 양육비, 접근금지로 놈을 있는 대로 벗겨 먹을 수 있었죠. 나는 기꺼이 파격 할인가로 의뢰를 맡았고 놈은 슈퍼 푸주한으로 종일 생고기 썬 돈을 매달 자기 와이프한테 꼬나 박는 신세가 됐죠. 자, 그래서 내가 생각만큼 만족했을까요? 나는 한 가지 깨닫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준 교훈을요. 그건, 무언가를 갚아줄 땐 반드시 같은 거로 갚아야 한다는 거였죠. 나는 집에서 쫓겨난 날 어떻게든 칼 맥칼라니의 코피를 터뜨려야 했었습니다. 우리 개척자의 자손들은 눈에는 눈, 피에는 피라는 전통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어떻게 되갚겠다는 뜻이죠?"


"그렇다고 제가 고객한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모든 걸 감추려 드는 이 오만한 여성의 집에 찾아가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게 전부겠죠. 자기 껄 일체 오픈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여성이 홈그라운드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기분 좀 내는 거죠. 그럼 내가 내 체면을 담보로 190만 달러를 꿨다는 멍에도 사라질 테고. 사실,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서로의 기분 아니겠습니까?"


"알겠어요. 금요일 오후 3시에 저희 집에서 보도록 하죠. 주소는 그날 보내드리겠어요."



모레 오후 2시 50분. 나는 질이 보낸 주소에 따라 퍼시픽 팰리세이즈 인근 샌타모니카 내의 한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대문 앞에는 이미 멀리서부터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푸짐한 덩치 둘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유럽인의 외형적 특징을 한 둘은 정장 차림새를 하고선 시종 나를 노려봤다.



"뭡니까? 매트릭스라도 찍고 있어요? 질 불러줘요."



둘은 마치 영어를 못 알아듣거나 아니면 귀머거리라도 되는 양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해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위압감에 나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선 안 들릴 정도의 목소리 크기로 욕지거리를 몇 차례 내뱉는 게 다였다. 잠시 후 대문으로 나온 질이 두 덩치의 등을 다정스레 쓰다듬고는 내게 인사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형식적인(그리고 다분히 경계를 띤) 인사를 나누고는 안내에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는 마치 그녀와도 같았다. 모든 게 고풍스럽고 예스러웠으며 동시에 세련된 풍취를 띠었다. 허나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한 켠으로 진열된 작은 크기의 수많은 사진 액자들이었다. 그러한 사진들 너머로는 실로 방대한 수의 사람들이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연령대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독사진의 주인이었으며, 또 때로는 대가족으로 보이는 집단의 주인들이었다. (사진들 속에서 현관 앞의 덩치 둘도 찾을 수가 있었다)



"사진들이 많죠? 저는 생각보다 더 옛날 사람인지라 적어도 소중한 사진은 액자에 장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말도 안 되게 좋은 냄새를 풍기는 밀크티를 내게 건네며 질이 말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녀가 먼저 계약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얌전히 밀크티만 홀짝였다. 이윽고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그녀는 대뜸 수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준비한 대사를 읊듯이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스미스 부부의 대리인으로서 법적 서비스 제공에 대한 추가 지급금 일체를 지불하는 바입니다. 이로써 해당 계약은 상호 간의 이행에 따라 종결되었습니다."


"..이게 답니까? 그런데 대관절 내가 스미스 부부에게 무슨 법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거죠?"


"계약서에는 기간 내에 법적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법적 서비스에 따라 수임료를 지불한다는 문구가 아니라요."


"..대단하시군.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당신 뭡니까? 목적이 뭐예요? 좋습니다. 난 진실을 원해요. 이 40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진실을 말해줘요."


"그럴 필요 없답니다, 베일 씨. 40만 달러는 우리의 계약 이행에 따른 지불입니다. 지금 베일 씨가 말씀하시는 건 별개의 사안이고요. 나가는 길을 안내해드리죠."


"좋아요. 그래도 알아야겠다면요? 40만 달러의 반환 대신 다른 조건을 건다면요?"


"베일 씨.."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면요? 경찰이라도 부를 건가요? 아님 밖의 매트릭스들? 그 전에 빨리 말해야겠군요. 다음 조건은 이겁니다.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판사한테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 당신 집에 찾아오겠어요. 매일같이 현관문 밖에서 당신을 부르겠죠. 그럼 파파라치들이 할리우드의 공식 악어새인 나한테서 뭐 재미난 거 좀 얻어낼까 이곳을 순례하겠죠. 당신 매트릭스들이 코피 터뜨리는 법은 알아도 카메라 플래시 막는 방법은 모를 거라고 내기할 수 있습니다."


"베일 씨, 분명 전화로는 저희 집에서 계약을 마무리하는 게 다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걸 말씀드려야겠군요. 법칙 하나,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요. 베일 씨, 생각만큼 교활하시네요."


"뭘 기대한 겁니까? 교활하지 않을 거면 변호사 말고 다른 걸 했겠죠."



질은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어쩐지 공기가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진실을 알려드릴 테니 베일 씨는 어떤 대가를 지불할 건가요?"


"바로 이런 게 협상이죠. 말해보세요. 원하는 대가를."


"베일 씨가 지금까지 받은 190만 달러 전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 축내자는 겁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농담을 하지 않아요."


"지금 여기 앉아서 나눌 몇 마디 말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베일 씨, 슬프게도 진실이란 게 그런 겁니다. 때론 몇 마디 말에 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걸기도 해야 하는. 누구에게나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진실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죠.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필요로 하기에 그만한 돈을 당신께 지불한 겁니다."



질은 다정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엄격함을 품고 있는 표정이기도 했다. '우리'라. 첫 번째 단서를 얻게 되자 한층 더 내 몸이 달아올랐다. 따라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안에 포함된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나는 정말이지 알아야만 했다. 내 몸속 모든 세포가 그것을 원하고, 또 그러기를 종용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수 시간 같은 수 초 후, 질이 콧김을 한번 부드럽게 내뿜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베일 씨.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해야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내 딸 애한테도요. 마누라는 별거 중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꼭 그러셔야 할 거예요. 제 조건은,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것 모두 비닉특권을 엄수해달라는 겁니다. 비닉특권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알겠습니다. 맹세하죠."


"그리고 진실을 듣고 나면 얌전히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다시는 방문하지 마시고요. 일이 있으면 제가 당신 사무실을 찾아뵙도록 하죠."


"여부가 없습니다."



질은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거예요. 조금은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어쨌거나 끼어들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앞에 놓인 밀크티 잔을 한번 기울이고선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를.



"우리 셋..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제가 미국에 온 것은 1957년 4월 2일이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도착 후 얼마 안 있어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씨와 접선을 가졌죠. (나는 또 한 번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 왔어요. 다른 은하계에서요. (나는 끼어들 기분도 들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당시 천문학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도널드 맨젤 씨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서구식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토르, 돈, 질.. 우리는 그 이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죠.


멘젤 씨는 우리를 당시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장이었던 제임스 킬리언 씨에게 소개해주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요청에 따라 이 두 사람이 곧 아이젠하워 씨와의 접선을 주선해주었죠. 이 둘에게(또 아이젠하워 씨들에게도) 우리가 다른 은하계에서 왔음을 믿게 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요. 우리가 타고 온 소형 우주 비행선의 착륙지점으로 안내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별장에서 멘젤 씨와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와 국방부장관 및 정보국장을 앞에 두고 준비한 브리핑을 낭독했죠. 우리의 요구는 심플했어요. 지구로의 망명(그래요, 당신네들 표현 따라 우리는 정치적 망명을 온 거였어요)을 허락할 것, 그리고 시민권을 보장할 것. 마지막으로.. 혹여 우리를 추적해 지구로의 잠입을 시도할지 모르는 우리 행성의 요원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


아이젠하워 씨는 나머지 넷과 잠시 상의를 하고는 이내 그 제안을 수용했어요. 제안에 따른 우리의 보답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죠. 이 협상에 따라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원시적인 양자역학 컴퓨터를 위한 모듈러 디자인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인간사회에서는 지금껏 없었던 가장 극적인 변화가 발생할 것이며, 당신들의 능력과 끈기에 따라 수 세대 후에는 은하 간 이동을 위한 기초적인 아이디어가 창안될 거랍니다.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처음 발을 디뎠던 오리건 주에 비밀요새 겸 저택을 건립했습니다. (당신은 오리건 주에 가본 적이 있나요?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당신네 자연은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을 선사해준답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며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소형 비행 우주선이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주 아주 오래도록 살 수 있도록(바다거북이보다도 더 말입니다) 설계되었고 또 진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 많은 것을 버리고 바꿔야 했지만, 당신네들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이름과 땅은 여전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너무도 흘렀어요. 벌써 60년이에요. 멘젤 씨,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 우리를 알던 당신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 우리는 스스로를 도와야 하는 처지이죠. 방치되었다고 표현하지는 않겠어요. 당신네들은 망명객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를 베풀었고 지난 60년간 우리는 인간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정말 이곳 지구가 우리의 집이랍니다.


저와 돈이 이곳에서 낳은 아이들은 인간과 연을 맺어 자신들의 아이들을, 그리고 그 아이들은 또 다른 인간과의 사이에서 새로운 탄생을 이루었거나 앞두고 있답니다. 토르 역시 인간 여성과 두 차례 결혼을 했고(첫 번째 여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주 많이 낙담했었죠) 그의 아이들 역시 이곳에서 결혼과 출산을 경험했죠. 그러한 아이들 모두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으며 결코 그걸 잊는 법이 없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종종 오리건 주의 고향 집에서 만남을 갖습니다. 음식을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본연의 뿌리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며 서로를 축복하죠. 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정말 좋아한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곳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그러면서 매일 자연을 느끼고 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공동체이고 뿌리 된 자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다양한 특허의 주인인지 안다면 당신은 정말 놀랄 거랍니다.


그런데 최근.. 재앙이 스며들기 시작했어요. 우리,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저를 추적해 우리 행성의 요원 몇몇이 이곳에 잠입한 거죠. 그들은 이미 당신네들 사이에 있어요.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답니다.


밥까지, 벌써 우리 아이들 여섯이 죽었어요. 그들은 우리를 데려가려 하고, 우리에게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이들을 위해 하며 무언의 협박을 벌이고 있는 거죠. 당신 말이 맞아요. 밥의 사인은 말기 암이죠. 멀쩡하던 애가 반년도 안되어 암으로 죽은 거랍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질병을 심어놓고 있어요.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노선을 택했을 것 같나요?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냈답니다. 그 과정에서 밥이 희생되었죠.(그녀는 잠시 상념에 잠긴 듯 수 초 후에나 말을 이었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고향 땅 오리건 주에 공동체를 설립했어요.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거랍니다. 누구도 이걸 방해할 순 없어요. 심지어 당신네 대통령일지라도."



"....이야기 끝인가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두 했답니다."


"오리건 주에서의 공동체 생활이라, 아미시 마을이라도 만들려고 그런답니까?"


"비슷한 거죠. 다만, 기원이 없는 곳에 믿음의 뿌리를 두지는 않는다는 게 차이겠네요.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원과 뿌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좋아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네시, 빅풋, 늑대인간.. 저도 그런 걸 참 좋아했었죠."


"저도 그렇답니다."


"그래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베일 씨. 오, 그리고 물론 돈은 일체 반환하실 필요 없으세요. 제 말을 아주 잘 경청해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요. 아구가 안 맞는 게 있어서요. 어째서,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밥의 시체를 일부러 내게 보여주고..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베일 씨, 당신네 공놀이 광고 1초에 몇억이 들어가는지 아세요? 우리는 미국 전역에 1달 넘도록 홍보를 한 거고 저는 제가 지불한 돈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습니다, 질."


"베일 씨, 모든 생물체는 호전적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벌써 여섯 아이를 잃었어요. 이제 우리도 대응에 나설 거랍니다. 그들도 사실은 잘 알고 있겠죠. 다른 은하계에서 총 맞고 죽어봐야 아무도 몰라준다는 걸. 또, 당신네들 중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그들은 이곳 어느 나라에도 시민권이 없는 자들인데. 우리는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침입을 시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미리 홍보한 거예요. 이제 그들도 알겠죠. 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그들을 죽여도 그들은 지구에 위해를 가할 수 없답니다. 은하계의 규약이라는 건.. 정말 골치 아픈 행정이거든요."


"그러니까 말인즉슨, 나를 이용해 사건을 키웠다는 겁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우리 생각보다도 더 유명세가 있더군요. 당신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가판대 타블로이드판 해프닝 대신 CNN 토픽으로 다뤄질 수 있었던 거죠. 덕분에 당신네 정부 사람들이 앞으로 밥의 유산을 건네받은 캐서린을 주시하게 되겠죠. 자연히 요원들은 더욱더 접근에 어려움이 생길 거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밀크티 잘 마셨습니다. 질, 아주 좋았어요."


"고마워요, 베일 씨. 다음에 또 당신을 찾게 되면 그땐 수임료를 좀 깎아 줄 건가요?"


"아뇨. 당신네들은 인간의 무서움을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배웅나올 필요 없습니다. 나가는 길 아니까요. 한 번 본 건 끝까지 기억하거든요. 매트릭스들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길."


"당신도요. 당신과 내가 믿는 신이 서로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질의 저택을 나와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년. 하여지건 돈 많은 것들이 미치면 더 극적으로 돌아버린다니까."



이건 정말이다. 나는 이걸 지금껏 몸소 체험해왔다. 이곳 할리우드는 졸부들과 미친 것들의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오히려 저 정도 피해망상은 귀여운 편이다.


질의 이야기를 완전히 잊고서 일상으로 돌아간 지 몇 달이었다. 내가 다시금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것은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대로변에서 내게 대뜸 말을 걸면서부터였다.



"할랜드 베일 씨? 맞으시죠?"


"누구시죠?"


"국토안보부입니다."


"증명해보시죠."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슈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세워선 안쪽을 펼쳐 보였다.



"그래, 국토안보부 요원이 대관절 제겐 무슨 용건이랍니까?"


"베일 씨께서는 몇 달 전 스미스 부부의 변호사셨죠?"


"그랬죠. 일을 맡은 적이 있었죠."


"혹시 이 사진 속.. 세 명을 보신 적이 있거나 알고 계십니까?"



그가 아이폰 7을 꺼내어(아마 그도 딸이 있는가 보다) 스크린에 띄어진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뇨. 이들은 스미스 부부가 아닌데요."


"예, 그래요. 이들은 다른 사람이죠. 모르십니까?"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셋 모두 본 적이 없군요. 누군데요, 이 사람들?"


"미국 안보에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자들이죠."


"그렇군요. 꼭 잡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정말 본 적이 없으십니까?"


"네, 혹시 나중에라도 보게 되면 알려드리죠. 명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일 씨."



나는 남자와 간단히 눈인사를 교환하고는 가던 방향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돌려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걸음 중간중간, 마치 이곳의 중력을 아직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듯 발을 살짝씩 땅에 끌어대며 걸음을 이어갔다. 나는 그날 국토안보부에 문의해 그가 보였던 신분증 속 요원이 존재하는지 물었고 돌아온 대답에 별반 놀라지 않아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가 자신의 아이폰 7에 띄었던 사진,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분명 5-60년대 풍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사진. 나는 이 셋이 함께 찍힌 또 다른 사진을 질의 저택에서 보았다. 물론, 그 사진은 당시 몰래 촬영한 내 아이폰 7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이기도 하다. (명심하시라! 딸이 있으면 아이폰 7로 소리 없이 촬영하는 게 가능해진다)


클래식하지만 분명 현대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셋은 식당 루크스에서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채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전혀 늙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내 아이폰 7에 저장된 그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고선 중얼거렸다.



"안녕. 토르, 돈, 질."



만약,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질에게 좀 더 정중하게 굴었을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온 이 용감한 이민자에게.


자, 코카인을 빨고서 뺑소니를 쳤는데 어떡하냐고? 음주운전을 하다 차량 서너 대를 박살 냈다고?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어? 여자친구 얼굴에 새긴 멍 자국?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사실 인간이 아니라고? 걱정 말고 모두 내게로 오시라! LA 최고의 악명을 자랑하는, 이 구원자 베일에게로!





-fin-




















후기


본 이야기 속 밥 스미스의 실제 모델인 제프리 래시는 2015년 7월 4일 자신의 SUV에서 부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UCLA 대학 중퇴 후의 행보가 알려져있지 않으며 직업에 대한 기록이나 세금내역이 불명확하다.


또 저택에선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되었으며 모두 사용된 적 없는 것들이었다. 수억 원의 현금 및 그의 명의로 된 10대가 넘는 SUV 또한 발견되었고 말이다.


나는 이 미스터리로 종결 중인 사건을 접하고선 이내 해당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왜 이런 식의 이야기냐 하면, 나는 지금껏 세간에 알려진 UFO 사건들은 모두 와전되었거나 뻥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지난 수년간 '이상한 옴니버스'를 운영하며 나름의 조사를 한 결과)


사람들은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공간 낭비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 말대로 우주에 우리 이외의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지성체가 오로지 우리뿐이라는 가정은 지독한 오만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계인과 접촉했었고 외계인은 지구에 방문했었을까? 허나, 광활함과 유구함을 뽐내는 이 우주에서 티끌보다도 작은 지구에 벌써 서로 다른 외계인들끼리 접촉이 있었다는 가정 또한 우주에 대한 오만이자 지구에 대한 자만일 수가 있다.


하지만 가망성이 없는 것에 대한 공상만큼 신나는 게 없다. 만약 외계인이 은밀하게 지구에 거주 중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바로 정치적 망명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곳이라고 지적 생명체가 사는 게 다르겠는가? 정적(政敵)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아, 한편 제프리 래시의 약혼녀는 자신의 모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엄마, 그 사람은 사실 외계인과 인간의 혼혈이야."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33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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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생긴 일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1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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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















파티에서 생긴 일




나는 지금 고등학생을 흥분케 하는 3요소와 함께하고 계시다. 그것도 셋을 동시에.


첫째, 하우스 파티 장소로 향하고 있다. 분명 그곳에서 제대로 된 리큐어를 찾을 수가 있을 거다. 하다못해 럼이라도. 둘 다 없더라도 문제없다. 내가 하나 가지고 있거든.


둘째, 당장 인접한 주(州)로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기름이 채워져 있는 오픈카. 말이 필요하랴! 비록, 10년 넘은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이긴 하지만.


셋째, 옆자리의 골 때리는 친구 놈. 이놈은 옆집에 사는 애런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바보짓을 할 때면 항상 함께였다. 사실 이 세브링도 이놈 거다. 제 큰아빠한테 물려받은 건데 웃기게도 아직 면허가 없어 이렇게 내가 매번 운짱을 맡는다.


애런은 불룩 나온 배 때문에 서 있는 상태에선 자기 발을 못 볼 정도의 뚱땡이에다 흑갈색 곱슬머리를 한 대단히 웃기는 놈이다. 동시에 애런은 학교 제일의, 아니, 카운티 내 최고의 색골로 만약 물어만 본다면 심지어 아무 여학생의 사타구니 털 개수까지도 척척 대답할 놈이시다.


그리고 나, 개빈. 평범한 가정환경, 중하위권 성적,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6피트를 넘는 키(이모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매번 왜 이렇게 컸느냐며 야단이다)에다 제법 멋들어진 컬의 모질과 고르고 하얀 치아를 지니고 있어 향후 20년간은 외모 덕을 톡톡히 볼 십 대다.



"그나저나, 개빈. 우리 오늘 몇 시까지 있을 수 있는 거냐?"


"못해도 11시. 아니, 12시. 우리 꼰대들 오늘 할머니 댁에 갔다가 오거든."


"오, 개빈이 엄마아빠를 꼰대라고 부른대요. 오늘 또 땡깡 부렸다고 엉덩이 맴매라도 맞았나 보지?"


"닥쳐, 똥돼지. 그나저나 확실해? 진짜 괜찮은 애들로 산을 이루고 있다고?"


"이봐, 개빈. 그거 알아? 난 가끔 너한테 했던 말을 또 해야 할 때마다 네 입 구멍에 우리 할아버지가 사용한 기저귀를 쑤셔 넣고 싶은 거? 너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냐? 야시엘네 대저택이라고! 그 야시엘!"


"..나도 알아, 야시엘이 누군지. 지나가다 본 적 있어. 네 똥차 값보다 비싼 타이어를 4개씩이나 박아놓은 차를 몰고 가던 거. 그래.. 그 야시엘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그 멕시코 놈 집안은 뭐 하길래 그렇게 돈이 많은 거야?"


"이런, 이런. 선생, 멕시칸이 여기 와서 그렇게 떵떵거리고 산다면 뭐겠어?"


"뭐? 뭔데?"



애런은 대답 대신 검지를 치켜들어 자신의 코밑에 바짝 대고는 바깥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에 콧숨을 한 차례 훅 소리 내어 들이마셔 보였다.



"뭣?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당신의 상식 머리시네요, 선생."


"상관 안 해. 여자들만 많다면야."


"걱정 마시게, 형제여. 성경에도 나와 있어요. 마약이 있는 곳에 여자가 꼬이는 법일지니."



애런과 내가 파티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분위기가 한창으로 접어들었는지 저마다 짝을 지어 서로 음탕한 눈길을 건네고 있었고, 패배자들은 외곽에 띄엄띄엄 자리한 채 포기를 모르는 질척한 눈빛으로 사방을 내리훑고 있었다. 우리? 물론 도착과 동시에 애런과 나도 미친 듯이 주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삼 빠떼루지! (애런이 제 큰아빠한테서 배워온 유행어다)


그리고 그때였다. 시야에 한 여자애가 들어온 게. 그 애는 동그랗고 작은 반원의 이마가 돋보이도록 연한 다갈색 머리를 야무지게 묶어 올렸으며, 키는 작지만 긴 다리가 부각되도록 딱 알맞은 길이감의 청바지를 입고서, 흰 티 밖으로 친오빠 옷장에서 꺼내온 듯한 검정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아니, 실은 내가 왜 그런지 확실히 알지만) 나는 그 애에게 감히 눈을 떼지 못하고선 시종 가슴팍 어딘가가 애리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그 애만이.. 젠장, 이런 진부한 표현을 할 줄이야. 마치 그 애만이 주변보다 더 또렷히 보이는 듯했다.



"선생,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누구야?"


"쟤를 몰라? 아.. 그렇지. 미안. 할아버지 병상이랑 장례 때문에 최근 학교에 잘 못 나왔었지.. 여하튼 이름 킴벌리 로렌, 뉴저지에서 얼마 전 이사 옴, 무남독녀, 성적은 중상위권, 아직 어울리는 그룹 없음, 피우는 담배 브랜드는.."


"좋았어!"


"어..? 잠깐, 개빈. 잠깐, 잠깐. 너.. 쟤한테 들이대려고?"


"당삼 빠떼루지, 인마!"


"포기하는 게 좋을걸? 쟤가 깐 남자애들만 모아도 카운티를 형성할 수 있을 거다. 그 안에서 곧 선거인단도 발족할 수 있겠고. 우리 학교의 자랑 쿼터백 왕자님께서도 2초 만에 까이셨다니까!"


"..왜?"


"..왜라니? 너 지금 왜냐고 물은 거냐? 너도 가끔은 네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해보는 게 어때? 왜긴 왜겠냐, 레즈니까 그렇지. 아니고서야 쿼터백 왕자를 쳐다도 안 보고 까버리겠냐? 봐봐! 이러는 동안에도 저기 한 명 더 까였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뭐, 다른 이유 뭐?"


"아마 아직 마음에 차는 남자를 발견하지.."


"오, 야훼시여! 돌아가시겠네! 개빈이 또 똥 잡수시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내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개빈, 아빠 말 잘 들으렴. 널 위해 충고 하나 해줘야 할 시간이구나. 잘 들어, 얼빵아. 네가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는 건 나와 함께 있어서야. 알아들어? 여기 이 2-300파운드짜리 유대인 놈 옆에 서서 미소를 보내기 때문에 여자애들이 받아주는 거라고! 개빈, 아빠는 네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다물어, 개빈. 그건 부족한 놈들이 스스로를 기만할 때나 외우는 주문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 자, 정신 차리고 빨리 다른 여자를 찾아봐. 기왕이면 두 명으로. 난 정말 아무나 괜찮으니까."


"..좋아, 이 꼬부랑 털 돼지 놈아. 너 만약 내가 저 여자애와 함께 여기 저택 문을 나서면 어쩔래?"


"..네 말은, 지금 쟤를 꼬셔서 같이 나갈 수 있다고?"


"어이, 가는 귀가 먹으셨나? 왜 했던 말을 또 하게 만들지? 입 구멍에다 너네 할아버지 기저귀를 쑤셔 넣어 줄까? 자, 내가 저 여자애와 그러면 어떻게 할래? 대답해보시지, 선생."


"좋아! 네가 성공하면, 내가 네 꺼 한 번 빨아준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마치 마상시합에 출전하는 앙리 2세마냥(뭐, 비록 그는 시합 중에 뒈졌지만) 당당한 보무로 그 애에게 다가갔다. 뒤편으로 '개빈, 그냥 아빠 품으로 돌아오렴.'이라고 조롱하는 애런을 무시하고서. 그렇게 나는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서 그 애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용기 있다고? 아니, 사실 나는 엄밀히 말해 겁쟁이에 속하는 편이다. 애런의 도발에 적잖게 흥분해선 반발심에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 그건 그저 핑계이며 사실 나는 뭐든 상관없으니 그저 그 애와 한순간만이라도 눈을 맞춰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그 단편적인 기억조차도 내게는 두고두고 환희로 박제될 게 분명하리란 직감해서였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안녕, 킴벌.. 로렌."


"..안녕."


"아, 나는 개빈이야. 개빈 마틴."


"술 이름 같네. 근데 너 나 아니?"


"어.. 응, 우리 같은 학교야. 그리고.. 사실 네 이름은.. 저기 돼지 몸통에다 사람탈 올려놓은 애 보여? 쟤가 알려줬어. (애런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마디로 정보통이지.. 너도 학교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쟤한테 물어보면 돼."


"그래, 고맙다."



마뜩잖아하는 그 애를 앞에 두고서 발작해대는 심장이 내게 유혹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인마, 당초 소원을 풀었잖아. 이제 돌아가자. 꼭 한 발 더 내디뎌야 늪인 걸 아는 게 아니니까.' 허나 나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서(사실 순간 넘어갈 뻔했다) 크게 양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이고는 다시 그 애에게 말을 붙였다.



"좋아. 로렌, 지금 나한테 1쿼터만 시간을 내줄래? 어쩌면 지금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고작 1쿼터야, 15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레미 마틴?"



사실, 그 순간 내 몸의 모든 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에 휩싸였었는데.. 동시에, 우습게도 내 입은 스스로 움직여 말을 내뱉고 있었다.



"15분이야. 너 혼자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어도 어차피 15분은 흘러."



그리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애의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더니 곧 삐딱하던 몸을 풀어 완전히 내 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반가워, 개빈. 나는 로렌이야. 킴벌리 로렌. 어.. 지금 공 울렸어."



그다음?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원래 중요한 순간이란 건 그런 거다. 그저 나는.. 1쿼터 동안 나 자신을 기꺼이 내던졌고..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는데..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난 존재 같았다. 그건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쿼터 버저가 채 울리기도 전에

그 애는 나를 받아주었다.


뭐.. 이후 한 차례 실수를 하긴 했다. 무슨 실수냐 하면,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그때껏 팽팽하던 긴장이 풀리면서

흔히 저지르곤 하는 '말실수' 말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그 실수가 우리의 관계를 극적으로 끌고 가기는 했다만.



"사실 너한테 말 걸기까지 많이 걱정했거든."


"왜?"


"네가 지금까지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고 들어서. 그래서 네가.. 아.. 음.."


"레즈라고?"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 순간, 그 애가 까치발을 들어 내게 기대는가 싶더니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말했다.



"지금 증명이 된 거지?"



이제 우리는 시끄러운 곳을 벗어나 좀 더 사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나는 그 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애런에게 돌아갔다. (그때까지 애런은 나를 마치 두 발 자전거에 처음 도전하는 자식을 지켜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애런."


"믹 재거 선생께서 오셨군. 그래, 알았어. 지금 빨면 돼?"


"아니, 괜찮아. 대신 정말 미안한데.. 그.. 차 좀 빌릴 수 있을까?"



애런은 잠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내게 건넸다.



"당삼 빠떼루지, 인마! 걱정 말고 쓰게나, 친구. 시트 더럽히지만 말고. 나는 마약왕이랑 코카인이라도 하다가 카풀할 테니까."



애런은 정말 멋진 놈이다!




 



나는 그 애에게 우리 마을 최고의 야경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며 야경보다도 빛나는 시간을 공유했다. 그렇게 자정 즈음..


있지 말이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종종 허세를 떨어야 하는 가련한 동물인 법이다. 나는 그 애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을 할 엄두조차 내지 않고선 집에 데려다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애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고 절대 찌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그 애가 시선은 정면에 둔 채 나지막이, 그러나 명료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서 조금 더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지 몰라. 사실.. 우리 부모님이 오늘 집을 비우셨거든."



그 말에 나는 제한속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링컨이 운전대를 잡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코너가 연속해서 나오는 좁다란 진입로에서 차선에 걸쳐 돌던 중 마주 오는 차량과 가까스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젠장! 애런은 집 나간 전조등 하나를 도통 교체할 생각을 안 한다) 우리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숨넘어가듯 웃어 젖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다면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사랑은 종종 사람을 비상식으로 몰고 가는 법이다.


그렇게 마지막 코너에서 차선을 걸친 상태로 가속 페달을 밟았고, 커브 길을 빠져나온 순간 채 인식을 하기도 전에 번쩍거리는 빛이 시야를 온통 채워버렸다. 신경을 긁어 대는 경적음과 함께. 그리고 나는 찰나였지만 내 시야가 뒤집힌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추억을 공유하던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겠다.



"저런 후레자식 같으니!"



나는 가까스로 핸들을 꺾어 마주 오던 차량을 피하고는 외쳤다. 옌병할, 안 봐도 뻔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십 대 놈이겠지. 십 대 놈들은 정말이지, 대관절 무슨 배짱으로 자기에겐 불운 따윈 찾아올 리가 없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조심성이라도 부리면 사탄이 거시기라도 쥐어뜯어 가는 줄 아는 족속들.


나는 잠시 막 스쳐 지나간 차량이 전조등 불량이란 것을 떠올렸지만 지금 시각까지 보안관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서 집에 가서 몸뚱어리에다 따뜻한 물을 뒤엎고선 마누라와 함께 딸애가 보낸 손자놈 영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마누라가 슬쩍 먼저 봤을지도 모르겠군. 마누라는 그런 면에선 일견 뻔뻔스럽거든)


그때였다. 내 뒤편으로 날카로운 경적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차를 세우곤 잠시 눈을 껌뻑인 뒤(옌장, 늙으면 무언가를 깨닫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 부리나케 차를 돌려 충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곧장 경찰과 구급대에 신고를 한 나는 사건 현장을 5초 정도 둘러보고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경찰만 불러도 될 뻔했군.'



현장을 모두 둘러본 후 널브러진 두 차량 저 너머로 누군가가 쓰러져있는 것을 목도했다. (아마 컨버터블 차량에서 튀어나간 거겠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고, 나는 쓰러져있는 사람이 바로 개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은 지나가다 마주칠 때나 인사를 나누던 개빈이지만 어릴 때는 종종 주말이면 우리 집을 찾아와 보안관 놀이 따위를 하다가 마누라가 만들어준 쿠키를 먹곤 했다. 또, 방학 때는 잔디밭을 깎아주고선 수고비를 받아 가기도 했었다. 개빈은 아주 훌륭한 일꾼이었다. 정해진 돈만을 타 갔고 건강보험을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나를 보안관 아저씨라 부르던 개빈, 그 애는 커서 나 같은 보안관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아니, 그건 우리 딸애였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점점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져 간다.



"얘야, 개빈! 내 말 들리니?"


"..보안관 아저씨.."


"그래, 보안관 아저씨란다. 개빈, 세상에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제가.. 바보같이.. 사고를.. 아저씨.. 제 옆에 탄 애는요..?"


"누구 말이니, 개빈?"


"..제 옆에.. 킴버가 타고 있었어요.. 아주 좋은 애예요.. 무사한가요..?"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그저 개빈의 얼굴 여기저기를 손으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킴버.. 좋은 아이인데.. 나 때문에.."


"개빈, 이건 사고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우리 차랑.. 충돌한 차.. 그 사람은 괜찮나요..?"


"..개빈,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개빈.. 오, 신이시여!"



부품이 어지럽게 헤쳐진 차량마냥 개빈의 몸 또한 그러했다. 나는 개빈의 온전한 손 한쪽을 두 손으로 움켜쥐느라 흐르는 눈물들을 그저 밑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아저씨..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해요.."


"그래.. 그래.. 게빈, 그러마."


"..킴버.. 킴벌리 로렌네 부모님에게.. 정말 정말.. 죄송하다고.. 그리고 다른 운전자.. 가족에게도.. 너무 죄송하다고.. 애런에게는 차를.. 걔는 아마.. 벌써 용서했을 거예요.."


"그래.. 게빈.. 아저씨가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하마."


"..그리고.. 보안관 아저씨.. 약속해요.. 우리 엄마 아빠한테.. 그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 좀 내버려 둬요.'예요.. 그분들께.. 꼭 전해주셔야 해요.. 개빈이 너무나 사랑한다고.. 다시.. 다시.. 엄마 아빠 자식으로 태어나면 안 되냐고.."


"..그래. 개빈, 보안관 아저씨가 반드시 약속하마. 약속하마."


"..아저씨.. 나 때문에.. 죽었어요.. 나는 지옥에 갈 거예요.."


"개빈, 그렇지 않아. 사고였다. 누구한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너무 추워요.."


"..개빈, 신이 곧 너를 따뜻하게 품어주실 거다."


"..아니요..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그러지 않으실 거예요.. 그분은 나를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서.. 가.. 멀리 가거라.. 여긴 네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실 거예요.."


"오, 개빈.. 절대 그렇지 않단다.... 개빈? 얘, 개빈아. 개빈? 개빈?"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세상의 아이러니와 마주한다는 거다. 만약 개빈이 1-2초만 늦게 코너에 진입했다면, 만약 개빈이 가속 페달을 1파운드만큼만 덜 밟았다면, 만약 개빈이 핸들을 몇 인치만 덜 돌렸다면.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신의 뜻을 찾으란 말인가? 오늘 밤,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나는 경찰 차량과 구급대 차량 사이로 구급대원이 시신 네 구를 옮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그 옛날 잔디밭을 깎으면 수고비를 주겠다던 나에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에요.'라고 외치던 꼬맹이 개빈이 떠올랐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일면식인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예리하게 뜬 달 너머로 칠흑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부디, 이 사과가 개빈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개빈, 얘야.. 미안하다. 네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구나."





-fin-




















후기


본 이야기의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온전히 교감하기 위해선 짧은 글 안에다 개빈, 애런, 그리고 로렌 간의 무고한 천진함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러니까, 읽는 이들이 이 셋을 그전부터 잘 알던 사이로 느껴야 했다는 뜻이다.


내 의도가 어느 정도나 들어먹혔는지는 모르겠으나(살면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치는 법이니까), 만약 제대로 전달받은 이라면 '독자의 바람이 담긴 그릇'에다 뱉어놓은 내 환희의 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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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형수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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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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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형수




롱펠로는 사형일을 목전에 둔 죄수이다.


이제 롱펠로에게 있어서 유일한 낙이란 사형 직전에 먹을 메뉴를 미리 상상하는 것뿐이다. 그런 롱펠로가 오래전부터 면회를 거부해왔던 한 사내와의 면회를 승낙했다. 사내는 아주 오래전부터(사실 롱펠로가 교도소에 수형되고 직후서부터) 지금껏 꾸준히 면회 신청을 이어왔다. 그렇다면, 롱펠로는 어찌하여 갑작스레 면회 신청을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그 사내가 누구이길래 롱펠로는 지금껏 면회를 거부해왔을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죽음을 앞둔 자의 단순한 변덕과 유희.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그 사내는 바로 롱펠로가 죽인 두 자녀의 아빠.


엄마의 승진을 축하하고자 서프라이즈 선물을 사러 동네의 중고 물품점을 향하던 어린 남매를 차량 납치, 납치 당일 남매를 교살한 후 지하 육류용 냉동고에 시신 유기, 이후 한 달간 총 4번에 걸쳐 남매의 부모를 협박해 14만 달러를 갈취, 결국 부모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사건에 개입해 체포. 이게 롱펠로의 죄질이다.



"..지난달 인터넷 뉴스에 나온 사진보다 여위어 보이는군, 롱펠로."


"뉴스보다 훨씬 오래전에 찍은 사진이니까. 여긴 SNS를 할 수가 없거든. 봐봐, 지금은 앞머리가 더 벗겨졌지? 그리고 요즘 소식하고 있어. 최후의 만찬을 더 기껍게 만끽하려고 말이야."


"..왜 갑자기 면회를 승낙했지?"


"이봐, 그럼 너는 내가 매번 거절하는 데도 어째서 포기하지 않은 거야? 내가 변덕이라도 부릴 거라고 희망한 거야? 뭐, 그렇다면 축하해. 자네 감이 맞았어."


"왜 죽인 거지?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었어! 왜 죽인 거야!"


"얼마든지 주기는, 경찰에 신고했잖아.."


"네가 29일 동안 내 아이들의 목소리를 첫 통화 말고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으니까! 단 한 번도! 왜 죽였어!"


"왜 죽였냐니.. 그야 계속 울어대니까. 이웃이 눈치라도 채면 어떡하라고? 그리고 난 시끄러운 게 세상에서 제일로 싫어."


"...."


"이봐봐, 당연히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그런 말만 할 거면 이만하겠네. 스트레스는 건강에 좋지 않거든. 자네한테도, 나한테도."


"..롱펠로, 환생이란 걸 믿나?"


"뭐? 이 친구, 맛이 갔구먼."


"사람의 영혼은 그 육신이 다 하고 나면 새로운 육신으로 삶을 시작해."


"그럼, 어째서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데?"


"새 생명으로 태어난 직후 아주 일시적으로만 기억하는 거니까. 곧 동시에 전생의 기억이 사라지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거지. 새 시작을 알리면서 말이야. 하지만 가끔은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전생의 기억을 유지하기도 해. 그리고 그러한 환생은 때론.."


"그래? 그럼 네 자식들에게 잘 된 거구먼. 적어도 이번 생에는 나를 다시 볼 일이 없을 테니까."



롱펠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의 교도관을 한 차례 바라보곤 몸을 돌렸다. 동시에 맞은 편의 사내는 자신을 제지하고 나선 다른 교도관 너머로 다급하게 울부짖었다.



"롱펠로! 널 기억하겠어! 네 그 눈망울을 내 심장에 박아놓으마! 네가 환생해서 어디에 있건 한눈에 알아보도록!

롱펠로! 내 말 똑똑히 기억해! 널 기억하겠어!"



롱펠로는 돌아보지 않은 채 중지를 치켜들었고, 그게 롱펠로와 이 사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40달러를 꽉꽉 채운 롱펠로 최후의 만찬은 다음과 같았다. 꽃등심 스테이크, 물론 미디엄 레어로. 감자튀김 듬뿍, 물론 얇게. 소시지구이, 물론 스모키하게. 디저트는 저먼 초콜릿 아이스크림, 물론 1.5 쿼터 통들이로.


그리고 롱펠로는 약물 투입으로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교도소 내에 떠도는 도시 괴담, 즉 재수가 없으면 바로 죽지 않고 1시간 넘게 발작 증세가 이어진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롱펠로는 10분도 채 안 되어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 롱펠로의 마지막 기억은 눈이 감기면서 동시에 아주 많은 빛이 내리쬐던 기억이다.


한편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으나 롱펠로는 감긴 눈꺼풀 바깥으로 그 빛들이 여전히 가득하게 내리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빛들이 사라지고.. 어째서인지 롱펠로는 울고 있었다.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롱펠로의 감긴 눈앞으로 의료용 캡을 눌러쓴 한 남자의 얼굴이 들이밀어 졌다. 남자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러한 환생은 때론.. 전생에 자신과 연이 닿았던 이와 가까운 사이로 이루어지곤 하지."



감히 사람이 품을 수 없는, 그런 슬픔과 환희가 뒤섞인 표정을 한 남자가 재차 말을 이었다.



"우린 아주 오래도록 함께할 거다, 롱펠로."








-fin-




















후기


나는 독자의 바람이 담긴 그릇에다 침을 뱉는 걸 좋아한다. 물론 몰래 뱉어야 한다. 아니면 그러려고 한 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뱉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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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집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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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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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집




우리 자매가 어릴 적 할머니는 종종 뽐내듯 말하곤 했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말거라.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간단다."



뭐, 요즘은 할머니도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지 오래라서.


어쨌건 결과적으로 나는 할머니의 말을 따랐다. 불행을 두려워하지도,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굳이 둘러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아니었다. 동생은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했고 잔뜩 웅크린 채 불행이 오지는 않았나 항상 사방을 살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흠, 이번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을 말해줘야겠군.


어릴 때부터 동생은 내 껌딱지였다. 두 살 터울인 동생은 심약하기가 그지없는 아이였다. 사람 얼굴을 3초 이상 쳐다보면 얼굴이 벌게져서 터져버릴지 모르는, 그런. 동생이 가족을 제외한 사람에게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한 건(실상 가족들에게조차 늘 기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바로 이웃집 참전용사 지미 할아버지에게 한 인사였을 것이다.


어느 날 엄마는 동생의 성격을 고쳐보겠다며 이웃집 지미 할아버지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오지 않으면 평생 집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마 전날 어디서 시답잖은 자녀훈육계발서 따위를 읽었을 거다. 아니면 동네에서 방귀 좀 뀌는 아줌마에게 귓동냥을 받았거나.


그날 마당에 나와 팔짱을 낀 채 노려보는 엄마 앞에서 동생은 얼굴이 눈물 반이 된 채로 몇 번이고 지미 할아버지(비만 오지 않으면 매일 현관 앞 오크나무 의자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글쎄, 지미 할아버지에게 그 인사가 제대로 전달됐을는지 모르겠다. 그 양반 원체 가는 귀가 먹어서 말이다.


물론 그런 발작적인 훈육은 당연히 장기적인 효과가 없었고, 엄마는 이내 손을 떼고 말았으며, 아빠는 사춘기가 지나면 자연히 성격이 바뀔 거라며 태평을 부렸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각종 심부름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옆집의 다 죽어가는 영감쟁이에게도 말 한마디 못하는 동생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동생이 염치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심부름을 도맡는 게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서 동생은 매번 나를 따라나서선 아무리 가벼운 짐이라도 나누어 들곤 했다. 그렇게, 내가 사는 오하이오 주 시골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나와 내동생을 '껌딱지 자매'라고 불렀다.


자, 그럼 시간을 이번 여름방학으로 돌려볼까?


내가 사는 마을에선 차라도 끌고 나가지 않는 이상 10대가 즐길 수 있을 만한 게 도통 없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중학생이라 면허증이 없었고 후져 터진 6단 기어 자전거로는 어디 멀리 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 숲(사실 숲이라고 표현하기에 민망할 정도의 규모지만)으로 가 꼬불쳐 둔 떨 따위를 피우는 게 최고의 여가였다.


당연히 항상 옆에는 내 껌딱지도 있었다.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시간을 보내던 동생을 나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같이 있어 줘야 했고 그건 방학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학마다(꼭 방학이 아니더라도) 숲으로 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 동생도 수다를 떨었냐고? 그렇다. 동생은 나와 있을 때면 제법 명랑했다. 말도 곧잘 했고. 사실 동생은 말주변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어쨌건, 내가 하려는 말은 이렇게 볼 것 없는 시골 마을에선 으레 도시 괴담 하나둘 정도는 나돈다는 거다. 당연히 우리 마을에도 도시 괴담이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숲 가장자리의 귀신 들린 집과 관련된 것이었다.


숲 가장자리에는 녹을 띤 허름한 울타리 안쪽으로 오래된 목조 집 하나가 있었다. 그 목조 집에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얌전하고 상냥하기만 하던 그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모습이 존재했다. 그녀는 지독한 카니발리즘 소유자로, 몰래 꾀어낸 동네 여자애들을 집으로 데려가 한 점 한 점 음미하며 뜯어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 끝에 유죄를 선고받곤 죄수들이 가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 이후 법적인 소유 문제로 인해 덩그러니 남아버린 목조 집 주변으로 철조망이 설치됐고, 정신병원에 수용된 그녀는 며칠이고 식사를 게워내더니 어느 날 알몸인 채로 입이 닿는 곳의 자기 살점들을 모조리 뜯어먹어 과다출혈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이지, 그녀는 죽어서 이 목조 집으로 돌아와 여자애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대."


"..언니, 근데 왜 여자애들이야? 그 여자는 여자애들만 잡아먹는 거야?"


"그건 말이야.. 아이들의 살점에서 누린내가 덜 나고 여자가 씹는 맛이 더 부드러워서래. 그녀는 산채로 사람을 잡아먹는 주의거든. 그래서 먼저 혓바닥과 목구녕을 칼로 헤집는 거지."


"..언니는 그 이야기를 믿어?"


"글쎄다. 사실은 상관 안 해. 중요한 건 지금 이거보다 재미있는 게 우리한테 있느냐는 거지. 자, 나 먼저 간다."



나는 철망 하단으로 흉하게 뚫린 구멍을 기어 통과한 뒤 동생이 따라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문이 열려있는데?"


"..언니, 그냥 돌아가자."


"안에 잠깐만 들어갔다가 가자. 전리품은 챙겨가야지."


"..그냥, 가자. 느낌이 안 좋아."


"너 겁먹은 거야? 그녀에게 잡아먹힐까 봐?"


"...."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딛는 거야. 그리고 전리품을 챙기면 넌 이제 학교에서 적어도 두 달간은 인기스타가 되어있을 거라고."



한참을 주춤이던 동생은 결심한 듯 내 얼굴을 올려다봤고, 그렇게 우리는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환장하겠네, 있는 거라곤 거미줄뿐이고. 뭐 챙겨갈 만한 것 좀 보여?"





아무 대답이 없어 동생 쪽을 돌아보니 동생은 그야말로 분칠한 듯한 얼굴색으로 굳어있었다. 동생의 시선은 어느 바닥에 머물러있었는데 그곳엔 자그마한 뼛조각들과 함께 아무렇게나 떨구어진 듯한 핏자국들이 아직 선명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미친 사람마냥 뛰쳐나가는 공포영화 속 클리셰는 모두 엉터리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날, 나와 동생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망각한 채 자빠지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비틀비틀 오두막을 빠져나오곤 울타리를 기어 나와서도 한참을 기어댔다.


그리고, 그날부터였다. 동생은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는지 밤마다 '그날' 못 질렀던 비명을 지르느라 분주했다. 허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동생은 이따금 발작적으로 어떤 음식이든 게워내기 일쑤였다. 원래부터 마른 몸이었던 동생은 곧 삐쩍 마른 형상으로 변해갔다.


엄마 아빠는 손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의사는 동생의 몸에 특별한 이상을 찾을 수가 없으며 아마 심리적인 문제로 보이는데 식이장애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병원 측은 가정에서 좀 더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하면서 만약 상황이 지속될 경우엔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아빠가 직장에서 의료보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마을의 신부님에게 주기적인 가정방문과 기도식을 간곡히 부탁했고(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기 싫어 갖은 핑계로 내빼곤 하던 아빠도 마지못한 얼굴로 동의했다. "그래, 뭐. 와서 기도만 하는 거라면야, 뭐."), 그 열의와 신앙심에 감복한 신부님은 매일마다 저녁 식사 전 우리 집에 들러 다정한 음성으로 동생 앞에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러나 동생의 발작적인 증상은 그대로였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그리고 또 새로워졌다. 어느 날부턴가 동생의 팔 주변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물어뜯은 듯한 상처였는데 정작 동생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했다. 병원에선 사람의 치아로 인한 상처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이 신고를 한 탓에 엄마와 아빠는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동생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또 늘어났다. 다양한 부위들로. 더불어 그에 비례해 악몽으로 인한 비명 또한 더욱 거세져 갔다. 이제 엄마, 아빠는 매일 밤마다 동생을 당장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하니 말아야 하니로 싸워댔다.


그렇게 그날이었다. 언제나 보다 조금 이른 새벽녘. 평소와는 달리 마치 짐승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에 우리는 반사적으로 깨어나 동생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자 어둠 속임에도 동생이 침대 앞에 우뚝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켜자(아마 아빠였을 거다) 우리는 동생의 모습과 행동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동생은 만면에 웃음꽃이 핀 얼굴을 하고서 이제는 하얀 뼈가 드러나기 시작한 한쪽 팔의 살코기를 게걸스레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압도적인 광경에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수 초 후에나 아빠가 나와 엄마를 살짝 감싸 안은 채 동생을 향해 말했다.



"마리아, 너 지금 뭐하는 거니? 가만히 있으렴. 아빠가.."



그러자 동생이 정말 미친 사람처럼, 마치 고장 난 인형마냥 얼굴을 격렬하게 흔들며 웃어 젖혔고 곧 덜렁거리는 살코기 한 점이 동생의 입에서 툭 떨어졌다. 동생이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쾌활하고 명료한, 그리고 탁한 음성으로.



"난 마리아가 아니야. 사람 잘못 봤수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온몸이 굳어버려 그저 꼼짝도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고, 그런 우리를 재미있다는 듯이 훑어보던 동생이 다시 덧붙였다.



"자빠지겠네! 니들은 지금 내가 마리아로 보이는 거니?"



여기까지가, 내 동생이 여름방학 중에 결박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일련의 이야기이다. 동생은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했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불행이 오지는 않았나 항상 사방을 살핀 끝에 불행과 눈이 마주쳐졌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강력했다.


동생은 여름방학이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금에도 여전히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다. 종종 음식물을 게워내고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집중 감시를 받으며 종종 악몽을 겪은 후에나 하루를 시작하면서 말이다.


자, 이야기 끝이다. 나? 나는 문제없다. 나는 불행이라는 놈을 다룰 줄 안다. 무엇보다도 나는 '목조 집의 그녀' 이야기를 결코 믿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낸 거니까.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성가시기는 했지만 효과는 내 예상 밖이었다. 덕분에 말이지, 나는 학교에서 같이 노는 친구들이 생겨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 그저 좀 놀래켜서 여름방학만이라도 껌딱지에서 해방된 채 홀로 바깥에서 호사를 좀 누리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나 자유의 몸이 되다니!


그리고 지금 나는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않는다.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가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내 동생은 오래도록 입원해있을 것이다.





-fin-




















후기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 중 하나를 꼽자면 '사람의 마음'을 들 수 있겠다. 특히나 '상대방의 마음'이. 그래서 뻔뻔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잘 사는 거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말거라.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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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2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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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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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지난밤이었다. 잠옷 바람을 한 우리 막내 딸아이가 서재(나 홀로 그렇게 부르는 골방)로 종종 달려와 그림책 한 권을 쑥 내밀곤 물었다. 그 그림책은 '헨젤과 그레텔'이었는데 아마 제 엄마가 월마트에서 사줬나 보다.



"아빠, 마녀가 진짜 있는 거야?"


"..뭐라고 했니?"


"마녀. 이렇게 코가 기-다랗고 손톱이 뾰족해."



딸아이가 펼친 페이지에는 흉측한 형상의 마녀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너 그것도 몰랐냐? 우리 앞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마녀야. 그 할멈, 지난번 니 뒷다리 보면서 군침 좀 흘리더라. 넌 이제 다 살았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놈이 딸아이에게 이죽거렸다.



"저리 가!"



딸아이가 아들놈 쪽을 향해 팔을 허공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자, 그만. 너희 둘 그렇게 자꾸 싸우고 그러면.. 진짜 마녀가 나타나서 잡아간다!"



내가 딸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사방으로 흔들어대자 딸아이는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연신 내뱉었다. 한편, 아들놈은 그저 멀뚱히 서서 입꼬리만 씰룩이고 있었다. 고개도 같이 삐딱하게 돌려 젖히고는 말이다. 도대체 저런 표정과 제스쳐를 아이들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아빠, 세상에 마녀가 어딨어요."



아들놈이 내게 점잖이 핀잔을 주었다. 맙소사, 마치 세상 다 살아본 사내의 눈빛이로군.



"얘야, 마녀는 진짜 있을지도 모른단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말이지. 그러니까 어서 양치하고 엄마한테 굿나잇 인사하렴. 마녀는 잠들어있는 아이에겐 관심이 없거든."


"하지만 아빠, 정말 마녀가 있다면 이미 유튜브에 올라왔을걸요?"



도대체가, 인터넷이 애들한테 도움되는 꼴을 못 봤다니까.



"그래? 덕분에 새로운 걸 알게 됐구나. 마녀는 카메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자, 어서 양치하러 가렴."



나는 두 아이를 돌려보내곤 다시금 모니터 속 문서창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얘들아, 마녀는 존재한단다.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에는 말이지."



 



그렇다. 마녀는 존재한다. 어딘가에그래, 마녀는 존재한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그리고 생각보다 젊고 평범한 모습으로. 어쩌면 당신도 살면서 한 번쯤 마주쳤을지 모른다.


이건 오래된 이야기이다. 1991년 당시의 이야기이니까. 만약 딸아이가 마녀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았다면 더 오래오래 잊고 지냈을 거다. 그러고 싶었고 말이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 중에서 형제자매의 전 애인 만큼 잊고 사는 관계가 또 있을까? 이건 오래된 이야기인 동시에 내 누이의 전 남친이었던 새미토퍼 체이스의 이야기이다.


먼저 새미에 대해 좀 말해보겠다. 엄밀히 말해 새미는 썩 어울리고 싶은 부류의 남자는 아니었다. 술, 담배, 메리앤제인이나 약어로 된 알약은 물론이고 심지어 농지거리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남자였으니까. 그는 살면서 군것질 서리 한 번 안 해봤을 텐데, 이 모든 건 아마 그의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일 거다. '새미, 아가. 도둑질은 나쁜 거란다. 술, 담배도 하지 마렴. 쟤들이랑 놀지 말고. 엄마 말 듣지 않으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없단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새미는 그런 남자였다. 너무도 착실해서 감히 놀릴 마음조차 들지 않는. 그런데도 여자들은 그를 썩 좋아하곤 했다. '그는 샌님이라서가 아니라 삶에 진지한 거야.'라나? 세상에 마상에, 가끔 보면 정말 여자들은 이해하기가 힘들다니까.


어쨌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야기 자체는 제법 짧다.


그, 그러니까 새미가 내 누이와 진지한 만남을(오, 아무렴. 새미인데) 이어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새미는 한 음악 회사의 아티스트 매니저 겸 일종의 음악 프로듀서였다. 그즈음 새미는 평소 동경하던 음악 장르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완전히. 새미가 빠져있던 건 바로 '고대 이집트 음악'이었다. 아마 고대 이집트 음악이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유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보다 정확히는 그저 그 장르에 꽂혀버린 것일 테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도 이 고대 이집트 음악은 철저하게 비주류였다. 하여, 새미는 해당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백방으로.


그 과정에서 새미는 한 여인과 접촉하게 된다. 여인 쪽에서 먼저 어떻게 알고서 연락을 취해왔는데 분명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고 연락해온 건 아닐 거다. 그녀는 자신을 고대 이집트 음악 전문가로 소개했다. 곧 저녁 식사 약속을 잡은 새미는 그녀가 거주하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녀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티셔츠와 재킷, 진 차림에다 아무리 봐도 대학생 정도로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곳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 동안 둘은 고대 이집트 음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시종 심도 있는 고견을 내놓았다. 그녀의 고대 이집트 음악에 대한 조예는 새미 이상이었고 이에 새미는 그녀와 진부한 표현 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서 새미는 그녀에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는데(아주 조심스럽게), 시종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는 그 질문에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선언하듯 대답했다.



"제 직업은 마녀랍니다, 체이스 씨."



직업이 마녀라.. 정말이지, 세무서 직원이 좋아할 만한 대답 아닌가? 허나 새미는 새미인지라 그러한 대답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조소를 보내지 않았다. '마녀'를 단어 그대로의 마녀가 아닌 일종의 삶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 반, 그리고 상대의 말에 섣불리 비아냥으로 화답하는 건 그의 인생 철학에 위배된다는 게 반이라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새미는 그녀에게 조소를 보냈어야 했다. 그건, 일종의 테스트였으니까.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선 직후 그녀는 대놓고 새미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왔다. 문지방에서 몇 발자국이나 떨어졌을까. 그녀가 새미의 팔짱을 부드럽게 끼고선 말했다.



"체이스 씨, 저희 집에서 한잔하면서 더 이야기해요."



이럴 경우 새미는 상당히 단호한 편이다. 새미는 즉시 팔짱을 푸르곤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럴 수 없겠노라고 대응했다. 그때였다. 시종 어른스럽고 고고한 태도로 일관했던 그녀가 갑자기 인도 한복판에서 새미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핏대 서린 얼굴로 새미를 힐난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계속해서 호의를 보내와 놓곤 갑자기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새미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인생에서 대부분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곤 하는 법이다. 그녀는 끝내 화를 풀지 않고서 뒤돌아 가버렸다. 마지막으로 새미에게 거칠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새미토퍼 체이스, 넌 나를 모욕했어. 망신을 주었다고. 두고 봐. 네게 저주를 내릴 테다!"



아무리 매사에 진지한 새미일지라도 그녀의 '저주'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 순간 민망함에 화가 났던 것이라고만 여겼다. 처음 며칠간은 말이다. 며칠 후, 새미의 꿈에 나타난 탁한 쇳소리가 말했다.



"사악한 눈의 딸이 너를 찾아갈 거야. 어린 그녀, 지금의 그녀, 그리고 미래의 그녀가."



그 주부터였다. 체이스의 꿈에 웬 흐릿하고 검은 형체가 나타난 게. 꿈임에도 그 형체로부터 설명 못 할 두려움을 느낀 새미는 매번 집을 뛰쳐나오곤 했다. 허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코너를 도는 순간 어째서인지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 있었고 몇 번이나 도망치다가 절규하며 꿈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그리고 마침내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형체가 드러낸 모습은 소녀였다. 소녀는 손에 쥔 칼을 앙칼지게도 흔들어대며 새미를 노려봤다. 소녀는 단지 멀찍이서 칼을 흔들어댈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새미에겐 충분한 고통이었다. 며칠간 새미를 괴롭히던 형체는 이번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그녀 자신의 모습으로.


또 며칠간 시달리는 날이 이어지고 이번엔 중년의 여인으로 나타난 형체가 새미의 손톱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꼼꼼하게 빼먹지 않고서. 물론, 잠에서 깬 새미의 손톱들은 모두 멀쩡했다. 다만 환장하겠는 건 꿈속에서 하나하나 뜯어먹힐 때마다 절로 비명을 자아냈던 그 아픔들이 꿈을 깬 후에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온전히 붙어있는 손톱들, 그 자리로 계속해서 욱신거리는 고통들. 더 무서운 거? 매번 꿈에서 손톱들을 모두 뜯어먹은 여인이 눈을 까뒤집은 채 새미의 가슴팍을 더듬으며 말한다는 거다.





"심장이 어느 쪽이지? 이쪽이지? 아닌가? 괜찮아, 두 군데 다 파보면 되니까."



여기까지가, 나와 누이가 새미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어찌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지 새미는 눈에 띄게 빠진 머리와 깊은 골짜기로 박힌 눈, 내 누이만큼 가늘어진 손목을 한 채 하소연했다. 이따금 입술 가장자리로 끈적한 침을 새어가며.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딱히 도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는 대학에서도 배운 적이 없으니까.


며칠 후, 누이는 새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지역 경찰에 신고했다. 왜냐하면 그가 누이의 전화에다 평소 같지 않은 음성을 남긴 이래 연락이 되지 않았거든.



"이제 나는 이대로 죽을지도 몰라. 너무나 두려워. 그래도! 그래도! 절대로 그 개년이 날 이기게 두지는 않을 거야!"



꽤나 오래전 일인지라 새미가 정확히 개년이라고 했는지는(맞는다면 아마 태어나서 처음 한 욕일 거다) 모르겠다만 어쨌든 충분히 흥분하고 있던 건 확실했다. 한편 새미네 집을 찾아간 경관은 소득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아무리 현관문을 두드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다음 날 나와 누이는 직접 새미네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지역 경관 둘과 함께 새미네 집을 찾아갔다. 집은 전날과 달리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경관은 우리에게 문밖에 있을 것을 지시한 뒤 권총을 꺼내 들고선 거실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누이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새미의 이름을 외쳤다. 나는 그런 누이를 말리려고 뛰어들어갔다가 깨달았다. 현관문에서부터 집 사방으로 소금이 흩뿌려져 있다는 걸. 또, 욕실 문이 잠긴 채로 닫혀있다는 걸.



"경관님! 여기 욕실 문이 잠겨 있어요! 와보세요!"


"새미! 새미, 거기 있어?"


"물러나세요. 체이스 씨, 안에 계십니까? 체이스 씨, 계시면 대답하세요."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자 경관 둘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거실에 비치된 싸구려 2단짜리 장식장에서 얼굴만 한 크기의 파라오 석상을 가져온 누이가 그걸로 욕실 문손잡이를 냅다 후려갈기기 시작했고

나와 경관 둘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손잡이가 맥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실에서 나는 평생 못 잊을 장면을 보게 된다. 아마, 나 외에 셋도 마찬가지리라.


욕탕 안에는 새미가 누워있었다. 새미는 잠옷 차림으로 빈 욕탕 안에 누워있었고 머리카락은 두피가 온전히 드러날 정도로 다 빠져 있었다. 새미는 참으로 얌전하게도 가지런히 누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그 옛날의 파라오상 같았다.


우리 넷은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새미의 몸은 마치 방금 샤워를 끝낸 양 깨끗해 마지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엔 눈물마냥 죽음이 그렁하게 걸려있었다. 허나 우리는 놀랄 정신도 슬퍼할 정신도 없었다. 파라오상과 같은 모습으로 욕탕에 안장된 새미, 집 안과 마찬가지로 온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소금, 욕탕 주변으로 마치 바리케이드마냥 펼쳐진 양초떼, 그 안으로 조심스레 정렬된 가지각색의 십자가상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오컬트 관련 서적(펼쳐진 페이지는 모두 '저주'에 관한 것들이었다)들. 이와 같은 기괴한 하모니가 전달하는 이질적 공포감에 꼼짝없이 전염되어버린 것이다. 궁극적인 공포 앞에선 그 무엇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마치 묵시록적인 예술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 앞에서 잠시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 묵시록적 예술작품. 한낮의 인간세계로 재림한 사탄과 종말, 바로 그걸 캔버스 소재로 한. 한편 사방으로 보이는 소금, 양초떼, 십자가상들, 오컬트 관련 서적들이 인간 새미가 마지막까지 얼마나 처절하게 대항했는가를 짐작게 했다.


그러나.. 새미는 패배했다. 정확히 무엇과 그리 사투를 벌였는지 감히 짐작이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새미는 떠났다는 걸. 보름 후, 나와 누이는 신문을 통해 새미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지난달, 마녀로부터 표적이 되었다며 두려워하던 남자가 자신의 자택 욕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여자친구에 의하면 남자의 이름은 사무엘 체이스(35)로, 자신을 마녀라고 밝힌 신원 미상의 한 여성으로부터 애정 표시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4월 18일, 체이스 씨의 여자친구로부터 신고를 받은 경찰은 노스 킹 카운티 북부 152번가 1300 블록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킹 카운티 경찰에 의하면 당시 현장에선 범죄, 폭력, 강도와 관련한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조사 결과 현장 주변으로 소금, 양초, 십자가상이 발견되었다.


한편, 킹 카운티 검시관 리치 가너는 체이스 씨의 몸에서 그 어떠한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인에 대해선 급성 심근염이라 결론 내렸다.


- 1991년 5월 4일 자 <시애틀 타임즈>



새미의 사인은 급성 심근염이었다. 하나 말해주자면 말했듯 새미는 생전 술, 담배, 약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비타민을 챙겨 먹었고 가족친지 중 심장 병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본인 역시 생전 심장과 관련한 질환을 앓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새미는 사방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선 욕탕 안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무언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잠긴 욕실로 침입한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 아마, 흔적이란 게 남을 수 없었던 존재였겠지. 그리고 그 무언가로 인해 새미의 심장이 갑작스레 멈추고 말았다. 그 무언가를 보고 너무도 놀라서인지, 아니면 그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심장을 멈추게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자기, 안 잘 거야? 뭐 한다고 그렇게 오래 있어?"


"아.. 여보. 애들은 다 잠들었어?"


"진즉에."


"마무리하고 금방 갈게."


"그래, 하고 와."



나는, 내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한번 짚고는 뒤돌아 나가는 아내에게 나도 모르게 물었다.



"여보?"


"응?"


"..혹시, 살면서 마녀 본 적 있어?"



아내는 난데없는 질문에도 일말의 당황한 표정 없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는 곧 대답했다.



"자기, 내가 바로 그 마녀야."



오히려 내가 잠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내는 머리를 푸는 동시에 장난스레 엉덩이를 양옆으로 흔들며

한껏 꾸며낸 목소리로 말했다.



"잊었어, 자기? 내가 밤마다 못된 마녀가 된다는 걸?"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내보이고는 예전 내가 청혼했을 때 지었던 그 미소를 띤 여인네에게 금방 가겠노라고 조아렸다. 그렇게 엉덩이를 과장스레 씰룩대며 돌아나가는 그녀를 끝까지 지켜본 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fin-




















후기


해당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 속 <시애틀 타임즈>는 있는 그대로 옮긴 것이라 보면 된다.


실제 모델인 크리스토퍼 케이스는 공포에 잠식된 나날을 보낸 끝에 숨이 멎고야 말았다.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저마다 품에 안고 사는 것이다. 사실 그 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일는지 모른다.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5143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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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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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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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살아남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도망친 것이다. 내 품에 싸인 이 '물건'을 맡아야 하니까. 나는 이 '물건'을 맡으라는 명을 하달받았다. 그 명을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탈출로를 선점 받았다. 그러니 조금은 내 비겁함을 변호해야겠다. 나는 명에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을 맡은 다음은, 그다음엔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같이 평생을 명에 따랐던 군인에게 있어

은퇴란 그런 거다. 계획된 것이든, 계획되지 않았던 것이든 간에. 앞으론 군복 대신 셔츠 쪼가리 하나만 걸칠 것이다. (어차피 군복도 모두 처분한 지 오래다) 그리곤 이 따뜻한 곳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겠지.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어쨌건, 그렇게라도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이 끝까지 사는 거다.


히틀러 씨(그분은 항시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바랐다)가 이 '물건'을 처음 접한 건 빈에 거주하며 미술에 몸담고 있던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그것은, 1912년 합스부르크 가의 보물을 전시하던 박물관에서였다. 처음 히틀러 씨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그게 2시간 전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 평소 조용하고 수줍음 많았던 히틀러 씨는 이야기 내내 핏발에 광기를 띠고 있었다. 히틀러 씨는 마치 다른 세상을 엿보고 있는 양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선 그날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온 유럽이 기독교인 만큼 나 또한 가톨릭교도였네. 그래서 처음 그 '창'에 어떤 신성함 같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실제로 본 순간 모든 게 날아가 버렸네. 그때 내가 느낀 건 신성함이 결코 아니었어. 곧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비명 지르는 게 느껴졌지. 때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잖나. 그리곤.. 이건 농담이 아닐세. 그 '창'이 내게 말을 건네왔어.


'아디, 아디. 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옛날, 네가 태어나기도 전 네가 날 손에 넣었을 무렵부터. 아디, 내게로 오렴.'"



그 뒤, 히틀러 씨는 1차 세계 대전 참전 후로부터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계와 대중의 총아가 되었다. 그렇게, 방랑하던 미술가는 1934년 독일의 총통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 씨와 '창'과의 인연(?)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자 비밀스러운 심복이었던(그리고 친구였던) 나는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 임무를 일임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임무의 첫 수행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창'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창'은 여러 주인의 손을 탔던 것 같다. 아리마태아의 요셉 자손들이 차례로 보관해오다 오랜 세월 예루살렘에 묻혀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이 찾아낸 이래로.


그렇게 로마 황제들의 손에 번갈아 들어갔던 '창'은 그들을 패권의 길로 인도했다. 허나 손을 벗어난 '창'은

그들을 곧바로 패망의 길로 밀어뜨렸다. 이후 십자군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창'은

원정 승리로써 그에 보답한다.


그 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창'은 그들에게 유럽 제일의 패권을 가져다주었다. 천하에 위세를 떨치던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빛나는 승전보를 올리나 끝내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창을 가로채는 데엔 실패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600년 가깝도록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배하며 1914년 세계 대전을 선포한다.


그리고 1938년. 히틀러 씨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병합한다. 동시에 히틀러 씨는 친위대 앞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들을 압수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물론, 그전에 미리 비밀명령을 하달받은 나로 인해 '창'은 아무도 모르게 가짜로 대체된다. 뉘른베르크의 교회로 옮겨진 게 바로 그 가짜였다.


마침내 히틀러 씨는 '창'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망했었던 그 '창'을. 지금에 와 보면 가난한 미술가가 독일의 총통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합병한 게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1939년. 히틀러 씨는 폴란드 침공을 전개했고 곧 두 번째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창'을 손에 넣은 히틀러 씨는 곧 전 세계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마침내 이곳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내가 아무도 모르게 친위대 중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안전하게 탈출로를 선점 받았던 것은 히틀러 씨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씨는 확신했다. '창'이 수중에 있는 한 운명은 다시금 자신의 편에 서리라고. 하여, 첩보를 입수하고선 전설의 '창'을 손에 넣으려 호시탐탐 침을 흘려대는 개떼(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에 대비해 내가 움직인 것이다.





머저리 놈들. 가짜를 두고서 서로 물어뜯기나 하라지. 말했듯, 히틀러 씨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창'만 있다면야 언젠간 전황이 바뀔 거라고. 그러나 쑥밭으로 둘러싸인 벙커 안에서 히틀러 씨는 마침내 낙담하며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창'의 보관 임무에 실패한 거라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히틀러 씨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낯선 땅에 홀로 남겨졌다. 말했듯,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나는 이제 안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직감하고 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창'은 신성한 피가 닿은 성유물이 아니었다. '창'은 패권으로 인도하는 제왕의 유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창'은 기다렸다. 로마 제국 시절 발견된 이래 황제들의 손을 거치며 그들을 부추겼다. 그들을 움직였다.


'창'은 그들론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차례로 그들을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허무한 몰락을 맞이했고 '창'은 십자군 원정을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로 도착했다. (십자군 역시 끝내 버림받으며 비참한 끝을 맞이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대로 된 대상자를 찾은 것이다.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세계 대전이 끝나자 '창'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버렸다. 지난 '그들'이 그러했듯 합스부르크 왕가는 몰락했고 '창'은 히틀러 씨를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이제는 안다. '창'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제 안다. '창'은 피를 원한다. 우리 인간의 피를. 더 많은 우리 인간의 피를. '창'에는 그 옛날 두 번째 인간을 유혹했던 사탄이 깃들여 있는 거다. 사탄은 광야에서 나사렛 사람에게 세 가지 유혹을 거절당하곤 잠시간 자취를 감췄다. 사탄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건 '그날'이었다. 사탄은 스스로를 '창' 속에 구속한 것이다. 인간의 피를 부르기 위해. 나사렛 사람을 평등과 사랑을 전파한 개혁가가 아닌, 오로지 신의 아들로만 만들고자. 그러기 위해 '장치'를 자처했다.


'창'이 마침내 두 번째 인간이 탄생했던 곳을 찔렀다. 사탄은 스스로를 구속시키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에 성공한 거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이 신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두고서 신의 이름을 빌린 자들에 의해 쏟아진 헤아릴 수 없는 피들이 아마 땅속을 스며들어 저 아래 지옥에까지 닿았을 것이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창'은 끝없이 피를 갈구하며 대상자를 찾아왔다. '창'은, 사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창'이 더는 인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오, 하늘에 계신 분이시여. 이 사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땅에 가라앉히든, 물에 가라앉히든, 가라앉은 건 언제고 떠오르는 법이 아닌가. 나는 대상자들이 사탄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최소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러도록 할 것이다. 사탄을 항시 품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오래지 않아.. 그래, 머지않아서. 대상자들이 다시금 사탄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개 무리는 늑대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 법이니까. 그때까지 우리 인간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오래도록 지금의 피에 만족하길. 그래서 가능한 한 늦게 대상자를 불러들이길.



 



"meos tuosque, huc ades"





-fin-


















후기


대표적인 성유물 '운명의 창'을 두고서 실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 종교 소재만큼 영감을 자극하는 게 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색채를 입히면 제 아무리 덜떨어진 수준의 창작물이라도 일견 봐줄만해지는 법 아닌가.


어쨌건, 나 역시 성(聖)을 향한 관음 욕구를 기꺼이 소비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이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의 역할이 종래 다른 창작물들과 다른 노선을 띠고 있는 것에 기꺼워하는 편이다. 그건, 성(聖)스러움을 확립코자 쌍스러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그것을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이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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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생각했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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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















시몬은 생각했다



 



도르르


도르르


도르르르


오늘도 실타래는 풀려 간다.


역사라는 이름의 실타래가.


다음 실타래를 위하여.





그건 1914년 여름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정해 놓은 것처럼, 그저 순서가 되었기에 찾아온 것처럼, 그렇게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젊은이인 시몬도 전장에 발을 딛게 되었다. 과거의, 또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1918년 가을, 프랑스 최북단에 위치한 노르 주. 이곳의 한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해당 전투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본인의 마지막 세계 대전을 치르는 셈이었다. 시몬은 바로 이 전장 한복판에 있었다.


허나, 마지막 전장이라고 위안 삼기엔 일렀다. 시몬이 속한 소대는 부대와 고립된 채 적군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내내 그 망할 놈의 기관총으로 참호 밖으로 내미는 머리통을 쏴 재끼고 있었다. 당연히, 그러한 머리통은 모두 시몬의 전우 것이고 말이다.


아직 머리통이 달려 있는 것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시몬은 이미 한참 전부터 죽음의 내음을 맡고 있었다. 그 내음은 땅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포도밭 향 따윈 진즉에 사라진 이곳 토양, 절망과 손을 맞잡고 춤추던 전우들, 그 전우들을 영양분 삼는 구더기 떼, 세상의 끝과 마주한 채 곳곳에서 꺼뜨리는 비릿한 한숨들. 그러한 것들이 한데 묶인 향이 계속해서 시몬의 콧속을 찔러 대며 유혹을 가해 오고 있었다. '포기'라는 유혹을.


하지만 시몬은 그 유혹과 결코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용감하기 때문에? 아니, 그렇지 않다. 새 떼에게 쪼인 눈알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목이 덜렁덜렁한 시체에서 새어 나온 배설물들의 악취가 공포라는 것을 전염시키는 와중에 용기라니? 그러한 상황을 두고서 용기 운운하는 것들은 필경 지붕 밑에서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그 상스러운 주둥이를 흔들어 대는 치들뿐이다.


시몬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건 바로 무섭기 때문이었다. 시몬 옆의 전우들, 그 전우들의 동태 눈에서 하나 같이 새어 나오는 죽음의 예언. 그게 매 순간 시몬을 두려움에 젖게 하며 포기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 내몰린 시몬은 참호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고막을 찌를 듯한 소리들이 공기를 가르고 시야를 흩트리는 동안에도 시몬은 어쩐지 턱 끝까지 다다른 찬 내음만을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찬 내음에만 집중하고선 달린 끝에 시야로 기관총을 붙들고 서 있는 적군이 들어왔다. 시몬의 시야는 전에 없을 만큼 선명했다. 하얗게 질린 채 한쪽 입이 살짝 뒤틀려선 기관총에다 자신의 운명을 떠넘긴 적군의 모습, 그자의 치켜진 눈썹 위로 난 주름살 개수마저 가늠될 정도였다.


시몬은 품에 쥐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 전방으로 내던졌다. 마치 여적 그것을 위해 살아왔던 것처럼, 그러라고 신이 세상에 내보낸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신속하고 절묘한 투척이었다. 이어 시몬은 적군 진지 내 좁다란 통로에서 달려드는 적군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검을 내질렀다. 아무런 철학도 없는 본능적인 행위였기에 그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시몬 뒤로 광기에 붙들린 눈을 한 전우들이 같은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몬은 살아남았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적군의 단말마가 시몬에게 고향에 돌아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고 있었다. 곧이어 시몬이 활로를 연 덕택에 합류한 본대가 적군에게 응징을 가했다. 한편, 시몬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전우들을 대신하여 잔당 색출 작업에 참여했다. 본대의 배려를 받아 후방에 남아서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시몬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온 것은. 그 남자는 뼈대만 흉물스레 남은 벽담에 한 팔을 기댄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시쳇더미 속에서 죽음을 위장한 채 화를 피했던 것인지 얼굴과 온몸에 핏물 어린 진흙덩이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남자는 적군이었다. 시몬과 비슷한 나잇대의.


잠시 후,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시몬과 눈이 마주쳤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어 사격 자세를 취했고 이에 남자는 심장이라도 떨군 듯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몬은 남자의 눈에서 익숙한 것을 보았다. 죽음에서 빠져나갈 희망 따윈 모두 내팽개친, 그 익숙한 눈빛을. 그렇다. 남자는 죽음을 각오한 게 아니라 희망을 포기한 것이었다.


너무도 뜻밖의,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부닥친 시몬은 그 남자처럼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그저 총부리만을 겨눌 뿐이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재빨리 사방을 확인해 보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군 한 명은 이미 저 멀찍이서 소피를 보고 있었다. 시몬은 다시 총구로 고개를 돌려 남자를 조준했다.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그런 절망감 어린 눈으로.


영겁과 같은 찰나의 그 순간, 시몬의 머릿속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다.



"이봐, 전쟁영웅 씨. 뭘 망설이시나? 쏴, 쏘라고! 뭐야? 왜 그러고 선 거야? 사람 처음 쏴 봐? 잠깐, 지금 사람 처음 쏴 보냐는 농담 제법 괜찮았지?"



전장에 몸을 비비며 이미 씻을 수 없는 피를 온몸에 끼얹은 시몬이지만 그래도 버리지 말아야 할 신념이 있었다. 부상당한 적군과 항복하는 적군을 사살하지 말자는 것 말이다.



"아아, 휴머니티! 이 친구야, 항상 모든 문제의 대다수는 그거 때문에 일어난다고. 전쟁이 다 끝난 거 같지? 네가 보낸 저놈이 언젠가는 네 어미, 네 누이, 그리고 네 아내를 겁탈할 거다. 아니, 어쩌면 이미 네 친척이나 이웃 중 하나를 겁탈했을는지 모르지. 모르는 거야. 요컨대, 저놈은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그럴 거라는 거다. 이봐봐, 너는 자기만 아는 그런 이기적인 놈이었나? 주변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치 않는, 그런 놈팡이였나?"



시몬에겐 무저항의 적군을 사살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건, 불가피하게 살육의 지옥터에 내던져진

처지에 있어 그래도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위안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얼씨구! 이 친구야, 그건 비겁한 자기기만일 뿐이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고작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싶다는 어리광에 불과한 거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저 위의 대리자를 참칭하는 자들로부터 한마디 위로받으면 모두 해소될 것에 불과한 거라고. 네 그 비열함이 나를 악마의 형상으로 만든 건 알지? 어떤 선택을 하든 '악마의 말을 듣지 않았어.', '악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라고 도망가려고 말이야."



시몬에겐 신념이 있었다.



"대단하시군.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난 사람을 죽였지만 신념을 지켰어.'라고 자위할려고? 그런 저열한 위로에 기댄 채 살아갈 건가? 여보, 친구. 이건 기회라고. 저놈을 쏘고서 다시 태어나게. 그럼 너는 네 가족이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마무리를 지은 게 되는 거지. 그 전에 네가 쏘아 죽였던 적군들에서처럼. 그러니 당겨, 방아쇠를 당겨! 너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 되라고! 저놈을 쏘고 완전한 승리를 취해! 명심해,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하면 넌 그저 살인자가 될 뿐이야! 하지만 승리자가 된다면 영웅이 되는 거다! 스스로를 떳떳하게 여기며 평생을 승리자로 살아야 할 거 아냐! 쏴! 쏘라고!"



쏠 것인가, 보낼 것인가. 곧 저기서 아무 고민도 없이 소피를 보고 있는 아군이 돌아오면 그 아군에 의해 남자는 사살되고 말 것이다. 저 아군은 같은 고향 출신의 전우가 죽은 사실을 자신의 모든 행위에 정의를 부여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 그러니 남자를 포착하는 순간 자신의 철학을 완성코자 필경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러므로 시몬은 남자의 운명을 남의 손에 떠넘겨 훗날 후회하는 대신 죽일지 살릴지 직접 결정키로 했다.



"싯팔! 난 인간이라고!"



외마디 내뱉음과 함께 시몬은 총부리를 내리고서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시몬의 심중을 알아차리고선 절도있는 본새로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곤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시몬은, 남자의 뒷모습을 쫓으며 중얼거렸다. 악마야, 입 다물어.


전쟁이 끝나고 시몬은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영웅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남자 역시 전쟁이 끝나고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국가로부터 훈장은 수여받지 못했지만 삶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좋은 거 하나를 얻으면 좋은 거 하나를 잃는 거.


세월이 흘러 1925년 11월 4일.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는 이날 한쪽 발을 저는 남자와 만났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둘은 서로에게 매료됨과 동시에 인정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 이날을 기점으로 그 남자가 한쪽 발을 저는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역사의 실타래는 본래보다 빠르게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만나게 되는 한쪽 발을 저는 남자가 역사의 기점이었던 것이다. 한쪽 발을 저는 이 남자의 이름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





도르르르르





-fin-




















후기


이 이야기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영웅이었던 영국군 헨리 텐디의 일화를 그 모델로 하고 있다.


1918년 9월 28일, 프랑스 노르 주 마르코잉 마을. 영국군 소대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 채 기관총 견제를 받는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국군 병사였던 헨리 텐디가 기관총 진지를 일순 무너뜨려 아군에게 퇴로를 확보하는가 하면 이후 소수의 아군과 포박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총검술로 앞장서 독일군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한편, 이후 상황이 역전되어 영국군이 독일군 잔당을 소탕할 시 헨리 텐디는 도망 중이던 한 독일군 병사와 마주한다. 여기서 헨리 텐디는 '부상당했거나 항복하는 적군은 사살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에 따라 그 독일군 병사를 그대로 도망가도록 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히틀러는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과의 회동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그날 헨리 텐디는 나를 죽이기 한없이 가까운 곳에 있었소.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독일을 볼 수 없겠구나 생각했소. 하지만 신의 섭리는 영국군들이 내게 겨누던 사악한 총부리로부터 나를 구해내 주었소."


최근의 전문가들은 역사적 사료를 들어 히틀러의 이러한 언급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당시 영국군의 전쟁영웅이었던 헨리 텐디가 문제의 전투에서 도망치고 있던 독일군 병사 하나를 신념에 따라 보내 주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서 자신의 존재 당위성과 신화 구성을 위한 일종의 선전으로 그같은 창작을 했다고 본다. 헨리 텐디는 이에 대해 1939년 당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쩌면 내가 놓아 주었던 독일군 병사가 히틀러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그 독일군 병사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삶에 있어 사람에게 보다 중요한 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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