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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그대 커피숍 창가로 악마를 보거든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6.16 15:52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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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커피숍 창가로 악마를 보거든




나는 그날을 처음부터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날은 5월 24일이었어요. 그날 난 커피숍 창가 너머의 악마와 만났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비유나 은유, 시적인 표현으로써의 악마를 말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그자는 일견 악마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말인즉슨 헐벗고 벌그죽죽한 몸뚱이도, 제멋대로에 날 선 치열도, 막 자라 굽어진 손발톱의 모습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악마는 못 봐줄 몰골로 음험하게 나타나는 족속이 아니었던 거죠.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성미 급한 당신이 지금쯤 몸을 들썩이며 지루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2015년 5월 23일. 나는 본가가 있는 경기도 외곽으로 향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고 실질적으론 두 번째 이유로 인한 방문이었다.


이유 첫 번째,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할아버지(늘 사냥감을 막 놓친 호랑이마냥 날이 서 있었다던)는 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 급성 심장정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냥반은 갈 때도 뒤 한번 안돌아보고 갔지.' 아빠가 한 말이다.


이유 두 번째, 독립한 지 4년 반 만에 돈이 다 떨어졌다. 하여 본가에 들러 내가 똬리를 틀만 한 둥지가 있는지 정세를 살펴야 했다. 이유 두 번째에 대한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말하자면, 내 직업은 글쟁이다. ('돈이 떨어졌으면 일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잖아?'라고 중얼거렸었다면 이 대목에서 조금은 납득이 갔겠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글쟁이 직업에 대한 이야기 좀 해볼까 한다. 글쟁이가 직업적으로 갖는 단점이야 모두들 알고도 넘칠 터이니(돈! 돈! 돈!) 남들이 언뜻 모를 수도 있는 장점을 말해보겠다.


먼저, 어느 곳에서든 살 수가 있다. 서울 밖은 물론 도심이 아닌 어느 교외 지역에서든. 이건 어디서건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적 배경에 있어 무척이나 편리한 부분이다. (베개와 책만 주시라!) 글쟁이를 생계수단으로 삼으려는 치들(왜 굳이 이 짓을 하려는 거지?)에게 유경험자로서 하나 조언하자면 가장 좋은 거주지는 부모님 둥지라는 거다. 일단 들어가라. 그리고 골방에서 조용히 지내라. 그럼 해결되리라. (베개와 책 외에는 원하지 마시라!)


하나 첨언하자면, 특히 이 직업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에게 그야말로 감당 못 할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헛된 망상을 붙들지 말 것. 그 재능은 어떻게 파악하느냐고? 경험을 토대로 말해주자면 파악할 시도를 해본 적이 있다면 이미 재능이 없는 거다.


또 하나 장점은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든 좋은 첫인상을 줄 수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이런 식이겠다.



"실례지만, 지금 하시는 일이 뭔가요?"


"아, 글을 쓰고 있어요."


"작가시구나!"



그러면 상대는 이제 밑도 끝도 없는 호감을 보내온다. 당연히 인간적인 호감 부문에 한정해서. 물론 그러한 호감은 내가 무언가를 이룩해서가 아니다. 사실 상대는 내가 어떠한 글쟁이인지 크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호기심에 무슨 종류의 글을 쓰는지야 묻겠다만. 이건 정말이다. 그들이 근본 없는 호감을 품는 원천엔 숱하게 많은 글을 남긴 '오래된 작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신 작가'를 줄줄이 꿰고 있는 괴짜는 거의 없다)


즉, 그들은 나를(혹은 글쟁이인 당신을) 바로 그 옛날 굶주린 주둥이로도 아편은 빨아 재끼며 작품을 완성해간 예술가들로 투영해 보는 것이다. 그네들은 아편 빤 예술가를 삼위일체처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 얼마나 우스운 불로소득인지. 그러니 만약 당신이 글로 돈을 벌고 있다면 이 예술가 선생들이 쌓은 다리 위에서 기꺼이 춤추길. 참고로 나는 앞뒤로 신나게도 흔들어댔다. 끝이 언제 올지 모를 땐 격렬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본가로 향했다. 5-6년 전 유명 작가의 이름을 딴 공모전에서 입상, 내 이름이 딸린 글이 출간, 단군 이래 호황이었던 적이 아직 없다는 출판계에서 신입 작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세를 기록(물론 액수를 본 월급쟁이들은 '그거 정말 못 해먹을 직업이구나'라고 자기 위안이 담긴 동정을 보내겠다만), 인세로 서울에 반전세 집을 장만.


그리고 지금은 글쟁이의 직업으로써 장점인 '어디에서나 살 수 있다'와 '가장 좋은 곳은 부모님 둥지'라는 절대 명제를 깨고서 서울 생활을 만끽하던 이 늙어버린 청춘은 아직 자신의 둥지가 남아있나 확인을 하러 가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별수 있으랴, 사람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결코 현명해질 수가 없는 법 아니던가. 언제든 또 다른 글로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글쓰기 재주가 어디로 떠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모르고 있었던 거다. 그 재능은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내게 남겨진 길은 두 개였다. 사형선고를 받들어 아사할 때까지 미련에 매달리거나, 유배지로 쫓겨나 부자유 속 자유를 누리거나. 4년 반 내내 별 볼 일 없는 연재처들에 궁둥짝을 빌어대며 월세로 보증금을 바람 빼먹듯 구멍 내던 나는 그렇게 본래의 둥지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허나 '최소한 글은 계속 쓸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위안을 위해 부모님께 사실을 전하고 혈정(血情)에 매달려야 했거늘 결국 제사 다음 날까지 끝내 체면치례하던 입속에다 점심밥을 밀어 넣던 나는 민망함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선 황망히 시외버스터미널로 나섰다. 그렇게 집을 나와 시내까지 걸었다. 십수 년 전 등교하던 때처럼 그저 그래야하는 거니까 발을 끌어가며 걸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걸 제외하곤 이제 목적지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시내엔 제법 많은 수의 가게가 존재했다. 헌데 우습게도 몇 년 새 군청 지휘 아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만 그 좁다란 시내에서 보이는 거라곤 커피숍뿐이었다. 그곳엔 내가 아는 대형 커피 체인점과 내가 모르는 대형 커피 체인점이 모두 있었다. 두 걸음 뗄 때마다 커피숍이 나타나곤 했는데 아마 이곳 커피숍 주인들은 매번 자기 옆집 커피숍에 잘못 들어가 한숨을 푹 내쉬곤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킬 게 틀림없었다.


덕분에 내 기분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둥지만 되찾는다면야 어느 커피숍이곤 굽히고 들어가 한자리 차지하고 말 테다. 그럼 본가에 눌러앉아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면책권이 생기리라.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금세 사치와 안락, 그리고 자축을 누리고파 마땅한 커피숍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글쟁이들은 본디 현실감각을 거부하며 사는 법이다)


바로 그때였다. 가게명으로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간판명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긴 조합의 글자로 이루어진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 조합은 외국의 인명 내지 지명 같기도 했는데 간판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이질감'이었다. 입구의 간판명 밑으로 나무 계단이 위로 늘어져 있기에 그것이 2층의 가게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게의 건물 외관 역시 간판명만큼이나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너머의 그 가게를 한동안 넋이 빠져라 보고 있었는데 만약 누가 내게 다가와 저 건물은 아직 나라가 독립한 사실을 몰라 숨어 사는 투사들의 아지트라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만큼 건물의 외관은 너무도 오래된 풍의 양식을 띠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2층 창가로 보이는 높다란 테이블로 보아(그리고 지역색으로 미루어) 그곳이 분명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것을. 허나 가게 안으로 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게는 마치 현지인들의 터부이거나 혹은 너무도 형편없어 찾는 이라곤 옆의 2층짜리 대형 커피 체인점 사장뿐인 것 같았다. 그 사장은 아마 오늘도 계단을 올라 그 가게에 들어섰다가 '아, 제발!'이라는 한탄과 함께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겠지.


나는 곧 내 안의 충동이 무책임하게 설득해오는 것을 느꼈다. 혹시 모르지, 저곳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일지. 보통 그렇잖아? 내가 장담하는데 구약에 나오는 사탄은 바로 이 '혹시 모르지'로 둔갑해선 우리들 속에 똬리 틀고 있다.


그 순간 그 2층 가게의 창가로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손에 컵을 든 남자였다. 내 나이대의(당시 나는 고작 서른하나였다) 사람이 이렇게 표현하는 게 조금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는 젊은이였다. 헤어스타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는 절대로 단정한 옆머리를 하지 않으니까. 옆머리를 단정하게 치면 길거리 공무원들로부터 딱지를 끊는 줄 알거든.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자 마음먹었던 게 그를 보기 전이었는지 아니면 본 후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건 당시 그를 통해 앞으로 있을 도전에 대비해 일종의 평온을 맛본 것만은 확실했다. 설령 저 가게에 들어가더라도 주인이나 손님이 나를 쏘아보며 '대관절 저렇게 어린 놈이 여긴 왜 오는 거야?'라고 중얼거릴 일은 없을 테니까. 노인네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 모두 미덕을 지키지 않는 얼뜨기에겐 조소를 보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비법이니까.


계단에 올라서자 그 끝엔 나무로 된 구식 출입문이(열쇠 하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왔다. 나는 순간 너무도 클래식한 모양새에 기가 죽어선 잠시 문이 자동으로 열리길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문은 제 모습을 유지했고 나는 맥없이 싸구려 도색의 손잡이를 돌렸다.


가게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생각 이상으로 정상이었다. 지나침 없이 정갈한 원목 바닥재, 실용성을 강조한 심플한 디자인의 테이블, 천연화산재로 마감된 벽면, 바닥재를 자연스레 비춰주는 색상의 조명등들(부검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조명이 아니라), 사방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관엽식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책들.


다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건 바로 내 쪽으로 향해 선 노인이었다. 노인은 아내를 떠나보낸 지 족히 20년은 되어 보이는 차림새였다. (이 나이대의 남자들은 결코 아내 없인 사람 많은 곳으로 나서지 않으며 아내가 새로 사주지 않는 이상 마음에 드는 옷만을 주야장천 입어댄다) 비닐 재질의 얇은 단색 재킷과 그 안으로 피케이 티셔츠(본래 색상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는) 차림을 한 노인은 내 쪽을 향해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처음 가게를 두고 했던 고민에 이어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여섯 발자국 앞의 노인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하는. 그냥 자연스레 지나쳐가면 될까? 그러기엔 이 노인이 너무 가까이 있는 데다 테이블 사이의 통로 또한 극적으로 비좁았다. 비켜달라고 할까? 안 돼, 아직 이곳이 노인들의 텃밭이 아니라곤 장담할 수 없으니까. 같은 요청이라도 자기 집 현관문에서 들으면 기분 나빠지는 법이 아닌가.


그렇게 우뚝 서 있던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에(그가 입은 잿빛 기지 바지만큼이나 싸구려로 보이는, 그러나 깃털 같은 몸을 지탱하기엔 충분히 단단해 보이는) 의지해 겨우 눈치챌 만한 느릿한 발동작으로 출입문 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2시간도 전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했던 듯싶다.


나는 이내 문 안쪽 좁다란 옆 공간으로 비켜섰다. 노인은 신중하게 지팡이질을 해가며 경사진 계단을 내려갔고 그 노인으로 인해 그때까지 고민 중이던 내 마음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적어도 이 집 커피엔 저 노인네가 목 부러질 각오로 올 만큼 특별한 게 있으리라.


밝아진 기분으로 다시 눈을 가게 내부로 돌리자 이번엔 창가의 그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는 내가 유령이라도 되는 양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선 노인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팔목까지 어설프게 걷어 올린 진한색상의 데님 셔츠에 검정 슬랙스 밑단으론 복숭아뼈가 깡총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책장 바로 옆에 위치한 테이블 아래에다 짐가방을 끌어다 놓은 뒤 조금은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카운터를 향했다. 가게엔 손님이 나 하나뿐이었으며(주인인지 직원인지도) 카운터 바로 앞 우측의 목제 기둥에는 벽걸이용 블랙보드 메뉴판과 스피커가 자리하고 있었다.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즈풍 노래가 흐르던 90년대풍 싸구려 스피커에서 글렌 밀러의 '문라이트 세레나데' 전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남자가 싱거운 어조로 내뱉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내 눈에다 시선을 맞춘 상태에서(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정확한 발음의 저음을 내놓았기에 무뚝뚝함보단 정중함에 가깝게 느껴졌다. 남자의 본새가 제법 멀끔했기에 긴장과 더불어 의구심도 풀렸던 나는 그러나 시외교통비만 한 가격표를 확인하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우라질, 커피값 받는 거로 건물 외관을 뜯었어도 열두 번은 했겠네. 그래도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영 손해는 아닐 것이다. 저 많은 책 중 봐줄 만한 거 하나는 있을 테니까. 


남자는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주며 커피는 자리로 갖다 주겠노라고(거, 참. 편리하군) 했다. 나는 손님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굉장히 상투적인 목 돌림으로 가게 이곳저곳을 채점하고는 이내 책장 앞으로 갔다.







남자가 테이블에 프러시안 블루색(그럴듯하게 들리지?) 컵을 내려놓고는 쌩하고 돌아갔다. 나는 <목수들이여,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란 책을 마저 꺼내 든 뒤 의자를 바짝 붙여 앉았다. 컵 안엔 진한 색상 위로 하얀 하트가 사무적이게도 수놓여 있었다. 어쨌건 맛은 좋았다. 그건 인정해야겠다. 내 취향에 거의 근접한 달콤쌉싸름이었다. 에스프레소가 영 저질은 아니었나 보다.


커피 맛도 괜찮고, 손님도 들지 않아 평화롭고, 친근한 척 말 건네는 가게 주인도 없고, 모든 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다. 그렇게 절로 콧소리를 내며 잔을 반쯤 비우곤 책 속 주인공이 결혼 당사자가 불참한 결혼식장에 당도한 부분을 읽어내려 갈 때였다.



"커피 맛은 괜찮나요?"



어느새 맞은편으로 자리를 차지한 남자가 꼭 짐짓 꾸며내는 듯한 어조로 쾌활히 물었다. 마치 투덜대며 눈 치우러 나왔다가 이웃집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나는 어설픈 미소로 그렇다고 대답함과 동시에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남자는 내 완곡한 의사 표시에도 아랑곳 않고선 어느새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친근한 척 말 건네는 가게주인도 없고'는 정정해야겠다)



"..임대료가 좀 부담이 돼야죠. 이럴 거면 뭐 한다고 이런 깡촌까지 내려왔는지.. 사실 여기 목도 내 입장에선 힘에 부치거든요. 세상에 귀신보다 무서운 게 부동산이라더니. 잘하는 거 없는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세상이 개만도 못하니 개 같은 것들만 판을 치고."


어느새 나는 책장을 덮고선 남자를 향해 적당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자는 내 또래로 보였으나 분명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인 듯했다. 상대에게 사적인 불평을 털어놓으면서도 묘한 카타르시스와 유쾌함을 느끼게 하려면 천성적인 말재주 외에 남이 하지 못한 경험이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가게 문 열고서 처음으로 온 손님이 아까 그 노인네였다니까요. 환장하겠는 건 매번 이런식 이라는 거거든요. 노인네 냄새 가까이서 맡아본 적 있으세요? 죽음의 냄새가 뒤엉킨 찌릉내. 그런 사람들이 여기 손님의 다라니까요. 아, 내가 뭐 나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던가 그런 건 아닌데요.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은 도통 원하는 게 없다는 거예요. 마음속에 '바라지 않는 것들'만 가득 차 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그런 사람들 싫어요. 아주 질색이거든요. 사람이라면 자고로 원하는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죠. 언제 어느 때라도요. 그래서 난 노인네들이 여기 오는 거 싫어요. 그 사람들은 '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여기 깡촌 것들도 죄다 마음에 안 들어요. 실은 도시 것들도 그렇지만요. 사람들이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알아요? 아침 되면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노인정에 갔다가 밤이면 집으로 기어가고. 자기 일 외에는 모든 게 스스로 굴러간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워낙 등신들인지라 정치라면 대통령 인기투표가 전분지 알죠. 사내새끼들은 그저 쑤셔댈 곳 없나만 생각하고 기집들은 TV에다 인생을 허비하고요.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것들이에요. 서서 싸냐 앉아 싸냐만 빼고 죄다요. 거짓말 아녜요. 남자든 여자든 하는 거라곤 마냥 배부를 때까지 입속에다 뭐든 쳐넣는 거라니까요. 지가 뭘 원하는지도 몰라요. 잊어버리기로 했거든요. 먹고 자기 위해 사는 주제에,

그것밖에 생각하는 게 없으면서 겉으론 지들이 어찌나 괜찮은 사람인 척들을 하는지! 그거 범죄예요. 우리끼리 법전에다가만 써놓지 않기로 한 거지 범죄라니깐요.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모든 범죄가 나쁜 놈이 저지르는 게 아니라고요. 담배만 몸에 해로운 게 아니라고요. 하긴 어쩌겠어요. 인간이 본래 죄 많은 동물로 살아야 하는 법이잖아요. 그래야 구원받거든요. 성경에 나온 것처럼요."



나는 식어버린 컵을 의미 없이 돌려대며 적당한 웃음으로 계속해서 반응해주었다. 남자가 무슨 말을 더할지 사뭇 궁금했기 때문이다. (본디 극단적인 게 재미있는 법이다) 비록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있더라도 어쨌건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남자의 말본새를 보고 있자니 적잖이 유쾌했다.



"손님, 책 아주 좋아하나 보네요?"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실은 글 쓰는 일 하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한 나 자신에게 적잖이 놀랐다. 상대가 끈덕지게 물어오지 않는 이상(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다. 빌어처먹을 세무원 같은 것들) 글을 쓰는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 이후의 뻔한 레퍼토리들('책도 냈나요?', '뭐에 대한 거예요?')이 언제나 나를 꽤나 우울하게 만들어서였다. 그들은 뻔한 질문을 하고 뻔한 표정과 뻔한 생각으로 나를 본다. 마치 광대를 광대로만 바라보는 것처럼.



"오, 작가님이셨네."



남자가 한 차례 입꼬리를 양옆으로 길게 늘어뜨리곤 말했다.



"사실 그쪽이 가게에 왔을 때부터 알았어요. 작가님한테 원하는 게 있다는 걸요. 그래서 작가라는 대답에 별로 놀라지 않았지."



잠시 이게 무슨 말인고 눈알을 굴리고 있자니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그쪽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는 작게 '그렇군요.'라고 대꾸하고는 좌우로 컵을 돌려대는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쟁이이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언제나 환영이지만 그 주제가 나를 향할 경우엔 정말이지 사양이다. 더구나 그게 훈계조라면. 차라리 얼굴에 침을 맞는 게 낫지.



"저기요, 의미 없는 짓 좀 그만 해요. 이미 사는 동안 충분히 그랬을 거 아녜요."



잔을 돌려대던 내 손목을 짓누름과 동시에 남자가 쇳소리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의 손 마디 마디는 보기 좋은 것을 떠나 다소 괴상할 만큼 기다랗고 가늘었다. 그리고 손목에 느껴지는 감촉은 그 옛날 초등학교 과학 시간 개구리 배때지를 갈라보라는 선생님의 엄포에 떠밀려 쥐었던 메스 손잡이를 떠올리게 했다.



"내 얘기했으니까 이제 작가님 얘기도 해봐요. 토요일 대낮부터 쫓겨난 행색으로 젊은 사람이 다 무너져가는 외벽 안으로 기 들어온 이유요."



손목에서 손을 뗀 남자가 재차 쇳소리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동시에 내 머릿속에선 성난 눈알로 개구리 배때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쏘아대며 '그어! 그으라고!' 명령하던 과학 선생의 음성이 떠올랐다. 나는 짐짓 꾸며낸 동작으로 허리를 반쯤 추켜세우곤 카운터 너머의 벽시계를 훑는 척했다.





2시 19분에서 20분으로 가기 직전.



"..이제 가봐야 돼서, 시외버스 타야 하거든요."



나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짧게 내뱉고는 고개를 떨군 채 짐가방을 챙기기로 했다. 맞은편의 남자와 같은 부류들을 꽤나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이유를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사유로 탈바꿈하는 치들. 시비를 걸어도 될법한 상대에게라면야 뭐든 시도하는 치들. 그러한 분노로만이 스스로를 가치평가 할 수 있는 치들. 세상의 대다수가 그와 같은 얼치기들이기에 나는 그런 부류를 꽤나 잘 안다고 확신한다. 내가 컵을 돌려대서? 호응이 시원찮아서? 웃는 게 비웃는 것처럼 보여서? 뭐든 좋다. 어떤 것이든 이유가 될 수 있으니까. 임대료만큼 손님이 들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남자에게 있어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남자가 이유 두세 개를 더 만들어내기 전에 적당히 둘러대곤 도망치는 꼴로 피해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몸을 숙여 테이블 밑을 사방으로 둘러봐도 짐가방이 보이질 않았다. 짐가방은 남자의 옆자리에 놓여있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양손(손가락이 거의 손목뼈에 닿을 정도였다)을 하고 있었다.



"시외버스 타러 가야 한다니까요.. 지금 안 가면 시간을 제때 못 맞춰요."



내 목소리가 어쩐지 애원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들려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왔다. 남자는 내 말에 과장스레 감탄과 웃음소리를 꾸며내고는 답했다.



"작가님이라서 그런지 말을 재밌게 하시네. 저기요, 그렇게 시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행색으로 이런 싸구려 건물을 왔다 갔다 하는 처지가 됐을까요? 도대체 그 티셔츠랑 신발은 뭐예요? 어디 가면 돈 주고 살 수 있는 거예요? 옌병, 그 바진 차라리 아까 나간 노인네 쪽이 더 세련됐네."



순간 발가벗겨진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황급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벗겨진 치부들을 그나마 가릴 수 있도록. 남자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사뭇 인자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름 대신에 작가님이라고 계속 불러도 되죠? 언제나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요즘 글은 잘 써져요?"



나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소가 아닌 웃음을 터뜨린 건 거진 1년하고 3개월 만이었다. 내 눈가는 순식간에 불그스레 물들었다. 글이 잘 써지냐는 물음을 들은 것 역시 1년하고 3개월 만이었으니까.



"4,506자, 4년 동안 내가 쓴 차기작 단편의 글자 수예요. 남들 하는 거 따라 하며 살려고 쓴 연재 글의 글자 수는

그 수십 수백 배가 되겠지만요."



내 목소리가 마치 쥐 새끼가 구녕으로 꽁무니를 뺄 때 낼법한 요상한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그거참.. 힘들었겠네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음성, 눈빛, 표정에는 어떠한 불순물도 첨가물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콧잔등까지 벌게져선 연신 콧물을 먹어댔다.



"4년 동안 혼자 그렇게 싸운 거예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당시 내 또래들이 그랬듯 동네 태권도 도장에 다닌 적이 있다. 본래 태권도가 끝나면 봉고차에 태워져 집 앞에서 내려야 하거늘 언젠가는 같이 다니던 친구 놈 집 앞에서 내린 적이 있다. 그놈의 오락기 있다는 말에. 친구 집에서 놀고선 집에 가기 위해 차도 하나를 건넌 적이 있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 엉엉 짜면서 엄마한테 말했었다. 친구 집에서 놀고 혼자 차도를 건너왔다고. 적잖이 혼날 걸 각오했었던 나를 엄마는 살짝 안아주고는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혼자서 차도도 건너고 대단하다면서. 마치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가 나를 감싸 안듯 물어온 게. 그러자 우습게도 나는 여지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이들 앞에선 스스로를 만들어내느라 감히 할 필요가 없었던 내 사생활에 대해서 말이다.



"그걸 다 말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테이블 위로 냅킨을 집어 들어 흘러내리는 콧물만 살짝살짝 닦아내며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여긴 올라오는 계단이 많아서 노인네들이 오려면 입구에서 안쪽까지 족히 1시간은 걸릴 거거든요. 그거 보단 길지 않죠? 그럼 좀 곤란해서."



웃음보가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나는 웃음보를 참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예요. 그러니까 국민학교 때죠. 학교에 검프라고 불리는 애가 있었어요.."



이어 작당을 모의하는 소년들처럼 서로를 마주 보던 중 내가 말했다.



"야, 포레스트 검프!"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소리가 난다 싶으면 그곳엔 항상 검프가 있었다. 학교의 공식 지정 바보였던 검프. 뭔가 짜증이 난다거나 재밌는 게 보이지 않을 땐 남자애들은 검프 뒤로 살그미 다가가 참으로 호쾌하게도 뒤통수를 갈기곤 했다. 여자애들은 눈만 마주쳐도 앙칼지게 쏘아붙여 댔는데 그래도 그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단 나았으므로 검프는 주로 여자애들 근처를 서성였다.


나? 나는 아마 유일하게 학교 남학생 중에서(동급생 중에서) 검프의 뒤통수를 갈기지 않는 애였을 것이다. 그건 정의감에서가 아니라 쑥스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철부지에다 까불이인 동시에 어떤 부분에선 기벽이라고 할 만큼 애어른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있어 검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건 마치 반 애들 앞에서 춤을 춰대는 것과도 같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괴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쨌건 앞장서서 검프를 놀려대거나 뒤통수를 갈기지 않으면서 남자애들끼리의 암묵적 증표를 마다한 나였으나 다행히 그걸 꼬투리 잡는 애들은 없었고 따라서 내 뒤통수도 무사할 수 있었다. 애들은 철부지 까불이 또는 괴짜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검프는 바보였는데 당시 우리끼리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 바보'는 아니었다. 반에서 꼴찌는 도맡았지만 그 앞의 녀석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말이 어눌하고 행동거지가 둔했지만(물론 이따금 침도 주르륵 흘리고) 그것 빼곤 사실 특별하게 우리들과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무렵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미 바뀌었었다) 때였다. 우리는 달마다 짝꿍을 바꾸곤 했는데 그 날은 짝꿍 바꾸는 날 전일이었다. 종례시간이 모두 끝나고 떼 지어 나가는 애들 틈에서 나를 끄집어낸 담임선생님이 살며시 말했다.



"잠깐 남아서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할래?"



본디 반 남자애들과 곧장 축구시합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나는 남자들끼리의 신뢰를 그 자리에서 팽개치곤 얌전히 선생님을 따라 다시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선생님은 학교에서 가장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보기 좋게 각진 얼굴 가운데로 진하고 얇은 눈썹에다 항시 구불거리는 풍만한 머리채를 단정히 치켜 묶고 다녔으며 가끔씩 청바지를 입기도 했다. (당시 선생님이, 특히나 여선생님이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온다는 건 애들에게 있어 쇼크에 가까웠다.)


또, 선생님에게선 늘 좋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그래서 우리 반 여자애들은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다. 비록 내색하지 않느라 애들을 써댔지만 그건 남자애들도였다. 학교 최고의 덩치이자 말썽꾼이었던 녀석도 선생님 앞에선 곧잘 생글거렸을 정도였다. (우리는 녀석의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오싹함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 선생님이 반장도 부반장도 아닌 나를 따로 불러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선생님은 교실 한 가운데 자리에 나를 앉히고는 자신은 그 앞자리 의자에 몸을 거꾸로 돌려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어른이 우리처럼 그렇게 의자에 앉는다는 게 참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뭐든 들어줄게요!) 재욱이 있잖니. (아, 검프 놈이 왜요?) 내일이 짝꿍 바꾸는 날인데 재욱이랑 여기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



나는 선생님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그 깨끗하고 반질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평소처럼 '이달의 불행한 아이'가 나올 때까지 종이 뽑기로 짝꿍을 정하거나(그렇게 불행한 아이가 된 여자애는 책상에 금을 긋곤 검프 놈이 움직일 때마다 기겁하기 일쑤였고 남자애가 짝꿍이 된 날엔 이따금씩 퍽 하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아니면 안경잽이 반장 부반장 중 하나를 시키면 될 일 아닌가?



"선생님은 네가 재욱이 짝꿍이 돼서 선생님이 말한 것들을 해줬으면 좋겠어."



선생님이 내 카라 한쪽을 바로 잡아주며 말했다.



"왜요?"



억울한 마음을 감추느라 다소 괴상해진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뒤통수를 갈기지 않는 것과 짝꿍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건 비밀인데.. 선생님은 너를 제일 좋아하거든. 이 학교에서 제일로. 다들 재욱이를 싫어하지? 그래서 너희들에겐 이게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잖아. 그러니까 선생님은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선생님은 제일 좋아하는 애를 제일로 믿거든. 선생님 부탁 들어줄래?"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생님이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팔을 움직일 때마다 말도 안 되게 좋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이어 선생님은 나를 똑바로 향한 채 눈과 입으로 환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날 조회 시간. 종이 뽑기를 하기도 전에 나는 검프 놈 옆자리에다 가방을 폈다.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검프 놈의 짝꿍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애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 일제히 나를 둘러싸고선 위로를 건네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나는 위로를 받을 만큼 슬프지가 않았다. 아니, 실은 기쁘기까지 했다. 선생님이 누구를 제일 좋아하는지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검프 놈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때마다 점잖게 꾸지람을 놓았고 급식 시간에는 반찬을 남기지 않도록 감독관 역할도 수행했다. 그리고 남은 학기 내내 검프 놈과 짝꿍을 자처했으며 졸업식 날 선생님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얼굴로 나를 꼭 안았다.


짝꿍을 정하는 날 전일, 선생님은 내게 가장 완벽한 미소를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게 주었던 건 하나가 더 있었다.


짝꿍을 정하는 날, 저마다 위로를 건넨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갔을 무렵. 한 여자애가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와선 무섭도록 깨끗한 눈동자를 한 채 또렷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너 진짜 멋지다. 정말로."



그 애의 이름은 김초현이었다. 하지만 남자애들은 그 애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그 애를 '로보캅'이라고 불렀다. 그 애는 5학년 때 전학 왔다. (그때도 같은 반이었다) 처음 그 애가 교실에 나타났을 때 우리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우뚱 기우뚱



그녀는 선생님을 따라 좌우로 양어깨를 갸웃거리며 한 발 한 발 큰 걸음으로 교탁까지 나아갔다. 교통사고가 그녀에게서 너무 빨리도 커다란 걸 앗아간 셈이었다. 애들은 그 애를 놀려대지 않았다. 적어도 앞에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맘 편히 놀려 먹을 수 있는 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검프 놈 놀리기에도 지칠 때면 남자애들은 지나가는 그 애 뒤를 쫓아가 걸음걸이를 흉내 내곤 키득거리기 일쑤였다. 더불어 남자애들끼리 그 애를 입에 올릴 때면 반드시 '로보캅'이라는 지칭으로 불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애를 사랑하는 거로 간주되었고 그건 초등학생 남자애에게 있어 너무도 큰 형벌이었다.


물론 여자애들은 그러한 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가 결코 인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애는 집이 가까운 둘 셋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친구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물론 그 애의 신체적 특성으로 인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어른스러우면서도 깐깐한 성격 또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검프 놈 건으로 그 애가 내게 말을 건네기 전까진 나는 그 애와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으면서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인상 깊은 기억 두 개는 가지고 있었다. 남자애들이 자기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걸 분명히 알아차렸음에도 그 애는 뒤돌아본다든지 자리에 멈춰 울음을 터뜨린다든지 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 애는 언제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갈 뿐이었다. 고개 전방, 힘차게. 기우뚱 기우뚱


다른 하나는 그 애가 친구 둘과 함께 하교할 때의 일이었다. (사실 그 애는 우리 아파트 뒷동으로 이사를 왔었다) 그날 난 같이 하교하던 친구 놈이 청소 당번이었던지라 홀로 가던 중 우연찮게 동행 아닌 동행을 하게 되었다. (물론 여자애들이랑 같이 가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충분히 거리를 두고서) 동네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커다란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서 그 애 옆의 한 여자애가 지극히 꾸며낸 듯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초현아, 찻길 건너고 할 때 무섭거나 그러지 않아? 그러면 말해. 우리가 손잡아 줄게."



그러자 그 애는 여전히 맞은편 신호등에다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마치 엄마가 자식의 물음에 답하는 듯한 어조로.



"교통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들 중에서 자주 일어나는 거에 포함되는 게 아니야. 나는 이미 한 번 겪었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어. 게다가 다리 한쪽만 저는 정도라 나쁜 일 중에서도 좋은 일이었던 거고. 살면서 있을 나쁜 일을 이렇게 미리 운 좋은 수준으로 끝냈으니 다행이지."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애와 또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 된 거였다.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일은 학기 초 담임 선생님의 주관으로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급격한 변화와 새로운 만남을 맞닥뜨리게 된 아이들은 저마다 터질 듯 불안한 마음을 감춘 채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소개 발표 시간을 소화해야 했다. 여기엔 난관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과 함께 자신의 별명을 소개하는 게 그것이었다. 아마 구시대적 발상에 매인 담임은 그게 더할 나위 없는 친교의 역할을 하리라 믿었던 듯싶다. (아니면 그저 생각 없이 전통을 따르던 거던가)


나는 그 시간 내내 가슴 한편이 짓눌러지듯 불편했다. 그건 그 애의 발표 때문이었다. 그 애가 걱정스러워서라기보단 그러한 난감한 상황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게 영 껄끄러워서였다. 그래서 속으로 담임을 어찌나 욕했는지 모른다. 그 애의 차례가 되고, 그 애는 자리에서 삐딱이 일어나 교탁으로 걸어 나갔다. 고개 전방, 힘차게. 기우뚱 기우뚱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 애의 다리 쪽으로 쏠렸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도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배가 땅겨와 잠시 상반신을 수그려야 할 정도였다. 기우뚱 기우뚱


그 애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별명을 발표(?)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였다. 1, 2초간 반 아이들을 좌우로 훑고는 그 애가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제 별명은 로보캅입니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든요. 아마 이 별명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다친 쪽 다리가 더 이상 좋아질 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의사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면서 겪을 큰 고통을 미리 겪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걸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남이 주는 것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저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든 저 스스로를 보는 눈은 변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연이어 박수 소리를 내는 가운데 쑥스러운지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선 잰 보폭으로 자리로 돌아가던 그 애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 연설(난 그게 감히 연설이었노라고 생각한다)로 그 애가 인기스타가 되었던 건 아니었다. (학교에선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법이다) 그 애는 여전히 여자애 둘 셋하고만(그중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 같이 다니던 애였다) 어울려 다녔다. 다행히 그 애를 로보캅이라고 놀려대거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남자애들도 없었지만 그건 그날의 연설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도 이젠 연민이라는 감정을 학습하게 되는 시기여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건 그날의 연설을 가슴 속에 품게 된 아이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나와 그 애가 학교에서 어울리는 일은 여전히 없었지만 같은 학원에서 만나게 된 걸 계기로

이따금 동네에서 마주칠 때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애는 한마디로 말이 통하는 동지였다. 어떤 주제로든 우리는 즐겁게 대화를 이어갈 수가 있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동네에서 마주쳤을 때 우리는 동네 청과점에서 맥주 한 캔씩을 사 예전처럼 놀이터 구석 벤치에 앉아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재미있는 건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마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꽤나 가치있게 생각했던 것 같고 그럴 때의 감정을 잃게 되는 게 싫었나 보다.


군 입대를 이틀인가 남겨두었을 때 그 애와 마주쳤던 게 기억이 난다. 그 애는 내 밤톨 머리를 보곤 모든 걸 깨닫게 되었는지 꽤나 오랜만에 마주쳤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중학교 때 자기소개 시간에 자신의 차례가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일순 지었던 그 표정과 똑같았다. 그날 헤어지던 때 그 애는 마치 지가 내 어미라도 되는 양 양손으로 내 얼굴을 살며시 감싸고는 힘주어 말했다.



"가서 잘 지내야 돼."



나는 그 애가 한 말을 지켰다. 다친 데 없이 제날짜에 제대했으니까.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공모전에서 입상 후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날 오랜만에 고향의 동네를 거닐다가였다. (내 부모님은 내가 군대에 있을 당시 전원생활을 위해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했었다) 은행원 같은 차림새의 여자가 저 멀리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기우뚱 기우뚱 나는 정말 발작적으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고 뒤를 돌아본 그 애는 언제나처럼 큰 보폭으로 갸웃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고개 전방, 힘차게.


그녀는 고향 동네에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놀이터 벤치에서 몇 캔이고 맥주를 깠다.


얼마 후 내 첫 책이 제법 히트를 치고, 나는 고향 동네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곳에다 반전세 집을 구해 들어갔고,

그 애는 이따금, 아니 종종 내 집을 방문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됐다. 그 애는 내 어미였으며, 내 아비였고, 내 누이였으며, 즐거운 벗이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어루만져주고픈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애는 내 청춘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즐거운 것에는 그 끝이 더 빨리 있는 법이다. 4년간 어떠한 창작도 해내지 못한 내게 어느 날 그 애가 걱정을 억누르지 못하고서 글이 잘 써지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걸 공식적인 내 사망 진단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 책과 같은 것을 몇 개는 만들어낼 줄 알았다. 결코 자만도 과신도 아니었다. 재능이란 어디로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결국,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지금 그 애와 헤어진다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자가 속 좁게도 여자를 몰아세우곤 헤어지게 되는 꼴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 그 애와 헤어진다면 여자는 헤어진 연유를 자신에게로 몰아세울지도 모른다.


시간이 되기 전 첫 번째만큼의 작품 몇 개를 더 내놓고 금전적 여유를 잡을 수 있었다면 아무 걱정 없이 그 애와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고개 전방, 힘차게. 하지만 이제 금전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고스란히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건 '행복'이었지 '만족'이 아니었다. 우리 둘이 스스로와 서로를 기만하며 시간 바깥에서 숨죽여 지내길 결코 원하지 않았다. 끝내 시간에게 들켜 다시 안쪽으로 끌려와 비참한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인간다운 게 아니니까. 그럴 바엔 강바닥에다 몸을 던지는 게 낫다.


그녀를 앙칼지게 밀어낸 지 1년 3개월. 그간 나는 지리한 미련을 감히 떨쳐내지 못하고선 매일 점심시간 그 애가 일하는 우체국 앞으로 향했다. 그리곤 식사 후 돌아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10여 초가 내 변하지 않는 일과였다. 그녀 역시 매일같이 돌아가는 길에서 나와 10여 초간 눈을 마주치는 게 일과였다.


그렇게 우리 둘은 무언의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는 그게 그녀 또한 내가 그녀를 밀어낸 연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도 내 재능이 다시금 세상에 팔리기 시작하면 끊겨진 시간을 이어붙일 수 있으리라 생각할 거라고 직감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허나 나는 이제 곧 그녀를 실망시키게 되리라. 나는 시간 바깥으로 줄행랑을 치고자 마음먹었으니까. 나 하나뿐이라면 언제까지고 바깥에서 숨죽인 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미련을 모두 저버린다면 말이다.



"..참, 현실적이라 더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침 삼키는 걸 이제야 떠올렸는지 남자가 목젖을 한 차례 상하로 흔들고는 말했다.



"본래 뻔한 게 제일 안타깝고 슬프고.. 그렇더라고요." 



거의 바깥까지 흘러내린 한쪽 코를 냅킨으로 훔치고는 내가 말했다.



"작가님, 내 생각에요.. 만약 금전적인 상황이 괜찮은 수준이었다면 작가님은 아주 행복할 수 있었겠죠?"



잠시간 뜸을 들이곤 남자가 말했다.



"그렇겠죠. 그 애랑 같이 있으면서.. 또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엄청 행복할 수 있었겠죠."



잠시간 뜸을 들이곤 내가 말했다.



"덤으로 그 여자분 다리도 멀쩡했다면 더 좋겠고요. 그쵸?"



남자가 말했다.



"덤이 너무 커요."



내가 말했다.



"작가님, 만약에요. 내가 그 두 가지를 이뤄주면 어쩔 건가요?"



남자가 말했다.



"좋죠, 그러면."



내가 미소를 참지 못하고선 말했다.



"'어떻겠습니까'가 아니라 '어쩌겠습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면 어쩌겠습니까?"



남자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그쪽이 원하는 걸 해야겠죠."



나도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뭐로 받아가야 하나.. 분명 경쟁업체가 이런 걸 급여에서 10% 떼가는 형식으로 일하곤 하는데.. 사실 나는 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시간'이죠. 좋아요. 역시 시간이 좋겠어요. 작가님의 행복한 시간, 그 시간을 아주 조금만 나눠주세요. 약속하면 작가님에게 아까 말한 걸 이뤄줄게요."


남자가 미소를 거두곤 말했다. 나는 장난스레 그러겠노라고 맞장구치곤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아 몇 차례 흔들어댔다. 무언가를 털어놓으니 그래도 잠시간은 후련했고 이 모든 불행이라 생각했던 게 고작 세 치 혀로 설명이 가능하단 걸 깨달으니 깊은 곳에서 힘이 솟구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 애 생각이 났다. 오늘 내가 갑자기 모습을 안 보인다면 걱정할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럼 그 애는 내 의중을 판단하고 존중하느라 끝내 쥐고 있던 가느다란 실뭉치를 그대로 놓아버릴지 모른다. 비록 그게 단 하루뿐일지라도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그 애가 단 하루라도 슬퍼지는 게 더는 싫었다.


카운터 너머로 시간을 확인했다. 서두른다면 시외버스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그럼 퇴근 시간 전에 우체국에 모습을 비출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말하리라.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기다려보라고. 너와라면 언제 어디서든 춤을 춰도 쑥스럽지 않다고.


나는 남자에게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덕분에 즐거울 수 있었다고, 지금 당장 시외버스를 잡으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말 없이 옆자리의 짐 가방을 번쩍 들어 테이블 위로 사뿐히 내려놓았다. 나는 짐 가방을 낚아채듯 쥐어 들고선 그대로 달려나갔다. 고개 전방, 힘차게.


택시까지 잡아타고선 내리자마자 숨도 돌리지 않고 뜀박질을 했건만 매표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차량 출발 시간을 5분은 넘긴 때였다. 나는 막연한 기대를 붙들고선 표를 끊어 플랫폼으로 내달렸다. 드센 숨을 몰아쉬며 손에 들린 표가 그 너풀거림을 멈췄을 때 본디 없었어야 할 차량이 태연히 그 자리에 정차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량 바로 옆에는 전형적인 운전사 복장을 한 남자가 가느다란 담배 하나를 입에 물어 연신 자신의 생명줄을 뿜어내고 있었다. 표를 보인 나는 허겁지겁 차 안으로 기어들어 가 자리에 날리듯 몸을 던졌다.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있나. 내게서 발작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몇 차례 터져 나왔고 가짜 구찌백을 동여맨 옆옆 자리의 아줌마가 그런 나를 흘기듯 쳐다보았다. 아줌마,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있을까요.


이내 둔탁한 엔진음과 함께 덜컹거리며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이 빠져버린 나는 몇 분 안 있어 꾸벅꾸벅 졸아대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번은 몸을 크게 들썩이며 얕은 잠에서 깨어났던 나는 마침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나는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다는 걸 느꼈다.


다음 순간. 눅눅한 느낌이 전해지는 눈꺼풀을 한 번, 두 번 들어 올리자 그곳엔 낯선 풍경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낯익은 풍경이 들어왔다.


낯선 풍경, 어느 모로 둘러봐도 병원이었다. 개인 입원실. 군데군데 색이 다소 바랜 흰색 벽지, 전형적인 색상의 목재 사물함, LCD 텔레비전, 가정용 절반 크기만 한 냉장고,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볕,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바짝 붙어있는 간이침대.


그리고 낯익은 풍경. 그 애였다. 그 애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 내 쪽으로 날듯이 뛰어와선 너스콜인지 뭔지를 미친 여자마냥 두드려댔다. 손을 쫙 펴선 인정사정없이 퍽. 그래 맞다, 남자애들이 검프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때도 저렇게 손을 쫙 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 애가 뛰어왔을 때, 그 애는 전혀 기우뚱거리지 않았다. 내 얼굴 위로 자꾸만 눈물 덩어리를 떨구며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는 순간에도 그 애는 전혀 갸웃거리지 않았다. 청바지 너머로 그 애의 탐스러운 허벅지 탄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영문을 몰라 그 애를 위아래로 훑고는 그저 따라서 눈물만 떨궈댈 뿐이었다. 이게 무어냐. 이게 무슨 운수 좋은 날이냐.


그렇게 수 초간 정신을 못 차리고서 뜻 모를 감탄음만 내뱉던 때였다. 웬 조그마한 여자애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양손으로 내 손목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선 손등에다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놀라서 한차례 숨을 훅하고 들이마시며 내가 쳐다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눈과 코를 한 그 여자애가 오물오물 입을 놀리며 말했다.



"아빠가 일어났어."



낯익은 얼굴들. 엄마, 아빠, 누나, 그 애, 그 애의 부모님, 그 애의 여동생. 처음 보는 얼굴. 좀체 내 손을 놓으려 하지 않는 조그마한 여자애.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런 모두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 흰색 가운 물결들을 꼬리처럼 달고 온 소갈머리 희끗한 의사. 의사가 내 초점에다 시선을 맞춘 채로 뜻 모를 말을 이어나갔다.



"환자분,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죠?"


"2015년 5월이고.."


"네, 그리고요?"


"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을 말해볼래요?"


"..5월 24일, 버스를 타고 있었어요. 시외버스요. 거기서 잠깐 졸았는데.. 근데 깨보니까 여기고.. 옷차림들을 보니까 겨울인 것 같고.."


"네, 환자분. 보호자분들 동의가 있었으니까 지금 상황을 모두 말해드릴게요. 오늘은 11월 7일입니다. 근데 2015년이 아니고 2017년이에요."



평소 많이 자는 편이긴 하지만 2년 반은 조금 너무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이 하나둘 방정맞게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 의사 말이 사실인가 보다.



"..교통사고가 나서 2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있었던 거네요."


"아니요. 환자분,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오늘이 9일째예요. 환자분 2017년 10월 29일 자택에서 저녁 식사 도중

의식 잃고 쓰러져서 여기로 입원하신 거예요."



무슨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건가 싶어 기가 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둘러싼 이들은 여전히 코만 훌쩍이고 있었다. 여자애는 '아빠가 갑자기 넘어져서 엄마랑 119 불렀어.'라고 오물거렸다.



"환자분, 환자분 병명은 뇌동정맥 기형입니다. 아마 들어본 적 없을 거예요. 0.1% 미만에게서만 나타나는 희귀병이거든요."



희귀병이라는 말에 일순 오금이 저린 나는 여자애에게 붙잡혀있던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쉽게 말씀드릴게요. 우리 몸은 동맥, 모세혈관, 정맥의 혈관을 거쳐서 피가 공급돼야 합니다. 그런데 환자분 뇌 뒷부분에서 손톱 반만 한 크기의 혈액이 응고해버린 거예요. 굳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자,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쪽이 막히니까 뇌에서 모세혈관을 거치지 않고 동맥에서 정맥으로 그대로 연결되면서 문제가 생기겠죠? 이게 뇌동정맥 기형입니다. 왜 이런 병이 생기는지는 현대 의학에서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아서 원인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여기까지 이해가 가셨죠? 이 병 때문에 환자분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지금 혼동하고 계신 거예요. 환자분 혼수상태에 있던 게 2년이 아니라 9일이에요. 뇌가 잠시 손상을 입어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에

이제 쉽게 말해 컴퓨터처럼 오류가 났다가 덮어씌워진 거죠. 환자분 지금 수술이 아주 잘 됐어요. 합병증 증세도 없고요. 한두 달 입원하면서 추이 좀 보다가 퇴원하면 일상생활 가능합니다. 다만, 한 번 뇌 기능이 중단돼서 기억이 손상된 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왜 컴퓨터도 지워진 공간에다 새로 파일 만들어지고 하면 예전 파일은 쓸 수가 없게 되죠? 그거랑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의사가 기계적인 어투로 내 보호자를 찾았고 곧이어 흰색 가운 물결들을 따라 그 애와 우리 가족이 병실 문을 나갔다.


자, 9일을 자면서 2년 반 동안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단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여자애의 단풍잎 같은 두 손을 뿌리치고는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아무도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능하다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싶었다.


그 애와 그 여자애(얘가 내 딸이란다. 세상에 마상에!)는 다음 날부터 내내 내 옆에 붙어 내가 자느라 잊어먹은 과거의 일들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노벨 문학상은 누가 탔어?"


"여자 작간데.. 그.. 이름이 길고 어려워. <체르노빌의 목소리> 썼던 사람."


"..2016년은?"


"밥 딜런."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나 보다.



"미국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어."


"그게 누군데?"


"도널드 트럼프."


"그 부자?"


"더 놀란 거 말해줘?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중간에 탄핵됐어."


"어? 왜?"


"그리고 감옥소에 있어, 지금."


"뭔 말이야, 그게? 쿠데타라도 일어났어?"



그 애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싯팔..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진짜 큰일이 일어났나 보다.


잠에서 깨어 한 달 반. 그간 나는 바깥에서 일어난 2년 반의 공백을 그럭저럭 메울 수 있었다. (가끔 그 애가 잘못된 정보를 주고는 신나하느라 시간이 좀 더 소요되긴 했지만) 그리고 나와 그 애 사이의 공백 또한.


나와 그 애는 내가 공모전에 당선되고 책이 나온 해에 결혼했단다. 속도를 위반해서라고 하는데 누가 신호를 지키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단다. 그 직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8평이 채 안 되는 월셋집을 신혼집으로 구해선 나머지 돈과 대출금을 탈탈 털어 장사를 시작했단다.


그렇게 그 애는 만삭 중에도 모든 것을 프로듀싱하며 동네 골목 가에다 희한한 가게를 오픈했다. 그 가게는 좌석이 그리 많지 않은 테이크아웃 위주로, 아시아 각국의 주전부리들을 한데 모아 인스턴트식으로 쉽고 빠르게 제공하는(손님이 직접 그 자리에서 취향에 맞게 조리할 수 있는) 가게였다. 그리고 1년 만에 체인점을 내더니 지금에 와선 2개의 체인점(그중 하나는 대학가 주변에 입점한)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점은 임대 가게가 아닌 자가 건물이 되었단다. ("바깥에 나가보면 요즘 죄다 우리 꺼 따라 하느라 비슷한 가게들뿐이야." 그 애가 덧붙였다)


우리 딸 애는 올해 미운 네 살로, 얼마 전까진 그림 그리기에 환장하다시피 하더니 요즘은 놀이학교에서 배운 영어 노래를 밤낮으로 염불 외듯 중얼거린단다. 나는 이제 딸 애가 병원에 오면 종일 업고 다니며 제 엄마를 빼닮은 눈꺼풀과 콧방울에다 하염없이 입을 맞춘다.



"..너, 다리는?"



어느 날, 참다못한 내가 그 애에게 슬며시 흘리듯 물었다.



"다리가 뭐?"


"다리가 불편하다든지.. 예전에 다친 적이 있다든지.."


"그런 적 없는데?"



그 애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과거의 기억 중 몇몇이 잘못 보존되거나 하여 틀린 기억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남들처럼 걸어 다녔다. 나는 커피숍의 남자와 악수를 하던 게 떠올랐다. 그건 그저 9일간의 꿈이었을까? 아니, 꿈이란 건 꾸고 있을 땐 몰라도 깨어난 뒤에는 아는 법이다. 그게 꿈이었는지 아닌지. 남자는 내게 말했었다.



"작가님의 행복한 시간, 그 시간을 아주 조금만 나눠주세요."



그리곤 말했었다.



"약속하면 작가님에게 아까 말한 걸 이뤄줄게요."



크리스마스가 있던 주에 나는 퇴원했다. 병원 문을 나서며 나는 양손으로 두 여자의 손깍지를 꼭 쥐고선 중얼거렸다.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차례네."



그 주는 내내 너무도 행복했다. 살면서 가장. 높고 넓은 전셋집에서 딸애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엔 그 애와 트리 아래로 선물 꾸러미를 가득히 채워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 아주 이른 아침. 나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발광하듯 뛰어다니는 딸애와 장난감 칼싸움을 하며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빠, 이제 선물 풀어봐도 돼?"



칼에 찔려 죽는시늉을 하는 내 모습에 이젠 질렸는지 딸애가 칭얼거리며 물었다.



"엄마 곧 일어날 거야. 그럼 다 같이 산타가 뭘 놓고 갔는지 확인해보자, 알았지?"



그때였다. 일순 집 안으로 가스 냄새 같은 게 풍겨왔다. 가스 밸브에는 문제가 없었다. 냄새는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과학 시간 때 알코올램프에서 나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과학실에서 과학 선생은 항상 눈을 부라리며 외쳤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열고 닫았었는지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열었다, 닫았다!"



방 안에서 그 애가 아직 꺼벙한 눈을 한 채로 걸어나왔다.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가스 냄새 같은 거."



내가 물었다.



"아니, 안 나는데."



그 애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애는 나를 지나쳐 딸 애의 뒤편에 우뚝 서더니 내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의미 없는 건 그만 물어봐."



영문을 몰라하는 내게 그 애는 장난감 칼을 쥐고 있는 내 한쪽 손을 가리키며 외치듯 명령했다.



"그어! 그으라고!"



이어 딸 애가 장난감 칼을 바닥에 거세게 부딪혀대며 자지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그 순간 한층 강해진 가스 냄새와도 같은 게 내 코를 덮으면서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여전히 그 냄새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내 귓가엔 글렌 밀러의 '문라이트 세레나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콧속으론 다소 미약해진 가스 냄새가

여전히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눈동자론 맞은편으로 의자 뒤에 한껏 등을 기댄 커피숍의 남자가 들어왔다.


가스 냄새의 정체는 유황 내음이었다. 남자는 포만감과 권태로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약속대로, 행복한 시간 조금을 나눠 가졌다."



남자 뒤편 카운터, 그 카운터 너머로 벽시계의 긴 바늘이 숫자 '4'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fin-
























후기


누구나 인상에 남는 꿈 한 두 가지쯤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자면서 보는 꿈. 나 또한 그렇다. 꿈 중엔 분명 다른 꿈들과는 다른 성질의 것들이 존재한다. 주제나 내용을 떠나 꿈꾸는 중에 어떤 특별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들 말이다. 그런 특별한 감정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농밀한 감정선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런 꿈들을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잊지 않고 떠올린다.


해당 이야기는 바로 이런 꿈들 중 하나를 베이스로 한 거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296758075











  1. 너무 좋네요
    제목부터 취향이었는데 잘 읽고갑니다🤗
  2. 지나가다가 2018.06.16 20:37 신고
    그럼 글쓴이는 그 카페주인이 꿈을 꾸게 해서 1분동안 꿈을 꿨던건가요
  3. 행복한 시간을 조금만 가져갈것같은 뉘앙스더니.. 행복한 시간을 조금만 남겨두는군요. 악마들의 셈법보소
  4. 달콤한 꿈의 결말을 조금더 달달하게 하면 카페 단골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초능력자들의 동창회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6.10 21:05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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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들의 동창회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 조지 고든 바이런





세상엔 우리를 싫어하는 치들이 제법 있는데,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IRS를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건 바로 우리의 직업 때문이겠다.


우리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준다. 우리는 때론 성경 속 인물이 되어준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일 것 같은가? 맞춰 보시라!


내 이름은 제라드 윌헬름, 직업은 초능력자다.


사건은 일리노이주에서 벌어졌다. 일리노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 물론, 그들도 나를 사랑하고. 깡촌 것들만큼 우리 초능력자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또 어디 없다. 어쨌건 사건은 일리노이주에서 벌어졌다. 어느 곳이라고 콕 짚어 말하진 않겠다. 하여튼 시카고는 아니다. 엿 먹을 여피족.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Parapsychological Association과 American Society of Psychical Research 측의 기념비적인 합동 컨벤션에 참석하고서 얼마 전 새로 뽑은 메르세데스의 차 문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정전기와도 같은 불쾌한 감촉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믿을 수 없는 일이자 믿고 싶지 않은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9평대 헛간(아마도 지하로, 임시 저장고 역할을 위해 지어진 곳인 듯했다)에 남자 둘, 여자 둘이 모두 빤스 바람으로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던 거다. 아, 물론 나도. 그러니까.. 남자 셋, 여자 둘.. 모두 다섯이지, 맞지? 우리가 빤스 바람(양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완벽하군!)이라는 거 말고도 재미있는 사실은 또 있었다. 그건 우리 모두 서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상대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는 거였다.


안나 파크스, 점성술사. 과테말라의 고대 무덤에서 발견했다던 수정 해골(그 해골이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왔다나?)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한다. 해골은 그녀에게 자신을 론다라고 소개했다는데 중남미 출신인 그녀가 왜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는 미스터리시다.


샘 버캐넌, 사이코메트러. 특정인 또는 특정 사물과 접촉(손을 대거나 그런)해 그와 연결된 과거의 기억을 읽어낸단다. 좋은 능력이지 않은가.


피터 브루너, 전도사. 오순절 교회 목사인 그는 환자의 질병을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그 자리에서 낫게 하는데 그게 모두 신앙의 힘을 빌려서란다. 아 윌 팔로 힘!


실비아 젠슨..은 나중에 소개하지.


그리고.. 나, 현재 미국 여성에게 가장 사랑받는 투시 능력자.


자, 이렇게 평소엔 바쁘기 그지없는 동종업자 다섯이 컨벤션에서의 동창회를 끝내고서 그 피로연으로 빤스 바람 채 헛간에서 조우하게 되었으니(게다가 모두들 살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중년이다).. 운명은 정말이지 희극을 좋아하는 것 같다. 헛간 안의 빤스 바람 초능력자 다섯이라.. 더 시적일 수도 없겠네.


아, 한 명 소개를 잊었다. 우리 앞에 멀쩡한 옷차림을 한 채 사냥용 엽총을 두르고선(어찌나 그 모습이 어울리던지 원래부터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온 것 같았다) 상석에 앉아있는 거구의 남자. 보아하니.. 옥수수나 호밀 따위의 관리를 맡으면서 담배 전문점에 들러 할인된 말보로 사 피우는 전형적인 깡촌놈이 분명했다. 그리고 짐작건대 이렇게 동창회 자리를 마련한 게 바로 이 양반이겠지.



"마지막 사람까지 전부 깼나 보군."



남자가 중얼거리더니 사냥용 엽총을 다른 쪽 어깨에다 옮겨 기대고선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네들을 아주 잘 알지만 당신들은 나를 알지 못할 거요. 나는 데이브 하트만이요. 보다시피.. 농장일을 하고.. 당신들의 팬이기도 하지. 강연회를 쫓아다니고 통신판매용 킷들을 몇 개씩 구입하기도 했으니까. 이정도면 팬으로 인정할법 하지 않소? 그건 그렇고.. 먼저.. 이런 상황을 만든 내 무례를 용서해주시오. 하지만 내가 지금 희망을 걸 사람은 당신들뿐이라는 걸 이해해줘야 해요. 정말.. 이해해줘야 합니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울먹임을 참으려는 필사적이고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손아귀로 온 얼굴을 거듭 쓸어내렸다.



"이해를 바랍니다. 이해를.. 이제 당신들뿐이에요.. 제기랄! 육시랄! 망할!"






발작적인 욕설과 함께 남자가 어깨의 엽총을 꼬나 들었기에 우리는 모두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쭈그려선 머리를 감싸는 민둥숭이들. 처음 불을 목도한 원숭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남자가 애써 자신을 다스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선생님들. 그리고.. 당신들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나와.. 내 아들을."



끝내 마지막에 가서 흐느끼던 남자는 뒤편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커다란 나무궤짝을 자신의 앞으로 힘겨이 끌어다 놓았다. (한 손으론 그 망할 엽총을 어찌나 단단히 쥐었던지 투박한 손등 너머 핏줄들이 울룩불룩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봐도 관짝으로 보이는 저건.. 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가 궤짝 문을 열어젖혔고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놀랄 겨를도 없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마 빤스 바람인지라 진짜 얼어붙었을는지도 모른다)


궤짝, 아니 관짝엔 전형적인 검은 양복이 안치되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카라 쪽으로 울퉁불퉁한 원형의 덩어리가.. 누가 초능력자 아니랄까 봐.. 내 예상이 맞았다. 이건 관짝이었다. 제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남자는 가장 좌측에 자리하던 안나 파크스를 향해 엽총을 치켜들고선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의 발음으로 울부짖었다.



"안나 파크스 씨! 앞으로 나오세요!"



갑작스러운 명령에 우리는 모두 안나 파크스를 쳐다볼 뿐이었고 안나 파크스는 엽총과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어서!'라는 남자의 짧은 호령에 어기적 일어났다. 그리곤 그녀는 교탁으로 끌려가는 초등학생이 되어 주춤주춤 남자, 아니 관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안나 파크스가 몸을 어정쩡하게 가리며 어물어물 물었다.



"안나 파크스 씨, 그리고 선생님들 모두. 제 부탁은 하나입니다. 여기 앞의 시신은 죽은 제 아들입니다. 얼마 전 장례를 치른.. 아들은 보다시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길가 한복판,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죠.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누군가, 즉 범인을 여러분들께서 밝혀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마치, 며칠간 준비한 대본을 읽어내리듯이. 그러니까.. 미해결 사건의 범인을.. 우리보고 찾아내라는 건가? 다른 이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지 입을 헤 벌리고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한편 남자는 구석에 놓여있던 페인트 자국 투성의 싸구려 천 가방에서 수정 해골을 꺼내와 힘차게 외쳤다.



"자, 안나 파크스 씨! 당신이 첫 번째입니다. 평소처럼 수정 해골을 사용해 범인을 비춰주세요. 여기 론다는 제가 잘 챙겨왔습니다."



오, 안나.... 우리 모두는 한마음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이내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걱정하느라 심히 똥 씹은 표정들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잃고 또라이가 된(아니지, 보아하니 애초 우리들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것 같으니 100% 정상이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남자에게 시험을 받게 될 줄이야..



"시작하세요."



안나 파크스에게 수정 해골을 건네주고선 수갑을 풀어준 뒤 엽총 머리를 까딱거리며 남자가 말했다. 안나 파크스는 당연히 우리보다 더 당혹스러워했으나 그녀 역시 장사밥 하루 이틀을 먹은 게 아니었던지라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선 평소처럼 수정 해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제가 범인에 대해 알아내면 풀어주는 거죠?"



수정 해골에 시선을 둔 채로 안나 파크스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단서만이라도 좋습니다. 선생님들 모두 단서 하나씩이라도 좋습니다. 그럼 무사히 집으로 보내드리겠다고 여기 데이브 하트만이 약속드립니다."



남자가 한결 진정된 어투로 우리에게 답했다. 그리곤.. 한참 동안 수정 해골을 쓰다듬던 안나 파크스가 입을 열었다.



"하트만 씨, 당신네 아들을 해친 사람이 지금 잠깐 보였어요. 이런! ..한 명이 아니에요. 순간이었지만 그들이 폭행을 가한 것처럼 보이네요. 그중 하나는 금발이고.."



그 순간, 남자는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안나 파크스의 가슴팍에 엽총 머리를 들이밀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파악할 새도 없이 남자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어 우악스러운 총포음과 함께 안나 파크스가 눈을 감는 것도 잊고서 발라당 점프하듯 뒤로 나자빠졌다. 그녀의 목 안으론 위압적인 거품 소리가 잠시 새어 나오더니 이내 헛간 안은 관짝이 하나 더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경기를 일으키듯 외쳐댔다.



"이 여편네야! 내 아들은 폭행으로 죽은 게 아니야! 내 아들은 차에 치여 죽었다고! 뺑소니 사고! 이 거짓말쟁이!"



또라이인데 영악한 또라이라.. 이제 론다의 말은 누가 들어주지..



철컥



둔탁한 장전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시 말했다.



"다음! 샘 버캐넌 선생!"



사이코메트러 샘 버캐넌. 백발에다 잘 어울리는 길이감의 곱슬머리를 한 그가 말없이 남자 앞으로 걸어가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내밀었다. 수갑을 해제하며 남자는 다소 흥분한 듯 말했다.



"선생 덕분에 지역사회와 세계 각국의 미제 사건들이 해결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지난번 일본 방송사에 출연해 능력을 발휘하면서 실종된 여아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 아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부디 제 아들내미의 사건 당시 모습을 읽어주십시오. 여기, 사이코메트리에 필요한 것들도 모두 준비해두었습니다."



자.. 초능력 탐정 선생, 신도 앞에서 당신은 어떤 기적을 행할 것인가? 주의해야 할 거야, 샘 버캐넌. 당신의.. 그리고 우리의 목숨이 달려있으니까. 샘 버캐넌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피 묻은 의복과 관짝 안의 짜부라진 덩어리들을 연신 손으로 헤아리듯 쓰다듬었다.



"..끔찍하군요. 뺑소니예요. 당신 아들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는데.. 너무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차량의 자세한 모습은 알 수가 없네요. 다만, 운전자의 모습으로 보이는 형상이 잠시 비쳤는데.. 백인이고 3-40대 남성인 것 같습니다. 아드님의 순간적인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도 커 그 외에 다른 부분은 읽을 수가 없네요. 오로지 그 감정에만 모든 게 집중되어 있어서 말이죠."



그 말에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아선 마치 아이처럼 작고 높은 울음소리를 연신 내뱉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모두 내 잘못이에요! 그날 저는 지미가 하는 바에서 컵스팀 경기를 보고 있었어요. 저는 아들을 집에 혼자 둘 수가 없어 바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도록 했죠. 종종 그랬거든요. 그 애는 그날.. 내가 생일날 사준 8단 자전거(사내애들끼리는 다들 갖고있는 걸 갖고 있지 않으면 업신여기는 법이잖습니까)를 타고서.. 오, 그 애는 그 자전거를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리고.. 바닥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나길래 달려가 보니.. 우리 애가 죽어있었어요. 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샘 버캐넌은 조용히 남자에게 다가가 등을 어루만져댔다. 마치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듯. 그러나 남자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고(맙소사, 그 큰 덩치가 콧물 소리에 맞춰 상반신을 흔들대는 모습은 가히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어 샘 버캐넌이 타이르듯 말했다.



"하트만 씨, 아드님에게는 미처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찰나의 고통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 후로는 신께서 곧장 따뜻하게 안아주었거든요. 나는 알 수 있습니다. 아드님은 절대 괴로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축축한 얼굴을 위로 기울여 샘 버캐넌을 바라보던 남자가 대단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엽총을 듦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짧은 천둥음과 함께 가슴팍 이곳저곳을 쥔 샘 버캐넌이 그대로 발라당 엉덩방아를 찧으며 드러누웠다. 남자가 샘 버캐넌의 가슴팍을 그 우악스러운 발로 연신 짓이기며 외쳤다.



"이 버러지 같은 자식아! 얼빠진 놈 같으니라고! 내 아들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세상을 떠났어! 내가 911 신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 그 애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 '아빠, 못 참겠어. 어떻게 좀 해봐.'였어! 그런 자식에게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비의 마음을 알아? 이런 엠병할!"



남자는 채 감지 못한 샘 버캐넌의 눈이 더는 깜빡이지 않음에도 한참 동안 가슴팍을 짓이겨댔다. 그래도 울분이 채 풀리지 않았는지 우리를 향해 엽총을 꼬나 들곤 남은 분통을 밀어내듯 용광로가 끓는 듯한 외침을 내뱉었다.



"다음! 피터 브루너! 젠장할! 귀먹었어? 피터 브루너, 나오라고!"



거듭된 외침에 피터 브루너는 마치 고해성사실로 끌려가는 죄인처럼 어기적어기적 남자 앞으로 기어나갔다. 오, 헐벗은 채 재판대에 선 신의 대리자를 참칭한 죄인이여. 남자 앞에 엉거주춤 선 채 피터 브루너가 심히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하트만 씨, 뭔가 잘못 아신 겁니다. 저는.. 제 능력은 범인을 알아낸다든지 같은 게 아닙니다. 저는.. 저는 목사에요."



"입 닥쳐!"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두 발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바지춤을 올려붙이고선 이어 웃통 역시 어깻죽지까지 말아 올린 채 말했다.



"너는 내 아들을 위해 데려온 게 아니야. 나를 위해 데려온 거지.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해오다 보니까 병이 생기더라고. 잘나 빠진 의사양반께서 뭐라고 했더라.. 척추관협.. 뭐라더라.. 우리 아버지도 앓았던 병이지. 여하튼, 이놈의 농부병 때문에 허리를 똑바로 곧추세우지도 못하고 자다가도 다리가 욱신거려 깨게 된다고. 그러니까 피터 브루너 목사, 당신이 나를 치료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전도회에서 앉은뱅이들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말이야."



불쌍한 피터 브루너는 두 눈에 공포가 새겨진 눈물을 그렁하게 단 채로 남자의 다리 한쪽을 두 손으로 쥐고선 무릎 꿇은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은 마치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필연적인 죄악을 고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던지라 어쩐지 숙연한 기분마저 감돌게 했다.


남자는 곧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추켜든 엽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방으로 잘게 튄 핏방울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피터 브루너의 허리춤이었는데 그로 인해 남자는 자신의 통증이 잠시나마 사라진 듯한 기분에 휩싸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헛간 안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처지가 되었다. 남자가 요란한 손동작과 함께 과장된 어투로 외쳤다.



"실비아 젠슨 씨! 전미 최고의 심령술사! 앞으로 나오시죠."



실비아 젠슨, 미국 최고로 꼽히는 심령술사. 그녀는 역시 그녀였던지라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주변(곳곳에 송장이 널브러진)이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남자 앞에 꼿꼿이 섰다. 그리곤 수갑을 막 해제하려는 남자에게 대뜸 말했다.



"당신 아들이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요."



수갑을 해제하려다 말고 남자가 눈만 살짝 치켜들어 물었다.



"..왜죠?"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남자는 행동을 멈춘 채 실비아 젠슨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실비아 젠슨은 잠시간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는 완전히 분위기를 제압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좋았어, 실비아 젠슨. 초능력자의 가장 큰 덕목은 기세지. 초능력자 측, 공격 시작!



"그 아이는 자기 아빠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걸 내내 보고 있었답니다. 바로, 저기에 서서."



그 말과 동시에 실비아 젠슨이 관짝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고 남자는 화들짝 놀라선 가리킨 방향과 실비아 젠슨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하트만 씨, 오늘 당신이 저지른 일이 아들을 위한 것이었나요?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었나요? 당신 아들이 무척이나 궁금하다네요. 대답해주시겠어요?"



남자가 금세 울먹이더니 마치 투정 부리듯 대꾸했다.



"젠장! 물론 아들을 위해서였죠! 내 아들을 위해서였다고요! 아들을 죽인 놈을 찾아 그놈의 사지를 찢어놓는 게 아비 된 자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못한 겁니까? 예?"


"아니요, 하트만 씨, 아니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리고 당신 아들이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죠."


"그럼요? 그럼 뭔데요! 젠장할!"


"당신 아들은 지금 슬퍼하고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게 당신의 행위로 인한 거라는 거죠. 당신 아들은 죽은 직후부터 가야 할 곳 대신에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이건 결코 당신 아들에게 좋은 게 아니랍니다. 날 믿어요. 이런 쪽으로는 내가 전문가니까."


"..내가 아빠니까 당연히 나를 잊지 못하고서 따라다니려는 거겠죠. 그게 뭐가 문젠가요?"


"아니에요. 아들의 죽음 직후 아들은 당신이 걱정되어 지금까지도 따라다니는 거랍니다. 당신의 분노가 당신의 아들이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리고 있는 거죠. 농부시라니까 모든 것엔 시기가 있다는 걸 아시겠군요. 자칫 잘못하다간 당신 아들이 시기를 놓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이제 당신 아들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아무 곳도 아닌 곳을 떠돌게 되는 거죠. 지금은 당신을 바라볼 수라도 있다지만 당신이 죽고 나면요? 그때 가서 아이인 당신 아들은 홀로 무얼 의지해야 하나요?"



눈썹 모두가 흠뻑 젖은 채로 관짝에 시선을 고정시킨 남자가 물었다.



"제가.. 제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뭡니까?"


"모든 이기심을 내려놓으세요. 지금 당신이 품은 분노는 아들이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한 게 되어버렸으니까요.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하트만 씨. 반면 당신 아들은 순리에 따라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답니다. 아들이 당신을 걱정하느라 해야 할 일을 그르치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그건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랍니다."


"제가.. 경찰에 자수하고서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그럼 아들이 안심하고서 제시간에 맞춰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트만 씨."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전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젠슨.. 아니, 실비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데이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네, 정확히 실비아 당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감옥에 가고 나면 더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내 아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다음 생애에 다시 한번 아버지가 되도록 허락해줄 수 있느냐고.. 그렇게.. 좀 전해주세요."


"그럼요, 물론이죠. 내가 책임지고 전하겠습니다, 데이브."


"오.. 내 아들.. 지금 저기에 있는 게 맞나요?"


"그래요, 관 바로 옆에서 당신을 보고 있네요."


"실비아."


"네, 데이브."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내 아들, 내 아들놈 홍채 색이 뭡디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실비아 젠슨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관짝으로 향했다. 허나.. 설령 관짝 안 시신으로 시야가 미쳤다 해도 저 뭉개진 덩어리 사이로 어찌 홍채 색을 확인한단 말인가. 남자가 엽총 장전하는 소리와 동시에 이죽거렸다.



"실비아, 무슨 색이냐니까? 아주 간단하잖아! 그저 보고 내게 말해주면 되는 거야. 자, 나와 같은 헤이즐색이야? 아니면, 녹색? 회색일 수도 있지. 파란색은 어떨까? 오, 하지만 생물학이 뭔지 안다면 추천하진 않겠어. 파란색 눈은 열성이니까."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는 게 이미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대로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콰당



송장 다섯, 사람 둘. 이제 실질적으로 헛간 안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 자신이 질문할 대상은 단 한 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남자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절망감도 엿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처음으로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왜일까?



"드디어, 마침내, 제라드 윌헬름 씨의 차례군요! 윌헬름 씨, 제가 뭐 하나 알려드릴까요?"



뭐, 총을 쥔 건 그쪽이니까.



"윌헬름 씨, 저는 평소 초능력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온 사람입니다. 물론, 진지하게요."



그럴 것 같았다. 아, 이건 초능력이 아니라 그냥 내 예상이었지만.



"초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초능력은 피를 타고 내려오는 거죠. 밀에서 밀알이 나오는 것처럼요. 그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발현되느냐 발현되지 않느냐가 관건인 거고요. 여기 널브러져 있는 년놈들 모두가 말할 가치도 없는 것들입니다. 초능력자가 아니에요! 허풍쟁이들! 비열한 사기꾼들! 하지만! 당신은 달라! 이 치들 모두 혹여나 모를 내 판단 미스에 대비하고자 구색 맞추기 식으로 뽑은 쭉정이이지만(언제나 스페어가 중요한 거거든. 나는 농부라 그걸 잘 알지) 당신은 달라! 젠장할, 그래도 이 중 진짜 하나는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여하튼 지건 당신이야말로 진짜 미국의 초능력자요! 이 위대한 미국의 나 홀로 초능력자란 말이요!"


"..그렇군요."


"나는 당신 아버지를 잘 알아.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서 봤지. 7-80년대, DIA(그땐 그렇게 불렸지)는 초능력을 보유한 사람들을 비밀리에 끌어모아 실험을 진행했어. 이름하여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그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인 사람이 바로 당신 아버지였어."



망할 스토커 자식. 방송에서도 말 안 한 내 치부를.



"당신 아버지는 그야말로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였어. 그 점을 알아야 돼. 그는 고대 화성에서 일부 협곡 중 거대홍수가 형성되어있던 것을 투시했지. 또 목성의 고리도 보이저 1호보다 먼저 보고 있었고. 그뿐이 아니야! 염력 능력 또한 지니고 있었어. 그거 알아? 당신 아버지는 초당 400프레임으로 촬영되고 있는 현장에서 밀봉된 투명 유리병 안의 알약을 자기 손 위로 이동시켰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말이야! 상상해봐! 알약이 병을 통과해 손 위로 이동하는 게 단 1프레임 안에서 발생한 거라고!"


"내 아버지 소개를 꽤나 거창하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무얼 원하는 거죠?"


"윌헬름 씨, 내가 말했지. 초능력은 유전력이라고. 비록 당신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신은 분명 투시력을 유전 받았어. 나는 그걸 알 수가 있단 말이야! ..내 아들을 뺑소니친 범인을 투시해 줘.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일이 끝나면 내 아들놈의 명예를 걸고서 약속하지. 당신을 풀어줄게."


"..좋아요, 내가 범인에 대해 투시했다고 칩시다. 그걸 어떻게 당신에게 증명받을 수가 있죠?"


"실로 간단해. 그날 내 아들을 뺑소니친 차량을 내가 봤거든."


"뭐요?"


"다만 어두웠고 워낙 순식간이었던 데다.. 내가 조금 취해있어서 모든 걸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어느 회사 차량인지, 그리고 번호판 앞자리 세 자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 정도면 경찰에게 맡기는 게 훨씬 빠를 겁니다, 데이브 하트만 씨."


"아니! 나는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어! 말하지 않을 거야! 그 일을 경찰에게 떠넘길 수야 있나! 윌헬름 씨, 나는 말이야. 내 손으로 범인을 잡으려는 거라고. 그놈이 먹을 때 먹고 잘 때 자면서 가석방으로 기어 나오는 꼴을 나는 못 봐, 알겠어? 내 손으로 잡아서 똑같이, 아니, 더 심한 고통을 줄 거야. 나는 아비니까!"


"..좋습니다. 당신 뜻대로 하세요. 당신 아들의 일이니까. 어쨌건 약속해줘야 합니다. 만약 내가 제대로 투시를 한다면 당신은 나를 손끝 하나 대지 않고서 풀어줘야 해요."


"물론,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맙소사! 언제나 그런 법이죠. ..뭡니까, 그 조건이."


"어중간한 정보로는 안돼. 범인이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적어도 내가 혼자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줘야 돼. 그렇지 않겠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풀어주겠어. 아니면? 정보를 알아낼 때까지 나와 함께 여기서 지내야겠지."



나를 송장으로 만들려는 놈과 송장이 된 것들과의 잠 못 드는 밤이라, 낭만적이군.



"..좋아요. 약속 꼭 지켜요. 그나저나 이거 옷 좀 입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대체 왜 벌거벗겨놓은 겁니까?"


"윌헬름 씨, 미안하지만 당신이 투시를 마칠 때까지는 안 돼. 이건.. 우리 아버지가 고안한 방법이야. 내가 어릴 때 우리 가족들은 잘못한 게 있으면 여기 이 헛간으로 끌려와선 벌거숭이로 대답해야 했어. 아버지가 묻는 말들에 말이야. 우리는 벌거숭이가 되면 언제나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어. 태초의 모습에서 인간은 순수해질 수밖에 없는 거거든. 비록 내 아버지가 썩 훌륭한 치는 못되었지만 이 방법만은 언제나 옳았지."



나는 남자가 내 손에 걸린 수갑을 해제하는 동안 남자의 아버지가 벌거숭이 상태로 울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남자를 혁대로 후려갈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남자 역시 벌거벗겨진 자기 아들을 혁대로 후려갈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폭력은 대물림이 아니겠는가.



"자, 진짜배기가 뭔지 보여봐!" 



남자가 그 우악스러운 손바닥으로 내 등을 후려갈기며(혁대로 맞는 게 더 나을뻔했다) 쾌활하게 말했고 나는 정장 차림새의 덩어리와 그 옆으로 펼쳐진 피 묻은 의복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곤 그 앞에서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뒤편의 남자가 조심스레 '아직인가?'라고 물을 때까지)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그래, 정리가 필요했다.



"..하트만 씨, 보입니다. 당신 아들이 쓰러져있는 게 보여요. 아들을 친 차량이.. 잠시 멈췄다가 곧바로 급발진하네요. 차량은.. 테일 라이트가.. 캐딜락.. 이번 신형.."


"맞아! 맞아, 캐딜락!"


"근데 너무 어둡고 빠르게 지나가서 색깔은 잘 모르겠어요. 밝은색이나 대비되는 색상 계통은 아니고.."


"다시 접속해서 돌려봐!"


"뭐라고요?"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 아버지처럼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해서 보는 거잖아!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우주 속 도서관, 아카식 레코드!"



정말 모르는 게 없는 양반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건 진짜다. 요즘은 노동자나 10대 애들이 제일 똑똑한 세상이다. 그 망할 놈의 인터넷 때문에.



"그러려던 참이었어요. ...보인다!"


"뭐? 뭐가?"


"번호판 숫자는..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4, 1, 6.."


"그래, 맞아! 맞아, 4! 1! 6!"


"번호판 형식이랑 색상으로 보아.. 워싱턴, 일리노이 둘 중 하나겠군요."


"이럴 줄 알았어! 당신이 진짜배기일 줄 알았다고!"


"이 이상은 볼 수가 없어요. 내 능력이 모든 걸 포착하진 못해요. 원하는 방향 모두를 가져올 순 없으니까. 그저 특정 시점의 한 방향과 마주하는 거죠. 마치 꿈속 장면처럼요." 


"..끝이라고? 번호 세 개가? 이봐, 번호 세 개는 나도 알고 있던 거라고!"



나는 남자를 등진 자세 그대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어 조용히 해줄 것을 종용했다. 새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이번엔 다행히도 남자가 재촉해오지 않았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정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좋았어, 찾았다.



"..지금 차 안으로 들어갔어요. 차 안을 보고 있어요."


"운전사! 운전사가 어떻게 생겼지? 신형 캐딜락이니까 분명 중년의 백인 놈이겠지?"


"하트만 씨, 생긴 걸 말해봐야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그린 몽타주 한 장 쥐어 들고서 워싱턴과 일리노이 전역을 돌아다니려고? 나를 여기다 가둔 채?"


"젠장, 당신 말이 맞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당신 말도 맞군요. 중년의 백인 남성이에요. 이제.. 남자 주머니 안, 그리고 지갑 속으로 들어갈 겁니다." 



남자가 뱀 같은 미소를 흘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윌헬름, 그놈의 운전면허를 보는 거야. 제기랄,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내가 했던 말 취소할게. 네가 네 아버지 보다 뛰어나!"



그리고.. 자, 이제 모든 게 정리되면서 명확해졌다.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하트만 씨! 주소가 보여요! 빨리! 펜이랑 종이!"



내 외침에 남자는 제자리에서 잠시 몸을 도리질하더니 더 커다란 외침으로 화답했다.



"이런 망할! 둘 다 없어! 위에 가서 바로 가져올게!"


"그렇게 몇 번이나 접속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내 슈트 윗도리 안주머니에 펜이 있으니 가져와요!"



남자는 어찌나 다급했던지 시종 부러져라 쥐고 있던 엽총도 내던지고선 벌게진 얼굴로 슈트 상의를 주워들어 내게 달려오는 동시에 찢어져라 안주머니를 쑤셔댔다. (아마 조금 찢어졌을 거다)



"여기! 여기, 펜!"


"종이는요?"


"..위에 가서 가져올게!"


"손 내밀어요! ..두 개 다!"



나는 앞으로 내민 두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양손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선 다른 손으론 펜 뚜껑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열린 뚜껑 자리로 모습을 드러낸 날카로운 또 하나의 펜 촉. 300달러짜리 택티컬 펜의 숨겨진 발톱. 그 티타늄 발톱을 바로 치켜들곤 자기 양손을 뚫어져라 지켜보는 남자의 허리통 반만 한 목덜미를 향해 지체 없이 쑤셔 넣었다. 동시에 손 너머로 심히 기분 나쁜 감촉이 풍겨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불쾌한 남자의 꺼져가는 눈 떼기. (맙소사, 뿌예 터진 게 마치 만들다 만 레트로 수프 속 고깃덩어리를 보는 것 같다)


남자는 그 육중한 몸 전체를 고꾸라뜨리기 직전 나를 향해 무어라 입을 움직였지만 이미 그의 성대는 그 기능을 다 한지라 급작스러운 유언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오, 만약 실비아가 살아있었다면 남자의 영혼에게 물어볼 수 있었으련만)


자.. 오래된 송장 하나, 새로운 송장 다섯. 모두 일곱.. 아니, 이 경운 하나가 맞겠다.



"..네, 그 주소 맞아요. 네. 네, 헛간에 갇혀있고요.. 네, 맞아요. 신고자인 저만 살아있습니다. 그거 꼭 좀 전달해주세요. 겨우 죽다 살아났는데 또 죽을 뻔할 수는 없잖습니까. 네. 네, 제라드 윌헬름이요. 아니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더는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서요. 왜 다들 그럴 때가 있잖습니까. 저는 그게 지금이네요. 네,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나는 한 손으로 주섬주섬 남은 옷가지를 마저 끼워 매며 다른 한 손으로 쥐어 들고 있는 남자의 속이 드러난 지갑에다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데이브 하트만.. 그냥 경찰에게 말했어야지..


헛간을 둘러보았다. 경찰이나 보안관이 이 깡촌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다. 또 한 번 헛간을 둘러보았다. 인생은 복불복이라더니, 죽을 뻔한 위기인 줄 알았건만 그게 내 미래를 구할 줄이야.


나는 널브러진 송장들을 차례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그리고 빨리, 최대한 빨리, 나는 술이 필요하다. 어서 빨리 취해있고 싶었다. 허나 집에 도착하고서야 그럴 것이다. 싯팔. 이제 두 번 다시 음주운전 하지 않으리.





-fin-




















후기


나는 '이상한 옴니버스'라는 이름으로 수년간 웹, 출판물, SNS 앱, 방송 등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이비 지식들을 파헤쳐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걸출하게 이름난 (자칭)초능력자들의 사기 행각을 다루기도 했는데, 해당 이야기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 모두(주인공 제라드 윌헬름 을 제외하곤) 바로 이런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한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안나 파크스와 론다: 안나 미첼 헤지스와 수정해골이 모델이다. 모두들 인디아나 존스의 수정해골을 잘 알 거다. 대표적인 오파츠인 이 수정해골은 안나 미첼 헤지스가 17살무렵 탐험가였던 부친과 함께 마야문명 유적을 발굴하던 중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전설은 안나 미첼 헤지스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실은 1943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400파운드에 구매한 현대의 금속 공예품에 불과하다. 그녀의 수정해골로 인해 한동안 세계 각지에서 수정해골이 어떤 영험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도시괴담이 폭넓게 퍼지게 된다.

샘 버캐넌: 어떤 물체를 만지는 것만으로 그 물체에 새겨진 과거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능력, 사이코메트리. 아마 초능력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가히 낯설지 않을 거다. 그런 능력을 보유한 이를 사이코메트러라고 칭하는데, 샘 버캐넌의 모델이 바로 역사상 최고의 사이코메트러로 꼽히는 제라드 크로이셋이다. 그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초능력자이자 60-70년대에 세계 각지를 돌며 미해결 사건을 해결한 초능력 탐정으로 불리는데.. 물론 이 역시 모두 사기와 거짓전설에 불과하다. 그는 다른 모든 (자칭)초능력 탐정들이 그러했듯 방송과 자기 홍보를 통해 자신이 미해결 사건들을 해결하거나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주장하나.. 경찰 측의 수사기록을 확인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었던 거로 드러났다. 아, 당연히 사이코메트리라는 개념 역시 전 세계 적으로 초심리학이 학문의 일환으로 유행하던 40-50년대에 탄생한 유사과학에 불과하다.

피터 브루너: 실제 모델은 피터 포포프다. 독일 태생의 오순절 교회 목사였던 그는 80년대에 TV 매체 등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치유한다며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사기 전도극을 일삼던 자였다. 그는 전도회 전에 미리 참석할 사람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점쟁이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초능력 사냥꾼 제임스 랜디에 의해 그 진실이 폭로되면서 모습을 감추게 되지만.. 이후 통신판매를 통해 기적의 샘물과 같은 사기물품을 판매하면서 고급저택에 슈퍼카를 모는, 여전한 리치가이로 인생을 보낸다.

실비아 젠슨: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심령술사 실비아 브라운을 모델로 했다. 그녀는 생전 20분간의 전화 상담료로 700달러를 받았으며 그마저 예약이 2년 치는 찰 정도였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언젠가 CNN 래리 킹 라이브 쇼에서 분위기에 휩쓸린 나머지 제임스 랜디에게 도전하겠다고 입방정을 떨었다가 이후 죽을 때까지 제임스 랜디의 전화와 이메일을 회피해야 했다.

이들 모두 생전 분명 과분하고 불로소득격인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 비난받아야 할 주체는 언론과 미디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이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조장하고 선전해왔다. 그래야 광고주들이 좋아하니까. 결론적으로 세상만사가 그렇듯 이것 역시 돈에 관련된 문제이다.

나는 이상한 옴니버스를 통해 초능력자들을 죽여왔고, 이번 창작에서도 그들을 죽이게 되었다. 그게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1. 잘 읽겠습니다!
  2. 오랜만에 올라온 괴담 잘읽었습니다
  3. 와우.. 멋진 글이네요. 오랫만에 글이라서 그런건지도ㅋㅋ 주인장님 항상 고생하십니다.
  4. 오오 좋아요 이런 소재!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새글이 있어서 반갑네용
    잘 읽었습니당^_^
  5. 와 꿀잼 갓잼 대잼 ㄷㄷㄷ 단편영화나 티브이시리즈 본 기분이에요. 넘나릥 재밌네요.
  6. 앞으로 꾸준히 많이 써주세요! 재미있네요

사다코 대 카야코, 2016

호러 영화 짧평 2018.02.25 22:00



20세기 말,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일본발 호러 무비 두편이 있었으니, 링과 주온이 그것입니다.

각자 야마무라 사다코와 사에키 카야코라는 소름 끼치는 원혼을 중심으로,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저주와 그 순환에 대해 다룬 호러계의 명작입니다.

그 인기에 힘입어 수도 없는 속편, 세계 각국에서의 리메이크가 이어지기도 했죠.

그 탓에 오히려 시리즈의 위명은 점차 빛을 잃고 땅으로 내려온 느낌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두 시리즈가 콜라보레이션이라니!

서양에서 프레디 VS. 제이슨을 내놓았다면, 이것이 동양의 대답이겠죠!

하지만 여러분도 다 예상하다시피, 이런 게 멀쩡한 영화일리가 없습니다...





애시당초 가장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관객들은 이제 사다코건 카야코건 질릴만큼 봐왔다는 점이겠죠.

이 작품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하려면, 링과 주온 두 시리즈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기나긴 세월 수많은 작품을 다 따라왔으면 이 두 사람이 별로 안 무서워요.

모든 호러 프랜차이즈가 그렇듯, 처음에는 소름 끼치던 귀신도 눈에 익으면 아는 친구처럼 반가워지거든요.

생전에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고, 죽어서도 참 오랜 세월 힘겹게 구르고 있는 두 귀신에 대한 연민의 정이 피어오를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또 시리즈에 이해가 없는 관객이 단발성으로 이 영화만 봤을 때 무섭느냐!

그게 또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애시당초 발상부터가 양 시리즈의 고인물 팬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니만큼, 상당히 뻔한 클리셰들이 반복되거든요.

딱히 무섭지도 않고, 설정도 납득이 안 가면 그게 재미있을리가 없겠죠.





게다가 영화 스스로도 스스로를 우습게 만듭니다.

저주에 맞서다 죽는 연구자의 모습인데, 박치기 당해서 얼굴이 짜부가 되었습니다.

이걸 보고 무서워하라는 건지 웃으라는 건지...


제목에서는 사다코랑 카야코가 박터지게 싸울 거 같이 써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비디오를 봐서 걸린 사다코의 저주를 카야코의 저주로 상쇄하겠다는 이이제이의 발상인데...

양쪽 다 보시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사실 사다코가 훨씬 세서 그냥 1:1로 싸우면 승패는 이미 갈리거든요.

실제로 둘이 나와서 대면하고 싸우는 장면은 기껏해야 5분이 채 안될 겁니다.

그나마도 별 이상한 마무리로 실소를 자아내고요.


그나마 좋게 봐줄만한 거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유투브로 저주의 비디오를 뿌리는 장면 정도입니다.

이거는 할리우드판 링스에서도 나왔던 장면인데, VHS 복사 떠서 저주를 뿌리던 시절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죠!

유투브로 퍼져나가는 사다코를 보아라!





정말 괴상한 영화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감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겨냥하는 수요층에게는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일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한테도 무섭기보다는 반갑고 재밌는 경험일 거에요.

사실 이 두 시리즈 오랫동안 보아온 분들이라면, 애처롭고 웃기고 씁쓸하고 온갖 감정이 다 들 겁니다.


얘네 둘 다 첫 영화에서는 진짜 무서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온갖 속편에 리메이크에 리부트 거치는 동안 그 후광이 사라지고 이제는 조소의 대상이 되어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

국내 개봉도 한번 취소됐다가 배급사가 바뀌고 다시 나올 정도로 험난했었는데, 아무쪼록 이제 둘 다 그냥 편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점수는 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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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로 링크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괴담을이나 호러무비를 좋아해서
  2. 개인적으론 이런 vs 영화 안 나왔으면 좋겟음... 하나같이 공포보다는 코미디 느낌
  3. ㅋㅋㅋㅋㅋ쉬었으면 좋겠다는말 정말 공감합니다...저친구 둘다 이젠 좀 안식에 들때가 왔어요
  4. 진심 두 분 다 성불하셔서 이런 고초를 겪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햇수로 몇 년인데 아직도 이런 영화로 고통을 받고 있나...ㅋㅋㅋ

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1.30 20:31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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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4년여 전 즈음의 일인 것 같다. 아니, 5년? 어쨌건 망아지처럼 날뛰지만 않는다면야 비교적 좋은 날씨라 취급할 수 있는 그런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도심 생활을 마무리 짓고선 경기도 외곽 산허리에서 똬리를 틀던 차였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싶으면 읽고 글을 쓰고 싶으면 쓰는 신선놀음 짓에 기꺼워하고 있었다.


한밤중, 산허리를 맨 소나무 끝 가지 위 애처로이 두 발을 디딘 뻐꾸기의 울음 새로 책장을 넘긴 일이 당신은 있는가? 아직 없다면 앞으로도 그러길. 그건 보다 적은 이들이 누렸으면 하는 이기적인 기쁨의 하나이니까.


그날 해가 꺼져가는 오후 녘. 툇마루에 놓인 원목 흔들의자 위로 궁둥짝을 방정맞게 도리질하다 중간 즈음 읽던 책을 잠시 덮고선 맞은편의 산마루를 똥폼스레 바라보던 때였다.



냐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던 공간과 시간 복판에서 자그마한 얼굴을 치켜든 고 씨가 잘록하게 빠진 허리를 네 다리로 이며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는(남자는 언제든 상대가 여자인지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마치 한 동작인 양 툇마루로 깡총하게 올라서선 내 바로 앞 장판 떼기 위로 사뭇 교양 머리 있는 차림새의 앉음 모양을 취했다.



..누구니?



그녀는 올바른 대답 대신 두어 차례 내 언어를 모방한 울음을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한층 빳빳이 추켜세웠다. 그 모방이 적잖이 출중했던지라 나는 그 뜻을 받들어 곧 주방에서 뒤져온 마른 멸치 움큼과 냉수 한 잔을 정중히 그녀 앞으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제 내가 자기에게 빠졌다는 것(실은 첫눈에 그랬다만)을 과신한 양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묵묵히 주안상을 비워댔다.


용무를 마친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진 내 얼굴을 흘끗 훑더니(남자의 미소는 그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법이다) 엎드린 자세로 주저앉아선 고개를 꾸벅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한 나는 낮잠이 이어진 1시간여 동안 그녀의 몸을 탐할 수가 있었다. 그날 졸음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휑하고 일어나 우아한 발놀림으로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숨겼다.


다행히 그녀 또한 내가 제법 마음에 찼는지 그러한 입궐은 밤공기가 제법 싸늘해질 때까지 매일같이 이루어졌다. 서늘해질 때까지. 계절이 넘어가던 무렵 그녀는 갑작스레 발길을 끊었고, 이제 툇마루엔 실의에 찬 남자 하나가 의자 위로 하릴없이 그 몸뚱어릴 흔들어 젖히며 공허히 산마루를 응시하매 연정을 달랠 뿐이었다.


그러던 의자 위로 남자의 옷차림이 달라졌을 무렵이었다.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그녀가 다시금 툇마루를 찾았다. 그 꽁무니로 자신의 서늘한 눈매를 똑 닮은 새끼 둘을 동반하고서.


이제 우리 둘은 달라진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그녀는 두 아이가 서로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동안 서둘러 밥상을 비우곤 잠시 구석에서 짧은 낮잠으로 고단함을 쫓아야 했고,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놀다 지쳐 의자 위로 고꾸라진 아이들을 재우랴 조심스레 의자 머리를 흔들어대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한낮 동안 내게 탁아를 부탁하곤 외출을 할 수가 있었으니 그녀에겐 퍽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몇 달간 이를 몹시도 못마땅해하던 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인접한 마당의 진도(잡종) 씨였다. 그는 본디 대단히 순박했던 이였으나 언젠가 줄을 풀고서 산 아래 동네의 닭 따위를 해한 연유로 짧아진 쇠줄 아래에서 고 씨 가족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허나 그의 목줄을 다시금 늘어뜨릴 수만도 없었다. 이미 그가 한 차례 피 맛을 본 뒤였기 때문이겠다. 그는 이제 사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 짓는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다. (핏속에 새겨진 기호 위에서 누군들 자유로우랴) 물론, 난데없이 사랑방을 꾀고 앉은 고 씨네 새댁이 그의 마음에 찰리 만무했다.


어느 날이었다. 마당을 나온 나는 진도 씨네 집안이 텅 빈 것을 보곤 그의 행방을 쫓아 사방팔리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끝내 그의 행방을 포기하고선 떨어지는 태양을 따라 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잡초더미 사이로 마치 땅바닥에서 뜯겨 나온 듯한 사체 두 구를 보았으니, 둘은 내게 탁아의 책임이 있던 그 아이들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나는 내 안에 이는 감당 못 할 회한들의 크기로 인해 끝끝내 아무런 감정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그저 두 아이를 조심스레 사뿐히 안아 들고는 마당과 인접한 부지(敷地)로 향할 뿐이었다. 그렇게 둘을 부지 내 툇마루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다 묻고는 며칠이나 지났을 무렵에도 진도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 씨 또한.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고서였다. 대낮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 툇마루로 나서니 그곳엔 돌아온 탕아가 반쯤 사라진 목줄을 한 채 집 주변을 촐싹대며 돌아댕기고 있었다. (범행은 어렵지가 않다. 도망가는 게 힘들지)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콧김을 한차례 불어 젖히더니 요기할 게 없느냐며 재촉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뻔뻔스러움에 재차 이는 분통을 뒤로하고선 엊저녁 먹고 남긴 찬밥을 국에다 말아 한 사발 차려 주었다.


접싯물에 코 박은 채 숨 쉴 새도 없이 쩝쩝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예뻐해 하고 이름을 붙여주고 옷을 입혀주며 어쩌고저쩌고해도 개는 개라는 것을. 그런 내 마음은 미처 사라지질 못한 분노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던 또 어느 날이었다. 채 넘기지 못한 책장에 못내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던 나는 잠결에 무슨 낌새래도 차렸는지 여적 어둑하던 꺼먼 새벽녘 눈을 떴다. (못다 한 일이 있으면 잠귀가 밝아지는 법이다)





창문에 바람이 새는듯한 소리에 나는 홀리듯 그 근원지로 졸린 발을 끌었다.



톡 톡



그 소리는 툇마루와 연결된 서재 통유리에서 나고 있었다. 서재로 발을 디딘 나는 점차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그것이 무슨 연유로 인한 소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나는 황급히 주저앉아 문을 열어젖히고선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는 예의 그 품위 어린 앉음새로 나를 살그머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재차 엄습함과 동시에 그 이상으로 그녀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던 묵은 감정이 쏟아지면서 결국 나는 몇 번이나 한풀이하듯 넋두리했다.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그녀는 말없이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그저 한스러운 그 넋두리를 목도할 뿐이었다. 그리곤 잠시 후 몸을 돌려 하늘한 걸음새로 저 건너 어둠과 동화되어갔다. 나는 꼭 다른 사람의 발로 걷는듯한 걸음걸이로 다시금 잠자리로 향했다. 마치 그러한 행위가 꿈속을 빠져나와 현실로 되돌아가는 의식인 것만 같았다.


다음날, 간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툇마루로 나온 나는 끔찍한 산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건 어떤 잔혹한 표현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을 광경이었다. 진도 씨가 죽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풍경이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공포를 느끼잖는가)


진도 씨네 바로 앞으로 나 있던 정자(널찍한 바위), 그 정자로 세워져 있던 아이만 한 크기의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진도 씨가 목매달려 있던 것이다. 그건 교수형의 그것과 동일한 모양새였다. 나는 만져보지 않아도 진도 씨의 몸이 이미 뻣뻣하게 굳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또 설명할 길 없는 그 죽음에, 나는 한동안 슬퍼하거나 시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소나무와 그 소나무로 매달린 목줄을 살펴보았다.


사유는 명백했다. 소나무 한가운데 굵은 가지 사이로 고정된 목줄로 인해 진도 씨는 뒷발을 땅에 디딜 수가 없었고 그게 바로 사인이었다. 허나 그런 '어떻게'에는 분명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진도 씨는 어떻게 그 사이로 목을 맬 수가 있었단 말인가?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 주변을 반복해서 돌아 밑기둥에 목줄이 반 정도 감기게 한 뒤, 바로 옆 바위를 타고 집 지붕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남은 목줄이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통과해 고정되도록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가 빠져있었다. 도대체 왜? 어찌하여? 소나무야, 너는 무얼 알고 있니?


나는 목줄에 걸린 진도 씨를 빼내어(예상대로 그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마당과 인접한 부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땅을 막 파던 찰나 나는 생각했다. 두 아이와 너무 가까이에 자리하면 그 애들에게 또다시 못 할 짓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한참 흙을 파내던 중 나는 묘한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작은 언덕 위로 그녀가 앉아 있었다. 예의 그 품위 있는 앉음새로.


나는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금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가끔씩 고개를 돌릴 때면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자리의 정당한 입회인이라는 듯이.


마침내 진도 씨의 매장을 모두 마치고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없었다. 그녀는 아마 기품있는 걸음으로 몸을 돌려 나아갔을 것이다. 들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모두 씻겨 내리게 만드는 그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처음 내 앞으로 정중히 다가오던 그 날처럼.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fin-

















후기


사실 나는 요크셔파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862507



  1. 읔ㅋㅋㅋ뭐가뭔지 잘 몰겟당
  2. 묘생만경과 비슷한 이야기네요
  3. 고씨라 해서 처음엔 고라닌가 했네~ㅎㅎㅎ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01.29 22:05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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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이름은 할랜드 베일이다. 통칭, 구원자 베일. 직업은 LA에서 제일 잘나가는(그리고 악명 높은) 변호사이고. 내게는 세 가지 룰이 있다.


첫째,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엄마가 내게 '사랑한다 아들아.'라고 한다면 먼저 그 말을 의심할 것. 둘째, 돈 많은 것들의 말을 믿어줄 것. 셋째, 두 번째 룰을 첫 번째 룰보다 우선시할 것.


말했듯, 나는 이 거리에서 '구원자 베일'로 통한다. '이 거리'란 당연히 할리우드를 뜻한다. 세상에서 악명을 떨치기 가장 적합한 곳. 그러니까 이 몸은 돈맛에 눈 돌아가 카메라 렌즈에 중독된 이 거리 종자들의 뒤를 닦아주고 계신다 이 말씀이다. 물론 돈 많은 비치(Beach)년놈들의 엉덩이도.


코카인 빨고서 뺑소니? 내게로 와. 술 자시고 운전하다 차량 서너 대쯤 박았다고? 그 정도는 귀엽지.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다? 뭐, 어때. 건강에 좋다며 아침마다 비타민 대신 섭취하는 놈들도 있는데. 여자 친구 얼굴에 난 멍 자국 좀 어떻게 해달라고? 사흘 안에 여자 친구가 찍소리 못하도록 약점을 물어다 주지.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약속하지, 남편 똥꼬까지 털어주겠노라고.


자, 이쯤 되면 내가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파악이 갈 거다. 그래, 맞다. 철딱서니 없는 할리우드 셀럽, 졸부년놈들의 악어새. 그게 바로 나, 구원자 베일이올시다. ..뭐라는 거야? 악어새가 악어와 공생 관계라는 건 사실 잘못 알려진 상식이라고? ..이봐, 자신 있으면 법정에서 증명해보라고. 어쨌거나.



"싯팔! 이게 웬 거야?"



초장부터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온 연유는 업무용 계좌에 뜬금없이 50만 달러가 꽂혀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50만 달러의 출처는 당일에 밝혀졌다.



"베일 씨, 베일 씨 전화 맞죠?"


"네, 누구시죠?"


"클라이언트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쪽이신가요? 아니면.."


"오늘 착수금을 보내드렸죠."


"..어디 관계자이시죠?"


"저는 그냥.. 민간인입니다."


"..내 개인 번호와 계좌는 어떻게 알아낸 거요? 당신 누구야?"


"그걸 궁금해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베일 씨. 안 그래도 오늘 만나서 말씀드릴까 했거든요."


"..여전히 내 질문에는 답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오늘 왜 만나?"


"오늘 오후부터는 스케줄이 있다고 손 쳐도 모두 사적인 걸 테니까요. 제가 약속드리죠. 오늘 저와 만나는 게

분명 당신 와이프 대신 애인과 루크스에서 식사하는 일보단 값어치 있을 거라고."


"뭐라고? 당신.."


"그러니 루크스에는 당신 애인 대신 제가 합류하도록 하죠. 베일 씨가 예약한 시간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하여.. 나는 금요일 오후 웬 처음 보는 40대 여성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40대. 그래, 맞다. 그녀는 분명 40대였을 것이다.


매끈하고 굴곡 없는 피부 결(하루가 멀다 하고 셀럽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내가 장담하는데 시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좁다래한 얼굴 넓이로 더없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역시, 모두 수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강렬한 대비의 홍채색. 분명, 외모만으로는 대학원생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지만..


클래식 스타일로 감아올려 묶은 금발, 마찬가지로 클래식 스타일로 음영 없는 분칠에다 눈썹과 입에만 얇게 포인트를 준 화장법, 고풍스러운 실루엣의 민무늬 원피스 룩(소매가 팔뚝 반을 가리는), 다소 와이드하고 높지 않은 굽에다 전체적으로 심플한 라운드 셰이프의 단색 구두.


무엇보다 사람의 눈을 바르게 응시하며(요즘은 다들 구린 의도를 감추느라 이러질 못한다) 어절마다 조용하지만 명쾌하게 강약세를 보이는 그녀는 분명 젊은이가 결코 지닐 수 없는 기품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지극히도 이국적인 이채로움을 가만히 내뿜고 있었는데, 마치 수녀원에 평생을 갇혀있다가 일주일 전에 탈출했든지 아니면 과거 조사를 게을리한 채 가이드북에 의지해 타임머신을 타고서 2017년 이곳 루크스로 식사를 하러 온 미래인인 것만 같았다.



"오소부코를 추천해드릴게요. 본토 맛에는 따라갈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실패가 없는 메뉴죠."


"좋아요, 당신은 뭘 주문하시겠어요? 미스.. 미세스.."


"그냥 질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플레절렛 수프, 리코타와 과일을 섞은 샐러드면 되겠네요.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서로의 식사가 모두 끝난 후(그녀는 이파리 하나 남기지 않았다) 디저트를 기다리던 중 그녀가 말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 50만 달러는 착수금이었어요."


"..저보고 뭘 하라는 거죠? 아니, 아니. 아직 맡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요. 이런 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보다 내 번호랑 계좌는 어떻게.."


"말은 착수금이지만 정식 착수금은 아니에요."


"..옌장, 도통 모를 말들만 내뱉으시네."


"정식 착수금이 아니란 말은, 지금부터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제 말을 잠자코 경청해주는 대가라는 의미예요."


"..그 뒤에 내가 일을 맡지 않겠다면?"


"그건 당신 자유입니다. 당신 계좌로 들어간.. 물론, 깨끗한 50만 달러 또한 당신의 자유이고요. 당연히 정식 착수금 100만 달러 역시 당신의 자유겠지요? 오, 빼먹을 뻔했네.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도요."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이라 하면.. 소송 서비스를 말하는 게 아니겠군요."


"바로 그렇답니다, 베일 씨. 그리고 성공 보수금이 아니므로 종래의 성공 보수금 수준보다 더 높은 퍼센티지를 적용하도록 하죠. 물론, 정식 착수금을 기준으로요."


"..몇 퍼센트요?"


"20퍼센트."


"25퍼센트. 그 밑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무슨 일이든 간에 법적 테두리 안에서

범죄 불성립으로 해석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어야 합니다. 범죄 불성립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에요, 베일 씨. 무슨 의미인지 안답니다. 그리고 안심하세요, 베일 씨. 당신에게 맡기는 일은 완벽하게 합법적인 일이랍니다."


"..좋아요, 질. 무슨 일이죠?"


"베일 씨, 제안을 하나 더 해도 될까요?"


"..그럽시다."


"말씀드렸듯, 분명 합법적인 일입니다. 당신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캘리포니아 내에선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어요. 물론 그 말은 가장 높은 악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죠. 만약 자세한 걸 묻기 전에 계약부터 해준다면 추가적으로 10만 달러를 더 지불하죠."


"15만 달러."


"..좋아요."


"단, 계약서에 이 한 줄만 추가합시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가 필요할 경우 언제든 중도에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수임료는 전액 반환하지 아니한다.'"


"거기에 한 줄만 더 추가합시다, 베일 씨. '어떠한 사유로도 상기 항목에 위배되지 않음에도 도중에 계약을 파기할 시 수임료 반환을 2배로 산정한다.'"


"..좋수다! 바로 사무실로 갑시다! 아, 이 셔벗은 마저 먹고서."



우리는 정중히 악수를 한 뒤 사무실로 가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녀가 명시한 변호사 서비스 의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할랜드 베일은 밥 스미스와 캐서린 스미스(질 가라사대, '나는 밥의 친가 쪽 사람이에요. 그리고 둘은 내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죠.')의 모든 법적 대리 임무를 위임받아 그들의 요청에 따라 모든 가능한 법률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법률적 서비스 지원은 계약일로부터 60일이 되는 자정까지로 기한한다.



다음 날. 나는 질, 밥 스미스의 아내 캐서린 스미스와 함께 LA의 대표적인 부촌인 퍼시픽 파리세데스로 향했다. (캐서린 스미스 역시 독특한 분위기의 이국적인 여성으로 분명 여러 나라의 피가 섞였으리라 여겨졌다. 아마 질과 마찬가지로 메인은 게르만 계통?) 그리곤 둘의 안내에 따라 어느 공용 주차장 내 캐딜락 차량으로 인도되었다.



"베일 씨, 트렁크 좀 열어주시겠어요?"



캐서린 스미스가 시동을 걸고선 트렁크 버튼을 누르자 질이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왜요? 뭐 꺼낼 게 있나요?"



질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인자한 웃음을 보냈고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이런 싯팔!"



트렁크 안에는 부패하기 시작한 한 중년 남성의 시신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뒤로 잰걸음을 치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막 운전석에서 걸어 나온 캐서린 스미스가 질의 바로 뒤편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헌데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놀라 나자빠진 내 입 한쪽으로 찐득한 침이 새는 동안, 열린 트렁크 사이로 죽음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구린내가 탈출하는 동안, 두 여성은 그저 가만히 서선 조용히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이런, 싯팔! 여기 시체가 있다고! 안 들려?"



질이 걸어와 트렁크 안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쭈그려 앉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길 가다 만난 동네 아이를 타이르듯이.



"베일 씨,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스미스 부부는 당신에게 재산관리에 대한 모든 법적 서비스의 대행을 맡기려고 했어요. 둘의 재산은 아주 방대하고.. 동시에 복잡하고.. 무슨 말인지 당신도 충분히 알겠죠. 그런데 사실 밥은 지난주 외출한 후에 갑자기 연락이 끊긴 상태예요. 차량과 여권은 그대로 휴대전화와 지갑만 챙기고서요. 오늘은 일단 밥의 차량등록증을 챙기려던 거였는데.."


"엿 까는 소리 하고 계시네! 내가 중고차 딜러요?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시오! 이봐.. 이.. 년들아! 나는 돈에 움직이는 사람이야. 당연히 지불받은 돈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내 의무고! 그렇다고 이런 개수작에 나를 끌어들여? 계약종료야, 이.. 살인자들아!"


"그렇지 않아요, 베일 씨."


"가까이 오지 마!"


"진정하세요. 우리도 무척이나 놀랐답니다. 다만 너무도 놀라서라고 설명해두죠. 물론 우리는 밥의 죽음과 무관하고요."


"거짓말! 내가 당신 같은 것들을 한두 번 보는지 알아? 이런 지긋지긋한 치정극은.. 이게 법적으로 알리바이나 유리한 증언이 될 거라고 생각해?"


"베일 씨, 일단은 신고부터 해주세요. 우리가 살인자인지 아닌지는 먼저 경찰이 와야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손이 떨려서 못하시겠다면 제가 하죠. 대신 가서 캐서린을 보살펴 주겠어요? 남편의 시체를 막 발견한 참이잖아요."



나는 잠시 두 여자를 번갈아 둘러본 뒤 크게 한두 차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신고하죠. 당신과 캐서린 스미스 씨는 떨어져 있어요. 설령 시체에 손댈 생각일랑 하지 말고."



잠시 후 도착한 경찰에게 최대한 간략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들의 동태를 주시했는데 어쩐지 묘한 위화감 같은 게 들었다. 그녀들의 만면엔 분명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에게서 나타나는 상실감이 박혀있었다. 그런데 반면에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레 잃었을 때의 당혹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갔고(적어도 이곳 LA는 말이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녀들과의 접촉은 없었으며, 나는 하릴없이 일상으로 복귀했다. '베일 씨, 계약은 언제든 중도에 파기해도 됩니다. 위약금은 계산해보니까 200만 달러네요.' 질이 마지막으로 내게 건넸던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간의 일은 LA 타임스 기사로 대신하는 게 나을지 싶다.



지난주 퍼시픽 팰리세이즈 내 차량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과 관련하여 LAPD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LAPD는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미루고 있으나 사망자 배우자 측의 대변인인 변호사 할랜드 베일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지역의 60세 밥 스미스라고 한다.


형사법원은 시신에 대해 현재 LAPD가 조사 중이므로 관련 사항은 일부 비공개이나 익명을 요구한 법집행기관 내의 인사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밥 스미스가 맞으며 아직 사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타살은 아니라고 전했다.


피아니스트인 모친과 미생물학자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밥 스미스는 1980년대 UCLA에 입학하며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 과학자가 되고자 했었다고 한다. 허나 UCLA의 대변인에 따르면 밥 스미스는 중도에 자퇴했으며 그의 생전 요청에 따라 세부적인 사항들은 모두 열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후 밥 스미스의 행적과 직업에 대해서는 외부로 알려진 게 전혀 없다. 심지어 LAPD는 그가 직업을 가졌었다는 기록이나 세금신고서 제출 내역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한편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저택수색 과정에서 드러났다. 해당 수사 책임관인 윌리엄 하비 경감은 밥 스미스의 저택에서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했으며 모두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또, 밥 스미스의 명의로 등록된 차량이 수륙양용 SUV만 14대이며 이러한 차량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 보관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LAPD 청장은 본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밥 스미스 씨가 어떠한 마약상 및 총기거래에도 연루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또 그의 재산과 관련하여 어떠한 범죄 수익과도 연관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한 끝에 우리는 그를 단순한 개인 총기 수집가로 결론 내렸다.'


밥 스미스의 시체를 발견하고서 최초로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지역의 변호사 할랜드 베일로, 그는 스티븐 시걸과 같은 여러 할리우드 셀럽들의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그로부터 한 달하고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들과의 계약 종료를 코앞에 둔 바로 그때였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예고도 없이 질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베일 씨, 잔금을 계산할 때네요. 정식 착수금의 25퍼센트니까 25만 달러. 그리고 루크스에서 약속한 15만 달러. 총 40만 달러를 그 계좌로 보내드리죠. 베일 씨와 계약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직접 만납시다."


"네?"


"직접 만나서 계약을 마무리 짓자는 말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베일 씨는 계약을 완수하셨으니 약속된 돈만 받으시면 됩니다."


"질, 이 계약을 탈 없이 끝내고 싶죠? 그쵸?"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이 모든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은 거냐고 묻는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직접 만난 자리에서 계약을 끝내야겠습니다. 그거 아시죠? 지금 캘리포니아 말고도 전역에 밥 스미스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 걸요. 내 말대로 하지 않겠다면 언론과 인터뷰를 할 생각입니다. 법적 해석에 위반되지 않는 사항 내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한 비하인드 이야깃거리에 대해 말이죠. 사건에 이어 이 황당무계한 법률 서비스 건도 뜨거운 감자가 되겠군요."


"좋아요, 좋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들었습니다. 알겠어요. 이번 주 금요일 오후 3시 사무실에서.."


"오후 3시에 당신네 댁에서 보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어째서.."


"단순히 변덕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어요. 그냥, 당신이 클라이언트치고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통은 제 일이란 게 입장이 그 반대거든요. 한마디로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심지어 나는 의뢰주인 스미스 부부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중간에서 모든 걸 움켜쥐고서 컨트롤했기 때문.."


"그건 알다시피 밥에게 변고가 생겨서.."


"바로 이겁니다. 네, 그래요. 바로 이걸 말하는 겁니다. 이미 며칠이나 지난 시신을 가지고서 나를 엿먹였다는 거! 경찰에게 들었습니다. 암이라고 하더군요, 말기 암. 밥 스미스는 암으로 병사한 거죠. 젠장, 대관절 무슨 수작입니까! 암으로 죽은 사람을 가지고서 2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들여 나를 이 광대극에 끌어들인 이유가 뭐냐 말입니다. 광대라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 고용됐는지 아는 법입니다. 당신은 눈먼 돈을 먹여 나를 얼간이 천치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액수란 게 나를 내내 물 먹였죠. 이 바닥 최고였던 나를 무력감과 모욕감의 골짜기로 자빠뜨린 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어릴 때 말이죠, 학교에 칼 맥칼라니라는 애가 있었어요. 우리 중 가장 덩치가 컸고 또 제일 포악한 놈이었죠. 그놈은 우리 코피를 터뜨리는 게 취미였는데.. 몸이 근질근질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애가 그날의 희생양이었어요. 물론 그건 저라고 예외가 아니었죠. 어느 날은 제가 코피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집에 가 질질 짜니 아버지가 화를 내며 저를 쫓아내더군요. 가서 똑같이 때린 놈 코피 터뜨릴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면서요.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어요. 사실은 그놈 반경으로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 했죠. 당시 그놈 주먹 크기는 이미 제 얼굴만 했거든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잘나가는 변호사가 된 저는 그놈 와이프로부터 의뢰를 받았죠. 그놈과 그놈 와이프 또한 동창이었거든요. 간단했습니다. 폭력성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쳤고 위자료, 양육비, 접근금지로 놈을 있는 대로 벗겨 먹을 수 있었죠. 나는 기꺼이 파격 할인가로 의뢰를 맡았고 놈은 슈퍼 푸주한으로 종일 생고기 썬 돈을 매달 자기 와이프한테 꼬나 박는 신세가 됐죠. 자, 그래서 내가 생각만큼 만족했을까요? 나는 한 가지 깨닫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준 교훈을요. 그건, 무언가를 갚아줄 땐 반드시 같은 거로 갚아야 한다는 거였죠. 나는 집에서 쫓겨난 날 어떻게든 칼 맥칼라니의 코피를 터뜨려야 했었습니다. 우리 개척자의 자손들은 눈에는 눈, 피에는 피라는 전통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어떻게 되갚겠다는 뜻이죠?"


"그렇다고 제가 고객한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모든 걸 감추려 드는 이 오만한 여성의 집에 찾아가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게 전부겠죠. 자기 껄 일체 오픈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여성이 홈그라운드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기분 좀 내는 거죠. 그럼 내가 내 체면을 담보로 190만 달러를 꿨다는 멍에도 사라질 테고. 사실,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서로의 기분 아니겠습니까?"


"알겠어요. 금요일 오후 3시에 저희 집에서 보도록 하죠. 주소는 그날 보내드리겠어요."



모레 오후 2시 50분. 나는 질이 보낸 주소에 따라 퍼시픽 팰리세이즈 인근 샌타모니카 내의 한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대문 앞에는 이미 멀리서부터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푸짐한 덩치 둘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유럽인의 외형적 특징을 한 둘은 정장 차림새를 하고선 시종 나를 노려봤다.



"뭡니까? 매트릭스라도 찍고 있어요? 질 불러줘요."



둘은 마치 영어를 못 알아듣거나 아니면 귀머거리라도 되는 양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해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위압감에 나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선 안 들릴 정도의 목소리 크기로 욕지거리를 몇 차례 내뱉는 게 다였다. 잠시 후 대문으로 나온 질이 두 덩치의 등을 다정스레 쓰다듬고는 내게 인사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형식적인(그리고 다분히 경계를 띤) 인사를 나누고는 안내에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는 마치 그녀와도 같았다. 모든 게 고풍스럽고 예스러웠으며 동시에 세련된 풍취를 띠었다. 허나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한 켠으로 진열된 작은 크기의 수많은 사진 액자들이었다. 그러한 사진들 너머로는 실로 방대한 수의 사람들이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연령대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독사진의 주인이었으며, 또 때로는 대가족으로 보이는 집단의 주인들이었다. (사진들 속에서 현관 앞의 덩치 둘도 찾을 수가 있었다)



"사진들이 많죠? 저는 생각보다 더 옛날 사람인지라 적어도 소중한 사진은 액자에 장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말도 안 되게 좋은 냄새를 풍기는 밀크티를 내게 건네며 질이 말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녀가 먼저 계약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얌전히 밀크티만 홀짝였다. 이윽고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그녀는 대뜸 수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준비한 대사를 읊듯이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스미스 부부의 대리인으로서 법적 서비스 제공에 대한 추가 지급금 일체를 지불하는 바입니다. 이로써 해당 계약은 상호 간의 이행에 따라 종결되었습니다."


"..이게 답니까? 그런데 대관절 내가 스미스 부부에게 무슨 법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거죠?"


"계약서에는 기간 내에 법적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법적 서비스에 따라 수임료를 지불한다는 문구가 아니라요."


"..대단하시군.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당신 뭡니까? 목적이 뭐예요? 좋습니다. 난 진실을 원해요. 이 40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진실을 말해줘요."


"그럴 필요 없답니다, 베일 씨. 40만 달러는 우리의 계약 이행에 따른 지불입니다. 지금 베일 씨가 말씀하시는 건 별개의 사안이고요. 나가는 길을 안내해드리죠."


"좋아요. 그래도 알아야겠다면요? 40만 달러의 반환 대신 다른 조건을 건다면요?"


"베일 씨.."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면요? 경찰이라도 부를 건가요? 아님 밖의 매트릭스들? 그 전에 빨리 말해야겠군요. 다음 조건은 이겁니다.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판사한테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 당신 집에 찾아오겠어요. 매일같이 현관문 밖에서 당신을 부르겠죠. 그럼 파파라치들이 할리우드의 공식 악어새인 나한테서 뭐 재미난 거 좀 얻어낼까 이곳을 순례하겠죠. 당신 매트릭스들이 코피 터뜨리는 법은 알아도 카메라 플래시 막는 방법은 모를 거라고 내기할 수 있습니다."


"베일 씨, 분명 전화로는 저희 집에서 계약을 마무리하는 게 다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걸 말씀드려야겠군요. 법칙 하나,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요. 베일 씨, 생각만큼 교활하시네요."


"뭘 기대한 겁니까? 교활하지 않을 거면 변호사 말고 다른 걸 했겠죠."



질은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어쩐지 공기가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진실을 알려드릴 테니 베일 씨는 어떤 대가를 지불할 건가요?"


"바로 이런 게 협상이죠. 말해보세요. 원하는 대가를."


"베일 씨가 지금까지 받은 190만 달러 전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 축내자는 겁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농담을 하지 않아요."


"지금 여기 앉아서 나눌 몇 마디 말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베일 씨, 슬프게도 진실이란 게 그런 겁니다. 때론 몇 마디 말에 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걸기도 해야 하는. 누구에게나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진실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죠.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필요로 하기에 그만한 돈을 당신께 지불한 겁니다."



질은 다정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엄격함을 품고 있는 표정이기도 했다. '우리'라. 첫 번째 단서를 얻게 되자 한층 더 내 몸이 달아올랐다. 따라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안에 포함된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나는 정말이지 알아야만 했다. 내 몸속 모든 세포가 그것을 원하고, 또 그러기를 종용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수 시간 같은 수 초 후, 질이 콧김을 한번 부드럽게 내뿜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베일 씨.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해야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내 딸 애한테도요. 마누라는 별거 중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꼭 그러셔야 할 거예요. 제 조건은,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것 모두 비닉특권을 엄수해달라는 겁니다. 비닉특권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알겠습니다. 맹세하죠."


"그리고 진실을 듣고 나면 얌전히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다시는 방문하지 마시고요. 일이 있으면 제가 당신 사무실을 찾아뵙도록 하죠."


"여부가 없습니다."



질은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거예요. 조금은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어쨌거나 끼어들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앞에 놓인 밀크티 잔을 한번 기울이고선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를.



"우리 셋..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제가 미국에 온 것은 1957년 4월 2일이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도착 후 얼마 안 있어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씨와 접선을 가졌죠. (나는 또 한 번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 왔어요. 다른 은하계에서요. (나는 끼어들 기분도 들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당시 천문학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도널드 맨젤 씨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서구식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토르, 돈, 질.. 우리는 그 이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죠.


멘젤 씨는 우리를 당시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장이었던 제임스 킬리언 씨에게 소개해주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요청에 따라 이 두 사람이 곧 아이젠하워 씨와의 접선을 주선해주었죠. 이 둘에게(또 아이젠하워 씨들에게도) 우리가 다른 은하계에서 왔음을 믿게 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요. 우리가 타고 온 소형 우주 비행선의 착륙지점으로 안내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별장에서 멘젤 씨와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와 국방부장관 및 정보국장을 앞에 두고 준비한 브리핑을 낭독했죠. 우리의 요구는 심플했어요. 지구로의 망명(그래요, 당신네들 표현 따라 우리는 정치적 망명을 온 거였어요)을 허락할 것, 그리고 시민권을 보장할 것. 마지막으로.. 혹여 우리를 추적해 지구로의 잠입을 시도할지 모르는 우리 행성의 요원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


아이젠하워 씨는 나머지 넷과 잠시 상의를 하고는 이내 그 제안을 수용했어요. 제안에 따른 우리의 보답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죠. 이 협상에 따라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원시적인 양자역학 컴퓨터를 위한 모듈러 디자인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인간사회에서는 지금껏 없었던 가장 극적인 변화가 발생할 것이며, 당신들의 능력과 끈기에 따라 수 세대 후에는 은하 간 이동을 위한 기초적인 아이디어가 창안될 거랍니다.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처음 발을 디뎠던 오리건 주에 비밀요새 겸 저택을 건립했습니다. (당신은 오리건 주에 가본 적이 있나요?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당신네 자연은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을 선사해준답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며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소형 비행 우주선이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주 아주 오래도록 살 수 있도록(바다거북이보다도 더 말입니다) 설계되었고 또 진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 많은 것을 버리고 바꿔야 했지만, 당신네들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이름과 땅은 여전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너무도 흘렀어요. 벌써 60년이에요. 멘젤 씨,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 우리를 알던 당신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 우리는 스스로를 도와야 하는 처지이죠. 방치되었다고 표현하지는 않겠어요. 당신네들은 망명객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를 베풀었고 지난 60년간 우리는 인간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정말 이곳 지구가 우리의 집이랍니다.


저와 돈이 이곳에서 낳은 아이들은 인간과 연을 맺어 자신들의 아이들을, 그리고 그 아이들은 또 다른 인간과의 사이에서 새로운 탄생을 이루었거나 앞두고 있답니다. 토르 역시 인간 여성과 두 차례 결혼을 했고(첫 번째 여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주 많이 낙담했었죠) 그의 아이들 역시 이곳에서 결혼과 출산을 경험했죠. 그러한 아이들 모두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으며 결코 그걸 잊는 법이 없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종종 오리건 주의 고향 집에서 만남을 갖습니다. 음식을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본연의 뿌리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며 서로를 축복하죠. 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정말 좋아한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곳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그러면서 매일 자연을 느끼고 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공동체이고 뿌리 된 자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다양한 특허의 주인인지 안다면 당신은 정말 놀랄 거랍니다.


그런데 최근.. 재앙이 스며들기 시작했어요. 우리,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저를 추적해 우리 행성의 요원 몇몇이 이곳에 잠입한 거죠. 그들은 이미 당신네들 사이에 있어요.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답니다.


밥까지, 벌써 우리 아이들 여섯이 죽었어요. 그들은 우리를 데려가려 하고, 우리에게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이들을 위해 하며 무언의 협박을 벌이고 있는 거죠. 당신 말이 맞아요. 밥의 사인은 말기 암이죠. 멀쩡하던 애가 반년도 안되어 암으로 죽은 거랍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질병을 심어놓고 있어요.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노선을 택했을 것 같나요?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냈답니다. 그 과정에서 밥이 희생되었죠.(그녀는 잠시 상념에 잠긴 듯 수 초 후에나 말을 이었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고향 땅 오리건 주에 공동체를 설립했어요.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거랍니다. 누구도 이걸 방해할 순 없어요. 심지어 당신네 대통령일지라도."



"....이야기 끝인가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두 했답니다."


"오리건 주에서의 공동체 생활이라, 아미시 마을이라도 만들려고 그런답니까?"


"비슷한 거죠. 다만, 기원이 없는 곳에 믿음의 뿌리를 두지는 않는다는 게 차이겠네요.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원과 뿌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좋아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네시, 빅풋, 늑대인간.. 저도 그런 걸 참 좋아했었죠."


"저도 그렇답니다."


"그래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베일 씨. 오, 그리고 물론 돈은 일체 반환하실 필요 없으세요. 제 말을 아주 잘 경청해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요. 아구가 안 맞는 게 있어서요. 어째서,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밥의 시체를 일부러 내게 보여주고..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베일 씨, 당신네 공놀이 광고 1초에 몇억이 들어가는지 아세요? 우리는 미국 전역에 1달 넘도록 홍보를 한 거고 저는 제가 지불한 돈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습니다, 질."


"베일 씨, 모든 생물체는 호전적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벌써 여섯 아이를 잃었어요. 이제 우리도 대응에 나설 거랍니다. 그들도 사실은 잘 알고 있겠죠. 다른 은하계에서 총 맞고 죽어봐야 아무도 몰라준다는 걸. 또, 당신네들 중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그들은 이곳 어느 나라에도 시민권이 없는 자들인데. 우리는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침입을 시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미리 홍보한 거예요. 이제 그들도 알겠죠. 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그들을 죽여도 그들은 지구에 위해를 가할 수 없답니다. 은하계의 규약이라는 건.. 정말 골치 아픈 행정이거든요."


"그러니까 말인즉슨, 나를 이용해 사건을 키웠다는 겁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우리 생각보다도 더 유명세가 있더군요. 당신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가판대 타블로이드판 해프닝 대신 CNN 토픽으로 다뤄질 수 있었던 거죠. 덕분에 당신네 정부 사람들이 앞으로 밥의 유산을 건네받은 캐서린을 주시하게 되겠죠. 자연히 요원들은 더욱더 접근에 어려움이 생길 거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밀크티 잘 마셨습니다. 질, 아주 좋았어요."


"고마워요, 베일 씨. 다음에 또 당신을 찾게 되면 그땐 수임료를 좀 깎아 줄 건가요?"


"아뇨. 당신네들은 인간의 무서움을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배웅나올 필요 없습니다. 나가는 길 아니까요. 한 번 본 건 끝까지 기억하거든요. 매트릭스들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길."


"당신도요. 당신과 내가 믿는 신이 서로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질의 저택을 나와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년. 하여지건 돈 많은 것들이 미치면 더 극적으로 돌아버린다니까."



이건 정말이다. 나는 이걸 지금껏 몸소 체험해왔다. 이곳 할리우드는 졸부들과 미친 것들의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오히려 저 정도 피해망상은 귀여운 편이다.


질의 이야기를 완전히 잊고서 일상으로 돌아간 지 몇 달이었다. 내가 다시금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것은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대로변에서 내게 대뜸 말을 걸면서부터였다.



"할랜드 베일 씨? 맞으시죠?"


"누구시죠?"


"국토안보부입니다."


"증명해보시죠."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슈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세워선 안쪽을 펼쳐 보였다.



"그래, 국토안보부 요원이 대관절 제겐 무슨 용건이랍니까?"


"베일 씨께서는 몇 달 전 스미스 부부의 변호사셨죠?"


"그랬죠. 일을 맡은 적이 있었죠."


"혹시 이 사진 속.. 세 명을 보신 적이 있거나 알고 계십니까?"



그가 아이폰 7을 꺼내어(아마 그도 딸이 있는가 보다) 스크린에 띄어진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뇨. 이들은 스미스 부부가 아닌데요."


"예, 그래요. 이들은 다른 사람이죠. 모르십니까?"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셋 모두 본 적이 없군요. 누군데요, 이 사람들?"


"미국 안보에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자들이죠."


"그렇군요. 꼭 잡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정말 본 적이 없으십니까?"


"네, 혹시 나중에라도 보게 되면 알려드리죠. 명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일 씨."



나는 남자와 간단히 눈인사를 교환하고는 가던 방향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돌려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걸음 중간중간, 마치 이곳의 중력을 아직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듯 발을 살짝씩 땅에 끌어대며 걸음을 이어갔다. 나는 그날 국토안보부에 문의해 그가 보였던 신분증 속 요원이 존재하는지 물었고 돌아온 대답에 별반 놀라지 않아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가 자신의 아이폰 7에 띄었던 사진,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분명 5-60년대 풍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사진. 나는 이 셋이 함께 찍힌 또 다른 사진을 질의 저택에서 보았다. 물론, 그 사진은 당시 몰래 촬영한 내 아이폰 7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이기도 하다. (명심하시라! 딸이 있으면 아이폰 7로 소리 없이 촬영하는 게 가능해진다)


클래식하지만 분명 현대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셋은 식당 루크스에서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채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전혀 늙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내 아이폰 7에 저장된 그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고선 중얼거렸다.



"안녕. 토르, 돈, 질."



만약,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질에게 좀 더 정중하게 굴었을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온 이 용감한 이민자에게.


자, 코카인을 빨고서 뺑소니를 쳤는데 어떡하냐고? 음주운전을 하다 차량 서너 대를 박살 냈다고?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어? 여자친구 얼굴에 새긴 멍 자국?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사실 인간이 아니라고? 걱정 말고 모두 내게로 오시라! LA 최고의 악명을 자랑하는, 이 구원자 베일에게로!





-fin-




















후기


본 이야기 속 밥 스미스의 실제 모델인 제프리 래시는 2015년 7월 4일 자신의 SUV에서 부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UCLA 대학 중퇴 후의 행보가 알려져있지 않으며 직업에 대한 기록이나 세금내역이 불명확하다.


또 저택에선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되었으며 모두 사용된 적 없는 것들이었다. 수억 원의 현금 및 그의 명의로 된 10대가 넘는 SUV 또한 발견되었고 말이다.


나는 이 미스터리로 종결 중인 사건을 접하고선 이내 해당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왜 이런 식의 이야기냐 하면, 나는 지금껏 세간에 알려진 UFO 사건들은 모두 와전되었거나 뻥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지난 수년간 '이상한 옴니버스'를 운영하며 나름의 조사를 한 결과)


사람들은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공간 낭비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 말대로 우주에 우리 이외의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지성체가 오로지 우리뿐이라는 가정은 지독한 오만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계인과 접촉했었고 외계인은 지구에 방문했었을까? 허나, 광활함과 유구함을 뽐내는 이 우주에서 티끌보다도 작은 지구에 벌써 서로 다른 외계인들끼리 접촉이 있었다는 가정 또한 우주에 대한 오만이자 지구에 대한 자만일 수가 있다.


하지만 가망성이 없는 것에 대한 공상만큼 신나는 게 없다. 만약 외계인이 은밀하게 지구에 거주 중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바로 정치적 망명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곳이라고 지적 생명체가 사는 게 다르겠는가? 정적(政敵)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아, 한편 제프리 래시의 약혼녀는 자신의 모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엄마, 그 사람은 사실 외계인과 인간의 혼혈이야."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33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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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욕으로 사용되는 비치는 beach가 아니라 bitch예요... beach는 해변...
  2. 내가 볼땐 제프리 레시는 CIA의 살인청부업자이가나 스파이라고 해석하는게 맞지않을까요? 그렇게 신분이 노출되지않은것은 미국 정부의 도움이 없인 불가능하니까요~ 특히 UFO나 외계인등의 이야기는 군사기밀을 덮기위한 미정부의 역정보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되네요~ㅎㅎㅎ 하지만 님의 소설같은 상상력이 더 재미있네요~
  3. 아 너무 재밌따 ㄷㄷ

살인소설 2: 다시 시작된 저주, 2015

호러 영화 짧평 2018.01.25 23:12



아, 이게 뭔지 정말...

1편도 모자란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합격점 이상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2편은 완전히 말아먹었네요.

1편이 스너프 필름의 느낌이라도 전달했다면, 2편은 그냥 아무 것도 못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단 기본 스토리 구성부터가 전작을 못 따라갑니다.

전작이 비밀을 파헤치는 쪽이었다면 이번 건 참사를 막는 쪽이죠.

호러 영화에서 어느 쪽이 더 오싹할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전작만큼의 스토리 구성이 안 나오니까 양보다 질이라고 스너프 필름 비중을 왕창 늘렸습니다.

근데 그게 전작처럼 리얼하고 오싹한 느낌이 안 들어서 그냥 그저 그래요...





에단 호크가 전편에서 사망하며 하차한 탓에, 전편의 조력자였던 제임스 랜슨이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호감 가는 캐릭터로 1편에 이어 노력했고, 좋은 모습 보여줬습니다.

1편에서는 경찰이었는데, 2편에서는 때려치우고 부굴의 저주를 막으려 동분서주하는 역할입니다.

대단히 소시민적인 호러 히어로인데, 그래서 더 응원해주고 싶어지는 게 있어요.

배우한테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네요.


더불어서 1편에서 제목 멋대로 번역한 죄값을 이번에 톡톡히 치뤘습니다.

원래 1편에서 에단 호크가 작가로 나오는 탓에 살인소설이라는 제목을 갖다붙인건데, 이번 작품에는 소설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나오거든요.

원제가 Sinister, 사악한 내지는 불길한이라는 뜻인데 이걸 이런 식으로 바꿔버렸으니 원.




1편에서도 하는 거 하나도 없이 아바타 놀이나 하던 부굴은 더욱 찌질해져서 돌아왔습니다.

악신에게서 느껴져야 할 위압감과 공포는 온데간데 없고, 찌질하게 뒤에 숨어서 겁이나 주다가 사라지는 삼류 악당으로 나와버리는 게 이 영화 최대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빼앗는 악신이라더니 하...

애들이나 겁주다가 마지막에서나 좀 있는 척 하는 동네 양아치 같은 모습이 정말 꼴뵈기 싫었습니다.

너 하나도 안 무서워 임마.




이 영화 시리즈가 꾸준히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소재 자체는 진짜 괜찮다는 겁니다.

근데 1편에서는 그나마 진짜 스너프 필름 느낌이라도 나던 살인영화가, 2편 들어서는 그냥 아무거나 갖다붙이고 대놓고 보여주는 형태가 되어버렸어요.

아무리 호러 장르가 저가에 찍어서 남겨먹는 작품성 모자란 B급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대충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3편은 아마 영원히 못 나올 거 같네요.


제 점수는 4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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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와우 완전히 혹평이신데요ㅋㅋ근데 이렇게 비난하시니 왠지 더 궁금해져요! 보면 후회할 게 뻔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후회를 겪고 싶은 듯한? ㅋㅋㅋ 1편부터 함 봐봐야 겟어요 얼마나 구린 영화인지 궁금궁금ㅋㅋ
  2. 심심한나무 2018.02.06 23:03 신고
    저도 살인소설을 되게 재밌게 봤어요~ 특별히 일반적인 공포영화랑 큰 차이점이 없지만 무섭게 잘 만들었더라구요. 그래서 2편도 기대했는데 여기저기서 혹평이라 그냥 안봤어요 ㅋㅋ

카니발 - 피의 만찬, 2013

호러 영화 짧평 2017.12.27 23:28



극단적인 광신과 카니발리즘, 그리고 가스라이팅.

무겁고 독특한 소재를 다뤘는데, 나름대로 깔끔하게 잘 뽑아낸 영화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의 대물림과, 강제로 이루어지는 세뇌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수입판 제목에서 나타나 있듯, 식인에 대한 내용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과거 미국 개척시대, 극한의 상황에서 식인을 시작한 가문이 그 전통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을 기반으로 삼고 있죠.

사실 이런 자연에 의한 극단적 상황, 근본주의 기독교 느낌이 풍기는 남부 백인을 다룬 작품들은 우리나라 정서에서는 100% 이해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미국 정서를 감안하고 본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 내내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으로 가득 찬 영화입니다.

희생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살인과 식인의 행사는 이미 몇대 전부터 지속된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 오랜 세월, 모든 가족 구성원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보면, 이 체제가 유지되는데 얼마나 큰 폭력과 억압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가부장적 체제 위에 만들어진 단 하나의 선택지.

여기에 동의하면 그 체제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잡아먹혔겠죠.


부모는 이미 지속된 식인으로 인한 쿠루병에 걸려 제대로 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와중.

자녀들은 그런 부모 아래, 강제로 식인과 살인에 동참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강요된 체제를 거부하는 순간, 칼끝은 방향을 바꿔 돌아설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욱 오싹해지는거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통과 의례 부분입니다.

이 부분의 충격은 직접 보시는 게 더 인상적일테니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영화 내내 울려퍼지는 노래, It Was Me That Made Her Bad 도 그런 충격을 설명하는 연장선에 있는 거겠죠.


대단히 매력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토리의 얼개적인 측면에서 왜 이런 선택이 나왔는지 의아해지는 부분들이 분명 있거든요.

분위기를 위해서 서사를 희생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명확한 설명을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꽤 답답한 영화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폐쇄적인 사회와 광신의 조합은 늘 매력적입니다.

더불어 이 작품의 엔딩 또한 꽤 의미심장하고요.

조금 더 어두운 분위기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남기는 하지만요.

괴물을 미워하다 그 스스로 똑같은 괴물이 되는 이야기는 우울하면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말부만 생각하면 영화의 원제, We Are What We Are 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겁니다.


제 점수는 7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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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생긴 일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12.10 21:39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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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생긴 일




나는 지금 고등학생을 흥분케 하는 3요소와 함께하고 계시다. 그것도 셋을 동시에.


첫째, 하우스 파티 장소로 향하고 있다. 분명 그곳에서 제대로 된 리큐어를 찾을 수가 있을 거다. 하다못해 럼이라도. 둘 다 없더라도 문제없다. 내가 하나 가지고 있거든.


둘째, 당장 인접한 주(州)로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기름이 채워져 있는 오픈카. 말이 필요하랴! 비록, 10년 넘은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이긴 하지만.


셋째, 옆자리의 골 때리는 친구 놈. 이놈은 옆집에 사는 애런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바보짓을 할 때면 항상 함께였다. 사실 이 세브링도 이놈 거다. 제 큰아빠한테 물려받은 건데 웃기게도 아직 면허가 없어 이렇게 내가 매번 운짱을 맡는다.


애런은 불룩 나온 배 때문에 서 있는 상태에선 자기 발을 못 볼 정도의 뚱땡이에다 흑갈색 곱슬머리를 한 대단히 웃기는 놈이다. 동시에 애런은 학교 제일의, 아니, 카운티 내 최고의 색골로 만약 물어만 본다면 심지어 아무 여학생의 사타구니 털 개수까지도 척척 대답할 놈이시다.


그리고 나, 개빈. 평범한 가정환경, 중하위권 성적,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6피트를 넘는 키(이모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매번 왜 이렇게 컸느냐며 야단이다)에다 제법 멋들어진 컬의 모질과 고르고 하얀 치아를 지니고 있어 향후 20년간은 외모 덕을 톡톡히 볼 십 대다.



"그나저나, 개빈. 우리 오늘 몇 시까지 있을 수 있는 거냐?"


"못해도 11시. 아니, 12시. 우리 꼰대들 오늘 할머니 댁에 갔다가 오거든."


"오, 개빈이 엄마아빠를 꼰대라고 부른대요. 오늘 또 땡깡 부렸다고 엉덩이 맴매라도 맞았나 보지?"


"닥쳐, 똥돼지. 그나저나 확실해? 진짜 괜찮은 애들로 산을 이루고 있다고?"


"이봐, 개빈. 그거 알아? 난 가끔 너한테 했던 말을 또 해야 할 때마다 네 입 구멍에 우리 할아버지가 사용한 기저귀를 쑤셔 넣고 싶은 거? 너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냐? 야시엘네 대저택이라고! 그 야시엘!"


"..나도 알아, 야시엘이 누군지. 지나가다 본 적 있어. 네 똥차 값보다 비싼 타이어를 4개씩이나 박아놓은 차를 몰고 가던 거. 그래.. 그 야시엘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그 멕시코 놈 집안은 뭐 하길래 그렇게 돈이 많은 거야?"


"이런, 이런. 선생, 멕시칸이 여기 와서 그렇게 떵떵거리고 산다면 뭐겠어?"


"뭐? 뭔데?"



애런은 대답 대신 검지를 치켜들어 자신의 코밑에 바짝 대고는 바깥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에 콧숨을 한 차례 훅 소리 내어 들이마셔 보였다.



"뭣?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당신의 상식 머리시네요, 선생."


"상관 안 해. 여자들만 많다면야."


"걱정 마시게, 형제여. 성경에도 나와 있어요. 마약이 있는 곳에 여자가 꼬이는 법일지니."



애런과 내가 파티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분위기가 한창으로 접어들었는지 저마다 짝을 지어 서로 음탕한 눈길을 건네고 있었고, 패배자들은 외곽에 띄엄띄엄 자리한 채 포기를 모르는 질척한 눈빛으로 사방을 내리훑고 있었다. 우리? 물론 도착과 동시에 애런과 나도 미친 듯이 주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삼 빠떼루지! (애런이 제 큰아빠한테서 배워온 유행어다)


그리고 그때였다. 시야에 한 여자애가 들어온 게. 그 애는 동그랗고 작은 반원의 이마가 돋보이도록 연한 다갈색 머리를 야무지게 묶어 올렸으며, 키는 작지만 긴 다리가 부각되도록 딱 알맞은 길이감의 청바지를 입고서, 흰 티 밖으로 친오빠 옷장에서 꺼내온 듯한 검정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아니, 실은 내가 왜 그런지 확실히 알지만) 나는 그 애에게 감히 눈을 떼지 못하고선 시종 가슴팍 어딘가가 애리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그 애만이.. 젠장, 이런 진부한 표현을 할 줄이야. 마치 그 애만이 주변보다 더 또렷히 보이는 듯했다.



"선생,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누구야?"


"쟤를 몰라? 아.. 그렇지. 미안. 할아버지 병상이랑 장례 때문에 최근 학교에 잘 못 나왔었지.. 여하튼 이름 킴벌리 로렌, 뉴저지에서 얼마 전 이사 옴, 무남독녀, 성적은 중상위권, 아직 어울리는 그룹 없음, 피우는 담배 브랜드는.."


"좋았어!"


"어..? 잠깐, 개빈. 잠깐, 잠깐. 너.. 쟤한테 들이대려고?"


"당삼 빠떼루지, 인마!"


"포기하는 게 좋을걸? 쟤가 깐 남자애들만 모아도 카운티를 형성할 수 있을 거다. 그 안에서 곧 선거인단도 발족할 수 있겠고. 우리 학교의 자랑 쿼터백 왕자님께서도 2초 만에 까이셨다니까!"


"..왜?"


"..왜라니? 너 지금 왜냐고 물은 거냐? 너도 가끔은 네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해보는 게 어때? 왜긴 왜겠냐, 레즈니까 그렇지. 아니고서야 쿼터백 왕자를 쳐다도 안 보고 까버리겠냐? 봐봐! 이러는 동안에도 저기 한 명 더 까였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뭐, 다른 이유 뭐?"


"아마 아직 마음에 차는 남자를 발견하지.."


"오, 야훼시여! 돌아가시겠네! 개빈이 또 똥 잡수시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내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개빈, 아빠 말 잘 들으렴. 널 위해 충고 하나 해줘야 할 시간이구나. 잘 들어, 얼빵아. 네가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는 건 나와 함께 있어서야. 알아들어? 여기 이 2-300파운드짜리 유대인 놈 옆에 서서 미소를 보내기 때문에 여자애들이 받아주는 거라고! 개빈, 아빠는 네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다물어, 개빈. 그건 부족한 놈들이 스스로를 기만할 때나 외우는 주문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 자, 정신 차리고 빨리 다른 여자를 찾아봐. 기왕이면 두 명으로. 난 정말 아무나 괜찮으니까."


"..좋아, 이 꼬부랑 털 돼지 놈아. 너 만약 내가 저 여자애와 함께 여기 저택 문을 나서면 어쩔래?"


"..네 말은, 지금 쟤를 꼬셔서 같이 나갈 수 있다고?"


"어이, 가는 귀가 먹으셨나? 왜 했던 말을 또 하게 만들지? 입 구멍에다 너네 할아버지 기저귀를 쑤셔 넣어 줄까? 자, 내가 저 여자애와 그러면 어떻게 할래? 대답해보시지, 선생."


"좋아! 네가 성공하면, 내가 네 꺼 한 번 빨아준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마치 마상시합에 출전하는 앙리 2세마냥(뭐, 비록 그는 시합 중에 뒈졌지만) 당당한 보무로 그 애에게 다가갔다. 뒤편으로 '개빈, 그냥 아빠 품으로 돌아오렴.'이라고 조롱하는 애런을 무시하고서. 그렇게 나는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서 그 애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용기 있다고? 아니, 사실 나는 엄밀히 말해 겁쟁이에 속하는 편이다. 애런의 도발에 적잖게 흥분해선 반발심에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 그건 그저 핑계이며 사실 나는 뭐든 상관없으니 그저 그 애와 한순간만이라도 눈을 맞춰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그 단편적인 기억조차도 내게는 두고두고 환희로 박제될 게 분명하리란 직감해서였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안녕, 킴벌.. 로렌."


"..안녕."


"아, 나는 개빈이야. 개빈 마틴."


"술 이름 같네. 근데 너 나 아니?"


"어.. 응, 우리 같은 학교야. 그리고.. 사실 네 이름은.. 저기 돼지 몸통에다 사람탈 올려놓은 애 보여? 쟤가 알려줬어. (애런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마디로 정보통이지.. 너도 학교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쟤한테 물어보면 돼."


"그래, 고맙다."



마뜩잖아하는 그 애를 앞에 두고서 발작해대는 심장이 내게 유혹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인마, 당초 소원을 풀었잖아. 이제 돌아가자. 꼭 한 발 더 내디뎌야 늪인 걸 아는 게 아니니까.' 허나 나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서(사실 순간 넘어갈 뻔했다) 크게 양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이고는 다시 그 애에게 말을 붙였다.



"좋아. 로렌, 지금 나한테 1쿼터만 시간을 내줄래? 어쩌면 지금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고작 1쿼터야, 15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레미 마틴?"



사실, 그 순간 내 몸의 모든 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에 휩싸였었는데.. 동시에, 우습게도 내 입은 스스로 움직여 말을 내뱉고 있었다.



"15분이야. 너 혼자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어도 어차피 15분은 흘러."



그리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애의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더니 곧 삐딱하던 몸을 풀어 완전히 내 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반가워, 개빈. 나는 로렌이야. 킴벌리 로렌. 어.. 지금 공 울렸어."



그다음?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원래 중요한 순간이란 건 그런 거다. 그저 나는.. 1쿼터 동안 나 자신을 기꺼이 내던졌고..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는데..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난 존재 같았다. 그건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쿼터 버저가 채 울리기도 전에

그 애는 나를 받아주었다.


뭐.. 이후 한 차례 실수를 하긴 했다. 무슨 실수냐 하면,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그때껏 팽팽하던 긴장이 풀리면서

흔히 저지르곤 하는 '말실수' 말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그 실수가 우리의 관계를 극적으로 끌고 가기는 했다만.



"사실 너한테 말 걸기까지 많이 걱정했거든."


"왜?"


"네가 지금까지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고 들어서. 그래서 네가.. 아.. 음.."


"레즈라고?"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 순간, 그 애가 까치발을 들어 내게 기대는가 싶더니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말했다.



"지금 증명이 된 거지?"



이제 우리는 시끄러운 곳을 벗어나 좀 더 사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나는 그 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애런에게 돌아갔다. (그때까지 애런은 나를 마치 두 발 자전거에 처음 도전하는 자식을 지켜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애런."


"믹 재거 선생께서 오셨군. 그래, 알았어. 지금 빨면 돼?"


"아니, 괜찮아. 대신 정말 미안한데.. 그.. 차 좀 빌릴 수 있을까?"



애런은 잠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내게 건넸다.



"당삼 빠떼루지, 인마! 걱정 말고 쓰게나, 친구. 시트 더럽히지만 말고. 나는 마약왕이랑 코카인이라도 하다가 카풀할 테니까."



애런은 정말 멋진 놈이다!




 



나는 그 애에게 우리 마을 최고의 야경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며 야경보다도 빛나는 시간을 공유했다. 그렇게 자정 즈음..


있지 말이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종종 허세를 떨어야 하는 가련한 동물인 법이다. 나는 그 애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을 할 엄두조차 내지 않고선 집에 데려다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애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고 절대 찌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그 애가 시선은 정면에 둔 채 나지막이, 그러나 명료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서 조금 더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지 몰라. 사실.. 우리 부모님이 오늘 집을 비우셨거든."



그 말에 나는 제한속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링컨이 운전대를 잡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코너가 연속해서 나오는 좁다란 진입로에서 차선에 걸쳐 돌던 중 마주 오는 차량과 가까스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젠장! 애런은 집 나간 전조등 하나를 도통 교체할 생각을 안 한다) 우리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숨넘어가듯 웃어 젖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다면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사랑은 종종 사람을 비상식으로 몰고 가는 법이다.


그렇게 마지막 코너에서 차선을 걸친 상태로 가속 페달을 밟았고, 커브 길을 빠져나온 순간 채 인식을 하기도 전에 번쩍거리는 빛이 시야를 온통 채워버렸다. 신경을 긁어 대는 경적음과 함께. 그리고 나는 찰나였지만 내 시야가 뒤집힌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추억을 공유하던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겠다.



"저런 후레자식 같으니!"



나는 가까스로 핸들을 꺾어 마주 오던 차량을 피하고는 외쳤다. 옌병할, 안 봐도 뻔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십 대 놈이겠지. 십 대 놈들은 정말이지, 대관절 무슨 배짱으로 자기에겐 불운 따윈 찾아올 리가 없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조심성이라도 부리면 사탄이 거시기라도 쥐어뜯어 가는 줄 아는 족속들.


나는 잠시 막 스쳐 지나간 차량이 전조등 불량이란 것을 떠올렸지만 지금 시각까지 보안관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서 집에 가서 몸뚱어리에다 따뜻한 물을 뒤엎고선 마누라와 함께 딸애가 보낸 손자놈 영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마누라가 슬쩍 먼저 봤을지도 모르겠군. 마누라는 그런 면에선 일견 뻔뻔스럽거든)


그때였다. 내 뒤편으로 날카로운 경적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차를 세우곤 잠시 눈을 껌뻑인 뒤(옌장, 늙으면 무언가를 깨닫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 부리나케 차를 돌려 충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곧장 경찰과 구급대에 신고를 한 나는 사건 현장을 5초 정도 둘러보고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경찰만 불러도 될 뻔했군.'



현장을 모두 둘러본 후 널브러진 두 차량 저 너머로 누군가가 쓰러져있는 것을 목도했다. (아마 컨버터블 차량에서 튀어나간 거겠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고, 나는 쓰러져있는 사람이 바로 개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은 지나가다 마주칠 때나 인사를 나누던 개빈이지만 어릴 때는 종종 주말이면 우리 집을 찾아와 보안관 놀이 따위를 하다가 마누라가 만들어준 쿠키를 먹곤 했다. 또, 방학 때는 잔디밭을 깎아주고선 수고비를 받아 가기도 했었다. 개빈은 아주 훌륭한 일꾼이었다. 정해진 돈만을 타 갔고 건강보험을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나를 보안관 아저씨라 부르던 개빈, 그 애는 커서 나 같은 보안관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아니, 그건 우리 딸애였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점점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져 간다.



"얘야, 개빈! 내 말 들리니?"


"..보안관 아저씨.."


"그래, 보안관 아저씨란다. 개빈, 세상에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제가.. 바보같이.. 사고를.. 아저씨.. 제 옆에 탄 애는요..?"


"누구 말이니, 개빈?"


"..제 옆에.. 킴버가 타고 있었어요.. 아주 좋은 애예요.. 무사한가요..?"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그저 개빈의 얼굴 여기저기를 손으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킴버.. 좋은 아이인데.. 나 때문에.."


"개빈, 이건 사고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우리 차랑.. 충돌한 차.. 그 사람은 괜찮나요..?"


"..개빈,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개빈.. 오, 신이시여!"



부품이 어지럽게 헤쳐진 차량마냥 개빈의 몸 또한 그러했다. 나는 개빈의 온전한 손 한쪽을 두 손으로 움켜쥐느라 흐르는 눈물들을 그저 밑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아저씨..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해요.."


"그래.. 그래.. 게빈, 그러마."


"..킴버.. 킴벌리 로렌네 부모님에게.. 정말 정말.. 죄송하다고.. 그리고 다른 운전자.. 가족에게도.. 너무 죄송하다고.. 애런에게는 차를.. 걔는 아마.. 벌써 용서했을 거예요.."


"그래.. 게빈.. 아저씨가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하마."


"..그리고.. 보안관 아저씨.. 약속해요.. 우리 엄마 아빠한테.. 그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 좀 내버려 둬요.'예요.. 그분들께.. 꼭 전해주셔야 해요.. 개빈이 너무나 사랑한다고.. 다시.. 다시.. 엄마 아빠 자식으로 태어나면 안 되냐고.."


"..그래. 개빈, 보안관 아저씨가 반드시 약속하마. 약속하마."


"..아저씨.. 나 때문에.. 죽었어요.. 나는 지옥에 갈 거예요.."


"개빈, 그렇지 않아. 사고였다. 누구한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너무 추워요.."


"..개빈, 신이 곧 너를 따뜻하게 품어주실 거다."


"..아니요..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그러지 않으실 거예요.. 그분은 나를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서.. 가.. 멀리 가거라.. 여긴 네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실 거예요.."


"오, 개빈.. 절대 그렇지 않단다.... 개빈? 얘, 개빈아. 개빈? 개빈?"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세상의 아이러니와 마주한다는 거다. 만약 개빈이 1-2초만 늦게 코너에 진입했다면, 만약 개빈이 가속 페달을 1파운드만큼만 덜 밟았다면, 만약 개빈이 핸들을 몇 인치만 덜 돌렸다면.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신의 뜻을 찾으란 말인가? 오늘 밤,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나는 경찰 차량과 구급대 차량 사이로 구급대원이 시신 네 구를 옮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그 옛날 잔디밭을 깎으면 수고비를 주겠다던 나에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에요.'라고 외치던 꼬맹이 개빈이 떠올랐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일면식인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예리하게 뜬 달 너머로 칠흑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부디, 이 사과가 개빈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개빈, 얘야.. 미안하다. 네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구나."





-fin-




















후기


본 이야기의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온전히 교감하기 위해선 짧은 글 안에다 개빈, 애런, 그리고 로렌 간의 무고한 천진함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러니까, 읽는 이들이 이 셋을 그전부터 잘 알던 사이로 느껴야 했다는 뜻이다.


내 의도가 어느 정도나 들어먹혔는지는 모르겠으나(살면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치는 법이니까), 만약 제대로 전달받은 이라면 '독자의 바람이 담긴 그릇'에다 뱉어놓은 내 환희의 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5869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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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쌍한 개빈...ㅠ.ㅠ
    어찌보면 수컷이란 참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죠.
  2. 충돌차량이 할머니댁에 갔다오는 개빈의 부모님인듯..
    4명의 사망자와 마지막소원을 못들어준다는 독백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