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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멜리스, 2016

호러 영화 짧평 2021. 2. 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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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또 시간을 낭비하고야 말았습니다.

 

2003년 서울시 송파구에서 일어난 거여동 밀실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실제 사건은 정말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인데, 영화는 비극을 단순히 화제몰이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을만큼 깊이가 없습니다.

 

사건의 영화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잘 안되더라고요.

 

 

 

 

 

 

주연으로 출연한 홍수아씨와 임성언씨의 캐릭터 둘 중 어느 쪽에도 크게 공감할 수 없다는 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무고한 피해자가 등장하는데, 양 쪽 모두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양 쪽 중 어느 쪽에던 공감이 되어야 극적인 상황에서 긴장감이 느껴질텐데, 그저 답답함만 느끼게 되네요.

 

상황마다 제대로 된 연결이 되지도 않고 단절된 장면들이 그냥 붙어있는 수준이에요.

 

 

 

 

 

 

화목한 가정을 질투하며,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어야 한다며 벽 한면을 차지하던 거대한 가족사진을 내다버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큰 가족사진이 난데없이 집에서 사라졌는데, 내내 집에서 살고 있던 남편과 아이는 물론이고, 병원에서 퇴원한 아내마저도 가족사진이 어디갔냐는 말 한마디를 안합니다.

 

저렇게 큰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서 내다버리는데 고작해야 접시 하나 사라졌다는 것만 알아차리는 정도의 주의력을 발휘하는 걸 보면, 오히려 관객이 바보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통 가족사진은 그 가족에게 있어 무척 소중한 존재인 것이 기본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다버린 거 아닌가요?

 

 

 

 

 

 

이 아저씨는 초반에 2번 등장합니다.

 

한번은 아이를 보던 이모할머니에게서 섬찟한 시선을 보내며 아이를 유괴하려는 것처럼.

 

또 한번은 밤길에 아내를 미행하며 금방이라도 위해를 가하려는 것처럼 달려오며.

 

근데 이 아저씨, 극 중에서 아무 것도 안하는 그냥 동네 아저씨입니다...

 

마치 뭔가 있을 것처럼 열심히 던져놓고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오는 걸 보니 사기당한 기분이었어요.

 

 

 

한국 호러영화는 가끔 참 놀라운 성과들을 빚어내곤 합니다만, 이런 작품을 보고 나면 참 회의감이 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뭐가 안된 걸 영화관에 걸어뒀다는 점에서 참 안타까운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돈 주고 보러 가서 시간까지 잃으신 분들에게...

 

제 점수는 4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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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넥트, 2020

호러 영화 짧평 2021. 1. 2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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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시대가 도래한 이후, 영화관을 찾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이 됐습니다.

 

호러 영화 감상이 취미인 저도 작년 5월 호텔 레이크를 관람한 이후 반년 넘게 영화관에 발도 들여놓질 않았었네요.

 

정말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아서 본 게 바로 이 영화인데...

 

봐도 하필 이런 걸 골라서...

 

 

 

 

이 작품은 원래 2017년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단편 호러 영화, 래리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편 작품을 감독했던 제이콥 체이스가 그대로 장편 영화의 감독 또한 맡았죠.

 

단편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매력을 장편으로 잘 살릴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역량 이상의 임무였던 모양입니다.

 

사실상 영화는 단편에서 이미 다룬 소재들을 우리고 우리고 또 우리는 사골국물 같은 작품이 나와버렸습니다.

 

 

 

 

단편 영화 래리가 가지고 있던 매력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스마트 기기를 자유자재로 옮겨다니고, 거기서 튀어나오는 존재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합니다.

 

스마트폰 안에 살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포착되는 존재.

 

그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호러 요소라고 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딱 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단편 영화에서는 충분히 멋진 연출이 가능했던 거고요.

 

하지만 장편으로 이야기를 늘리는 과정에서, 주제의식이 확고하게 정해지지 못한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그 때문에 이야기는 여기저기로 표류하다 끝내는 엔딩 시점에서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어요.

 

 

 

 

언프렌디드 : 친구 삭제나 사탄의 인형 리부트에서 드러나듯, 호러 영화는 이제 새로운 시대의 기술들을 활용하는 단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아이디어 몇개만을 늘어놓고 별로 신선하지 못한 점프 스케어만으로 재주를 부리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네요.

 

충분히 좋은 원작, 충분히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이 정도 수준에 머물렀다는 건 참 아쉬운 일입니다.

 

청소년 대상으로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강한데, 솔직히 청소년이 보더라도 그리 재미는 없을 것 같네요.

 

 

 

간만에 영화관에서 본 호러 영화가 이 모양이라서 상심이 큽니다.

 

북미 흥행이 영 좋지 못하던데, 아무리 호러 업계가 저예산으로 적당히 만들어서 흥행 대박을 노리는 곳이라도 기준 이하의 작품은 날로 먹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 점수는 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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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9. 3. 3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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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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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우스운 건, 어떤 기억은 과거의 것이 더 선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간혹 주관에 의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게 바로 기록이다.

내 경우에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다. 다만 문제는 기록적인 부분에서 구멍이 있다는 거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 모두 나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럼 결론은 내 기억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됐다는 건데 도통 내 입장에선 인정도 납득도 안 된다는 게 또 문제겠다. 보통, 아니 거의 대부분이 이런 경우엔 그 기억이 당사자에게 인상 깊게 남아있거나 혹은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내 경우엔 후자였다.

90년대였다. 어린 나는 일요일 늦은 오후를 맞아 차량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건 주말마다 으레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엄마 아빠는 토요일이면 오후가 되기 무섭게 부랴부랴 차를 몰고선 여행을 떠났고, 아직 혼자 집을 볼 수 있을 만큼 자라지 못한 나는 일요일이면 지루한 기분과 육체적 피로에 몰려 파김치가 된 상태로 귀갓길 내내 뒷좌석 전체를 뒹굴거려야 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우리 가족을 태운 차량이 평소보단 조금 이르게 귀갓길에 오를 때였다. 인적이 드문 여행로를 타던 중 엄마 아빠가 창문 너머의 한 여성을 대화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아 배낭여행을 나선 거라느니, 친구랑 싸웠는지 뭔지 왜 여자 혼자서 걷고 있는 거냐는 지 따위를 말이다. 엄마 아빠는 곧 그 여성을 태우기로 빠르게 합의를 도출했다. 오지랖이라고? 히치하이킹은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한 나라에서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뿌리 박히게 된 문화일 뿐이라고? 글쎄다. 우리나라도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여행지에서 대학생들이 히치하이킹을 구걸하면 기꺼이 태워다 주는, 그런.

제의를 받은 여성은 잠시간 주저하는듯하다 이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으로 자리했다. 쏟아지는 엄마의 질문에 여성은 그저 자신은 대학생이고 택시가 다닐만한 곳까지만 태워다주길 부탁했다. 엄마 아빠는 애초 자신들의 생각대로 대학생이 친구와 여행지에서 싸우고선 뛰쳐나와 홀로 귀갓길에 오르는 거라고 확신했는지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여성은 자신의 등을 거의 다 덮고 있던 커다란 검정 백팩을 앞으로 안고서는 이따금 숨을 몰아쉬었다. 또 시선은 줄곧 고정되지 않은 채 창밖 풍경 이곳저곳을 훑느라 분주했고 주기적으로 눈을 감은 채 안에서 눈알을 격렬히 흔들어대느라 눈꺼풀 바깥으로 그 떨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본래 싹싹한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여성의 행동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인 것인지라 어쩐지 무서워져 앉은 거리가 멀어지도록 조금씩 티가 나지 않게 몸을 옮겼다.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떨어졌다고 생각해 다시금 여성을 훔쳐보자 어느새 여성의 손엔 내 교과서가 들려 있었다. 당시 나는 금요일 숙제를 해결하고자 주말마다 차량 뒷좌석을 책상 삼아야 했다. 문제는 그런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주로 일요일 귀갓길에야 불씨에 콩 볶듯 해결한다는 거고, 이제 문제는 여성에게 감히 교과서를 달라고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성은 교과서 페이지를 거칠게 넘겨가며 무언가 끼어맞추려는 듯 이따금 얼굴을 살짝 치켜세우곤 미간을 찌푸린 채 먼 곳을 응시했다. 나는 한층 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째서인지 그런 여성의 행동을 가만히 탐구하듯 응시하게 됐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린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여성은 이번엔 관심사를 나로 바꿨는지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이곳저곳 관찰하는 눈치였다. 이어 여성은 교과서를 덮고는 표지 위로 큼지막하고 조금은 삐뚤게 적혀진 내 이름을 보는 듯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성에게 내 이름을 들킨 거다. 어쩐지 나는 한층 더 두려워져 여성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감히 거두려고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버렸다. 내 얼굴로 시선을 옮긴 여성은 대뜸 든 자신의 오른손을 내 얼굴로 향했다. 그리곤 무척이나 부드럽고 기품있는 움직임으로 내 왼쪽 앞머리를 들어 올리듯 쓸어올린 뒤 그대로 귀 쪽까지 아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여성은 다분히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인 듯 경직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든 나는 그 쓰다듬 한 번으로 완전히 진정을 되찾았다. 그제서야 여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얼굴에 시선을 맞춘다고 고개를 숙이느라 풍만한 머리숱 사이로 얼굴 전체가 드러났는데, 왼쪽 이마 관자놀이 부근 손톱보다 조금 더 긴 모양새의 얄따란 하얀 흉터가 한 치 오차도 없는 피부결 사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발작적으로 치켜진 여성의 얼굴이 다시 처음 차량으로 올라설 때의 그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치켜진 얼굴은 운전석 앞유리창을 향하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여성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조심해!'라고 소리 질렀다.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성은 백팩으로 내 앞을 덮고는 또 그 위를 자신의 몸 전면부로 감싸 안았다. 한편 흡사 포식자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여성의 외침에 아빠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돌림과 함께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량은 가드레일에 아슬하게 붙여진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어 엄마 아빠의 '어어' 하는 숨넘어가는 듯한 외마디 말이 들려왔고 나는 내 몸이 좌우로 빠르게 요동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그날 내 기억의 마지막이다.

눈을 떴을 땐 침대였다. 내 방 침대. 목조 프레임으로 제작된. 양옆 끝으로 가드레일마냥 차단막이 있는 어린이용 침대. 나를 깨운 건 여느 날처럼 엄마였다. 엄마는 빨리 나와서 밥 먹고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일상이 이어졌고 내가 그날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토요일이었는데도 언제나처럼 여행을 가지 않고서 엄마 아빠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날이었다. 늦은 점심식사 동안 엄마 아빠의 이어지던 수다를 귀동냥 하면서 나는 그날 우리 가족이 추돌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나를 눈치챘는지 엄마는 내게 너는 기억이 잘 안 날 거라고 했다. 아이들은 놀라면 그러기도 한다면서.

당시 2차선 국도 커브 길을 들어서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차선을 점령하며 갑작스레 튀어나온 관광버스가 우리 차량을 거의 덮치듯 스쳐 지나갔다고, 아빠가 재빨리 핸들을 꺾은 뒤 관광버스가 지나감과 동시에 다시 반대로 핸들을 돌리며 브레이크를 밟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그 직후 내가 울음을 터뜨리더니 곧 잠들었고 다음 날 멀쩡해 보여서 괜히 놀랄까 봐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엄마의 설명이었다. '그럼 그 누나는?' 내 말에 엄마와 아빠는 무슨 누나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나는 히치하이킹부터 사고 직전 여성이 내 몸을 덮던 거까지를 얘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나를 당혹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엄마 아빠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내게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 한다며 핀잔을 줬다. 쟤는 가끔 보면 엉뚱한 말을 한다고. 네가 꿈꾼 걸 착각하는 거라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그날 사고에 대해 히치하이킹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엄마 아빠의 잡담에 등장하는 놀림감 소재가 되면서부터 나는 그 여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다만 그날 일은 여전히 내 머릿속 앞 좌석에 자리하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성인 이후에도 가끔씩 불쑥 왕래하는, 그런 오랜 친구로 말이다.

물론 그동안 그날 일에 대해 되짚어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게을리 한 건 아니다. 나는 어린애가 겪은 발작적인 사고와 그에 더해져 이후 꾼 꿈과의 혼동과 혼합 속에서 마치 비슷한 퍼즐 조각을 억지로 꿰맞추듯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그건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추론이었다.

초여름이 되었다. 초여름의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29살이었고 서울로 올라와 있었다. 올라와 있었다고 표현한 건 이유가 있다. 당시 나는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이주한 부모님(이른 은퇴와 함께)을 따라 몇년간이나 한량생활을 영위하던 와중이었다. 밤낮으로 새소리 따위나 들어가며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써보고 싶은 글을 끄적여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내가 쓰던 글이 제법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결국은 업체들과 상업적인 계약을 맺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날 나는 또다시 어느 업체와 미팅을 가진 자리에서 그대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간만에 서울 여행을 와 일까지 따냈으니 프로 한량께서 할 게 뭐겠는가. 오랜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은 나는 붕 떠버린 시간을 축내고자 해가 막 저무는 가운데 환락스러운 도심 중심을 목적 없이 거닐며 사람 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골목에서였다. 유행을 좇아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도배된 상가 거리를 거의 끝에서 끝까지 둘러봤을 때였다. 그럴듯한 외국어 이름의 펍이 나타났고 그 테라스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친구와 테라스 자리에 마주 앉아 앞에 맥주잔 하나를 두고선 은근한 미소와 함께 조잘거리고 있었다. 살구색에 전면으로 화려하면서도 어지러이 조각형태로 수놓아진 긴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수다 도중 웃음을 흘릴 때마다 귀로 깡총히 달린 같은 살구색상의 태슬 귀걸이 숱이 우아하게도 하늘거렸다. 또 어깨로는 짙고 세련된 네이비 색상의 얇은 밀리터리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 그런 옷매무새들은 그녀의 더 없이 보기 좋은 테를 간신히 뒤쫓느라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으며 동시에 지극히 트렌디한 옷차림임에도 굉장히 기품있는 모양새로 이채로움이 발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녀를 본 100명이 모두 그녀에게 반할 정도라고 확신은 할 수 없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조형에서 다시 없을 찬미의 욕구를 느꼈다. 그저 첫눈에, 그리고 한눈에 대책 없이 반해버린 걸 누가 글쟁이 아니랄까 봐 요란하게도 늘어놓는다고 조소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서 어떤 신념에 가까운 애절함을 느낄 정도였다. 맹세코 그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오늘 말을 걸지 못한다면 그냥 강바닥에 뛰어들어 가라앉는 게 나을 거라며 스스로 다짐하고 독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 전부를 던져놓은 채 미친놈이 된 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친구가 자리를 비울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여자에게 말을 걸 땐 그 여자의 동행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하라는 게 성경에도 나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목덜미를 노리는 이리마냥 가만히 숨죽이곤 기다렸다. 일단 물게만 되면 결코 놓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품고서.

사람들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만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녀의 친구가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십중팔구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고 나는 그녀의 친구가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유추하고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놀라지 않을 만큼의 가까운 거리로(하지만 내 훤칠한 키가 제대로 파악될 만큼은 멀게), 그리고 사선으로 비스듬한 위치까지 걸어 나간 나는 아주 정중하고 느릿한 묵례를 하고는 말을 꺼냈다. 안녕하냐고, 계속 보고 있다가 온 거라고, 반했다고, 하지만 외형만 보고 반한 거라서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해보고 싶다고, 어차피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시간은 흐르는 거 아니냐고.

안다, 굉장히 뻔하고 뻔뻔하고 저질스럽기까지 한 말이란 거.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표정, 목소리, 말투, 제스쳐다. 오히려 메시지는 유치하고 직설적일수록 효과적인 법이다. 그래서 나는 정중하고 진심 어리며 동시에 따분하진 않은 사람으로 주지시키고자 내 모든 행동거지를 컨트롤하랴 비지땀이 나는 걸 숨겨야 했다. 정말이지 똥 새도록 노력했다. 그녀의 테를 뒤쫓는 옷매무새들마냥.

그녀는 다소 놀란 듯 입을 조금 벌리더니 수초간이나 내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무섭도록 고운 그 얼굴 한가운데로 박힌 그녀의 눈이 내 머리, 얼굴, 짙은 데님 소재에 가운데로 격자무늬가 수놓아진 셔츠 상의, 왼손으로 셔츠 색상과 같은 밴드가 채워진 시계, 복숭아뼈가 온전히 드러나는 기장의 하계용 검정 슬랙스 하의, 그리고 흰 가죽에 베이지색 패턴으로 스웨이드가 자리한 스니커즈까지를. 나는 어쩐지 그녀의 눈이 나를 투과해 저 멀리까지 보고 있는 것 같아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 한층 더 노력해야 했다. 시선을 거두고서도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녀는 이내 자기 친구에게 보였던 그 미소를 흘리며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쳐보였다.

나는 대책 없이 천박한 미소가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단속하고는 너무 급하게 보이지 않도록 차분히 그녀의 옆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리곤 다시 한번 안녕하냐고, 반갑다고, 내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29살이라고 처음 목소리를 힘겨이 유지한 채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굉장히 느릿하고 부드럽게 이목구비 전부로 아주 깊은 미소를 짓더니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동안이네.'라고 말하면서. 나는 곧장 몸을 반쯤 일으켜 다소 장난스레 '고맙습니다.'하고 두어차례 꾸벅였고, 그녀는 그게 마음에 찼는지 입도 가리지 않고 고개를 젖혀 깔깔거리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28살.'

그녀와 채 1분도 말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나는 무섭도록 내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미 그녀의 어떤 모습과 행동을 보더라도 내 자신의 이상향 그대로라고 굳게 믿어버릴 아찔함이 느껴져서 말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제대로 수행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친구가 돌아와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이게 어느 곳 어느 때에서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흔하디 흔한 모습으로 남겨지길 원치 않는다고. 그러니 그전에 어서 전화번호를 받고서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그녀 또한 내 말에 공감했는지 잠금 풀린 핸드폰을 내 손 위에 올려놨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 건 1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화였다. 짐짓 꾸며낸 목소리로 '여보세요.'라며 가식적으로 말을 뱉는 내게 그녀는 다짜고짜 지금 어디냐고, 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면전에 천재지변 같은 일이 생겨 약속을 깨야겠으며 불가피한 사정이니 다음에 술을 산다든지는 안 할 거라고 쏘아붙이곤 그녀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어깨로 재킷을 걸친 그녀와 밤 거리를 나아갔다.

저물었던 해가 다시금 그 얼굴을 들이 미려 하고 있었고 이제 나와 그녀는 그녀가 사는 고층 오피스텔 옆으로 이어진 정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적어도 수십시간은 쉬지 않고 이어갈 자신과 바람이 있었으나 어쨌든 빌어쳐먹게도 아침이 되고 있었고 그건 곧 오늘은 이만 빠빠이라는 암묵적인 룰의 환기였다. '이제 너 그만 집에 들어가야지.'라고 한숨 뱉듯 말하는 내 얼굴 한편으로 어떤 일말의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 게 그대로 읽혀졌는지, 그게 우습고도 조금은 귀여워 보였는지 그녀는 어깨로 걸쳐진 재킷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사뿐한 움직임으로 내 무릎팍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가만히 아무런 말과 표정도 없이 내 얼굴을 응시했고 나는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팍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왜 허리를 감싸지?'라고 물으며 미처 참지 못한 미소를 새어 보냈다. 나는 '너 몸이 뒤로 젖혀지면 재킷이 떨어지니까'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처음 내 무르팍에 앉았을 때의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기다란 머리 끝단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부드럽게 매만졌다. 세상 진귀한 비단이 손에 쥐어진 것 마냥. 이어 그녀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한 채로 응시하더니 곧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살며시(그러나 확실하게) 마치 잠시 올려놓듯 맞췄다. 그건 어쩐지 신성한 의식으로 느껴질 만큼 내 마음을 경건함으로 물들게 한 행위였다.

그녀는 꽃잎 끝에서 조심스레 박차 오르는 나비처럼 내 무르팍에서 날아올라 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미소엔 애정어림과 함께 단호함 또한 새겨있었으므로 나는 그 뜻을 받들어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그녀가 좀전의 입맞춤보다도 부드러이 느껴지는 음색으로 말했다. '이제 너가 하려는 일을 해.' 나는 그러겠노라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오늘 내가 너에게 한 말들은 모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것이었다고, 다시 만날 날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곤 뒤돌아 최대한 느릿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멀어지면서도 서너차례 연신 뒤를 돌아봤고, 그때마다 그 자리 그대로에서 그 서정적인 눈매로만 살짝 미소짓고 있는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술은 조금만 취한 상태였으나 분위기에는 있는 대로 취해버린지라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릴 심산으로 그녀의 동네를 거닐기 시작했다. 동네는 신도시의 전형인듯한 외국풍의 아케이드가 펼쳐져 있었고 나는 아무도 없는 그 거리 골목마다를 구경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평소 돌아다니는 장소가 아니던가. 따라서 충분히 볼만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골목까지 도착해선 이제 택시를 잡으러 큰길 쪽으로 향하고자 골목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내 앞으로 이국적인 정취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신도시 아케이드로부터 이국적인 말이다.

군데군데 전신주가 위용을 뽐내고 있고 그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분간이 불가능한 서로 같은 모습의 연립주택들이 사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남은 취기마저 한순간에 말끔히 씻겨 내려진 나는 발작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동네는 없었다. 좌우앞뒤 사방이 처음 보는 주택단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빠지는 호흡 속에서 침착하게 현재의 상황을 이론적으로 풀어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추론을 도출했다. 블랙아웃이 된 상황에서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제대로 말하지 않아 엉뚱한 곳에서 내려진 거구나 하는. 하지만 이 완벽한 추론에는 오류가 하나 존재했다. 내 손목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으론 그런 일이 벌어지기에 충분한 여유가 없었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선 연신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리고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애 하나가 언제 왔는지 내 쪽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등교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여기가 어느 동네인지, 그리고 택시를 잡으러 큰길로 나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을 요량으로 그 아이를 불러세웠다. 그러자 아이는 인적없는 거리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낯선 성인 남성이 경계되는지 몸을 뒤로 움찔거리며 동시에 나를 파악하려는 듯 위아래로 훑어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나는 어떤 명백한 확신에 차게 되었다. 그건 마치 진리로 통하는 숨겨진 오솔길을 우연히 발견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깨달음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괴력을 발휘해 양손을 쭉 뻗어 아이를 거의 들어 올리듯 밀쳤다. 아이의 몸이 한참을 붕 떠져선 저 멀리 땅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제 튀어나왔는지 오토바이 하나가 그 굉음보다 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와 아이 사이를 가로질렀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였다. 나는 황급히 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심장이 본분을 잊고서 가슴팍을 제멋대로 흔들어대고 긴장감으로 혀가 바싹 말라 목 전체가 따끔거렸다. 아이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열린 책가방 사이로 빠져나온 교과서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교과서 표지 위론 큼지막하고 조금은 삐뚤게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멈췄던 발을 조심스레 떼고는 다시 아이 쪽으로 한 발 내디뎠다.

해가 막 저물고 있었다. 유행을 좇아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도배된 상가 거리 골목이었다. 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난 이국적인 정취를 따라 길을 걸었다. 그럴듯한 외국어 이름의 펍이 나타났고 그 테라스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친구와 테라스 자리에 마주 앉아 앞에 맥주잔 하나를 두고선 은근한 미소와 함께 조잘거리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나아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롯이 그녀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소 놀란 듯 입을 조금 벌리더니 수초간이나 나를 훑었다. 무섭도록 고운 그 얼굴 한가운데로 박힌 그녀의 눈이.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왼쪽 앞머리를 들어 올리듯 쓸어올린 뒤 그대로 그 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겼다. 그녀의 풍만한 머리숱 사이로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왼쪽 이마 관자놀이 부근 손톱보다 조금 더 긴 모양새의 얄따란 하얀 흉터가 한 치 오차도 없는 피부결 사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엄지로 그 흉터를 아주 부드럽게 매만졌다.

우스운 건, 어떤 기억은 과거의 것이 더 선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간혹 주관에 의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게 바로 기록이다.

내 경우에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다.

-fin-








후기

고백하자면, 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떠한 미스터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501547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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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죽을 준비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9. 3. 9.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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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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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죽을 준비

변기 물로 참방하게 잠긴 흑갈색 똥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월트 벨은 생각했다.

좋아. 잘 나왔군. 최고의 시작이야.

월트 벨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의 가장 큰 난관이라 여긴 일이었는데 전날 밤 뒤척이며 꿈꾼 이상보다도 나은 결과가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아침식사를 신경 썼다지만 노인성 변비가 이토록 시원하게 해결되다니.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입꼬리로 새어 나오는 망측한 웃음소리를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저린 다리 때문에(일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자 평소보다 오래 앉아 있었다) 잠시간 변기 옆 벽면으로 설치된 보조손잡이를 잡고 있어야 했으나 그 지옥 같은 시간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어정쩡하게 굽혀진 무르팍 아래론 잠옷 바지와 트렁크 팬티가 포개져 있었다. 기저귀 따윈 없었다. 기저귀는 어제 모두 처분했다. 더는 기저귀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똥을 잘 싸야 했는데 뜻대로 됐다. 설사도 아니고 나오다 만 조각들도 아니고 된 똥이었다. 설사면 매시간 지리느라 시간을 축냈을 테고 나오다 만 조각들이었다면 거북함 때문에 온종일 신경을 빼앗겼을 거다. 그런데 된 똥이라니. 이제 하루를 마음먹은 대로 마무리 지을 수가 있다.

월트에겐 명확한 철학이 있다. 모든 일에 앞서서 성사를 좌우하는 건 똥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라는 게 그렇다. 게티즈버그에서 링컨이 사람들의 영혼을 투과한 건 연설 덕택이었다. 하지만 똥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면 어땠겠는가? 그 연설은 역사 속 기록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서너 시간이나 이어진 행사 동안 악다구니로 똥을 참으면서 찬바람은 쉬지 않고 아랫배를 때리는데 이미 죽은 놈들이 뭐가 대수겠는가. 매가리 없고 거북해 보이는 목소리와 초조한 표정, 링컨은 역시 교양 머리 없는 켄터키 촌놈이고 게티즈버그엔 에버레트의 이름만 남았을 거다. 또 모르지. 연설 도중 못 참고 흘렸다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민주당이 당시 불던 反링컨 바람을 지피며 다음 해 선거에서 탄핵시켰을지도. 세상만사는, 특히나 큰일을 앞두고선 똥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똥의, 똥에 의한, 똥을 위한 시작이 필요한 거다.

잘 가게, 친구. 월트는 마지막 작별 인사와 함께 변기물을 내리고는 똥 덩어리들이 휴지 더미와 뒤덥혀 휘몰아치는 걸 묵묵히 바라봤다. 주섬주섬 아랫도리를 추켜올린 뒤엔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자신과 마주했다. 얼굴 전체로 새겨진 주름은 세는 게 무의미했고 이마 위로 덮여진 검버섯 주변으론 정전기 맞은 듯 곤두선 백색의 색실들이 새싹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누구도 사려고도 또 원하지도 않는 땅 위로 무의미하게 남겨진 새싹들. 하지만 그 밑의 양 옹이구멍으론 막 벌려진 독수리의 부리마냥 불꽃이 튀고 있었다. 월트는 탁하고 잠긴 목소리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소화하듯 힘 있게 중얼거렸다. 시작해보자, 월트.

태양이 꼭대기로 위치한 가운데 월트는 집의 가장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4평짜리 지하 창고는 채워져있는 짐보다 퀴퀴한 냄새와 먼지 덩이들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짐들은 죄다 가지런히도 정렬돼 있었는데 그 때문에 실지보다 더 양이 적어 보였다. 하지만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정반대였었다. 그간 월트는 이 창고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분류했다. 필요한 것들을 격식에 맞게, 소중한 것들은 순서에 따라 차곡히, 그렇지 못한 것들은 기저귀 떼와 함께 처분하면서. 남의 인생사에 훈수 둘 때처럼 참으로 야무지게도 해낸 것이다.

월트는 짐들이 각각 자기 자리에 맞도록 배열되었는지를 눈으로 훑으며 동시에 짐을 이루고 있는 상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다 짐들 가장 위에 자리한 베이지 색상의 상자로 향한 손으로 조심스레 그 누렇게 바랜 뚜껑을 열어젖혔다. 상자에서 흑백사진 더미들을 집어 든 월트는 의식적으로 한 차례 훅하고 숨을 내쉬곤 사진으로 시야를 고정시켰다. 그것은 며칠 전부터 지하 창고 대정리를 펼치며 가장 마지막에 할 일로 점찍어둔 일이었다.

첫 번째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한 장씩 넘기며 이 사진으로 돌아오면 이제 지하 창고에서의 업무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 사진엔 고만고만한 키의 세 아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셋 모두 제각각의 앞니들이 훤히 드러나도록 웃고 있었고 옷매무새 밖으론 똥배가 볼록하고 솟아 있었다. 사진 속 월터의 형은 파일럿을 꿈꿨었다. 그 시대 남자애들 누가 안 그랬겠냐마는. 아쉽게도 월터의 형은 평생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배만 실컷 타고서 두 번째 세계 대전지들을 돌아다니느라 말이다. 월터의 여동생은 좀 더 소박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던지라 자기 이름으로 된 옷 가게를 가지는 게 꿈이었다. 비록 그 꿈도 이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 늘 그랬듯 손자 손녀들을 위해 스웨터를 뜨던 와중 세상을 떠났으니 영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소파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더욱 그렇겠다.

사진을 넘기니 이번엔 젊은 청년이 처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자기보다 어린 부모의 사진을 본다는 건 언제나 이상한 순간이다. 이제는 사진을 들여다보는 순간에만 얼굴이 기억나는 부모의 사진을 보며 월트는 혀를 찼다. 아버지, 어머니 전부 이렇게 젊었단 말이야? 사진을 또 한 번 넘기자 젊은 월트의 얼굴이 나왔다. 주름은 어디에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고 하얗게 드러난 건치들은 모두 진짜 자신의 이였다. 활짝 웃고 있는 젊은 월트는 옆의 아리따운 여인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내는 평생을 새침데기 여인네였다. 이제는 십 년이 다 돼가는 어느 날, 면회 종료 시간을 코앞에 두고는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 앞에서 월트는 긴장으로 연거푸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날 월트의 몸속은 사랑으로 충만해 어디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월트는 아내의 손등에 입 맞춰야겠노라고 계속해서 다짐했다. 하지만 쉬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애꿎은 주름들만 미간에 가득 잡히고 월터의 아내는 이 양반이 또 뭐 맘에 안 드는 게 있나 해 물끄러미 월터를 훑었다. 그러다 마치 연극이라도 시작하듯 월터는 뻣뻣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선 그대로 아내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월터의 아내가 웃음을 간신히 참는 얼굴로 올려다보곤 내뱉었다. 월터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멈춰 섰던 손을 다시 움직였고, 월터는 아내는 날다람쥐처럼 민첩하게도 그 손을 빼내들어선 자신의 입을 막고 깔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전쟁에서 다친 몸 하나 없이 돌아와선 가장 큰 역경을 보냈다는 생각에 평생 함께 살고 싶다고 떠듬떠듬 말을 했을 때에도 월터의 아내는 그렇게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깔깔깔 웃어댔었다. 그날 월터의 아내는 월터의 손을 감싸 쥐고는 말했다. 자기 전에 또 맥주 마시거나 그러지 마요. 소피 땜에 깨서는 잠을 설친다고, 이 양반아. 월터는 그날 집에 돌아가 물 반잔만으로 입을 축이고는 단잠에 빠졌고, 도중에 한 번 설침도 없이 다음날 일어나서 마저 물 반 잔을 마시던 중 병원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아야 했다.

사진을 다시 한 장 넘기자 이번엔 웃통을 깐 채 뽀빠이처럼 이두박근을 들어 보이고 있는 두 소년이 나왔다. 한날한시에 월터 부부에게로 왔었던 쌍둥이. 둘은 어찌나 서로가 각별했는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디 스친 곳도 없이 베트남에서 무사히 돌아와놓곤 자동차를 몰다가. 쌍둥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월터는 안타까움보다 화가 치솟았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빨리 왔다 간 건지. 쯧하고 혀를 차고선 사진을 넘겼다. 그리고 또 넘겼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의 사진, 아내와의 사진, 쌍둥이와의 사진, 친구들과의 사진, 남한의 격전지에서 유독 친했던 분대원 둘과 찍은 사진.. 젊은 청년이 처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사진.

깡총히 달린 창문으론 굵다란 빛줄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줄기로 먼지가 사방에서 올라오고, 그리고 내려가고, 또 올라오고들 있었다. 월트는 손을 들어 휘이하고 빛줄기를 저어보았다. 먼지가 손짓을 따라 올라왔다, 내려가고, 올라갔다. 월트는 먼지들이 임무에 따라 각자의 위치로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휘몰아 광풍에 이는 나선들이여.

집안 곳곳을 누비며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내려 확인 작업을 끝낸 월터는 마지막 하나 남은 레트로 고기 수프로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최후의 만찬 치고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할 수 있겠으나 월터의 생각은 달랐다. 괜히 소화라도 안되거나 해서 남은 시간을 엉뚱한 데에 몰두하고 싶지 않았다. 요기만 없애면 그만이었다. 예수라는 양반도 그랬잖은가. 자기 먹을 걸 나눠주면서 말이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그렇지만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똥이란 중대한 거다.

첫 격전지에서였다. 갑작스러운 출전에서 월트는 만 이틀 동안 똥 묻은 팬티(팬티 묻은 똥이 더 맞겠다)에 궁둥짝이 짓뭉개진 채로 사경을 헤매야 했다. 멀쩡히 두 눈 뜨고 움직이는 사경을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전쟁터에서였다. 똥을 지린 게 월터뿐만도 아니었고 말이다.

월터는 제대로 준비를 하려 한다. 아내가 떠난 후 한 번도 종합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 최근엔 각혈과 피똥이 일상이었다. 몸도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심장도 지가 원하는 대로 뛰어댔다. 그러다 요새 며칠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도 세졌다. 월터는 안다. 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고. 제집마냥 병원을 들락거리며 산송장이 되어 걸어 다니지도, 리타이어 커뮤니티에 들어가 흘러감의 공포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생판 남들과 나눠갖지도 않은, 그저 주어진 몸뚱이로 길을 걸어가 총알이 날아올 그곳에 우뚝 선 채로 앞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말이다. 월터는 안다. 자신에게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라고. 평생 이 몸뚱이만 사용해왔다. 이 정도면 가히 최우수 고객이 아니겠는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 사용일이다. 월터는 제대로 죽을 준비를 하려 한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절도있게 식사를 마친 월터는 현관문을 열고 앞마당에 나가 입속에 잔뜩 머금은 채 가글 하던 물 한 바가지를 그대로 투하했다. 그리곤 몇차례 마저 침을 주륵 내보내고선 고개를 들어 무심코 옆을 보자 이웃집 꼬마 놈이 시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벨 할아버지."

꼬마가 목청껏 인사했다. 몇 달 전 이사 온 이래 늘상 월터만 보면 저리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며 인사한다. 망할 것, 누굴 귀머거리로 아나. 월터는 평소대로 고개만 한 번 까닥하고는 하늘로 시야를 돌렸다. 어느새 태양은 잔뜩 취한 양 뻘건 빛으로 세상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벨 할아버지."

월터는 깜짝놀라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웃집 꼬마 놈이 어느새 다가왔는지 바로 앞에서 월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치켜올려 쓴 야구 모자는 군데군데 땀 때문인지 하얗게 바래있었고 손으론 형형색의 찍찍이 캐치볼 세트가 쥐어있었다. 꼬마는 잠시간 눈을 내리깐 채 찍찍이 공을 주물 거리더니 발작적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데이비드 그레이프예요. 벨 할아버지.. 벨 할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들었어요."

"뭣?"

데이비드가 거의 소리 지르듯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월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내저어야 했다.

"이놈아! 뭐라고 했냐고가 아니라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이냐는 거다! 귀 안먹었으니 작게 작게 말해!"

월터의 노성에 데이비드는 그냥 뒤로 내빼야하나를 잠깐 고민했는지 몸을 쭈뼛거리다 입을 뗐다.

"죄송해요. 평소에 인사를 해도 반응이 없으시길래 할아버지가 소리를 잘 못 듣는지 알았어요."

"..용건이 뭐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들었어요. 학교에서 친구들한테요."

옌장할. 월터는 구태여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서 혀를 쯧하고 찼다. 불 보듯 물 보듯 뻔한 거 아닌가. 저 또래 남자애들이 다 죽어가는 영감을 앞에 두고서 눈을 뒤집는다면 그다음 나올 질문은 하나다. '진짜 사람 쏴봤어요? 몇이나 죽였어요? 히틀러 본 적 있어요?' 월터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짐을 느꼈다. 자신과 관련 없는 것에 단 1초도 신경을 기울이기가 싫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래도 되는 거 아닌가.

"난 지금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렴."

월터의 냉랭한 어조에 데이비드는 눈을 내리깔아 애꿎은 캐치볼만 손안에서 굴려댔다. 캐치볼은 이미 땅바닥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왔는지 간신히 본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분명 저 찍찍이 캐치볼 세트로 인해 데이비드가 또래들로부터 심심찮게 조롱거리가 되어왔으리라 월터는 확신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같은 사내끼리는 분명 알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이다. 월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데이비드는 찍찍이 글로브에 고정되어있던 손을 황망히 빼들고는 입을 열었다.

"버즈 형이 진짜 소가죽으로 된 근사한 글러브랑 야구공을 사준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했어요. 전부 중고가 아니라 새 걸로 사주겠다고요. 근데 언제 돌아올지를 모르겠어요. 형은 지금 멀리 가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옆집 큰아들 놈이 언제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다. 덥수룩한 머리에다 코와 턱으론 양 새끼마냥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수염보단 여드름 자국이 더 많을 정도로 애송이였다. 아마 그 애도 성인이 되고서 미주리의 변변찮은 사내놈들처럼 한 가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월터는 생각했다. 남의 목장 봐주기 따위를 해오다 자신은 다른 치들과 다르다며 집을 떠나서는 결국 살충제 공장들을 뺑뺑이 돌거나 아니면 노상에서 컨트리 음악을 믹싱한 CD를 관광객에게 팔거나 말이다.

"형은.. 지금 이라크에 있어요."

어이쿠. 그래, 그게 남아있었지. 약 팔고 마트 털던 놈들까지 끌어모으는 판국에 이런 미주리 촌놈은 더할 나위 없는 재원이지. 이 나라는 여적 변한 게 없다. 진짜 명예란 게 뭔지도 구별할 줄 모르는 애들에게 총을 쥐여주고는 죽음의 골짜기를 타도록 한다. 이 나라는 모른다. 똥 지리는 공포가 무엇인지를. 그저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가장 악독한 개새끼가 되도록 가르칠 뿐이다. 가르치는 건 누구나가 할 수 있다. 그럴듯하고 이치에 맞아 보이는 말을 떠벌리면 되는 거다. 하지만 똥 지리는 건 다른 문제다. 똥은 지려본 놈만 아는 거다. 더 큰 문제는 똥을 지릴 놈들이 태생적으로 정해져있다는 거겠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게 뭐니?"

"전쟁에 나가면.. 그러니까.. 열 명 중에 몇 명이 무사히 돌아오나요?"

오, 신이 있다면 이런 빌어처먹을.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내가 뭐라고 대답해줘야 한단 말이오. 네 형은 무사히 돌아올 거다.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하니까. 우리의 신념이 더 고귀하니까. 우리는 신의 수호를 받고 있는 나라니까. 이러면 되오? 변변찮은 곳의 촌놈이 최전선에서 총포로부터 모두 빗겨나도록 당신이 힘이라도 써주는 게요? 월터는 잠시간 그저 데이브를 묵묵히 내려다봐야만 했다. 그 침묵에 데이브가 막 불안감을 느끼려던 찰나 월터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뱉고선 지하 창고를 향해 뛰듯이 걸어나갔다. 허벅지 근육은 나흘 전 전부 사용한 줄 알았는데 아직 여분이 좀 남아있었는가 보다.

다시 돌아왔을 때 월터의 손에는 투명한 아크릴 플라스틱제 키링이 하나 들려 있었다. 월터는 그 키링을 데이비드에게 쥐여주고는 말했다.

"자, 얘야. 받으렴."

"이게 뭐예요?"

"이건 내가 전쟁에 나갈 때 아내가 가지고 있던 부적이란다. 이 투명한 플라스틱 말고.. 여기 안에 보이지? 네잎클로버란다. 원래 클로버는 잎이 세 개뿐인데 이건 네 개지. 그거 아니? 만 개의 클로버 중 한 개만이 이렇게 잎이 네 개란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가져온단다. 나폴레옹이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서 허리를 굽히자 그 위로 총알이 지나갔지. 또 항상 네잎클로버를 지니고 다니던 링컨도 깜빡하고서 빼먹은 날에 극장에서.."

"알아요! 머리에 총을 맞았어요! (데이비디는 공갈 총을 한 자신의 손을 머리에 대고는 푸슝하고 소리냈다)"

"그래, 그만 네잎클로버를 까먹었던 게지. 하지만 내 아내는 그러지 않았단다. 내가 전쟁에 나간 날부터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어. 덕분에 나는 다친 데 하나 없이 돌아올 수 있었고 말이다. 이걸 너에게 주마. 나는 이제 아무래도 전쟁에 나갈 일이 없을 것 같구나."

데이비드는 마치 마크 맥과이어의 사인볼이라도 거머쥔 양 입꼬리를 있는 대로 올려 미소를 지었다. 옌장, 대체 어떤 쾌변을 하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 거람.

"데이브!"

어느새 집 밖으로 나왔는지 옆집 현관문 앞에서 데이비드의 엄마가 이쪽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윽고 월터와 시선이 마주쳐진 그녀는 짧게 목례를 해왔다. 월터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근심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데이비드에게 이만 엄마에게 가보라고 재촉했다. 호시탐탐 애들 엉덩이를 후리려는 치들이 사방에 놓여져있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죽고 나면은 그런 오해를 설명할 기회도 없어지는 법이다. 이미 죽고 나면 뭔들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호색한 영감쟁이로 마녀사냥 당하는 것만은 사양이올시다. 그 대상이 자기만 아니라면야 마녀사냥만큼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또 없지 않은가.

데이비드는 연신 미소 지어진 얼굴을 한 채 한 손으로 키링을 치켜들어선 월터를 향해 '꼭 품에 지니고 있을게요!'라고 외치고는 제 엄마를 향해 뛰어갔다. 월터는 모자가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까지를 지켜본 후 다시 하늘로 시야를 돌렸다. 뻘건 빛을 내뿜던 태양은 이제 취기에서 돌아왔는지 장막 속으로 그 부끄러움을 막 숨기려 하고 있었다. 얼마 후엔 달이 자리를 대신하겠지.

문득 월터는 정말로 데이비드의 형이 무사히 돌아오리란 확신이 들었다. 미주리맨에겐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중요하다지만, 그리고 비록 네잎클로버 키링 자체가 실은 아내가 언젠가 길거리 히피에게서 적선하듯 구입한 거였지만 말이다. (그 히피 놈이 곧장 떨을 사 피웠을 거라고 전 재산을 배팅할 수 있었지만 그날 월터는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오는 법이다. 우리는 이 나선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빤스가 벗겨지지 않도록 잘 붙들어매고 있어야 할 따름이다.

하늘로 시선을 두고 있던 월터는 한 마디 읊조려 주고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내가 뻥 좀 쳤수다. 당신네 십계명은 거진 엉터리야. 처음부터 잘 좀 만들지 그랬수."

이제 마지막 의식으로 월터는 정성스레 샤워를 했다. 이미 쭈글쭈글한 손이 더욱 쭈글탱해질 때까지. 그리곤 준비한 잠옷(월터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잠옷으로, 곤색에 가로와 세로로 빗금이 새겨진 상하의 세트였다)을 입고선 주방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 최전선에는 미첼롭 앰버박 한 병과 지퍼팩으로 봉해진 소고기 육포 한 점이 열을 맞추고 있었다.

침실로 가 침대에 걸터앉은 월터는 병따개로 맥주병을 두 번, 세 번에 걸쳐 간신히 딴 후 한 모금, 두 모금, 그리고 세 모금 쉬지 않고 기울였다. 이어 지퍼팩 위로 놓인 육포도 손으로 한 점 잘게 찢어선 입으로 가져갔다. 최상의 파인컷. 작은 미소와 그보다 더 작은 중얼거림을 내뱉은 월터는 따진 맥주 뚜껑으로 조심스레 맥주병 아가리를 닫은 뒤 역시 남은 육포를 지퍼팩에 안치하고는 꼼꼼히 봉했다.

월터는 침대 옆 소형 탁자로 자리한 맥주병과 지퍼팩 옆의 봉투를 집어서는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무늬라곤 가로줄이 전부인 편지지에는 몇 줄 안되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건 자신 명의로 된 소박한 재산들을 어디 앞으로 남기는가 하는 따위의 글이었다. 월터는 만약 아내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에게 종용했을 선택지인, 그리고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던 본인을 위해 격주마다 봉사단원을 보내 잡일을 봐주면서 생전 개근생인 아내의 부탁을 지금껏 실천해온 마을 교회로 그 대상을 정했다. '할렐루야! 월터 벨 씨가 마지막에 회개하시어 주님 곁으로 떠났습니다.'라며 호들갑 칠 교인들을 떠올리면 배알이 꼴리는 감도 있었으나 어쨌든 유일하게 남은 호의는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살아있는 동안 받은 호의를 모두 갚아온 월터에게 있어(갚기도 전에 죽어버린 자들의 호의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뭐, 어떠랴. 본디 나이가 들면 까먹고 싶은 건 까먹으며 사는 거다) 마지막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장례절차에 대한 것까지(죽을 놈이 지 묻히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모두 확인한 월터는 편지지를 넣은 봉투를 소형 탁자 가장 앞줄 가운데로 자리시켰다.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는 자신을 몇 차례 흔들어보던 봉사단원의 시야에 최대한 잘 들어오도록. 이어 월터는 찬찬히 고개를 돌아보며 주변을 덮고 있는 어둠 너머를 차례로 훑어내렸다. 총알이 날아올 그 자리임을 재차 확인하면서.

침대에 몸을 뉘인 월터는 가슴팍까지 이불을 올리고선 끙 하는 숨내움과 함께 눈을 껌뻑이기 시작했다.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아내로부터 신을 두고 살아왔던 월터 벨이 이제 마지막 신으로 삼았던 그 자신의 육신을 벗어나고자 하고 있었다. 껌뻑이는 눈과 숨소리의 간격이 아주 부드럽게 늘어나면서 월터는 자신의 모든 게 땅으로 땅으로 점차 동화되는 느낌에 침식당했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월터의 눈은 완전히 감겨졌고 입은 헤 하고 조금 벌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무아의 순간으로 빠지는 와중 월터는 지금 이미 자신의 모습이 누가 보더라도 송장일 거라는 생각에 피식하고 찰나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날을 위한 하루, 하루를 위한 모든 날. 월터는 제대로 죽을 준비를 했다.



-fin-

후기

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시오.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시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48373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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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ck or Treat!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2. 15.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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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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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ck or Treat!




"싯팔, 진정하자고!"



문고리를 거칠게 끌어당겨 화장실 밖으로 나온 앤드류 모라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연신 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의 앞머리는 손길이 닿지 못한 땀방울들로 축축이 가라앉아있었다.


우리 모두 사는 동안 깨닫는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살면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거다. 앤드류에게 있어 오늘 10월 31일이 그런 날이었다.


앤드류는 열린 문 사이로 잠시 시선을 두고는 한 차례 의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안쪽의 잠금 똑딱이를 누르곤 문을 닫은 뒤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거실 복판의 싸구려 인조가죽 소파에다 몸을 던진 뒤에도 앤드류는 한참을 숨을 몰아쉬었다. 집시풍 카펫 위론 양발을 발작적으로 떨어대면서.



새벽까지 기다리자.. 차분히 그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래, 새벽까지 기다리는 거야. 거리론 달빛만 음흉히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럼 차를 끌고 나가 모든 게 해결되리. 앤드류는 한 손으로 천천히 앞머리를 쓸어 올린 뒤 소파로 한껏 등을 뉘었다. 세상사 모든 게 생각 하나로 답이 나오는 거라 깨닫고 나니 더없이 마음이 든든해졌다. 앤드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맥주캔 하나 정도는 있을 거라는 기대로.


그때였다. 집안 전체로 전형적인 싸구려 차임이 울려 퍼졌다. 앤드류는 거의 점프하듯 몸을 움찔거리고는 천천히 고개만 돌려 현관문 쪽을 쳐다봤다. 다시 차임이 울렸다. 연속해서 몇 번씩이나. 가, 그냥 가라고. 여긴 아무도 없으니까. 앤드류는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알잖은가. 살면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거. 이번엔 차임 대신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집안을 채웠다.



"저희 왔어요!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 여세요!"



앤드류는 온몸이 얼어붙어 버린 듯, 그러나 핏발 선 눈알 두 짝만 멀쩡한 양 현관문 전체를 훑어댈 뿐이었다.



"열라고요! 저희 왔다고요!"



이번엔 거칠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 앤드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잠금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맥없이 열려버린 것이다. 이제 현관문 몸통(군데군데 흰 칠이 벗겨진)이 있던 자리를 두 소녀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소녀라는 표현보다는 꼬마 여자애라는 표현이 더 들어맞겠다. 앤드류의 배꼽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을 신장이었으니까. 게다가 한 소녀는 그만큼도 안 되어 보였다.


두 진저는 구불거리는 컬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어깨 위까지 내려진 머리에 롱한 잿빛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둘의 얼굴은 자매임이 분명함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호박색 홍채마저도 서로가 똑 닮아있었다. DNA란 정말 우습고도 무서운 것이다.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두 소녀가 아직은 제멋대로인 크기의 앞니들을 활짝 드러내며 외쳤다. 외양과 목소리, 그리고 표정마저 누가 봐도 깜찍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었으나 앤드류에겐 상황은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었다. 두 소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얼어있는 앤드류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이어 언니 쪽이 천진한 어조를 그대로 이어 말했다.



"케이 아줌마가 아니잖아? 아저씨 누구예요?"



앤드류의 목에선 처음 갈라진 파열음이 새어 나온 뒤 몇 차례 가다듬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대답이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케이 아줌마의 동생이란다."



언니 쪽이 즉각 '아! 아저씨가 앤드류군요!'라고 반응한 뒤 동생 쪽 귀에 대고 잠시간 속삭였다.



"..나를 알아? 너희는 누구니? 문은 어떻게 연 거고?"



앤드류의 반문에는 조급함과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심히 낯설게 느껴졌다. 언니 쪽이 열쇠고리를 건 손가락을 번쩍 추켜세운 채로 대답했다.



"아줌마가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어요. 자기 동생이 있는데 이름이 앤드류라고. 저희는 아줌마 친구예요. 아줌만 항상 키를 같은 데에다 보관하죠."



예측불허였던 전개에 앤드류는 꼼짝도 않고서 머리만(실은 눈알도 같이) 굴려댈 뿐이었다. 동생 쪽이 앞니를 훤히 드러내곤 처음보단 자그마하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말했다.



"..그래, 사탕. 일단 들어오렴. 현관문 잠그고."


"케이 아줌마는요?"


"..엄마 집에 갔단다. 그러니까.."


"알아요. 아줌마네 엄마가 죽었잖아요. 근데 장례식은 이미 치렀는데."


"그게.."


"아! 유품 정리하러 간 거구나."



말을 마친 언니 쪽은 납득이 간다는 듯 입을 오므리곤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이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현관문과 잠금 걸쇠를 닫았다.



"그래서 사탕은요, 아저씨?"


"..잠깐만 기다리렴."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하면서 앤드류는 화장실 문을 한 번 쳐다봤다. 문과 잠금 걸쇠는 닫힌 상태 그대로였다. 앤드류는 최대한 굼뜬 동작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케이와 친하단다. 거기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앤드류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생각들이 돌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결론은 정해진 상태였다.



같이 처리해야 해.



앤드류는 싱크대 주변으로 자리하고 있던 사탕 바구니(케이가 색색의 포장지로 된 캔디류, 초코바들을 정성스레 채워둔)를 하단 선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저씨, 사탕 못 찾았나요?"



소리도 없이 언제 왔는지 언니 쪽이 새초롬히 눈을 치켜뜨고는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어.. 사탕이 없는.."


"말도 안 돼! 케이 아줌마가 우리 걸 준비 안 했을 리가 없어요! 우리가 이 동네에서 유일한 친구라고요!"


"저기.. 얘야.."


"내 이름은 루시에요."



언니 쪽이 자기 스웨터 가슴팍에 수 놓아진 철자를 가리키며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어 거실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동생 쪽을 가리키곤 '쟤는 루나예요'라고 말하자 그걸 또 들었는지 동생 쪽이 한 손을 치켜들어 보였다.


앤드류의 눈에 그제야 루시와 루나의 차림새가 자세히 들어왔다. 두터운 조직감의 롱슬리브 원피스, 그리고 가슴팍엔 색실로 이름이 새겨있었다. 제 엄마가 손으로 직접 짠 것임이 분명했는데 앤드류로선 대관절 무슨 코스프레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루시'와 '루나'라는 캐릭터가 어디에 나오는지도 말이다. 그런 앤드류를 단박에 알아차렸는지 루시가 말했다.



"이건 엄밀히 말해 할로윈 복장은 아니에요. 그래도 일종의 코스프레인 셈이죠. 재미있죠? 그러니까, 차림새 하나로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게요."


"그렇구나.. 그래, 루시야.. 사탕은 없는데 대신 코코아는 어떻니?"


"코코아랑, 또 딴 건 없어요?"



상단의 선반 안을 헤집으며 앤드류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집안에 잡아두고서 기회를 엿봐야 한다고. 그러려면 이 애들 입맛에 맞을만한 게 필요했다. 하지만 앤드류의 시야에 들어오는 간식이라곤 비스킷 한 팩뿐이었다. 앤드류는 팩째로 쥐어 들어선 루시 앞에 보이고는 조심스레 '이거 괜찮겠니?'라고 물었다. 루시는 처음 현관문을 박차고 왔을 때의 그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젠장! 로터스! 우리 이거 좋아해요. 다른 애들은 냄새가 어쩌고 하지만. 아주 잘했어요, 앤드류 아저씨."



루시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앤드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코코아는 미지근하게 부탁해요. 저희는 뜨거운 걸 못 먹거든요.'라고 말했다. 앤드류는 루나가 앉아있는 소파로 향하는 루시의 뒷모습을 쫓으며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벌었군. 집에 잡아두는 데에도 성공했고. 하지만 쟤들 부모가 찾아 나설 때까지 시간이 넉넉한 게 아니야. 싯팔.. 무리해서라도 서둘러서 이것들을 전부 싣고 떠나야 하나? 아니지, 쟤들 부모가 여기 온 걸 알 텐데.. 그냥 사탕 줘서 보냈어야 했나? ..아니야. 어찌 됐든 나를 본 걸 얘기할 테니.



불빛 아래 피루엣을 도는 우유 잔을 멍하니 응시하는 앤드류의 눈꼬리들로 눈물이 맺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마치 운명이라는 놈이 심술궂게 자신을 계속해서 벼랑으로 모는 것 같다고 앤드류는 생각했다. 이쪽 벼랑을 피해 가면 이번엔 저쪽 벼랑으로.. 그런 식으로 말이다. 전자레인지에 두 번째 우유 잔을 넣으면서 앤드류는 싱크대 서랍에서 식칼을 집었다. 가장 큰 크기의 식칼이었다. 앤드류는 칼을 허리춤에 조심스레 꽂고는 두터운 플란넬 셔츠로 가렸다.


로터스 팩과 코코아 잔 둘을 실은 우든 쟁반을 들고 앤드류가 나타나자 루시와 루나는 함박미소를 흘리며 발작적인 박수를 만들었다. 둘은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쟁반으로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로터스를 집고선 연신 코코아에 적셔댔다.



"..천천히 먹거라."



앤드류는 그런 둘 앞에 서서 한 손으로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겁박해? 그러기엔 너무 맹랑해 보이고.. 게다가 그래 봐야 뒤로 미루는 것밖엔 안 되니.. 오, 주여. 결국은 이 자리에서 할 수밖에..



결심을 다진 앤드류가 허리춤의 플란넬 셔츠를 걷는 순간, 루시가 별안간 꺅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닦을 것 좀요! 루나가 코코아 잔을 엎었어요!"



앤드류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걷어 올려진 허리춤의 셔츠를 다시 내리고선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가져온 키친타올을 길게 한 번 끊어 묵묵히 탁묵히 탁자를 닦았다. 루시가 말했다.



"루나, 화장실 가서 손 씻자."


"잠깐만, 얘들아! 화장실은 안 돼!"



앤드류는 기겁해선 거의 소리 지르듯 외쳤다.



"왜요, 아저씨? 루나 손이 끈적끈적하다고요."



앤드류의 외침에 깜짝 놀랐던 루시가 다소 심통이 난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때였다. 루시와 앤드류가 서로 눈을 맞추고 있는 그 사이로 쿵 하는 소리가 들어왔다. 몇 번씩이나. 셋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인 화장실 쪽을 바라봤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가 멈추더니 이번엔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바짝 엎드린 자세의 케이였다. 케이가 양손과 양발을 교차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두 눈은 치켜 올라가 홍채가 겨우 보이는 정도였고 혓바닥은 길게 늘어뜨려져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루시가 침묵을 깨고선 말했다. 아주아주 냉소적인 어조로.



"오, 앤드류 아저씨. 케이 아줌마를 어떻게 한 거야."



케이가 고개를 들어 루시와 루나, 그리고 앤드류를 쳐다봤다. 고개가 들려지자 목 전체로 푸르딩딩한 멍 자국이 자리하고 있는 게 나타났다. 또 늘어뜨려진 혓바닥으론 연신 침전물이 흐르고 있었다. 케이의 목 안에서 쇳덩이를 긁어내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앤드류우우우!"



케이가 양발과 양손을 푸드덕거리며 스프링이 튕겨 나가듯 전진했다. 고개가 좌우로 꿈틀거려지며 기는 게 꼭 거대한 지네를 보는 듯했다. 앤드류는 놀라 목구멍 밖으론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칼을 빼 들었다. 케이와 앤드류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앤드류가 칼을 쥔 손을 치켜든 순간, 케이가 거의 점프하듯 달려들어선 앤드류의 한쪽 발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그렇게 둘이 뒤엉켜 넘어지는 와중 앤드류는 케이의 목덜미로 정확하게 칼을 꽂아 넣었다.



"으아아악! 시잇팔!"



허나 비명이 터져 나온 곳은 앤드류의 목구멍이었다. 입을 쩍하고 벌린 케이가 그대로 앤드류의 오른 어깻죽지를 물은 것이다. 목덜미로 칼이 꽂혔음에도 케이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처음 화장실 문밖으로 나올 때의 그 한기 서린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또 치켜 올라간 눈가론 여전히 홍채만 겨우 보이고 있었다.


앤드류는 자신의 어깻죽지를 물고 있는 케이의 얼굴을 밀쳐내고, 때리고, 잡고 흔들어 젖혀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더 기가 차는 건 칼이 꽂혔음에도(족히 한 뼘은!) 어깻죽지로 전해지는 치악력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거다. 게다가 케이의 목덜미론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저리 가라고, 이.. 빌어먹을 년아!"



이제 앤드류에게 남은 건 악을 질러대는 것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 앤드류는 충실히 그 수단을 이행했다. 물론, 모두의 인생사에서 그렇듯 이 수단은 별반 효과가 없었지만. 


남은 수단까지 전부 동원했던 앤드류는 이제 그저 자신의 어깻죽지로 입을 박아넣은 케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어찌나 세게 무는지 케이의 이가 앤드류가 꽂은 칼보다도 더 깊이 살 속으로 박힌 듯했다. 그럼에도 케이는 멈추지 않았다. 앤드류의 청각으론 플라스틱 조각이 깨지는 듯한 불쾌한 파열음이, 그리고 시야론 케이의 이들이 더는 못 버티고서 하나둘씩 짜부라지는 게 들어왔다.


앤드류의 눈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케이처럼 홍채들이 눈 위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 순간 앤드류는 자신의 머리맡으로 루시와 루나가 우뚝 서 있음을 깨달았다. 앤드류의 목구멍에서 희망과 절실함에 찬 음성이 쥐어짜여 나왔다.



"얘들아.. 칼.. 그걸 빼서.. 아저씨한테 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시가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고선 몇 차례 앞뒤로 흔들더니 쑥하고 칼을 빼 들었다. 앤드류의 희망에 겨운 눈망울을 응시하며 루시가 말했다.



"정말이지 앤드류 아저씨, 케이 아줌마를 어떻게 한 거야."



루시는 루나 손에 칼을 쥐여주고는 앤드류의 머리맡 바로 위로 가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곤 양손으로 앤드류의 머리채를 야무지게 쥐어 잡아선 그 고개가 들쳐지게 힘껏 자신 쪽으로 당겼다. 이어 영문을 몰라 바삐 돌아가는 앤드류의 시야로 루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양손으로 칼을 치켜든 루나의 모습이.


'기다려'였을까? 아니면 '왜 그러는 거야?'였을까? 어쨌든 앤드류의 입에서 채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루나는 치켜진 목을 향해 그대로 칼을 꽂아 넣었디. 앤드류의 목에서 잠시 수프가 끓어 차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곧 그 소리마저 멎어버렸다. 두 소녀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마치 서로 끌어안고 있는 듯한 오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리론 해가 완전히 저물고 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요란한 브레이크 음과 함께 차에서 내린 로버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뒤 그 위를 다른 한 손에 들려있던 보안관 모자로 조심스레 덮었다. 현관문 앞으로 마중 나와 있던 부보안관 모자를 쓴 남자가 그런 로버트를 반겼다.



"로버트, 빨리 왔군요."


"그래, 아들놈이랑 마누라를 길바닥에 버려두고선 혼자 차를 몰고 왔거든. 엄청난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캐스퍼를 본 적 있어?"


"집에 들어가면 사모님께 살해되겠군요."


"맞아. 그러니까 내가 내일 안 나오면 제1 용의자로 내 마누라를 올려놓으면 돼."



둘은 안마당으로 아무렇게나 쳐진 노란 테이프를 지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로버트를 본 그의 부하들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부하 중 하나는 핸디용 카메라로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촬영하고 있었다. 로버트와 부보안관은 문 열린 화장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런, 케이.. 불쌍하게도.."


"목졸림 당해 질식사한 것 같아요. 거실로 가죠."



거실 복판으론 눈이 까뒤집혀진 앤드류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목 정중앙으론 칼이 똑바르게 꽂혀있었고 주변으로 넓게 얼룩진 검붉은 피가 마치 꽃잎처럼 앤드류를 감싸고 있었다.



"현장만 잘 보존했다가 시경이랑 과학수사 애들한테 인계하면 돼요."


"이놈이 케이 남동생인가? 그 약쟁이 놈?"


"예, 맞아요. 얼마 전 케이 씨네 어머님 장례식이 있었더라고요."


"잠깐만, 내가 맞혀보지. 자기 앞으론 상속된 게 하나도 없는 걸 알고서 푼돈이라도 옭아내려고 찾아왔다가 말다툼이 붙었고.. 그다음은.. 이런 거겠구먼."


"아마 그런 거겠죠, 콜롬보 씨. 식료품점에 담배 사러 가던 노인네 하나가 집안에서 남자가 소리 질러 대는 거랑 뒤엉키는 소리가 나니까 신고했어요. 이 동네 사람들 모두 케이 씨가 혼자 사는 걸 아니까요."


"..그럼 역시 이 약쟁이 놈이 화장실로 도망가던 케이를 쫓아가선 목 졸라 죽이고는, 그리곤 자포자기하는 식으로 자살한 건가? 그런데 이렇게 자기 목에다 칼 꽂고 자살하는 게 가능한가?"


"약쟁이 놈이 뭔들 못하겠어요. 집안은 밀실에다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고요. 케이 씨도 목 졸림 외엔 외상이 없는 데다 약쟁이 놈 역시 칼에 의한 자상 말고는 없어요. 자포자기로 그랬는지 약에 취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스테레오 타입 사건이죠."


"허긴. 오늘의 토픽에도 못 실릴 일이지."



대화가 멎은 뒤에도 잠시간 앤드류를 내려다보던 로버트는 이번엔 소파 앞에서 가만히 빛내고 있는 호박색 홍채 두 쌍과 눈을 마주쳤다. 



"이 애들은 뭐야?"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죠."


"여기 집 애들이야?"



부보안관이 한 차례 콧김과 함께 '그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로버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호박색 홍채들과 눈을 맞춘 채로 작게 읊조렸다.



"젠장.. 얘들아, 나한테 뭐 말해줄 게 없겠니?"



로버트의 말이 들리는지 아닌지, 각각 '루시'와 '루나'라는 이름이 새겨진 스웨터 재질의 옷을 입고 있는 자그마한 오렌지 태비 한 쌍이 탁자 위로 놓인 코코아와 로터스를 바라보며 연신 혀를 날름거렸다.








-fin-




















후기


단순한 루트와 아날로그식 연출을 뽐내는 그 옛날 공포 단편들을 이제는 사람들이 별반 반기질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제법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이야기들엔 어쩐지 고풍스러운 기품(하지만 억지스럽진 않은)이 있다고 느껴져서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엔 꼭 고양이가 등장한다. 그래서 나도 언젠간 그런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었다. 비록 나는 요크셔파이지만.


예전 창작단편인 '귀신 들린 집', '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와 이번 단편이 바로 그런 부류겠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418779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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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존재한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7. 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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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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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존재한다




나는 미래에 대해 결코 생각하는 법이 없다.

어차피 곧 현실로 다가올 거니까.


- 알버트 아인슈타인





장례식 절차만큼이나 사람 진을 빼놓는 게 또 없다. 특히나 유족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목사의 손짓에 따라 무덤가 앞에 선 올리비아는 조심스레 장갑 위로 쌓은 흙 한 줌을 관 위로 흩뿌렸다. 이어 목사의 말에 따라 조문객들 모두 고개를 떨구곤 묵상기도에 동참했다. 올리비아만 빼놓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무덤가를 감싸 안고 있는 묘비와 눈을 맞췄다.



에단 피츠패트릭 

MAY. 28. 1985

NOV. 7. 2016



절차가 모두 끝나고 올리비아는 같이 있어야겠노라 바득바득 우겨대는 부모님과 친구들을 한사코 마중 보내고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잠시간 거실에 놓여진 비취색상의 가죽소파를 훑어내리고서 곧 그곳으로 무너지듯 몸을 내실었다. 가죽소파는 군데마다 해져선 하얗고 거친 속살을 들이밀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속살을 쓰다듬으며 손끝으로 감촉을 연신 느껴댔다.


가죽소파는 에단의 좋은 파트너였다. 고된 일과를 거쳐 밥 먹을 여력도 없이 쓰러졌을 때, 컵스 경기를 보다 맥주 비우는 것도 잊고선 졸아버릴 때(에단은 그럴 때마다 TV를 향해 "정말 똥들을 푸고 있군."하고 중얼거렸다), 일요일 햇살에 맥을 못 출 때.. 그럴 때마다 에단은 새우등을 하고선 가죽소파의 품에 안겨 마치 세상을 벗어난 사람인 양 새근거렸다.


올리비아는 쓰다듬을 멈추고 가만히 하얀 속살의 내음을 들이켰다. 집안에서 에단의 외침이 다시금 울리는 것만 같았다. 으레 외치곤 하던 그 말이.



"리비! 밖에 갔다 왔으면 손부터 씻어!"



올리비아는 천천히 한 손을 내려 자신의 배를 연신 사뿐히 쓸어내렸다. 에단이 남기고 간 아직 여물지 않은 그의 유산을.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언제나 흐른다. 최근 올리비아는 그걸 새삼 느꼈다.


간신히 잠든 베서니를 복고풍 모델의 목제 아기침대에다 조심스레 눕히고선 올리비아는 숨돌림과 함께 생각했다.



'걷게 되는 날부터는 더 죽어 나가겠군.'



올리비아는 잠시 베서니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새우등을 한 에단의 감긴 눈이 절로 떠올라서였다. 올리비아는 픽 하고 웃었다. 이제 문득 에단의 기억이 떠올라도 그렇게 행복한 웃음이 나온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비록 인생의 의미 반이 사라진 채였지만.


에단이 있었다면 아마 이것보다 곱절은 훌륭한 목제 침대를 손수 만들어냈겠지.. 그러다 퍼뜩 정신을 돌린 올리비아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까치발로 방문을 나섰다.



'마지막 회를 놓치나 했더니 이렇게 시간이 남을 줄이야!'



계단을 내려온 올리비아는 거실로 가 절도있는 본새로 TV를 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가죽소파로 향하려다 문득 가죽소파 뒤편에 자리한 참나무 책장으로 시선을 놓았다. 그건 에단이 만든 수제 책장이었다. 책장으론 책들(대부분, 실은 거의 다가 에단의 것들이었다)이 틈도 안 주고서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빳빳한 색상의, 이제는 누렇게 바래진, 절판되어 다시는 구할 도리가 없는, 그런 책들이 서로 몸을 의지한 채 꼿꼿이 고개를 뻗치고들 있었다.


에단과 올리비아는 서로 책을 읽는 방식이 영 딴판이었다. 에단이 한 번 책을 들면 끝을 봐야 하는 식이었다면 올리비아는 조금씩 조금씩 날을 두고서 읽어내리는 식이었다. 에단이 하나의 큰 감정선으로 책을 대하는 거라면 올리비아는 날마다 다른 감정선으로 대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간 올리비아는 전혀 책을 대하지 않아 왔다. 베서니의 탄생과 육아로 정신적인 여력이 없기도 했었지만

사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가죽소파에 새우등을 하고 누워 있노라면 책장이 자신을 부드러이 감싸 안아 속삭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마치 에단처럼. 그래서 그 모양새들을 감히 흩트리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올리비아는 달랐다. 지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에단을 굳건히 쌓아 올릴 수 있었고 (에단이 생전 근사하고 훌륭한 목수였던 것마냥 그녀 역시) 오히려 더 깊어진 사랑은 이제 대체물이 필요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서야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세상의 순리가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어쨌건.


그 순간 올리비아는 갑자기 책이 읽고 싶어졌다. 에단이 읽던 책을 읽고 싶어졌다. 어차피 드라마 시작 전까지 시간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날마다 조금씩'이 아니던가. 잠시 검지 하나를 뻗어 책들을 헤아리던 올리비아는 한 책에 다다라 손을 멈췄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이었다. 올리비아는 에단과 처음 영화를 보러 갈 때 들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본 게 쥬라기 공원이야. 부모님이 데리고 갔었지. 끝나고 나와서 가판대에 전시된 랩터 장난감을 사달라고 얼마나 졸랐었는지 몰라. 그리고..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받은 선물이 됐지."



에단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읜 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을 땐 외톨이가 되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정말 외톨이였다. 에단은 누구와도 관계를 쌓지 않았다. 사실 올리비아가 에단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혼자였다. 올리비아는 에단과 만나면서도 그의 가족이나 친구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에단이 생전 친구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 친구들 모두 본래는 올리비아의 친구들이었지만.



"내 쪽엔 하객도 들러리도 없어. 가족도, 그리고 친구도."



결혼식을 준비하며 에단이 수줍게 말을 꺼냈고 초여름에 있었던 야외 결혼식에서 신랑 측 하객과 들러리는 올리비아 측 절반이 맡았다. 그렇다고 에단이 괴팍한 심보의 소유자라던가 성격 어디 한구석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올리비아의 가족과 친구들이 때때로 에단을 더 좋아하는 걸 노골적으로 표하면서 가끔은 질투가 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에단은 묘한 사람이었다. 말주변이 특출나게 좋다거나 뻔뻔한 얼굴로 금세 친해지는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단과 마주할 때면 모두들 마치 부모 품에 안긴 아이마냥 포근함을 느꼈다. 막 처음 본 그에게서 누구보다도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건 마치 자신의 추억을 함께 공유한 가족에게서 느끼는 그것과도 같았다.


올리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감히 사랑에 빠졌노라 말할 수 있으니까. 둘은 다음날 한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즉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올리비아는 발을 힘껏 뻗어 에단의 무릎에 뉘었고 그럴 때면 에단은 남는 손으로 올리비아의 발을 연신 쓰다듬었다.


흰색 페이퍼백으로 이뤄진 쥬라기 공원엔 표지 이곳저곳으로 쭈글한 금이 가 있었다. 마치 가죽소파의 속살마냥. 올리비아는 꼬맹이 에단이 랩터 장난감을 부여잡고서 만면에 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올리비아의 양 입꼬리로도 어느새 미소가 걸렸다. 오, 나의 엔. 오, 우리의 베티.


올리비아가 쥬라기 공원의 속살을 펼쳤다. 그러자 동시에 그 속살은 종이 하나를 토해냈다. 전형적인 접이식으로 접혀진 종이 하나를. 잠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 종이를 들쳐 올렸다. 그리고 종이를 접기 순서에 따라 차례로 푸는 와중 뜻 모를 심장 고동을 느껴야 했다.


이윽고 펼쳐진 종이 맨 위의 글자조합을 읽은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손을 이마로 갖다 대곤 나지막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종이 맨 위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안녕, 내 사랑 리비



올리비아는 들고 있던 종이에서 잠시 눈을 떼야 했다. 어느새 흐르고 있던 양 눈가의 그리움과 사무침을 닦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음 문장을 읽으려면 말이다.



자기한테 하려는 이 말, 어떤식으로든 꼭 했어야 하는 이 말, 그걸 혹시 자기는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에 대해 원망을 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리비, 나는 그저 '시간'에 따랐을 뿐이야.


리비, 이제 자기는 내 얘기를 알게 될 거야. 지금 자기가 이 글을 읽어내리는 순간이 바로 그 때이니까.


자, 리비. 우리 베티는 세상 단잠에 빠졌고 드라마 마지막 회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야. 드라마는 결말보다 그 과정에서의 감정들이 중요한 거니까. 그러니까, 움직여!



올리비아는 꼬맹이 에단이 랩터에게 그랬듯 한동안 종이를 꼭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에단은 생전 자신의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물론이요, 당연히 자신이 지어준 이름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베서니의 단잠과 드라마 마지막 회라니..


그러나 종이 위로 남아있는 글씨는 분명 에단의 필체였다. 그리고.. 움직이라고? 움직이라니? 올리비아는 여전히 종이를 손에 쥔 채 그대로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서있어야 했다. 움직여! 에단의 외침이 들리는듯 했다.


그런 올리비아의 눈에 책장 맨하단으로 DVD 케이스 뭉텅이들이 들어왔다. 주말이면 올리비아와 에단의 밤을 밝혀주던 DVD들. 올리비아는 홀리듯 종이를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뻗어 DVD 케이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꺼내든 DVD 케이스를 앞면으로 돌리자 거기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문구가 있었다. 올리비아가 에단을 졸라 같이 몇번이고 돌려봤었던 DVD였다.


올리비아는 케이스를 열어 그곳에 있던 또 하나의 접혀진 종이를 봤고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그 종이가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종이를 펼치자 거기엔 빼곡하게 글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레카, 리비!


나는 자기가 첫 번째 종이를 본 뒤 곧바로 이 종이를 찾아내리란 걸 알고 있었어. (드라마 따윈 내팽개치고서!) 정말이야. 나는 자기한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


리비, 지금부터 이 글을 빠짐없이 잘 읽어야 해. (물론 난 자기가 그랬단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자기도 알다시피 난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어. 교통사고였지. 그분들이 부디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셨길. 그즈음부터였어. 그러니까, '시간'은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게. 아니, 실은 그걸 진정으로 깨닫는 데엔 훨씬 더 오랜 나날이 걸렸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나는 부모님을 볼 때면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되었어. 그건 부모님이 탑승한 차량과 몇 대의 차량들이 뒤엉켜 사고를 일으키는 거였지. 나는 그게 뭔지 몰랐어. 왜 그런 '장면'이 보이는지, 그리고 그게 뭔지도 말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서 나는 그게 미래를 본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감당하기 버거운 죄악감에 휩싸이게 되었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말리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친구들에게서도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있었어. 그래서 다툼, 사고, 불행처럼 나쁜 것들이 보일 때마다 그걸 막아보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모두 실패였어. 언제나 모든 미래의 순간들은 결국엔 '장면'대로 벌어졌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말이야.


리비, 내가 느껴왔던 그 무력감을 자기는 헤아릴 수조차도 없을 거야. 사실 자기가 헤아리지 않았으면 싶지만 말이야. 그건.. 슬픈 거니까. 나한테도, 자기한테도.


그러다 나는 '장면'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어.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꼈던, 그리고 느끼게 되는 강렬한 감정선, 바로 그 순간을 엿보는 게 '장면'이라는 걸. 내가 갖게 된 그 능력은 대체 무얼까? 우주에서 발생하는 먼지만 한 틈새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왜 내게 그런 능력이 생긴 걸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부터 나는 사람들과 일절 관계를 맺지 않았어. 더는 '장면'에 시달리고 싶지가 않았어.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나는 과거와 미래에만 존재하게 되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거든. 그래서 그냥 고통받지 않는 외톨이가 되기로 했던 거야.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웠어. 무력감보다 두려움이 더 컸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로부터 미래의 내 모습을 보게 될까 너무나 무서웠어. 거기엔 분명 나쁜쪽으로의 모습도 포함될 테니까.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나서 하나 깨달았어. 나는 그때까지 누구로부터도 그때 이후의 내 모습을 '장면'에서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래, 자기. 나는 애초부터 그들 모두와 평생 등을 지고 사는 거였던 거야.


그렇게 나는 외톨이로 살았어. 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게서부터 말이야. 그러다 리비, 자기와 만났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나는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어. 내 생에 가장 행복했고, 행복하고, 행복할 순간이었으니까.


자기와 맨처음 세상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그 순간 나는 '장면'을 보게 되었거든.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눈만 마주친 건데 말이야. 나는 그 찰나의 순간 보았어. 자기와 내가 다음날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거,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거, 초여름 야외에서 열린 환상적인 결혼식(자기의 말에 따르길 잘했어), 우리가 매순간 사랑하는 거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보였지만 나는 찰나 동안 그걸 모두 볼 수가 있었어. 자기가 손 위로 놓인 흙더미를 조심스럽게 내 무덤가에 바치는 것도, 베티가 첫 음성을 세상에 공표하던 것도, 드라마 마지막 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 베티를 재우던 것도, 지금 당신이 내가 남긴 이 글을 읽는 것까지도. 그리고, 자기와 베티의 삶도.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시간'은 경사로를 따라 흘러가는 돌멩이가 아니라 경사로 그 자체였다는 걸. 그 찰나의 순간이 끝나던 순간 나는 알게 되었어. 나는 리비 자기를 사랑해왔고 사랑하고 사랑할 거라는 걸. 그 순간이 처음으로 운명이 내 편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지.


그리고 오, 리비.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어.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라고. '시간'은 존재하는 거라고. 그러니 리비, 자기. 더는 나를 그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 없어. 나는 지난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이 다음에도 당신과 베티와 같은 순간에 함께 있는 거니까. '시간'은 존재하는 거니까.


리비, 자기. 자기가 아직 손댈 엄두도 못 낸 차고 지하의 내 공간, 그곳 한가운데 바닥을 보면 나무 바닥이 들리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거기엔 자기와 베티에게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주는 편지가 있어. 왜 그런 데다 숨겨놨냐고 화내진 마. 난 그저 '시간'에 따랐을 뿐이니까.


편지는 정확히 베티가 성인이 될 때까지에 해당하는 것들만 있어. 왜 그때 것까지만 썼냐고 아쉬워하지는 마. 자기랑 베티가 죽을 때까지의 편지를 쓰고 싶은 게 내 마음이라지만, 드라마의 묘미는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감정에 있는 거니까.


그러니 리비, 인생을 즐겨! 그게 바로 내가 당신 덕분에 알아낸 우주의 진실이야.


추신. 편지 말미에 날짜를 기입하지는 않을게. 나는 자기와 베티, 둘 모두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같은 순간 함께 있는 거니까.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에단이, 어떤 순간.



편지를 모두 읽어내린 올리비아는 눈물을 떨구지도 또 전혀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아주 깊이.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거니까. 그녀는 자신과 에단, 그리고 베티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같은 순간 모든 모습으로 같이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녀의 몸 속 모든 세포가 그걸 깨닫고 있었다.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조심스레 접어 DVD 케이스에 넣으면서 올리비아는 에단을 만난 이래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자신의 취미이자 마음을 채워주곤 했던 일, 홀로 바에서 여유롭게 한잔하는 일, 그 일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꼈다. 인생은 즐겨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시간은 존재한다. 언제나 존재한다. 올리비아는 이제 그걸 안다.



"맥캘란 12.. 아니, 18 더블 온더락으로 부탁해요."



바텐더로부터 한 잔 받아든 올리비아는 구석으로 걸어가 자리를 트고서야 입을 축였다. 저마다 무리를 지어 저마다의 감정으로 부딪혀가는 모습들을 몰트를 홀짝이며 보고 있는 건 가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기분이 꽤나 좋았다. 올리비아는 무리 지은 군중들 사이로 이방인이 되는 걸 꽤나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군중을 안주 삼아 홀짝이던 중 근처에서 자신처럼 홀로 서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올리비아는 이내 시선을 거뒀으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다시금 눈을 돌리자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살그머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우리들이 웃음을 지어 보이고자 내는 그런 표정이 아니라 즐거움에 겨워 얼굴 밖으로 새어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이었다. 올리비아는 필시 남자가 어린 시절의 웃는 얼굴 그대로를 가지고서 자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안돼. 지금은 정말 남자를 만나고 싶지가 않아. 그럴 때가 아니야.'



그 순간 어느새 올리비아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여전한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기도 모르게, 정말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와 같은 미소를 지은 채로 한 손을 쭉 뻗으며 말했다.



"올리비아예요.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리비라고 불러요."



남자는 역시 한 손을 쭉 뻗어 올리비아의 손을 아주 부드럽고 깊이 움켜쥐고선 말했다. 올리비아는 남자의 음성이 마치 자신을 품에 안은 듯 자상하다고 생각했다.



"안녕, 리비. 전 에단이에요. 에단 피츠패트릭. 엔이라고 불러도 돼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모를 거예요."








-fin-




















후기


그저 글을 쓰고 싶어 쓰는 사람이든 인세를 받고 글을 쓰는 사람이든 창작 분야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책상에 죽어라 앉아선 이야기를 짜맞춰가는 방식, 자신이나 타인의 경험을 모델로 이야기를 구상해가는 방식, 독자로 하여금 의도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자 시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 등등.


내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고 할 수가 있겠다. 나는 이 창작 분야에 도통 재능이라곤 없다. 정말이지 우스울 정도로 없다. 다만 가끔씩 잠이 들던 찰나의 와중, 잠이 든 순간에서의, 그리고 잠이 막 깨려는 찰나의 와중 간혹씩 어떤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그 순간은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순식간의 찰나이다. 짧으면 수 초, 길면 1분. 그리고 과정에서 간혹 접하게 되는(전달받게 되는, 더 정확히는 꿈꾸듯 느끼게 되는) 이야기 구조가 있다. 말로 더 자세히 설명하긴 어려우나 어쨌건 그렇다.


어떤 이야기인지를 떠나 그 순간 어떤 긴 행복보다도 농밀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 또 그런 이야기를 더듬고 더듬어 미약한 글재주로나마 끄적일 수가 있어 더할 나위가 없다.


내가 지금껏 끄적여 온 창작 단편물 모두가 이런 식으로 탄생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 노출됨에 따라 부끄러운 한편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혹시 이런 방식이 너무도 편하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건 어찌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말인즉슨, 이런 방식은 마치 스팸 전화와도 같아서 지가 원할 때만 걸어온다는 거겠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간과 관련한 SF적 이야기를 원했고 2018년 7월 11일 새벽간 잠자리에서 찰나에 전달받았으므로 이렇게 이날 이른 오후 작성을 마치는 바이다.


아, 에단의 말마따나 2018년 7월 11일이 아니겠다. 어떤 순간 찰나에 전달받았으므로 이렇게 어떤 순간 작성을 마치는 바이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320349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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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Down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6. 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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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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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Down





어둠 깔린 2성급 호텔 창문 앞에서 나는 서 있었다. 어찌 이런 색을 골랐을까 싶은 연고동 색상의 커튼 자락을 한 손으로 툭툭 쳐대면서. (그럼 그 자락은 계속해서 열심히도 돌아왔다) 저 아래 호텔 정문으로 자리한 싸구려 인조야자수 잎 끝자락 자락 갈라진 개수를 세며 나 마이클 켐블은 서 있었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멈추고서 욕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기분 나쁜 쇳음과 함께 벌거숭이 모습으로 나온 레스터가

불알을 수건으로 털어대며 외쳤다.



"이런 싯팔.. 미키!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왜 말 안 했냐! 불알 터질뻔했잖냐!"



걸쭉한 웃음과 함께 내 뒤로 바싹 다가온 레스터가 쥐고 있던 수건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어 수건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목덜미를 힘주어 잡고선 조용하게, 또 마치 동요를 부르는듯한 억양으로 말했다. 이건 레스터가 어릴 때부터 나를 안심시킬 때면 쓰던 방법이었다.



"괜찮아, 미키. 다 잘될 거다. 행운은 필요해질 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거든.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고."


"..만약 내가 진다면?"


"그럼 계속해서 패를 돌려. 더 많이 패를 돌리는 거야. 완전히 질 때까지."


"..그러고서 완전히 진다면?"


"걱정 마, 따샤. 승부는 너 혼자서 하지만.. 뒈질 땐 내가 네 앞에 있을 테니까." 



내 머리 위에다 수건을 올려다 놓고선 레스터는 알몸 그대로 침대 커버 속으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비벼댔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들의 갖은 정액 덩어리가 새겨진 커버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레스터가 다시 말했다.



"인마, 뭣하면 스트립걸이나 부를까? 아까 카지노들 둘러보는데 웬 비너가 명함을 주더라고. '핫 베이브가 호텔 방에서 보여드립니다. 696-9696' 옌병할, 이 번호 죽을 때까지 못 잊어먹을 거 같지 않냐?"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레스터는 황망히 웃음기를 거두어 크게 숨을 내뿜곤 재차 말했다. 마치 사과는 빨간색이라는 걸 설명하는 것처럼.



"걱정 마라. 켐블家 남자는 필요할 때가 되면 승부에서 이긴단다. 그리고 내일이 바로 그 때고."


"..하지만 모두들 자기 여자가 뒈질 땐 손도 쓰지 못했지."



내 말에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던 레스터는 한 차례 픽 하고 자조 섞인 콧방귀와 함께 '네 말이 맞아, 천재 양반.'하고 대꾸했다. 그리곤 이어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살려야 할 거 아냐. 한 번쯤 역사를 거슬러보라고, 따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가지고 있는 게 거의 없다. 그저 남아있는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얼굴 하나를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내 친형 레스터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어머니는 우리가 철이 제대로 들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촌부였다. 뉴멕시코주 남동부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놈 중의 촌놈이었고 우리 또한 그랬다. 우리는 어릴 적 마을(학교가 있는) 외곽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고 아버지는 양을 치기 위해 30마일은 떨어진 목장에서 해가 떠 있는 동안을 보냈다. 그곳에 있을 때면 별채에 마련된 라디오와 전화기가 아버지의 마누라요, 자식놈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우리 형제가 매번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일요일이었다. 그날이면 우리는 엄마의 전매특허인 칠리소스가 조금 들어간 '크리스마스(우리 지역의 전통음식이다)'를 먹고 아버지의 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점심때까지 함께 양을 쳤다.


그 이후부터가 중요한데, 우리 세 남자는 별채 원탁에 둘러앉아 엄마가 싸준 팬케이크를 목구멍에다 들이밀며 카드를 쳤다. 우리가 치던 카드 게임은 언제나 블랙잭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딜러를, 배팅액은 1게임당 1쿼터 상한이 룰이었다.


그렇게 우리 세 남자는 일요일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대통령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름의 주일예배를 실천했다. 아버지의 목장 별채는 우리 형제에게 있어 신의 안식처였던 셈이다. 일요일은 우리 남자들에게, 또 엄마에게도 말썽쟁이 세 놈에게 벗어나 한숨 돌리는 안식일이었다.


아버지는 유능한 딜러인 동시에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매일의 절반을 외로움과 싸우며 우리 가족을 뒤에서 보필한 신이 내린 양치기였다. 그는 불평 따윈 도통할 줄을 모르던(적어도 우리 형제가 태어난 이후로는), 매번 생색 없이 일용한 양식과 따뜻한 옷가지를 내려주던 진정한 사내였다.


물론 이런 사내도 약해질 때가 있었다. 엄마가 난소암으로 손쓸틈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내는 거의 두 달 내내 우울해 있었다. 평소보다 목장 별채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일요일마다 운영되던 주일 예배당도 중단됐다.


이 무렵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왠지 평소처럼 대하면 어느 순간 툭 하고 아버지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우리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더 사랑했다는 걸 느꼈기에 그걸 알 수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까지 묵묵히 외로운 싸움을 견디던 아버지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형제를 불러세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마당에 놓인 가로로 길쭉한 오동나무 의자(아버지가 엄마를 위해 직접 만들었었던 의자였다)에 앉아있었다. 우리 형제는 서로 눈치를 보다 쭈뼛거리며 아버지 양옆으로 자리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한 번씩 훑고는 멜빵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곤 나와 레스터 입에다가도 하나씩 물리고는 차례로 불을 붙여줬다. 그렇게 세 남자는 시외 담배 전문점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말보루를 꼬나물고는 사내의 딜러 복귀를 미리 축하했다.


아버지는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우리 형제가 성인이 되도록 해주었으며, 나와 레스터에게 각각 싸구려 중고차를 내려 어디든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내가 아내와 결혼하고 딸을 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내는 갑작스레 간암으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위해 살았다. 우리 형제는 신을 믿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믿었다. 아버지는 신이 내린 양치기였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우리 형제는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게 됐다. 레스터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자신의 첫사랑 사만다와 앨버커키에서 살림을 차렸다. 나는 본래 살던 집을 처분하고 아버지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 여전히 양 치는 일(정확히는 그 일이 더 확장되어 젖소들도 생겼다)을 했다.


나와 레스터가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된 건 둘 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면서였다. 내 아내 샤롤르트는 감기를 심하게 앓는가 싶더니 심근염으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레스터의 연인 사만다는 약물중독치료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호텔방에서 약어로 된 가루를 거하게 빨고는 난간에서 노래 부르며 율동을 하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그나마 위안인 건 샤롤르트와 달리 행복한 기분으로 생을 마감했을 거라는 거겠다.


그리고 이제 내 딸 클로이는 급성 백혈병이라는 원인도 알 수 없는 아주 악독한 병 때문에 2차 골수 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두 차례의 항암치료와 골수 이식 후에 1주년 기념 파티를 하기 직전 병이 재발해서 말이다.


클로이마저 암에 걸리면서 이제 나는 완전히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선 내가 신의 대리인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한편 이 저주받은 켐블家를 돕고자 내 형 레스터가 돌아왔다. 레스터는 기꺼이 나와 함께 신의 대리인이 되기로 해주었다. 항암치료와 골수이식 비용 등으로 이미 내 똥꼬가 털려버리자 자기 똥꼬를 내놓으러 레스터가 고향으로 복귀한 거다.


곧 레스터는 자기가 알던 날건달을 통해 이탈리아 이민자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 시칠리아 태생의 남자 앞에서 서약을 하는 신세가 됐다.



"둘 다 잘 들어, 이 모래밭 촌양키들아. 기한일에서 1초라도 지나면 곧장 우리 애들이 잡으러 갈 거야. 그리고 마리아께 맹세컨대 너희 형제를 다른 얼치기 놈들의 반면교사로 삼고 말겠어. 너넨 살아있는 채로 소장과 대장이 어떻게 그렇게 길었을까 하고 보게 될 거다. 도망갈 수 있으리라 생각지 마. 그러니까 내 말은, 네 딸을 두고서 말이야."



"으아아어어어어!"



곯아떨어진 레스터의 입에서 날숨이 뒤범벅된 끔찍한 웅얼거림이 새 나왔다. 아마 꿈속에서 자기 소장과 대장을 보던 중이었나 보다. 그걸 방해하면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최대한 조용하게 자세를 바꾸고는 재차 잠을 재촉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와 양을 칠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미키, 양의 털은 깎고 깎고 또 깎을 수가 있단다. 하지만 껍질은 아니야. 껍질은 한 번밖에 벗길 수가 없거든."



도박 또한 그렇다. 도박에서 승리하는 법은 간단하다. 여러 번 이기는 게 아니라 단 한 번 이겨야 할 때 이기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좋지 않은 패가 들어오면 뒈져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날 가장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껍질을 벗겨내는 거다.


아버지는 주일 예배당에서 우리 형제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블랙잭만큼 신사다운 카드게임이 또 없지. 플레이어가 승리할 가능성이 49.72%나 되거든."



늘 그랬듯 아버지 말이 맞다. 블랙잭은 신사들의 게임이다. 딜러가 이기거나, 플레이어가 이기거나. 하지만 이 신사들의 게임에서조차 언제나 승리하는 건 딜러들이다. 간단하다. 플레이어들은 돈을 따려고 하지 않고 꿈을 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행에 환희를 보내고 잃었을 때를 추억한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부도덕한 거지 결코 블랙잭이 부도덕한 게 아니다. 승리하고자 노력해 본 적 없는 쪽이 돈을 따는 거, 그거야말로 부도덕한 거 아니겠는가.


그래, 물론 세상은 부도덕한 일로 넘실댄다. 문제는 어리석게도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에게도 그런 부도덕한 불로소득이 올 거라고 기대한다는 거다.



"딜러 퀸, 딜러 버스트.. 플레이어 윈입니다."



내 주변으로 '와'하고 탄성이 이어졌다. 옆의 처음 보는 양복쟁이는 얼굴이 시뻘게져선 내 어깨를 연신 움켜쥐며 환호했다. 그러곤 자기 옆 여성(좀 전까지 마치 런웨이이를 걷다가 온 듯한)의 허리춤을 거칠게 안아채고는 침을 튀겨대며 외쳤다.



"봤어? 봤어?"


"그래, 자기야. 저 사람이 이긴 거지?"


"그래! 벌써 8만 달러라고! 이봐, 형씨! 좋았어! 이렇게 된 거 10만 달러 채우라고!"



양복쟁이가 다시금 내 어깨를 쥐고선 흔들어댔다. 재수 없는 것들. 저 치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자기 경주마인 양 행동한다. 마치 운명이란 놈이 늘상 궁핍하고 불운한 것들을 찾아내어선 쥐고 흔들려는 것처럼. 나는 양복쟁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입꼬리만 힘겨이 올려 보이고선 테이블의 칩을 내 쪽으로 끌어모았다. 맞은편의 생선 대가리를 닮은 딜러가 반쯤 벗겨지고 없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겨우 중얼거렸다.



"..축하드립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일순 내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모두가 나를 주시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눈만 살짝 돌려선 조금 떨어져 자리한 레스터를 바라봤다. 빨대가 꽂힌 프루트 주스잔(얼음이 녹을 대로 녹아 밖으로 수증기가 맺힌)을 들고선 우두커니 서 있던 레스터는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다시 눈을 돌려 이번엔 내 앞의 딜러를 쳐다봤다. 딜러는 나처럼 빌린 돈으로 카드라도 치는 것처럼 저 너머의 핏보스(얼굴테로 개기름이 낀)를 흘끗 바라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재차 얼마 없는 소갈머리를 정돈했다. 오, 생선 대가리. 그래도 너는 게임이 끝나도 네 안에서 나온 창자 더미가 손 위에 올려질 일은 없을 거 아니냐.


카드판은 양치기와 여러모로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엔.. 너무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보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놓치기 마련이다. 그런 내 속내를 어느새 읽었는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군중(이미 한참 전부터 테이블엔 나와 딜러뿐이었다)이 발을 구르며 합창하기 시작했다.



"위너, 위너, 치킨디너! 위너, 위너, 치킨디너!"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군중을 한 번, 레스터를 한 번, 핏보스를 한 번, 딜러를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앞에 쌓인 칩 더미를 봤다. 딜러가 말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배팅하죠. 한도만큼"



내 말에 군중은 재차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딜러는 체념한 듯 카드를 정리해 셔플마스터에다 정성스레 투입하기 시작했다. 나는 칩 더미 속에서 반무퉁이 가량을 떼 앞으로 밀어젖혔다. 도박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그날 가장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껍질을 벗겨내는 거다. 지금 이 시각 이 생선 대가리의 맞은편 자리는 패가 들어오는 자리다. 그리고 나는 아직 필요한 껍질이 한참이다. 관광와서 스트립걸들 팁이나 벌어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레스터? 그 자리 그곳에 서 있던 레스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 번 숨을 크게 내쉬는 입 모양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딜러가 말했다.



"딜하겠습니다."



첫 번째 플레이어 카드, 숫자 9. 첫 번째 딜러 카드, 숫자 10. 두 번째 플레이어 카드, 스페이드 잭. 그리고 두 번째 딜러 카드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졌다. 딜러가 입술을 오므린 채 내 손동작을 기다렸다. 나는 가만히 내 앞에 놓인 카드 두 장을 번갈아 봤다. 먼저 숫자 9를, 그리고 이어 스페이드 잭을. 그다음 딜러 앞에 놓인 오픈된 숫자 10을. 나는 나도 모르게 절로 중얼거렸다.



"..그날과 똑같아."



그날과 마찬가지로 스페이드 잭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인마, 내가 네 램프의 지니가 되어줄게. 나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애꾸눈 잭이니까."



고등학생 무렵 동네에서 형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카드 말이다. 특히나 블랙잭을. 형은 그야말로 애어른 할 거 없이 동네 남자들의 주머닛돈을 모두 긁어모았고 또래 여자들은 돈 대신 유방을 보여주느라 가슴이 남아나질 않았다. 이건 정말이다. 상대방 동행인과 함께 번갈아 딜러 역할을 해야 하느라 항상 형 옆에 있었으니까.


당시 마땅한 오락거리 하나 없던 시골이었던지라 주말이면 동네에 혼자 사는 프랭키 아저씨네 집에서 카드판이 벌어졌다. (프랭키 아저씨는 모두에게 입장료를 받았고 추가 요금을 내면 식을 대로 식은 크래프트 병맥주도 내왔다) 그리고 간혹 대승부가 벌어지는 날엔 대관료를 받고서 집을 비워주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주말마다 신성한 카드판의 집정관 노릇을 했다. 카드판이 벌어지는 날마다 집 앞 흔들의자 위에 몸을 뉘어 크래프트 병맥주와 싸구려 담배(간혹 입장료가 없는 사람은 대신에 담배를 냈다)를 했는데 그때마다 어깨 한편으로 엽총이 자리하고 있어 카드판에 끼는 사람들은 카지노에 온 양복쟁이들 마냥 지극히 예의가 바르고 순순했다.


이런 카드판에 전설로 남은 명시합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레스터가 낀 판이었다. 그리고 그 시합은 레스터의 십 대 마지막 시합이기도 했다. (이 시합 이후 도박사실을 아버지에게 들키면서 코피가 두 번이나 나야 했으니까) 레스터가 동네 남자들의 돈을 휩쓸면서 아무도 함께 카드를 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번 돈은 중고로 포드 픽업트럭을 살 정도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레스터는 엄마를 잃고 나서부터 언제라도 가족이 아프면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돈을 모으려 했단다)


물론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돈 욕심에 덤비는 자들이 몇 있었으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이윽고 레스터가 카드 카운팅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엔 다들 촉새 레스터가 무슨 수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겠냐며 웃어넘겼지만 불알 두 짝까지 쫙쫙 털리는 이들이 속출하면서 모두들 레스터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건 현명한 처사였다. 레스터는 진짜 레인맨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현명치 못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어느 날 '더 크레이지' 크루즈가 형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크루즈는 그 애칭답게 정신이 좀 돈 놈이었다. 레스터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성격이 그렇게 포악해 학교는 일찌감치 퇴학당하고 동네 어른들도 길을 가다가 마주치면 눈을 피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그런 크루즈가 도전장을 내밀었고 레스터는 자기가 무슨 챔피언 벨트라고 두르고 있는 양 호기롭게 그 도전을 수락했다.


그건 레스터에게 꿍꿍이가 있어서였는데 그 꿍꿍이란 다름 아닌 크루즈의 여동생 사만다였다. 사만다는 동네 또래 여자애들 중, 아니 동네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다. 하지만 사만다와 데이트를 한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눈이 높아서였는데.. 엄밀히 말해 사만다가 아니라 크루즈의 눈이 높아서였다.


사만다에게 집적거린 남자애들은 다음날이면 작살이 나도록 얻어맞고 발가벗겨진 채로 길가에서 발견되기 일쑤였는데 어떨 때 보면 크루즈가 코피 터뜨리는 일을 즐기려고 자기 동생을 이용하는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레스터 또한 사만다를 흠모했으나 자기 코피 색을 확인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던지라 가끔 마주치면 캣콜링을 날리며 윙크를 하는 게 다였다.



"얼빵아, 룰을 좀 바꿔야겠어. 고 잔대가리를 돌려대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날 크루즈는 테이블 위에 카드덱 4벌을 올려놓고서 말했다.



"바뀐 룰은 이거야. 룰 하나, 여기 내 동생만 카드를 딜한다. 둘, 매경기마다 이 4벌을 셔플한다. 셋, 카드를 딜할 땐 동일한 카드덱이 아니라 각각의 카드덱에서 돌아가며 돌린다."



그건 훌륭한 묘안이었다. 그런 방식으론 레스터는 물론이고 조니 모스, 도일 브런슨 같은 양반일지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을 테니까. 사만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테이블 위의 카드덱을 차례로 셔플하기 시작했다. 나와 레스터는 마르스에게 지혜를 빌려준 게 이 사랑스러운 미네르바였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가 있었다.


나는 레스터를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댔다. 대관료는 버린 셈 치고 망신살 한번 당한 뒤 나가는 게 상책이었으니까. 레스터는 내게 윙크를 날리고는 크루즈에게 말했다.



"좋아. 찬성이야."


"좋아. 하지만 아직 몇 가지 더 있어, 얼빵아. 마저 들어봐."


"..좋아."


"룰은 동일해. 다만 딜러 역할은 번갈아 가면서, 그리고 배팅은 텍사스홀덤 식으로, 자기 턴마다 배팅 가능, 상한가 없음, 한쪽이 전부 잃을 때까지."


"..좋아. 하지만 상한선을 정하지 않았다가 만약 진 쪽 쩐이 부족하면?"


"그럼 오늘은 그 부족한 만큼 흠씬 두들겨 맞고서 차용증을 남겨야 겠지."


"..알겠어. 네 룰에 따를게. 다만 이쪽도 요구사항이 있어. 그걸 들어주지 않겠다면 게임은 여기서 종료야."


"그래, 한 번 지껄여봐."


"두 가지야. 하나, 나는 돈을 걸겠어. 전부 잃게 되면 당연히 그건 네 거야. 지불액보다 많이 잃으면 기꺼이 얻어맞고서 차용증도 남기겠어. 단, 너는 돈을 모두 잃어도 그 돈을 주지 않아도 돼."


"..그건 또 무슨 잡소리야?"


"네가 가진 돈을 다 잃으면.. 돈 대신 네 여동생이랑 데이트하게 해 줘."



레스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루즈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위압적으로 생긴 각진 턱으로 마치 레스터의 얼굴을 빵꾸라도 내려는 듯 밀착시켰다. 크루즈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만다를 한 번 흘끗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선 레스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좋다구. 그렇게 하자. 네가 오늘 두 발로 집에 갈 수 있을지 정말 기대된다, 얼빵아."



비열한 웃음과 함께 크루즈가 테이블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판돈 대신 여자애들의 가슴을 보는 데다 사만다를 걸라는 요구를 그 오빠가 받아들이는 게 남성 우월적으로 보였다면 사과한다. 변명하자면 그땐 그런 시대였다. 국기의 불명예 사건이 채 잊혀지기도 전이었으며 지나가는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당연한 권리이자 미덕인 시대였다.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턱을 까딱거리는 크루즈를 앞에 두고서 레스터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 이 게임은 나 대신 여기 내 동생 미키가 끝까지 한다."



그 말에 크루즈는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 대신 너네가 가진 돈 보다 더 많이 잃으면 둘 모두 손봐주는 거다. 어이, 거기 샌님! 빨리 앉아. 게임 시작이다.'라고 외쳤다. 레스터는 눈만 똥그랗게 뜨고 있는(그래, 이번엔 내가) 내 목덜미를 힘주어 잡고선 조용하게, 또 마치 동요를 부르는 듯한 억양으로 귓속에다 말했다.



"괜찮아, 미키.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내 돈 다 잃어도 돼. 혹시 돈이 부족해서 맞게 되더라도.. 승부는 네가 하지만 뒈질 땐 내가 네 앞에 서 있을게. 뭐.. 그럴 일도 없겠지만. 너도 알지? 카드 카운팅 없인 네가 나보다 잘하는 거. 그리고 카드 카운팅이 있어도 결정적인 게임에선 항상 네가 이기는 거."



내 앞으로 미니멈 배팅액인 2달러 치 칩이 올려지고 크루즈가 딜러로, 곧이어 사만다가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플레이어 카드, 숫자 9. 첫 번째 딜러 카드, 숫자 10. 두 번째 플레이어 카드, 스페이드 잭. 그리고 두 번째 딜러 카드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졌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원아이드 잭을 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크루즈에게 말했다.



"..더블다운."



크루즈가 피식하고 웃더니 대꾸했다.



"지금 상황에서 더블다운을 하겠다고? 그래, 맘대로 해봐라. 나야 감사히 따라가 주지. 야, 형 쪽 켐블. 네 동생 정신머리 멀쩡한 거냐? "



나는 내게 놓여진 칩 전부를 앞으로 밀어젖히고는 다시 말했다.



"..우리가 가진 돈 전부를 베팅하겠어."



크루즈는 내가 내민 2천 달러가 조금 안 되는 칩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샌님놈이.. 지금 여기서 장난이나 하자는 줄 아냐?"



레스터가 황급히 다가와 내 어깨를 짚고는 '얌마, 미키!'라고 작게 웅얼거렸다. 나는 그런 레스터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려 포개고선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아, 레스터. 내가 이기는 게임이야."



내가 그렇게 득의양양하게 첫판부터 더블다운으로 올인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날 이 승부를 두고 나는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새벽 늦게야 선잠에 들었다. (레스터는 진작부터 코를 골아대며 자빠졌었지만) 그리고 그런 선잠 와중 꿈을 꿨다. 블랙잭 게임이 진행 중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플레이어였다. 딜러가 내게 카드를 2장 줬는데 하나는 숫자 9였고 다른 하나는 스페이드 잭이었다. 그리고 딜러의 오픈 카드는 숫자 10이었다. 스페이드 잭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친구. 더블다운을 걸어.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 전부 베팅해."


"하지만.. 2 이상이 나오면 내가 지는 거잖아."


"그래, 너 똑똑하다. 잔말 말고 전부 베팅해!"


"그렇지만.."


"인마, 내가 네 램프의 지니가 되어줄게. 나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애꾸눈 잭이니까."


"..좋아. 내게 승리를 줘."



그리곤.. 베팅과 함께 내게 마지막 카드 한 장이 들어왔다. 에이스였다! 총합 20. 내 앞의 스페이드 잭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봤지? 이젠 딜러 차례다. 오래 끌 거 없이 한큐에 끝내줄게."



이어 딜러 측 남은 카드 한 장이 오픈되었고.. 그 카드는 숫자 7이었다. 언 럭키 세븐! 딜러 측 총합 17. 딜러가 숫자 17 이상이므로 스테이가 되어 내가 승리했다.



"..야, 내 동생이 더블다운으로 전부 건다잖아. 어쩔 거야? 받을 거야, 죽을 거야?"



레스터의 도발 섞인 어조에 크루즈가 재차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좋아. 좋다, 이 얼빵한 형제야. 사만다! 카드 돌려!"



크루즈의 외침에 경기라도 일으키듯 일순 놀랐던 사만다가 조심스레 카드덱 중 한 곳에서 꺼내 든 카드를 내 앞으로 펼쳤다. 에이스였다. 레스터가 비명 같은 외침을 날렸고 크루즈는 똥그래진 눈으로 나와 내 앞의 에이스를 계속해서 번갈아 봤다. (사만다는 참으로도 귀여운 딸꾹질을 했다) 내가 말했다.



"자, 크루즈. 내가 네 카드를 맞춰볼까? 네 카드는 불운하게도 숫자 7일 거야. 언 럭키 세븐인 셈이지. 총합 17, 강제 스테이, 플레이어 승."



크루즈가 마치 내 팔 한 짝을 뽑아버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곤 자신 앞에 놓인 덮어진 카드를 오픈했다. 숫자 7이었다. 레스터가 외쳤다.



"싯팔! 미키! 네가 뭘 했는지 봐봐!"


"이건 말도 안 돼!"



크루즈가 테이블 위의 칩들을 손으로 거칠게 쓸어버리며 외쳤다. 그리곤 이어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쥐어틀었다.



"비열한 쥐새끼 같으니라고!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내가 간신히 호흡을 끊어가며 '카드는 네 여동생이 돌렸잖아'라고 말했고 크루즈는 '입 닥쳐!'라는 말과 함께 내 멱살 채로 나를 반쯤 들어 올렸다. 레스터가 현관을 향해 다급하게도 외쳤다.



"프랭키! 프랭키! 문제가 생겼어요!"



거의 동시에 쾅 하고 문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프랭키가 모습을 나타냈다. 프랭키는 마치 지옥 불에서 숙면을 취하던 중 억지로 지상으로 끌어올려 진 악마마냥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테이블 앞으로 느릿느릿 큰 걸음으로 다가온 프랭키가 입을 열었다.



"애송이들아. 내가 대관료를 받고 자리를 빌려준 거지.. 여기가 너네들 학교라도 되냐? 조용히 카드나 치라고."



레스터가 나와 크루즈를 가리키면 숨넘어갈 듯 조아렸다.



"우리가 이겼는데 이 자식이 행패를 부리잖아요! 프랭키, 당신 카지노에서 감히 멋대로 굴 수 있는 건가요?"



나와 크루즈 쪽으로 고개를 돌린 프랭키가 바로 앞까지 와서는 다시 입을 뗐다.



"그건 안되지. 내 카지노에선 룰을 지켜야 하고말고. 룰 하나, 졌으면 돈을 뱉어내. 룰 하나, 싸움은 바깥에서. 룰 하나, 행패 부리는 놈은 내가 엉덩이를 까준다."



이번엔 내 멱살에서 손을 뗀 크루즈가 프랭키 쪽으로 한발 다가가 얼굴을 치켜들곤 말했다.



"그래서.. 어쩔 건데. 거기 그 낡아빠진 엽총으로 날 쏘기라도 할려고? 쏴보시지, 그래?"



나, 레스터, 사만다가 침 삼키는 것도 잊고 상황을 주시하는 가운데 프랭키가 얼굴을 한층 더 내리깔고선 말했다. 그 거대한 키에다 오히려 위압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깡마른 몸매, 그리고 잔주름 곳곳으로 팬 서늘함을 뿜어내며.



"아니, 그렇지 않아. 널 쏘다니. 당치도 않지. 내가 산 거의 반만큼도 살지 않은 널 쏴봐야 무슨 명예가 남겠어.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내 룰을 지키지 않겠다면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너와 나, 우리 둘 모두 이제부터 아주 재미없는 시간이 될 거다. 약속하지."



그 말에 잠시 프랭키의 얼굴을 훑던 크루즈는 이내 귀까지 시뻘게져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곤 현관 쪽으로 걸어 나가면서 도중에 레스터를 거칠게 밀고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해 지기 전까지 사만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맹세컨대 너네 형제를 산송장으로 만들어 강둑에다 거꾸로 처박아 줄 거다."



"..손님? 스탠드 하실 겁니까?"



내 앞의 생선 대가리 딜러가 말했다. 내가 대꾸했다.



"아뇨.. 더블다운이요."



주변의 군중이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 언제 왔는지 레스터가 내 바로 뒤로 자리하고 있었다. 딜러가 말했다.



"..지금 더블다운이라고 하셨나요? 확실하신 건가요?"


"그래요. 더블다운. 그리고.. 저기 핏보스도 좀 불러주고요. 여기 있는 칩을 전부 걸 거거든요."


"..손님, 상한선은 5만 달러까지입니다. 그건 인정되지 않아요."


"네, 똑똑하시군요. 그래서 제가 핏보스좀 불러 달라고 한 겁니다."



딜러는 오므린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핏보스 쪽을 바라봤다. 한편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핏보스가 그 개기름 낀 몸뚱일 마침내 움직여 딜러 옆으로 와 섰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제안할 게 있습니다. 더블다운을 걸고서 제 칩을 전부 베팅하고 싶어요."


"..선생님, 저희 카지노 블랙잭은 상한선이 5만 달러입니다."


"나도 내 칩이 전부 얼만지는 알아요. 하지만.. 자, 보세요. 어차피 이 테이블 구멍도 전부 내 차지고.. 그리고 나랑 딜러 카드도 좀 보시고요."



핏보스가 내 카드와 딜러 카드를 힐끔 확인하고는 말했다.



"안됩니다, 선생님. 테이블 상한선은 5만 달러입니다."


"이봐요, 라스베가스 최고의 상한가 테이블을 보유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 그 호텔의 핏보스가 너무 겁이 많은 거 아닙니까? 그쪽 재량으로 가능하단 거 다 알아요. 내 카드를 보세요, 난 맨몸으로 내 모든 걸 다 걸고 있다고요. 겨우 상한가의 2배예요. 아니면, 내가 계속해서 상한가 베팅으로 게임을 해도 날 끌어내리지 않을 거라고

여기 사람들 앞에서 약속해줄 수 있어요?"



핏보스는 내 카드와 딜러의 카드를 다시 한번, 그리고 더 많아진 주변 군중을 살짝 둘러보고선 말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이번 베팅 한 번뿐입니다."



핏보스의 말에 군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편 내 뒤로 레스터는 한 손으론 내 어깨를 짚고는 말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그런 손 위로 내 손을 포개고는 레스터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레스터. 내가 이기는 게임이야."



딜러가 빠르게 여러 번 앞머리를 추켜올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플레이어 더블다운. 남은 카드 한 장 딜하겠습니다."



다시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해진 가운데 딜러가 일순 머뭇거리는 손 움직임으로 카드를 꺼내어 내 앞으로 오픈했다. 에이스였다.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군중들이 미친년놈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레스터도 벌게진 얼굴로 내 어깨를 쥐고선 흔들어대며 '부야!'라고 외쳤다. 딜러는 내가 본 가장 애처로운 눈빛으로 옆의 핏보스를 힐끔 쳐다봤다. 핏보스는 그 옛날 크루즈가 지었었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어깨를 짚은 레스터의 손을 두어 차례 쓰다듬고는 핏보스를 향해 말했다.



"이제 제가 딜러 측 카드가 뭐일지 말해볼까요? 숫자 7일 겁니다. 그리고 총합 17로 스테이가 되는 거죠. 언 럭키 세븐."



내 말에 핏보스는 양 허리로 손을 짚고는 귀까지 벌게져선 나를 노려봤다. 그 중간에서 딜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딜러 카드 오픈하겠습니다.."



이어 딜러가 자기 앞의 뒤집어진 카드를 오픈했다. 그리고 군중들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픈된 딜러 측 카드는 에이스였다.



"....미키, 아직 끝난 게 아냐. 돌릴 수 있을 때까지 패를 돌리는 거야. 아직 내일까지 하루 시간이 더 있잖냐. 오늘 너무 빠르게 벌었던 거야."



카지노 한복판에서 다 쓰러져가는 나를 한 손으로 지탱하며 레스터가 말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달리 레스터 특유의 낙관학개론도 내 귀에 머물질 못했다.



"레스터..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주머니에 있던 50센트 뭉텅이를 꺼내 레스터의 손에 올려놨다.



"이게 지금 우리 전부야.."



나는 레스터 손 위로 케네디 얼굴과 함께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새겨진 동전들을 잠시 멍하니 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건 목적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레스터와 떨어지기 위함이었다. 그 옛날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가 또한 우리 형제를 피하던 것처럼.


그 순간 내가 신을 믿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을 믿는다면, 그러면 그 작자가 어디 있든 찾아내선 흠씬 두들겨줄 테니까. 그럼 사람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불로 태우겠지. 빌어처먹을 놈의 신, 신, 신! 아! 라스베가스여! 사막 한가운데로 솟은 오아시스! 신기루인지도 모르고 목구멍에다 모래를 퍼넣는 도피자들!


나는 재차 찾아온 현기증에 한쪽 무릎과 한쪽 손을 땅바닥에다 짚어야 했다. 마침 내 옆을 지나가던 노부부가 내 쪽으로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디밀고는 걱정스레 말했다.



"이봐요, 괜찮은 게요? 사람을 불러줄까?"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노부부는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저 노인네들보다도 빨리 뒈지게 생겼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내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여러 것들이 떠올랐다.


이제 어째야 할까.. 레스터.. 먼저 레스터에게 사과해야겠다. 날 위해 자기 목숨도 내놓다니.. 젠장, 그 시칠리아 놈이 분명 우릴 죽일 거야. 레스터에게 그놈을 소개시켜준 크루즈가 그걸 도울 거고. 그 자식은 사만다가 죽으면서 레스터에게 더더욱 원한을 가졌으니까. 시칠리아 놈은 우리 장기를 시험용기에다 절여놓고선 한쪽 방에다 전시하겠지. 그럼 돈을 빌리러 오는 놈들마다 거기로 데리고 가선 이러는 거야. '이거 보여? 여기 용기 앞에 붙인 사진 속 놈들 몸 안에서 꺼낸 거야. 내가 직접. 자, 이게 주는 교훈이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으면 내가 알려주지. 돈과 관련된 약속은 절대로 지킬 것!'


그러다 문득 양치기 목장 별채에다 보관하는 사냥용 엽총(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로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총이 나가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차피 은행직원은 그걸 그리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이번엔 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포옹하던 그 순간이. 그 애의 다 빠진 머리에다 입 맞추던 순간 풍기던 두피의 살 내음. 그 애의 눈가에 키스하던 순간 입술로 느껴지던 눈썹의 무게. 입원실을 나가는 나를 가만히 새겨놓던 그 눈매.


나는 헛구역질이 올라와 다시금 땅바닥에다 손과 무릎을 짚고는 입을 가려야 했다. 사실은 입보다 눈가를 먼저 훔쳐야 했지만. 그러다 내 머릿속으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깨달았다.


그건 기도쟁이들이 평생 손을 맞잡아봐야 결코 깨우칠 수 없는 진리였다. 신이 내린 양치기란 없다. 신의 대리인은 없다. 오로지 신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신은 저 위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신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로 존재하고 있다.


신은, 가족이다.


내 머릿속으로 울리기 시작하던 요란한 경고음이 카지노 전체를 뒤덮었다. 곧이어 이번엔 레스터의 째지는 비명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미키! 미키! 내가 잭팟을 잡았어! 아아아! 싯팔!"




-fin-
























후기


이 이야기의 마지막 씬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티븐 킹 단편 <Luckey Quarter>를 오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제목인 Double Down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궁금하면 찾아보시라!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30038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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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커피숍 창가로 악마를 보거든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6. 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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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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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커피숍 창가로 악마를 보거든




나는 그날을 처음부터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날은 5월 24일이었어요. 그날 난 커피숍 창가 너머의 악마와 만났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비유나 은유, 시적인 표현으로써의 악마를 말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그자는 일견 악마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말인즉슨 헐벗고 벌그죽죽한 몸뚱이도, 제멋대로에 날 선 치열도, 막 자라 굽어진 손발톱의 모습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악마는 못 봐줄 몰골로 음험하게 나타나는 족속이 아니었던 거죠.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성미 급한 당신이 지금쯤 몸을 들썩이며 지루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2015년 5월 23일. 나는 본가가 있는 경기도 외곽으로 향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고 실질적으론 두 번째 이유로 인한 방문이었다.


이유 첫 번째,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다. 할아버지(늘 사냥감을 막 놓친 호랑이마냥 날이 서 있었다던)는 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 급성 심장정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냥반은 갈 때도 뒤 한번 안돌아보고 갔지.' 아빠가 한 말이다.


이유 두 번째, 독립한 지 4년 반 만에 돈이 다 떨어졌다. 하여 본가에 들러 내가 똬리를 틀만 한 둥지가 있는지 정세를 살펴야 했다. 이유 두 번째에 대한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말하자면, 내 직업은 글쟁이다. ('돈이 떨어졌으면 일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잖아?'라고 중얼거렸었다면 이 대목에서 조금은 납득이 갔겠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글쟁이 직업에 대한 이야기 좀 해볼까 한다. 글쟁이가 직업적으로 갖는 단점이야 모두들 알고도 넘칠 터이니(돈! 돈! 돈!) 남들이 언뜻 모를 수도 있는 장점을 말해보겠다.


먼저, 어느 곳에서든 살 수가 있다. 서울 밖은 물론 도심이 아닌 어느 교외 지역에서든. 이건 어디서건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적 배경에 있어 무척이나 편리한 부분이다. (베개와 책만 주시라!) 글쟁이를 생계수단으로 삼으려는 치들(왜 굳이 이 짓을 하려는 거지?)에게 유경험자로서 하나 조언하자면 가장 좋은 거주지는 부모님 둥지라는 거다. 일단 들어가라. 그리고 골방에서 조용히 지내라. 그럼 해결되리라. (베개와 책 외에는 원하지 마시라!)


하나 첨언하자면, 특히 이 직업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에게 그야말로 감당 못 할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헛된 망상을 붙들지 말 것. 그 재능은 어떻게 파악하느냐고? 경험을 토대로 말해주자면 파악할 시도를 해본 적이 있다면 이미 재능이 없는 거다.


또 하나 장점은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든 좋은 첫인상을 줄 수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이런 식이겠다.



"실례지만, 지금 하시는 일이 뭔가요?"


"아, 글을 쓰고 있어요."


"작가시구나!"



그러면 상대는 이제 밑도 끝도 없는 호감을 보내온다. 당연히 인간적인 호감 부문에 한정해서. 물론 그러한 호감은 내가 무언가를 이룩해서가 아니다. 사실 상대는 내가 어떠한 글쟁이인지 크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호기심에 무슨 종류의 글을 쓰는지야 묻겠다만. 이건 정말이다. 그들이 근본 없는 호감을 품는 원천엔 숱하게 많은 글을 남긴 '오래된 작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신 작가'를 줄줄이 꿰고 있는 괴짜는 거의 없다)


즉, 그들은 나를(혹은 글쟁이인 당신을) 바로 그 옛날 굶주린 주둥이로도 아편은 빨아 재끼며 작품을 완성해간 예술가들로 투영해 보는 것이다. 그네들은 아편 빤 예술가를 삼위일체처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 얼마나 우스운 불로소득인지. 그러니 만약 당신이 글로 돈을 벌고 있다면 이 예술가 선생들이 쌓은 다리 위에서 기꺼이 춤추길. 참고로 나는 앞뒤로 신나게도 흔들어댔다. 끝이 언제 올지 모를 땐 격렬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본가로 향했다. 5-6년 전 유명 작가의 이름을 딴 공모전에서 입상, 내 이름이 딸린 글이 출간, 단군 이래 호황이었던 적이 아직 없다는 출판계에서 신입 작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세를 기록(물론 액수를 본 월급쟁이들은 '그거 정말 못 해먹을 직업이구나'라고 자기 위안이 담긴 동정을 보내겠다만), 인세로 서울에 반전세 집을 장만.


그리고 지금은 글쟁이의 직업으로써 장점인 '어디에서나 살 수 있다'와 '가장 좋은 곳은 부모님 둥지'라는 절대 명제를 깨고서 서울 생활을 만끽하던 이 늙어버린 청춘은 아직 자신의 둥지가 남아있나 확인을 하러 가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별수 있으랴, 사람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결코 현명해질 수가 없는 법 아니던가. 언제든 또 다른 글로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글쓰기 재주가 어디로 떠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모르고 있었던 거다. 그 재능은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내게 남겨진 길은 두 개였다. 사형선고를 받들어 아사할 때까지 미련에 매달리거나, 유배지로 쫓겨나 부자유 속 자유를 누리거나. 4년 반 내내 별 볼 일 없는 연재처들에 궁둥짝을 빌어대며 월세로 보증금을 바람 빼먹듯 구멍 내던 나는 그렇게 본래의 둥지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허나 '최소한 글은 계속 쓸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위안을 위해 부모님께 사실을 전하고 혈정(血情)에 매달려야 했거늘 결국 제사 다음 날까지 끝내 체면치례하던 입속에다 점심밥을 밀어 넣던 나는 민망함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선 황망히 시외버스터미널로 나섰다. 그렇게 집을 나와 시내까지 걸었다. 십수 년 전 등교하던 때처럼 그저 그래야하는 거니까 발을 끌어가며 걸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걸 제외하곤 이제 목적지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시내엔 제법 많은 수의 가게가 존재했다. 헌데 우습게도 몇 년 새 군청 지휘 아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만 그 좁다란 시내에서 보이는 거라곤 커피숍뿐이었다. 그곳엔 내가 아는 대형 커피 체인점과 내가 모르는 대형 커피 체인점이 모두 있었다. 두 걸음 뗄 때마다 커피숍이 나타나곤 했는데 아마 이곳 커피숍 주인들은 매번 자기 옆집 커피숍에 잘못 들어가 한숨을 푹 내쉬곤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킬 게 틀림없었다.


덕분에 내 기분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둥지만 되찾는다면야 어느 커피숍이곤 굽히고 들어가 한자리 차지하고 말 테다. 그럼 본가에 눌러앉아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면책권이 생기리라.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금세 사치와 안락, 그리고 자축을 누리고파 마땅한 커피숍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글쟁이들은 본디 현실감각을 거부하며 사는 법이다)


바로 그때였다. 가게명으로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간판명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긴 조합의 글자로 이루어진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 조합은 외국의 인명 내지 지명 같기도 했는데 간판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이질감'이었다. 입구의 간판명 밑으로 나무 계단이 위로 늘어져 있기에 그것이 2층의 가게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게의 건물 외관 역시 간판명만큼이나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너머의 그 가게를 한동안 넋이 빠져라 보고 있었는데 만약 누가 내게 다가와 저 건물은 아직 나라가 독립한 사실을 몰라 숨어 사는 투사들의 아지트라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만큼 건물의 외관은 너무도 오래된 풍의 양식을 띠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2층 창가로 보이는 높다란 테이블로 보아(그리고 지역색으로 미루어) 그곳이 분명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것을. 허나 가게 안으로 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게는 마치 현지인들의 터부이거나 혹은 너무도 형편없어 찾는 이라곤 옆의 2층짜리 대형 커피 체인점 사장뿐인 것 같았다. 그 사장은 아마 오늘도 계단을 올라 그 가게에 들어섰다가 '아, 제발!'이라는 한탄과 함께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겠지.


나는 곧 내 안의 충동이 무책임하게 설득해오는 것을 느꼈다. 혹시 모르지, 저곳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일지. 보통 그렇잖아? 내가 장담하는데 구약에 나오는 사탄은 바로 이 '혹시 모르지'로 둔갑해선 우리들 속에 똬리 틀고 있다.


그 순간 그 2층 가게의 창가로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손에 컵을 든 남자였다. 내 나이대의(당시 나는 고작 서른하나였다) 사람이 이렇게 표현하는 게 조금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는 젊은이였다. 헤어스타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는 절대로 단정한 옆머리를 하지 않으니까. 옆머리를 단정하게 치면 길거리 공무원들로부터 딱지를 끊는 줄 알거든.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자 마음먹었던 게 그를 보기 전이었는지 아니면 본 후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건 당시 그를 통해 앞으로 있을 도전에 대비해 일종의 평온을 맛본 것만은 확실했다. 설령 저 가게에 들어가더라도 주인이나 손님이 나를 쏘아보며 '대관절 저렇게 어린 놈이 여긴 왜 오는 거야?'라고 중얼거릴 일은 없을 테니까. 노인네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다. 그들 모두 미덕을 지키지 않는 얼뜨기에겐 조소를 보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비법이니까.


계단에 올라서자 그 끝엔 나무로 된 구식 출입문이(열쇠 하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왔다. 나는 순간 너무도 클래식한 모양새에 기가 죽어선 잠시 문이 자동으로 열리길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문은 제 모습을 유지했고 나는 맥없이 싸구려 도색의 손잡이를 돌렸다.


가게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생각 이상으로 정상이었다. 지나침 없이 정갈한 원목 바닥재, 실용성을 강조한 심플한 디자인의 테이블, 천연화산재로 마감된 벽면, 바닥재를 자연스레 비춰주는 색상의 조명등들(부검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조명이 아니라), 사방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관엽식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책들.


다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건 바로 내 쪽으로 향해 선 노인이었다. 노인은 아내를 떠나보낸 지 족히 20년은 되어 보이는 차림새였다. (이 나이대의 남자들은 결코 아내 없인 사람 많은 곳으로 나서지 않으며 아내가 새로 사주지 않는 이상 마음에 드는 옷만을 주야장천 입어댄다) 비닐 재질의 얇은 단색 재킷과 그 안으로 피케이 티셔츠(본래 색상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는) 차림을 한 노인은 내 쪽을 향해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처음 가게를 두고 했던 고민에 이어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여섯 발자국 앞의 노인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하는. 그냥 자연스레 지나쳐가면 될까? 그러기엔 이 노인이 너무 가까이 있는 데다 테이블 사이의 통로 또한 극적으로 비좁았다. 비켜달라고 할까? 안 돼, 아직 이곳이 노인들의 텃밭이 아니라곤 장담할 수 없으니까. 같은 요청이라도 자기 집 현관문에서 들으면 기분 나빠지는 법이 아닌가.


그렇게 우뚝 서 있던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에(그가 입은 잿빛 기지 바지만큼이나 싸구려로 보이는, 그러나 깃털 같은 몸을 지탱하기엔 충분히 단단해 보이는) 의지해 겨우 눈치챌 만한 느릿한 발동작으로 출입문 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2시간도 전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했던 듯싶다.


나는 이내 문 안쪽 좁다란 옆 공간으로 비켜섰다. 노인은 신중하게 지팡이질을 해가며 경사진 계단을 내려갔고 그 노인으로 인해 그때까지 고민 중이던 내 마음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적어도 이 집 커피엔 저 노인네가 목 부러질 각오로 올 만큼 특별한 게 있으리라.


밝아진 기분으로 다시 눈을 가게 내부로 돌리자 이번엔 창가의 그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는 내가 유령이라도 되는 양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선 노인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팔목까지 어설프게 걷어 올린 진한색상의 데님 셔츠에 검정 슬랙스 밑단으론 복숭아뼈가 깡총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책장 바로 옆에 위치한 테이블 아래에다 짐가방을 끌어다 놓은 뒤 조금은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카운터를 향했다. 가게엔 손님이 나 하나뿐이었으며(주인인지 직원인지도) 카운터 바로 앞 우측의 목제 기둥에는 벽걸이용 블랙보드 메뉴판과 스피커가 자리하고 있었다.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즈풍 노래가 흐르던 90년대풍 싸구려 스피커에서 글렌 밀러의 '문라이트 세레나데' 전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남자가 싱거운 어조로 내뱉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내 눈에다 시선을 맞춘 상태에서(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정확한 발음의 저음을 내놓았기에 무뚝뚝함보단 정중함에 가깝게 느껴졌다. 남자의 본새가 제법 멀끔했기에 긴장과 더불어 의구심도 풀렸던 나는 그러나 시외교통비만 한 가격표를 확인하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우라질, 커피값 받는 거로 건물 외관을 뜯었어도 열두 번은 했겠네. 그래도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영 손해는 아닐 것이다. 저 많은 책 중 봐줄 만한 거 하나는 있을 테니까. 


남자는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주며 커피는 자리로 갖다 주겠노라고(거, 참. 편리하군) 했다. 나는 손님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굉장히 상투적인 목 돌림으로 가게 이곳저곳을 채점하고는 이내 책장 앞으로 갔다.







남자가 테이블에 프러시안 블루색(그럴듯하게 들리지?) 컵을 내려놓고는 쌩하고 돌아갔다. 나는 <목수들이여,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란 책을 마저 꺼내 든 뒤 의자를 바짝 붙여 앉았다. 컵 안엔 진한 색상 위로 하얀 하트가 사무적이게도 수놓여 있었다. 어쨌건 맛은 좋았다. 그건 인정해야겠다. 내 취향에 거의 근접한 달콤쌉싸름이었다. 에스프레소가 영 저질은 아니었나 보다.


커피 맛도 괜찮고, 손님도 들지 않아 평화롭고, 친근한 척 말 건네는 가게 주인도 없고, 모든 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다. 그렇게 절로 콧소리를 내며 잔을 반쯤 비우곤 책 속 주인공이 결혼 당사자가 불참한 결혼식장에 당도한 부분을 읽어내려 갈 때였다.



"커피 맛은 괜찮나요?"



어느새 맞은편으로 자리를 차지한 남자가 꼭 짐짓 꾸며내는 듯한 어조로 쾌활히 물었다. 마치 투덜대며 눈 치우러 나왔다가 이웃집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나는 어설픈 미소로 그렇다고 대답함과 동시에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나 남자는 내 완곡한 의사 표시에도 아랑곳 않고선 어느새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친근한 척 말 건네는 가게주인도 없고'는 정정해야겠다)



"..임대료가 좀 부담이 돼야죠. 이럴 거면 뭐 한다고 이런 깡촌까지 내려왔는지.. 사실 여기 목도 내 입장에선 힘에 부치거든요. 세상에 귀신보다 무서운 게 부동산이라더니. 잘하는 거 없는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세상이 개만도 못하니 개 같은 것들만 판을 치고."


어느새 나는 책장을 덮고선 남자를 향해 적당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자는 내 또래로 보였으나 분명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인 듯했다. 상대에게 사적인 불평을 털어놓으면서도 묘한 카타르시스와 유쾌함을 느끼게 하려면 천성적인 말재주 외에 남이 하지 못한 경험이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가게 문 열고서 처음으로 온 손님이 아까 그 노인네였다니까요. 환장하겠는 건 매번 이런식 이라는 거거든요. 노인네 냄새 가까이서 맡아본 적 있으세요? 죽음의 냄새가 뒤엉킨 찌릉내. 그런 사람들이 여기 손님의 다라니까요. 아, 내가 뭐 나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던가 그런 건 아닌데요.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은 도통 원하는 게 없다는 거예요. 마음속에 '바라지 않는 것들'만 가득 차 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그런 사람들 싫어요. 아주 질색이거든요. 사람이라면 자고로 원하는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죠. 언제 어느 때라도요. 그래서 난 노인네들이 여기 오는 거 싫어요. 그 사람들은 '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여기 깡촌 것들도 죄다 마음에 안 들어요. 실은 도시 것들도 그렇지만요. 사람들이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알아요? 아침 되면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노인정에 갔다가 밤이면 집으로 기어가고. 자기 일 외에는 모든 게 스스로 굴러간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워낙 등신들인지라 정치라면 대통령 인기투표가 전분지 알죠. 사내새끼들은 그저 쑤셔댈 곳 없나만 생각하고 기집들은 TV에다 인생을 허비하고요.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 것들이에요. 서서 싸냐 앉아 싸냐만 빼고 죄다요. 거짓말 아녜요. 남자든 여자든 하는 거라곤 마냥 배부를 때까지 입속에다 뭐든 쳐넣는 거라니까요. 지가 뭘 원하는지도 몰라요. 잊어버리기로 했거든요. 먹고 자기 위해 사는 주제에,

그것밖에 생각하는 게 없으면서 겉으론 지들이 어찌나 괜찮은 사람인 척들을 하는지! 그거 범죄예요. 우리끼리 법전에다가만 써놓지 않기로 한 거지 범죄라니깐요.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모든 범죄가 나쁜 놈이 저지르는 게 아니라고요. 담배만 몸에 해로운 게 아니라고요. 하긴 어쩌겠어요. 인간이 본래 죄 많은 동물로 살아야 하는 법이잖아요. 그래야 구원받거든요. 성경에 나온 것처럼요."



나는 식어버린 컵을 의미 없이 돌려대며 적당한 웃음으로 계속해서 반응해주었다. 남자가 무슨 말을 더할지 사뭇 궁금했기 때문이다. (본디 극단적인 게 재미있는 법이다) 비록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있더라도 어쨌건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남자의 말본새를 보고 있자니 적잖이 유쾌했다.



"손님, 책 아주 좋아하나 보네요?"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실은 글 쓰는 일 하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한 나 자신에게 적잖이 놀랐다. 상대가 끈덕지게 물어오지 않는 이상(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다. 빌어처먹을 세무원 같은 것들) 글을 쓰는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 이후의 뻔한 레퍼토리들('책도 냈나요?', '뭐에 대한 거예요?')이 언제나 나를 꽤나 우울하게 만들어서였다. 그들은 뻔한 질문을 하고 뻔한 표정과 뻔한 생각으로 나를 본다. 마치 광대를 광대로만 바라보는 것처럼.



"오, 작가님이셨네."



남자가 한 차례 입꼬리를 양옆으로 길게 늘어뜨리곤 말했다.



"사실 그쪽이 가게에 왔을 때부터 알았어요. 작가님한테 원하는 게 있다는 걸요. 그래서 작가라는 대답에 별로 놀라지 않았지."



잠시 이게 무슨 말인고 눈알을 굴리고 있자니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그쪽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는 작게 '그렇군요.'라고 대꾸하고는 좌우로 컵을 돌려대는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글쟁이이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언제나 환영이지만 그 주제가 나를 향할 경우엔 정말이지 사양이다. 더구나 그게 훈계조라면. 차라리 얼굴에 침을 맞는 게 낫지.



"저기요, 의미 없는 짓 좀 그만 해요. 이미 사는 동안 충분히 그랬을 거 아녜요."



잔을 돌려대던 내 손목을 짓누름과 동시에 남자가 쇳소리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의 손 마디 마디는 보기 좋은 것을 떠나 다소 괴상할 만큼 기다랗고 가늘었다. 그리고 손목에 느껴지는 감촉은 그 옛날 초등학교 과학 시간 개구리 배때지를 갈라보라는 선생님의 엄포에 떠밀려 쥐었던 메스 손잡이를 떠올리게 했다.



"내 얘기했으니까 이제 작가님 얘기도 해봐요. 토요일 대낮부터 쫓겨난 행색으로 젊은 사람이 다 무너져가는 외벽 안으로 기 들어온 이유요."



손목에서 손을 뗀 남자가 재차 쇳소리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동시에 내 머릿속에선 성난 눈알로 개구리 배때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쏘아대며 '그어! 그으라고!' 명령하던 과학 선생의 음성이 떠올랐다. 나는 짐짓 꾸며낸 동작으로 허리를 반쯤 추켜세우곤 카운터 너머의 벽시계를 훑는 척했다.





2시 19분에서 20분으로 가기 직전.



"..이제 가봐야 돼서, 시외버스 타야 하거든요."



나는 시선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짧게 내뱉고는 고개를 떨군 채 짐가방을 챙기기로 했다. 맞은편의 남자와 같은 부류들을 꽤나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이유를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사유로 탈바꿈하는 치들. 시비를 걸어도 될법한 상대에게라면야 뭐든 시도하는 치들. 그러한 분노로만이 스스로를 가치평가 할 수 있는 치들. 세상의 대다수가 그와 같은 얼치기들이기에 나는 그런 부류를 꽤나 잘 안다고 확신한다. 내가 컵을 돌려대서? 호응이 시원찮아서? 웃는 게 비웃는 것처럼 보여서? 뭐든 좋다. 어떤 것이든 이유가 될 수 있으니까. 임대료만큼 손님이 들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남자에게 있어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남자가 이유 두세 개를 더 만들어내기 전에 적당히 둘러대곤 도망치는 꼴로 피해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몸을 숙여 테이블 밑을 사방으로 둘러봐도 짐가방이 보이질 않았다. 짐가방은 남자의 옆자리에 놓여있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양손(손가락이 거의 손목뼈에 닿을 정도였다)을 하고 있었다.



"시외버스 타러 가야 한다니까요.. 지금 안 가면 시간을 제때 못 맞춰요."



내 목소리가 어쩐지 애원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들려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왔다. 남자는 내 말에 과장스레 감탄과 웃음소리를 꾸며내고는 답했다.



"작가님이라서 그런지 말을 재밌게 하시네. 저기요, 그렇게 시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행색으로 이런 싸구려 건물을 왔다 갔다 하는 처지가 됐을까요? 도대체 그 티셔츠랑 신발은 뭐예요? 어디 가면 돈 주고 살 수 있는 거예요? 옌병, 그 바진 차라리 아까 나간 노인네 쪽이 더 세련됐네."



순간 발가벗겨진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황급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벗겨진 치부들을 그나마 가릴 수 있도록. 남자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사뭇 인자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름 대신에 작가님이라고 계속 불러도 되죠? 언제나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요즘 글은 잘 써져요?"



나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소가 아닌 웃음을 터뜨린 건 거진 1년하고 3개월 만이었다. 내 눈가는 순식간에 불그스레 물들었다. 글이 잘 써지냐는 물음을 들은 것 역시 1년하고 3개월 만이었으니까.



"4,506자, 4년 동안 내가 쓴 차기작 단편의 글자 수예요. 남들 하는 거 따라 하며 살려고 쓴 연재 글의 글자 수는

그 수십 수백 배가 되겠지만요."



내 목소리가 마치 쥐 새끼가 구녕으로 꽁무니를 뺄 때 낼법한 요상한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그거참.. 힘들었겠네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음성, 눈빛, 표정에는 어떠한 불순물도 첨가물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콧잔등까지 벌게져선 연신 콧물을 먹어댔다.



"4년 동안 혼자 그렇게 싸운 거예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이전 당시 내 또래들이 그랬듯 동네 태권도 도장에 다닌 적이 있다. 본래 태권도가 끝나면 봉고차에 태워져 집 앞에서 내려야 하거늘 언젠가는 같이 다니던 친구 놈 집 앞에서 내린 적이 있다. 그놈의 오락기 있다는 말에. 친구 집에서 놀고선 집에 가기 위해 차도 하나를 건넌 적이 있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 엉엉 짜면서 엄마한테 말했었다. 친구 집에서 놀고 혼자 차도를 건너왔다고. 적잖이 혼날 걸 각오했었던 나를 엄마는 살짝 안아주고는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혼자서 차도도 건너고 대단하다면서. 마치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가 나를 감싸 안듯 물어온 게. 그러자 우습게도 나는 여지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다른 모든 이들 앞에선 스스로를 만들어내느라 감히 할 필요가 없었던 내 사생활에 대해서 말이다.



"그걸 다 말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테이블 위로 냅킨을 집어 들어 흘러내리는 콧물만 살짝살짝 닦아내며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여긴 올라오는 계단이 많아서 노인네들이 오려면 입구에서 안쪽까지 족히 1시간은 걸릴 거거든요. 그거 보단 길지 않죠? 그럼 좀 곤란해서."



웃음보가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나는 웃음보를 참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예요. 그러니까 국민학교 때죠. 학교에 검프라고 불리는 애가 있었어요.."



이어 작당을 모의하는 소년들처럼 서로를 마주 보던 중 내가 말했다.



"야, 포레스트 검프!"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소리가 난다 싶으면 그곳엔 항상 검프가 있었다. 학교의 공식 지정 바보였던 검프. 뭔가 짜증이 난다거나 재밌는 게 보이지 않을 땐 남자애들은 검프 뒤로 살그미 다가가 참으로 호쾌하게도 뒤통수를 갈기곤 했다. 여자애들은 눈만 마주쳐도 앙칼지게 쏘아붙여 댔는데 그래도 그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단 나았으므로 검프는 주로 여자애들 근처를 서성였다.


나? 나는 아마 유일하게 학교 남학생 중에서(동급생 중에서) 검프의 뒤통수를 갈기지 않는 애였을 것이다. 그건 정의감에서가 아니라 쑥스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철부지에다 까불이인 동시에 어떤 부분에선 기벽이라고 할 만큼 애어른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있어 검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건 마치 반 애들 앞에서 춤을 춰대는 것과도 같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괴짜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쨌건 앞장서서 검프를 놀려대거나 뒤통수를 갈기지 않으면서 남자애들끼리의 암묵적 증표를 마다한 나였으나 다행히 그걸 꼬투리 잡는 애들은 없었고 따라서 내 뒤통수도 무사할 수 있었다. 애들은 철부지 까불이 또는 괴짜를 좋아하는 법이니까.


검프는 바보였는데 당시 우리끼리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 바보'는 아니었다. 반에서 꼴찌는 도맡았지만 그 앞의 녀석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말이 어눌하고 행동거지가 둔했지만(물론 이따금 침도 주르륵 흘리고) 그것 빼곤 사실 특별하게 우리들과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무렵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미 바뀌었었다) 때였다. 우리는 달마다 짝꿍을 바꾸곤 했는데 그 날은 짝꿍 바꾸는 날 전일이었다. 종례시간이 모두 끝나고 떼 지어 나가는 애들 틈에서 나를 끄집어낸 담임선생님이 살며시 말했다.



"잠깐 남아서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할래?"



본디 반 남자애들과 곧장 축구시합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나는 남자들끼리의 신뢰를 그 자리에서 팽개치곤 얌전히 선생님을 따라 다시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선생님은 학교에서 가장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보기 좋게 각진 얼굴 가운데로 진하고 얇은 눈썹에다 항시 구불거리는 풍만한 머리채를 단정히 치켜 묶고 다녔으며 가끔씩 청바지를 입기도 했다. (당시 선생님이, 특히나 여선생님이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온다는 건 애들에게 있어 쇼크에 가까웠다.)


또, 선생님에게선 늘 좋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그래서 우리 반 여자애들은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다. 비록 내색하지 않느라 애들을 써댔지만 그건 남자애들도였다. 학교 최고의 덩치이자 말썽꾼이었던 녀석도 선생님 앞에선 곧잘 생글거렸을 정도였다. (우리는 녀석의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오싹함에 몸서리를 쳤다.) 그런 선생님이 반장도 부반장도 아닌 나를 따로 불러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선생님은 교실 한 가운데 자리에 나를 앉히고는 자신은 그 앞자리 의자에 몸을 거꾸로 돌려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어른이 우리처럼 그렇게 의자에 앉는다는 게 참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뭐든 들어줄게요!) 재욱이 있잖니. (아, 검프 놈이 왜요?) 내일이 짝꿍 바꾸는 날인데 재욱이랑 여기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



나는 선생님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그 깨끗하고 반질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평소처럼 '이달의 불행한 아이'가 나올 때까지 종이 뽑기로 짝꿍을 정하거나(그렇게 불행한 아이가 된 여자애는 책상에 금을 긋곤 검프 놈이 움직일 때마다 기겁하기 일쑤였고 남자애가 짝꿍이 된 날엔 이따금씩 퍽 하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아니면 안경잽이 반장 부반장 중 하나를 시키면 될 일 아닌가?



"선생님은 네가 재욱이 짝꿍이 돼서 선생님이 말한 것들을 해줬으면 좋겠어."



선생님이 내 카라 한쪽을 바로 잡아주며 말했다.



"왜요?"



억울한 마음을 감추느라 다소 괴상해진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뒤통수를 갈기지 않는 것과 짝꿍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건 비밀인데.. 선생님은 너를 제일 좋아하거든. 이 학교에서 제일로. 다들 재욱이를 싫어하지? 그래서 너희들에겐 이게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잖아. 그러니까 선생님은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선생님은 제일 좋아하는 애를 제일로 믿거든. 선생님 부탁 들어줄래?"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생님이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팔을 움직일 때마다 말도 안 되게 좋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이어 선생님은 나를 똑바로 향한 채 눈과 입으로 환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날 조회 시간. 종이 뽑기를 하기도 전에 나는 검프 놈 옆자리에다 가방을 폈다.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검프 놈의 짝꿍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애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 일제히 나를 둘러싸고선 위로를 건네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나는 위로를 받을 만큼 슬프지가 않았다. 아니, 실은 기쁘기까지 했다. 선생님이 누구를 제일 좋아하는지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검프 놈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때마다 점잖게 꾸지람을 놓았고 급식 시간에는 반찬을 남기지 않도록 감독관 역할도 수행했다. 그리고 남은 학기 내내 검프 놈과 짝꿍을 자처했으며 졸업식 날 선생님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얼굴로 나를 꼭 안았다.


짝꿍을 정하는 날 전일, 선생님은 내게 가장 완벽한 미소를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게 주었던 건 하나가 더 있었다.


짝꿍을 정하는 날, 저마다 위로를 건넨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갔을 무렵. 한 여자애가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와선 무섭도록 깨끗한 눈동자를 한 채 또렷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너 진짜 멋지다. 정말로."



그 애의 이름은 김초현이었다. 하지만 남자애들은 그 애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그 애를 '로보캅'이라고 불렀다. 그 애는 5학년 때 전학 왔다. (그때도 같은 반이었다) 처음 그 애가 교실에 나타났을 때 우리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우뚱 기우뚱



그녀는 선생님을 따라 좌우로 양어깨를 갸웃거리며 한 발 한 발 큰 걸음으로 교탁까지 나아갔다. 교통사고가 그녀에게서 너무 빨리도 커다란 걸 앗아간 셈이었다. 애들은 그 애를 놀려대지 않았다. 적어도 앞에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맘 편히 놀려 먹을 수 있는 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검프 놈 놀리기에도 지칠 때면 남자애들은 지나가는 그 애 뒤를 쫓아가 걸음걸이를 흉내 내곤 키득거리기 일쑤였다. 더불어 남자애들끼리 그 애를 입에 올릴 때면 반드시 '로보캅'이라는 지칭으로 불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애를 사랑하는 거로 간주되었고 그건 초등학생 남자애에게 있어 너무도 큰 형벌이었다.


물론 여자애들은 그러한 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애가 결코 인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애는 집이 가까운 둘 셋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친구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물론 그 애의 신체적 특성으로 인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어른스러우면서도 깐깐한 성격 또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검프 놈 건으로 그 애가 내게 말을 건네기 전까진 나는 그 애와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으면서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인상 깊은 기억 두 개는 가지고 있었다. 남자애들이 자기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걸 분명히 알아차렸음에도 그 애는 뒤돌아본다든지 자리에 멈춰 울음을 터뜨린다든지 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 애는 언제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갈 뿐이었다. 고개 전방, 힘차게. 기우뚱 기우뚱


다른 하나는 그 애가 친구 둘과 함께 하교할 때의 일이었다. (사실 그 애는 우리 아파트 뒷동으로 이사를 왔었다) 그날 난 같이 하교하던 친구 놈이 청소 당번이었던지라 홀로 가던 중 우연찮게 동행 아닌 동행을 하게 되었다. (물론 여자애들이랑 같이 가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충분히 거리를 두고서) 동네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커다란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서 그 애 옆의 한 여자애가 지극히 꾸며낸 듯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초현아, 찻길 건너고 할 때 무섭거나 그러지 않아? 그러면 말해. 우리가 손잡아 줄게."



그러자 그 애는 여전히 맞은편 신호등에다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마치 엄마가 자식의 물음에 답하는 듯한 어조로.



"교통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들 중에서 자주 일어나는 거에 포함되는 게 아니야. 나는 이미 한 번 겪었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어. 게다가 다리 한쪽만 저는 정도라 나쁜 일 중에서도 좋은 일이었던 거고. 살면서 있을 나쁜 일을 이렇게 미리 운 좋은 수준으로 끝냈으니 다행이지."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애와 또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 된 거였다.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 일은 학기 초 담임 선생님의 주관으로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급격한 변화와 새로운 만남을 맞닥뜨리게 된 아이들은 저마다 터질 듯 불안한 마음을 감춘 채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소개 발표 시간을 소화해야 했다. 여기엔 난관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과 함께 자신의 별명을 소개하는 게 그것이었다. 아마 구시대적 발상에 매인 담임은 그게 더할 나위 없는 친교의 역할을 하리라 믿었던 듯싶다. (아니면 그저 생각 없이 전통을 따르던 거던가)


나는 그 시간 내내 가슴 한편이 짓눌러지듯 불편했다. 그건 그 애의 발표 때문이었다. 그 애가 걱정스러워서라기보단 그러한 난감한 상황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게 영 껄끄러워서였다. 그래서 속으로 담임을 어찌나 욕했는지 모른다. 그 애의 차례가 되고, 그 애는 자리에서 삐딱이 일어나 교탁으로 걸어 나갔다. 고개 전방, 힘차게. 기우뚱 기우뚱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 애의 다리 쪽으로 쏠렸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도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배가 땅겨와 잠시 상반신을 수그려야 할 정도였다. 기우뚱 기우뚱


그 애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별명을 발표(?)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였다. 1, 2초간 반 아이들을 좌우로 훑고는 그 애가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제 별명은 로보캅입니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든요. 아마 이 별명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다친 쪽 다리가 더 이상 좋아질 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의사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면서 겪을 큰 고통을 미리 겪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걸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남이 주는 것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저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든 저 스스로를 보는 눈은 변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연이어 박수 소리를 내는 가운데 쑥스러운지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선 잰 보폭으로 자리로 돌아가던 그 애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 연설(난 그게 감히 연설이었노라고 생각한다)로 그 애가 인기스타가 되었던 건 아니었다. (학교에선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법이다) 그 애는 여전히 여자애 둘 셋하고만(그중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 같이 다니던 애였다) 어울려 다녔다. 다행히 그 애를 로보캅이라고 놀려대거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남자애들도 없었지만 그건 그날의 연설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도 이젠 연민이라는 감정을 학습하게 되는 시기여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건 그날의 연설을 가슴 속에 품게 된 아이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나와 그 애가 학교에서 어울리는 일은 여전히 없었지만 같은 학원에서 만나게 된 걸 계기로

이따금 동네에서 마주칠 때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애는 한마디로 말이 통하는 동지였다. 어떤 주제로든 우리는 즐겁게 대화를 이어갈 수가 있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동네에서 마주쳤을 때 우리는 동네 청과점에서 맥주 한 캔씩을 사 예전처럼 놀이터 구석 벤치에 앉아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재미있는 건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마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꽤나 가치있게 생각했던 것 같고 그럴 때의 감정을 잃게 되는 게 싫었나 보다.


군 입대를 이틀인가 남겨두었을 때 그 애와 마주쳤던 게 기억이 난다. 그 애는 내 밤톨 머리를 보곤 모든 걸 깨닫게 되었는지 꽤나 오랜만에 마주쳤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중학교 때 자기소개 시간에 자신의 차례가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일순 지었던 그 표정과 똑같았다. 그날 헤어지던 때 그 애는 마치 지가 내 어미라도 되는 양 양손으로 내 얼굴을 살며시 감싸고는 힘주어 말했다.



"가서 잘 지내야 돼."



나는 그 애가 한 말을 지켰다. 다친 데 없이 제날짜에 제대했으니까. 그 애를 다시 만난 건 공모전에서 입상 후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날 오랜만에 고향의 동네를 거닐다가였다. (내 부모님은 내가 군대에 있을 당시 전원생활을 위해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했었다) 은행원 같은 차림새의 여자가 저 멀리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기우뚱 기우뚱 나는 정말 발작적으로 그 애의 이름을 외쳤고 뒤를 돌아본 그 애는 언제나처럼 큰 보폭으로 갸웃거리며 내게로 걸어왔다. 고개 전방, 힘차게.


그녀는 고향 동네에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놀이터 벤치에서 몇 캔이고 맥주를 깠다.


얼마 후 내 첫 책이 제법 히트를 치고, 나는 고향 동네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곳에다 반전세 집을 구해 들어갔고,

그 애는 이따금, 아니 종종 내 집을 방문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됐다. 그 애는 내 어미였으며, 내 아비였고, 내 누이였으며, 즐거운 벗이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어루만져주고픈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애는 내 청춘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즐거운 것에는 그 끝이 더 빨리 있는 법이다. 4년간 어떠한 창작도 해내지 못한 내게 어느 날 그 애가 걱정을 억누르지 못하고서 글이 잘 써지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걸 공식적인 내 사망 진단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 책과 같은 것을 몇 개는 만들어낼 줄 알았다. 결코 자만도 과신도 아니었다. 재능이란 어디로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결국, 시간이 다 된 것이었다. 지금 그 애와 헤어진다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자가 속 좁게도 여자를 몰아세우곤 헤어지게 되는 꼴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 그 애와 헤어진다면 여자는 헤어진 연유를 자신에게로 몰아세울지도 모른다.


시간이 되기 전 첫 번째만큼의 작품 몇 개를 더 내놓고 금전적 여유를 잡을 수 있었다면 아무 걱정 없이 그 애와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고개 전방, 힘차게. 하지만 이제 금전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고스란히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건 '행복'이었지 '만족'이 아니었다. 우리 둘이 스스로와 서로를 기만하며 시간 바깥에서 숨죽여 지내길 결코 원하지 않았다. 끝내 시간에게 들켜 다시 안쪽으로 끌려와 비참한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인간다운 게 아니니까. 그럴 바엔 강바닥에다 몸을 던지는 게 낫다.


그녀를 앙칼지게 밀어낸 지 1년 3개월. 그간 나는 지리한 미련을 감히 떨쳐내지 못하고선 매일 점심시간 그 애가 일하는 우체국 앞으로 향했다. 그리곤 식사 후 돌아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10여 초가 내 변하지 않는 일과였다. 그녀 역시 매일같이 돌아가는 길에서 나와 10여 초간 눈을 마주치는 게 일과였다.


그렇게 우리 둘은 무언의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는 그게 그녀 또한 내가 그녀를 밀어낸 연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도 내 재능이 다시금 세상에 팔리기 시작하면 끊겨진 시간을 이어붙일 수 있으리라 생각할 거라고 직감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허나 나는 이제 곧 그녀를 실망시키게 되리라. 나는 시간 바깥으로 줄행랑을 치고자 마음먹었으니까. 나 하나뿐이라면 언제까지고 바깥에서 숨죽인 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미련을 모두 저버린다면 말이다.



"..참, 현실적이라 더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침 삼키는 걸 이제야 떠올렸는지 남자가 목젖을 한 차례 상하로 흔들고는 말했다.



"본래 뻔한 게 제일 안타깝고 슬프고.. 그렇더라고요." 



거의 바깥까지 흘러내린 한쪽 코를 냅킨으로 훔치고는 내가 말했다.



"작가님, 내 생각에요.. 만약 금전적인 상황이 괜찮은 수준이었다면 작가님은 아주 행복할 수 있었겠죠?"



잠시간 뜸을 들이곤 남자가 말했다.



"그렇겠죠. 그 애랑 같이 있으면서.. 또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쓰고 싶은 글만 쓰고.. 엄청 행복할 수 있었겠죠."



잠시간 뜸을 들이곤 내가 말했다.



"덤으로 그 여자분 다리도 멀쩡했다면 더 좋겠고요. 그쵸?"



남자가 말했다.



"덤이 너무 커요."



내가 말했다.



"작가님, 만약에요. 내가 그 두 가지를 이뤄주면 어쩔 건가요?"



남자가 말했다.



"좋죠, 그러면."



내가 미소를 참지 못하고선 말했다.



"'어떻겠습니까'가 아니라 '어쩌겠습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면 어쩌겠습니까?"



남자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그쪽이 원하는 걸 해야겠죠."



나도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뭐로 받아가야 하나.. 분명 경쟁업체가 이런 걸 급여에서 10% 떼가는 형식으로 일하곤 하는데.. 사실 나는 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시간'이죠. 좋아요. 역시 시간이 좋겠어요. 작가님의 행복한 시간, 그 시간을 아주 조금만 나눠주세요. 약속하면 작가님에게 아까 말한 걸 이뤄줄게요."


남자가 미소를 거두곤 말했다. 나는 장난스레 그러겠노라고 맞장구치곤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아 몇 차례 흔들어댔다. 무언가를 털어놓으니 그래도 잠시간은 후련했고 이 모든 불행이라 생각했던 게 고작 세 치 혀로 설명이 가능하단 걸 깨달으니 깊은 곳에서 힘이 솟구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 애 생각이 났다. 오늘 내가 갑자기 모습을 안 보인다면 걱정할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럼 그 애는 내 의중을 판단하고 존중하느라 끝내 쥐고 있던 가느다란 실뭉치를 그대로 놓아버릴지 모른다. 비록 그게 단 하루뿐일지라도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그 애가 단 하루라도 슬퍼지는 게 더는 싫었다.


카운터 너머로 시간을 확인했다. 서두른다면 시외버스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그럼 퇴근 시간 전에 우체국에 모습을 비출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말하리라.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기다려보라고. 너와라면 언제 어디서든 춤을 춰도 쑥스럽지 않다고.


나는 남자에게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덕분에 즐거울 수 있었다고, 지금 당장 시외버스를 잡으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말 없이 옆자리의 짐 가방을 번쩍 들어 테이블 위로 사뿐히 내려놓았다. 나는 짐 가방을 낚아채듯 쥐어 들고선 그대로 달려나갔다. 고개 전방, 힘차게.


택시까지 잡아타고선 내리자마자 숨도 돌리지 않고 뜀박질을 했건만 매표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차량 출발 시간을 5분은 넘긴 때였다. 나는 막연한 기대를 붙들고선 표를 끊어 플랫폼으로 내달렸다. 드센 숨을 몰아쉬며 손에 들린 표가 그 너풀거림을 멈췄을 때 본디 없었어야 할 차량이 태연히 그 자리에 정차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량 바로 옆에는 전형적인 운전사 복장을 한 남자가 가느다란 담배 하나를 입에 물어 연신 자신의 생명줄을 뿜어내고 있었다. 표를 보인 나는 허겁지겁 차 안으로 기어들어 가 자리에 날리듯 몸을 던졌다.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있나. 내게서 발작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몇 차례 터져 나왔고 가짜 구찌백을 동여맨 옆옆 자리의 아줌마가 그런 나를 흘기듯 쳐다보았다. 아줌마, 이런 운수 좋은 날이 있을까요.


이내 둔탁한 엔진음과 함께 덜컹거리며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이 빠져버린 나는 몇 분 안 있어 꾸벅꾸벅 졸아대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번은 몸을 크게 들썩이며 얕은 잠에서 깨어났던 나는 마침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나는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다는 걸 느꼈다.


다음 순간. 눅눅한 느낌이 전해지는 눈꺼풀을 한 번, 두 번 들어 올리자 그곳엔 낯선 풍경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낯익은 풍경이 들어왔다.


낯선 풍경, 어느 모로 둘러봐도 병원이었다. 개인 입원실. 군데군데 색이 다소 바랜 흰색 벽지, 전형적인 색상의 목재 사물함, LCD 텔레비전, 가정용 절반 크기만 한 냉장고, 창문으로 내리쬐는 햇볕,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바짝 붙어있는 간이침대.


그리고 낯익은 풍경. 그 애였다. 그 애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 내 쪽으로 날듯이 뛰어와선 너스콜인지 뭔지를 미친 여자마냥 두드려댔다. 손을 쫙 펴선 인정사정없이 퍽. 그래 맞다, 남자애들이 검프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때도 저렇게 손을 쫙 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 애가 뛰어왔을 때, 그 애는 전혀 기우뚱거리지 않았다. 내 얼굴 위로 자꾸만 눈물 덩어리를 떨구며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는 순간에도 그 애는 전혀 갸웃거리지 않았다. 청바지 너머로 그 애의 탐스러운 허벅지 탄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영문을 몰라 그 애를 위아래로 훑고는 그저 따라서 눈물만 떨궈댈 뿐이었다. 이게 무어냐. 이게 무슨 운수 좋은 날이냐.


그렇게 수 초간 정신을 못 차리고서 뜻 모를 감탄음만 내뱉던 때였다. 웬 조그마한 여자애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양손으로 내 손목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선 손등에다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놀라서 한차례 숨을 훅하고 들이마시며 내가 쳐다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눈과 코를 한 그 여자애가 오물오물 입을 놀리며 말했다.



"아빠가 일어났어."



낯익은 얼굴들. 엄마, 아빠, 누나, 그 애, 그 애의 부모님, 그 애의 여동생. 처음 보는 얼굴. 좀체 내 손을 놓으려 하지 않는 조그마한 여자애.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런 모두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 흰색 가운 물결들을 꼬리처럼 달고 온 소갈머리 희끗한 의사. 의사가 내 초점에다 시선을 맞춘 채로 뜻 모를 말을 이어나갔다.



"환자분,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죠?"


"2015년 5월이고.."


"네, 그리고요?"


"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을 말해볼래요?"


"..5월 24일, 버스를 타고 있었어요. 시외버스요. 거기서 잠깐 졸았는데.. 근데 깨보니까 여기고.. 옷차림들을 보니까 겨울인 것 같고.."


"네, 환자분. 보호자분들 동의가 있었으니까 지금 상황을 모두 말해드릴게요. 오늘은 11월 7일입니다. 근데 2015년이 아니고 2017년이에요."



평소 많이 자는 편이긴 하지만 2년 반은 조금 너무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이 하나둘 방정맞게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 의사 말이 사실인가 보다.



"..교통사고가 나서 2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있었던 거네요."


"아니요. 환자분,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오늘이 9일째예요. 환자분 2017년 10월 29일 자택에서 저녁 식사 도중

의식 잃고 쓰러져서 여기로 입원하신 거예요."



무슨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건가 싶어 기가 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둘러싼 이들은 여전히 코만 훌쩍이고 있었다. 여자애는 '아빠가 갑자기 넘어져서 엄마랑 119 불렀어.'라고 오물거렸다.



"환자분, 환자분 병명은 뇌동정맥 기형입니다. 아마 들어본 적 없을 거예요. 0.1% 미만에게서만 나타나는 희귀병이거든요."



희귀병이라는 말에 일순 오금이 저린 나는 여자애에게 붙잡혀있던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쉽게 말씀드릴게요. 우리 몸은 동맥, 모세혈관, 정맥의 혈관을 거쳐서 피가 공급돼야 합니다. 그런데 환자분 뇌 뒷부분에서 손톱 반만 한 크기의 혈액이 응고해버린 거예요. 굳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자,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쪽이 막히니까 뇌에서 모세혈관을 거치지 않고 동맥에서 정맥으로 그대로 연결되면서 문제가 생기겠죠? 이게 뇌동정맥 기형입니다. 왜 이런 병이 생기는지는 현대 의학에서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아서 원인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여기까지 이해가 가셨죠? 이 병 때문에 환자분 뇌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지금 혼동하고 계신 거예요. 환자분 혼수상태에 있던 게 2년이 아니라 9일이에요. 뇌가 잠시 손상을 입어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에

이제 쉽게 말해 컴퓨터처럼 오류가 났다가 덮어씌워진 거죠. 환자분 지금 수술이 아주 잘 됐어요. 합병증 증세도 없고요. 한두 달 입원하면서 추이 좀 보다가 퇴원하면 일상생활 가능합니다. 다만, 한 번 뇌 기능이 중단돼서 기억이 손상된 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왜 컴퓨터도 지워진 공간에다 새로 파일 만들어지고 하면 예전 파일은 쓸 수가 없게 되죠? 그거랑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의사가 기계적인 어투로 내 보호자를 찾았고 곧이어 흰색 가운 물결들을 따라 그 애와 우리 가족이 병실 문을 나갔다.


자, 9일을 자면서 2년 반 동안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단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여자애의 단풍잎 같은 두 손을 뿌리치고는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아무도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능하다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싶었다.


그 애와 그 여자애(얘가 내 딸이란다. 세상에 마상에!)는 다음 날부터 내내 내 옆에 붙어 내가 자느라 잊어먹은 과거의 일들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노벨 문학상은 누가 탔어?"


"여자 작간데.. 그.. 이름이 길고 어려워. <체르노빌의 목소리> 썼던 사람."


"..2016년은?"


"밥 딜런."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나 보다.



"미국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어."


"그게 누군데?"


"도널드 트럼프."


"그 부자?"


"더 놀란 거 말해줘?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중간에 탄핵됐어."


"어? 왜?"


"그리고 감옥소에 있어, 지금."


"뭔 말이야, 그게? 쿠데타라도 일어났어?"



그 애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싯팔..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진짜 큰일이 일어났나 보다.


잠에서 깨어 한 달 반. 그간 나는 바깥에서 일어난 2년 반의 공백을 그럭저럭 메울 수 있었다. (가끔 그 애가 잘못된 정보를 주고는 신나하느라 시간이 좀 더 소요되긴 했지만) 그리고 나와 그 애 사이의 공백 또한.


나와 그 애는 내가 공모전에 당선되고 책이 나온 해에 결혼했단다. 속도를 위반해서라고 하는데 누가 신호를 지키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단다. 그 직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8평이 채 안 되는 월셋집을 신혼집으로 구해선 나머지 돈과 대출금을 탈탈 털어 장사를 시작했단다.


그렇게 그 애는 만삭 중에도 모든 것을 프로듀싱하며 동네 골목 가에다 희한한 가게를 오픈했다. 그 가게는 좌석이 그리 많지 않은 테이크아웃 위주로, 아시아 각국의 주전부리들을 한데 모아 인스턴트식으로 쉽고 빠르게 제공하는(손님이 직접 그 자리에서 취향에 맞게 조리할 수 있는) 가게였다. 그리고 1년 만에 체인점을 내더니 지금에 와선 2개의 체인점(그중 하나는 대학가 주변에 입점한)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점은 임대 가게가 아닌 자가 건물이 되었단다. ("바깥에 나가보면 요즘 죄다 우리 꺼 따라 하느라 비슷한 가게들뿐이야." 그 애가 덧붙였다)


우리 딸 애는 올해 미운 네 살로, 얼마 전까진 그림 그리기에 환장하다시피 하더니 요즘은 놀이학교에서 배운 영어 노래를 밤낮으로 염불 외듯 중얼거린단다. 나는 이제 딸 애가 병원에 오면 종일 업고 다니며 제 엄마를 빼닮은 눈꺼풀과 콧방울에다 하염없이 입을 맞춘다.



"..너, 다리는?"



어느 날, 참다못한 내가 그 애에게 슬며시 흘리듯 물었다.



"다리가 뭐?"


"다리가 불편하다든지.. 예전에 다친 적이 있다든지.."


"그런 적 없는데?"



그 애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과거의 기억 중 몇몇이 잘못 보존되거나 하여 틀린 기억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남들처럼 걸어 다녔다. 나는 커피숍의 남자와 악수를 하던 게 떠올랐다. 그건 그저 9일간의 꿈이었을까? 아니, 꿈이란 건 꾸고 있을 땐 몰라도 깨어난 뒤에는 아는 법이다. 그게 꿈이었는지 아닌지. 남자는 내게 말했었다.



"작가님의 행복한 시간, 그 시간을 아주 조금만 나눠주세요."



그리곤 말했었다.



"약속하면 작가님에게 아까 말한 걸 이뤄줄게요."



크리스마스가 있던 주에 나는 퇴원했다. 병원 문을 나서며 나는 양손으로 두 여자의 손깍지를 꼭 쥐고선 중얼거렸다.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차례네."



그 주는 내내 너무도 행복했다. 살면서 가장. 높고 넓은 전셋집에서 딸애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새벽엔 그 애와 트리 아래로 선물 꾸러미를 가득히 채워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 아주 이른 아침. 나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발광하듯 뛰어다니는 딸애와 장난감 칼싸움을 하며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빠, 이제 선물 풀어봐도 돼?"



칼에 찔려 죽는시늉을 하는 내 모습에 이젠 질렸는지 딸애가 칭얼거리며 물었다.



"엄마 곧 일어날 거야. 그럼 다 같이 산타가 뭘 놓고 갔는지 확인해보자, 알았지?"



그때였다. 일순 집 안으로 가스 냄새 같은 게 풍겨왔다. 가스 밸브에는 문제가 없었다. 냄새는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과학 시간 때 알코올램프에서 나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과학실에서 과학 선생은 항상 눈을 부라리며 외쳤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열고 닫았었는지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열었다, 닫았다!"



방 안에서 그 애가 아직 꺼벙한 눈을 한 채로 걸어나왔다.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가스 냄새 같은 거."



내가 물었다.



"아니, 안 나는데."



그 애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 애는 나를 지나쳐 딸 애의 뒤편에 우뚝 서더니 내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의미 없는 건 그만 물어봐."



영문을 몰라하는 내게 그 애는 장난감 칼을 쥐고 있는 내 한쪽 손을 가리키며 외치듯 명령했다.



"그어! 그으라고!"



이어 딸 애가 장난감 칼을 바닥에 거세게 부딪혀대며 자지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그 순간 한층 강해진 가스 냄새와도 같은 게 내 코를 덮으면서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여전히 그 냄새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내 귓가엔 글렌 밀러의 '문라이트 세레나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콧속으론 다소 미약해진 가스 냄새가

여전히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내 눈동자론 맞은편으로 의자 뒤에 한껏 등을 기댄 커피숍의 남자가 들어왔다.


가스 냄새의 정체는 유황 내음이었다. 남자는 포만감과 권태로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약속대로, 행복한 시간 조금을 나눠 가졌다."



남자 뒤편 카운터, 그 카운터 너머로 벽시계의 긴 바늘이 숫자 '4'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fin-
























후기


누구나 인상에 남는 꿈 한 두 가지쯤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자면서 보는 꿈. 나 또한 그렇다. 꿈 중엔 분명 다른 꿈들과는 다른 성질의 것들이 존재한다. 주제나 내용을 떠나 꿈꾸는 중에 어떤 특별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들 말이다. 그런 특별한 감정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농밀한 감정선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런 꿈들을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잊지 않고 떠올린다.


해당 이야기는 바로 이런 꿈들 중 하나를 베이스로 한 거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296758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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