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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Down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6. 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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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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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Down





어둠 깔린 2성급 호텔 창문 앞에서 나는 서 있었다. 어찌 이런 색을 골랐을까 싶은 연고동 색상의 커튼 자락을 한 손으로 툭툭 쳐대면서. (그럼 그 자락은 계속해서 열심히도 돌아왔다) 저 아래 호텔 정문으로 자리한 싸구려 인조야자수 잎 끝자락 자락 갈라진 개수를 세며 나 마이클 켐블은 서 있었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멈추고서 욕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기분 나쁜 쇳음과 함께 벌거숭이 모습으로 나온 레스터가

불알을 수건으로 털어대며 외쳤다.



"이런 싯팔.. 미키! 갑자기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왜 말 안 했냐! 불알 터질뻔했잖냐!"



걸쭉한 웃음과 함께 내 뒤로 바싹 다가온 레스터가 쥐고 있던 수건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어 수건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목덜미를 힘주어 잡고선 조용하게, 또 마치 동요를 부르는듯한 억양으로 말했다. 이건 레스터가 어릴 때부터 나를 안심시킬 때면 쓰던 방법이었다.



"괜찮아, 미키. 다 잘될 거다. 행운은 필요해질 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거든.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고."


"..만약 내가 진다면?"


"그럼 계속해서 패를 돌려. 더 많이 패를 돌리는 거야. 완전히 질 때까지."


"..그러고서 완전히 진다면?"


"걱정 마, 따샤. 승부는 너 혼자서 하지만.. 뒈질 땐 내가 네 앞에 있을 테니까." 



내 머리 위에다 수건을 올려다 놓고선 레스터는 알몸 그대로 침대 커버 속으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비벼댔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들의 갖은 정액 덩어리가 새겨진 커버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레스터가 다시 말했다.



"인마, 뭣하면 스트립걸이나 부를까? 아까 카지노들 둘러보는데 웬 비너가 명함을 주더라고. '핫 베이브가 호텔 방에서 보여드립니다. 696-9696' 옌병할, 이 번호 죽을 때까지 못 잊어먹을 거 같지 않냐?"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레스터는 황망히 웃음기를 거두어 크게 숨을 내뿜곤 재차 말했다. 마치 사과는 빨간색이라는 걸 설명하는 것처럼.



"걱정 마라. 켐블家 남자는 필요할 때가 되면 승부에서 이긴단다. 그리고 내일이 바로 그 때고."


"..하지만 모두들 자기 여자가 뒈질 땐 손도 쓰지 못했지."



내 말에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던 레스터는 한 차례 픽 하고 자조 섞인 콧방귀와 함께 '네 말이 맞아, 천재 양반.'하고 대꾸했다. 그리곤 이어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살려야 할 거 아냐. 한 번쯤 역사를 거슬러보라고, 따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가지고 있는 게 거의 없다. 그저 남아있는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얼굴 하나를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내 친형 레스터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어머니는 우리가 철이 제대로 들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촌부였다. 뉴멕시코주 남동부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놈 중의 촌놈이었고 우리 또한 그랬다. 우리는 어릴 적 마을(학교가 있는) 외곽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고 아버지는 양을 치기 위해 30마일은 떨어진 목장에서 해가 떠 있는 동안을 보냈다. 그곳에 있을 때면 별채에 마련된 라디오와 전화기가 아버지의 마누라요, 자식놈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우리 형제가 매번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일요일이었다. 그날이면 우리는 엄마의 전매특허인 칠리소스가 조금 들어간 '크리스마스(우리 지역의 전통음식이다)'를 먹고 아버지의 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점심때까지 함께 양을 쳤다.


그 이후부터가 중요한데, 우리 세 남자는 별채 원탁에 둘러앉아 엄마가 싸준 팬케이크를 목구멍에다 들이밀며 카드를 쳤다. 우리가 치던 카드 게임은 언제나 블랙잭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딜러를, 배팅액은 1게임당 1쿼터 상한이 룰이었다.


그렇게 우리 세 남자는 일요일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대통령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름의 주일예배를 실천했다. 아버지의 목장 별채는 우리 형제에게 있어 신의 안식처였던 셈이다. 일요일은 우리 남자들에게, 또 엄마에게도 말썽쟁이 세 놈에게 벗어나 한숨 돌리는 안식일이었다.


아버지는 유능한 딜러인 동시에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매일의 절반을 외로움과 싸우며 우리 가족을 뒤에서 보필한 신이 내린 양치기였다. 그는 불평 따윈 도통할 줄을 모르던(적어도 우리 형제가 태어난 이후로는), 매번 생색 없이 일용한 양식과 따뜻한 옷가지를 내려주던 진정한 사내였다.


물론 이런 사내도 약해질 때가 있었다. 엄마가 난소암으로 손쓸틈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내는 거의 두 달 내내 우울해 있었다. 평소보다 목장 별채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일요일마다 운영되던 주일 예배당도 중단됐다.


이 무렵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왠지 평소처럼 대하면 어느 순간 툭 하고 아버지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우리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더 사랑했다는 걸 느꼈기에 그걸 알 수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까지 묵묵히 외로운 싸움을 견디던 아버지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형제를 불러세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마당에 놓인 가로로 길쭉한 오동나무 의자(아버지가 엄마를 위해 직접 만들었었던 의자였다)에 앉아있었다. 우리 형제는 서로 눈치를 보다 쭈뼛거리며 아버지 양옆으로 자리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한 번씩 훑고는 멜빵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곤 나와 레스터 입에다가도 하나씩 물리고는 차례로 불을 붙여줬다. 그렇게 세 남자는 시외 담배 전문점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말보루를 꼬나물고는 사내의 딜러 복귀를 미리 축하했다.


아버지는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우리 형제가 성인이 되도록 해주었으며, 나와 레스터에게 각각 싸구려 중고차를 내려 어디든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내가 아내와 결혼하고 딸을 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내는 갑작스레 간암으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위해 살았다. 우리 형제는 신을 믿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믿었다. 아버지는 신이 내린 양치기였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우리 형제는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게 됐다. 레스터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나와 자신의 첫사랑 사만다와 앨버커키에서 살림을 차렸다. 나는 본래 살던 집을 처분하고 아버지가 살던 집으로 들어가 여전히 양 치는 일(정확히는 그 일이 더 확장되어 젖소들도 생겼다)을 했다.


나와 레스터가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된 건 둘 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면서였다. 내 아내 샤롤르트는 감기를 심하게 앓는가 싶더니 심근염으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레스터의 연인 사만다는 약물중독치료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호텔방에서 약어로 된 가루를 거하게 빨고는 난간에서 노래 부르며 율동을 하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그나마 위안인 건 샤롤르트와 달리 행복한 기분으로 생을 마감했을 거라는 거겠다.


그리고 이제 내 딸 클로이는 급성 백혈병이라는 원인도 알 수 없는 아주 악독한 병 때문에 2차 골수 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두 차례의 항암치료와 골수 이식 후에 1주년 기념 파티를 하기 직전 병이 재발해서 말이다.


클로이마저 암에 걸리면서 이제 나는 완전히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선 내가 신의 대리인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한편 이 저주받은 켐블家를 돕고자 내 형 레스터가 돌아왔다. 레스터는 기꺼이 나와 함께 신의 대리인이 되기로 해주었다. 항암치료와 골수이식 비용 등으로 이미 내 똥꼬가 털려버리자 자기 똥꼬를 내놓으러 레스터가 고향으로 복귀한 거다.


곧 레스터는 자기가 알던 날건달을 통해 이탈리아 이민자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 시칠리아 태생의 남자 앞에서 서약을 하는 신세가 됐다.



"둘 다 잘 들어, 이 모래밭 촌양키들아. 기한일에서 1초라도 지나면 곧장 우리 애들이 잡으러 갈 거야. 그리고 마리아께 맹세컨대 너희 형제를 다른 얼치기 놈들의 반면교사로 삼고 말겠어. 너넨 살아있는 채로 소장과 대장이 어떻게 그렇게 길었을까 하고 보게 될 거다. 도망갈 수 있으리라 생각지 마. 그러니까 내 말은, 네 딸을 두고서 말이야."



"으아아어어어어!"



곯아떨어진 레스터의 입에서 날숨이 뒤범벅된 끔찍한 웅얼거림이 새 나왔다. 아마 꿈속에서 자기 소장과 대장을 보던 중이었나 보다. 그걸 방해하면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최대한 조용하게 자세를 바꾸고는 재차 잠을 재촉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와 양을 칠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미키, 양의 털은 깎고 깎고 또 깎을 수가 있단다. 하지만 껍질은 아니야. 껍질은 한 번밖에 벗길 수가 없거든."



도박 또한 그렇다. 도박에서 승리하는 법은 간단하다. 여러 번 이기는 게 아니라 단 한 번 이겨야 할 때 이기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좋지 않은 패가 들어오면 뒈져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날 가장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껍질을 벗겨내는 거다.


아버지는 주일 예배당에서 우리 형제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블랙잭만큼 신사다운 카드게임이 또 없지. 플레이어가 승리할 가능성이 49.72%나 되거든."



늘 그랬듯 아버지 말이 맞다. 블랙잭은 신사들의 게임이다. 딜러가 이기거나, 플레이어가 이기거나. 하지만 이 신사들의 게임에서조차 언제나 승리하는 건 딜러들이다. 간단하다. 플레이어들은 돈을 따려고 하지 않고 꿈을 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행에 환희를 보내고 잃었을 때를 추억한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부도덕한 거지 결코 블랙잭이 부도덕한 게 아니다. 승리하고자 노력해 본 적 없는 쪽이 돈을 따는 거, 그거야말로 부도덕한 거 아니겠는가.


그래, 물론 세상은 부도덕한 일로 넘실댄다. 문제는 어리석게도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에게도 그런 부도덕한 불로소득이 올 거라고 기대한다는 거다.



"딜러 퀸, 딜러 버스트.. 플레이어 윈입니다."



내 주변으로 '와'하고 탄성이 이어졌다. 옆의 처음 보는 양복쟁이는 얼굴이 시뻘게져선 내 어깨를 연신 움켜쥐며 환호했다. 그러곤 자기 옆 여성(좀 전까지 마치 런웨이이를 걷다가 온 듯한)의 허리춤을 거칠게 안아채고는 침을 튀겨대며 외쳤다.



"봤어? 봤어?"


"그래, 자기야. 저 사람이 이긴 거지?"


"그래! 벌써 8만 달러라고! 이봐, 형씨! 좋았어! 이렇게 된 거 10만 달러 채우라고!"



양복쟁이가 다시금 내 어깨를 쥐고선 흔들어댔다. 재수 없는 것들. 저 치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자기 경주마인 양 행동한다. 마치 운명이란 놈이 늘상 궁핍하고 불운한 것들을 찾아내어선 쥐고 흔들려는 것처럼. 나는 양복쟁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입꼬리만 힘겨이 올려 보이고선 테이블의 칩을 내 쪽으로 끌어모았다. 맞은편의 생선 대가리를 닮은 딜러가 반쯤 벗겨지고 없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겨우 중얼거렸다.



"..축하드립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일순 내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모두가 나를 주시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눈만 살짝 돌려선 조금 떨어져 자리한 레스터를 바라봤다. 빨대가 꽂힌 프루트 주스잔(얼음이 녹을 대로 녹아 밖으로 수증기가 맺힌)을 들고선 우두커니 서 있던 레스터는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다시 눈을 돌려 이번엔 내 앞의 딜러를 쳐다봤다. 딜러는 나처럼 빌린 돈으로 카드라도 치는 것처럼 저 너머의 핏보스(얼굴테로 개기름이 낀)를 흘끗 바라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재차 얼마 없는 소갈머리를 정돈했다. 오, 생선 대가리. 그래도 너는 게임이 끝나도 네 안에서 나온 창자 더미가 손 위에 올려질 일은 없을 거 아니냐.


카드판은 양치기와 여러모로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엔.. 너무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보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놓치기 마련이다. 그런 내 속내를 어느새 읽었는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군중(이미 한참 전부터 테이블엔 나와 딜러뿐이었다)이 발을 구르며 합창하기 시작했다.



"위너, 위너, 치킨디너! 위너, 위너, 치킨디너!"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군중을 한 번, 레스터를 한 번, 핏보스를 한 번, 딜러를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앞에 쌓인 칩 더미를 봤다. 딜러가 말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배팅하죠. 한도만큼"



내 말에 군중은 재차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딜러는 체념한 듯 카드를 정리해 셔플마스터에다 정성스레 투입하기 시작했다. 나는 칩 더미 속에서 반무퉁이 가량을 떼 앞으로 밀어젖혔다. 도박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그날 가장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 껍질을 벗겨내는 거다. 지금 이 시각 이 생선 대가리의 맞은편 자리는 패가 들어오는 자리다. 그리고 나는 아직 필요한 껍질이 한참이다. 관광와서 스트립걸들 팁이나 벌어보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레스터? 그 자리 그곳에 서 있던 레스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 번 숨을 크게 내쉬는 입 모양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딜러가 말했다.



"딜하겠습니다."



첫 번째 플레이어 카드, 숫자 9. 첫 번째 딜러 카드, 숫자 10. 두 번째 플레이어 카드, 스페이드 잭. 그리고 두 번째 딜러 카드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졌다. 딜러가 입술을 오므린 채 내 손동작을 기다렸다. 나는 가만히 내 앞에 놓인 카드 두 장을 번갈아 봤다. 먼저 숫자 9를, 그리고 이어 스페이드 잭을. 그다음 딜러 앞에 놓인 오픈된 숫자 10을. 나는 나도 모르게 절로 중얼거렸다.



"..그날과 똑같아."



그날과 마찬가지로 스페이드 잭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인마, 내가 네 램프의 지니가 되어줄게. 나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애꾸눈 잭이니까."



고등학생 무렵 동네에서 형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카드 말이다. 특히나 블랙잭을. 형은 그야말로 애어른 할 거 없이 동네 남자들의 주머닛돈을 모두 긁어모았고 또래 여자들은 돈 대신 유방을 보여주느라 가슴이 남아나질 않았다. 이건 정말이다. 상대방 동행인과 함께 번갈아 딜러 역할을 해야 하느라 항상 형 옆에 있었으니까.


당시 마땅한 오락거리 하나 없던 시골이었던지라 주말이면 동네에 혼자 사는 프랭키 아저씨네 집에서 카드판이 벌어졌다. (프랭키 아저씨는 모두에게 입장료를 받았고 추가 요금을 내면 식을 대로 식은 크래프트 병맥주도 내왔다) 그리고 간혹 대승부가 벌어지는 날엔 대관료를 받고서 집을 비워주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주말마다 신성한 카드판의 집정관 노릇을 했다. 카드판이 벌어지는 날마다 집 앞 흔들의자 위에 몸을 뉘어 크래프트 병맥주와 싸구려 담배(간혹 입장료가 없는 사람은 대신에 담배를 냈다)를 했는데 그때마다 어깨 한편으로 엽총이 자리하고 있어 카드판에 끼는 사람들은 카지노에 온 양복쟁이들 마냥 지극히 예의가 바르고 순순했다.


이런 카드판에 전설로 남은 명시합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레스터가 낀 판이었다. 그리고 그 시합은 레스터의 십 대 마지막 시합이기도 했다. (이 시합 이후 도박사실을 아버지에게 들키면서 코피가 두 번이나 나야 했으니까) 레스터가 동네 남자들의 돈을 휩쓸면서 아무도 함께 카드를 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번 돈은 중고로 포드 픽업트럭을 살 정도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레스터는 엄마를 잃고 나서부터 언제라도 가족이 아프면 최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돈을 모으려 했단다)


물론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돈 욕심에 덤비는 자들이 몇 있었으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이윽고 레스터가 카드 카운팅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엔 다들 촉새 레스터가 무슨 수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겠냐며 웃어넘겼지만 불알 두 짝까지 쫙쫙 털리는 이들이 속출하면서 모두들 레스터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건 현명한 처사였다. 레스터는 진짜 레인맨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현명치 못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어느 날 '더 크레이지' 크루즈가 형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크루즈는 그 애칭답게 정신이 좀 돈 놈이었다. 레스터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성격이 그렇게 포악해 학교는 일찌감치 퇴학당하고 동네 어른들도 길을 가다가 마주치면 눈을 피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그런 크루즈가 도전장을 내밀었고 레스터는 자기가 무슨 챔피언 벨트라고 두르고 있는 양 호기롭게 그 도전을 수락했다.


그건 레스터에게 꿍꿍이가 있어서였는데 그 꿍꿍이란 다름 아닌 크루즈의 여동생 사만다였다. 사만다는 동네 또래 여자애들 중, 아니 동네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다. 하지만 사만다와 데이트를 한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눈이 높아서였는데.. 엄밀히 말해 사만다가 아니라 크루즈의 눈이 높아서였다.


사만다에게 집적거린 남자애들은 다음날이면 작살이 나도록 얻어맞고 발가벗겨진 채로 길가에서 발견되기 일쑤였는데 어떨 때 보면 크루즈가 코피 터뜨리는 일을 즐기려고 자기 동생을 이용하는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레스터 또한 사만다를 흠모했으나 자기 코피 색을 확인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던지라 가끔 마주치면 캣콜링을 날리며 윙크를 하는 게 다였다.



"얼빵아, 룰을 좀 바꿔야겠어. 고 잔대가리를 돌려대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날 크루즈는 테이블 위에 카드덱 4벌을 올려놓고서 말했다.



"바뀐 룰은 이거야. 룰 하나, 여기 내 동생만 카드를 딜한다. 둘, 매경기마다 이 4벌을 셔플한다. 셋, 카드를 딜할 땐 동일한 카드덱이 아니라 각각의 카드덱에서 돌아가며 돌린다."



그건 훌륭한 묘안이었다. 그런 방식으론 레스터는 물론이고 조니 모스, 도일 브런슨 같은 양반일지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을 테니까. 사만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테이블 위의 카드덱을 차례로 셔플하기 시작했다. 나와 레스터는 마르스에게 지혜를 빌려준 게 이 사랑스러운 미네르바였음을 단박에 알아챌 수가 있었다.


나는 레스터를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댔다. 대관료는 버린 셈 치고 망신살 한번 당한 뒤 나가는 게 상책이었으니까. 레스터는 내게 윙크를 날리고는 크루즈에게 말했다.



"좋아. 찬성이야."


"좋아. 하지만 아직 몇 가지 더 있어, 얼빵아. 마저 들어봐."


"..좋아."


"룰은 동일해. 다만 딜러 역할은 번갈아 가면서, 그리고 배팅은 텍사스홀덤 식으로, 자기 턴마다 배팅 가능, 상한가 없음, 한쪽이 전부 잃을 때까지."


"..좋아. 하지만 상한선을 정하지 않았다가 만약 진 쪽 쩐이 부족하면?"


"그럼 오늘은 그 부족한 만큼 흠씬 두들겨 맞고서 차용증을 남겨야 겠지."


"..알겠어. 네 룰에 따를게. 다만 이쪽도 요구사항이 있어. 그걸 들어주지 않겠다면 게임은 여기서 종료야."


"그래, 한 번 지껄여봐."


"두 가지야. 하나, 나는 돈을 걸겠어. 전부 잃게 되면 당연히 그건 네 거야. 지불액보다 많이 잃으면 기꺼이 얻어맞고서 차용증도 남기겠어. 단, 너는 돈을 모두 잃어도 그 돈을 주지 않아도 돼."


"..그건 또 무슨 잡소리야?"


"네가 가진 돈을 다 잃으면.. 돈 대신 네 여동생이랑 데이트하게 해 줘."



레스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루즈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위압적으로 생긴 각진 턱으로 마치 레스터의 얼굴을 빵꾸라도 내려는 듯 밀착시켰다. 크루즈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만다를 한 번 흘끗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선 레스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좋다구. 그렇게 하자. 네가 오늘 두 발로 집에 갈 수 있을지 정말 기대된다, 얼빵아."



비열한 웃음과 함께 크루즈가 테이블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판돈 대신 여자애들의 가슴을 보는 데다 사만다를 걸라는 요구를 그 오빠가 받아들이는 게 남성 우월적으로 보였다면 사과한다. 변명하자면 그땐 그런 시대였다. 국기의 불명예 사건이 채 잊혀지기도 전이었으며 지나가는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당연한 권리이자 미덕인 시대였다.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턱을 까딱거리는 크루즈를 앞에 두고서 레스터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 이 게임은 나 대신 여기 내 동생 미키가 끝까지 한다."



그 말에 크루즈는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 대신 너네가 가진 돈 보다 더 많이 잃으면 둘 모두 손봐주는 거다. 어이, 거기 샌님! 빨리 앉아. 게임 시작이다.'라고 외쳤다. 레스터는 눈만 똥그랗게 뜨고 있는(그래, 이번엔 내가) 내 목덜미를 힘주어 잡고선 조용하게, 또 마치 동요를 부르는 듯한 억양으로 귓속에다 말했다.



"괜찮아, 미키.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내 돈 다 잃어도 돼. 혹시 돈이 부족해서 맞게 되더라도.. 승부는 네가 하지만 뒈질 땐 내가 네 앞에 서 있을게. 뭐.. 그럴 일도 없겠지만. 너도 알지? 카드 카운팅 없인 네가 나보다 잘하는 거. 그리고 카드 카운팅이 있어도 결정적인 게임에선 항상 네가 이기는 거."



내 앞으로 미니멈 배팅액인 2달러 치 칩이 올려지고 크루즈가 딜러로, 곧이어 사만다가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플레이어 카드, 숫자 9. 첫 번째 딜러 카드, 숫자 10. 두 번째 플레이어 카드, 스페이드 잭. 그리고 두 번째 딜러 카드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로 놓여졌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원아이드 잭을 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크루즈에게 말했다.



"..더블다운."



크루즈가 피식하고 웃더니 대꾸했다.



"지금 상황에서 더블다운을 하겠다고? 그래, 맘대로 해봐라. 나야 감사히 따라가 주지. 야, 형 쪽 켐블. 네 동생 정신머리 멀쩡한 거냐? "



나는 내게 놓여진 칩 전부를 앞으로 밀어젖히고는 다시 말했다.



"..우리가 가진 돈 전부를 베팅하겠어."



크루즈는 내가 내민 2천 달러가 조금 안 되는 칩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샌님놈이.. 지금 여기서 장난이나 하자는 줄 아냐?"



레스터가 황급히 다가와 내 어깨를 짚고는 '얌마, 미키!'라고 작게 웅얼거렸다. 나는 그런 레스터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려 포개고선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아, 레스터. 내가 이기는 게임이야."



내가 그렇게 득의양양하게 첫판부터 더블다운으로 올인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날 이 승부를 두고 나는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새벽 늦게야 선잠에 들었다. (레스터는 진작부터 코를 골아대며 자빠졌었지만) 그리고 그런 선잠 와중 꿈을 꿨다. 블랙잭 게임이 진행 중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플레이어였다. 딜러가 내게 카드를 2장 줬는데 하나는 숫자 9였고 다른 하나는 스페이드 잭이었다. 그리고 딜러의 오픈 카드는 숫자 10이었다. 스페이드 잭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친구. 더블다운을 걸어.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 전부 베팅해."


"하지만.. 2 이상이 나오면 내가 지는 거잖아."


"그래, 너 똑똑하다. 잔말 말고 전부 베팅해!"


"그렇지만.."


"인마, 내가 네 램프의 지니가 되어줄게. 나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애꾸눈 잭이니까."


"..좋아. 내게 승리를 줘."



그리곤.. 베팅과 함께 내게 마지막 카드 한 장이 들어왔다. 에이스였다! 총합 20. 내 앞의 스페이드 잭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봤지? 이젠 딜러 차례다. 오래 끌 거 없이 한큐에 끝내줄게."



이어 딜러 측 남은 카드 한 장이 오픈되었고.. 그 카드는 숫자 7이었다. 언 럭키 세븐! 딜러 측 총합 17. 딜러가 숫자 17 이상이므로 스테이가 되어 내가 승리했다.



"..야, 내 동생이 더블다운으로 전부 건다잖아. 어쩔 거야? 받을 거야, 죽을 거야?"



레스터의 도발 섞인 어조에 크루즈가 재차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좋아. 좋다, 이 얼빵한 형제야. 사만다! 카드 돌려!"



크루즈의 외침에 경기라도 일으키듯 일순 놀랐던 사만다가 조심스레 카드덱 중 한 곳에서 꺼내 든 카드를 내 앞으로 펼쳤다. 에이스였다. 레스터가 비명 같은 외침을 날렸고 크루즈는 똥그래진 눈으로 나와 내 앞의 에이스를 계속해서 번갈아 봤다. (사만다는 참으로도 귀여운 딸꾹질을 했다) 내가 말했다.



"자, 크루즈. 내가 네 카드를 맞춰볼까? 네 카드는 불운하게도 숫자 7일 거야. 언 럭키 세븐인 셈이지. 총합 17, 강제 스테이, 플레이어 승."



크루즈가 마치 내 팔 한 짝을 뽑아버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곤 자신 앞에 놓인 덮어진 카드를 오픈했다. 숫자 7이었다. 레스터가 외쳤다.



"싯팔! 미키! 네가 뭘 했는지 봐봐!"


"이건 말도 안 돼!"



크루즈가 테이블 위의 칩들을 손으로 거칠게 쓸어버리며 외쳤다. 그리곤 이어 손을 뻗어 내 멱살을 쥐어틀었다.



"비열한 쥐새끼 같으니라고!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내가 간신히 호흡을 끊어가며 '카드는 네 여동생이 돌렸잖아'라고 말했고 크루즈는 '입 닥쳐!'라는 말과 함께 내 멱살 채로 나를 반쯤 들어 올렸다. 레스터가 현관을 향해 다급하게도 외쳤다.



"프랭키! 프랭키! 문제가 생겼어요!"



거의 동시에 쾅 하고 문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프랭키가 모습을 나타냈다. 프랭키는 마치 지옥 불에서 숙면을 취하던 중 억지로 지상으로 끌어올려 진 악마마냥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테이블 앞으로 느릿느릿 큰 걸음으로 다가온 프랭키가 입을 열었다.



"애송이들아. 내가 대관료를 받고 자리를 빌려준 거지.. 여기가 너네들 학교라도 되냐? 조용히 카드나 치라고."



레스터가 나와 크루즈를 가리키면 숨넘어갈 듯 조아렸다.



"우리가 이겼는데 이 자식이 행패를 부리잖아요! 프랭키, 당신 카지노에서 감히 멋대로 굴 수 있는 건가요?"



나와 크루즈 쪽으로 고개를 돌린 프랭키가 바로 앞까지 와서는 다시 입을 뗐다.



"그건 안되지. 내 카지노에선 룰을 지켜야 하고말고. 룰 하나, 졌으면 돈을 뱉어내. 룰 하나, 싸움은 바깥에서. 룰 하나, 행패 부리는 놈은 내가 엉덩이를 까준다."



이번엔 내 멱살에서 손을 뗀 크루즈가 프랭키 쪽으로 한발 다가가 얼굴을 치켜들곤 말했다.



"그래서.. 어쩔 건데. 거기 그 낡아빠진 엽총으로 날 쏘기라도 할려고? 쏴보시지, 그래?"



나, 레스터, 사만다가 침 삼키는 것도 잊고 상황을 주시하는 가운데 프랭키가 얼굴을 한층 더 내리깔고선 말했다. 그 거대한 키에다 오히려 위압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깡마른 몸매, 그리고 잔주름 곳곳으로 팬 서늘함을 뿜어내며.



"아니, 그렇지 않아. 널 쏘다니. 당치도 않지. 내가 산 거의 반만큼도 살지 않은 널 쏴봐야 무슨 명예가 남겠어.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내 룰을 지키지 않겠다면 그냥 넘어갈 수야 없지. 너와 나, 우리 둘 모두 이제부터 아주 재미없는 시간이 될 거다. 약속하지."



그 말에 잠시 프랭키의 얼굴을 훑던 크루즈는 이내 귀까지 시뻘게져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곤 현관 쪽으로 걸어 나가면서 도중에 레스터를 거칠게 밀고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해 지기 전까지 사만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맹세컨대 너네 형제를 산송장으로 만들어 강둑에다 거꾸로 처박아 줄 거다."



"..손님? 스탠드 하실 겁니까?"



내 앞의 생선 대가리 딜러가 말했다. 내가 대꾸했다.



"아뇨.. 더블다운이요."



주변의 군중이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 언제 왔는지 레스터가 내 바로 뒤로 자리하고 있었다. 딜러가 말했다.



"..지금 더블다운이라고 하셨나요? 확실하신 건가요?"


"그래요. 더블다운. 그리고.. 저기 핏보스도 좀 불러주고요. 여기 있는 칩을 전부 걸 거거든요."


"..손님, 상한선은 5만 달러까지입니다. 그건 인정되지 않아요."


"네, 똑똑하시군요. 그래서 제가 핏보스좀 불러 달라고 한 겁니다."



딜러는 오므린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핏보스 쪽을 바라봤다. 한편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핏보스가 그 개기름 낀 몸뚱일 마침내 움직여 딜러 옆으로 와 섰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제안할 게 있습니다. 더블다운을 걸고서 제 칩을 전부 베팅하고 싶어요."


"..선생님, 저희 카지노 블랙잭은 상한선이 5만 달러입니다."


"나도 내 칩이 전부 얼만지는 알아요. 하지만.. 자, 보세요. 어차피 이 테이블 구멍도 전부 내 차지고.. 그리고 나랑 딜러 카드도 좀 보시고요."



핏보스가 내 카드와 딜러 카드를 힐끔 확인하고는 말했다.



"안됩니다, 선생님. 테이블 상한선은 5만 달러입니다."


"이봐요, 라스베가스 최고의 상한가 테이블을 보유한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 그 호텔의 핏보스가 너무 겁이 많은 거 아닙니까? 그쪽 재량으로 가능하단 거 다 알아요. 내 카드를 보세요, 난 맨몸으로 내 모든 걸 다 걸고 있다고요. 겨우 상한가의 2배예요. 아니면, 내가 계속해서 상한가 베팅으로 게임을 해도 날 끌어내리지 않을 거라고

여기 사람들 앞에서 약속해줄 수 있어요?"



핏보스는 내 카드와 딜러의 카드를 다시 한번, 그리고 더 많아진 주변 군중을 살짝 둘러보고선 말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이번 베팅 한 번뿐입니다."



핏보스의 말에 군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편 내 뒤로 레스터는 한 손으론 내 어깨를 짚고는 말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그런 손 위로 내 손을 포개고는 레스터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레스터. 내가 이기는 게임이야."



딜러가 빠르게 여러 번 앞머리를 추켜올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플레이어 더블다운. 남은 카드 한 장 딜하겠습니다."



다시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해진 가운데 딜러가 일순 머뭇거리는 손 움직임으로 카드를 꺼내어 내 앞으로 오픈했다. 에이스였다.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군중들이 미친년놈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레스터도 벌게진 얼굴로 내 어깨를 쥐고선 흔들어대며 '부야!'라고 외쳤다. 딜러는 내가 본 가장 애처로운 눈빛으로 옆의 핏보스를 힐끔 쳐다봤다. 핏보스는 그 옛날 크루즈가 지었었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어깨를 짚은 레스터의 손을 두어 차례 쓰다듬고는 핏보스를 향해 말했다.



"이제 제가 딜러 측 카드가 뭐일지 말해볼까요? 숫자 7일 겁니다. 그리고 총합 17로 스테이가 되는 거죠. 언 럭키 세븐."



내 말에 핏보스는 양 허리로 손을 짚고는 귀까지 벌게져선 나를 노려봤다. 그 중간에서 딜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딜러 카드 오픈하겠습니다.."



이어 딜러가 자기 앞의 뒤집어진 카드를 오픈했다. 그리고 군중들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픈된 딜러 측 카드는 에이스였다.



"....미키, 아직 끝난 게 아냐. 돌릴 수 있을 때까지 패를 돌리는 거야. 아직 내일까지 하루 시간이 더 있잖냐. 오늘 너무 빠르게 벌었던 거야."



카지노 한복판에서 다 쓰러져가는 나를 한 손으로 지탱하며 레스터가 말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달리 레스터 특유의 낙관학개론도 내 귀에 머물질 못했다.



"레스터..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주머니에 있던 50센트 뭉텅이를 꺼내 레스터의 손에 올려놨다.



"이게 지금 우리 전부야.."



나는 레스터 손 위로 케네디 얼굴과 함께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새겨진 동전들을 잠시 멍하니 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건 목적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레스터와 떨어지기 위함이었다. 그 옛날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가 또한 우리 형제를 피하던 것처럼.


그 순간 내가 신을 믿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을 믿는다면, 그러면 그 작자가 어디 있든 찾아내선 흠씬 두들겨줄 테니까. 그럼 사람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불로 태우겠지. 빌어처먹을 놈의 신, 신, 신! 아! 라스베가스여! 사막 한가운데로 솟은 오아시스! 신기루인지도 모르고 목구멍에다 모래를 퍼넣는 도피자들!


나는 재차 찾아온 현기증에 한쪽 무릎과 한쪽 손을 땅바닥에다 짚어야 했다. 마침 내 옆을 지나가던 노부부가 내 쪽으로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디밀고는 걱정스레 말했다.



"이봐요, 괜찮은 게요? 사람을 불러줄까?"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노부부는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저 노인네들보다도 빨리 뒈지게 생겼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내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여러 것들이 떠올랐다.


이제 어째야 할까.. 레스터.. 먼저 레스터에게 사과해야겠다. 날 위해 자기 목숨도 내놓다니.. 젠장, 그 시칠리아 놈이 분명 우릴 죽일 거야. 레스터에게 그놈을 소개시켜준 크루즈가 그걸 도울 거고. 그 자식은 사만다가 죽으면서 레스터에게 더더욱 원한을 가졌으니까. 시칠리아 놈은 우리 장기를 시험용기에다 절여놓고선 한쪽 방에다 전시하겠지. 그럼 돈을 빌리러 오는 놈들마다 거기로 데리고 가선 이러는 거야. '이거 보여? 여기 용기 앞에 붙인 사진 속 놈들 몸 안에서 꺼낸 거야. 내가 직접. 자, 이게 주는 교훈이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으면 내가 알려주지. 돈과 관련된 약속은 절대로 지킬 것!'


그러다 문득 양치기 목장 별채에다 보관하는 사냥용 엽총(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로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총이 나가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차피 은행직원은 그걸 그리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이번엔 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포옹하던 그 순간이. 그 애의 다 빠진 머리에다 입 맞추던 순간 풍기던 두피의 살 내음. 그 애의 눈가에 키스하던 순간 입술로 느껴지던 눈썹의 무게. 입원실을 나가는 나를 가만히 새겨놓던 그 눈매.


나는 헛구역질이 올라와 다시금 땅바닥에다 손과 무릎을 짚고는 입을 가려야 했다. 사실은 입보다 눈가를 먼저 훔쳐야 했지만. 그러다 내 머릿속으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깨달았다.


그건 기도쟁이들이 평생 손을 맞잡아봐야 결코 깨우칠 수 없는 진리였다. 신이 내린 양치기란 없다. 신의 대리인은 없다. 오로지 신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신은 저 위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신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로 존재하고 있다.


신은, 가족이다.


내 머릿속으로 울리기 시작하던 요란한 경고음이 카지노 전체를 뒤덮었다. 곧이어 이번엔 레스터의 째지는 비명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미키! 미키! 내가 잭팟을 잡았어! 아아아! 싯팔!"




-fin-
























후기


이 이야기의 마지막 씬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티븐 킹 단편 <Luckey Quarter>를 오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제목인 Double Down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궁금하면 찾아보시라!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30038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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