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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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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이여송은 평양에서 왜구를 정벌했다.

그 때 이여송은 김씨 성을 가진 역관을 총애하였다.

김역관은 나이가 겨우 20세로, 꽃다운 용모에 미색이 흘러 넘쳤다.



이여송은 밤낮으로 그를 가까이 하며 잠시도 놓아주지 않으니, 임금이 왕비를 사랑하는 것도 그것만 못할 정도였다.

김역관이 무슨 말을 하던 반드시 들어주었으니, 그의 소원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여송은 군대를 철수하여 명으로 돌아갈 때도 김역관을 데리고 갔다.



만주 봉황성 책문에 이르렀는데, 군량이 약속된 기일이 되도록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여송은 크게 노하여 요동 통제사를 군법으로 다스리려 했다.

요동 통제사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첫째는 시랑 벼슬이고 둘째는 서길사였으며, 막내 아들은 신묘한 승려였다.



황제가 그 셋째 아들을 스승으로 모셔 대궐 안에 별관을 세워 그 곳에서 거하게 했다.

그 융숭함이 마치 당나라 숙종이 이필을 대하는 것 같았다.

요동 통제사가 군법으로 처벌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들은 세 아들들은 모두 요동까지 달려와 아버지를 구할 방법을 의논했다.



그 때 셋째 아들이 말했다.

[형님들, 제가 소문을 들어보니 조선의 김씨 성을 가진 역관이 제독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역관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들어준다고 하니 그 역관을 만나 간곡하게 빌어봅시다.]

그리하여 세 아들은 함께 제독의 병영으로 가서 김역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역관은 그 사실을 이여송에게 아뢰었다.

[요동 통제사의 세 아들이 소인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여송이 말했다.



[분명 자기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려는 것일게다. 하지만 저 셋은 명나라에서 벼슬 자리에 오른 귀한 이들이니, 외국의 하찮은 일개 역관인 네가 안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 어서 나가 보거라.]

김역관이 나가자 세 아들은 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아버님이 변을 당하셔서 이대로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부디 그대가 우리를 위해 제독에게 잘 아뢰어서 목숨이나마 살려주시면 평생의 은혜로 삼겠습니다.]



김역관이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외국인인 제가 어떻게 군법을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세 분의 정성이 이렇게 간곡하니 제가 거절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독께 여쭈어 볼테니 여기서 제독의 결정을 기다리십시오.]

김역관이 바로 막사로 들어가니 제독이 물었다.



[저들이 찾아온 이유가 요동 통제사 때문이더냐?]

[그렇습니다.]

이어서 김역관은 세 아들과 주고 받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이야기 했다.



제독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평생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지금까지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그르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네가 귀인들에게 부탁을 받다니,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겠구나. 내가 너를 이 명나라 땅으로 데리고 온 후 너를 위해 해 준 것이 없으니, 군법이 지엄하다지만 이번 한 번만은 내가 너를 위해 한 번 도와주마.]

김역관이 밖으로 나가 세 아들에게 제독이 한 말을 전하니, 세 사람은 함께 절을 하며 말했다.



[그대의 은혜 덕분에 아버님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소.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바다와 같이 넓습니다. 어떤 것으로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깃털, 사아, 가죽, 금, 은, 옥, 비단 등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리다.]

[저희 집안은 원래 청렴하고 검소합니다. 보배로운 패물이나 진귀한 노리개 같은 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조선 사람이니, 우리 임금님께 청해 그대를 조선의 재상으로 삼게 하면 어떻겠소?]

[우리나라는 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중인이니 제가 정승이 되어봐야 사람들은 '중인 정승' 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놀려댈 것입니다. 차라리 정승이 되지 않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를 명나라에서 높은 관직에 임명하여, 유명한 가문의 양자로 들이면 어떻겠소?]

[저희 부모님은 아직 모두 살아계십니다. 지금 조선을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어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은혜는 꼭 갚아야겠소. 그대는 원하는 바를 말하시오. 만약 지극히 귀한 물건이어서 들어주기 힘든 것이라 해도 반드시 들어주겠소.]

세 아들이 너무나 애걸하니, 김역관이 엉겁결에 경솔히 말하고 말았다.

[제가 딱히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만, 소원이라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보는 것입니다.]



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서로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셋째 아들인 신승이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은 김역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김역관은 안으로 들어가 제독을 만났다.

제독이 물었다.



[그 세 사람이 반드시 너에게 은혜를 갚으려 할텐데, 너는 무엇을 달라고 했느냐?]

김역관이 말했다.

[저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독은 번쩍 일어나 김역관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가 소국의 사람인데 어찌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도 원대하느냐? 그들이 허락했느냐?]

[허락하였습니다.]



제독이 말했다.

[그들이 어디서 그런 여자를 구해올꼬? 황제 폐하라 하더라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찾기 힘들 것인데!]

김역관이 이여송을 따라 명나라 수도 북경에 들어섰다.



그러자 세 아들이 와서 김역관을 데리고 어느 집으로 들어섰다.

그 곳은 세로 지은 큰 누각이었는데, 크기가 크고 시원했으며, 금색의 벽은 휘황찬란했다.

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세 아들이 말했다.



[돌아가지 말고 오늘 밤은 이 곳에서 자고 가도록 하시오.]

조금 있으니 온 집안에 향 냄새가 가득했다.

안쪽 문이 열리더니 곱고 짙게 화장한 미인 수십 명이 나왔다.



어떤 이는 향로를 들고, 어떤 이는 붉은 보자기로 싼 상자를 들고 줄을 서서 마루 앞에 섰다.

김역관이 그들을 보니 모두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없었다.

미인들을 본 뒤 김역관이 떠나려 하니, 세 아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가려는 것이오?]

[제가 이미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들을 보았으니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세 아들은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고작 시녀일 뿐이오. 어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 할 수 있겠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이제 나올 것이오.]

잠시 뒤 안쪽 문이 활짝 열리며 난초와 사향 향기가 진하게 퍼져 나왔다.

그리고 시녀 십여명이 천하일색의 여인을 데리고 나와 마루 위에 올라 앉으니 마치 의자 위에 곱게 화장한 열 손가락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세 아들과 김역관 역시 차례로 의자 위에 앉았다.

세 아들이 김역관에게 물었다.

[이 여자야말로 진정 김역관이 보기 원했던 천하 제일의 미녀입니다. 어떻습니까?]



김역관이 그 여자를 보니, 온 몸에 장식된 구슬과 보석들에서 비추는 빛 때문에 정작 사람은 보이지가 않았다.

세 아들이 말했다.

[오늘 밤에 그대는 반드시 이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야 합니다.]



김역관이 말했다.

[저는 그저 한 번 보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대가 천하일색을 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발이 닳도록 여자를 찾아 헤멨소. 천하에서 두번째, 세번째 아름다운 여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황제 폐하의 힘을 빌려도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소.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베트남 왕의 원수를 갚아준 적이 있었소. 베트남 왕이 우리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가 말만 하면 뭐든 들어줄 기세였는데, 마침 그 베트남 왕의 딸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지 뭐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소원을 말한 그 날 바로 베트남 왕에게 사람을 보내 부탁했더니 왕이 흔쾌히 허락했소. 그대가 북경에 들어서는 날에 맞춰 이 여자를 데려오기 위해 천리마 세 필을 썼으니, 그 돈만 수만 은이 넘었소. 베트남과 북경이 삼만리가 넘는 먼 길이었기 때문이오. 오늘 서로 만났는데 그대는 남자가 저 사람은 여자이오. 만약 한 번 보기만 하고 헤어질 것이었다면 어찌 국왕의 딸이 함부로 움직이겠소? 사람은 이치를 따라야 하오. 다시는 사양하지 마시오. 오늘은 길일이니 혼례를 치루기도 딱 좋지 않소?]

김역관은 어쩔 수 없이 그 곳에서 묵기로 하고, 여자와 결혼했다.

마침내 침실에 들었는데, 밀랍으로 만든 촛불이 휘황찬란하고 사향 냄새가 풍겼다.



김역관은 눈빛이 몽롱해지고 심신이 황홀해져 미녀를 바라봐도 놀라고 당황하기만 할 뿐, 남자가 여자를 덮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니 방 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세 아들이 문 밖에서 엿보다가 김역관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내 말했다.

[남녀가 한 잠자리에 드는데 어찌 이렇게 조용합니까? 아무래도 당신은 제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구려.]



그리고 접시를 김역관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 먹어보시오. 이것은 촉땅에서 가져온 홍삼이오.]

김역관이 홍삼을 먹고 방에 들어가니, 눈이 밝아지고 정신이 상쾌해져서 그 미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꽃 같은 얼굴에 달 같은 자태로,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잠자리를 같이 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니 세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김역관을 보고 물었다.



[저 미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외국인이 졸지에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대가 우연히 기이한 만남으로 인해 이 천하일색을 얻었는데, 사람이 한 번 만나면 헤어지는 일은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대는 외국인이라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도 어려울 것이고, 가족들을 본국에 두고 이 곳에 사는 것도 힘들 것이오. 하지만 우리 세 사람이 이미 그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그대의 일을 소홀히 하겠소? 그대가 역관의 임무를 맡았으니, 매년 사신들이 명을 찾을 때마다 반드시 수행 역관으로 따라 오시오. 그렇게 일년에 한 번씩 마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것처럼 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 우리가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리다.]

김역관은 그 후 평생 역관으로 매년 한 번씩 명나라로 들어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곤 했다.

마침내 그녀와 김역관 사이에는 몇 명의 아들이 생겼는데, 김역관의 후예들은 중국에서 부귀공명을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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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산마루에 온갖 잡신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그 효험이 꽤 영험했다.

산 주변 마을을 다스리는 이들이 이 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가마에서 내려 절을 한 뒤, 돈을 모아 신들에게 굿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나중에 이상한 재앙을 맞곤 했다.



그러던 와중 한 관찰사가 새재 너머의 마을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성품이 강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무슨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가 새재를 넘다 사당 앞에 도착하니, 아전들이 몰려들어 예전 사또들의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관찰사는 그런 요사스러운 짓은 말도 안 된다고 물리친 뒤 말을 타고 한달음에 그 곳을 지나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갑자기 바람이 세게 휘몰아치더니, 난데없이 비가 관찰사가 탄 가마에만 집중적으로 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주변 사람들은 귀신의 소행이라며 몹시 두려워했다.



관찰사는 마부에게 명령해 사당에 불을 지르라고 시키고, 명령을 거르스는 자들을 죽였다.

아랫 사람들이 마지못해 그 명령을 따라 사당을 태우니, 곧 사당은 싸늘한 재가 되었다.

관찰사는 그대로 새재를 내려와 문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관찰사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새재의 신이오. 새재 사당에서 제삿밥을 먹은지 100년이 넘었소. 그런데 당신은 예도 올리지 않은데다 내 집까지 태워버렸으니, 나는 당신의 맏아들을 죽여버릴 것이오.]

관찰사가 노인을 꾸짖으며 말했다.



[요망한 귀신이 사당에 눌러 앉아 사람을 괴롭히니, 내가 왕명을 받들어 요사한 것을 제거했다. 이것은 내 직분인데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해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느냐!]

귀신은 화를 내며 가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관찰사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큰 아드님께서 여행의 피곤함 때문에 병이 드셨는데, 갑자기 위독한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관찰사가 가서 아들을 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관찰사는 곡을 하고 아들의 염을 한 뒤, 곧 관청에 들어섰다.



그 날 밤 귀신이 또 관찰사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내 사당을 불태운 것을 회개하고 새로 사당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당신의 둘째 아들이 죽을 것이오.]

관찰사는 여전히 의연한 모습을 지키며 지난 번처럼 귀신을 꾸짖어 물리쳤다.



아침이 되자 관찰사가 눈을 뜨기도 전에 집안 사람이 와서 둘째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고했다.

관찰사는 매우 슬퍼하며 아들의 장례를 치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사의 꿈에 귀신이 또 나타나 말했다.



[첫째를 죽이고 또 둘째를 죽였으니 당신의 자식은 점점 줄어갈 것이오. 이번에는 셋째 아들이 죽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불쌍해서 내가 기회를 주려하니, 빨리 내 사당을 지어주면 셋째 아들의 목숨은 살려주겠소.]

하지만 관찰사는 이 말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귀신은 점점 화를 내며 온갖 협박을 하고, 끝내 좋은 말로 달래기까지 했다.



관찰사는 화가 나서 칼을 빼어들고 귀신을 베려고 했다.

그러자 귀신은 뒤로 물러나더니 뜰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말했다.

[저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저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오직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어르신의 두 아드님은 수명이 다하여 돌아가실 예정이었기에 제가 그것을 알고 어르신을 협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셋째 아드님은 그 지위가 높이 오르고 오랫동안 건강하실테니 제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어르신께 온갖 공갈 협박을 한 것이었지만, 어르신께서는 끝내 올바름을 지키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르신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관찰사가 딱히 여기며 말했다.

[네가 오랫동안 황폐한 사당에 살면서 지냈는데, 내가 어찌 네 집을 마음대로 부수고 싶었겠느냐? 네가 너에게 화가 났던 것은 요망한 술수로 사람들을 희롱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네가 그것을 자백하니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구나. 내가 새로 너의 집을 지어주마. 하지만 만약 네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면 당장 부숴버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귀신은 감동하여 흐느끼며 절하고 돌아갔다.



관찰사는 다시 사당을 세우고 그가 꿈에서 본 귀신의 모습을 흙으로 빚어 세워 두었다.

그 이후에 문경새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은 귀신에 대한 근심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관찰사의 셋째 아들은 오랫동안 살면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 갔으니, 귀신의 말이 과연 맞았다.



Illust by 엥비(http://blog.naver.com/junk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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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 김아무개가 젊었을 때, 친한 친구 서너명과 함께 백연봉 아래에 있는 영월암에서 공부를 했다.

하루는 친구들이 다 집에 돌아가서 깊은 밤에 혼자 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인이 곡하는 소리가 원망하는 듯 하소연하는 듯 영월암 뒤쪽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곡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와 창 밖에 와서 멈췄다.

공은 괴이하게 여겼지만 똑바로 앉아 흔들리지 않고 물었다.

[밖에 있는 것은 귀신이오, 사람이오?]



그러자 밖에서 여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귀신입니다.]

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귀신 주제에 감히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느냐?]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제가 살아 있을 때 해결하지 못해 한이 된 것이 있는데, 어르신이 아니면 그 한을 풀어주실 분이 없을 것 같아 하소연하려고 왔습니다.]



공이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여인은 보이지 않고 공중에서 휘파람 소리만 나면서 말소리가 들렸다.

[제 모습을 드러내면 공께서 놀라실까 두렵습니다.]

공이 말했다.



[일단 네 모습을 드러내 보거라.]

공이 말을 마치자 눈 앞에 한 젊은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공이 말했다.



[그대는 무슨 원통한 일을 겪어서 내게 하소연하려는 것인가?]

[저는 조정 관리의 딸로 아무개의 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요망한 계집에게 홀려서 저를 꾸짖고 때리더니 결국 그 여자의 꾀임에 넘어가 한밤 중에 저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영월암 절벽 사이에 버린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남편은 우리 부모님에게마저 제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도 슬픈데, 죽어서 오명까지 뒤집어 쓰니 이 원한은 저승에서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공이 말했다.



[네 사정이 비록 딱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냥 선비일 뿐이다. 무슨 방법으로 원한을 풀어줄 수 있겠느냐?]

여인이 말했다.

[공께서는 어느 해에 과거에 급제하실 것이고, 어느 해에는 이러한 관직에 올랐다 어느 해에 형조참의가 되실 것입니다. 형조는 형벌을 다루는 곳이니 그 관직에 오르시면 제 원통함을 풀어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여인은 하직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공이 몰래 절벽 사이를 살펴 보았더니, 과연 한 여인의 시체가 있었는데 바로 어제 봤던 그 여인이었다.

여인의 시체는 피에 흠뻑 젖어 있어 마치 금방 전에 죽은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공은 돌아와 책을 읽으며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후 공은 귀신의 말대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게 되었다.

공은 귀신의 하소연을 기억하고 곧장 관아에 달려가 그 여자의 남편을 잡아들여 신문했다.



[너는 영월암에서 억울하게 죽은 네 아내를 기억하겠지?]

하지만 그는 변명을 하며 범행을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그를 영월암으로 끌고 가서 시체를 보여주었다.



그는 말문이 막혀 한참을 멍하니 있다 곧 모든 사실을 시인하였다.

공은 여자의 부모를 불러서 장례를 치루게 하고, 그녀의 남편은 사형에 처했다.

밤에 공이 다시 영월암에 들어가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있으니,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창 밖에서 울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그 여자는 전과는 다르게 머리를 쪽지어 단정히 하였고, 옷도 깨끗하게 입고 있었다.

공은 그녀를 가까이 불러 자신의 운세를 물었더니 여인이 대답했다.

[공께서는 어느 해에 어느 직급에 올라가시고, 결국에는 대관의 지위에 이르실 것입니다. 어느 해에 나라를 위해 일하시다 돌아가실텐데, 죽은 후에도 그 명성이 전국에 자자할 것입니다. 자손도 크게 번창할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하직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공은 여자가 읊어 준 운세를 평생 기억했는데, 역시 모든 것이 그녀의 말처럼 이루어졌다.

공은 말년에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순국하였으며, 그 명성이 후대에까지 아름답게 기억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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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류가 병조좌랑이던 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당시 이경류의 둘째 형은 나라를 위해 붓을 내던지고 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방장 변기가 전쟁에 나서면서 이경류의 둘째형을 종사관으로 삼기 위해 임금님에게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하필 이름을 잘못 써서 이경류의 이름이 올라가고 말았다.

둘째 형이 이경류에게 말했다.

[내가 전쟁에 나서야 하는데, 이름이 네 이름으로 잘못 올라갔구나. 하지만 당연히 내가 전쟁에 나가야 옳을 것이다.]



그러자 이경류가 말했다.

[이미 제 이름을 보고 임금님이 허가를 하셨으니 제가 가야합니다.]

이경류는 무구를 챙겨 어머님께 인사를 올리고 전장으로 나섰다.



하지만 변기가 영남에서 크게 패하고 죽어버려서, 장군을 잃은 진중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경류는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그 곳으로 가서 윤섬, 박호와 함께 이일의 밑에서 머물렀다.

이일의 군대가 전투를 치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진이 함락되고 윤섬과 박호도 크게 다쳤다.



이경류가 진 밖으로 나가니 시종이 말을 끌고 이경류를 기다리고 있다 흐느끼며 아뢰었다.

[주인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서둘러서 이 말을 타고 서울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경류가 웃으며 말했다.



[나라가 이렇게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내가 죽지 않고 욕되게 살라고 하느냐?]

그리고 지필묵을 꺼내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써서 도포자락 속에 감춘 뒤, 시종에게 그것을 전하라고 시켰다.

이경류가 말을 타고 적진 가운데로 향하려고 하자, 시종은 그를 껴안고 울면서 놓아주지를 않았다.



이경류가 말했다.

[너의 정성이 갸륵하구나. 내가 네 말을 따라 서울로 돌아가겠다. 그런데 내가 지금 몹시 배가 고프니 밥을 좀 구해왔으면 좋겠구나.]

시종이 그 말을 믿고 주변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차려 돌아와보니 이경류는 이미 적진으로 향한 뒤였다.



시종은 적진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이경류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경류는 적진에서 맨손으로 왜구를 쳐 죽이다 결국 상주 북문 밖 평야에서 죽었으니, 그 때 24살이었다.

시종이 말을 끌고 서울로 돌아가니, 집안 사람들이 그제야 이경류의 죽음을 알았다.



편지를 쓴 날을 기일로 삼고 장례를 치뤘다.

시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말 또한 먹이를 먹지 않더니 굶어 죽었다.

가족들은 이경류가 남긴 물건들을 거두어 관에 넣어 경기도 광주에 장사 지내고, 그 옆에 시종과 말의 무덤도 만들어주었다.



상주의 선비들은 제단을 지어서 이경류의 제사를 지내 주었고, 조정에서는 도승지를 추서했다.

을묘년에는 정조 임금께서 친히 충신의사단이라는 글을 써서 북평에 사당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경류는 죽은 후 매일 밤 집에 왔는데, 그 목소리와 웃는 모습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다.



부인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나 음식을 마련하여 올리면 먹고 마시는 것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는데, 나중에 보면 음식은 그대로 있었다.

이경류는 매일 날이 저물면 왔다가 닭이 울면 문을 나섰다.



부인이 이경류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의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알 수 있다면 고향으로 모셔와 제대로 장례를 치루겠습니다.]

이경류가 슬피 울며 말했다.



[그 수많은 백골이 쌓여 있는 곳에서 어떻게 내 몸만 찾을 수 있겠소? 그냥 두는 게 더 좋을 것이오. 게다가 내 몸이 묻힌 곳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곳이오.]

죽은지 1년이 지나자 이경류는 이틀에 한 번씩 오기 시작했다.

죽은지 2년이 지나자 이경류는 말했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오.]

그 때 이경류의 아들 제는 나이가 겨우 4살이었다.

이경류는 제를 어루만지며 탄식했다.



[이 아이는 과거에 급제하겠으나, 그 후 불행해질 것이오. 그 때가 오면 내가 다시 오겠소.]

그 말을 남긴 뒤 이경류는 사라졌는데, 그 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윽고 20여년이 흘러 광해군 때에 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사당에 알현할 때, 공중에서 신참의 신고식을 하라고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이경류의 늙은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그 때가 5월 즈음이었다.

노모가 목이 말라 시종에게 말했다.



[어떻게 귤 하나만 구할 수 없을꼬? 그걸 먹으면 갈증이 싹 가실 것 같은데...]

며칠 뒤 하늘에게 이경류가 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뜰에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 보니 구름 속에서 이경류가 귤 3개를 던지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귤 생각을 하시기에 제가 동정호에서 귤을 얻어왔습니다. 이것을 드리면 어머님의 병이 곧 나을 것입니다.]

도암 이재가 신도비에 [공중에서 귤을 던지니 정신이 황홀하구나.] 라고 쓴 것이 바로 이 광경을 뜻하는 것이다.

이경류의 제삿날이 되면 언제나 병풍 뒤에서 밥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종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계집종이 실수를 해서 머리카락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제사가 끝난 뒤 바깥채에서 시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들었더니 그 소리는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시종이 사랑방에 들어가자 이경류의 목소리가 떡을 만든 계집종을 잡아오게 하고 분부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머리카락을 꺼린다. 너희는 어째서 머리카락이 있는지 잘 살피지 않았느냐? 그 죄는 매를 맞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계집종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릴 것을 명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는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감히 후손들이 이경류의 제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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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지 김윤신은 점술사 남사고와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남사고의 집에 가면 언제나 베옷 입은 노인이 남사고와 점괘를 논하고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파란 옷과 나막신으로 나라 일을 알 수 있을 것 같소.]

남사고가 한참 생각하고 말했다.

[그렇군요.]



노인이 또 말했다.

[머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고, 임금이 궁궐을 떠나는 재앙이 이를 것이며, 서쪽 변방까지 가서야 겨우 도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남사고가 또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노인이 또 말했다.

[두번째 들어올 때는 한강까지 오지 못할 것이오.]



남사고는 이번에도 한참을 생각하고 말했다.

[과연 그 말이 맞습니다.]

김윤신이 옆에서 그 말을 주워 들었지만, 도저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옷과 나막신이 세상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나막신이 없었는데, 임진왜란 직전에 나막신이 들어와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신게 되었다.

또한 기자가 흰 옷을 입고 이 땅에 온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흰색 옷을 입었는데, 임진왜란 전에 흰 옷을 입지 못하게 금지하여 모두 파란 옷을 입었던 것이다.



임진년 여름이 되자 왜구가 우리나라 깊숙이 들어와서, 마침내 선조 대왕이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임금님의 가마가 의주에서 머무르다가 왜구가 평정된 후에야 서울로 돌아왔으니 과연 베옷 입은 노인의 말이 모두 들어 맞은 것이었다.

정유년이 되어 왜구가 다시 쳐들어와 서울이 혼란에 빠졌다.



그 당시 명나라 장군 양호가 우리나라에 와 있었다.

선조 대왕과 양호가 남대문에 나가서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적을 막아낼 방법을 논의하고 있었다.

김윤신도 그 때 음사 미관으로 임금님을 따라 맨 끝에 서 있다가,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두번째는 한강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 소리에 모든 조정의 신하들이 놀라고, 임금님마저 놀라서 물으셨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그래서 김윤신을 임금님 앞에 데려와서 물었다.

[방금 전 두번째는 한강을 건너지 못한다고 한 것은 무슨 소리냐?]



김윤신은 이전에 베옷 입은 노인에게 들었던 것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보면 그 노인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나이다. 그러니 이번 두번째에 한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 역시 반드시 맞을 것입니다.]

임금님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셨다.



즉시 김윤신의 벼슬을 껑충 올려서 첨지로 삼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호가 보낸 부하 마귀가 충청도 직산 소사평에서 왜구를 만나 기병으로 물리치고 경상도까지 밀어냈다.

이로써 베옷 입은 노인의 마지막 예언까지 모두 맞아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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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거사는 안동 사람으로, 서애 류성룡의 숙부였다.

생김새가 보잘 것 없고 행동거지마저 어리석고 실속이 없었으며, 평소에는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류거사는 초가집을 하나 지어서 문을 닫고 혼자 책만 읽어서, 류성룡은 삼촌이 그냥 멍청한 줄 알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류거사가 류성룡에게 말했다.

[자네, 나와 바둑이나 두면서 놀지 않겠나?]

류성룡은 바둑의 고수였다.



게다가 그 전까지 숙부의 어리석은 모습만 보아 왔지 바둑 두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에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숙부님도 바둑을 두실 줄 아십니까?]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바둑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당대 조선의 국수였던 류성룡이 내리 3판을 숙부에게 내주고 말았다.

류성룡이 깜짝 놀라 의아해 하는데 류거사가 말했다.

[이제 바둑은 그만 두세. 오늘 저녁 어떤 중이 분명 자네 집을 찾아올걸세. 그 중을 만나면 내 집으로 오라고 말하게나.]



류성룡은 마음 속으로는 숙부의 말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겉으로는 [예,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날 밤, 과연 어떤 중이 류성룡의 집에 와서 말했다.

[저는 묘향산에서 온 중입니다. 오늘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을런지요?]



류성룡은 평소 멍청하던 숙부의 말이 들어맞은 것에 신기해하며 중에게 저녁을 먹이고 숙부의 집으로 보냈다.

류거사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중의 안색이 변하면서 물었다.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류거사가 말했다.



[조금 전 내 조카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요. 반드시 이 조용한 곳에 와서 잘 것이라 생각했소.]

말을 마친 뒤 류거사는 다른 말 없이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 척을 했다.

그러자 중 역시 잠에 들었다.



중이 잠든 틈을 타서, 잠든 척하던 류거사는 몰래 중의 바리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우리나라 지도 한 장이 있었다.

지도 곳곳에 관문, 성, 관청의 위치, 험한 곳, 우리나라의 주요 인물 등에 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 바리 안에는 단검 한 쌍이 있었는데, 그 칼날이 매우 날카로웠다.

류거사는 단검을 쥐고 중의 배 위에 걸터 앉아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말했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중이 놀라서 잠에 깨어 났더니 번쩍번쩍 빛나는 날카로운 검이 머리 위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중이 말했다.

[소승은 죄가 없습니다.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류거사가 말했다.

[주머니 속에 지도를 만든 것은 네놈의 죄가 아니냐? 조선에 몰래 세 번 들어온 것 역시 네 죄가 아니냐?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 것 또한 너의 죄가 아니냐?]

중이 입을 다물고 차마 대답조차 못하다가 애걸복걸하며 말했다.



[제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바다를 건너가서 다시는 조선에 오지 않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나이다.]

류거사가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우리나라에 7년간 전쟁이 일어날 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다. 내가 쥐새끼 같은 네놈들을 죽여봐야 어쩔 수가 없구나. 내가 지금은 네 목숨을 살려주겠지만 나중에 왜놈들이 안동 땅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여놓는다면 내가 모두 죽여버리겠다. 너는 당장 네 나라로 돌아가라.]



중은 [예, 예] 하고 정신 없이 대답하고 도망치듯 떠났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이 왜구에게 유린당했으나, 안동만은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 못하였다.

이것은 곧 류거사의 공덕 덕분인 것이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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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유진항은 젊었을 때 선전관이어서 대궐에서 숙직했다.

그 해는 1762년 영조 대왕 때로 금주령이 내려 엄하게 지켜지던 때였다.

어느날 한밤 중에 임금님이 갑자기 숙직 중인 선전관은 궁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셨다.



마침 숙직 중이던 유진항이 명령을 받들어 궁으로 들어가니 임금님이 긴 검 하나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소문을 들었더니 아직도 백성들이 몰래 술을 빚어 먹는다더구나. 너는 이 검을 가지고 가서 3일 내로 술을 빚는 사람을 잡아들이도록 하거라. 만약 술 빚는 사람을 잡아오지 못하면 네 목을 벨 것이다.]

유진항은 명령을 받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유진항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누웠다.

그러자 애첩이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기운이 없고 힘들어하시는가요?]



[내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건 임자도 알 것이네. 그런데 술을 못 마신지 너무 오래되다 보니 목이 말라 죽겠구만.]

[날이 저물면 술을 구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셔요.]

밤이 되자 첩이 말했다.



[제가 술이 있는 집을 알고 있는데, 제가 직접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술병을 들고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집을 나섰다.

유진항은 몰래 첩의 뒤를 따라갔는데, 첩은 동촌의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 술을 사오고 있었다.



유진항이 이 술을 맛있게 마시고 다시 사오라고 시키자 첩은 또 그 집에 가서 술을 사 왔다.

유진항이 이번에는 직접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첩이 이상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유진항이 대답했다.

[이 근처에 사는 아무개가 내 술 친구인데, 이렇게 귀중한 술을 얻었으니 어떻게 혼자만 마실 수 있겠나? 가서 친구와 함께 마시고 오겠네.]

유진항은 집을 나서 술을 팔던 동촌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 들어서니 몇 칸 되지 않는 누추한 집이어서 비바람도 가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집 안에는 한 선비가 등잔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다가, 유진항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 일어나 맞이했다.

[손님께서는 이런 깊은 밤에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집에 오셨습니까?]



유진항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왔소이다.]

그러면서 유진항은 허리에 차고 온 술병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 술은 이 집에서 판 것이 맞겠지요? 임금님께서 엄히 명하시어 모든 백성에게 술을 금하였는데 어찌 그대는 술을 파는 것이오? 그대의 혐의가 모두 드러났으니 나를 따라가 그 벌을 받아야겠소.]

선비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말했다.

[법으로 임금님께서 금한 것을 어겼으니 어찌 용서를 빌겠습니까? 하지만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부디 하직 인사 한마디라도 하고 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유진항이 말했다.

[그러도록 하시오.]

선비가 안쪽 방으로 들어가서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니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얘야, 왜 아직 자지 않고 어미를 부르느냐?]

선비가 대답했다.

[전에 제가 어머님께 사대부는 비록 굶어 죽더라도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끝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못난 아들이 붙잡혀 가니 다시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늙은 어머니가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내가 몰래 술을 빚은 게 돈을 벌려고 한 게 아니라 너에게 아침에 죽이라도 먹이려고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된 게 모두 이 못난 어미 탓이니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그 사이 부엌에 있던 선비의 아내도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비가 차분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왔는데 울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게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더라도 부디 어머님을 잘 보살펴주시오. 그리고 옆 동네에 아무개에게 아들 몇 명이 있으니,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중 한 명을 양자로 삼아 편안히 살도록 하시오.]

선비가 아내에게 부탁을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유진항이 가만히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마음이 아팠다.

유진항이 선비에게 물었다.

[어머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70살이 넘으셨습니다.]

[아들은 있는가?]

[없습니다.]



유진항이 말했다.

[이런 광경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구려. 나는 아들도 둘이나 있고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당신 대신 내가 죽겠소. 그대는 마음을 놓고 술병을 모두 가지고 나오시오.]

아내가 술병을 내오자 유진항은 선비가 술을 한 잔 하고는 술병을 깨트려 집 뜰에 묻고 말했다.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는데 집안 꼴이 말이 아니구려. 내가 이 검을 줄테니 이것을 팔아 어머님을 잘 모시구려.]

유진항은 차고 있던 검을 주고 그 곳을 떠났다.

선비가 따라오며 한사코 자신이 죽으러 가겠다고 외쳤으나 유진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선비가 지쳐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부디 은인의 성함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나는 선전관이오. 이름은 알아서 어디에 쓰겠소?]



말을 마치고 유진항은 멀리 떠났다.

다음날은 임금님이 말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대궐에 들어가니 임금님이 물으셨다.



[너는 술 빚는 사람을 잡아왔느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소리치셨다.



[그런데 감히 네 놈이 아직도 머리를 목에 붙인 채 내 앞에 나타났느냐!]

유진항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 뒤에야 화를 가라앉히신 임금님은 유진항을 평소보다 3배 멀리 돌아서 제주도에 유배하도록 명하셨다.



유진항은 유배를 간 지 몇 년뒤에야 비로소 풀려났고, 10여년 동안 가난하게 살다가 복직되어 경상북도 합천군 초계 사또가 되었다.

그런데 유진항이 가난히 살았던 탓에 원한이 사무쳤는지 그 마을에서 오로지 자신 혼자 잘 사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백성들은 모두 근심하며 매일 사또의 욕을 했다.



그러다 마침 그 주변을 돌아다니던 암행어사가 출도해서 창고를 봉하고 관가로 들어섰다.

어사는 이방과 아전들을 모두 잡아들인 다음 매를 칠 준비를 했다.

유진항이 두려워하며 문 틈으로 엿봤더니, 놀랍게도 어사는 바로 옛날 동촌에서 술을 팔다 자신에게 걸렸던 선비였다.



유진항은 아랫 사람을 시켜서 어사를 알현하기를 청했다.

어사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감히 탐관오리가 암행어사를 보겠다고? 정말 양심도 없구나!]



유진항은 막무가내로 들어가서 어사 앞에 절을 했으나, 어사는 얼굴도 보지 않고 정색을 한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유진항이 물었다.

[어사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어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혼잣말을 했다.

[내가 그대를 어찌 알겠는가?]

유진항이 말했다.



[혹시 어사의 집이 옛날에 동촌에 있지 않았습니까?]

어사가 놀라서 말했다.

[어찌하여 그것을 알며, 또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묻는 것이오?]



유진항이 말했다.

[임오년에 임금님이 내리셨던 금주령을 어겨서 당신을 찾아갔던 선전관을 기억하십니까?]

어사가 더욱 놀라서 궁금해하며 말했다.



[그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진항이 말했다.

[제가 바로 그 선전관입니다.]



어사는 급히 일어나 유진항의 손을 잡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말했다.

[은인이 여기 계셨군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만난 것은 하늘이 이어준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뒤 어사는 죄인들을 모두 석방하고, 밤이 새도록 풍악을 울리며 유진항과 회포를 풀었다.



어사는 그 곳에서 며칠 동안 머문 뒤 서울로 돌아가 보고서를 올렸는데, 유진항을 칭찬하는 내용이 가득이었다.

임금님께서는 그 보고서를 보고 흡족해 하시어 유진항을 특별히 평안도 삭주부사로 임명하셨다.

그 후 어사는 대신의 지위까지 올라갔는데, 가는 곳마다 유진항과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유진항과 어사의 의리에 대한 칭송이 가득했다.

유진항은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역임했다.

어사는 소론의 대신인데, 내가 그 이름을 잊어버려서 여기에는 적지 못했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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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이유가 홍문관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종묘 담 밖에 있는 순라곡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마침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밀짚모자를 쓰고 도롱이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두 눈이 횃불 같이 빛나는데 외발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이유와 시종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데, 이유가 갑자기 시종에게 물었다.

[지나 오면서 혹시 가마 한 대를 보지 못했느냐?]



[못 봤습니다.]

그 사이 외발로 뛰던 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유가 오다가 제생동 입구에서 가마 하나를 만났던 것이 떠올랐기에, 바로 그 뒤를 쫓아 제생동으로 갔다.



마침내 제생동에 있는 어느 집에 도착했는데 그 집은 이유의 먼 친척집이었다.

그 집 며느리가 괴질에 걸려 여러 달이 되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 날은 제생동 친척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이유는 말에서 내려 그 집으로 들어가 주인을 만났다.



그리고 자기가 길에서 보았던 것들을 말하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했다.

방에 들어갔더니 조금 전 길에서 만났던 그 귀신이 부인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유는 아무 말 없이 귀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그 귀신은 밖으로 나가서 마당 한 가운데에 섰다.

이유가 따라나가 또 바라보았더니 귀신은 다시 용마루 위로 올라갔다.

이유가 계속해서 올려다보자 그 귀신은 결국 공중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아파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던 며느리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데, 마치 전혀 아프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이유가 그 집을 떠나자 며느리는 곧바로 다시 앓아 누웠다.

결국 이유는 종이를 백장 정도 구해서 손수 서명을 하고 방 안 가득히 그 종이를 붙였다.



그러자 드디어 귀신이 물러나고 며느리의 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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