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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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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지 김윤신은 점술사 남사고와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남사고의 집에 가면 언제나 베옷 입은 노인이 남사고와 점괘를 논하고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파란 옷과 나막신으로 나라 일을 알 수 있을 것 같소.]

남사고가 한참 생각하고 말했다.

[그렇군요.]



노인이 또 말했다.

[머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고, 임금이 궁궐을 떠나는 재앙이 이를 것이며, 서쪽 변방까지 가서야 겨우 도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남사고가 또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노인이 또 말했다.

[두번째 들어올 때는 한강까지 오지 못할 것이오.]



남사고는 이번에도 한참을 생각하고 말했다.

[과연 그 말이 맞습니다.]

김윤신이 옆에서 그 말을 주워 들었지만, 도저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 옷과 나막신이 세상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나막신이 없었는데, 임진왜란 직전에 나막신이 들어와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신게 되었다.

또한 기자가 흰 옷을 입고 이 땅에 온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흰색 옷을 입었는데, 임진왜란 전에 흰 옷을 입지 못하게 금지하여 모두 파란 옷을 입었던 것이다.



임진년 여름이 되자 왜구가 우리나라 깊숙이 들어와서, 마침내 선조 대왕이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임금님의 가마가 의주에서 머무르다가 왜구가 평정된 후에야 서울로 돌아왔으니 과연 베옷 입은 노인의 말이 모두 들어 맞은 것이었다.

정유년이 되어 왜구가 다시 쳐들어와 서울이 혼란에 빠졌다.



그 당시 명나라 장군 양호가 우리나라에 와 있었다.

선조 대왕과 양호가 남대문에 나가서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적을 막아낼 방법을 논의하고 있었다.

김윤신도 그 때 음사 미관으로 임금님을 따라 맨 끝에 서 있다가,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두번째는 한강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 소리에 모든 조정의 신하들이 놀라고, 임금님마저 놀라서 물으셨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그래서 김윤신을 임금님 앞에 데려와서 물었다.

[방금 전 두번째는 한강을 건너지 못한다고 한 것은 무슨 소리냐?]



김윤신은 이전에 베옷 입은 노인에게 들었던 것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보면 그 노인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나이다. 그러니 이번 두번째에 한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 역시 반드시 맞을 것입니다.]

임금님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셨다.



즉시 김윤신의 벼슬을 껑충 올려서 첨지로 삼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호가 보낸 부하 마귀가 충청도 직산 소사평에서 왜구를 만나 기병으로 물리치고 경상도까지 밀어냈다.

이로써 베옷 입은 노인의 마지막 예언까지 모두 맞아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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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거사는 안동 사람으로, 서애 류성룡의 숙부였다.

생김새가 보잘 것 없고 행동거지마저 어리석고 실속이 없었으며, 평소에는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류거사는 초가집을 하나 지어서 문을 닫고 혼자 책만 읽어서, 류성룡은 삼촌이 그냥 멍청한 줄 알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류거사가 류성룡에게 말했다.

[자네, 나와 바둑이나 두면서 놀지 않겠나?]

류성룡은 바둑의 고수였다.



게다가 그 전까지 숙부의 어리석은 모습만 보아 왔지 바둑 두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에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숙부님도 바둑을 두실 줄 아십니까?]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바둑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당대 조선의 국수였던 류성룡이 내리 3판을 숙부에게 내주고 말았다.

류성룡이 깜짝 놀라 의아해 하는데 류거사가 말했다.

[이제 바둑은 그만 두세. 오늘 저녁 어떤 중이 분명 자네 집을 찾아올걸세. 그 중을 만나면 내 집으로 오라고 말하게나.]



류성룡은 마음 속으로는 숙부의 말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겉으로는 [예,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날 밤, 과연 어떤 중이 류성룡의 집에 와서 말했다.

[저는 묘향산에서 온 중입니다. 오늘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을런지요?]



류성룡은 평소 멍청하던 숙부의 말이 들어맞은 것에 신기해하며 중에게 저녁을 먹이고 숙부의 집으로 보냈다.

류거사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중의 안색이 변하면서 물었다.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류거사가 말했다.



[조금 전 내 조카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요. 반드시 이 조용한 곳에 와서 잘 것이라 생각했소.]

말을 마친 뒤 류거사는 다른 말 없이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 척을 했다.

그러자 중 역시 잠에 들었다.



중이 잠든 틈을 타서, 잠든 척하던 류거사는 몰래 중의 바리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우리나라 지도 한 장이 있었다.

지도 곳곳에 관문, 성, 관청의 위치, 험한 곳, 우리나라의 주요 인물 등에 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 바리 안에는 단검 한 쌍이 있었는데, 그 칼날이 매우 날카로웠다.

류거사는 단검을 쥐고 중의 배 위에 걸터 앉아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말했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중이 놀라서 잠에 깨어 났더니 번쩍번쩍 빛나는 날카로운 검이 머리 위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중이 말했다.

[소승은 죄가 없습니다.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류거사가 말했다.

[주머니 속에 지도를 만든 것은 네놈의 죄가 아니냐? 조선에 몰래 세 번 들어온 것 역시 네 죄가 아니냐?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 것 또한 너의 죄가 아니냐?]

중이 입을 다물고 차마 대답조차 못하다가 애걸복걸하며 말했다.



[제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바다를 건너가서 다시는 조선에 오지 않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나이다.]

류거사가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우리나라에 7년간 전쟁이 일어날 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다. 내가 쥐새끼 같은 네놈들을 죽여봐야 어쩔 수가 없구나. 내가 지금은 네 목숨을 살려주겠지만 나중에 왜놈들이 안동 땅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여놓는다면 내가 모두 죽여버리겠다. 너는 당장 네 나라로 돌아가라.]



중은 [예, 예] 하고 정신 없이 대답하고 도망치듯 떠났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이 왜구에게 유린당했으나, 안동만은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 못하였다.

이것은 곧 류거사의 공덕 덕분인 것이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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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유진항은 젊었을 때 선전관이어서 대궐에서 숙직했다.

그 해는 1762년 영조 대왕 때로 금주령이 내려 엄하게 지켜지던 때였다.

어느날 한밤 중에 임금님이 갑자기 숙직 중인 선전관은 궁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셨다.



마침 숙직 중이던 유진항이 명령을 받들어 궁으로 들어가니 임금님이 긴 검 하나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소문을 들었더니 아직도 백성들이 몰래 술을 빚어 먹는다더구나. 너는 이 검을 가지고 가서 3일 내로 술을 빚는 사람을 잡아들이도록 하거라. 만약 술 빚는 사람을 잡아오지 못하면 네 목을 벨 것이다.]

유진항은 명령을 받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유진항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누웠다.

그러자 애첩이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기운이 없고 힘들어하시는가요?]



[내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건 임자도 알 것이네. 그런데 술을 못 마신지 너무 오래되다 보니 목이 말라 죽겠구만.]

[날이 저물면 술을 구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셔요.]

밤이 되자 첩이 말했다.



[제가 술이 있는 집을 알고 있는데, 제가 직접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술병을 들고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집을 나섰다.

유진항은 몰래 첩의 뒤를 따라갔는데, 첩은 동촌의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 술을 사오고 있었다.



유진항이 이 술을 맛있게 마시고 다시 사오라고 시키자 첩은 또 그 집에 가서 술을 사 왔다.

유진항이 이번에는 직접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첩이 이상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유진항이 대답했다.

[이 근처에 사는 아무개가 내 술 친구인데, 이렇게 귀중한 술을 얻었으니 어떻게 혼자만 마실 수 있겠나? 가서 친구와 함께 마시고 오겠네.]

유진항은 집을 나서 술을 팔던 동촌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 들어서니 몇 칸 되지 않는 누추한 집이어서 비바람도 가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집 안에는 한 선비가 등잔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다가, 유진항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 일어나 맞이했다.

[손님께서는 이런 깊은 밤에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집에 오셨습니까?]



유진항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왔소이다.]

그러면서 유진항은 허리에 차고 온 술병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 술은 이 집에서 판 것이 맞겠지요? 임금님께서 엄히 명하시어 모든 백성에게 술을 금하였는데 어찌 그대는 술을 파는 것이오? 그대의 혐의가 모두 드러났으니 나를 따라가 그 벌을 받아야겠소.]

선비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말했다.

[법으로 임금님께서 금한 것을 어겼으니 어찌 용서를 빌겠습니까? 하지만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부디 하직 인사 한마디라도 하고 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유진항이 말했다.

[그러도록 하시오.]

선비가 안쪽 방으로 들어가서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니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얘야, 왜 아직 자지 않고 어미를 부르느냐?]

선비가 대답했다.

[전에 제가 어머님께 사대부는 비록 굶어 죽더라도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끝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못난 아들이 붙잡혀 가니 다시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늙은 어머니가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내가 몰래 술을 빚은 게 돈을 벌려고 한 게 아니라 너에게 아침에 죽이라도 먹이려고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된 게 모두 이 못난 어미 탓이니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그 사이 부엌에 있던 선비의 아내도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비가 차분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왔는데 울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게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더라도 부디 어머님을 잘 보살펴주시오. 그리고 옆 동네에 아무개에게 아들 몇 명이 있으니,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중 한 명을 양자로 삼아 편안히 살도록 하시오.]

선비가 아내에게 부탁을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유진항이 가만히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마음이 아팠다.

유진항이 선비에게 물었다.

[어머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70살이 넘으셨습니다.]

[아들은 있는가?]

[없습니다.]



유진항이 말했다.

[이런 광경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구려. 나는 아들도 둘이나 있고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당신 대신 내가 죽겠소. 그대는 마음을 놓고 술병을 모두 가지고 나오시오.]

아내가 술병을 내오자 유진항은 선비가 술을 한 잔 하고는 술병을 깨트려 집 뜰에 묻고 말했다.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는데 집안 꼴이 말이 아니구려. 내가 이 검을 줄테니 이것을 팔아 어머님을 잘 모시구려.]

유진항은 차고 있던 검을 주고 그 곳을 떠났다.

선비가 따라오며 한사코 자신이 죽으러 가겠다고 외쳤으나 유진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선비가 지쳐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부디 은인의 성함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나는 선전관이오. 이름은 알아서 어디에 쓰겠소?]



말을 마치고 유진항은 멀리 떠났다.

다음날은 임금님이 말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대궐에 들어가니 임금님이 물으셨다.



[너는 술 빚는 사람을 잡아왔느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소리치셨다.



[그런데 감히 네 놈이 아직도 머리를 목에 붙인 채 내 앞에 나타났느냐!]

유진항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 뒤에야 화를 가라앉히신 임금님은 유진항을 평소보다 3배 멀리 돌아서 제주도에 유배하도록 명하셨다.



유진항은 유배를 간 지 몇 년뒤에야 비로소 풀려났고, 10여년 동안 가난하게 살다가 복직되어 경상북도 합천군 초계 사또가 되었다.

그런데 유진항이 가난히 살았던 탓에 원한이 사무쳤는지 그 마을에서 오로지 자신 혼자 잘 사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백성들은 모두 근심하며 매일 사또의 욕을 했다.



그러다 마침 그 주변을 돌아다니던 암행어사가 출도해서 창고를 봉하고 관가로 들어섰다.

어사는 이방과 아전들을 모두 잡아들인 다음 매를 칠 준비를 했다.

유진항이 두려워하며 문 틈으로 엿봤더니, 놀랍게도 어사는 바로 옛날 동촌에서 술을 팔다 자신에게 걸렸던 선비였다.



유진항은 아랫 사람을 시켜서 어사를 알현하기를 청했다.

어사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감히 탐관오리가 암행어사를 보겠다고? 정말 양심도 없구나!]



유진항은 막무가내로 들어가서 어사 앞에 절을 했으나, 어사는 얼굴도 보지 않고 정색을 한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유진항이 물었다.

[어사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어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혼잣말을 했다.

[내가 그대를 어찌 알겠는가?]

유진항이 말했다.



[혹시 어사의 집이 옛날에 동촌에 있지 않았습니까?]

어사가 놀라서 말했다.

[어찌하여 그것을 알며, 또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묻는 것이오?]



유진항이 말했다.

[임오년에 임금님이 내리셨던 금주령을 어겨서 당신을 찾아갔던 선전관을 기억하십니까?]

어사가 더욱 놀라서 궁금해하며 말했다.



[그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진항이 말했다.

[제가 바로 그 선전관입니다.]



어사는 급히 일어나 유진항의 손을 잡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말했다.

[은인이 여기 계셨군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만난 것은 하늘이 이어준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뒤 어사는 죄인들을 모두 석방하고, 밤이 새도록 풍악을 울리며 유진항과 회포를 풀었다.



어사는 그 곳에서 며칠 동안 머문 뒤 서울로 돌아가 보고서를 올렸는데, 유진항을 칭찬하는 내용이 가득이었다.

임금님께서는 그 보고서를 보고 흡족해 하시어 유진항을 특별히 평안도 삭주부사로 임명하셨다.

그 후 어사는 대신의 지위까지 올라갔는데, 가는 곳마다 유진항과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유진항과 어사의 의리에 대한 칭송이 가득했다.

유진항은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역임했다.

어사는 소론의 대신인데, 내가 그 이름을 잊어버려서 여기에는 적지 못했다.




원문 및 번역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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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이유가 홍문관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종묘 담 밖에 있는 순라곡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마침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밀짚모자를 쓰고 도롱이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두 눈이 횃불 같이 빛나는데 외발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이유와 시종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데, 이유가 갑자기 시종에게 물었다.

[지나 오면서 혹시 가마 한 대를 보지 못했느냐?]



[못 봤습니다.]

그 사이 외발로 뛰던 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유가 오다가 제생동 입구에서 가마 하나를 만났던 것이 떠올랐기에, 바로 그 뒤를 쫓아 제생동으로 갔다.



마침내 제생동에 있는 어느 집에 도착했는데 그 집은 이유의 먼 친척집이었다.

그 집 며느리가 괴질에 걸려 여러 달이 되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 날은 제생동 친척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이유는 말에서 내려 그 집으로 들어가 주인을 만났다.



그리고 자기가 길에서 보았던 것들을 말하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했다.

방에 들어갔더니 조금 전 길에서 만났던 그 귀신이 부인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유는 아무 말 없이 귀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그 귀신은 밖으로 나가서 마당 한 가운데에 섰다.

이유가 따라나가 또 바라보았더니 귀신은 다시 용마루 위로 올라갔다.

이유가 계속해서 올려다보자 그 귀신은 결국 공중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아파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던 며느리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데, 마치 전혀 아프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이유가 그 집을 떠나자 며느리는 곧바로 다시 앓아 누웠다.

결국 이유는 종이를 백장 정도 구해서 손수 서명을 하고 방 안 가득히 그 종이를 붙였다.



그러자 드디어 귀신이 물러나고 며느리의 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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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병자년때 초봄에 초시를 치루고, 복시는 나라에 일이 있어서 다음해 봄으로 미뤄졌다.

이 때 초시에 합격한 유생 네 명이 북한산에 모여 같이 공부 모임을 만들고 공부했다.

그런데 하루는 웬 스님이 와서 선비들에게 말했다.



[이 곳에 신통하신 큰스님이 계시니 선비님들은 과거 문제와 향후 운세에 관해 여쭤보시지요.]

네 선비가 같이 모여 큰스님에게 물었더니 큰스님이 말했다.

[소승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관상에 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한 분씩 천천히 살펴보고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네 선비가 그 말에 따라서 한 명씩 큰스님의 방에 들어가서 관상을 보고 나왔다.

서로 모여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물어보자 한 선비가 말했다.

[나는 자손이 천명이 넘을거래!]



다른 선비가 말했다.

[나는 도적들의 장수가 될거래!]

또 다른 한 선비가 말했다.



[나는 신선이 될거래!]

마지막 선비가 말했다.

[나는 과거에 합격해서 반드시 너희 셋을 만날거래!]



네 선비는 각자의 점괘에 한바탕 웃고 떠들며 정신 나간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 없이 그 해 말에 청나라 오랑캐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강화도를 함몰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네 선비는 각자 달아나서 목숨만 겨우 건졌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마저 끊겼다.



그 중 한 선비는 정말로 과거에 급제해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봄에 경상도를 순찰하면서 안동에 도착했는데, 안동에서 떠나려는 와중에 문 밖에 한 손님이 소를 타고 와서 명함을 내밀고 만나기를 청했다.

그렇지만 관찰사는 명함을 받아봐도 그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들어오게 해서 만나보았더니, 평소 알지 못하던 사람인데 다 떨어진 도포에 망가진 삿갓을 쓴 가난한 선비였다.

인사를 나눈 뒤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그는 바로 지난날 북한산에서 함께 공부했던 선비 중 한 명이었다.

큰 전쟁이 있은 후 각자 생사도 알지 못하고 살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관찰사가 사는 곳을 물었더니 순찰 경로 근처였다.

선비가 말했다.

[영감의 행차가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깝습니다. 옛 정을 생각하여 부디 와 주셔서 가난한 집이나마 빛내주시지 않겠습니까?]



관찰사는 관복을 벗고 평범한 옷을 입은 다음 혼자 말을 타고 선비를 따라갔다.

한 골짜기에 도착하자 높고 큰 누각이 온 계곡에 가득했는데, 마치 궁궐 같았다.

자리에 앉고 보니 소를 타고 왔던 선비는 장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관찰사가 놀라서 물었다.

[자네의 모습을 보니 자네는 도적 수령이 아닌가?]

[그렇소.]



[어쩌다 이렇게 된거요?]

[북한산에서 관상을 봐 주었던 스님의 말을 기억하시지요? 당시에는 비웃었는데 세상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더군요. 전쟁통에 가족들은 모두 죽고 나만 혼자 살아남아 도망치다 이 산에 도착했습니다. 나말고도 피난하여 온 사람들이 산 속에 모여 살다가, 내가 공부를 좀 했다고 나를 두목으로 뽑았습니다. 나는 약탈해 온 물건들을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 인심을 얻었지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여기 남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님이 말했던 우리 관상은 역시 정해져 있던 운명이었나 봅니다. 나는 이 곳에서 부귀를 누리고 있으니 당신이 조금도 부럽지 않소. 마침 그대가 이 곳 근처를 지나간다기에 내가 일부러 불러서 이 곳을 보게 한 것이오. 당신이 비록 관찰사라도 병사는 아마 나보다 적을 것입니다. 돌아가서 나를 잡으려는 생각은 하지 말고, 나를 보았다는 이야기도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닥 좋은 일은 없을게요.]

관찰사는 무서워서 [알았네, 알았네.] 라고 말하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그 후 관찰사는 경상북도를 순찰하다 어느 군에 도착하였다.

일을 마치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어느 선비가 만나기를 청해왔다.

그를 만나보니 역시 옛날 북한산에서 같이 공부하던 선비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선비가 말했다.

[영감께서 이 곳까지 오셨는데, 제가 사는 곳이 이 근처입니다. 부탁컨대 잠시 들렀다 가시지요.]

관찰사는 지난 번에 당한 것을 생각하고 이번에는 관찰사답게 큰 행렬을 거느리고 갔다.



그 집에 도착하니 집이 매우 컸고, 주변에 집이 거의 수백개가 넘게 있어서 마을 하나 정도 크기였다.

그 선비는 많은 하인을 데리고 나와서 관찰사를 맞이했다.

그 예의와 대접이 왠만한 도시에서 받는 것보다 더 대단할 정도였다.



관찰사가 놀라서 물었다.

[시골에서 살면서 어떻게 이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있으며, 이렇게나 부유하게 살고 있단 말이오?]

선비가 말했다.



[당신도 옛날 북한산에서 스님이 우리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요? 병자년 전쟁 이후 집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이 곳 영남에 흘러 들어왔소. 마친 한 산골에 들어갔더니 피난 온 여자들이 모여 살고 있더군요. 남자인 내가 그 곳에 도착하니 여자들이 크게 기뻐하며 다들 나와 함께 살자고 하더군요. 여자들은 밭을 갈고 베를 짜서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떠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같이 여기서 살아서 이미 여러해가 지났습니다. 내가 낳은 남자아이가 거의 백 명 가까이 되는데, 그 아이들이 각각 결혼해서 또 아이들을 낳았으니 늘그막에 자식들, 손자들 재롱에 편히 살고 있소. 이렇게 행복하니 나는 관찰사 영감이 그닥 부럽지도 않구려.]

이야기를 다 들은 관찰사는 망연자실했다.

그 후 또 순찰을 하다가 하동 경계에 도착해서 지리산 자락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관찰사의 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찰사가 의아해하면서 가마에서 머리를 내밀었더니, 그 소리는 산 위에서 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 절벽 위에 앉아 관찰사를 부르고 있었다.

관찰사가 행렬을 멈추고 누구냐고 물으니 산 위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소? 나는 아무개요.]

관찰사가 생각해보니 그 역시 옛날 북한산에서 같이 공부했던 선비였다.

관찰사가 손을 들어 그를 부르며 말했다.



[이리로 내려 오시오.]

[그대가 올라오시지요.]

잠시 후 푸른 옷을 입은 동자 두 명이 내려와서 관찰사의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산을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매우 험한 산길인데다 마치 맨땅을 걷는 듯 편안했다.

옛 친구와 만난 관찰사는 악수를 나눴다.

친구가 말했다.



[당신은 북한산 스님이 우리들의 관상을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그 때 나에게 신선이 될 것이라 말해서 나는 비웃고 넘어갔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분이 정말 신통하신 분입니다. 지난번 전쟁 때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나는 산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굶주리고 피곤해도 먹을 것이 없었지요. 그런데 물가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풀이 통통하고 색깔이 먹음직스럽더군요. 먹어보니 달고 씁쓸해서 맛있는지라 모두 캐 먹었다오. 그 이후로 나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입지 않아도 따뜻하며, 산길을 가다 거기서 그냥 자도 아프지 않고 한 번 걸어서 천리를 갈 수 있더이다. 내 몸이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며 걱정이 없고, 이익을 따지지 않으니 관찰사가 사는 것보다 내가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소? 내가 먹은 것은 장생초였으니 관찰사의 식사보다 결코 꿀리지 않을 것이오.]

신선은 말을 마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위로 던져 학의 등에 올라 탔다.

시동 두 사람도 좌우에서 함께 서서 공중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관찰사는 망연자실해서 자신이 관찰사라는 것도 잊어 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이는 모두 하늘이 정한 것이다.

또한 지나가던 스님의 말이 모두 맞아 떨어졌으니 그 스님 역시 이인이로다!



원문 및 번역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18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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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선조 임금 때 1584년 1월에 한양 선비 이생이 강릉에 일이 있어서 가게 되었다.

걸음이 느린 말을 타고 피곤하게 길을 가다 깊숙한 두메 산골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사람은 사람대로 지치고 말은 말대로 피곤한데, 날은 저무는데 머무를 곳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다행히 숲 속에서 한 목동을 만나게 되어 길을 물었더니, 목동은 언덕 너머를 가르키며 말했다.

[이 언덕을 넘어가면 아무개 양반집이 있습니다. 그 곳을 빼면 주변에 사람 사는 곳은 없습니다.]

선비가 목동의 말을 따라 언덕을 넘어갔더니 세칸짜리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 어떤 한 노인이 나왔는데, 나이는 60여세 정도였고 머리에는 다 떨어진 모관을 쓰고 있었고 한 소년이 옆에서 노인을 모시고 있었다.

노인이 선비를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이렇게 깊은 시골에 손님께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비가 산에 왔다 길을 잃어버린 사정을 설명하자 노인은 그 집에서 묵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노인은 조용히 앉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선비 또한 가볍게 말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여서 그냥 방 한 쪽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시중을 들던 소년이 저녁밥을 차려와서 먹었다.

황혼녘이 되자 노인은 소년에게 말했다.

[날이 벌써 저물었는데도 아직까지 오지 않는다니 몹시 이상하구나. 네가 문을 열고 멀리 내다보거라.]



소년이 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 막 앞 시냇가를 건너 오십니다.]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선비를 보며 말했다.



[부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옆에서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잠시 뒤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평범한 선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스님 옷을 입은 늙은 스님이었다.

방에 들어온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소년에게 정화수 한 그릇을 떠오게 해서 소반 위에 올리고 향로에 향을 살랐다.

그 후 세 사람이 모두 북쪽으로 꿇어 앉아 주문 같은 것을 한참 외웠는데 선비는 아무리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몇시간 하다가 노인이 소년을 불러 말했다.



[문 밖에 나가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거라.]

소년이 밖으로 나갔다 곧 들어와서 말했다.

[별 하나가 지금 동쪽에서 떨어져서, 그 빛이 온 땅을 밝히고 있습니다.]



노인과 두 손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참 동안 응시하다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늘이 내린 수명이니 이것을 어찌하겠는가!]

선비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엉겁결에 물었다.



[주인께서는 무슨 일로 한숨을 쉬십니까?]

[숙헌이 곧 죽게 생겼기에 내가 이 두 손님과 함께 하늘에 기도하며 경을 외어서 그 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했던 것이라오. 운이 좋아야만 했는데, 끝내 아무런 효험이 없겠습니다. 조금 전 별이 떨어졌으니 이미 숙헌을 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비가 물었다.



[숙헌이 누구입니까?]

[율곡 이이라는 분이오.]

[제가 이번달 초에 서울에서 출발할 때 그 분은 병조판서를 맡고 있었고 몸도 건강하셨는데요?]



[7, 8년 뒤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범할텐데, 숙헌이 살아 계신다면 그 난리를 능히 막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우리백성들은 모두 고깃조각이 될 것입니다. 살아날 방도가 없습니다.]

조금 뒤 두 손님이 집을 나서는데 안색이 정말 처참했다.

선비가 물었다.



[나라가 그렇게 난리를 맞게 된다면 저같은 불쌍한 선비는 어떻게 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만약 충청남도 당진이나 면천으로 간다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선비가 또 물었다.

[저 두 손님은 누구십니까?]

[선비 분의 이름은 말해 줄 수 없고, 스님은 바로 백제 때 고승인 검단대사님입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다른 곳에 퍼트리면 안 됩니다.]



선비가 한양에 돌아와 수소문해보니 과연 율곡 이이가 별이 떨어지던 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선비는 곧 충청남도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원문 및 번역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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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밖에 사는 심씨 성을 가진 양반이 있었다.

집이 무척 가난하여 외출을 할 때면 남편과 아내가 한 벌의 옷을 서로 바꿔 입고 번갈아 나갈 정도였다.

그나마 병마절도사 이석구와 친척이어서, 간혹 이석구가 도움을 주어 죽이나 겨우 먹고 다녔다.



작년 겨울 한낮에 심씨가 한가롭게 쉬고 있는데 갑자기 사랑방 지붕에서 쥐가 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심씨는 쥐를 내쫓으려고 담뱃대로 천장을 쳤다.

그런데 갑자기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당신을 보려고 산 넘고 물 건너 여기에 왔으니 나를 박대하지 마십시오.]

심씨가 놀라서 분명 도깨비인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대낮에 어떻게 도깨비가 나오겠는가!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워 하는데 다시 천장에서 소리가 났다.



[내가 먼 길을 와서 몹시 배가 고프니 밥 한 그릇만 주시오.]

심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가족에게 그 상황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가족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심씨가 말을 마치자마자 공중에서 소리가 났다.

[당신들끼리 모여서 나 몰래 내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아이들과 부인들이 놀라 달아나니까 귀신도 부인을 따라가면 계속 외쳤다.



[놀라서 도망칠 필요 없습니다. 나는 앞으로 이 집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것입니다. 곧 한 집안 식구가 될텐데 나를 섭섭하게 하지 마십시오.]

부인들이 여기저기 가서 숨었지만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머리 위에서 밥을 달라고 계속 소리를 쳤다.

결국 밥과 반찬을 한 상 차려서 대청마루에 놓아 두었더니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이 밥을 잠깐 사이에 다 먹어 치웠으니, 다른 귀신들이 제사를 지내면 음식의 향만 맡고 가는 것과 달랐다.

심씨가 놀라서 물었다.

[너는 어떤 귀신이고, 무슨 이유로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이냐?]



귀신이 말했다.

[나는 문경관이라 합니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 우연히 이 집에 들어온 것이오. 배부르게 밥을 먹었으니 이제 가겠소.]

곧 작별을 하고 귀신이 떠났다.



그런데 다음날 귀신이 또 찾아와서는 어제처럼 먹을 것을 요구하고 다 먹은 다음 가 버렸다.

이후 귀신을 매일 찾아왔고, 어느 날은 하룻 밤을 자고 가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온 집안 식구들이 익숙해져서 귀신이 와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심씨가 귀신을 쫓아내려고 벽에 부적을 붙이고 온갖 잡귀를 쫓아내는 물건들을 구해 집 앞에 내어 놓았다.

그랬더니 귀신이 또 와서 말했다.

[나는 요귀가 아닙니다. 그런 수작이 무서울리가 있겠습니까? 빨리 그것들을 치워서 나같은 손님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주시오.]



심씨가 어쩔 수 없이 물건들을 치우고 물었다.

[너는 미래의 운명에 관해 알고 있느냐?]

귀신이 말했다.



[아주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심씨가 말했다.

[우리 집은 미래에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귀신이 말했다.

[당신은 충분히 69살까지 살겠지만, 평생 불우할 것입니다. 당신 아들은 몇 살까지 살 것이고, 손자에 가서야 겨우 과거에 급제할 것이오. 하지만 그나마도 쉽게는 못할 것 같습니다.]

심씨가 그 말을 듣고 놀랄 뿐이었다.



집안 식구 중 어떤 부인은 몇 살까지 살고, 아들은 몇 명이나 낳을지 물어보니 귀신은 일일히 다 대답해주고 덧붙여 말했다.

[내가 쓸 곳이 좀 있으니 엽전 200냥만 좀 베풀어 주십시오.]

심씨가 말했다.



[네 눈엔 우리 집이 가난해 보이냐, 부자로 보이냐?]

[가난이 뼛 속까지 사무치지요.]

[네가 봐도 그런데 내가 어떻게 200냥을 마련해 주겠냐?]



[당신 집안에 숨겨둔 상자 속에 조금 전 빌려온 200냥이 있는 걸 내가 아는데 왜 그 돈을 나한테 주지 않습니까?]

[내가 쓸 돈도 없어서 겨우 빌어서 꿔 온 돈인데, 이 돈을 지금 너한테 주면 나는 저녁 먹을 거리도 없을 것이다.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당신 집에 아직 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 저녁밥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오. 어째서 거짓말로 때우려 하는 것이오? 내가 이 돈을 가져갈테니 화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귀신은 훌쩍 가버렸다.

심씨가 상자를 열어보니 자물쇠는 제대로 채워져 있었으나 돈은 사라지고 없었다.

심씨는 손해가 점점 커지는 것에 고민하다 부인들을 친정으로 보내고 자신도 친한 친구의 집에 가서 자기로 했다.



그랬더니 귀신은 친구 집까지 쫓아와서 화를 내며 말했다.

[어째서 나를 피해 이런 곳까지 와서 빌어 살고 앉았소? 당신이 만약 천 리를 달아난다 해도 내가 못 찾을 것 같소?]

귀신은 이번에는 그 집 주인에게 밥을 달라고 했다.



주인이 밥을 안 주자 귀신은 온갖 욕을 해대며 그릇들을 깨부쉈다.

이토록 밤새도록 소란을 피우니까 주인은 심씨에게 원망을 하며 깨진 그릇 값까지 물게 했다.

심씨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날이 새자마자 집으로 돌아갔다.



귀신은 부인들의 친정까지 찾아가 똑같이 소란을 피워서 부인들도 돌아와야만 했다.

이후 귀신은 평소처럼 심씨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하루는 귀신이 말했다.



[이제 오랫동안 헤어지고 만나지 못할테니 부디 몸을 잘 관리하시구려.]

심씨가 말했다.

[네가 어디로 가던 좋으니 부디 빨리 여기서 떠나라. 우리 집안 사람들도 편하게 좀 살아보자!]



귀신이 말했다.

[우리 집은 경상도 문경에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지만 노잣돈이 없구려. 그러니 유엽전 천냥만 내게 주시오.]

심씨가 말했다.



[내가 가난해서 밥도 잘 못 챙겨 먹는건 너도 알 거 아니냐? 그렇게 많은 돈을 내가 어디서 구하냐?]

귀신이 말했다.

[당신 친척인 절도사 이석구 집에 가서 내 이야기를 하면 쉽게 빌려줄 겁니다. 어째서 돈을 안 구해 와서 내가 집에 못 가게 합니까?]



심씨가 말했다.

[우리 집안의 모든 것은 절도사께서 주신 것이다. 입은 은혜가 너무 큰데 하나도 보답을 못해서 항상 부끄러워 하고 있는데 또 천냥을 빌리라는 게 말이 되느냐?]

귀신이 말했다.



[내가 당신 집에서 소란을 피운 걸 이미 절도사도 알고 있을 것이오. 당신이 이것만 해주면 요괴를 쫓아낼 수 있다고 말하면 어찌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심씨가 기가 막혀서 말도 못 했다.

그래서 즉시 이석구의 집으로 달려가 사정을 모두 말했다.



이석구는 화를 냈지만 결국 돈을 주었다.

심씨가 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상자 깊숙이 감춰 두고 앉아 있으니 곧 귀신이 와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잣돈을 넉넉히 가져도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덕분에 노잣돈을 얻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갈테요.]



심씨가 귀신을 속이려고 말했다.

[내가 누구에게서 돈을 얻어와서 너한테 노잣돈을 주겠냐?]

귀신이 웃으며 말했다.



[지난 번에 선생이 봐서 알텐데 왜 쓸데 없는 소리를 하십니까?]

잠시 뒤 귀신은 또 말했다.

[내가 이미 상자 속의 당신 돈을 가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250냥은 남겨 두었으니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십시오.]



귀신이 인사를 하고 사라지니 심씨 집안의 모든 이들이 좋아서 기뻐 날뛰며 서로 축하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자 또 공중에서 귀신이 인사를 했다.

심씨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소리 쳤다.



[내가 다른 사람에서 구걸까지 해서 천냥을 마련해서 고향에 가게 해 줬으면 너는 감사한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약속을 깨고 다시 와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니 너는 은혜도 모르는구나! 내가 관우 사당에 가서 너에게 벌을 주라고 빌어야겠다.]

귀신이 말했다.

[저는 문경관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은혜를 저버렸습니까?]



심씨가 말했다.

[문경관이 아니라고? 그럼 너는 누구냐?]

귀신이 말했다.



[나는 문경관의 아내입니다. 당신 집에서 귀신을 잘 대접한다고 남편이 그러길래 먼 길을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반갑게 맞이해야지 욕이나 하고 있군요. 남녀를 모두 공경하는 게 선비일텐데 당신은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것도 없습니까?]

심씨가 기가 막혀서 헛웃음만 웃었다.

귀신은 또 날마다 찾아왔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심씨의 소식이 끊겨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 호사가들은 앞다투어 심씨 집에 가서 귀신과 이야기를 했으니 심씨 집 문 앞이 시장바닥 같았다.

학사 이희조는 심지어 그 집에 하룻밤 묵으면서 귀신과 대화까지 했다고 한다.

아!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원문 및 번역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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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의 한 포수가 묘향산에서 사냥을 했다.

묘향산은 큰 산이어서 인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많았다.

포수가 사슴 한 마리를 보고 거의 잡을 뻔 했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하루 종일 쫓아다녔지만 결국 사슴을 잡지 못하고 떠돌다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날까지 저물어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위태로운 상황에 겁을 먹고 있는데, 깎아 세운 듯한 골짜기 가운데 작은 길이 있어 앞으로 몇 리를 나아가니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은 12칸이 길게 통해 있었는데, 한 칸만 주방이었을 뿐 나머지는 문도, 창도, 벽도 없이 길게 통해 있었다.

주방에서는 아름다운 한 여자가 저녁밥을 짓고 있었는데, 포수를 보고도 별로 놀라거나 이상히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

포수가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하자 그 예쁜 여자는 정성스럽게 응대하였다.



포수가 젊은 나이의 치기로 시험 삼아 유혹을 했더니 여자 또한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없어 쉽게 관계를 맺었다.

잠시 후 여자가 저녁밥을 내왔는데 반찬은 곰발바닥, 사슴포, 산돼지 고기 등이었다.

포수가 남자는 없느냐고 물어보자 여자는 [사냥 나갔다.] 고 대답했다.



4시쯤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자 여자는 바로 뛰어나가 맞이하였다.

포수가 나가보니 거인이 뜰에 서서 등에 지고 온 짐을 땅에 풀어 놓고 있었고, 그 짐의 크기는 집 한 칸만 했다.

그 사람은 몸도 크고 키도 커서 지붕보다 30m는 더 높이 솟아 있었기에 방 안에서는 도저히 그 사람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거인이 아내를 보며 말했다.

[오신 손님을 잘 대접하였소?]

[예, 잘 대접해 드렸습니다.]



거인이 마침내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사람은 키가 너무 컸으므로 방으로 똑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리부터 서서히 구부려 들어와
그대로 누웠다.

그 누운 길이가 11칸의 방을 모두 채웠다.

그 거인이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누운 것은 그의 앉은 키가 대들보보다 높아 몸을 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인이 포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 하루 종일 사슴을 쫓았지만 잡지는 못하지 않았소?]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저 여자와 관계를 갖지 않았소?]

포수는 [저 거인이 이처럼 신령하고 거대한데다 내가 지은 죄를 이미 헤아리고 있구나!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사실대로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거인이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 내 비록 저 여자를 이 곳에 두고 있지만 음식을 시중들게 한 것 뿐 처음부터 가까이하지 않았다오. 당신이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해도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니 두려워할 필요 없소.]

그리고 거인은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먹을 것을 준비해 오시오.]



여자는 명령을 받들어 조금 전 거인이 메고 왔던 큰 돼지 한 마리를 잘라 큰 그릇에 가득 담아 내왔다.

모두 날고기였고 다른 음식은 없었다.

거인이 고기를 모두 먹고난 뒤, 잠잘 때가 되자 다시 여자에게 말했다.



[저 손님과 함께 자시오.]

여자가 비록 포수와 함께 누워 있었지만, 포수는 의아스럽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밤새 그냥 잠만 잤다.

다음날 아침 다시 그 거인을 보자 그저 사람과 비슷할 뿐, 진짜 사람은 아니었다.



포수의 마음 속에서는 별의별 괴이한 생각이 다 떠올랐다.

날이 밝자 그 거인은 누운 채 여자를 불러 말했다.

[손님의 밥과 내 밥을 같이 차려오시오.]



여자가 명령을 받들어 밥을 준비하여 내왔다.

포수의 것은 밥과 반찬을 익혔으나, 거인의 것은 어제처럼 날고기만 그릇 가득 담겨 있었다.

음식을 다 먹자 거인은 긴 몸을 이끌고 방 밖으로 나왔는데, 마치 긴 이무기가 요동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부터 똑바로 기어나온 거인은 바깥 뜰에 나와서야 드디어 앉고 말했다.

[내가 당신의 관상을 보니 정말 복이 대단하구려. 그대가 어제 이 곳에 온 것 역시 내가 유인했던 것이오. 저 여자는 이 곳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니 두려워말고 데려 가시오. 또 내가 모아 놓은 호랑이, 표범, 노루, 사슴, 곰, 돼지 등의 가죽은 이 곳에 쌓아 놓아도 소용이 없으니 당신에게 주겠소. 그렇지만 당신은 힘이 약하여 많이 짊어질 수 없을테니 내가 힘을 다해서 운반해 주리다.]

거인은 동굴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가죽들을 큰 그물에 담아 어깨에 메고 나오더니 말했다.



[당신은 저 여자를 데리고 나보다 먼저 가다가 어느 곳이던 배가 멈추는 곳에서 멈추시오.]

포수가 안주 항구에 이르니, 그 거인도 산더미 같은 가죽을 등에 짊어지고 그 곳에 도착해서 말했다.

[이것들을 팔면 당신들 집안이 평생 먹고 살 재산을 될거요. 나 또한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소. 닷새 후 소를 두 마리 잡고, 소금을 100석 사서 이 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내가 그 때 반드시 다시 오리다.]



마침내 포수와 거인은 거기서 작별했다.

포수는 배를 빌려 여자와 가죽을 실었다.

여자는 아내로 삼고, 가죽은 팔아서 엄청난 돈을 얻었다.



그 거인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여자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닷새 뒤 포수는 소를 잡고 소금을 구해서 약속한 장소에 나가 기다렸다.

역시 거인이 왔는데, 지난번처럼 등에 가죽을 지고 왔다.



거인은 소는 모두 먹어 치우고, 소금 100석은 가죽을 담아온 그물에 넣어 짊어졌는데,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거인은 또 [닷새 후에 또 소금 100석을 가져와서 이 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라고 말하고 갔다.

포수는 거인의 말대로 소금을 준비했는데, 혹시 소는 거인이 잊어먹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싶어 소 두 마리도 잡아서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다.



거인은 또 가죽을 등에 잔뜩 짊어지고 왔다.

역시 예전처럼 소금을 그물에 넣어서 가져가다, 잡아온 소를 보고는 보기도 싫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만일 소가 먹고 싶었다면 먼저 내가 말했을 것이오. 이치상 이번에는 당연히 먹지 않아야 하오.]



고개를 흔들면서 가는데, 포수가 절실한 마음으로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고 또 오랜 친구도 아닌데 당신은 나에게 예쁜 아내와 큰 재산을 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소를 잡아온 것은 비록 당신의 지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한 입 먹어보지도 않고 가십니까?]

포수가 또 간청하니 거인이 손가락으로 셈을 해보고는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비록 5일의 기한을 늦추더라도 정성을 받아들여야겠구려.]

거인이 고기를 다 먹고 가면서 말했다.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오. 좋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 부디 스스로를 안전히 보호하시오.]



포수가 다시 거인 앞에 꿇어 앉아 길을 막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상대를 대함에 있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입니다. 게다가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마당에 아직 어떤 분인지도 모르겠으니 마음이 아파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어르신은 사람이십니까? 아니면 짐승이십니까? 도깨비십니까? 아니면 산신령이십니까?]

거인이 말했다.



[정해진 법이 있어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대는 내년 단오날에 낙동강 나루터에 가서 기다리다가 초립을 쓰고 청색 도포를 입은 채 검은 말 위에 앉아 있는 미소년을 만나면 그에게 물어보시오. 그러면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거인은 홀연히 가버렸다.

포수는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괴이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슬펐다.



집으로 돌아와 가죽을 모두 팔아버리고, 드디어 평안도 지방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포수는 다음해 단오날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낙동강 나루터에서 기다렸다.

과연 한 미소년이 보였는데, 거인이 말한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포수는 말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하고 그 소년에게 거인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소년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그 분은 우 임금이십니다. 우 임금이 물체로 존재하면 다행이지만 없어지는 것은 불행입니다. 보통 천지의 정기가 변화하여 영웅, 호걸이 됩니다. 임금이 성스럽고 신하가 충직하고 국가가 태평하며 백성이 편안하면,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세상을 구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웅이 되지 못한 정기들이 모여서 우 임금의 모습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우 임금은 깊은 산 골짜기에 몸을 감췄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져서 액운이 나타날 것 같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 때 소금이 꼭 필요하지요. 우 임금이 목숨을 거두면 정기가 우주에 흩어져 수많은 영웅들이 무더기로 태어납니다. 영웅이 태어나는 것에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그가 소금을 달라고 했던 것은 소금을 먹고 죽으려 했던 것입니다. 소금은 첫번째 5일 동안 먹으면 몸이 쇠약해지고, 그 후 두번째로 5일 동안 소금을 먹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중간에 만약 생고기를 먹으면 5일을 더 버틸 수 있게 됩니다. 우 임금이 두번째에 굳이 쇠고기를 사양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 이제 30년 안에 우리나라에 중국 삼국시대처럼 영웅 호걸들이 넘쳐날테니 우리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복은 정말 축하를 받을만 하군요. 우 임금은 당신을 친구로 삼고, 덕 있는 아내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 여자를 범한 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사람이 타고나는 기는 남자는 양기이고 여자는 음기입니다. 그러나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자라고 음기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에게는 양기 중에 음기가 있고 여자에게는 음기 중에 양기가 있어서 그 때문에 교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 임금은 완전히 양기만을 가진 신령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와 관계할 수 없지요.]



포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무척이나 신기해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소년의 이름을 물었다.

소년이 말했다.

[내 이름은 정몽주입니다.]



그리고 소년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갔다.

이후 30년도 되지 않아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웠고, 수많은 영웅들이 연달아 나타났으니 이것은 죽은 우 임금으로 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백성들이 전란에 시달려 고깃덩이가 되는 것이 예삿일이었지만, 그 포수만은 온 집안이 무사하여 죽은 사람 하나 없었다고 한다.



원문 및 번역문 :  http://koreandb.nate.com/life/yadam/detail?s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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