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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

[번역괴담][2ch괴담][700th]임대 별장

괴담 번역 2016. 6. 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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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이야기다.


일단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을 했으니, 구체적인 것들은 밝힐 수 없다.


어딘지 특정지을 수 있는 대부분의 요소는 생략할 작정이니, 감안하고 읽어주길.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나와 친구 5명은 수험 공부 때문에 피로도 쌓였고,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이니 어디 여행이라도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다만 이미 여름방학이 시작된 후였기에, 유명한 관광지에는 죄다 예약이 차 있어서 취소 나는 곳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숙소를 찾는데 꽤 애를 먹었다.


그리고 겨우겨우 킨키 지방의 어느 고원 근처 펜션에 빈방이 남았다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확인했다.


다들 신나게 놀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 없다기에, 바로 거기로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여행 당일, 이른 아침 출발해 오전 중에 숙소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조금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래도 여행 대리업체랑 펜션 관리조합 사이에서 의사전달이 꼬인 것 같았다.


우리는 오늘부터 2박 3일 일정을 잡고 왔는데, 정작 펜션 측에서는 우리가 사흘 뒤부터 묵는 걸로 알고 있던 것이다.




당장 방은 꽉 차서 묵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근처 산기슭에 있는 호텔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냥 여행을 왔다기보다는 방에서 떠들썩하게 밤까지 노는게 목적이었으니 계속 거부했다.




그러자 펜션쪽 사람은 [잠깐 기다려 봐.] 라고 하더니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전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꽤 안절부절하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15분 정도 통화를 하더니, 뭔가 결정된 듯 우리에게 다가왔다.




[근처에 임대 별장이 있는데, 거긴 어때? 우리 잘못이니까 요금은 펜션 방값에서 30% 빼줄게.]


우리는 그럼 됐다 싶어 OK했지만, 뭔가 돌아가는 꼴이 요상했다.


아무래도 그 임대 별장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곳인 것 같았다.




준비와 청소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 우리들한테는 교통비랑 수족관 할인권을 줄테니 거기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쯤에 오라는 것이었다.


그 수족관은 펜션과는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예 다른 현의 대도시에 있는 수족관이었으니까.


우리가 돌아오고나니 이미 저녁 6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준비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니, 완전 버려져있던 데 아냐?]




[가보니까 무슨 폐허만 있는 거 아니냐.]


[왠지 이상하네...]


우리는 온갖 불안한 마음을 말해가며 관리 사무소로 향했다.




펜션으로 돌아오자 아까와는 다른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가 끝났다며, 우리를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숲속 별장으로 안내했다.


거기는 정말 완전 숲속이라,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암만 큰소리로 떠들어봐야 들을 사람도 없을 것 같은 곳이었다.




그 아저씨 말에 따르면 한동안 사람이 오질 않아 정리하는데 시간은 걸렸지만, 전기도 수도도 가스도 다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휴대폰은 안 터지지만 관리 사무소로 연결되는 직통전화가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거라며 계속 설명을 해댔다.


우리는 뭔가 아저씨가 필사적이라 불안해졌지만, 이제 와서 어쩔 도리도 없다는 생각에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별장은 밖에서 봤듯 낡은 서양식 집이었다.


지은지 30년에서 40년은 족히 된 느낌이었고, 내부 인테리어도 그와 걸맞게 꽤 낡아빠진 곳이었다.


다만 한동안 사람이 쓰질 않았다는 말과는 달리, 꽤 깔끔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깔끔했다기보다는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다" 는 느낌이 더 맞을 것 같지만.


우리는 아저씨에게 대충 별장 시설 설명을 들었다.


2층짜리 건물이라 넓고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짐을 풀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바베큐 준비를 하는데, 아저씨가 가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


[여기는 밤이면 곰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한밤 중에는 돌아다니지들 말거라.]


그러면서 밤에 나다니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펜션에서 15분 거리에 있는데 곰이 다닌다고?


다들 의문을 가졋지만, 한밤 중에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위험하니까 겁주는 거라 생각하고 다들 납득한 모양이었다.


첫날은 그렇게 지나가, 저녁을 먹고 숲을 잠시 산책한 후 불꽃놀이랑 게임을 한 다음 2시쯤 잤다.




그날은 딱히 이상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친구 중 한놈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한밤 중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는데, 밖에서 북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뭘 잘못 들었을거라고 넘겼고, 본인도 기분탓일거라고 납득했지만...


그날 밤, 사건이 일어났다.


둘째날, 저녁에 또 고기를 구워먹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할일도 없다 싶어, 우리는 낮에 찾아낸 산길로 담력시험을 하러 가기로 했다.


담력시험 도중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우리는 재미없다고 투덜대며 별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별장 입구에 20대 후반쯤 되는 남자가 서서,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시간은 밤 10시 즈음.


이런 시간에 관리인 아저씨가 올 일도 없을텐데.




[빈집털이라도 온 걸까?] 


우리가 다가갔지만, 그 남자는 계속 문 손잡이만 잡고 서 있을 뿐 돌아보지도 않는다.


발소리나 목소리도 들리니, 도둑이나 이상한 사람이면 도망칠 터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10m 정도 거리까지 접근했는데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뭔가 기분 나빴지만, 리더 격인 친구와 내가 [아저씨, 뭐하는거야!] 라며 다가갔다.


남자의 눈앞까지 갔지만, 그럼에도 그는 움직이질 않았다.




짜증이 났는지 친구는 [안 들리냐!] 라며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그 순간, 나와 친구는 [우아아아아아아악!]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뒤로 꽁무니를 뺐다.


그 녀석의 팔을 친구가 잡아챈 순간, 손목부터 10cm 가량이 마치 고무처럼 쫙 구부러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며 다른 친구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는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초점이 불명확했다.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가까이서 보니 옷도 너덜너덜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가 멍하니 남자를 보고 있자, 남자는 우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듯 그대로 휘청휘청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우리는 너무 놀라 한동안 거기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계속 밖에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별장 안에 들어가 문을 잠궜다.


다들 문이란 문은 다 잠구고 거실에 모여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귀신인가?]


[하지만 팔을 잡았잖아.]




[팔이 어떻게 저렇게 구부러지냐...]


다들 패닉과 흥분에 젖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밖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둥 ... 둥... 둥...]




북소리 같았다.


그 소리는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닫고 귀를 곤두세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소리가 뜰 근처까지 다가오자,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 나머지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거실 커텐을 열고 밖을 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커다랗고 둥근 것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북소리 같은 소리는 그 물체에서 나는 것 같았다.


...둥하고 소리가 나면 구르고, 또 ...둥하고 소리가 나면 멈춘다.


그걸 반복하면서 큰길부터 별장에 이르는 길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크기는 5, 6m 정도는 됐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도 창밖을 보며 움직이질 않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다들 다가왔다가 "그걸" 보았다.


한동안 다들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정체가 뭔지도 알 수 없었는데다, 누구도 입을 열지를 못해 계속 그것만 바라봤다.


그러던 도중, 그것이 꽤 가까이 와 현관 앞까지 다가왔다.


현관에 달린 방범용 라이트가 켜진다.




그 순간, 나는 [뭐야, 저거! 진짜 뭐냐고!] 라고 소리치며 커튼을 닫았다.


커튼을 닫기 전, 순간 불빛에 비친 그것의 모습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무수한 사람의 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들이 아까 전 봤던 남자처럼 침을 흘리며, 초점 없는 눈으로 마구 뒤엉켜 커다란 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몇십명의 사람이,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친구들도 모두 그 사람 덩어리를 봤기에, 다들 공포에 질려 아무 말 못하고 거실에 모여 벌벌 떨 뿐이었다.




[어떻게 된거야...]


[저게 뭐지...]


불안한 마음만 가득이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니, 북소리 같던 소리가 들려오질 않았다.


그게 돌아간 것인지 확인할 용기가 나질 않아, 우리는 계속 거실 가운데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관에서 [쾅! 쾅! 쾅! 쾅! 쾅! 쾅! 쾅!] 하고 격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공포와 불안 때문에 패닉에 빠져 귀를 막았다.


다른 녀석들도 귀를 막고,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참아내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이번에는 건물 여기저기서 [쾅! 쾅! 쾅! 쾅! 쾅! 쾅! 쾅!] 하고 창문과 벽을 수많은 사람이 미친 듯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지, 한 친구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전화하자. 관리 사무소 직통 전화 있다며. 빨리 전화해서 살려달라고 하자고!]


우리는 그제야 전화가 있었다는 걸 떠올리고, 서둘러 현관에 있는 전화로 달려갔다.




두세번 신호음이 울리고, 별장까지 우리를 안내해줬던 아저씨가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에게 필사적으로 사정을 설명하자, 아저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설마, 아직도 나오다니...]




그리고는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해줄테니까, 거실에 불단이 있지? 거기 부적이랑 셀로판 테이프가 있을거야. 그 부적을 현관문에 붙이고 기다리거라.]


우리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갔지만, 딱히 방법도 없고 해서 거실로 돌아와 불단을 찾기로 했다.




불단은 방 구석 천장 근처에 있었다.


의자를 써서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지폐랑 테이프가 있었다.


우리는 그걸 가지고 서둘러 현관과 거실 입구, 창문에 부적을 붙였다.




창문에 부적을 붙일 때, 최대한 밖을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한순간 밖으로 시선이 가버렸다.


밖에는 창백한 팔이 여럿,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팔 너머에는 아무리 봐도 팔의 위치와는 맞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 역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나는 밖에 있는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무서워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몇시간 정도 지났을까.




밖에서 해가 밝아올 무렵에야, 벽과 문,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아직 그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 있자 멀리서 차가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는 뜰에서 멈췄고, 여러 사람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이봐, 괜찮아?] 하는 사람 목소리까지.


우리는 [살았다...] 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처음 펜션에서 만났던 아저씨와 안내해 준 아저씨, 그리고 다른 아저씨가 셋 더 있었다.


다들 미안해하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다. 이제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어. 사정은 설명해 줄테니 어서 짐을 정리해서 오렴. 쓰레기 같은 건 내버려둬도 되니까.]




우리는 짐을 챙겨 별장에서 빠져나왔다.


차를 타고 우리는 신사로 갔다.


함께 왔던 세 사람은 그 신사 관계자인 듯 했다.




우리는 마음이 놓이고 긴장이 풀렸다.


살아남았다는 기분도 강했지만, 그 이상으로 분노도 치솟았다.


[왜 저런데다가 사람을 묵게 하는건데요!]




그러자 신사의 신주 같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그곳은 쇼와 40년대까지는 평범한 숲이었다고 한다.


관광기 개발이 시작되면서 40년대 말부터 사람들이 들어오길 시작했다는 것이다.




개발은 순조로이 진행됐지만, 그 별장을 지은 쇼와 50년대 전반 무렵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별장이 원인인지, 개발 그 자체가 원인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그 북소리와 사람 덩어리가 그 무렵부터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래 별장 주인과 그 다음 별장을 산 사람은, 거기서 묵던 도중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 탓에 매각되어 지금처럼 관리조합 소유의 임대 별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몇번이고 그 사람 덩어리는 나타났고, 딱히 피해자는 없었지만 목격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만이 이어졌기에 신사에서 10여년 전 액막이를 했었다는 것이다.


액막이 후에는 별장은 방치해뒀지만, 청소나 정비 때문에 별장에 들렀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슬슬 괜찮지 않겠나 싶어 우리한테 빌려줬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젯밤 나타났고.


우리는 완전히 피해자 입장이었으니, 불만을 계속 늘어놨다.


펜션 관리인은 교통비랑 식비를 모두 지불하고, 별장 이용료도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다음에 이쪽으로 여행을 오면 방값도 할인해 줄테니,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면 안되겠니?]


우리는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경찰에 신고해봐야 믿어주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로 했다.


직접 겪은 사건은 이게 다다.




작년, 할인해준다는 말이 떠올라 다시 그 지역으로 여행을 갈까 싶어 전화를 했었는데, 그 별장은 해체되어 지금은 빈 땅만 남아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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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


나는 울 수 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와 기억 속의 여자가 보낸 슬픈 과거.




내가 모르던 가족의 이야기.


모든 것이 가슴에 꽂혀 눈물이 흘러넘친다.


나는 그저, 그저 슬펐다.




[그럼 이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멀어져간다.


[이제부턴 어쩔 생각이야?]




내 질문에 남자는 발을 멈춘다.


[나한테는 처음부터 수호령 따윈 없었어. 내 몸은 스스로 지켜왔지. 하지만 이제 능력은 봉인한다. 내가 너를 괴롭혔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괴로워할 차례지. 이제 너와 다시 만날 일도 없어. 내가 갈 곳은... 여동생과 아버지가 기다리는 지옥 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레스토랑 화장실에 돌아와 있었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씻으며, 나는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갈 곳은... 여동생과 아버지가 기다리는 지옥 뿐이야."




그 가족에게 구원이란 없는걸까.


한번 길을 벗어난 인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걸까.


나는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나는 가족이 기다리는 테이블로 향했다.


행복한 광경이다.


그 가족은 이런 광경을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것일까.




내 가슴은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다.


[야, 뭘 멍하니 있는거야.]


누나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린다.




[아, 미안해. 뭐 좀 생각하느라.]


[아까 전부터 계속 휴대폰에 전화가 오고 있잖아. 받으면 안되는 전화인가 싶어서 말은 안했지만...]


나는 휴대폰을 보았다.




부재중 전화가 5통이나 찍혀 있었다.


존이었다.


무슨 일이람.




나는 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씨?]


[그래, 무슨 일이야, 존? 전화 여러번 했던데, 급한 일이라도 있어?]




[아뇨, 내가 형씨한테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닌데요. 사장이 빨랑 사무소로 튀어오래서.]


[사장이?]


나는 전화를 끊고, 가족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레스토랑을 뛰쳐나왔다.




사장을 기다리게 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도 없다.


전력으로 달려, 나는 사장이 기다리는 탐정 사무소에 겨우 도착했다.


[무... 무슨 일로... 헉... 헉... 부르셨나요, 사장... 헉... 헉...]




사장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끈다.


[헉헉대지마, 기분 나쁘니까! 호흡 좀 정리해, 이 멍청아!]


내 눈앞에는 물 한컵이 쓱 나온다.




[형씨, 마셔요.]


존이었다.


[아... 고마워, 존.]




존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존이 준 물을 단번에 마시고, 나는 호흡을 정돈했다.


[이제 됐냐? 우선 이 서류 좀 읽어봐.]




사장이 건낸 서류를 본다.


거기에는 "내정 통지서" 라고 적혀있다.


[이게... 뭔가요, 사장?]




난데없는 채용제안에 나는 당황했다.


[보면 모르겠냐? 너를 우리 회사에 채용하겠다고. 너 아직도 실업자지? 내가 너를 고용해주겠다 이말이야.]


사장의 말에 놀라, 나는 존을 바라봤다.




존은 웃는 얼굴로 따봉을 날렸다.


[네? 아니, 감사하긴 한데! 근데... 뭐, 뭐가 어떻게 된건가요, 사장? 갑자기 이게...]


[당황스러운가 보네?]




사장은 요염하게 미소짓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네 적이었던 그 남자가 부탁한 거야.]


[그 남자가요?]




나는 놀랐다.


그 남자가 사장한테 무슨 부탁을...?


[나도 놀랐어. 우리 회사 계좌에 갑자기 천만엔을 보내더니, 너를 채용해달라고 사정사정하더라. 그나마 그게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한건지... 아니면 네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네. 뭐, 천만엔 정도 있으면 아무리 쌩신인이라도 일류까지 키워줄 수 있어. 나는 바로 OK했고. 이제 선택은 너한테 달렸지.]




나는 망설임 없이 [부탁드립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너한테는 영능력 재능이라고는 코딱지만큼 밖에 없으니까, 탐정으로 고용할거야. 먼저 말해두지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야. 각오는 됐겠지?]


그렇게 말하며 사장은 미소지었다.




존도 웃고 있었다.


나는 탐정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탐정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내 앞에는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고객의 이야기다.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 가볍게 털어놓을 수는 없지.




그 소동을 거치며, 나는 강해진 것 같다.


지금도 때때로 그 여자, 나나코를 떠올린다.


그녀는 아직도 어디선가 괴로워하고 있을까?




만약, 다시 그녀와 만날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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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말이라니?]


남자는 나를 비웃듯 미소짓는다.


[걱정마라. 그 오카마 사장한테는 허락을 받았으니까.]




남자는 내 가슴에 주먹을 댔다.


그러자 남자의 주먹은 어떤 감각도 주지 못하고, 그대로 내 몸을 통과한다.


[봐. 내가 너한테 뭔가 해를 끼칠 수는 없어. 그 오카마는 너를 완전히 지키고 있고, 내 능력의 근원도 그 오카마가 쥐고 있다고. 지금 나는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야.]




나는 뒷걸음질쳤다.


[나한테 뭘 들려주고 싶은데?]


남자는 어디에선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아까 말했잖아. 사건의 전말에 관해서 말야. 어째서 나랑 여동생이 너를 노렸는지, 왜 죽이려고 했는지... 너한테는 모든 걸 알 권리가 있어.]


확신은 없었지만, 남자가 나를 해치려 하는 건 아닌 듯 했다.


확실히 나도 이 기나긴 소동이 시작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 마음 한구석의 안개를 없애고 싶었다.


[좋아. 그럼 들려줘. 사건의 전말이라는 걸.]


[그래야지. 안 그러면 괜히 찾아온 보람이 없잖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담배를 바닥에 버린 후 발로 짓이겨 끈다.


[처음 널 만난 건 네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타루에 왔을 때였어. 투어였나? 뭐 그런 걸 하러 왔었지? 나는 우연히 오타루에 일이 좀 있어서 와 있던 터였고. 바로 그때 여동생 나나코가 너에게 주목한거야. 왜냐하면 너는 나나코에게 부러운 존재였으니까. 마치 빛을 보고 끌리는 날벌레들처럼, 나나코는 너한테 완전히 빠져서 씌어버린거지.]


나는 곤혹스러웠다.




[왜 난데? 나한테서 뭐가 그렇게 부러웠길래?]


[네 안에서는 따뜻한 가족끼리의 유대감이 느껴졌어. 그게 나나코한테는 진심으로 부러웠던거야. 우리 가족은... 말하자면 똥통 같은 존재였지. 특히 나나코는 쓰레기 같은 아버지한테 시달렸어. 입에 꺼내기도 역겨운 일이지. 친부가 자기 딸을 성노리개로 삼다니. 게다가 그 자식은 극단적인 새디스트였어. 정말 심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될 정도였지.]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도 인간쓰레기였다. 괴로워하는 여동생을 보면서도 모른 척 했으니까. 어머니는 옛날옛적 돌아가셨고. 여동생 입장에서는 의지할만한 사람이라고는 나 뿐이었을거야. 하지만 난 그걸 무시했어. 솔직히 말해 귀찮았으니까. 나한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고. 나나코한테는 절망적이었겠지. 그 녀석, 혼자 경찰서를 찾아가 살려달라고 빌기까지 했어.]


[자, 잠깐 기다려 봐!]


나는 남자의 말을 막았다.




[왜, 기분 나쁜가? 그렇겠지. 이런 똥통 같은 더러운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나 그럴테니.]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까 전까지 사람을 비웃듯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은, 이제 깊은 바다처럼 차갑게 식어있다.




나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남자의 표정에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괜찮을까? 계속 말해도?]


나는 아무 말 없이 동의했다.




가능한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나나코는 경찰한테 도움을 구했지만 모두 무시당했어. 아버지는 인간 쓰레기였지만 정신과 의사로서는 엘리트였거든. 경찰과도 협력관계가 있었고, 경찰 간부랑도 사이가 좋았지. 나나코를 만난 경찰관은 모두 인격적으로 나나코를 부정하고 되돌려보냈어. 더욱 절망한 끝에, 나나코는 결국 마음에 병이 생겨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 그것도 아버지 병원에.]


남자는 연기를 들이마시고 말을 이어가다.




[거기서도 나나코는 혹독한 취급을 당했어. 경찰한테 신고해 자신을 배신하려 했다며, 아버지는 나나코를 용서하지 않았지. 담당 간호사에게 명령해 매일 나나코를 때리게 했어. 믿을 수 있냐? 그걸 시킨 게 친아버지라는 걸. 그리고 나나코는 자살했어. 어디선가 가져온 로프로 목을 매서. 그제야 나는 처음으로 울었어.]


아무 말 없이, 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의 가족과 나의 가족.




마치 정반대에 놓인 가족처럼 느껴졌다.


[나나코는 자살한 후, 이 세상을 떠돌다 내게 왔어. 나나코에게 재능은 있었지만 나같은 능력은 없었지. 그러니까 내게 복수를 하겠다며 말을 걸어온거다. 협력하라고. 거절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나나코가 죽고 나서야 깨달음 감정 앞에 저항할 수 없었어. 나는 나나코를 사랑하고 있던거야. 완전히 제멋대로인 소리지만.]


잠시 말을 쉰 후, 남자는 입을 열었다.




[나는 나나코를 도와 아버지와 경찰관, 간호사를 죽였어. 그걸로 나나코가 만족할 줄 알았지. 하지만 틀렸어. 나는 영혼에 관해 어중간하게 알던 것에 불과했던거야. 아무리 복수를 이루어도 이미 나나코는 죽은 존재인데. 내 눈앞에 나타난 악령이 된 나나코는, 나나코이면서도 나나코가 아니었던거야. 단순한 정념의 덩어리였지. 그게 만족해서 사라질리가 있겠나. 나는 낙담했어. 아버지까지 포함해 셋이나 죽였는데, 그저 나나코의 형태를 한 악령이 늘어났을 뿐이니까. 바로 그때 네가 나타난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한 복수의 감정만을 가지고 있던 나나코였는데, 너한테는 매력을 느꼈어. 나한테는 놀라운 일이었지. 혹시나 하고 희망마저 느꼈고. 하지만 나나코는 죽었잖아. 평범하게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리 없지.]




[그래서 나를 죽이려 했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쳐!]


[그래,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소리지. 하지만 그때 나한테는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어. 너와 함께 있으면 나나코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냥 죽이는 거라면 너는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었을텐데? 왜 서두르지 않았지? 왜 그렇게 어렵게 빙빙 돈거냐고?]


나는 남자에게 따졌다.


남자의 표정은 그대로다.




[단순히 그냥 죽여봐야, 영혼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아. 곧바로 사라져버리지. 괴롭히고, 궁지에 몰고, 불합리하다고 느끼게하면서 비로소 영혼은 강한 정념을 가지게 되고, 죽어서도 이 세상에 머물게 되는거다. 나는 네가 영원히 나나코와 함께 하길 바랐으니까.]


남자의 말을 듣자, 온몸이 벌벌 떨렸다.


[홋카이도에서 돌아온 후 너는 교통사고를 당해 큰 상처를 입었지? 그것도 내가 한거다. 너희 회사 인사부장 뇌속에 침입해 너를 해고시켰던 것도 나고. 왼팔만 낫지를 않았지? 그것도 내가 했다. 그 외에도 너한테 이것저것 괴롭도록 온갖 장치를 쳤었지.]




나는 떨리는 주먹을 억눌렀다.


[때려도 괜찮아. 이 지경인데도 참는건 월급쟁이하면서 생긴 슬픈 근성 때문인가?]


나는 남자의 왼뺨을 온힘으로 때렸다.




남자는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뭐... 한대 정도는 맞아줘야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앉았다.




나는 분노 때문에 온몸이 뜨거워진 기분이었다.


[진정하라는 건 무리겠지만,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다오. 나는 너한테 감사하고 있어.]


[감사라고?]




[마지막에 너와 나나코가 함께 있었을 때... 그때 나는, 오카마의 부하놈한테 제압당해 바닥에 짓눌려 있었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보라고 오카마가 시켜서 너희를 보고 있었지. 그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어. 기적을 봤으니까. 단순한 복수의 정념이었던 나나코는 거기 없었어. 너도 봤지? 그 아이가 진짜 나나코야. 생전의 나나코였다고. 그 아이는 그냥 연약한 여자아이였어. 그게... 진짜 나나코였다고. 나는 울었어. 기적을 보면서, 그저 아이처럼 울 수밖에 없었어. 처음에는 빛을 보고 끌리는 날벌레처럼, 나나코는 그저 네게 매력을 느꼈을 뿐이었어. 하지만 어느샌가 너를 정말로 좋아하게 되어버렸던거야.]


나는 떨리는 주먹을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너도 희미하게는 깨닫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깊은 바다 같은 차가움은 사라져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 여자의 얼굴을, 나는 떠올렸다.


깨닫고 보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울어주는거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너는 정말 상냥하구나. 너를 그렇게까지 괴롭힌 나나코를 위해 울어주다니. 너는 정말 완고한 놈이었어. 뭘 하나 할때마다, 나는 네 용기에 감탄했었으니까.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그런거겠지. 지금이라면 나나코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우리는 사랑에 굶주려 있던거야. 정말로 네가 부럽다. 나나코는 살아있을 적, 한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어. 이런 모습이 아니라 나나코가 살아있던 때 너와 만났더라면... 너처럼 나에게도 용기가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텐데...]




나는 울었다.


그 여자를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그 여자는 적이다.




그 여자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나나코도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어. 천국에는 갈 수 없겠지. 나나코도 지옥에 떨어졌어. 그 녀석은 다시 태어나더라도 또 괴로운 인생을 보내야만 하겠지. 하지만... 만약, 네가 그 녀석을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남자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등을 돌린다.


[...미안하다. 제멋대로인것도 정도가 있지...]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떨군다.


그 등에는 슬픔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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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맥스.]


존은 그렇게 말했다.


사장이 적의 핵심을 제압하면, 존이 내 제령을 맡는다.




마침내 그 여자와의 싸움도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나는 토할 것 같은 속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밥을 집어삼켰다.


살고 죽고를 떠나, 그 여자한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저녁, 존은 나를 침대에 눕게 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마음만은 패배하지 말아주세요, 형씨.]


존의 말에 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은, 결코 저런 놈들에게 지지 않는다.


존은 시계를 보고 심호흡하고, [슬슬 때가 왔네요.] 라고 말한다.


[형씨, 조금 있다 내 휴대폰이 울리면 그게 신호에요. 나는 단번에 형씨 안으로 침입할 거에요. 아마 후견인을 잃은 여자는 미친 듯 날뛸겁니다. 내가 형씨 깊은 곳까지 다다를 때까지 꼭 버텨주세요.]




나는 존의 손을 잡았다.


[믿고 있을게.]


존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존의 휴대폰 벨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처음 보는 양옥집 안 나무의자에 묶여있었다.


눈앞에는 아래로 쭉 뻗은 계단이 보인다.




나는 건물 안을 돌아보았다.


꽤 오래된 느낌이다.


양옥집 안은 꿈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이전보다는 약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존이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 뒤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미치광이 여자인가?]




나는 물었다.


그러자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천천히 내 목에 팔을 감는다.


나는 확신했다.




미치광이 여자다.


[네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제와선 아무래도 좋아. 나는 너한테서 도망칠 생각만 했어. 정말로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친구가 생겼어. 이제 너 따윈 무섭지 않아.]


미치광이 여자는 나를 강하게 껴안았다.




[함께 있고 싶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살아있어. 너는 죽었고. 이 차이는 절대 메워지지 않아. 너도 너 나름대로의 욕망이 있겠지만, 나는 거기 부응할 수 없어. 나는 살고 싶으니까.]




나와 미치광이 여자 사이에는 정적이 흐른다.


여자는 나를 껴안은 채, 조용히 울고 있었다.


울고있는 여자에게 이전까지 느껴지던 기분 나쁜 느낌은 없었다.




이전과 목소리는 똑같다.


확실히 미치광이 여자다.


하지만 불가사의할 정도로 이전과는 인상이 다르다.




이상했다.


후견인을 잃어 미쳐 날뛸 거라는 말과는 달리, 여자는 내게 달라붙어 조용하게 울고 있을 뿐이다.


[너... 혹시...]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차마 그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양옥집 현관이 조용히 열린다.




거기에는 존이 있었다.


[형씨, 마중 나왔어요.]


존은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올라, 미치광이 여자를 노려봤다.




미치광이 여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존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아래에서 멈춘 여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전까지 봤던 삿된 느낌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녀처럼 안타깝고 슬픈 표정이 내 눈에 남았다.




여자는 돌아서서 현관 너머로 사라져간다.


[어떻게 된 거지, 저 여자...]


나는 중얼거렸다.




상상했던 전개와는 너무나도 다른 끝맺음이었다.


[그 여자의 후견인도, 다른 세 악령들도 사라졌으니까요. 더 이상 승산은 없을거라고 여겨 단념한거겠죠. 그 여자는 이제 형씨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이겼어요.]


존은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나는 기쁘지가 않았다.


존은 의자에 묶여있던 나를 풀어주었다.


의자에서 일어서자, 내 몸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가벼웠다.




나와 존은 서로 부축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현관 너머에는 눈부신 빛이 쏟아지고 있다.


마치 희망의 빛처럼.




우리는 현관 너머로 나아갔다.


그때, 시야 한구석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돌아보니 거기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정말로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보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아이처럼 통곡했다.


정말로 아이처럼...




[형씨.]


나는 존이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20층 호텔방.




우리는 돌아와 있었다.


[아... 긴 악몽을 꾼 기분이야. 하지만... 마지막은 다행이었어... 존, 고마워.]


[아뇨, 저뿐만이 아니에요. 사장도, 아버님도 고생하셨죠. 물론 형씨도요. 그 미끼 작전 때, 형씨는 적에게서 벗어나려 빌딩에서 뛰어내렸었죠. 아무리 현실이 아닌 걸 알더라도 그런 용기를 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적의 핵심을 눈앞에 두고서요. 모든 건 형씨의 용기있는 행동 덕이었어요.]




[아니, 나는...]


나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혼자였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시덥지 않은 걸 생각하고 있다.


[존, 그 여자 말인데...]


존은 내게 커피를 내밀었다.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아요. 마지막엔 나도 그 여자한테 침입했었으니까... 하지만 신경쓰지 마세요. 전부 끝났습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에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뿌리치며, 나는 야경을 눈에 새겼다.




그 후, 나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고열이 올라 병원에 급히 입원했다.


사흘 정도 고열에 시달린 후, 나는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접혀있던 왼팔 뼈도 의사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나아졌다.




최악이었던 컨디션도 완전히 돌아와, 나는 이전처럼 건강한 몸을 되찾았다.


입원한 도중, 존이 여러번 문병을 와 주었다.


정말 좋은 녀석이다.




최악의 나날 속, 존과 만날 수 있었던 것만큼은 신에게 감사하고 싶다.


이후 나는 재차 사장에게 감사를 전하러 갔다.


사장은 변함없이 히스테릭해서, 내가 감사를 전하자 [말로 하지말고 돈을 줘, 그럼!] 이라고 대꾸했다.




예상대로였다.


사장은 내게 [꼭 아버님 성묘 가라.] 라고 말했다.


나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 무덤에 성묘를 갔다.




오랜만에 찾은 아버지의 묘비는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청소도구를 꺼내, 정성스레 아버지 묘비를 닦았다.


[가족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요.]




그런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닦았다.


어머니와 누나는 필사적으로 묘비를 닦는 나를 바라보며, 왜 그리 열심인지 의아해했다.


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도 청소도구를 건네주고, 묘비를 닦아달라고 부탁했다.




기분 탓일까.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후, 우리는 가족끼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간만의 외식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화장실에 갔다.


문을 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거기는 빌딩 옥상이었다.


깜짝 놀라, 나는 주변을 돌아본다.


시선 끝에는 그 남자가 있었다.




지금껏 있었던 사건의 핵심, 거구의 남자가 펜스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어.]


가볍게 인사하고, 남자는 내게 다가온다.




[가까이 오지마!]


나는 고함쳤다.


[하하, 무서워라. 그렇게 고함치지마. 너한테 뭘 어쩌려는 생각은 없으니까.]




남자는 계속 내게 다가온다.


[무슨 작정이지? 도대체 뭐하러 온거야!]


고함치는 나를 무시하고, 남자는 내 눈앞에 섰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이번 일의 전말이 알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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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온힘을 다해 도망쳤다.


닿으면 죽는다는 도플갱어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믿고 의지할 존도 없다.




주변에는 온통 적뿐이다.


좁은 빌딩 옥상에서, 도망갈 곳이 있을리 없다.


나는 출입문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있었다.


손잡이는 꼼짝도 않는다.


뒤에서 또다른 내가 다가온다.




저놈에게 닿으면 나는 죽는다.


[이봐, 이제 됐잖아! 시간 끌지 마라!]


거구의 남자는 초조한 감정을 드러내며 고함친다.




도플갱어가 다가온다.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방법을,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옥상 펜스를 넘었다.




[이건 꿈이야. 꿈. 현실이 아니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눈앞에는 나락의 광경이 펼쳐진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건물은 높았다.


뒤를 돌아보자, 도플갱어가 서서히 걸어오고 있다.


그때, 갑자기 미치광이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나는 분노가 폭발하는 걸 느꼈다.


살아남을테다.




나는 절대 죽지 않아.


반드시 살아남을거야.


나는 소리를 질렀다.




뛰어내릴테다.


여기서 뛰어내릴거야.


[이봐! 분명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하지만 떨어지면 꽤 아플텐데? 견딜 수 있겠냐?]




거구의 남자는 내게 묻는다.


[너만은 절대 용서 못하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격통.


그 아픔을 설명할 단어는 이것 밖에 없을 것 같다.


빌딩에서 뛰어내린 나는 다리부터 떨어져, 지면에 머리를 부딪혔다.




마치 개구리처럼 비참한 꼴로 바닥에 달라붙는다.


내 주변에는 붉은 피가 퍼져간다.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끔찍한 고통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다 죽어가는 개구리가 경련을 일으키 듯, 내 몸은 조금씩 흔들렸다.


내 시야 끝에는, 건물 출구로 나오는 도플갱어의 모습이 보였다.




[오지... 마...]


곧 꺼질 듯한 촛불이 된 것 마냥, 나는 중얼거렸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가차없이 도플갱어는 내게 다가와, 내 눈앞까지 온다.


도플갱어가 나를 내려다본다.


몸은 아픔에 지배당해, 더 이상 도망조차 칠 수 없다.




나는 도플갱어를 죽어라 노려봤다.


나 자신에게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도플갱어는 주저 앉아, 내 등에 손을 얹고 [찾았다.] 라고 말했다.




녹아들듯, 도플갱어는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완전한 동화.


놈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감각.




도플갱어는 내게 녹아들어, 내 마음을 지배한다.


그 순간, 존이 말했던 "도플갱어한테 닿으면 무조건 죽는다" 는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온몸에 암흑이 펼쳐진다.




나는 끝났다.


끝나버렸다.


마음이 찢어질듯한, 어두운 심연에 나는 내던져졌다.




내 안에서는 썩어버린 감정만이 넘쳐흐른다.


나는 몽롱해졌다.


살아봐야 희망 따위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있어봐야 어쩔 수 없는 걸.


죽는게 낫겠다.


그저 죽고 싶었다.




정말 그것 뿐이었다.


뭐라도 좋아.


죽을 수 있다면, 로프던 휘발유던 내게 던져줘.




자살하고 싶어.


자살하게 해줘.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나를 자살시켜 줘.


나는 도플갱어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었다.


[형씨.]




아침, 존이 불러 나는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호텔방이다.


여기는 어제 내가 묵은 호텔방이다.


나는 온몸을 만져보았다.




어디에도 상처는 없다.


존이 커피를 내민다.


[형씨, 괜찮아요?]




나는 분명 도플갱어에게 지배당했었다.


하지만 지금 죽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살아난건가?




상황파악이 전혀 안됐다.


[혼란스러운가보네요. 형씨, 이제 괜찮아요. 겨우 나한테도 보였어요. 저놈이 형씨의 적이었군요.]


존의 말에 나는 놀랐다.




[무슨... 소리야, 존?]


[형씨한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일시적으로 방화벽을 약화시켰었어요. 아니나다를까, 적의 핵심이 바로 형씨한테 침입해오더군요. 목적대로였습니다.]


나는 존이 말하는 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일부러 그놈을 유인했었다는거야?]


[네. 형씨는 미끼가 되어주신겁니다. 물론 형씨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어요. 그 때문에 대책을 세워두고 함정을 판거구요.]


뭐가 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커피를 한모금에 들이켰다.


[냉정하게 얘기해 보자, 존. 나한테 뭘 했다는건데? 설명해줘. 뭘 했어?]


존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적은 형씨를 잡으려고 도플갱어를 썼어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죠. 상당한 실력자라는 추론은 여기서 나온거구요. 하지만 사장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갔습니다. "적은 자신과 동등한 능력자와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 라는 추리를 한거죠. 형씨를 향한 음습하고도 과도한 공격을 통해, 힘은 최상급이지만 경험은 부족한 인간일 거라고 생각한거에요. 그래서 함정을 친거구요.]


존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이 형씨의 도플갱어를 쓴다면, 우리도 형씨 도플갱어를 만들어내면 되는거죠. 적은 설마 자기말고도 도플갱어를 부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할테니까요. 아마 전혀 의심하지 못했을겁니다.]




[도플갱어? 뭐가? 어떤게? 뭐가 도플갱어였다는거야?]


나는 다시금 존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형씨가 그 빌딩 옥상에 불려간 시점에서, 이미 형씨는 사장이 만든 도플갱어였어요. 의식이 없는 인형이라면 의심을 받을게 분명하니 반 정도만 형씨 의식을 불어넣었고요. 형씨한테는 끔찍한 일이었겠지만, 그 덕에 나랑 사장이 놈을 지켜보고 있어도 들키지 않았어요. 이제 희망이 보입니다. 사장이 적 핵심을 추적하기 시작했어요. 여기서부터는 본업인 탐정 일이 빛을 보는거죠.]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러면 좀 사전에 말을 해주던가.




낮, 나는 한장의 식빵을 앞에 두고 곤란해하고 있었다.


한동안 변변한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도, 식욕은 전혀 솟지를 않았다.


한장의 식빵조차 지금 내게는 너무 무겁다.




[저기, 존. 아까 "사장이 적 핵심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고 말했잖아.]


스파게티를 빨아들이며, 존은 대답한다.


[네. 사장은 아침 비행기로 홋카이도에 갔어요.]




[홋카이도?]


[사장은 그 남자한테 침입해서, 어디 있을지 알아냈거든요. 아마 그 남자도 지금쯤은 거품물고 있을겁니다. 사장한테서는 절대 도망칠 수 없어요.]


[저기, 존. 그 녀석은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인거야? 저런 걸 사람이 할 수가 있는거야?]




존은 스파게티를 먹어치우고, 카레라이스에 손을 뻗는다.


[저도 놀랐습니다. 사장 말고 저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저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니 정말 무서워지네요.]


존은 카레라이스를 먹어치우고, 돈까스 덮밥에 손을 뻗었다.




이상하게 존은 계속 먹기만 한다.


[야, 존. 너 너무 먹는거 아냐?]


식욕이 없는 나로서는, 존이 먹어치우는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앞으로는 체력 싸움이라니까요. 먹어둬야만 합니다. 저녁까지 사장이 적 핵심을 제압할거에요.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클라이맥스에요, 형씨.]


그렇게 말하며, 존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식빵에 버터를 발라 먹기 시작했다.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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