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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

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 3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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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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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4년여 전 즈음의 일인 것 같다. 아니, 5년? 어쨌건 망아지처럼 날뛰지만 않는다면야 비교적 좋은 날씨라 취급할 수 있는 그런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도심 생활을 마무리 짓고선 경기도 외곽 산허리에서 똬리를 틀던 차였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싶으면 읽고 글을 쓰고 싶으면 쓰는 신선놀음 짓에 기꺼워하고 있었다.


한밤중, 산허리를 맨 소나무 끝 가지 위 애처로이 두 발을 디딘 뻐꾸기의 울음 새로 책장을 넘긴 일이 당신은 있는가? 아직 없다면 앞으로도 그러길. 그건 보다 적은 이들이 누렸으면 하는 이기적인 기쁨의 하나이니까.


그날 해가 꺼져가는 오후 녘. 툇마루에 놓인 원목 흔들의자 위로 궁둥짝을 방정맞게 도리질하다 중간 즈음 읽던 책을 잠시 덮고선 맞은편의 산마루를 똥폼스레 바라보던 때였다.



냐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던 공간과 시간 복판에서 자그마한 얼굴을 치켜든 고 씨가 잘록하게 빠진 허리를 네 다리로 이며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는(남자는 언제든 상대가 여자인지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마치 한 동작인 양 툇마루로 깡총하게 올라서선 내 바로 앞 장판 떼기 위로 사뭇 교양 머리 있는 차림새의 앉음 모양을 취했다.



..누구니?



그녀는 올바른 대답 대신 두어 차례 내 언어를 모방한 울음을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한층 빳빳이 추켜세웠다. 그 모방이 적잖이 출중했던지라 나는 그 뜻을 받들어 곧 주방에서 뒤져온 마른 멸치 움큼과 냉수 한 잔을 정중히 그녀 앞으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제 내가 자기에게 빠졌다는 것(실은 첫눈에 그랬다만)을 과신한 양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묵묵히 주안상을 비워댔다.


용무를 마친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진 내 얼굴을 흘끗 훑더니(남자의 미소는 그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법이다) 엎드린 자세로 주저앉아선 고개를 꾸벅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한 나는 낮잠이 이어진 1시간여 동안 그녀의 몸을 탐할 수가 있었다. 그날 졸음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휑하고 일어나 우아한 발놀림으로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숨겼다.


다행히 그녀 또한 내가 제법 마음에 찼는지 그러한 입궐은 밤공기가 제법 싸늘해질 때까지 매일같이 이루어졌다. 서늘해질 때까지. 계절이 넘어가던 무렵 그녀는 갑작스레 발길을 끊었고, 이제 툇마루엔 실의에 찬 남자 하나가 의자 위로 하릴없이 그 몸뚱어릴 흔들어 젖히며 공허히 산마루를 응시하매 연정을 달랠 뿐이었다.


그러던 의자 위로 남자의 옷차림이 달라졌을 무렵이었다.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그녀가 다시금 툇마루를 찾았다. 그 꽁무니로 자신의 서늘한 눈매를 똑 닮은 새끼 둘을 동반하고서.


이제 우리 둘은 달라진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그녀는 두 아이가 서로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동안 서둘러 밥상을 비우곤 잠시 구석에서 짧은 낮잠으로 고단함을 쫓아야 했고, 그런 그녀를 위해 나는 놀다 지쳐 의자 위로 고꾸라진 아이들을 재우랴 조심스레 의자 머리를 흔들어대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한낮 동안 내게 탁아를 부탁하곤 외출을 할 수가 있었으니 그녀에겐 퍽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몇 달간 이를 몹시도 못마땅해하던 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인접한 마당의 진도(잡종) 씨였다. 그는 본디 대단히 순박했던 이였으나 언젠가 줄을 풀고서 산 아래 동네의 닭 따위를 해한 연유로 짧아진 쇠줄 아래에서 고 씨 가족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허나 그의 목줄을 다시금 늘어뜨릴 수만도 없었다. 이미 그가 한 차례 피 맛을 본 뒤였기 때문이겠다. 그는 이제 사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 짓는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다. (핏속에 새겨진 기호 위에서 누군들 자유로우랴) 물론, 난데없이 사랑방을 꾀고 앉은 고 씨네 새댁이 그의 마음에 찰리 만무했다.


어느 날이었다. 마당을 나온 나는 진도 씨네 집안이 텅 빈 것을 보곤 그의 행방을 쫓아 사방팔리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끝내 그의 행방을 포기하고선 떨어지는 태양을 따라 길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잡초더미 사이로 마치 땅바닥에서 뜯겨 나온 듯한 사체 두 구를 보았으니, 둘은 내게 탁아의 책임이 있던 그 아이들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나는 내 안에 이는 감당 못 할 회한들의 크기로 인해 끝끝내 아무런 감정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그저 두 아이를 조심스레 사뿐히 안아 들고는 마당과 인접한 부지(敷地)로 향할 뿐이었다. 그렇게 둘을 부지 내 툇마루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다 묻고는 며칠이나 지났을 무렵에도 진도 씨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 씨 또한.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고서였다. 대낮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 툇마루로 나서니 그곳엔 돌아온 탕아가 반쯤 사라진 목줄을 한 채 집 주변을 촐싹대며 돌아댕기고 있었다. (범행은 어렵지가 않다. 도망가는 게 힘들지)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콧김을 한차례 불어 젖히더니 요기할 게 없느냐며 재촉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뻔뻔스러움에 재차 이는 분통을 뒤로하고선 엊저녁 먹고 남긴 찬밥을 국에다 말아 한 사발 차려 주었다.


접싯물에 코 박은 채 숨 쉴 새도 없이 쩝쩝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예뻐해 하고 이름을 붙여주고 옷을 입혀주며 어쩌고저쩌고해도 개는 개라는 것을. 그런 내 마음은 미처 사라지질 못한 분노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던 또 어느 날이었다. 채 넘기지 못한 책장에 못내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던 나는 잠결에 무슨 낌새래도 차렸는지 여적 어둑하던 꺼먼 새벽녘 눈을 떴다. (못다 한 일이 있으면 잠귀가 밝아지는 법이다)





창문에 바람이 새는듯한 소리에 나는 홀리듯 그 근원지로 졸린 발을 끌었다.



톡 톡



그 소리는 툇마루와 연결된 서재 통유리에서 나고 있었다. 서재로 발을 디딘 나는 점차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그것이 무슨 연유로 인한 소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나는 황급히 주저앉아 문을 열어젖히고선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는 예의 그 품위 어린 앉음새로 나를 살그머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재차 엄습함과 동시에 그 이상으로 그녀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던 묵은 감정이 쏟아지면서 결국 나는 몇 번이나 한풀이하듯 넋두리했다.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어이구, 니 새끼들 불쌍해서 어쩌누.



그녀는 말없이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그저 한스러운 그 넋두리를 목도할 뿐이었다. 그리곤 잠시 후 몸을 돌려 하늘한 걸음새로 저 건너 어둠과 동화되어갔다. 나는 꼭 다른 사람의 발로 걷는듯한 걸음걸이로 다시금 잠자리로 향했다. 마치 그러한 행위가 꿈속을 빠져나와 현실로 되돌아가는 의식인 것만 같았다.


다음날, 간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툇마루로 나온 나는 끔찍한 산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건 어떤 잔혹한 표현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을 광경이었다. 진도 씨가 죽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풍경이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공포를 느끼잖는가)


진도 씨네 바로 앞으로 나 있던 정자(널찍한 바위), 그 정자로 세워져 있던 아이만 한 크기의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진도 씨가 목매달려 있던 것이다. 그건 교수형의 그것과 동일한 모양새였다. 나는 만져보지 않아도 진도 씨의 몸이 이미 뻣뻣하게 굳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또 설명할 길 없는 그 죽음에, 나는 한동안 슬퍼하거나 시신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소나무와 그 소나무로 매달린 목줄을 살펴보았다.


사유는 명백했다. 소나무 한가운데 굵은 가지 사이로 고정된 목줄로 인해 진도 씨는 뒷발을 땅에 디딜 수가 없었고 그게 바로 사인이었다. 허나 그런 '어떻게'에는 분명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진도 씨는 어떻게 그 사이로 목을 맬 수가 있었단 말인가?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나무 주변을 반복해서 돌아 밑기둥에 목줄이 반 정도 감기게 한 뒤, 바로 옆 바위를 타고 집 지붕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남은 목줄이 소나무 한가운데 가지 사이로 통과해 고정되도록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가 빠져있었다. 도대체 왜? 어찌하여? 소나무야, 너는 무얼 알고 있니?


나는 목줄에 걸린 진도 씨를 빼내어(예상대로 그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마당과 인접한 부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땅을 막 파던 찰나 나는 생각했다. 두 아이와 너무 가까이에 자리하면 그 애들에게 또다시 못 할 짓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한참 흙을 파내던 중 나는 묘한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작은 언덕 위로 그녀가 앉아 있었다. 예의 그 품위 있는 앉음새로.


나는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금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가끔씩 고개를 돌릴 때면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자리의 정당한 입회인이라는 듯이.


마침내 진도 씨의 매장을 모두 마치고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없었다. 그녀는 아마 기품있는 걸음으로 몸을 돌려 나아갔을 것이다. 들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모두 씻겨 내리게 만드는 그 기품있는 걸음걸이로. 처음 내 앞으로 정중히 다가오던 그 날처럼.


그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fin-

















후기


사실 나는 요크셔파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86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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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 2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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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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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이름은 할랜드 베일이다. 통칭, 구원자 베일. 직업은 LA에서 제일 잘나가는(그리고 악명 높은) 변호사이고. 내게는 세 가지 룰이 있다.


첫째,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엄마가 내게 '사랑한다 아들아.'라고 한다면 먼저 그 말을 의심할 것. 둘째, 돈 많은 것들의 말을 믿어줄 것. 셋째, 두 번째 룰을 첫 번째 룰보다 우선시할 것.


말했듯, 나는 이 거리에서 '구원자 베일'로 통한다. '이 거리'란 당연히 할리우드를 뜻한다. 세상에서 악명을 떨치기 가장 적합한 곳. 그러니까 이 몸은 돈맛에 눈 돌아가 카메라 렌즈에 중독된 이 거리 종자들의 뒤를 닦아주고 계신다 이 말씀이다. 물론 돈 많은 비치(Beach)년놈들의 엉덩이도.


코카인 빨고서 뺑소니? 내게로 와. 술 자시고 운전하다 차량 서너 대쯤 박았다고? 그 정도는 귀엽지.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다? 뭐, 어때. 건강에 좋다며 아침마다 비타민 대신 섭취하는 놈들도 있는데. 여자 친구 얼굴에 난 멍 자국 좀 어떻게 해달라고? 사흘 안에 여자 친구가 찍소리 못하도록 약점을 물어다 주지.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약속하지, 남편 똥꼬까지 털어주겠노라고.


자, 이쯤 되면 내가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파악이 갈 거다. 그래, 맞다. 철딱서니 없는 할리우드 셀럽, 졸부년놈들의 악어새. 그게 바로 나, 구원자 베일이올시다. ..뭐라는 거야? 악어새가 악어와 공생 관계라는 건 사실 잘못 알려진 상식이라고? ..이봐, 자신 있으면 법정에서 증명해보라고. 어쨌거나.



"싯팔! 이게 웬 거야?"



초장부터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온 연유는 업무용 계좌에 뜬금없이 50만 달러가 꽂혀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50만 달러의 출처는 당일에 밝혀졌다.



"베일 씨, 베일 씨 전화 맞죠?"


"네, 누구시죠?"


"클라이언트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쪽이신가요? 아니면.."


"오늘 착수금을 보내드렸죠."


"..어디 관계자이시죠?"


"저는 그냥.. 민간인입니다."


"..내 개인 번호와 계좌는 어떻게 알아낸 거요? 당신 누구야?"


"그걸 궁금해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베일 씨. 안 그래도 오늘 만나서 말씀드릴까 했거든요."


"..여전히 내 질문에는 답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오늘 왜 만나?"


"오늘 오후부터는 스케줄이 있다고 손 쳐도 모두 사적인 걸 테니까요. 제가 약속드리죠. 오늘 저와 만나는 게

분명 당신 와이프 대신 애인과 루크스에서 식사하는 일보단 값어치 있을 거라고."


"뭐라고? 당신.."


"그러니 루크스에는 당신 애인 대신 제가 합류하도록 하죠. 베일 씨가 예약한 시간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하여.. 나는 금요일 오후 웬 처음 보는 40대 여성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40대. 그래, 맞다. 그녀는 분명 40대였을 것이다.


매끈하고 굴곡 없는 피부 결(하루가 멀다 하고 셀럽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내가 장담하는데 시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좁다래한 얼굴 넓이로 더없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역시, 모두 수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강렬한 대비의 홍채색. 분명, 외모만으로는 대학원생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지만..


클래식 스타일로 감아올려 묶은 금발, 마찬가지로 클래식 스타일로 음영 없는 분칠에다 눈썹과 입에만 얇게 포인트를 준 화장법, 고풍스러운 실루엣의 민무늬 원피스 룩(소매가 팔뚝 반을 가리는), 다소 와이드하고 높지 않은 굽에다 전체적으로 심플한 라운드 셰이프의 단색 구두.


무엇보다 사람의 눈을 바르게 응시하며(요즘은 다들 구린 의도를 감추느라 이러질 못한다) 어절마다 조용하지만 명쾌하게 강약세를 보이는 그녀는 분명 젊은이가 결코 지닐 수 없는 기품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지극히도 이국적인 이채로움을 가만히 내뿜고 있었는데, 마치 수녀원에 평생을 갇혀있다가 일주일 전에 탈출했든지 아니면 과거 조사를 게을리한 채 가이드북에 의지해 타임머신을 타고서 2017년 이곳 루크스로 식사를 하러 온 미래인인 것만 같았다.



"오소부코를 추천해드릴게요. 본토 맛에는 따라갈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실패가 없는 메뉴죠."


"좋아요, 당신은 뭘 주문하시겠어요? 미스.. 미세스.."


"그냥 질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플레절렛 수프, 리코타와 과일을 섞은 샐러드면 되겠네요.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서로의 식사가 모두 끝난 후(그녀는 이파리 하나 남기지 않았다) 디저트를 기다리던 중 그녀가 말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 50만 달러는 착수금이었어요."


"..저보고 뭘 하라는 거죠? 아니, 아니. 아직 맡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요. 이런 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보다 내 번호랑 계좌는 어떻게.."


"말은 착수금이지만 정식 착수금은 아니에요."


"..옌장, 도통 모를 말들만 내뱉으시네."


"정식 착수금이 아니란 말은, 지금부터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제 말을 잠자코 경청해주는 대가라는 의미예요."


"..그 뒤에 내가 일을 맡지 않겠다면?"


"그건 당신 자유입니다. 당신 계좌로 들어간.. 물론, 깨끗한 50만 달러 또한 당신의 자유이고요. 당연히 정식 착수금 100만 달러 역시 당신의 자유겠지요? 오, 빼먹을 뻔했네.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도요."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이라 하면.. 소송 서비스를 말하는 게 아니겠군요."


"바로 그렇답니다, 베일 씨. 그리고 성공 보수금이 아니므로 종래의 성공 보수금 수준보다 더 높은 퍼센티지를 적용하도록 하죠. 물론, 정식 착수금을 기준으로요."


"..몇 퍼센트요?"


"20퍼센트."


"25퍼센트. 그 밑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무슨 일이든 간에 법적 테두리 안에서

범죄 불성립으로 해석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어야 합니다. 범죄 불성립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에요, 베일 씨. 무슨 의미인지 안답니다. 그리고 안심하세요, 베일 씨. 당신에게 맡기는 일은 완벽하게 합법적인 일이랍니다."


"..좋아요, 질. 무슨 일이죠?"


"베일 씨, 제안을 하나 더 해도 될까요?"


"..그럽시다."


"말씀드렸듯, 분명 합법적인 일입니다. 당신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캘리포니아 내에선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어요. 물론 그 말은 가장 높은 악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죠. 만약 자세한 걸 묻기 전에 계약부터 해준다면 추가적으로 10만 달러를 더 지불하죠."


"15만 달러."


"..좋아요."


"단, 계약서에 이 한 줄만 추가합시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가 필요할 경우 언제든 중도에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수임료는 전액 반환하지 아니한다.'"


"거기에 한 줄만 더 추가합시다, 베일 씨. '어떠한 사유로도 상기 항목에 위배되지 않음에도 도중에 계약을 파기할 시 수임료 반환을 2배로 산정한다.'"


"..좋수다! 바로 사무실로 갑시다! 아, 이 셔벗은 마저 먹고서."



우리는 정중히 악수를 한 뒤 사무실로 가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녀가 명시한 변호사 서비스 의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할랜드 베일은 밥 스미스와 캐서린 스미스(질 가라사대, '나는 밥의 친가 쪽 사람이에요. 그리고 둘은 내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죠.')의 모든 법적 대리 임무를 위임받아 그들의 요청에 따라 모든 가능한 법률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법률적 서비스 지원은 계약일로부터 60일이 되는 자정까지로 기한한다.



다음 날. 나는 질, 밥 스미스의 아내 캐서린 스미스와 함께 LA의 대표적인 부촌인 퍼시픽 파리세데스로 향했다. (캐서린 스미스 역시 독특한 분위기의 이국적인 여성으로 분명 여러 나라의 피가 섞였으리라 여겨졌다. 아마 질과 마찬가지로 메인은 게르만 계통?) 그리곤 둘의 안내에 따라 어느 공용 주차장 내 캐딜락 차량으로 인도되었다.



"베일 씨, 트렁크 좀 열어주시겠어요?"



캐서린 스미스가 시동을 걸고선 트렁크 버튼을 누르자 질이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왜요? 뭐 꺼낼 게 있나요?"



질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인자한 웃음을 보냈고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이런 싯팔!"



트렁크 안에는 부패하기 시작한 한 중년 남성의 시신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뒤로 잰걸음을 치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막 운전석에서 걸어 나온 캐서린 스미스가 질의 바로 뒤편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헌데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놀라 나자빠진 내 입 한쪽으로 찐득한 침이 새는 동안, 열린 트렁크 사이로 죽음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구린내가 탈출하는 동안, 두 여성은 그저 가만히 서선 조용히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이런, 싯팔! 여기 시체가 있다고! 안 들려?"



질이 걸어와 트렁크 안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쭈그려 앉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길 가다 만난 동네 아이를 타이르듯이.



"베일 씨,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스미스 부부는 당신에게 재산관리에 대한 모든 법적 서비스의 대행을 맡기려고 했어요. 둘의 재산은 아주 방대하고.. 동시에 복잡하고.. 무슨 말인지 당신도 충분히 알겠죠. 그런데 사실 밥은 지난주 외출한 후에 갑자기 연락이 끊긴 상태예요. 차량과 여권은 그대로 휴대전화와 지갑만 챙기고서요. 오늘은 일단 밥의 차량등록증을 챙기려던 거였는데.."


"엿 까는 소리 하고 계시네! 내가 중고차 딜러요?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시오! 이봐.. 이.. 년들아! 나는 돈에 움직이는 사람이야. 당연히 지불받은 돈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내 의무고! 그렇다고 이런 개수작에 나를 끌어들여? 계약종료야, 이.. 살인자들아!"


"그렇지 않아요, 베일 씨."


"가까이 오지 마!"


"진정하세요. 우리도 무척이나 놀랐답니다. 다만 너무도 놀라서라고 설명해두죠. 물론 우리는 밥의 죽음과 무관하고요."


"거짓말! 내가 당신 같은 것들을 한두 번 보는지 알아? 이런 지긋지긋한 치정극은.. 이게 법적으로 알리바이나 유리한 증언이 될 거라고 생각해?"


"베일 씨, 일단은 신고부터 해주세요. 우리가 살인자인지 아닌지는 먼저 경찰이 와야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손이 떨려서 못하시겠다면 제가 하죠. 대신 가서 캐서린을 보살펴 주겠어요? 남편의 시체를 막 발견한 참이잖아요."



나는 잠시 두 여자를 번갈아 둘러본 뒤 크게 한두 차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신고하죠. 당신과 캐서린 스미스 씨는 떨어져 있어요. 설령 시체에 손댈 생각일랑 하지 말고."



잠시 후 도착한 경찰에게 최대한 간략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들의 동태를 주시했는데 어쩐지 묘한 위화감 같은 게 들었다. 그녀들의 만면엔 분명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에게서 나타나는 상실감이 박혀있었다. 그런데 반면에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레 잃었을 때의 당혹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갔고(적어도 이곳 LA는 말이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녀들과의 접촉은 없었으며, 나는 하릴없이 일상으로 복귀했다. '베일 씨, 계약은 언제든 중도에 파기해도 됩니다. 위약금은 계산해보니까 200만 달러네요.' 질이 마지막으로 내게 건넸던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간의 일은 LA 타임스 기사로 대신하는 게 나을지 싶다.



지난주 퍼시픽 팰리세이즈 내 차량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과 관련하여 LAPD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LAPD는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미루고 있으나 사망자 배우자 측의 대변인인 변호사 할랜드 베일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지역의 60세 밥 스미스라고 한다.


형사법원은 시신에 대해 현재 LAPD가 조사 중이므로 관련 사항은 일부 비공개이나 익명을 요구한 법집행기관 내의 인사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밥 스미스가 맞으며 아직 사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타살은 아니라고 전했다.


피아니스트인 모친과 미생물학자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밥 스미스는 1980년대 UCLA에 입학하며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 과학자가 되고자 했었다고 한다. 허나 UCLA의 대변인에 따르면 밥 스미스는 중도에 자퇴했으며 그의 생전 요청에 따라 세부적인 사항들은 모두 열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후 밥 스미스의 행적과 직업에 대해서는 외부로 알려진 게 전혀 없다. 심지어 LAPD는 그가 직업을 가졌었다는 기록이나 세금신고서 제출 내역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한편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저택수색 과정에서 드러났다. 해당 수사 책임관인 윌리엄 하비 경감은 밥 스미스의 저택에서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했으며 모두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또, 밥 스미스의 명의로 등록된 차량이 수륙양용 SUV만 14대이며 이러한 차량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 보관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LAPD 청장은 본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밥 스미스 씨가 어떠한 마약상 및 총기거래에도 연루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또 그의 재산과 관련하여 어떠한 범죄 수익과도 연관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한 끝에 우리는 그를 단순한 개인 총기 수집가로 결론 내렸다.'


밥 스미스의 시체를 발견하고서 최초로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지역의 변호사 할랜드 베일로, 그는 스티븐 시걸과 같은 여러 할리우드 셀럽들의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그로부터 한 달하고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들과의 계약 종료를 코앞에 둔 바로 그때였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예고도 없이 질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베일 씨, 잔금을 계산할 때네요. 정식 착수금의 25퍼센트니까 25만 달러. 그리고 루크스에서 약속한 15만 달러. 총 40만 달러를 그 계좌로 보내드리죠. 베일 씨와 계약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직접 만납시다."


"네?"


"직접 만나서 계약을 마무리 짓자는 말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베일 씨는 계약을 완수하셨으니 약속된 돈만 받으시면 됩니다."


"질, 이 계약을 탈 없이 끝내고 싶죠? 그쵸?"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이 모든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은 거냐고 묻는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직접 만난 자리에서 계약을 끝내야겠습니다. 그거 아시죠? 지금 캘리포니아 말고도 전역에 밥 스미스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 걸요. 내 말대로 하지 않겠다면 언론과 인터뷰를 할 생각입니다. 법적 해석에 위반되지 않는 사항 내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한 비하인드 이야깃거리에 대해 말이죠. 사건에 이어 이 황당무계한 법률 서비스 건도 뜨거운 감자가 되겠군요."


"좋아요, 좋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들었습니다. 알겠어요. 이번 주 금요일 오후 3시 사무실에서.."


"오후 3시에 당신네 댁에서 보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어째서.."


"단순히 변덕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어요. 그냥, 당신이 클라이언트치고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통은 제 일이란 게 입장이 그 반대거든요. 한마디로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심지어 나는 의뢰주인 스미스 부부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중간에서 모든 걸 움켜쥐고서 컨트롤했기 때문.."


"그건 알다시피 밥에게 변고가 생겨서.."


"바로 이겁니다. 네, 그래요. 바로 이걸 말하는 겁니다. 이미 며칠이나 지난 시신을 가지고서 나를 엿먹였다는 거! 경찰에게 들었습니다. 암이라고 하더군요, 말기 암. 밥 스미스는 암으로 병사한 거죠. 젠장, 대관절 무슨 수작입니까! 암으로 죽은 사람을 가지고서 2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들여 나를 이 광대극에 끌어들인 이유가 뭐냐 말입니다. 광대라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 고용됐는지 아는 법입니다. 당신은 눈먼 돈을 먹여 나를 얼간이 천치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액수란 게 나를 내내 물 먹였죠. 이 바닥 최고였던 나를 무력감과 모욕감의 골짜기로 자빠뜨린 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어릴 때 말이죠, 학교에 칼 맥칼라니라는 애가 있었어요. 우리 중 가장 덩치가 컸고 또 제일 포악한 놈이었죠. 그놈은 우리 코피를 터뜨리는 게 취미였는데.. 몸이 근질근질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애가 그날의 희생양이었어요. 물론 그건 저라고 예외가 아니었죠. 어느 날은 제가 코피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집에 가 질질 짜니 아버지가 화를 내며 저를 쫓아내더군요. 가서 똑같이 때린 놈 코피 터뜨릴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면서요.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어요. 사실은 그놈 반경으로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 했죠. 당시 그놈 주먹 크기는 이미 제 얼굴만 했거든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잘나가는 변호사가 된 저는 그놈 와이프로부터 의뢰를 받았죠. 그놈과 그놈 와이프 또한 동창이었거든요. 간단했습니다. 폭력성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쳤고 위자료, 양육비, 접근금지로 놈을 있는 대로 벗겨 먹을 수 있었죠. 나는 기꺼이 파격 할인가로 의뢰를 맡았고 놈은 슈퍼 푸주한으로 종일 생고기 썬 돈을 매달 자기 와이프한테 꼬나 박는 신세가 됐죠. 자, 그래서 내가 생각만큼 만족했을까요? 나는 한 가지 깨닫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준 교훈을요. 그건, 무언가를 갚아줄 땐 반드시 같은 거로 갚아야 한다는 거였죠. 나는 집에서 쫓겨난 날 어떻게든 칼 맥칼라니의 코피를 터뜨려야 했었습니다. 우리 개척자의 자손들은 눈에는 눈, 피에는 피라는 전통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어떻게 되갚겠다는 뜻이죠?"


"그렇다고 제가 고객한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모든 걸 감추려 드는 이 오만한 여성의 집에 찾아가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게 전부겠죠. 자기 껄 일체 오픈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여성이 홈그라운드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기분 좀 내는 거죠. 그럼 내가 내 체면을 담보로 190만 달러를 꿨다는 멍에도 사라질 테고. 사실,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서로의 기분 아니겠습니까?"


"알겠어요. 금요일 오후 3시에 저희 집에서 보도록 하죠. 주소는 그날 보내드리겠어요."



모레 오후 2시 50분. 나는 질이 보낸 주소에 따라 퍼시픽 팰리세이즈 인근 샌타모니카 내의 한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대문 앞에는 이미 멀리서부터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푸짐한 덩치 둘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유럽인의 외형적 특징을 한 둘은 정장 차림새를 하고선 시종 나를 노려봤다.



"뭡니까? 매트릭스라도 찍고 있어요? 질 불러줘요."



둘은 마치 영어를 못 알아듣거나 아니면 귀머거리라도 되는 양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해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위압감에 나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선 안 들릴 정도의 목소리 크기로 욕지거리를 몇 차례 내뱉는 게 다였다. 잠시 후 대문으로 나온 질이 두 덩치의 등을 다정스레 쓰다듬고는 내게 인사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형식적인(그리고 다분히 경계를 띤) 인사를 나누고는 안내에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는 마치 그녀와도 같았다. 모든 게 고풍스럽고 예스러웠으며 동시에 세련된 풍취를 띠었다. 허나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한 켠으로 진열된 작은 크기의 수많은 사진 액자들이었다. 그러한 사진들 너머로는 실로 방대한 수의 사람들이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연령대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독사진의 주인이었으며, 또 때로는 대가족으로 보이는 집단의 주인들이었다. (사진들 속에서 현관 앞의 덩치 둘도 찾을 수가 있었다)



"사진들이 많죠? 저는 생각보다 더 옛날 사람인지라 적어도 소중한 사진은 액자에 장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말도 안 되게 좋은 냄새를 풍기는 밀크티를 내게 건네며 질이 말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녀가 먼저 계약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얌전히 밀크티만 홀짝였다. 이윽고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그녀는 대뜸 수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준비한 대사를 읊듯이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스미스 부부의 대리인으로서 법적 서비스 제공에 대한 추가 지급금 일체를 지불하는 바입니다. 이로써 해당 계약은 상호 간의 이행에 따라 종결되었습니다."


"..이게 답니까? 그런데 대관절 내가 스미스 부부에게 무슨 법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거죠?"


"계약서에는 기간 내에 법적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법적 서비스에 따라 수임료를 지불한다는 문구가 아니라요."


"..대단하시군.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당신 뭡니까? 목적이 뭐예요? 좋습니다. 난 진실을 원해요. 이 40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진실을 말해줘요."


"그럴 필요 없답니다, 베일 씨. 40만 달러는 우리의 계약 이행에 따른 지불입니다. 지금 베일 씨가 말씀하시는 건 별개의 사안이고요. 나가는 길을 안내해드리죠."


"좋아요. 그래도 알아야겠다면요? 40만 달러의 반환 대신 다른 조건을 건다면요?"


"베일 씨.."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면요? 경찰이라도 부를 건가요? 아님 밖의 매트릭스들? 그 전에 빨리 말해야겠군요. 다음 조건은 이겁니다.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판사한테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 당신 집에 찾아오겠어요. 매일같이 현관문 밖에서 당신을 부르겠죠. 그럼 파파라치들이 할리우드의 공식 악어새인 나한테서 뭐 재미난 거 좀 얻어낼까 이곳을 순례하겠죠. 당신 매트릭스들이 코피 터뜨리는 법은 알아도 카메라 플래시 막는 방법은 모를 거라고 내기할 수 있습니다."


"베일 씨, 분명 전화로는 저희 집에서 계약을 마무리하는 게 다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걸 말씀드려야겠군요. 법칙 하나,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요. 베일 씨, 생각만큼 교활하시네요."


"뭘 기대한 겁니까? 교활하지 않을 거면 변호사 말고 다른 걸 했겠죠."



질은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어쩐지 공기가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진실을 알려드릴 테니 베일 씨는 어떤 대가를 지불할 건가요?"


"바로 이런 게 협상이죠. 말해보세요. 원하는 대가를."


"베일 씨가 지금까지 받은 190만 달러 전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 축내자는 겁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농담을 하지 않아요."


"지금 여기 앉아서 나눌 몇 마디 말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베일 씨, 슬프게도 진실이란 게 그런 겁니다. 때론 몇 마디 말에 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걸기도 해야 하는. 누구에게나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진실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죠.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필요로 하기에 그만한 돈을 당신께 지불한 겁니다."



질은 다정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엄격함을 품고 있는 표정이기도 했다. '우리'라. 첫 번째 단서를 얻게 되자 한층 더 내 몸이 달아올랐다. 따라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안에 포함된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나는 정말이지 알아야만 했다. 내 몸속 모든 세포가 그것을 원하고, 또 그러기를 종용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수 시간 같은 수 초 후, 질이 콧김을 한번 부드럽게 내뿜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베일 씨.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해야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내 딸 애한테도요. 마누라는 별거 중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꼭 그러셔야 할 거예요. 제 조건은,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것 모두 비닉특권을 엄수해달라는 겁니다. 비닉특권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알겠습니다. 맹세하죠."


"그리고 진실을 듣고 나면 얌전히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다시는 방문하지 마시고요. 일이 있으면 제가 당신 사무실을 찾아뵙도록 하죠."


"여부가 없습니다."



질은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거예요. 조금은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어쨌거나 끼어들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앞에 놓인 밀크티 잔을 한번 기울이고선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를.



"우리 셋..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제가 미국에 온 것은 1957년 4월 2일이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도착 후 얼마 안 있어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씨와 접선을 가졌죠. (나는 또 한 번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 왔어요. 다른 은하계에서요. (나는 끼어들 기분도 들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당시 천문학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도널드 맨젤 씨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서구식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토르, 돈, 질.. 우리는 그 이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죠.


멘젤 씨는 우리를 당시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장이었던 제임스 킬리언 씨에게 소개해주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요청에 따라 이 두 사람이 곧 아이젠하워 씨와의 접선을 주선해주었죠. 이 둘에게(또 아이젠하워 씨들에게도) 우리가 다른 은하계에서 왔음을 믿게 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요. 우리가 타고 온 소형 우주 비행선의 착륙지점으로 안내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별장에서 멘젤 씨와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와 국방부장관 및 정보국장을 앞에 두고 준비한 브리핑을 낭독했죠. 우리의 요구는 심플했어요. 지구로의 망명(그래요, 당신네들 표현 따라 우리는 정치적 망명을 온 거였어요)을 허락할 것, 그리고 시민권을 보장할 것. 마지막으로.. 혹여 우리를 추적해 지구로의 잠입을 시도할지 모르는 우리 행성의 요원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


아이젠하워 씨는 나머지 넷과 잠시 상의를 하고는 이내 그 제안을 수용했어요. 제안에 따른 우리의 보답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죠. 이 협상에 따라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원시적인 양자역학 컴퓨터를 위한 모듈러 디자인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인간사회에서는 지금껏 없었던 가장 극적인 변화가 발생할 것이며, 당신들의 능력과 끈기에 따라 수 세대 후에는 은하 간 이동을 위한 기초적인 아이디어가 창안될 거랍니다.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처음 발을 디뎠던 오리건 주에 비밀요새 겸 저택을 건립했습니다. (당신은 오리건 주에 가본 적이 있나요?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당신네 자연은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을 선사해준답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며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소형 비행 우주선이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주 아주 오래도록 살 수 있도록(바다거북이보다도 더 말입니다) 설계되었고 또 진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 많은 것을 버리고 바꿔야 했지만, 당신네들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이름과 땅은 여전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너무도 흘렀어요. 벌써 60년이에요. 멘젤 씨,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 우리를 알던 당신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 우리는 스스로를 도와야 하는 처지이죠. 방치되었다고 표현하지는 않겠어요. 당신네들은 망명객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를 베풀었고 지난 60년간 우리는 인간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정말 이곳 지구가 우리의 집이랍니다.


저와 돈이 이곳에서 낳은 아이들은 인간과 연을 맺어 자신들의 아이들을, 그리고 그 아이들은 또 다른 인간과의 사이에서 새로운 탄생을 이루었거나 앞두고 있답니다. 토르 역시 인간 여성과 두 차례 결혼을 했고(첫 번째 여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주 많이 낙담했었죠) 그의 아이들 역시 이곳에서 결혼과 출산을 경험했죠. 그러한 아이들 모두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으며 결코 그걸 잊는 법이 없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종종 오리건 주의 고향 집에서 만남을 갖습니다. 음식을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본연의 뿌리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며 서로를 축복하죠. 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정말 좋아한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곳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그러면서 매일 자연을 느끼고 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공동체이고 뿌리 된 자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다양한 특허의 주인인지 안다면 당신은 정말 놀랄 거랍니다.


그런데 최근.. 재앙이 스며들기 시작했어요. 우리,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저를 추적해 우리 행성의 요원 몇몇이 이곳에 잠입한 거죠. 그들은 이미 당신네들 사이에 있어요.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답니다.


밥까지, 벌써 우리 아이들 여섯이 죽었어요. 그들은 우리를 데려가려 하고, 우리에게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이들을 위해 하며 무언의 협박을 벌이고 있는 거죠. 당신 말이 맞아요. 밥의 사인은 말기 암이죠. 멀쩡하던 애가 반년도 안되어 암으로 죽은 거랍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질병을 심어놓고 있어요.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노선을 택했을 것 같나요?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냈답니다. 그 과정에서 밥이 희생되었죠.(그녀는 잠시 상념에 잠긴 듯 수 초 후에나 말을 이었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고향 땅 오리건 주에 공동체를 설립했어요.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거랍니다. 누구도 이걸 방해할 순 없어요. 심지어 당신네 대통령일지라도."



"....이야기 끝인가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두 했답니다."


"오리건 주에서의 공동체 생활이라, 아미시 마을이라도 만들려고 그런답니까?"


"비슷한 거죠. 다만, 기원이 없는 곳에 믿음의 뿌리를 두지는 않는다는 게 차이겠네요.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원과 뿌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좋아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네시, 빅풋, 늑대인간.. 저도 그런 걸 참 좋아했었죠."


"저도 그렇답니다."


"그래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베일 씨. 오, 그리고 물론 돈은 일체 반환하실 필요 없으세요. 제 말을 아주 잘 경청해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요. 아구가 안 맞는 게 있어서요. 어째서,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밥의 시체를 일부러 내게 보여주고..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베일 씨, 당신네 공놀이 광고 1초에 몇억이 들어가는지 아세요? 우리는 미국 전역에 1달 넘도록 홍보를 한 거고 저는 제가 지불한 돈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습니다, 질."


"베일 씨, 모든 생물체는 호전적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벌써 여섯 아이를 잃었어요. 이제 우리도 대응에 나설 거랍니다. 그들도 사실은 잘 알고 있겠죠. 다른 은하계에서 총 맞고 죽어봐야 아무도 몰라준다는 걸. 또, 당신네들 중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그들은 이곳 어느 나라에도 시민권이 없는 자들인데. 우리는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침입을 시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미리 홍보한 거예요. 이제 그들도 알겠죠. 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그들을 죽여도 그들은 지구에 위해를 가할 수 없답니다. 은하계의 규약이라는 건.. 정말 골치 아픈 행정이거든요."


"그러니까 말인즉슨, 나를 이용해 사건을 키웠다는 겁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우리 생각보다도 더 유명세가 있더군요. 당신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가판대 타블로이드판 해프닝 대신 CNN 토픽으로 다뤄질 수 있었던 거죠. 덕분에 당신네 정부 사람들이 앞으로 밥의 유산을 건네받은 캐서린을 주시하게 되겠죠. 자연히 요원들은 더욱더 접근에 어려움이 생길 거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밀크티 잘 마셨습니다. 질, 아주 좋았어요."


"고마워요, 베일 씨. 다음에 또 당신을 찾게 되면 그땐 수임료를 좀 깎아 줄 건가요?"


"아뇨. 당신네들은 인간의 무서움을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배웅나올 필요 없습니다. 나가는 길 아니까요. 한 번 본 건 끝까지 기억하거든요. 매트릭스들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길."


"당신도요. 당신과 내가 믿는 신이 서로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질의 저택을 나와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년. 하여지건 돈 많은 것들이 미치면 더 극적으로 돌아버린다니까."



이건 정말이다. 나는 이걸 지금껏 몸소 체험해왔다. 이곳 할리우드는 졸부들과 미친 것들의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오히려 저 정도 피해망상은 귀여운 편이다.


질의 이야기를 완전히 잊고서 일상으로 돌아간 지 몇 달이었다. 내가 다시금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것은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대로변에서 내게 대뜸 말을 걸면서부터였다.



"할랜드 베일 씨? 맞으시죠?"


"누구시죠?"


"국토안보부입니다."


"증명해보시죠."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슈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세워선 안쪽을 펼쳐 보였다.



"그래, 국토안보부 요원이 대관절 제겐 무슨 용건이랍니까?"


"베일 씨께서는 몇 달 전 스미스 부부의 변호사셨죠?"


"그랬죠. 일을 맡은 적이 있었죠."


"혹시 이 사진 속.. 세 명을 보신 적이 있거나 알고 계십니까?"



그가 아이폰 7을 꺼내어(아마 그도 딸이 있는가 보다) 스크린에 띄어진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뇨. 이들은 스미스 부부가 아닌데요."


"예, 그래요. 이들은 다른 사람이죠. 모르십니까?"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셋 모두 본 적이 없군요. 누군데요, 이 사람들?"


"미국 안보에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자들이죠."


"그렇군요. 꼭 잡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정말 본 적이 없으십니까?"


"네, 혹시 나중에라도 보게 되면 알려드리죠. 명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일 씨."



나는 남자와 간단히 눈인사를 교환하고는 가던 방향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돌려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걸음 중간중간, 마치 이곳의 중력을 아직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듯 발을 살짝씩 땅에 끌어대며 걸음을 이어갔다. 나는 그날 국토안보부에 문의해 그가 보였던 신분증 속 요원이 존재하는지 물었고 돌아온 대답에 별반 놀라지 않아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가 자신의 아이폰 7에 띄었던 사진,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분명 5-60년대 풍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사진. 나는 이 셋이 함께 찍힌 또 다른 사진을 질의 저택에서 보았다. 물론, 그 사진은 당시 몰래 촬영한 내 아이폰 7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이기도 하다. (명심하시라! 딸이 있으면 아이폰 7로 소리 없이 촬영하는 게 가능해진다)


클래식하지만 분명 현대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셋은 식당 루크스에서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채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전혀 늙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내 아이폰 7에 저장된 그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고선 중얼거렸다.



"안녕. 토르, 돈, 질."



만약,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질에게 좀 더 정중하게 굴었을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온 이 용감한 이민자에게.


자, 코카인을 빨고서 뺑소니를 쳤는데 어떡하냐고? 음주운전을 하다 차량 서너 대를 박살 냈다고?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어? 여자친구 얼굴에 새긴 멍 자국?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사실 인간이 아니라고? 걱정 말고 모두 내게로 오시라! LA 최고의 악명을 자랑하는, 이 구원자 베일에게로!





-fin-




















후기


본 이야기 속 밥 스미스의 실제 모델인 제프리 래시는 2015년 7월 4일 자신의 SUV에서 부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UCLA 대학 중퇴 후의 행보가 알려져있지 않으며 직업에 대한 기록이나 세금내역이 불명확하다.


또 저택에선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되었으며 모두 사용된 적 없는 것들이었다. 수억 원의 현금 및 그의 명의로 된 10대가 넘는 SUV 또한 발견되었고 말이다.


나는 이 미스터리로 종결 중인 사건을 접하고선 이내 해당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왜 이런 식의 이야기냐 하면, 나는 지금껏 세간에 알려진 UFO 사건들은 모두 와전되었거나 뻥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지난 수년간 '이상한 옴니버스'를 운영하며 나름의 조사를 한 결과)


사람들은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공간 낭비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 말대로 우주에 우리 이외의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지성체가 오로지 우리뿐이라는 가정은 지독한 오만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계인과 접촉했었고 외계인은 지구에 방문했었을까? 허나, 광활함과 유구함을 뽐내는 이 우주에서 티끌보다도 작은 지구에 벌써 서로 다른 외계인들끼리 접촉이 있었다는 가정 또한 우주에 대한 오만이자 지구에 대한 자만일 수가 있다.


하지만 가망성이 없는 것에 대한 공상만큼 신나는 게 없다. 만약 외계인이 은밀하게 지구에 거주 중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바로 정치적 망명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곳이라고 지적 생명체가 사는 게 다르겠는가? 정적(政敵)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아, 한편 제프리 래시의 약혼녀는 자신의 모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엄마, 그 사람은 사실 외계인과 인간의 혼혈이야."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33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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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소설 2: 다시 시작된 저주, 2015

호러 영화 짧평 2018. 1. 2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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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뭔지 정말...

1편도 모자란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합격점 이상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2편은 완전히 말아먹었네요.

1편이 스너프 필름의 느낌이라도 전달했다면, 2편은 그냥 아무 것도 못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단 기본 스토리 구성부터가 전작을 못 따라갑니다.

전작이 비밀을 파헤치는 쪽이었다면 이번 건 참사를 막는 쪽이죠.

호러 영화에서 어느 쪽이 더 오싹할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전작만큼의 스토리 구성이 안 나오니까 양보다 질이라고 스너프 필름 비중을 왕창 늘렸습니다.

근데 그게 전작처럼 리얼하고 오싹한 느낌이 안 들어서 그냥 그저 그래요...





에단 호크가 전편에서 사망하며 하차한 탓에, 전편의 조력자였던 제임스 랜슨이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호감 가는 캐릭터로 1편에 이어 노력했고, 좋은 모습 보여줬습니다.

1편에서는 경찰이었는데, 2편에서는 때려치우고 부굴의 저주를 막으려 동분서주하는 역할입니다.

대단히 소시민적인 호러 히어로인데, 그래서 더 응원해주고 싶어지는 게 있어요.

배우한테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네요.


더불어서 1편에서 제목 멋대로 번역한 죄값을 이번에 톡톡히 치뤘습니다.

원래 1편에서 에단 호크가 작가로 나오는 탓에 살인소설이라는 제목을 갖다붙인건데, 이번 작품에는 소설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나오거든요.

원제가 Sinister, 사악한 내지는 불길한이라는 뜻인데 이걸 이런 식으로 바꿔버렸으니 원.




1편에서도 하는 거 하나도 없이 아바타 놀이나 하던 부굴은 더욱 찌질해져서 돌아왔습니다.

악신에게서 느껴져야 할 위압감과 공포는 온데간데 없고, 찌질하게 뒤에 숨어서 겁이나 주다가 사라지는 삼류 악당으로 나와버리는 게 이 영화 최대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빼앗는 악신이라더니 하...

애들이나 겁주다가 마지막에서나 좀 있는 척 하는 동네 양아치 같은 모습이 정말 꼴뵈기 싫었습니다.

너 하나도 안 무서워 임마.




이 영화 시리즈가 꾸준히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소재 자체는 진짜 괜찮다는 겁니다.

근데 1편에서는 그나마 진짜 스너프 필름 느낌이라도 나던 살인영화가, 2편 들어서는 그냥 아무거나 갖다붙이고 대놓고 보여주는 형태가 되어버렸어요.

아무리 호러 장르가 저가에 찍어서 남겨먹는 작품성 모자란 B급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대충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3편은 아마 영원히 못 나올 거 같네요.


제 점수는 4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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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2ch괴담][913rd]문고리

괴담 번역 2018. 1. 2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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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한살 어린데 자주 같이 근무하는 남자 녀석이 있다.


노래방 아르바이트인데, 손님이 오지 않을 때는 카운터에서 담배 피거나 잡담도 해도 되는 꽤 자유로운 곳이었다.


나도 틈이 나면 그 녀석, M과 자주 떠들어대곤 했다.




이야기를 하던 와중, M은 자기가 영감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가게, "나오니까" 가끔 상태가 안 좋아져] 라던가.


확실히 새로 들어온 알바생이 [문을 확실히 닫았는데 청소하는 사이에 열려있었어. 무서워...] 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무서워서 아르바이트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했었으니, M은 정말 영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M에게 물어봤다.


[지금까지 겪은 것 중에 가장 무서웠던 일이 뭐야?]




그랬더니 M은 [바로 요 얼마 전 이야기인데...] 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M은 자동차를 좋아해서 혼자 자주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곤 한단다.


그날 역시 드라이브를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 해안선은 지역에서 유명한 심령 스폿이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 1시를 넘긴 터였고.


하지만 M은 아무래도 달리고 싶었는지, 차를 꺼냈다.




동반자 없이, 혼자 나서는 드라이브였다.


M은 혼자 드라이브 하는 걸 특히 좋아했으니까.


해안선은 심령 스폿으로도 유명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도로 경주가 자주 열릴만큼 커브와 직선 코스가 적절히 섞인 좋은 드라이브 코스기도 했다.




다만, 어느 다리에서 새벽 2시가 되면 여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M은 귀신 이야기 따위는 잊은채 기분 좋게 해안선을 드라이브했다.


그리고 귀신이 나온다는 다리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 문득 귀신 이야기가 떠올라 시계를 봤다.




딱 2시였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딱 들었단다.


U턴을 하려해도 중앙 분리대가 있는데다, 갓길도 없어서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M은 그대로 그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시선은 다리 너머로 고정하고, 절대 사이드미러와 백미러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애써 콧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무척 기분 나쁜 분위기였지만, 어떻게든 건넜다.


어차피 이런 귀신 이야기는 헛소문에 불과할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며, M은 드라이브를 마저 즐겼다.


해안선을 쫙 지나가며 만끽한 뒤, M이 집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 4시 무렵.




드라이브는 즐거웠지만, 조금 지친 탓에 M은 눈을 붙이기로 했다.


M의 방은 특이해서, 집 안에서 혼자 동떨어진 위치에 있다고 한다.


아파트 같은 입구에 현관도 있지만, 애시당초 집 안 부지에 있다보니 평소에는 문을 굳이 잠그지 않는다.




그런데 M이 이불 속에 들어가자, 갑자기 문고리가 철컥철컥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족이라면 문이 열려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을테고, 친구가 장난치러 왔다 쳐도 이미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이다.


M은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라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 와중에도 문고리는 계속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어쩔 도리도 없이, M은 문고리를 지켜봤다.


갑자기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서서히 문고리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M은 미친듯 달려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반쯤 돌아간 문고리를 우격다짐으로 돌린 뒤, 문을 잠궜다.




M이 문고리에서 손을 떼자, 문고리는 다시 미친 듯 철컥철컥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M은 날이 밝을 때까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혹시 친구였을지도 모르잖아. 문에 달린 구멍으로 내다보지 그랬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M은 새파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거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무서워서 내다볼 수도 없었다고. 그냥 짐작이지만, 밖을 내다봤으면 피투성이 여자가 있었을 거 같아서 도저히 내다볼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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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2ch괴담][912nd]거미가 된 사촌

괴담 번역 2018. 1. 21.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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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사촌이 자살했다.


난치병이라고 할까, 괴질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병 때문에 고생했었다.




자세하게 적을 수는 없지만, 꽤 희귀한 병이다.


일상생활이 가능은 하지만 완치는 불가능하고.


하지만 외모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들어지는 병이었다.




이성이라면 더더욱 꺼렸겠지.


사촌은 우울증에 걸려 술에 빠져 살다가, 가족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기 싫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우리 고향에서는 장례식날 철야할 때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죽은 사람이 거미의 몸을 빌려, 장례식 철야 자리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다.


장례식 철야 자리, 스님의 독경이 끝나고 상주의 인사가 시작됐다.




그 즈음, 커다란 농발거미가 나타났다.


꽤 컸기에 깜짝 놀랐지만, 사촌이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인사 하러 온 걸까 싶어 이내 침울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모, 그러니까 사촌의 어머니가 천천히 움직여, 맨손으로 거미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으깨죽였다.


그 때 이모가 짓고 있던 아무 감정 없는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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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2ch괴담][911st]사라진 오른팔

괴담 번역 2018. 1. 19.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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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회사에서 일하던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지인을 A라고 해둡시다.


겨울 어느날, A의 근무시간 도중 투신 자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A가 일을 그만 둘 때까지, 3번의 투신 자살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뒷처리를 해야만 하는데, 이 일만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나 죽은 사람의 시신을 모으는 일은요.




다행이라 할지, 그날 자살한 사람의 시신은 크게 손상이 없었습니다.


오른팔이 팔꿈치 아래로 잘려나간 걸 빼면, 나머지 사지는 거의 그대로 붙어있었습니다.


A는 그 시신의 상태를 보고, 다이어그램 복구는 빠를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독 시신의 오른팔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전철 운행을 멈춰둘 수가 없었기에, 결국 오른팔은 찾지 못한채 운행이 재개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오른팔 수색은 이어졌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3주가 지났습니다.




어느날, A가 근무하던 도중, 승객들에게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물품 보관함 안에서 악취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도 물품 보관함 안에 누가 음식을 두고 가서 썩어버린 적이 몇번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것일거라 생각했답니다.




역 밖에 있는 물품 보관함으로 다가가니, 분명히 뭔가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A는 여벌 열쇠로 그 보관함을 열었습니다.


안에는 옷이 들러붙어 있는, 오른팔 팔꿈치 아랫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걸 본 순간, A는 토하고 말았습니다.


A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업무상 일이라면 각오하고 있으니, 시체를 보는 것 자체는 참을 수 있어. 하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시체, 그것도 한 부분만을 보고 나니... 죽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못 참겠더라.]




경찰 조사 결과, 그 오른팔은 3주 전 투신 자살한 사람의 팔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물론 처음 발견한 A 입장에서는 그 두 사건이 연결되지가 않아 머릿 속에서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오른팔을 보관함에 넣어둔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시체의 오른팔을 발견해서 넣어둔 거겠지, 아마. 하지만 그게 오히려 제일 무서워. 차라리 자살한 사람의 귀신이 자기 오른팔을 보관함에 넣어뒀다고 믿고 싶다.]


A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후, A는 철도회사를 그만뒀습니다.




그 보관함에서 나온 오른팔의 주인이, 마지막으로 마주한 투신 자살자였다고 합니다.


[아이도 생겼고, 근무시간이 확실한 일을 하고 싶어서 직업을 바꿨지. 역무원은 주말 출근도 있고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지가 않잖아.]


내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짜 퇴직 사유인지는 모르겠군요.



Illust by pupyjines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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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토호쿠에 사는 어느 사람이, 한여름 플라이피싱을 나섰다.


어느 정도 낚시를 하며 다니다보니, 해가 져서 강에는 밤이 드리웠다.


그래도 그날은 꽤 꿈틀꿈틀 입질이 오던 터라, 고집 있게 낚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도중, 탁 트여서 낚시하기 딱 좋아보이는 곳이 나왔다.


오늘은 여기서 마감해야겠다 싶어 낚싯대를 흔들자, 갑자기 우르르 반딧불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반딧불이는 마치 수면에서 솟아나듯 날아다녀, 강은 환상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렇게 반딧불이가 많다니, 신기한 일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강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귀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정도 크기였지만, 서서히 그 목소리가 커져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작은 여자가이가 실종되어, 그 아이를 마을 사람들이 지금 시간까지 찾고있다는 내용 같았다.




슬슬 오싹했지만,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선 탓에, 슬슬 낚싯대를 흔들며 계속 이야기를 훔쳐들었단다.


마치 TV 드라마를 소리만 듣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사라진 아이의 엄마로 여겨지는 여자 목소리, 수색에 나선 마을 사람들 목소리라는 걸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는 점입가경, 끝내는 마을 사람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여기를 찾아보자고.] 하고 말하더란다.


이쯤 되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색 활동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무슨 다큐멘터리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음성만 수면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너무나도 리얼한 대화가 수면에서 들려오자, 마침내 겁에 질린 그 사람은 수면을 향해 소리쳤다.


[어떻게 된겁니까! 누가 있습니까! 누가 없어진겁니까!]


그 순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고, 듣는 것조차 견디기 힘든 여자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 비명에 겁에 질려, 그 사람은 낚싯대도 걷지 않고 강을 뛰어 달아났다.


세워둔 자동차와는 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어두워진 길을 죽어라.


황망한 와중, 근처에 집 불빛 같은게 보였다.




어쨌든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험한 길도 마다 앉고 그 집으로 뛰어갔다.


[죄송합니다! 누구 안 계신가요!] 


안에서는 구부정한 할머니가 나왔다.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한잔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컵에 물을 따라 가져다 주셨다.


거기다 한잔 더 달라고 염치없이 또 부탁했던 모양이다.


물을 두잔이나 마시니 마음도 좀 진정이 되더란다.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실례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을 횡설수설 설명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웃어 넘기기는 커녕, 침통한 표정이 되어 눈을 꼭 감았다.




[그런가. 또 반딧불이가 나왔는가.]


서글프게 중얼거리더란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옛날 그 강가에는 다른 현에서 이사 온 일가가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집은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단란했는데, 부모와 세살 난 외동딸이 함께 살았다.


어느날, 그 집 딸이 놀러나갔다가 실종됐다.


마을 사람들은 부모를 도와 필사적으로 수색에 나섰다.




허나 그 마을에서는 가끔 그렇게 실종자가 나오면 대부분 강에서 죽은 채 발견되곤 했단다.


저녁 때가 되어도 여자아이를 찾지 못하자, 마을 사람들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강을 헤매기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여자아이는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강가에 엎드린 채 둥둥 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차마 바라보지 못해 눈을 돌리자, 아이 어머니는 강으로 첨벙첨벙 뛰어들어 물을 헤치고, 죽은 딸을 부둥켜 안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고, 듣는 것조차 견디기 힘든 비명이 울려퍼졌다.


결국 딸을 잃은 가족은 그 후 집을 팔고 어딘가로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그 강 근처에서 무서운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꼭 한여름 저녁, 마침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기 시작할 시간.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이 집에 새파래진 안색으로 뛰쳐 들어온 사람은 처음이 아닌 듯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 사람은 무섭기보다는 묘하게 애틋한 기분이 되었다.


낚시를 하던 곳은 강이 약간 구부러져, 깊은 웅덩이가 생기는 자리였다.


강 상류에서 누군가 떠내려온다면, 시신은 분명 그 자리에 떠오르겠지.




이야기를 다 풀어낸 뒤, 할머니는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가, 두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집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컵을 현관에 두고 돌아왔다.


이후 반딧불이가 날아오를 시간까지 낚시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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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만, 한번도 본 적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전까지는.


그 무렵, 나는 여자친구와 다른 친구 둘까지 넷이서 유자와의 스키장에 스노우보드를 타러 갔다.




유자와에 있는 S 리조트에서 2박 3일을 묵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눈보라가 엄청 치는 시기라, 2박 3일 중 이틀은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날 역시 공교롭게도 눈보라가 몰아쳤다.




오전 중에는 그래도 신나게 보드를 타며 놀았지만, 오후가 되자 눈보라가 강해졌다.


우리는 저녁이 되기 전에 철수했다.


리조트에 돌아와 한숨 돌린 뒤, 돌아갈 채비를 하고 집을 향해 출발했다.




다들 도쿄에 살고 있어서, 돌아오는 길은 칸에츠 자동차 도로를 타고 외곽으로 돌아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눈보라 때문에 유자와 인터체인지가 전면 통제 중이었다.


한동안 분위기를 살폈지만, 통행이 재개될 것 같지도 않아 아래쪽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채지 말고 일단 리조트로 돌아갔다 길이 열리면 갔어야 했다.


아래쪽 길로 내려간 우리는,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주변에 다른 차들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나는 뒷좌석에 여자친구와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차 움직임과 핸들 방향이 맞지가 않는 느낌이었다.


눈길이다보니 타이어가 겉도는 거 같았다.


하지만 친구도 그걸 느끼고 있을텐데, 이상하다 싶어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타이어가 엄청 겉도는데. 좀 천천히 가도 되니까 안전운전 하자.]


평소 친구라면 피자 배달 나갈 때처럼 [안전운전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유쾌하게 대답할 터였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다른 친구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본 뒤, 운전하고 있는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친구는 지금껏 9년간 한번도 못 본,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대답 한마디 없이, 계속 백미러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었는지,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 녀석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차 뒤에 여자가 매달려 있었다.


아니, 차를 멈추게 하려는 듯, 자동차 날개를 붙잡고 온힘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여자친구에게 [뒤를 보면 안돼!] 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운전석에 앉은 친구에게, [야! 더 밟아!] 하고 외쳤다.


지금껏 우리가 하는 말에 대답조차 않던 친구였지만, 문득 정신이 들었는지 [알았어.] 하고, 공포를 억누르는 듯 작게 대답했다.


차는 미끄러지듯 눈길 위를 달려, 무서운 속도로 산길을 빠져나갔다.




오히려 스피드를 내니 타이어가 덜 미끄러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날개에 매달려 있던 여자가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겨우 안심하던 우리는, 여자친구의 비명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자친구 옆 창문 너머, 그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달려서 우리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시속 60km는 족히 밟고 있었을텐데, 그런 자동차를 따라 달리다니.




언뜻 보았던 그 얼굴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건가 싶은 순간, 운전하던 친구가 너무 무서웠던지 브레이크를 밟았다.


눈길에서 속도를 잔뜩 내고 있었으니, 그대로 미끄러지는게 정상일 터였다.




하지만 ABS가 제몫을 다했는지, 차는 안전히 멈춰섰다.


정신을 차리자, 여자는 우리 차 앞에 서 있었다.


운전석의 친구는 [으악!] 하고 소리치며, 액셀을 죽어라 밟아 여자를 향해 달렸다.




차에 부딪히는 그 순간에도, 여자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게다가 차에 치이는 느낌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겁에 질린 채 차를 몰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차는 시가지에 도착했다.


나는 [보이는 편의점 있으면 바로 들어가자.] 라고 말했다.




곧 편의점이 보여, 우회전해서 그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회전을 하려고 속도를 줄인 순간, 툭하는 소리가 났다.


체인이 떨어졌나 싶어,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여자 것으로 보이는 긴 머리카락이 수도 없이 체인에 감겨 있었다.


그 후 우리에게는 별 일은 없었다.


친구들 중에도 영감이 있다는 사람은 없고.




하지만 다시는 그 근처에 찾아갈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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