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ground

파티에서 생긴 일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10. 21:39
320x100

*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















파티에서 생긴 일




나는 지금 고등학생을 흥분케 하는 3요소와 함께하고 계시다. 그것도 셋을 동시에.


첫째, 하우스 파티 장소로 향하고 있다. 분명 그곳에서 제대로 된 리큐어를 찾을 수가 있을 거다. 하다못해 럼이라도. 둘 다 없더라도 문제없다. 내가 하나 가지고 있거든.


둘째, 당장 인접한 주(州)로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기름이 채워져 있는 오픈카. 말이 필요하랴! 비록, 10년 넘은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이긴 하지만.


셋째, 옆자리의 골 때리는 친구 놈. 이놈은 옆집에 사는 애런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바보짓을 할 때면 항상 함께였다. 사실 이 세브링도 이놈 거다. 제 큰아빠한테 물려받은 건데 웃기게도 아직 면허가 없어 이렇게 내가 매번 운짱을 맡는다.


애런은 불룩 나온 배 때문에 서 있는 상태에선 자기 발을 못 볼 정도의 뚱땡이에다 흑갈색 곱슬머리를 한 대단히 웃기는 놈이다. 동시에 애런은 학교 제일의, 아니, 카운티 내 최고의 색골로 만약 물어만 본다면 심지어 아무 여학생의 사타구니 털 개수까지도 척척 대답할 놈이시다.


그리고 나, 개빈. 평범한 가정환경, 중하위권 성적,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6피트를 넘는 키(이모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매번 왜 이렇게 컸느냐며 야단이다)에다 제법 멋들어진 컬의 모질과 고르고 하얀 치아를 지니고 있어 향후 20년간은 외모 덕을 톡톡히 볼 십 대다.



"그나저나, 개빈. 우리 오늘 몇 시까지 있을 수 있는 거냐?"


"못해도 11시. 아니, 12시. 우리 꼰대들 오늘 할머니 댁에 갔다가 오거든."


"오, 개빈이 엄마아빠를 꼰대라고 부른대요. 오늘 또 땡깡 부렸다고 엉덩이 맴매라도 맞았나 보지?"


"닥쳐, 똥돼지. 그나저나 확실해? 진짜 괜찮은 애들로 산을 이루고 있다고?"


"이봐, 개빈. 그거 알아? 난 가끔 너한테 했던 말을 또 해야 할 때마다 네 입 구멍에 우리 할아버지가 사용한 기저귀를 쑤셔 넣고 싶은 거? 너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냐? 야시엘네 대저택이라고! 그 야시엘!"


"..나도 알아, 야시엘이 누군지. 지나가다 본 적 있어. 네 똥차 값보다 비싼 타이어를 4개씩이나 박아놓은 차를 몰고 가던 거. 그래.. 그 야시엘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그 멕시코 놈 집안은 뭐 하길래 그렇게 돈이 많은 거야?"


"이런, 이런. 선생, 멕시칸이 여기 와서 그렇게 떵떵거리고 산다면 뭐겠어?"


"뭐? 뭔데?"



애런은 대답 대신 검지를 치켜들어 자신의 코밑에 바짝 대고는 바깥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에 콧숨을 한 차례 훅 소리 내어 들이마셔 보였다.



"뭣?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당신의 상식 머리시네요, 선생."


"상관 안 해. 여자들만 많다면야."


"걱정 마시게, 형제여. 성경에도 나와 있어요. 마약이 있는 곳에 여자가 꼬이는 법일지니."



애런과 내가 파티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분위기가 한창으로 접어들었는지 저마다 짝을 지어 서로 음탕한 눈길을 건네고 있었고, 패배자들은 외곽에 띄엄띄엄 자리한 채 포기를 모르는 질척한 눈빛으로 사방을 내리훑고 있었다. 우리? 물론 도착과 동시에 애런과 나도 미친 듯이 주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삼 빠떼루지! (애런이 제 큰아빠한테서 배워온 유행어다)


그리고 그때였다. 시야에 한 여자애가 들어온 게. 그 애는 동그랗고 작은 반원의 이마가 돋보이도록 연한 다갈색 머리를 야무지게 묶어 올렸으며, 키는 작지만 긴 다리가 부각되도록 딱 알맞은 길이감의 청바지를 입고서, 흰 티 밖으로 친오빠 옷장에서 꺼내온 듯한 검정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아니, 실은 내가 왜 그런지 확실히 알지만) 나는 그 애에게 감히 눈을 떼지 못하고선 시종 가슴팍 어딘가가 애리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그 애만이.. 젠장, 이런 진부한 표현을 할 줄이야. 마치 그 애만이 주변보다 더 또렷히 보이는 듯했다.



"선생,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누구야?"


"쟤를 몰라? 아.. 그렇지. 미안. 할아버지 병상이랑 장례 때문에 최근 학교에 잘 못 나왔었지.. 여하튼 이름 킴벌리 로렌, 뉴저지에서 얼마 전 이사 옴, 무남독녀, 성적은 중상위권, 아직 어울리는 그룹 없음, 피우는 담배 브랜드는.."


"좋았어!"


"어..? 잠깐, 개빈. 잠깐, 잠깐. 너.. 쟤한테 들이대려고?"


"당삼 빠떼루지, 인마!"


"포기하는 게 좋을걸? 쟤가 깐 남자애들만 모아도 카운티를 형성할 수 있을 거다. 그 안에서 곧 선거인단도 발족할 수 있겠고. 우리 학교의 자랑 쿼터백 왕자님께서도 2초 만에 까이셨다니까!"


"..왜?"


"..왜라니? 너 지금 왜냐고 물은 거냐? 너도 가끔은 네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해보는 게 어때? 왜긴 왜겠냐, 레즈니까 그렇지. 아니고서야 쿼터백 왕자를 쳐다도 안 보고 까버리겠냐? 봐봐! 이러는 동안에도 저기 한 명 더 까였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뭐, 다른 이유 뭐?"


"아마 아직 마음에 차는 남자를 발견하지.."


"오, 야훼시여! 돌아가시겠네! 개빈이 또 똥 잡수시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내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개빈, 아빠 말 잘 들으렴. 널 위해 충고 하나 해줘야 할 시간이구나. 잘 들어, 얼빵아. 네가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는 건 나와 함께 있어서야. 알아들어? 여기 이 2-300파운드짜리 유대인 놈 옆에 서서 미소를 보내기 때문에 여자애들이 받아주는 거라고! 개빈, 아빠는 네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다물어, 개빈. 그건 부족한 놈들이 스스로를 기만할 때나 외우는 주문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 자, 정신 차리고 빨리 다른 여자를 찾아봐. 기왕이면 두 명으로. 난 정말 아무나 괜찮으니까."


"..좋아, 이 꼬부랑 털 돼지 놈아. 너 만약 내가 저 여자애와 함께 여기 저택 문을 나서면 어쩔래?"


"..네 말은, 지금 쟤를 꼬셔서 같이 나갈 수 있다고?"


"어이, 가는 귀가 먹으셨나? 왜 했던 말을 또 하게 만들지? 입 구멍에다 너네 할아버지 기저귀를 쑤셔 넣어 줄까? 자, 내가 저 여자애와 그러면 어떻게 할래? 대답해보시지, 선생."


"좋아! 네가 성공하면, 내가 네 꺼 한 번 빨아준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마치 마상시합에 출전하는 앙리 2세마냥(뭐, 비록 그는 시합 중에 뒈졌지만) 당당한 보무로 그 애에게 다가갔다. 뒤편으로 '개빈, 그냥 아빠 품으로 돌아오렴.'이라고 조롱하는 애런을 무시하고서. 그렇게 나는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서 그 애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용기 있다고? 아니, 사실 나는 엄밀히 말해 겁쟁이에 속하는 편이다. 애런의 도발에 적잖게 흥분해선 반발심에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 그건 그저 핑계이며 사실 나는 뭐든 상관없으니 그저 그 애와 한순간만이라도 눈을 맞춰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그 단편적인 기억조차도 내게는 두고두고 환희로 박제될 게 분명하리란 직감해서였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안녕, 킴벌.. 로렌."


"..안녕."


"아, 나는 개빈이야. 개빈 마틴."


"술 이름 같네. 근데 너 나 아니?"


"어.. 응, 우리 같은 학교야. 그리고.. 사실 네 이름은.. 저기 돼지 몸통에다 사람탈 올려놓은 애 보여? 쟤가 알려줬어. (애런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마디로 정보통이지.. 너도 학교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쟤한테 물어보면 돼."


"그래, 고맙다."



마뜩잖아하는 그 애를 앞에 두고서 발작해대는 심장이 내게 유혹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인마, 당초 소원을 풀었잖아. 이제 돌아가자. 꼭 한 발 더 내디뎌야 늪인 걸 아는 게 아니니까.' 허나 나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서(사실 순간 넘어갈 뻔했다) 크게 양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이고는 다시 그 애에게 말을 붙였다.



"좋아. 로렌, 지금 나한테 1쿼터만 시간을 내줄래? 어쩌면 지금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고작 1쿼터야, 15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레미 마틴?"



사실, 그 순간 내 몸의 모든 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에 휩싸였었는데.. 동시에, 우습게도 내 입은 스스로 움직여 말을 내뱉고 있었다.



"15분이야. 너 혼자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어도 어차피 15분은 흘러."



그리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애의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더니 곧 삐딱하던 몸을 풀어 완전히 내 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반가워, 개빈. 나는 로렌이야. 킴벌리 로렌. 어.. 지금 공 울렸어."



그다음?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원래 중요한 순간이란 건 그런 거다. 그저 나는.. 1쿼터 동안 나 자신을 기꺼이 내던졌고..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는데..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난 존재 같았다. 그건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쿼터 버저가 채 울리기도 전에

그 애는 나를 받아주었다.


뭐.. 이후 한 차례 실수를 하긴 했다. 무슨 실수냐 하면,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그때껏 팽팽하던 긴장이 풀리면서

흔히 저지르곤 하는 '말실수' 말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그 실수가 우리의 관계를 극적으로 끌고 가기는 했다만.



"사실 너한테 말 걸기까지 많이 걱정했거든."


"왜?"


"네가 지금까지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고 들어서. 그래서 네가.. 아.. 음.."


"레즈라고?"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 순간, 그 애가 까치발을 들어 내게 기대는가 싶더니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말했다.



"지금 증명이 된 거지?"



이제 우리는 시끄러운 곳을 벗어나 좀 더 사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나는 그 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애런에게 돌아갔다. (그때까지 애런은 나를 마치 두 발 자전거에 처음 도전하는 자식을 지켜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애런."


"믹 재거 선생께서 오셨군. 그래, 알았어. 지금 빨면 돼?"


"아니, 괜찮아. 대신 정말 미안한데.. 그.. 차 좀 빌릴 수 있을까?"



애런은 잠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내게 건넸다.



"당삼 빠떼루지, 인마! 걱정 말고 쓰게나, 친구. 시트 더럽히지만 말고. 나는 마약왕이랑 코카인이라도 하다가 카풀할 테니까."



애런은 정말 멋진 놈이다!




 



나는 그 애에게 우리 마을 최고의 야경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며 야경보다도 빛나는 시간을 공유했다. 그렇게 자정 즈음..


있지 말이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종종 허세를 떨어야 하는 가련한 동물인 법이다. 나는 그 애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을 할 엄두조차 내지 않고선 집에 데려다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애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고 절대 찌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그 애가 시선은 정면에 둔 채 나지막이, 그러나 명료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서 조금 더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지 몰라. 사실.. 우리 부모님이 오늘 집을 비우셨거든."



그 말에 나는 제한속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링컨이 운전대를 잡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코너가 연속해서 나오는 좁다란 진입로에서 차선에 걸쳐 돌던 중 마주 오는 차량과 가까스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젠장! 애런은 집 나간 전조등 하나를 도통 교체할 생각을 안 한다) 우리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숨넘어가듯 웃어 젖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다면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사랑은 종종 사람을 비상식으로 몰고 가는 법이다.


그렇게 마지막 코너에서 차선을 걸친 상태로 가속 페달을 밟았고, 커브 길을 빠져나온 순간 채 인식을 하기도 전에 번쩍거리는 빛이 시야를 온통 채워버렸다. 신경을 긁어 대는 경적음과 함께. 그리고 나는 찰나였지만 내 시야가 뒤집힌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추억을 공유하던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겠다.



"저런 후레자식 같으니!"



나는 가까스로 핸들을 꺾어 마주 오던 차량을 피하고는 외쳤다. 옌병할, 안 봐도 뻔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십 대 놈이겠지. 십 대 놈들은 정말이지, 대관절 무슨 배짱으로 자기에겐 불운 따윈 찾아올 리가 없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조심성이라도 부리면 사탄이 거시기라도 쥐어뜯어 가는 줄 아는 족속들.


나는 잠시 막 스쳐 지나간 차량이 전조등 불량이란 것을 떠올렸지만 지금 시각까지 보안관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서 집에 가서 몸뚱어리에다 따뜻한 물을 뒤엎고선 마누라와 함께 딸애가 보낸 손자놈 영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마누라가 슬쩍 먼저 봤을지도 모르겠군. 마누라는 그런 면에선 일견 뻔뻔스럽거든)


그때였다. 내 뒤편으로 날카로운 경적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차를 세우곤 잠시 눈을 껌뻑인 뒤(옌장, 늙으면 무언가를 깨닫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 부리나케 차를 돌려 충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곧장 경찰과 구급대에 신고를 한 나는 사건 현장을 5초 정도 둘러보고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경찰만 불러도 될 뻔했군.'



현장을 모두 둘러본 후 널브러진 두 차량 저 너머로 누군가가 쓰러져있는 것을 목도했다. (아마 컨버터블 차량에서 튀어나간 거겠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고, 나는 쓰러져있는 사람이 바로 개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은 지나가다 마주칠 때나 인사를 나누던 개빈이지만 어릴 때는 종종 주말이면 우리 집을 찾아와 보안관 놀이 따위를 하다가 마누라가 만들어준 쿠키를 먹곤 했다. 또, 방학 때는 잔디밭을 깎아주고선 수고비를 받아 가기도 했었다. 개빈은 아주 훌륭한 일꾼이었다. 정해진 돈만을 타 갔고 건강보험을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나를 보안관 아저씨라 부르던 개빈, 그 애는 커서 나 같은 보안관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아니, 그건 우리 딸애였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점점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져 간다.



"얘야, 개빈! 내 말 들리니?"


"..보안관 아저씨.."


"그래, 보안관 아저씨란다. 개빈, 세상에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제가.. 바보같이.. 사고를.. 아저씨.. 제 옆에 탄 애는요..?"


"누구 말이니, 개빈?"


"..제 옆에.. 킴버가 타고 있었어요.. 아주 좋은 애예요.. 무사한가요..?"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그저 개빈의 얼굴 여기저기를 손으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킴버.. 좋은 아이인데.. 나 때문에.."


"개빈, 이건 사고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우리 차랑.. 충돌한 차.. 그 사람은 괜찮나요..?"


"..개빈,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개빈.. 오, 신이시여!"



부품이 어지럽게 헤쳐진 차량마냥 개빈의 몸 또한 그러했다. 나는 개빈의 온전한 손 한쪽을 두 손으로 움켜쥐느라 흐르는 눈물들을 그저 밑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아저씨..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해요.."


"그래.. 그래.. 게빈, 그러마."


"..킴버.. 킴벌리 로렌네 부모님에게.. 정말 정말.. 죄송하다고.. 그리고 다른 운전자.. 가족에게도.. 너무 죄송하다고.. 애런에게는 차를.. 걔는 아마.. 벌써 용서했을 거예요.."


"그래.. 게빈.. 아저씨가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하마."


"..그리고.. 보안관 아저씨.. 약속해요.. 우리 엄마 아빠한테.. 그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 좀 내버려 둬요.'예요.. 그분들께.. 꼭 전해주셔야 해요.. 개빈이 너무나 사랑한다고.. 다시.. 다시.. 엄마 아빠 자식으로 태어나면 안 되냐고.."


"..그래. 개빈, 보안관 아저씨가 반드시 약속하마. 약속하마."


"..아저씨.. 나 때문에.. 죽었어요.. 나는 지옥에 갈 거예요.."


"개빈, 그렇지 않아. 사고였다. 누구한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너무 추워요.."


"..개빈, 신이 곧 너를 따뜻하게 품어주실 거다."


"..아니요..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그러지 않으실 거예요.. 그분은 나를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서.. 가.. 멀리 가거라.. 여긴 네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실 거예요.."


"오, 개빈.. 절대 그렇지 않단다.... 개빈? 얘, 개빈아. 개빈? 개빈?"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세상의 아이러니와 마주한다는 거다. 만약 개빈이 1-2초만 늦게 코너에 진입했다면, 만약 개빈이 가속 페달을 1파운드만큼만 덜 밟았다면, 만약 개빈이 핸들을 몇 인치만 덜 돌렸다면.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신의 뜻을 찾으란 말인가? 오늘 밤,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나는 경찰 차량과 구급대 차량 사이로 구급대원이 시신 네 구를 옮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그 옛날 잔디밭을 깎으면 수고비를 주겠다던 나에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에요.'라고 외치던 꼬맹이 개빈이 떠올랐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일면식인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예리하게 뜬 달 너머로 칠흑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부디, 이 사과가 개빈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개빈, 얘야.. 미안하다. 네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구나."





-fin-




















후기


본 이야기의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온전히 교감하기 위해선 짧은 글 안에다 개빈, 애런, 그리고 로렌 간의 무고한 천진함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러니까, 읽는 이들이 이 셋을 그전부터 잘 알던 사이로 느껴야 했다는 뜻이다.


내 의도가 어느 정도나 들어먹혔는지는 모르겠으나(살면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치는 법이니까), 만약 제대로 전달받은 이라면 '독자의 바람이 담긴 그릇'에다 뱉어놓은 내 환희의 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58692199

320x100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  (5) 2018.01.30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5) 2018.01.29
어느 사형수  (2) 2017.12.09
귀신 들린 집  (4) 2017.12.04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0) 2017.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