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
제대로 죽을 준비
변기 물로 참방하게 잠긴 흑갈색 똥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월트 벨은 생각했다.
좋아. 잘 나왔군. 최고의 시작이야.
월트 벨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의 가장 큰 난관이라 여긴 일이었는데 전날 밤 뒤척이며 꿈꾼 이상보다도 나은 결과가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아침식사를 신경 썼다지만 노인성 변비가 이토록 시원하게 해결되다니.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입꼬리로 새어 나오는 망측한 웃음소리를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저린 다리 때문에(일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자 평소보다 오래 앉아 있었다) 잠시간 변기 옆 벽면으로 설치된 보조손잡이를 잡고 있어야 했으나 그 지옥 같은 시간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어정쩡하게 굽혀진 무르팍 아래론 잠옷 바지와 트렁크 팬티가 포개져 있었다. 기저귀 따윈 없었다. 기저귀는 어제 모두 처분했다. 더는 기저귀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똥을 잘 싸야 했는데 뜻대로 됐다. 설사도 아니고 나오다 만 조각들도 아니고 된 똥이었다. 설사면 매시간 지리느라 시간을 축냈을 테고 나오다 만 조각들이었다면 거북함 때문에 온종일 신경을 빼앗겼을 거다. 그런데 된 똥이라니. 이제 하루를 마음먹은 대로 마무리 지을 수가 있다.
월트에겐 명확한 철학이 있다. 모든 일에 앞서서 성사를 좌우하는 건 똥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라는 게 그렇다. 게티즈버그에서 링컨이 사람들의 영혼을 투과한 건 연설 덕택이었다. 하지만 똥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면 어땠겠는가? 그 연설은 역사 속 기록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서너 시간이나 이어진 행사 동안 악다구니로 똥을 참으면서 찬바람은 쉬지 않고 아랫배를 때리는데 이미 죽은 놈들이 뭐가 대수겠는가. 매가리 없고 거북해 보이는 목소리와 초조한 표정, 링컨은 역시 교양 머리 없는 켄터키 촌놈이고 게티즈버그엔 에버레트의 이름만 남았을 거다. 또 모르지. 연설 도중 못 참고 흘렸다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민주당이 당시 불던 反링컨 바람을 지피며 다음 해 선거에서 탄핵시켰을지도. 세상만사는, 특히나 큰일을 앞두고선 똥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똥의, 똥에 의한, 똥을 위한 시작이 필요한 거다.
잘 가게, 친구. 월트는 마지막 작별 인사와 함께 변기물을 내리고는 똥 덩어리들이 휴지 더미와 뒤덥혀 휘몰아치는 걸 묵묵히 바라봤다. 주섬주섬 아랫도리를 추켜올린 뒤엔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자신과 마주했다. 얼굴 전체로 새겨진 주름은 세는 게 무의미했고 이마 위로 덮여진 검버섯 주변으론 정전기 맞은 듯 곤두선 백색의 색실들이 새싹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누구도 사려고도 또 원하지도 않는 땅 위로 무의미하게 남겨진 새싹들. 하지만 그 밑의 양 옹이구멍으론 막 벌려진 독수리의 부리마냥 불꽃이 튀고 있었다. 월트는 탁하고 잠긴 목소리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소화하듯 힘 있게 중얼거렸다. 시작해보자, 월트.
태양이 꼭대기로 위치한 가운데 월트는 집의 가장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4평짜리 지하 창고는 채워져있는 짐보다 퀴퀴한 냄새와 먼지 덩이들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짐들은 죄다 가지런히도 정렬돼 있었는데 그 때문에 실지보다 더 양이 적어 보였다. 하지만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정반대였었다. 그간 월트는 이 창고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분류했다. 필요한 것들을 격식에 맞게, 소중한 것들은 순서에 따라 차곡히, 그렇지 못한 것들은 기저귀 떼와 함께 처분하면서. 남의 인생사에 훈수 둘 때처럼 참으로 야무지게도 해낸 것이다.
월트는 짐들이 각각 자기 자리에 맞도록 배열되었는지를 눈으로 훑으며 동시에 짐을 이루고 있는 상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다 짐들 가장 위에 자리한 베이지 색상의 상자로 향한 손으로 조심스레 그 누렇게 바랜 뚜껑을 열어젖혔다. 상자에서 흑백사진 더미들을 집어 든 월트는 의식적으로 한 차례 훅하고 숨을 내쉬곤 사진으로 시야를 고정시켰다. 그것은 며칠 전부터 지하 창고 대정리를 펼치며 가장 마지막에 할 일로 점찍어둔 일이었다.
첫 번째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한 장씩 넘기며 이 사진으로 돌아오면 이제 지하 창고에서의 업무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 사진엔 고만고만한 키의 세 아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셋 모두 제각각의 앞니들이 훤히 드러나도록 웃고 있었고 옷매무새 밖으론 똥배가 볼록하고 솟아 있었다. 사진 속 월터의 형은 파일럿을 꿈꿨었다. 그 시대 남자애들 누가 안 그랬겠냐마는. 아쉽게도 월터의 형은 평생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배만 실컷 타고서 두 번째 세계 대전지들을 돌아다니느라 말이다. 월터의 여동생은 좀 더 소박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던지라 자기 이름으로 된 옷 가게를 가지는 게 꿈이었다. 비록 그 꿈도 이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 늘 그랬듯 손자 손녀들을 위해 스웨터를 뜨던 와중 세상을 떠났으니 영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소파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더욱 그렇겠다.
사진을 넘기니 이번엔 젊은 청년이 처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자기보다 어린 부모의 사진을 본다는 건 언제나 이상한 순간이다. 이제는 사진을 들여다보는 순간에만 얼굴이 기억나는 부모의 사진을 보며 월트는 혀를 찼다. 아버지, 어머니 전부 이렇게 젊었단 말이야? 사진을 또 한 번 넘기자 젊은 월트의 얼굴이 나왔다. 주름은 어디에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고 하얗게 드러난 건치들은 모두 진짜 자신의 이였다. 활짝 웃고 있는 젊은 월트는 옆의 아리따운 여인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내는 평생을 새침데기 여인네였다. 이제는 십 년이 다 돼가는 어느 날, 면회 종료 시간을 코앞에 두고는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 앞에서 월트는 긴장으로 연거푸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날 월트의 몸속은 사랑으로 충만해 어디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월트는 아내의 손등에 입 맞춰야겠노라고 계속해서 다짐했다. 하지만 쉬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애꿎은 주름들만 미간에 가득 잡히고 월터의 아내는 이 양반이 또 뭐 맘에 안 드는 게 있나 해 물끄러미 월터를 훑었다. 그러다 마치 연극이라도 시작하듯 월터는 뻣뻣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선 그대로 아내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월터의 아내가 웃음을 간신히 참는 얼굴로 올려다보곤 내뱉었다. 월터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멈춰 섰던 손을 다시 움직였고, 월터는 아내는 날다람쥐처럼 민첩하게도 그 손을 빼내들어선 자신의 입을 막고 깔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전쟁에서 다친 몸 하나 없이 돌아와선 가장 큰 역경을 보냈다는 생각에 평생 함께 살고 싶다고 떠듬떠듬 말을 했을 때에도 월터의 아내는 그렇게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깔깔깔 웃어댔었다. 그날 월터의 아내는 월터의 손을 감싸 쥐고는 말했다. 자기 전에 또 맥주 마시거나 그러지 마요. 소피 땜에 깨서는 잠을 설친다고, 이 양반아. 월터는 그날 집에 돌아가 물 반잔만으로 입을 축이고는 단잠에 빠졌고, 도중에 한 번 설침도 없이 다음날 일어나서 마저 물 반 잔을 마시던 중 병원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아야 했다.
사진을 다시 한 장 넘기자 이번엔 웃통을 깐 채 뽀빠이처럼 이두박근을 들어 보이고 있는 두 소년이 나왔다. 한날한시에 월터 부부에게로 왔었던 쌍둥이. 둘은 어찌나 서로가 각별했는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디 스친 곳도 없이 베트남에서 무사히 돌아와놓곤 자동차를 몰다가. 쌍둥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월터는 안타까움보다 화가 치솟았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빨리 왔다 간 건지. 쯧하고 혀를 차고선 사진을 넘겼다. 그리고 또 넘겼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의 사진, 아내와의 사진, 쌍둥이와의 사진, 친구들과의 사진, 남한의 격전지에서 유독 친했던 분대원 둘과 찍은 사진.. 젊은 청년이 처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사진.
깡총히 달린 창문으론 굵다란 빛줄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줄기로 먼지가 사방에서 올라오고, 그리고 내려가고, 또 올라오고들 있었다. 월트는 손을 들어 휘이하고 빛줄기를 저어보았다. 먼지가 손짓을 따라 올라왔다, 내려가고, 올라갔다. 월트는 먼지들이 임무에 따라 각자의 위치로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휘몰아 광풍에 이는 나선들이여.
집안 곳곳을 누비며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내려 확인 작업을 끝낸 월터는 마지막 하나 남은 레트로 고기 수프로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최후의 만찬 치고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할 수 있겠으나 월터의 생각은 달랐다. 괜히 소화라도 안되거나 해서 남은 시간을 엉뚱한 데에 몰두하고 싶지 않았다. 요기만 없애면 그만이었다. 예수라는 양반도 그랬잖은가. 자기 먹을 걸 나눠주면서 말이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그렇지만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똥이란 중대한 거다.
첫 격전지에서였다. 갑작스러운 출전에서 월트는 만 이틀 동안 똥 묻은 팬티(팬티 묻은 똥이 더 맞겠다)에 궁둥짝이 짓뭉개진 채로 사경을 헤매야 했다. 멀쩡히 두 눈 뜨고 움직이는 사경을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전쟁터에서였다. 똥을 지린 게 월터뿐만도 아니었고 말이다.
월터는 제대로 준비를 하려 한다. 아내가 떠난 후 한 번도 종합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 최근엔 각혈과 피똥이 일상이었다. 몸도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심장도 지가 원하는 대로 뛰어댔다. 그러다 요새 며칠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도 세졌다. 월터는 안다. 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고. 제집마냥 병원을 들락거리며 산송장이 되어 걸어 다니지도, 리타이어 커뮤니티에 들어가 흘러감의 공포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생판 남들과 나눠갖지도 않은, 그저 주어진 몸뚱이로 길을 걸어가 총알이 날아올 그곳에 우뚝 선 채로 앞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말이다. 월터는 안다. 자신에게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라고. 평생 이 몸뚱이만 사용해왔다. 이 정도면 가히 최우수 고객이 아니겠는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 사용일이다. 월터는 제대로 죽을 준비를 하려 한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절도있게 식사를 마친 월터는 현관문을 열고 앞마당에 나가 입속에 잔뜩 머금은 채 가글 하던 물 한 바가지를 그대로 투하했다. 그리곤 몇차례 마저 침을 주륵 내보내고선 고개를 들어 무심코 옆을 보자 이웃집 꼬마 놈이 시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벨 할아버지."
꼬마가 목청껏 인사했다. 몇 달 전 이사 온 이래 늘상 월터만 보면 저리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며 인사한다. 망할 것, 누굴 귀머거리로 아나. 월터는 평소대로 고개만 한 번 까닥하고는 하늘로 시야를 돌렸다. 어느새 태양은 잔뜩 취한 양 뻘건 빛으로 세상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벨 할아버지."
월터는 깜짝놀라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웃집 꼬마 놈이 어느새 다가왔는지 바로 앞에서 월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도록 치켜올려 쓴 야구 모자는 군데군데 땀 때문인지 하얗게 바래있었고 손으론 형형색의 찍찍이 캐치볼 세트가 쥐어있었다. 꼬마는 잠시간 눈을 내리깐 채 찍찍이 공을 주물 거리더니 발작적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데이비드 그레이프예요. 벨 할아버지.. 벨 할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들었어요."
"뭣?"
데이비드가 거의 소리 지르듯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월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내저어야 했다.
"이놈아! 뭐라고 했냐고가 아니라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이냐는 거다! 귀 안먹었으니 작게 작게 말해!"
월터의 노성에 데이비드는 그냥 뒤로 내빼야하나를 잠깐 고민했는지 몸을 쭈뼛거리다 입을 뗐다.
"죄송해요. 평소에 인사를 해도 반응이 없으시길래 할아버지가 소리를 잘 못 듣는지 알았어요."
"..용건이 뭐냐?"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참전용사라고 들었어요. 학교에서 친구들한테요."
옌장할. 월터는 구태여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서 혀를 쯧하고 찼다. 불 보듯 물 보듯 뻔한 거 아닌가. 저 또래 남자애들이 다 죽어가는 영감을 앞에 두고서 눈을 뒤집는다면 그다음 나올 질문은 하나다. '진짜 사람 쏴봤어요? 몇이나 죽였어요? 히틀러 본 적 있어요?' 월터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짐을 느꼈다. 자신과 관련 없는 것에 단 1초도 신경을 기울이기가 싫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래도 되는 거 아닌가.
"난 지금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렴."
월터의 냉랭한 어조에 데이비드는 눈을 내리깔아 애꿎은 캐치볼만 손안에서 굴려댔다. 캐치볼은 이미 땅바닥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왔는지 간신히 본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분명 저 찍찍이 캐치볼 세트로 인해 데이비드가 또래들로부터 심심찮게 조롱거리가 되어왔으리라 월터는 확신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같은 사내끼리는 분명 알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이다. 월터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데이비드는 찍찍이 글로브에 고정되어있던 손을 황망히 빼들고는 입을 열었다.
"버즈 형이 진짜 소가죽으로 된 근사한 글러브랑 야구공을 사준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했어요. 전부 중고가 아니라 새 걸로 사주겠다고요. 근데 언제 돌아올지를 모르겠어요. 형은 지금 멀리 가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옆집 큰아들 놈이 언제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다. 덥수룩한 머리에다 코와 턱으론 양 새끼마냥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수염보단 여드름 자국이 더 많을 정도로 애송이였다. 아마 그 애도 성인이 되고서 미주리의 변변찮은 사내놈들처럼 한 가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월터는 생각했다. 남의 목장 봐주기 따위를 해오다 자신은 다른 치들과 다르다며 집을 떠나서는 결국 살충제 공장들을 뺑뺑이 돌거나 아니면 노상에서 컨트리 음악을 믹싱한 CD를 관광객에게 팔거나 말이다.
"형은.. 지금 이라크에 있어요."
어이쿠. 그래, 그게 남아있었지. 약 팔고 마트 털던 놈들까지 끌어모으는 판국에 이런 미주리 촌놈은 더할 나위 없는 재원이지. 이 나라는 여적 변한 게 없다. 진짜 명예란 게 뭔지도 구별할 줄 모르는 애들에게 총을 쥐여주고는 죽음의 골짜기를 타도록 한다. 이 나라는 모른다. 똥 지리는 공포가 무엇인지를. 그저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가장 악독한 개새끼가 되도록 가르칠 뿐이다. 가르치는 건 누구나가 할 수 있다. 그럴듯하고 이치에 맞아 보이는 말을 떠벌리면 되는 거다. 하지만 똥 지리는 건 다른 문제다. 똥은 지려본 놈만 아는 거다. 더 큰 문제는 똥을 지릴 놈들이 태생적으로 정해져있다는 거겠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게 뭐니?"
"전쟁에 나가면.. 그러니까.. 열 명 중에 몇 명이 무사히 돌아오나요?"
오, 신이 있다면 이런 빌어처먹을.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내가 뭐라고 대답해줘야 한단 말이오. 네 형은 무사히 돌아올 거다.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하니까. 우리의 신념이 더 고귀하니까. 우리는 신의 수호를 받고 있는 나라니까. 이러면 되오? 변변찮은 곳의 촌놈이 최전선에서 총포로부터 모두 빗겨나도록 당신이 힘이라도 써주는 게요? 월터는 잠시간 그저 데이브를 묵묵히 내려다봐야만 했다. 그 침묵에 데이브가 막 불안감을 느끼려던 찰나 월터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뱉고선 지하 창고를 향해 뛰듯이 걸어나갔다. 허벅지 근육은 나흘 전 전부 사용한 줄 알았는데 아직 여분이 좀 남아있었는가 보다.
다시 돌아왔을 때 월터의 손에는 투명한 아크릴 플라스틱제 키링이 하나 들려 있었다. 월터는 그 키링을 데이비드에게 쥐여주고는 말했다.
"자, 얘야. 받으렴."
"이게 뭐예요?"
"이건 내가 전쟁에 나갈 때 아내가 가지고 있던 부적이란다. 이 투명한 플라스틱 말고.. 여기 안에 보이지? 네잎클로버란다. 원래 클로버는 잎이 세 개뿐인데 이건 네 개지. 그거 아니? 만 개의 클로버 중 한 개만이 이렇게 잎이 네 개란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가져온단다. 나폴레옹이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서 허리를 굽히자 그 위로 총알이 지나갔지. 또 항상 네잎클로버를 지니고 다니던 링컨도 깜빡하고서 빼먹은 날에 극장에서.."
"알아요! 머리에 총을 맞았어요! (데이비디는 공갈 총을 한 자신의 손을 머리에 대고는 푸슝하고 소리냈다)"
"그래, 그만 네잎클로버를 까먹었던 게지. 하지만 내 아내는 그러지 않았단다. 내가 전쟁에 나간 날부터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어. 덕분에 나는 다친 데 하나 없이 돌아올 수 있었고 말이다. 이걸 너에게 주마. 나는 이제 아무래도 전쟁에 나갈 일이 없을 것 같구나."
데이비드는 마치 마크 맥과이어의 사인볼이라도 거머쥔 양 입꼬리를 있는 대로 올려 미소를 지었다. 옌장, 대체 어떤 쾌변을 하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 거람.
"데이브!"
어느새 집 밖으로 나왔는지 옆집 현관문 앞에서 데이비드의 엄마가 이쪽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윽고 월터와 시선이 마주쳐진 그녀는 짧게 목례를 해왔다. 월터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근심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데이비드에게 이만 엄마에게 가보라고 재촉했다. 호시탐탐 애들 엉덩이를 후리려는 치들이 사방에 놓여져있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죽고 나면은 그런 오해를 설명할 기회도 없어지는 법이다. 이미 죽고 나면 뭔들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호색한 영감쟁이로 마녀사냥 당하는 것만은 사양이올시다. 그 대상이 자기만 아니라면야 마녀사냥만큼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또 없지 않은가.
데이비드는 연신 미소 지어진 얼굴을 한 채 한 손으로 키링을 치켜들어선 월터를 향해 '꼭 품에 지니고 있을게요!'라고 외치고는 제 엄마를 향해 뛰어갔다. 월터는 모자가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까지를 지켜본 후 다시 하늘로 시야를 돌렸다. 뻘건 빛을 내뿜던 태양은 이제 취기에서 돌아왔는지 장막 속으로 그 부끄러움을 막 숨기려 하고 있었다. 얼마 후엔 달이 자리를 대신하겠지.
문득 월터는 정말로 데이비드의 형이 무사히 돌아오리란 확신이 들었다. 미주리맨에겐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가 중요하다지만, 그리고 비록 네잎클로버 키링 자체가 실은 아내가 언젠가 길거리 히피에게서 적선하듯 구입한 거였지만 말이다. (그 히피 놈이 곧장 떨을 사 피웠을 거라고 전 재산을 배팅할 수 있었지만 그날 월터는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가 가면 하나가 오는 법이다. 우리는 이 나선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빤스가 벗겨지지 않도록 잘 붙들어매고 있어야 할 따름이다.
하늘로 시선을 두고 있던 월터는 한 마디 읊조려 주고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내가 뻥 좀 쳤수다. 당신네 십계명은 거진 엉터리야. 처음부터 잘 좀 만들지 그랬수."
이제 마지막 의식으로 월터는 정성스레 샤워를 했다. 이미 쭈글쭈글한 손이 더욱 쭈글탱해질 때까지. 그리곤 준비한 잠옷(월터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잠옷으로, 곤색에 가로와 세로로 빗금이 새겨진 상하의 세트였다)을 입고선 주방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 최전선에는 미첼롭 앰버박 한 병과 지퍼팩으로 봉해진 소고기 육포 한 점이 열을 맞추고 있었다.
침실로 가 침대에 걸터앉은 월터는 병따개로 맥주병을 두 번, 세 번에 걸쳐 간신히 딴 후 한 모금, 두 모금, 그리고 세 모금 쉬지 않고 기울였다. 이어 지퍼팩 위로 놓인 육포도 손으로 한 점 잘게 찢어선 입으로 가져갔다. 최상의 파인컷. 작은 미소와 그보다 더 작은 중얼거림을 내뱉은 월터는 따진 맥주 뚜껑으로 조심스레 맥주병 아가리를 닫은 뒤 역시 남은 육포를 지퍼팩에 안치하고는 꼼꼼히 봉했다.
월터는 침대 옆 소형 탁자로 자리한 맥주병과 지퍼팩 옆의 봉투를 집어서는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무늬라곤 가로줄이 전부인 편지지에는 몇 줄 안되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건 자신 명의로 된 소박한 재산들을 어디 앞으로 남기는가 하는 따위의 글이었다. 월터는 만약 아내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에게 종용했을 선택지인, 그리고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던 본인을 위해 격주마다 봉사단원을 보내 잡일을 봐주면서 생전 개근생인 아내의 부탁을 지금껏 실천해온 마을 교회로 그 대상을 정했다. '할렐루야! 월터 벨 씨가 마지막에 회개하시어 주님 곁으로 떠났습니다.'라며 호들갑 칠 교인들을 떠올리면 배알이 꼴리는 감도 있었으나 어쨌든 유일하게 남은 호의는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살아있는 동안 받은 호의를 모두 갚아온 월터에게 있어(갚기도 전에 죽어버린 자들의 호의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뭐, 어떠랴. 본디 나이가 들면 까먹고 싶은 건 까먹으며 사는 거다) 마지막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장례절차에 대한 것까지(죽을 놈이 지 묻히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모두 확인한 월터는 편지지를 넣은 봉투를 소형 탁자 가장 앞줄 가운데로 자리시켰다.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는 자신을 몇 차례 흔들어보던 봉사단원의 시야에 최대한 잘 들어오도록. 이어 월터는 찬찬히 고개를 돌아보며 주변을 덮고 있는 어둠 너머를 차례로 훑어내렸다. 총알이 날아올 그 자리임을 재차 확인하면서.
침대에 몸을 뉘인 월터는 가슴팍까지 이불을 올리고선 끙 하는 숨내움과 함께 눈을 껌뻑이기 시작했다.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아내로부터 신을 두고 살아왔던 월터 벨이 이제 마지막 신으로 삼았던 그 자신의 육신을 벗어나고자 하고 있었다. 껌뻑이는 눈과 숨소리의 간격이 아주 부드럽게 늘어나면서 월터는 자신의 모든 게 땅으로 땅으로 점차 동화되는 느낌에 침식당했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월터의 눈은 완전히 감겨졌고 입은 헤 하고 조금 벌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무아의 순간으로 빠지는 와중 월터는 지금 이미 자신의 모습이 누가 보더라도 송장일 거라는 생각에 피식하고 찰나의 미소를 지었다.
모든 날을 위한 하루, 하루를 위한 모든 날. 월터는 제대로 죽을 준비를 했다.
-fin-
후기
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시오.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시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생연분 (3) | 2019.03.31 |
---|---|
Trick or Treat! (3) | 2018.12.15 |
시간은 존재한다 (2) | 2018.07.18 |
Double Down (8) | 2018.06.25 |
그대 커피숍 창가로 악마를 보거든 (6) | 2018.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