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네이트의 입에서 탄성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네이트는 그 말이 어쩐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만 느껴졌다. 적어도, 1973년 그날의 네이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이제 와 그분을 찾다니. 더 일찍 좀 찾았다면 그간 아내한테 주말마다 바가지 긁힐 일도 없었을 텐데. 허나 별수 있으랴. 불신자들에게 있어 '그분'이란 항상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머리를 디미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아니던가. 그러고선 뻔뻔하게도 품평을 늘어놓지. 파티 뒷정리는 조금도 도우려 들지 않으면서.
네이트는 연신 뜬눈으로 고개를 휘저어댔다.
그래도 조는 아니잖아. 시카고에서 조만큼 미사를 열심히 드렸던 자가 있던가? 남쪽 놈들은 당신보다야 메리 제인 여사를 찾고 나머지 여피족 놈들도 스스로를 당신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족속들 아니던가. 하지만 조는 아니었다고.
네이트는 굽혀진 무릎을 펼 여력이 없었다. 날마다 링컨공원을 뛰어다닌 끝에(물론, 그분을 찾아봬야 할 시간에도) 생후 10개월짜리 코끼리의 뒷다리만 한 하체를 가지게 되었지만 네이트가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던 건 그저 맥이 풀려서였다. 그러다 문득 이 사실을 아내에게 무어라 전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혼 조정 기간이 아니고서야(그리고 아내가 아르마니 수트의 변호사 놈을 대동하지 않고서야) 그 어떤 남편이 아내를 슬픔에 빠뜨리고선 기분이 찝찝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슬픔이 몇 시간짜리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네이트는 아예 엉덩이를 깔고서 자리에 앉아버렸다. 어차피 쏟아진 물이 아니던가. 네이트는 다음 일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곤 아내에겐 이 사실을 내일 저녁을 먹은 뒤 잠자리에서 말해주어야겠노라고 결심했다. 오늘 같은 기분에선 '어째서 조 같은 사람이..'라며 흐느낄 아내 면전에다 화풀이할 것만 같아서였다.
어째서긴! 이게 모두 다 그분의 계획이지! 언제나처럼! 늘 그래 왔거든! 왜냐고? 그야 자기 멋대로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까!
조는 분명 조금 별난 사람이었다. 아니, 사실 그를 그처럼 관대하게 표현하는 건 네이트네 부부뿐이었다. 모두들 조를 싫어했다. 그리고 모두 조를 유령처럼 취급했다.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조는 항상 같은 옷을 걸치고 다녔으며(게다가 값비싼 옷도 아니었다), 쓰레기장을 뒤지는 게 하루의 일과였고, 그 역시 다른 이들을 유령처럼 취급했으니까. 맙소사, 설상가상으로 그는 한쪽 다리를 절기까지 했다. 하나 더? 그가 노인이었다는 거였다. 쓰레기를 뒤지는 단벌 노인네를 그 누가 동정하겠는가. 적어도 이곳 시카고에서는 아니다.
그래도 네이트는 사람들이 조금은 비열하다고 여겨졌다. 그건 값싼 동정심에서 우러나오는 비겁한 우월감은 아니었다. 그저, 썩 잘나가는 포토그래퍼의(자식놈 셋과 아내 하나를 여태껏 굶주리게 한 적 없으니, 제법이잖은가!) 관찰안에서 나온 지극히 합당한 결론이었다.
조는 비록 1년 내내 단벌 행색이었지만, 쓰레기를 뒤질 땐 항상 겉옷을 야무지게 개서는 근처 땅바닥 중 가장 깨끗한 곳에다가 조심스레 모셨다. 또, 그에게선 생각과 달리 어떠한 기분 나쁜 악취도 나지 않았다. (뭐,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도중에야 모르겠다만) 이 쓰레기 뒤지기 일과는 그가 일요일을 제외하곤 매일마다 출근하는 직장 일(그는 지역 병원에서 네이트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청소부였다)이 끝난 뒤에야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말인즉슨, 하루 내내 스스로를 기꺼이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호로잡놈들과는 명백히 달랐다는 뜻이겠다. 그는 스스로를 돕는 사람이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게 뭐 어떤가? 우리 모두도 조금씩은 쓰레기를 뒤지며 살지 않는가. 그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있을 뿐. 그리고 다리를 저는 거?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노인네가 온전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다면 그건 그자가 지독한 악당임을 나타내는 거니까.
사람들이 처음부터 조를 '격렬하게'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이 나돌면서부터 급격히 여론이 악하되었다고 할까. 늘 그런 법이다. 언제나 그놈의 소문이 문제다. 조와 관련한 대표적인 소문 두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는, 그가 정신병원에서 도망 나와 이곳 시카고 일대를 돌던 떠돌이였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밤마다 그가 집안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들을 내며 끊임없이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댄다는 것이었다.
허나 네이트는 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조는 벌써 10년 넘도록 네이트가 세놓은 6평짜리 아파트 방(네이트가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로 와 처음 세 들었던 방이었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월세를 밀린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일리노이 주에서 그토록 계약을 잘 이행하는 사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전 세입자들마냥 거렁뱅이들을 끌고 와 떨을 피워대곤 체 게바라 흉내를 내며 이웃집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지도 않았다.
조는 또한 지독한 신사도를 갖추고 있었다. 간혹 이웃 주민이 화풀이할 요량으로 면전에다 이유 없이 치졸한 비난을 퍼부어대도 그저 수줍은 미소로 이렇게 답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근사한 무시 표명인 동시에 상대의 품위를 나락으로 떨구는 기발한 인사법이었다.
"안녕하시오. 내일은 아침부터 비가 올 것 같구려. 우산을 꼭 챙기시오."
사실, 네이트와 조가 사적으로 친해진 것은(적어도 네이트가 조에게 말을 걸면 다음 날 기상예보를 답변으로 듣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1년 전이었다. 정확히 1년 전.
네이트는 큰 목소리로 웃어젖히며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상대에게 마음을 여는(그건 비겁한 기만일 뿐이다) 남자가 아니었다. 네이트의 천성은 접근하는 게 아니라 관찰하는 것이었으니까. 처음 그건 그저 변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날은 아마 수요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목요일이었거나. 확실한 건, 1972년 4월 12일이었다. 네이트는 퇴근 중이던 조와 마주친 자리에서 자못 유쾌한 어조로 물었다.
"풀먼 씨, 퇴근하나 봐요? 이제 보물섬에 가겠군요."
그러자 조가 대답했다.
"아니, 오늘은 일 없다네."
"예? 어째서요?"
"오늘은, 오늘은 내 생일이거든. 그래서 퇴근 후의 일은 하루 쉬려고 하네."
네이트는 그 짧은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날 남은 6시간을 조가 어찌 보낼지가 그려졌다. 생일날 거실 한가운데에서(거실이 따로 있겠느냐마는) 폴란드인이 만든 콘독을 씹어대는 조. 그래도 생일이라고 호사를 부려 큰맘 먹고 산 눅눅한 프라이드 포테이토가 풍미를 더해주겠지만, 어쨌든. 그건 너무도 불공평한 처사였다. 적어도 네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네이트는 그날 조를 끌고 가다시피 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네이트의 아내는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그것도 네이트의 손님이), 특히 조가 바로 그 '조'라는 것을 알고선 꽤나 놀라워했다. 허나 그건 경멸에서 비롯되는 놀라움은 아니었다. 아이가 비에 쫄딱 젖은 들고양이를 당당히 집에 데려왔을 때 엄마가 품는 그런 감정도 아니었다. 다만, 정신병원을 탈출해 밤마다 잡아먹을 아이를 찾아 나선다는(아이가 없다면 길가의 새라도) 이 허튼 소문의 절름발이 노인네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녀는 조에게 생일을 축하해주면서도, 미처 준비할 틈이 없어 네이트 家 식의 전형적인 기름진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 그에게 사과했다. 그것은 진실된 사과였다. 그녀가 간혹 네이트의 누이 도로시에게 하곤 했던 사과와는 달랐다.
저녁 식사 후, 네이트는 생일 케이크를 대신해(허긴, 조가 어느 생일에 케이크를 먹었겠느냐마는) 싸구려 와인 하나를 땄다. 그 와인은 얼마 전 아내와의 외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식료품점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이었다. 종이 재질 포장곽의. 조는 제법 위트가 있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네이트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동의도 없이 와인을 딴 것에도 개의치 않아 했다.
그래도 가장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조였다.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넘기더니 이내 답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네이트 부부가 그때껏 들어본 적 없던 것으로 어느 지방의 마더구스를 비튼듯한 노래였다. 노래를 읊는 조의 목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미성이었던지라 네이트 부부는 마치 크리스마스날 소년소녀 합창단 앞에 선 기분이었다.
"옌장할...."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한탄하던 네이트는 아파트 단지를 나와 공중전화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듯 걸어나갔다. 조의 집엔 당연히 전화 따위는 설치되어있지 않았고 그의 이웃들에게 들러 전화를 빌리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조의 소식을 내 입으로 그런 불한당들에게 알릴 수야 없지.
그렇다. 적어도 이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는. 네이트가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침통한 어조로 내뱉었다.
"여기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건 따위가 아니니까 최대한 조용히 와주세요."
비록 마피아의 궁둥이를 봐주는 시카고 경찰이라지만 그들도 이러한 케이스에선 유능함을 발휘했다. 조는 죽을 때가 되어 죽은 것이었다. 속병 몇 개 정도는 훈장처럼 가지고 있는 나이였으니까. 또, 조는 하늘 아래 혼자였다. 아내가 있었던 적도 없었으며 당연히 자식 또한 없었다. 그는 이미 어린 시절 고아였고 끝내 고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것도 생일날 아침 이 골방 한구석에서. 어쩌면, 조는 그 날 처음으로 생일 케이크와 선물을 받았을 것이다. 그분의 빌어먹을 계획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나단 문 씨, 집주인 되시죠?"
"네, 그리고 신고자죠."
"사망하신 분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친구입니다."
"이분이 당신 앞으로 유서를 남겼네요."
유서라니, 마지막에 가서야 그렇게 보통 사람 흉내를 내는구먼.
"무슨 내용이죠?"
"뭐, 아무래도 유서다 보니 여러 내용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정식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잠깐 보기만 해도 될까요?"
경관은 잠시 네이트를 바라보더니 곧 그러라고 허락했다. 아마, 그는 돈을 받지 않고 부탁을 들어준 최초의 시카고 경찰이었을 것이다. 네이트는 조가 자신 앞으로 남긴 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몸 한번 뒤척이지 않고선 읽어내렸다. 경관의 말대로 여러 내용이 든 유서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정말이지 예상 못 한 것이었다.
아니, 아니지. 그 내용은 계시였다. 네이트는 지난 40년 넘도록 잊고 있었던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어린 시절 교회(부모를 따라 다니던)에서 주최한 성경 암송 대회를 위해 외웠던 구절이었다. (어떤 기억은 어린 시절의 것이 더 선명하게 남아있기도 한 법이다) 당시 네이트는 1등을 해 가죽 커버로 된 조그마한 성경책을 받았는데 아마 상품이 뭔지 알았다면 그토록 열심히 성경 구절들을 외우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건, 그토록 오랜 세월 잊고 지내던 다음의 구절 하나가 네이트의 머리를 강타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건, 네이트가 처음으로 그분의 계획을 신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그 주 주말엔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갔으니 말이다.
나단 문에게.
자네에게 내 모든 것을 남기겠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사과를 해야할 것 같군. 이건, 엄밀히 말해 그냥 종이 더미이거든. 그러나 이보게, 네이트. (내가 자네를 이렇게 부르는 것을 용서해주게나) 이건 내게 가장 소중하고 또 가장 값진 물건이라네. 그래서 어쩌면 자네도 이걸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네. 쓰레기를 뒤지는 노인네에게 관심을 갖는 자네니까 말일세.
이 종이 더미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15,145페이지짜리 동화라네. 내가 50년 넘게 써 내려간 이야기이지. 궁금하면 읽어봐도 좋네. 어차피 자네만 원한다면 이건 이제 자네 것이니까.
네이트, 내 자네에게도 왜 날마다 쓰레기를 뒤지는지 말해주지 않았지. 학교도 변변찮이 못 나온 이 노인네가 별수 있었겠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스스로 자료를 찾고 나설 수밖에. 나는 나를 받아줄 선생과 조언자가 필요했던 거라네.
그리고 이보게, 네이트. 이 변변찮은 노인네가 그래도 자네에게 하나 알려줄 게 생겼으니, 그건 스스로를 도울 것들은 그 어디에서든 찾을 수가 있다는 걸세. 구하라! 그럴 지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이보게, 네이트. 나는 걸음마를 뗄 때부터 혼자였네. 내 옆엔 절름발이 아버지(웃기지 않나?) 하나뿐이었지. 내 아버지는 내가 다 자라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버렸다네.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된 거였지. 그때부터 지금껏 나는 노인네였네.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유령, 누구와도 영혼을 나누지 못하는 이방인. 그렇게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의 삶을 살아왔네. 내게는 어린 시절이 없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네.
자네는 어린 시절 어른이 되고 싶었는가? 그랬겠지. 모두들 그러니까. 그런데 나는 아니었네. 애초에 내겐 어린 시절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나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어린아이가 되고 싶었지.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이야기가 펼쳐질 세계를 창조한 거라네.
이야기의 주인공은 비비안이라는 이름의 소녀일세. 용맹함과 不死라는 축복을 받은 아이이지. 그녀는 아이들을 노예로 부리는 이웃의 군사 국가와 싸우기로 결심했네. 대단하지 않나? 정면으로 시스템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다니 말일세.
네이트, 이 이야기는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휴식처였네. 그래서 이렇게 꽁꽁 숨겨왔던 것이지. 누구든 힘든 하루를 끝내고선 자기만 사용하는 해먹에다 몸을 뉘일 권리가 있는 게 아니겠나. 그러나 이제는 이 해먹을 자네에게 선물하겠네. 말했듯 이 이야기는 이제 자네 것이고 자네의 권리이니 오롯이 자네의 뜻대로 하게나. 이미 그 값은 내 생일날 와인으로 지불이 끝났으니 말일세.
자네 부부에게 주님의 은총과 자애가 항상 함께하길 기도하겠네.
추신. 이미 몇 년도 전부터 내가 이 이야기를 끝까지 써내려갈 수 있을까 의심했네. 내 육체는 진즉에 죽어버려 주님꼐서 걷어가셨으니 말일세. 그렇지만 여기까지 버텨냈고 이제 끝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네. 자비로우신 마리아께서 내 영혼을 기다려주기로 하신 거지. 아마, 내년 이맘때즈음 비비안의 여정과 함께 나 조 풀만의 삶도 마침표를 찍게 되겠지. 네이트, 고마웠네. 자네 부인에게도 안부 전해주게나.
1972년 4월 12일 조가
http://blog.naver.com/medeiason/221072979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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