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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 2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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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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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이름은 할랜드 베일이다. 통칭, 구원자 베일. 직업은 LA에서 제일 잘나가는(그리고 악명 높은) 변호사이고. 내게는 세 가지 룰이 있다.


첫째,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엄마가 내게 '사랑한다 아들아.'라고 한다면 먼저 그 말을 의심할 것. 둘째, 돈 많은 것들의 말을 믿어줄 것. 셋째, 두 번째 룰을 첫 번째 룰보다 우선시할 것.


말했듯, 나는 이 거리에서 '구원자 베일'로 통한다. '이 거리'란 당연히 할리우드를 뜻한다. 세상에서 악명을 떨치기 가장 적합한 곳. 그러니까 이 몸은 돈맛에 눈 돌아가 카메라 렌즈에 중독된 이 거리 종자들의 뒤를 닦아주고 계신다 이 말씀이다. 물론 돈 많은 비치(Beach)년놈들의 엉덩이도.


코카인 빨고서 뺑소니? 내게로 와. 술 자시고 운전하다 차량 서너 대쯤 박았다고? 그 정도는 귀엽지.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다? 뭐, 어때. 건강에 좋다며 아침마다 비타민 대신 섭취하는 놈들도 있는데. 여자 친구 얼굴에 난 멍 자국 좀 어떻게 해달라고? 사흘 안에 여자 친구가 찍소리 못하도록 약점을 물어다 주지.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약속하지, 남편 똥꼬까지 털어주겠노라고.


자, 이쯤 되면 내가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파악이 갈 거다. 그래, 맞다. 철딱서니 없는 할리우드 셀럽, 졸부년놈들의 악어새. 그게 바로 나, 구원자 베일이올시다. ..뭐라는 거야? 악어새가 악어와 공생 관계라는 건 사실 잘못 알려진 상식이라고? ..이봐, 자신 있으면 법정에서 증명해보라고. 어쨌거나.



"싯팔! 이게 웬 거야?"



초장부터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온 연유는 업무용 계좌에 뜬금없이 50만 달러가 꽂혀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50만 달러의 출처는 당일에 밝혀졌다.



"베일 씨, 베일 씨 전화 맞죠?"


"네, 누구시죠?"


"클라이언트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쪽이신가요? 아니면.."


"오늘 착수금을 보내드렸죠."


"..어디 관계자이시죠?"


"저는 그냥.. 민간인입니다."


"..내 개인 번호와 계좌는 어떻게 알아낸 거요? 당신 누구야?"


"그걸 궁금해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베일 씨. 안 그래도 오늘 만나서 말씀드릴까 했거든요."


"..여전히 내 질문에는 답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오늘 왜 만나?"


"오늘 오후부터는 스케줄이 있다고 손 쳐도 모두 사적인 걸 테니까요. 제가 약속드리죠. 오늘 저와 만나는 게

분명 당신 와이프 대신 애인과 루크스에서 식사하는 일보단 값어치 있을 거라고."


"뭐라고? 당신.."


"그러니 루크스에는 당신 애인 대신 제가 합류하도록 하죠. 베일 씨가 예약한 시간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하여.. 나는 금요일 오후 웬 처음 보는 40대 여성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40대. 그래, 맞다. 그녀는 분명 40대였을 것이다.


매끈하고 굴곡 없는 피부 결(하루가 멀다 하고 셀럽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내가 장담하는데 시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좁다래한 얼굴 넓이로 더없이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역시, 모두 수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강렬한 대비의 홍채색. 분명, 외모만으로는 대학원생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지만..


클래식 스타일로 감아올려 묶은 금발, 마찬가지로 클래식 스타일로 음영 없는 분칠에다 눈썹과 입에만 얇게 포인트를 준 화장법, 고풍스러운 실루엣의 민무늬 원피스 룩(소매가 팔뚝 반을 가리는), 다소 와이드하고 높지 않은 굽에다 전체적으로 심플한 라운드 셰이프의 단색 구두.


무엇보다 사람의 눈을 바르게 응시하며(요즘은 다들 구린 의도를 감추느라 이러질 못한다) 어절마다 조용하지만 명쾌하게 강약세를 보이는 그녀는 분명 젊은이가 결코 지닐 수 없는 기품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지극히도 이국적인 이채로움을 가만히 내뿜고 있었는데, 마치 수녀원에 평생을 갇혀있다가 일주일 전에 탈출했든지 아니면 과거 조사를 게을리한 채 가이드북에 의지해 타임머신을 타고서 2017년 이곳 루크스로 식사를 하러 온 미래인인 것만 같았다.



"오소부코를 추천해드릴게요. 본토 맛에는 따라갈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실패가 없는 메뉴죠."


"좋아요, 당신은 뭘 주문하시겠어요? 미스.. 미세스.."


"그냥 질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플레절렛 수프, 리코타와 과일을 섞은 샐러드면 되겠네요.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서로의 식사가 모두 끝난 후(그녀는 이파리 하나 남기지 않았다) 디저트를 기다리던 중 그녀가 말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 50만 달러는 착수금이었어요."


"..저보고 뭘 하라는 거죠? 아니, 아니. 아직 맡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요. 이런 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보다 내 번호랑 계좌는 어떻게.."


"말은 착수금이지만 정식 착수금은 아니에요."


"..옌장, 도통 모를 말들만 내뱉으시네."


"정식 착수금이 아니란 말은, 지금부터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제 말을 잠자코 경청해주는 대가라는 의미예요."


"..그 뒤에 내가 일을 맡지 않겠다면?"


"그건 당신 자유입니다. 당신 계좌로 들어간.. 물론, 깨끗한 50만 달러 또한 당신의 자유이고요. 당연히 정식 착수금 100만 달러 역시 당신의 자유겠지요? 오, 빼먹을 뻔했네.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도요."


"성공 보수금 수준의 사례금이라 하면.. 소송 서비스를 말하는 게 아니겠군요."


"바로 그렇답니다, 베일 씨. 그리고 성공 보수금이 아니므로 종래의 성공 보수금 수준보다 더 높은 퍼센티지를 적용하도록 하죠. 물론, 정식 착수금을 기준으로요."


"..몇 퍼센트요?"


"20퍼센트."


"25퍼센트. 그 밑으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무슨 일이든 간에 법적 테두리 안에서

범죄 불성립으로 해석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어야 합니다. 범죄 불성립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에요, 베일 씨. 무슨 의미인지 안답니다. 그리고 안심하세요, 베일 씨. 당신에게 맡기는 일은 완벽하게 합법적인 일이랍니다."


"..좋아요, 질. 무슨 일이죠?"


"베일 씨, 제안을 하나 더 해도 될까요?"


"..그럽시다."


"말씀드렸듯, 분명 합법적인 일입니다. 당신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캘리포니아 내에선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어요. 물론 그 말은 가장 높은 악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죠. 만약 자세한 걸 묻기 전에 계약부터 해준다면 추가적으로 10만 달러를 더 지불하죠."


"15만 달러."


"..좋아요."


"단, 계약서에 이 한 줄만 추가합시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가 필요할 경우 언제든 중도에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수임료는 전액 반환하지 아니한다.'"


"거기에 한 줄만 더 추가합시다, 베일 씨. '어떠한 사유로도 상기 항목에 위배되지 않음에도 도중에 계약을 파기할 시 수임료 반환을 2배로 산정한다.'"


"..좋수다! 바로 사무실로 갑시다! 아, 이 셔벗은 마저 먹고서."



우리는 정중히 악수를 한 뒤 사무실로 가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녀가 명시한 변호사 서비스 의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할랜드 베일은 밥 스미스와 캐서린 스미스(질 가라사대, '나는 밥의 친가 쪽 사람이에요. 그리고 둘은 내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죠.')의 모든 법적 대리 임무를 위임받아 그들의 요청에 따라 모든 가능한 법률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법률적 서비스 지원은 계약일로부터 60일이 되는 자정까지로 기한한다.



다음 날. 나는 질, 밥 스미스의 아내 캐서린 스미스와 함께 LA의 대표적인 부촌인 퍼시픽 파리세데스로 향했다. (캐서린 스미스 역시 독특한 분위기의 이국적인 여성으로 분명 여러 나라의 피가 섞였으리라 여겨졌다. 아마 질과 마찬가지로 메인은 게르만 계통?) 그리곤 둘의 안내에 따라 어느 공용 주차장 내 캐딜락 차량으로 인도되었다.



"베일 씨, 트렁크 좀 열어주시겠어요?"



캐서린 스미스가 시동을 걸고선 트렁크 버튼을 누르자 질이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왜요? 뭐 꺼낼 게 있나요?"



질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인자한 웃음을 보냈고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쳤다.



"이런 싯팔!"



트렁크 안에는 부패하기 시작한 한 중년 남성의 시신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뒤로 잰걸음을 치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막 운전석에서 걸어 나온 캐서린 스미스가 질의 바로 뒤편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헌데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놀라 나자빠진 내 입 한쪽으로 찐득한 침이 새는 동안, 열린 트렁크 사이로 죽음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구린내가 탈출하는 동안, 두 여성은 그저 가만히 서선 조용히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이런, 싯팔! 여기 시체가 있다고! 안 들려?"



질이 걸어와 트렁크 안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쭈그려 앉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길 가다 만난 동네 아이를 타이르듯이.



"베일 씨,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스미스 부부는 당신에게 재산관리에 대한 모든 법적 서비스의 대행을 맡기려고 했어요. 둘의 재산은 아주 방대하고.. 동시에 복잡하고.. 무슨 말인지 당신도 충분히 알겠죠. 그런데 사실 밥은 지난주 외출한 후에 갑자기 연락이 끊긴 상태예요. 차량과 여권은 그대로 휴대전화와 지갑만 챙기고서요. 오늘은 일단 밥의 차량등록증을 챙기려던 거였는데.."


"엿 까는 소리 하고 계시네! 내가 중고차 딜러요?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시오! 이봐.. 이.. 년들아! 나는 돈에 움직이는 사람이야. 당연히 지불받은 돈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내 의무고! 그렇다고 이런 개수작에 나를 끌어들여? 계약종료야, 이.. 살인자들아!"


"그렇지 않아요, 베일 씨."


"가까이 오지 마!"


"진정하세요. 우리도 무척이나 놀랐답니다. 다만 너무도 놀라서라고 설명해두죠. 물론 우리는 밥의 죽음과 무관하고요."


"거짓말! 내가 당신 같은 것들을 한두 번 보는지 알아? 이런 지긋지긋한 치정극은.. 이게 법적으로 알리바이나 유리한 증언이 될 거라고 생각해?"


"베일 씨, 일단은 신고부터 해주세요. 우리가 살인자인지 아닌지는 먼저 경찰이 와야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손이 떨려서 못하시겠다면 제가 하죠. 대신 가서 캐서린을 보살펴 주겠어요? 남편의 시체를 막 발견한 참이잖아요."



나는 잠시 두 여자를 번갈아 둘러본 뒤 크게 한두 차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신고하죠. 당신과 캐서린 스미스 씨는 떨어져 있어요. 설령 시체에 손댈 생각일랑 하지 말고."



잠시 후 도착한 경찰에게 최대한 간략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들의 동태를 주시했는데 어쩐지 묘한 위화감 같은 게 들었다. 그녀들의 만면엔 분명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에게서 나타나는 상실감이 박혀있었다. 그런데 반면에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레 잃었을 때의 당혹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아주 바쁘고 혼란스럽게 돌아갔고(적어도 이곳 LA는 말이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녀들과의 접촉은 없었으며, 나는 하릴없이 일상으로 복귀했다. '베일 씨, 계약은 언제든 중도에 파기해도 됩니다. 위약금은 계산해보니까 200만 달러네요.' 질이 마지막으로 내게 건넸던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간의 일은 LA 타임스 기사로 대신하는 게 나을지 싶다.



지난주 퍼시픽 팰리세이즈 내 차량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과 관련하여 LAPD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LAPD는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미루고 있으나 사망자 배우자 측의 대변인인 변호사 할랜드 베일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지역의 60세 밥 스미스라고 한다.


형사법원은 시신에 대해 현재 LAPD가 조사 중이므로 관련 사항은 일부 비공개이나 익명을 요구한 법집행기관 내의 인사에 따르면 사망자의 신원은 밥 스미스가 맞으며 아직 사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타살은 아니라고 전했다.


피아니스트인 모친과 미생물학자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밥 스미스는 1980년대 UCLA에 입학하며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 과학자가 되고자 했었다고 한다. 허나 UCLA의 대변인에 따르면 밥 스미스는 중도에 자퇴했으며 그의 생전 요청에 따라 세부적인 사항들은 모두 열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후 밥 스미스의 행적과 직업에 대해서는 외부로 알려진 게 전혀 없다. 심지어 LAPD는 그가 직업을 가졌었다는 기록이나 세금신고서 제출 내역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한편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사실은 저택수색 과정에서 드러났다. 해당 수사 책임관인 윌리엄 하비 경감은 밥 스미스의 저택에서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했으며 모두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또, 밥 스미스의 명의로 등록된 차량이 수륙양용 SUV만 14대이며 이러한 차량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 보관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LAPD 청장은 본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밥 스미스 씨가 어떠한 마약상 및 총기거래에도 연루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또 그의 재산과 관련하여 어떠한 범죄 수익과도 연관되어있지 않음을 확인한 끝에 우리는 그를 단순한 개인 총기 수집가로 결론 내렸다.'


밥 스미스의 시체를 발견하고서 최초로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지역의 변호사 할랜드 베일로, 그는 스티븐 시걸과 같은 여러 할리우드 셀럽들의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그로부터 한 달하고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들과의 계약 종료를 코앞에 둔 바로 그때였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예고도 없이 질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베일 씨, 잔금을 계산할 때네요. 정식 착수금의 25퍼센트니까 25만 달러. 그리고 루크스에서 약속한 15만 달러. 총 40만 달러를 그 계좌로 보내드리죠. 베일 씨와 계약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직접 만납시다."


"네?"


"직접 만나서 계약을 마무리 짓자는 말입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베일 씨는 계약을 완수하셨으니 약속된 돈만 받으시면 됩니다."


"질, 이 계약을 탈 없이 끝내고 싶죠? 그쵸?"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이 모든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은 거냐고 묻는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직접 만난 자리에서 계약을 끝내야겠습니다. 그거 아시죠? 지금 캘리포니아 말고도 전역에 밥 스미스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 걸요. 내 말대로 하지 않겠다면 언론과 인터뷰를 할 생각입니다. 법적 해석에 위반되지 않는 사항 내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한 비하인드 이야깃거리에 대해 말이죠. 사건에 이어 이 황당무계한 법률 서비스 건도 뜨거운 감자가 되겠군요."


"좋아요, 좋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들었습니다. 알겠어요. 이번 주 금요일 오후 3시 사무실에서.."


"오후 3시에 당신네 댁에서 보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어째서.."


"단순히 변덕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어요. 그냥, 당신이 클라이언트치고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통은 제 일이란 게 입장이 그 반대거든요. 한마디로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심지어 나는 의뢰주인 스미스 부부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중간에서 모든 걸 움켜쥐고서 컨트롤했기 때문.."


"그건 알다시피 밥에게 변고가 생겨서.."


"바로 이겁니다. 네, 그래요. 바로 이걸 말하는 겁니다. 이미 며칠이나 지난 시신을 가지고서 나를 엿먹였다는 거! 경찰에게 들었습니다. 암이라고 하더군요, 말기 암. 밥 스미스는 암으로 병사한 거죠. 젠장, 대관절 무슨 수작입니까! 암으로 죽은 사람을 가지고서 200만 달러 가까운 돈을 들여 나를 이 광대극에 끌어들인 이유가 뭐냐 말입니다. 광대라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이유에서 고용됐는지 아는 법입니다. 당신은 눈먼 돈을 먹여 나를 얼간이 천치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액수란 게 나를 내내 물 먹였죠. 이 바닥 최고였던 나를 무력감과 모욕감의 골짜기로 자빠뜨린 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어릴 때 말이죠, 학교에 칼 맥칼라니라는 애가 있었어요. 우리 중 가장 덩치가 컸고 또 제일 포악한 놈이었죠. 그놈은 우리 코피를 터뜨리는 게 취미였는데.. 몸이 근질근질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애가 그날의 희생양이었어요. 물론 그건 저라고 예외가 아니었죠. 어느 날은 제가 코피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집에 가 질질 짜니 아버지가 화를 내며 저를 쫓아내더군요. 가서 똑같이 때린 놈 코피 터뜨릴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면서요.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어요. 사실은 그놈 반경으로 감히 접근할 생각도 못 했죠. 당시 그놈 주먹 크기는 이미 제 얼굴만 했거든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잘나가는 변호사가 된 저는 그놈 와이프로부터 의뢰를 받았죠. 그놈과 그놈 와이프 또한 동창이었거든요. 간단했습니다. 폭력성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쳤고 위자료, 양육비, 접근금지로 놈을 있는 대로 벗겨 먹을 수 있었죠. 나는 기꺼이 파격 할인가로 의뢰를 맡았고 놈은 슈퍼 푸주한으로 종일 생고기 썬 돈을 매달 자기 와이프한테 꼬나 박는 신세가 됐죠. 자, 그래서 내가 생각만큼 만족했을까요? 나는 한 가지 깨닫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준 교훈을요. 그건, 무언가를 갚아줄 땐 반드시 같은 거로 갚아야 한다는 거였죠. 나는 집에서 쫓겨난 날 어떻게든 칼 맥칼라니의 코피를 터뜨려야 했었습니다. 우리 개척자의 자손들은 눈에는 눈, 피에는 피라는 전통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어떻게 되갚겠다는 뜻이죠?"


"그렇다고 제가 고객한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모든 걸 감추려 드는 이 오만한 여성의 집에 찾아가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게 전부겠죠. 자기 껄 일체 오픈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여성이 홈그라운드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기분 좀 내는 거죠. 그럼 내가 내 체면을 담보로 190만 달러를 꿨다는 멍에도 사라질 테고. 사실,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서로의 기분 아니겠습니까?"


"알겠어요. 금요일 오후 3시에 저희 집에서 보도록 하죠. 주소는 그날 보내드리겠어요."



모레 오후 2시 50분. 나는 질이 보낸 주소에 따라 퍼시픽 팰리세이즈 인근 샌타모니카 내의 한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대문 앞에는 이미 멀리서부터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푸짐한 덩치 둘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유럽인의 외형적 특징을 한 둘은 정장 차림새를 하고선 시종 나를 노려봤다.



"뭡니까? 매트릭스라도 찍고 있어요? 질 불러줘요."



둘은 마치 영어를 못 알아듣거나 아니면 귀머거리라도 되는 양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해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위압감에 나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선 안 들릴 정도의 목소리 크기로 욕지거리를 몇 차례 내뱉는 게 다였다. 잠시 후 대문으로 나온 질이 두 덩치의 등을 다정스레 쓰다듬고는 내게 인사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형식적인(그리고 다분히 경계를 띤) 인사를 나누고는 안내에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는 마치 그녀와도 같았다. 모든 게 고풍스럽고 예스러웠으며 동시에 세련된 풍취를 띠었다. 허나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한 켠으로 진열된 작은 크기의 수많은 사진 액자들이었다. 그러한 사진들 너머로는 실로 방대한 수의 사람들이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이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연령대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독사진의 주인이었으며, 또 때로는 대가족으로 보이는 집단의 주인들이었다. (사진들 속에서 현관 앞의 덩치 둘도 찾을 수가 있었다)



"사진들이 많죠? 저는 생각보다 더 옛날 사람인지라 적어도 소중한 사진은 액자에 장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말도 안 되게 좋은 냄새를 풍기는 밀크티를 내게 건네며 질이 말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녀가 먼저 계약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얌전히 밀크티만 홀짝였다. 이윽고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그녀는 대뜸 수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준비한 대사를 읊듯이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스미스 부부의 대리인으로서 법적 서비스 제공에 대한 추가 지급금 일체를 지불하는 바입니다. 이로써 해당 계약은 상호 간의 이행에 따라 종결되었습니다."


"..이게 답니까? 그런데 대관절 내가 스미스 부부에게 무슨 법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거죠?"


"계약서에는 기간 내에 법적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법적 서비스에 따라 수임료를 지불한다는 문구가 아니라요."


"..대단하시군.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당신 뭡니까? 목적이 뭐예요? 좋습니다. 난 진실을 원해요. 이 40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진실을 말해줘요."


"그럴 필요 없답니다, 베일 씨. 40만 달러는 우리의 계약 이행에 따른 지불입니다. 지금 베일 씨가 말씀하시는 건 별개의 사안이고요. 나가는 길을 안내해드리죠."


"좋아요. 그래도 알아야겠다면요? 40만 달러의 반환 대신 다른 조건을 건다면요?"


"베일 씨.."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면요? 경찰이라도 부를 건가요? 아님 밖의 매트릭스들? 그 전에 빨리 말해야겠군요. 다음 조건은 이겁니다.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판사한테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 당신 집에 찾아오겠어요. 매일같이 현관문 밖에서 당신을 부르겠죠. 그럼 파파라치들이 할리우드의 공식 악어새인 나한테서 뭐 재미난 거 좀 얻어낼까 이곳을 순례하겠죠. 당신 매트릭스들이 코피 터뜨리는 법은 알아도 카메라 플래시 막는 방법은 모를 거라고 내기할 수 있습니다."


"베일 씨, 분명 전화로는 저희 집에서 계약을 마무리하는 게 다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걸 말씀드려야겠군요. 법칙 하나, 누구의 말도 신용하지 말 것."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요. 베일 씨, 생각만큼 교활하시네요."


"뭘 기대한 겁니까? 교활하지 않을 거면 변호사 말고 다른 걸 했겠죠."



질은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어쩐지 공기가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진실을 알려드릴 테니 베일 씨는 어떤 대가를 지불할 건가요?"


"바로 이런 게 협상이죠. 말해보세요. 원하는 대가를."


"베일 씨가 지금까지 받은 190만 달러 전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 축내자는 겁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농담을 하지 않아요."


"지금 여기 앉아서 나눌 몇 마디 말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베일 씨, 슬프게도 진실이란 게 그런 겁니다. 때론 몇 마디 말에 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걸기도 해야 하는. 누구에게나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진실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죠.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필요로 하기에 그만한 돈을 당신께 지불한 겁니다."



질은 다정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동시에 엄격함을 품고 있는 표정이기도 했다. '우리'라. 첫 번째 단서를 얻게 되자 한층 더 내 몸이 달아올랐다. 따라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안에 포함된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나는 정말이지 알아야만 했다. 내 몸속 모든 세포가 그것을 원하고, 또 그러기를 종용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수 시간 같은 수 초 후, 질이 콧김을 한번 부드럽게 내뿜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베일 씨.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해야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내 딸 애한테도요. 마누라는 별거 중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꼭 그러셔야 할 거예요. 제 조건은,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것 모두 비닉특권을 엄수해달라는 겁니다. 비닉특권의 법적 용어 해석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알겠습니다. 맹세하죠."


"그리고 진실을 듣고 나면 얌전히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다시는 방문하지 마시고요. 일이 있으면 제가 당신 사무실을 찾아뵙도록 하죠."


"여부가 없습니다."



질은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거예요. 조금은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어쨌거나 끼어들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앞에 놓인 밀크티 잔을 한번 기울이고선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를.



"우리 셋..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제가 미국에 온 것은 1957년 4월 2일이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도착 후 얼마 안 있어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씨와 접선을 가졌죠. (나는 또 한 번 끼어들 뻔했다)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 왔어요. 다른 은하계에서요. (나는 끼어들 기분도 들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당시 천문학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도널드 맨젤 씨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서구식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토르, 돈, 질.. 우리는 그 이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죠.


멘젤 씨는 우리를 당시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장이었던 제임스 킬리언 씨에게 소개해주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요청에 따라 이 두 사람이 곧 아이젠하워 씨와의 접선을 주선해주었죠. 이 둘에게(또 아이젠하워 씨들에게도) 우리가 다른 은하계에서 왔음을 믿게 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어요. 우리가 타고 온 소형 우주 비행선의 착륙지점으로 안내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별장에서 멘젤 씨와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와 국방부장관 및 정보국장을 앞에 두고 준비한 브리핑을 낭독했죠. 우리의 요구는 심플했어요. 지구로의 망명(그래요, 당신네들 표현 따라 우리는 정치적 망명을 온 거였어요)을 허락할 것, 그리고 시민권을 보장할 것. 마지막으로.. 혹여 우리를 추적해 지구로의 잠입을 시도할지 모르는 우리 행성의 요원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


아이젠하워 씨는 나머지 넷과 잠시 상의를 하고는 이내 그 제안을 수용했어요. 제안에 따른 우리의 보답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죠. 이 협상에 따라 우리는 그들에게 아주 원시적인 양자역학 컴퓨터를 위한 모듈러 디자인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인간사회에서는 지금껏 없었던 가장 극적인 변화가 발생할 것이며, 당신들의 능력과 끈기에 따라 수 세대 후에는 은하 간 이동을 위한 기초적인 아이디어가 창안될 거랍니다.


우리는 아이젠하워 씨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처음 발을 디뎠던 오리건 주에 비밀요새 겸 저택을 건립했습니다. (당신은 오리건 주에 가본 적이 있나요?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이에요. 당신네 자연은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을 선사해준답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며 우리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소형 비행 우주선이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주 아주 오래도록 살 수 있도록(바다거북이보다도 더 말입니다) 설계되었고 또 진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 많은 것을 버리고 바꿔야 했지만, 당신네들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이름과 땅은 여전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너무도 흘렀어요. 벌써 60년이에요. 멘젤 씨, 킬리언 씨, 아이젠하워 씨.. 우리를 알던 당신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 우리는 스스로를 도와야 하는 처지이죠. 방치되었다고 표현하지는 않겠어요. 당신네들은 망명객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를 베풀었고 지난 60년간 우리는 인간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정말 이곳 지구가 우리의 집이랍니다.


저와 돈이 이곳에서 낳은 아이들은 인간과 연을 맺어 자신들의 아이들을, 그리고 그 아이들은 또 다른 인간과의 사이에서 새로운 탄생을 이루었거나 앞두고 있답니다. 토르 역시 인간 여성과 두 차례 결혼을 했고(첫 번째 여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주 많이 낙담했었죠) 그의 아이들 역시 이곳에서 결혼과 출산을 경험했죠. 그러한 아이들 모두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으며 결코 그걸 잊는 법이 없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종종 오리건 주의 고향 집에서 만남을 갖습니다. 음식을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본연의 뿌리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며 서로를 축복하죠. 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정말 좋아한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곳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그러면서 매일 자연을 느끼고 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공동체이고 뿌리 된 자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다양한 특허의 주인인지 안다면 당신은 정말 놀랄 거랍니다.


그런데 최근.. 재앙이 스며들기 시작했어요. 우리, 그러니까 토르, 돈, 그리고 저를 추적해 우리 행성의 요원 몇몇이 이곳에 잠입한 거죠. 그들은 이미 당신네들 사이에 있어요.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답니다.


밥까지, 벌써 우리 아이들 여섯이 죽었어요. 그들은 우리를 데려가려 하고, 우리에게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이들을 위해 하며 무언의 협박을 벌이고 있는 거죠. 당신 말이 맞아요. 밥의 사인은 말기 암이죠. 멀쩡하던 애가 반년도 안되어 암으로 죽은 거랍니다.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질병을 심어놓고 있어요.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어떤 노선을 택했을 것 같나요?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냈답니다. 그 과정에서 밥이 희생되었죠.(그녀는 잠시 상념에 잠긴 듯 수 초 후에나 말을 이었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고향 땅 오리건 주에 공동체를 설립했어요. 그곳에서 우리 모두는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거랍니다. 누구도 이걸 방해할 순 없어요. 심지어 당신네 대통령일지라도."



"....이야기 끝인가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두 했답니다."


"오리건 주에서의 공동체 생활이라, 아미시 마을이라도 만들려고 그런답니까?"


"비슷한 거죠. 다만, 기원이 없는 곳에 믿음의 뿌리를 두지는 않는다는 게 차이겠네요.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원과 뿌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좋아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네시, 빅풋, 늑대인간.. 저도 그런 걸 참 좋아했었죠."


"저도 그렇답니다."


"그래요,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베일 씨. 오, 그리고 물론 돈은 일체 반환하실 필요 없으세요. 제 말을 아주 잘 경청해주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요. 아구가 안 맞는 게 있어서요. 어째서,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밥의 시체를 일부러 내게 보여주고..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베일 씨, 당신네 공놀이 광고 1초에 몇억이 들어가는지 아세요? 우리는 미국 전역에 1달 넘도록 홍보를 한 거고 저는 제가 지불한 돈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습니다, 질."


"베일 씨, 모든 생물체는 호전적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벌써 여섯 아이를 잃었어요. 이제 우리도 대응에 나설 거랍니다. 그들도 사실은 잘 알고 있겠죠. 다른 은하계에서 총 맞고 죽어봐야 아무도 몰라준다는 걸. 또, 당신네들 중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그들은 이곳 어느 나라에도 시민권이 없는 자들인데. 우리는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침입을 시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미리 홍보한 거예요. 이제 그들도 알겠죠. 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그들을 죽여도 그들은 지구에 위해를 가할 수 없답니다. 은하계의 규약이라는 건.. 정말 골치 아픈 행정이거든요."


"그러니까 말인즉슨, 나를 이용해 사건을 키웠다는 겁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우리 생각보다도 더 유명세가 있더군요. 당신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가판대 타블로이드판 해프닝 대신 CNN 토픽으로 다뤄질 수 있었던 거죠. 덕분에 당신네 정부 사람들이 앞으로 밥의 유산을 건네받은 캐서린을 주시하게 되겠죠. 자연히 요원들은 더욱더 접근에 어려움이 생길 거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밀크티 잘 마셨습니다. 질, 아주 좋았어요."


"고마워요, 베일 씨. 다음에 또 당신을 찾게 되면 그땐 수임료를 좀 깎아 줄 건가요?"


"아뇨. 당신네들은 인간의 무서움을 좀 더 알 필요가 있어요. 이제 가보겠습니다. 배웅나올 필요 없습니다. 나가는 길 아니까요. 한 번 본 건 끝까지 기억하거든요. 매트릭스들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길."


"당신도요. 당신과 내가 믿는 신이 서로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질의 저택을 나와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년. 하여지건 돈 많은 것들이 미치면 더 극적으로 돌아버린다니까."



이건 정말이다. 나는 이걸 지금껏 몸소 체험해왔다. 이곳 할리우드는 졸부들과 미친 것들의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오히려 저 정도 피해망상은 귀여운 편이다.


질의 이야기를 완전히 잊고서 일상으로 돌아간 지 몇 달이었다. 내가 다시금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것은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대로변에서 내게 대뜸 말을 걸면서부터였다.



"할랜드 베일 씨? 맞으시죠?"


"누구시죠?"


"국토안보부입니다."


"증명해보시죠."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슈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세워선 안쪽을 펼쳐 보였다.



"그래, 국토안보부 요원이 대관절 제겐 무슨 용건이랍니까?"


"베일 씨께서는 몇 달 전 스미스 부부의 변호사셨죠?"


"그랬죠. 일을 맡은 적이 있었죠."


"혹시 이 사진 속.. 세 명을 보신 적이 있거나 알고 계십니까?"



그가 아이폰 7을 꺼내어(아마 그도 딸이 있는가 보다) 스크린에 띄어진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뇨. 이들은 스미스 부부가 아닌데요."


"예, 그래요. 이들은 다른 사람이죠. 모르십니까?"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셋 모두 본 적이 없군요. 누군데요, 이 사람들?"


"미국 안보에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자들이죠."


"그렇군요. 꼭 잡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정말 본 적이 없으십니까?"


"네, 혹시 나중에라도 보게 되면 알려드리죠. 명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일 씨."



나는 남자와 간단히 눈인사를 교환하고는 가던 방향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돌려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걸음 중간중간, 마치 이곳의 중력을 아직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듯 발을 살짝씩 땅에 끌어대며 걸음을 이어갔다. 나는 그날 국토안보부에 문의해 그가 보였던 신분증 속 요원이 존재하는지 물었고 돌아온 대답에 별반 놀라지 않아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가 자신의 아이폰 7에 띄었던 사진,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분명 5-60년대 풍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사진. 나는 이 셋이 함께 찍힌 또 다른 사진을 질의 저택에서 보았다. 물론, 그 사진은 당시 몰래 촬영한 내 아이폰 7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이기도 하다. (명심하시라! 딸이 있으면 아이폰 7로 소리 없이 촬영하는 게 가능해진다)


클래식하지만 분명 현대남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셋은 식당 루크스에서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채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전혀 늙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내 아이폰 7에 저장된 그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고선 중얼거렸다.



"안녕. 토르, 돈, 질."



만약,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질에게 좀 더 정중하게 굴었을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온 이 용감한 이민자에게.


자, 코카인을 빨고서 뺑소니를 쳤는데 어떡하냐고? 음주운전을 하다 차량 서너 대를 박살 냈다고? 파파라치 놈을 후드려 잡고선 얼굴에다 오줌을 갈겼어? 여자친구 얼굴에 새긴 멍 자국? 남편한테 위자료 좀 두둑이 빼먹고선

그 돈으로 젊은 애인과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시다?


..사실 인간이 아니라고? 걱정 말고 모두 내게로 오시라! LA 최고의 악명을 자랑하는, 이 구원자 베일에게로!





-fin-




















후기


본 이야기 속 밥 스미스의 실제 모델인 제프리 래시는 2015년 7월 4일 자신의 SUV에서 부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UCLA 대학 중퇴 후의 행보가 알려져있지 않으며 직업에 대한 기록이나 세금내역이 불명확하다.


또 저택에선 1,200개가 넘는 총기와 함께 총 6톤가량의 탄약 및 각종 무기를 발견되었으며 모두 사용된 적 없는 것들이었다. 수억 원의 현금 및 그의 명의로 된 10대가 넘는 SUV 또한 발견되었고 말이다.


나는 이 미스터리로 종결 중인 사건을 접하고선 이내 해당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왜 이런 식의 이야기냐 하면, 나는 지금껏 세간에 알려진 UFO 사건들은 모두 와전되었거나 뻥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지난 수년간 '이상한 옴니버스'를 운영하며 나름의 조사를 한 결과)


사람들은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공간 낭비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 말대로 우주에 우리 이외의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지성체가 오로지 우리뿐이라는 가정은 지독한 오만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계인과 접촉했었고 외계인은 지구에 방문했었을까? 허나, 광활함과 유구함을 뽐내는 이 우주에서 티끌보다도 작은 지구에 벌써 서로 다른 외계인들끼리 접촉이 있었다는 가정 또한 우주에 대한 오만이자 지구에 대한 자만일 수가 있다.


하지만 가망성이 없는 것에 대한 공상만큼 신나는 게 없다. 만약 외계인이 은밀하게 지구에 거주 중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바로 정치적 망명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곳이라고 지적 생명체가 사는 게 다르겠는가? 정적(政敵)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아, 한편 제프리 래시의 약혼녀는 자신의 모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엄마, 그 사람은 사실 외계인과 인간의 혼혈이야."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19433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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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생긴 일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1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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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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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생긴 일




나는 지금 고등학생을 흥분케 하는 3요소와 함께하고 계시다. 그것도 셋을 동시에.


첫째, 하우스 파티 장소로 향하고 있다. 분명 그곳에서 제대로 된 리큐어를 찾을 수가 있을 거다. 하다못해 럼이라도. 둘 다 없더라도 문제없다. 내가 하나 가지고 있거든.


둘째, 당장 인접한 주(州)로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기름이 채워져 있는 오픈카. 말이 필요하랴! 비록, 10년 넘은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이긴 하지만.


셋째, 옆자리의 골 때리는 친구 놈. 이놈은 옆집에 사는 애런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바보짓을 할 때면 항상 함께였다. 사실 이 세브링도 이놈 거다. 제 큰아빠한테 물려받은 건데 웃기게도 아직 면허가 없어 이렇게 내가 매번 운짱을 맡는다.


애런은 불룩 나온 배 때문에 서 있는 상태에선 자기 발을 못 볼 정도의 뚱땡이에다 흑갈색 곱슬머리를 한 대단히 웃기는 놈이다. 동시에 애런은 학교 제일의, 아니, 카운티 내 최고의 색골로 만약 물어만 본다면 심지어 아무 여학생의 사타구니 털 개수까지도 척척 대답할 놈이시다.


그리고 나, 개빈. 평범한 가정환경, 중하위권 성적,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6피트를 넘는 키(이모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매번 왜 이렇게 컸느냐며 야단이다)에다 제법 멋들어진 컬의 모질과 고르고 하얀 치아를 지니고 있어 향후 20년간은 외모 덕을 톡톡히 볼 십 대다.



"그나저나, 개빈. 우리 오늘 몇 시까지 있을 수 있는 거냐?"


"못해도 11시. 아니, 12시. 우리 꼰대들 오늘 할머니 댁에 갔다가 오거든."


"오, 개빈이 엄마아빠를 꼰대라고 부른대요. 오늘 또 땡깡 부렸다고 엉덩이 맴매라도 맞았나 보지?"


"닥쳐, 똥돼지. 그나저나 확실해? 진짜 괜찮은 애들로 산을 이루고 있다고?"


"이봐, 개빈. 그거 알아? 난 가끔 너한테 했던 말을 또 해야 할 때마다 네 입 구멍에 우리 할아버지가 사용한 기저귀를 쑤셔 넣고 싶은 거? 너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냐? 야시엘네 대저택이라고! 그 야시엘!"


"..나도 알아, 야시엘이 누군지. 지나가다 본 적 있어. 네 똥차 값보다 비싼 타이어를 4개씩이나 박아놓은 차를 몰고 가던 거. 그래.. 그 야시엘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그 멕시코 놈 집안은 뭐 하길래 그렇게 돈이 많은 거야?"


"이런, 이런. 선생, 멕시칸이 여기 와서 그렇게 떵떵거리고 산다면 뭐겠어?"


"뭐? 뭔데?"



애런은 대답 대신 검지를 치켜들어 자신의 코밑에 바짝 대고는 바깥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동시에 콧숨을 한 차례 훅 소리 내어 들이마셔 보였다.



"뭣?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당신의 상식 머리시네요, 선생."


"상관 안 해. 여자들만 많다면야."


"걱정 마시게, 형제여. 성경에도 나와 있어요. 마약이 있는 곳에 여자가 꼬이는 법일지니."



애런과 내가 파티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분위기가 한창으로 접어들었는지 저마다 짝을 지어 서로 음탕한 눈길을 건네고 있었고, 패배자들은 외곽에 띄엄띄엄 자리한 채 포기를 모르는 질척한 눈빛으로 사방을 내리훑고 있었다. 우리? 물론 도착과 동시에 애런과 나도 미친 듯이 주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삼 빠떼루지! (애런이 제 큰아빠한테서 배워온 유행어다)


그리고 그때였다. 시야에 한 여자애가 들어온 게. 그 애는 동그랗고 작은 반원의 이마가 돋보이도록 연한 다갈색 머리를 야무지게 묶어 올렸으며, 키는 작지만 긴 다리가 부각되도록 딱 알맞은 길이감의 청바지를 입고서, 흰 티 밖으로 친오빠 옷장에서 꺼내온 듯한 검정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아니, 실은 내가 왜 그런지 확실히 알지만) 나는 그 애에게 감히 눈을 떼지 못하고선 시종 가슴팍 어딘가가 애리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그 애만이.. 젠장, 이런 진부한 표현을 할 줄이야. 마치 그 애만이 주변보다 더 또렷히 보이는 듯했다.



"선생,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누구야?"


"쟤를 몰라? 아.. 그렇지. 미안. 할아버지 병상이랑 장례 때문에 최근 학교에 잘 못 나왔었지.. 여하튼 이름 킴벌리 로렌, 뉴저지에서 얼마 전 이사 옴, 무남독녀, 성적은 중상위권, 아직 어울리는 그룹 없음, 피우는 담배 브랜드는.."


"좋았어!"


"어..? 잠깐, 개빈. 잠깐, 잠깐. 너.. 쟤한테 들이대려고?"


"당삼 빠떼루지, 인마!"


"포기하는 게 좋을걸? 쟤가 깐 남자애들만 모아도 카운티를 형성할 수 있을 거다. 그 안에서 곧 선거인단도 발족할 수 있겠고. 우리 학교의 자랑 쿼터백 왕자님께서도 2초 만에 까이셨다니까!"


"..왜?"


"..왜라니? 너 지금 왜냐고 물은 거냐? 너도 가끔은 네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해보는 게 어때? 왜긴 왜겠냐, 레즈니까 그렇지. 아니고서야 쿼터백 왕자를 쳐다도 안 보고 까버리겠냐? 봐봐! 이러는 동안에도 저기 한 명 더 까였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뭐, 다른 이유 뭐?"


"아마 아직 마음에 차는 남자를 발견하지.."


"오, 야훼시여! 돌아가시겠네! 개빈이 또 똥 잡수시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내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개빈, 아빠 말 잘 들으렴. 널 위해 충고 하나 해줘야 할 시간이구나. 잘 들어, 얼빵아. 네가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는 건 나와 함께 있어서야. 알아들어? 여기 이 2-300파운드짜리 유대인 놈 옆에 서서 미소를 보내기 때문에 여자애들이 받아주는 거라고! 개빈, 아빠는 네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다물어, 개빈. 그건 부족한 놈들이 스스로를 기만할 때나 외우는 주문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 자, 정신 차리고 빨리 다른 여자를 찾아봐. 기왕이면 두 명으로. 난 정말 아무나 괜찮으니까."


"..좋아, 이 꼬부랑 털 돼지 놈아. 너 만약 내가 저 여자애와 함께 여기 저택 문을 나서면 어쩔래?"


"..네 말은, 지금 쟤를 꼬셔서 같이 나갈 수 있다고?"


"어이, 가는 귀가 먹으셨나? 왜 했던 말을 또 하게 만들지? 입 구멍에다 너네 할아버지 기저귀를 쑤셔 넣어 줄까? 자, 내가 저 여자애와 그러면 어떻게 할래? 대답해보시지, 선생."


"좋아! 네가 성공하면, 내가 네 꺼 한 번 빨아준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마치 마상시합에 출전하는 앙리 2세마냥(뭐, 비록 그는 시합 중에 뒈졌지만) 당당한 보무로 그 애에게 다가갔다. 뒤편으로 '개빈, 그냥 아빠 품으로 돌아오렴.'이라고 조롱하는 애런을 무시하고서. 그렇게 나는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서 그 애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용기 있다고? 아니, 사실 나는 엄밀히 말해 겁쟁이에 속하는 편이다. 애런의 도발에 적잖게 흥분해선 반발심에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 그건 그저 핑계이며 사실 나는 뭐든 상관없으니 그저 그 애와 한순간만이라도 눈을 맞춰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그 단편적인 기억조차도 내게는 두고두고 환희로 박제될 게 분명하리란 직감해서였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 아닌가.



"안녕, 킴벌.. 로렌."


"..안녕."


"아, 나는 개빈이야. 개빈 마틴."


"술 이름 같네. 근데 너 나 아니?"


"어.. 응, 우리 같은 학교야. 그리고.. 사실 네 이름은.. 저기 돼지 몸통에다 사람탈 올려놓은 애 보여? 쟤가 알려줬어. (애런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마디로 정보통이지.. 너도 학교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쟤한테 물어보면 돼."


"그래, 고맙다."



마뜩잖아하는 그 애를 앞에 두고서 발작해대는 심장이 내게 유혹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인마, 당초 소원을 풀었잖아. 이제 돌아가자. 꼭 한 발 더 내디뎌야 늪인 걸 아는 게 아니니까.' 허나 나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서(사실 순간 넘어갈 뻔했다) 크게 양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이고는 다시 그 애에게 말을 붙였다.



"좋아. 로렌, 지금 나한테 1쿼터만 시간을 내줄래? 어쩌면 지금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고작 1쿼터야, 15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레미 마틴?"



사실, 그 순간 내 몸의 모든 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에 휩싸였었는데.. 동시에, 우습게도 내 입은 스스로 움직여 말을 내뱉고 있었다.



"15분이야. 너 혼자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어도 어차피 15분은 흘러."



그리고..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애의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더니 곧 삐딱하던 몸을 풀어 완전히 내 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반가워, 개빈. 나는 로렌이야. 킴벌리 로렌. 어.. 지금 공 울렸어."



그다음?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냐고?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원래 중요한 순간이란 건 그런 거다. 그저 나는.. 1쿼터 동안 나 자신을 기꺼이 내던졌고..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는데..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난 존재 같았다. 그건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1쿼터 버저가 채 울리기도 전에

그 애는 나를 받아주었다.


뭐.. 이후 한 차례 실수를 하긴 했다. 무슨 실수냐 하면,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그때껏 팽팽하던 긴장이 풀리면서

흔히 저지르곤 하는 '말실수' 말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그 실수가 우리의 관계를 극적으로 끌고 가기는 했다만.



"사실 너한테 말 걸기까지 많이 걱정했거든."


"왜?"


"네가 지금까지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고 들어서. 그래서 네가.. 아.. 음.."


"레즈라고?"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 순간, 그 애가 까치발을 들어 내게 기대는가 싶더니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말했다.



"지금 증명이 된 거지?"



이제 우리는 시끄러운 곳을 벗어나 좀 더 사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나는 그 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애런에게 돌아갔다. (그때까지 애런은 나를 마치 두 발 자전거에 처음 도전하는 자식을 지켜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애런."


"믹 재거 선생께서 오셨군. 그래, 알았어. 지금 빨면 돼?"


"아니, 괜찮아. 대신 정말 미안한데.. 그.. 차 좀 빌릴 수 있을까?"



애런은 잠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내게 건넸다.



"당삼 빠떼루지, 인마! 걱정 말고 쓰게나, 친구. 시트 더럽히지만 말고. 나는 마약왕이랑 코카인이라도 하다가 카풀할 테니까."



애런은 정말 멋진 놈이다!




 



나는 그 애에게 우리 마을 최고의 야경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며 야경보다도 빛나는 시간을 공유했다. 그렇게 자정 즈음..


있지 말이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종종 허세를 떨어야 하는 가련한 동물인 법이다. 나는 그 애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을 할 엄두조차 내지 않고선 집에 데려다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애에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었고 절대 찌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그 애가 시선은 정면에 둔 채 나지막이, 그러나 명료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서 조금 더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지 몰라. 사실.. 우리 부모님이 오늘 집을 비우셨거든."



그 말에 나는 제한속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링컨이 운전대를 잡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코너가 연속해서 나오는 좁다란 진입로에서 차선에 걸쳐 돌던 중 마주 오는 차량과 가까스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젠장! 애런은 집 나간 전조등 하나를 도통 교체할 생각을 안 한다) 우리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숨넘어가듯 웃어 젖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다면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사랑은 종종 사람을 비상식으로 몰고 가는 법이다.


그렇게 마지막 코너에서 차선을 걸친 상태로 가속 페달을 밟았고, 커브 길을 빠져나온 순간 채 인식을 하기도 전에 번쩍거리는 빛이 시야를 온통 채워버렸다. 신경을 긁어 대는 경적음과 함께. 그리고 나는 찰나였지만 내 시야가 뒤집힌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추억을 공유하던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겠다.



"저런 후레자식 같으니!"



나는 가까스로 핸들을 꺾어 마주 오던 차량을 피하고는 외쳤다. 옌병할, 안 봐도 뻔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십 대 놈이겠지. 십 대 놈들은 정말이지, 대관절 무슨 배짱으로 자기에겐 불운 따윈 찾아올 리가 없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조심성이라도 부리면 사탄이 거시기라도 쥐어뜯어 가는 줄 아는 족속들.


나는 잠시 막 스쳐 지나간 차량이 전조등 불량이란 것을 떠올렸지만 지금 시각까지 보안관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서 집에 가서 몸뚱어리에다 따뜻한 물을 뒤엎고선 마누라와 함께 딸애가 보낸 손자놈 영상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마누라가 슬쩍 먼저 봤을지도 모르겠군. 마누라는 그런 면에선 일견 뻔뻔스럽거든)


그때였다. 내 뒤편으로 날카로운 경적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차를 세우곤 잠시 눈을 껌뻑인 뒤(옌장, 늙으면 무언가를 깨닫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 부리나케 차를 돌려 충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곧장 경찰과 구급대에 신고를 한 나는 사건 현장을 5초 정도 둘러보고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경찰만 불러도 될 뻔했군.'



현장을 모두 둘러본 후 널브러진 두 차량 저 너머로 누군가가 쓰러져있는 것을 목도했다. (아마 컨버터블 차량에서 튀어나간 거겠지) 지체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고, 나는 쓰러져있는 사람이 바로 개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은 지나가다 마주칠 때나 인사를 나누던 개빈이지만 어릴 때는 종종 주말이면 우리 집을 찾아와 보안관 놀이 따위를 하다가 마누라가 만들어준 쿠키를 먹곤 했다. 또, 방학 때는 잔디밭을 깎아주고선 수고비를 받아 가기도 했었다. 개빈은 아주 훌륭한 일꾼이었다. 정해진 돈만을 타 갔고 건강보험을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나를 보안관 아저씨라 부르던 개빈, 그 애는 커서 나 같은 보안관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아니, 그건 우리 딸애였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점점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져 간다.



"얘야, 개빈! 내 말 들리니?"


"..보안관 아저씨.."


"그래, 보안관 아저씨란다. 개빈, 세상에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제가.. 바보같이.. 사고를.. 아저씨.. 제 옆에 탄 애는요..?"


"누구 말이니, 개빈?"


"..제 옆에.. 킴버가 타고 있었어요.. 아주 좋은 애예요.. 무사한가요..?"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그저 개빈의 얼굴 여기저기를 손으로 쓰다듬을 뿐이었다.



"..킴버.. 좋은 아이인데.. 나 때문에.."


"개빈, 이건 사고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우리 차랑.. 충돌한 차.. 그 사람은 괜찮나요..?"


"..개빈,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개빈.. 오, 신이시여!"



부품이 어지럽게 헤쳐진 차량마냥 개빈의 몸 또한 그러했다. 나는 개빈의 온전한 손 한쪽을 두 손으로 움켜쥐느라 흐르는 눈물들을 그저 밑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아저씨..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해요.."


"그래.. 그래.. 게빈, 그러마."


"..킴버.. 킴벌리 로렌네 부모님에게.. 정말 정말.. 죄송하다고.. 그리고 다른 운전자.. 가족에게도.. 너무 죄송하다고.. 애런에게는 차를.. 걔는 아마.. 벌써 용서했을 거예요.."


"그래.. 게빈.. 아저씨가 사나이 대 사나이로 약속하마."


"..그리고.. 보안관 아저씨.. 약속해요.. 우리 엄마 아빠한테.. 그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 좀 내버려 둬요.'예요.. 그분들께.. 꼭 전해주셔야 해요.. 개빈이 너무나 사랑한다고.. 다시.. 다시.. 엄마 아빠 자식으로 태어나면 안 되냐고.."


"..그래. 개빈, 보안관 아저씨가 반드시 약속하마. 약속하마."


"..아저씨.. 나 때문에.. 죽었어요.. 나는 지옥에 갈 거예요.."


"개빈, 그렇지 않아. 사고였다. 누구한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 너무 추워요.."


"..개빈, 신이 곧 너를 따뜻하게 품어주실 거다."


"..아니요..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그러지 않으실 거예요.. 그분은 나를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서.. 가.. 멀리 가거라.. 여긴 네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실 거예요.."


"오, 개빈.. 절대 그렇지 않단다.... 개빈? 얘, 개빈아. 개빈? 개빈?"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세상의 아이러니와 마주한다는 거다. 만약 개빈이 1-2초만 늦게 코너에 진입했다면, 만약 개빈이 가속 페달을 1파운드만큼만 덜 밟았다면, 만약 개빈이 핸들을 몇 인치만 덜 돌렸다면.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신의 뜻을 찾으란 말인가? 오늘 밤,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나는 경찰 차량과 구급대 차량 사이로 구급대원이 시신 네 구를 옮기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그 옛날 잔디밭을 깎으면 수고비를 주겠다던 나에게 '사나이 대 사나이의 약속이에요.'라고 외치던 꼬맹이 개빈이 떠올랐다.


지역밀착형인 곳에서 보안관을 하면 가끔 엿 같은 게 뭔지 아는가? 그건 바로, 피해자가 나와 일면식인 사람일 때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예리하게 뜬 달 너머로 칠흑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부디, 이 사과가 개빈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개빈, 얘야.. 미안하다. 네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구나."





-fin-




















후기


본 이야기의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온전히 교감하기 위해선 짧은 글 안에다 개빈, 애런, 그리고 로렌 간의 무고한 천진함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러니까, 읽는 이들이 이 셋을 그전부터 잘 알던 사이로 느껴야 했다는 뜻이다.


내 의도가 어느 정도나 들어먹혔는지는 모르겠으나(살면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치는 법이니까), 만약 제대로 전달받은 이라면 '독자의 바람이 담긴 그릇'에다 뱉어놓은 내 환희의 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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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형수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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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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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형수




롱펠로는 사형일을 목전에 둔 죄수이다.


이제 롱펠로에게 있어서 유일한 낙이란 사형 직전에 먹을 메뉴를 미리 상상하는 것뿐이다. 그런 롱펠로가 오래전부터 면회를 거부해왔던 한 사내와의 면회를 승낙했다. 사내는 아주 오래전부터(사실 롱펠로가 교도소에 수형되고 직후서부터) 지금껏 꾸준히 면회 신청을 이어왔다. 그렇다면, 롱펠로는 어찌하여 갑작스레 면회 신청을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그 사내가 누구이길래 롱펠로는 지금껏 면회를 거부해왔을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죽음을 앞둔 자의 단순한 변덕과 유희.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그 사내는 바로 롱펠로가 죽인 두 자녀의 아빠.


엄마의 승진을 축하하고자 서프라이즈 선물을 사러 동네의 중고 물품점을 향하던 어린 남매를 차량 납치, 납치 당일 남매를 교살한 후 지하 육류용 냉동고에 시신 유기, 이후 한 달간 총 4번에 걸쳐 남매의 부모를 협박해 14만 달러를 갈취, 결국 부모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사건에 개입해 체포. 이게 롱펠로의 죄질이다.



"..지난달 인터넷 뉴스에 나온 사진보다 여위어 보이는군, 롱펠로."


"뉴스보다 훨씬 오래전에 찍은 사진이니까. 여긴 SNS를 할 수가 없거든. 봐봐, 지금은 앞머리가 더 벗겨졌지? 그리고 요즘 소식하고 있어. 최후의 만찬을 더 기껍게 만끽하려고 말이야."


"..왜 갑자기 면회를 승낙했지?"


"이봐, 그럼 너는 내가 매번 거절하는 데도 어째서 포기하지 않은 거야? 내가 변덕이라도 부릴 거라고 희망한 거야? 뭐, 그렇다면 축하해. 자네 감이 맞았어."


"왜 죽인 거지?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었어! 왜 죽인 거야!"


"얼마든지 주기는, 경찰에 신고했잖아.."


"네가 29일 동안 내 아이들의 목소리를 첫 통화 말고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으니까! 단 한 번도! 왜 죽였어!"


"왜 죽였냐니.. 그야 계속 울어대니까. 이웃이 눈치라도 채면 어떡하라고? 그리고 난 시끄러운 게 세상에서 제일로 싫어."


"...."


"이봐봐, 당연히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그런 말만 할 거면 이만하겠네. 스트레스는 건강에 좋지 않거든. 자네한테도, 나한테도."


"..롱펠로, 환생이란 걸 믿나?"


"뭐? 이 친구, 맛이 갔구먼."


"사람의 영혼은 그 육신이 다 하고 나면 새로운 육신으로 삶을 시작해."


"그럼, 어째서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데?"


"새 생명으로 태어난 직후 아주 일시적으로만 기억하는 거니까. 곧 동시에 전생의 기억이 사라지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거지. 새 시작을 알리면서 말이야. 하지만 가끔은 몇 년이 지날 때까지도 전생의 기억을 유지하기도 해. 그리고 그러한 환생은 때론.."


"그래? 그럼 네 자식들에게 잘 된 거구먼. 적어도 이번 생에는 나를 다시 볼 일이 없을 테니까."



롱펠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의 교도관을 한 차례 바라보곤 몸을 돌렸다. 동시에 맞은 편의 사내는 자신을 제지하고 나선 다른 교도관 너머로 다급하게 울부짖었다.



"롱펠로! 널 기억하겠어! 네 그 눈망울을 내 심장에 박아놓으마! 네가 환생해서 어디에 있건 한눈에 알아보도록!

롱펠로! 내 말 똑똑히 기억해! 널 기억하겠어!"



롱펠로는 돌아보지 않은 채 중지를 치켜들었고, 그게 롱펠로와 이 사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40달러를 꽉꽉 채운 롱펠로 최후의 만찬은 다음과 같았다. 꽃등심 스테이크, 물론 미디엄 레어로. 감자튀김 듬뿍, 물론 얇게. 소시지구이, 물론 스모키하게. 디저트는 저먼 초콜릿 아이스크림, 물론 1.5 쿼터 통들이로.


그리고 롱펠로는 약물 투입으로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교도소 내에 떠도는 도시 괴담, 즉 재수가 없으면 바로 죽지 않고 1시간 넘게 발작 증세가 이어진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롱펠로는 10분도 채 안 되어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 롱펠로의 마지막 기억은 눈이 감기면서 동시에 아주 많은 빛이 내리쬐던 기억이다.


한편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으나 롱펠로는 감긴 눈꺼풀 바깥으로 그 빛들이 여전히 가득하게 내리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빛들이 사라지고.. 어째서인지 롱펠로는 울고 있었다.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롱펠로의 감긴 눈앞으로 의료용 캡을 눌러쓴 한 남자의 얼굴이 들이밀어 졌다. 남자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러한 환생은 때론.. 전생에 자신과 연이 닿았던 이와 가까운 사이로 이루어지곤 하지."



감히 사람이 품을 수 없는, 그런 슬픔과 환희가 뒤섞인 표정을 한 남자가 재차 말을 이었다.



"우린 아주 오래도록 함께할 거다, 롱펠로."








-fin-




















후기


나는 독자의 바람이 담긴 그릇에다 침을 뱉는 걸 좋아한다. 물론 몰래 뱉어야 한다. 아니면 그러려고 한 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뱉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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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집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2. 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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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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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집




우리 자매가 어릴 적 할머니는 종종 뽐내듯 말하곤 했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말거라.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간단다."



뭐, 요즘은 할머니도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지 오래라서.


어쨌건 결과적으로 나는 할머니의 말을 따랐다. 불행을 두려워하지도,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굳이 둘러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아니었다. 동생은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했고 잔뜩 웅크린 채 불행이 오지는 않았나 항상 사방을 살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흠, 이번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을 말해줘야겠군.


어릴 때부터 동생은 내 껌딱지였다. 두 살 터울인 동생은 심약하기가 그지없는 아이였다. 사람 얼굴을 3초 이상 쳐다보면 얼굴이 벌게져서 터져버릴지 모르는, 그런. 동생이 가족을 제외한 사람에게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한 건(실상 가족들에게조차 늘 기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바로 이웃집 참전용사 지미 할아버지에게 한 인사였을 것이다.


어느 날 엄마는 동생의 성격을 고쳐보겠다며 이웃집 지미 할아버지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오지 않으면 평생 집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마 전날 어디서 시답잖은 자녀훈육계발서 따위를 읽었을 거다. 아니면 동네에서 방귀 좀 뀌는 아줌마에게 귓동냥을 받았거나.


그날 마당에 나와 팔짱을 낀 채 노려보는 엄마 앞에서 동생은 얼굴이 눈물 반이 된 채로 몇 번이고 지미 할아버지(비만 오지 않으면 매일 현관 앞 오크나무 의자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글쎄, 지미 할아버지에게 그 인사가 제대로 전달됐을는지 모르겠다. 그 양반 원체 가는 귀가 먹어서 말이다.


물론 그런 발작적인 훈육은 당연히 장기적인 효과가 없었고, 엄마는 이내 손을 떼고 말았으며, 아빠는 사춘기가 지나면 자연히 성격이 바뀔 거라며 태평을 부렸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각종 심부름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옆집의 다 죽어가는 영감쟁이에게도 말 한마디 못하는 동생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동생이 염치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심부름을 도맡는 게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서 동생은 매번 나를 따라나서선 아무리 가벼운 짐이라도 나누어 들곤 했다. 그렇게, 내가 사는 오하이오 주 시골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나와 내동생을 '껌딱지 자매'라고 불렀다.


자, 그럼 시간을 이번 여름방학으로 돌려볼까?


내가 사는 마을에선 차라도 끌고 나가지 않는 이상 10대가 즐길 수 있을 만한 게 도통 없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중학생이라 면허증이 없었고 후져 터진 6단 기어 자전거로는 어디 멀리 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 숲(사실 숲이라고 표현하기에 민망할 정도의 규모지만)으로 가 꼬불쳐 둔 떨 따위를 피우는 게 최고의 여가였다.


당연히 항상 옆에는 내 껌딱지도 있었다.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시간을 보내던 동생을 나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같이 있어 줘야 했고 그건 방학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학마다(꼭 방학이 아니더라도) 숲으로 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 동생도 수다를 떨었냐고? 그렇다. 동생은 나와 있을 때면 제법 명랑했다. 말도 곧잘 했고. 사실 동생은 말주변이 썩 괜찮은 편이었다.


어쨌건, 내가 하려는 말은 이렇게 볼 것 없는 시골 마을에선 으레 도시 괴담 하나둘 정도는 나돈다는 거다. 당연히 우리 마을에도 도시 괴담이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숲 가장자리의 귀신 들린 집과 관련된 것이었다.


숲 가장자리에는 녹을 띤 허름한 울타리 안쪽으로 오래된 목조 집 하나가 있었다. 그 목조 집에는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얌전하고 상냥하기만 하던 그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모습이 존재했다. 그녀는 지독한 카니발리즘 소유자로, 몰래 꾀어낸 동네 여자애들을 집으로 데려가 한 점 한 점 음미하며 뜯어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 끝에 유죄를 선고받곤 죄수들이 가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 이후 법적인 소유 문제로 인해 덩그러니 남아버린 목조 집 주변으로 철조망이 설치됐고, 정신병원에 수용된 그녀는 며칠이고 식사를 게워내더니 어느 날 알몸인 채로 입이 닿는 곳의 자기 살점들을 모조리 뜯어먹어 과다출혈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이지, 그녀는 죽어서 이 목조 집으로 돌아와 여자애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대."


"..언니, 근데 왜 여자애들이야? 그 여자는 여자애들만 잡아먹는 거야?"


"그건 말이야.. 아이들의 살점에서 누린내가 덜 나고 여자가 씹는 맛이 더 부드러워서래. 그녀는 산채로 사람을 잡아먹는 주의거든. 그래서 먼저 혓바닥과 목구녕을 칼로 헤집는 거지."


"..언니는 그 이야기를 믿어?"


"글쎄다. 사실은 상관 안 해. 중요한 건 지금 이거보다 재미있는 게 우리한테 있느냐는 거지. 자, 나 먼저 간다."



나는 철망 하단으로 흉하게 뚫린 구멍을 기어 통과한 뒤 동생이 따라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문이 열려있는데?"


"..언니, 그냥 돌아가자."


"안에 잠깐만 들어갔다가 가자. 전리품은 챙겨가야지."


"..그냥, 가자. 느낌이 안 좋아."


"너 겁먹은 거야? 그녀에게 잡아먹힐까 봐?"


"...."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딛는 거야. 그리고 전리품을 챙기면 넌 이제 학교에서 적어도 두 달간은 인기스타가 되어있을 거라고."



한참을 주춤이던 동생은 결심한 듯 내 얼굴을 올려다봤고, 그렇게 우리는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환장하겠네, 있는 거라곤 거미줄뿐이고. 뭐 챙겨갈 만한 것 좀 보여?"





아무 대답이 없어 동생 쪽을 돌아보니 동생은 그야말로 분칠한 듯한 얼굴색으로 굳어있었다. 동생의 시선은 어느 바닥에 머물러있었는데 그곳엔 자그마한 뼛조각들과 함께 아무렇게나 떨구어진 듯한 핏자국들이 아직 선명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미친 사람마냥 뛰쳐나가는 공포영화 속 클리셰는 모두 엉터리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날, 나와 동생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망각한 채 자빠지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비틀비틀 오두막을 빠져나오곤 울타리를 기어 나와서도 한참을 기어댔다.


그리고, 그날부터였다. 동생은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는지 밤마다 '그날' 못 질렀던 비명을 지르느라 분주했다. 허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동생은 이따금 발작적으로 어떤 음식이든 게워내기 일쑤였다. 원래부터 마른 몸이었던 동생은 곧 삐쩍 마른 형상으로 변해갔다.


엄마 아빠는 손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의사는 동생의 몸에 특별한 이상을 찾을 수가 없으며 아마 심리적인 문제로 보이는데 식이장애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병원 측은 가정에서 좀 더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하면서 만약 상황이 지속될 경우엔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아빠가 직장에서 의료보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마을의 신부님에게 주기적인 가정방문과 기도식을 간곡히 부탁했고(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기 싫어 갖은 핑계로 내빼곤 하던 아빠도 마지못한 얼굴로 동의했다. "그래, 뭐. 와서 기도만 하는 거라면야, 뭐."), 그 열의와 신앙심에 감복한 신부님은 매일마다 저녁 식사 전 우리 집에 들러 다정한 음성으로 동생 앞에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러나 동생의 발작적인 증상은 그대로였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그리고 또 새로워졌다. 어느 날부턴가 동생의 팔 주변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물어뜯은 듯한 상처였는데 정작 동생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했다. 병원에선 사람의 치아로 인한 상처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이 신고를 한 탓에 엄마와 아빠는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동생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또 늘어났다. 다양한 부위들로. 더불어 그에 비례해 악몽으로 인한 비명 또한 더욱 거세져 갔다. 이제 엄마, 아빠는 매일 밤마다 동생을 당장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하니 말아야 하니로 싸워댔다.


그렇게 그날이었다. 언제나 보다 조금 이른 새벽녘. 평소와는 달리 마치 짐승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에 우리는 반사적으로 깨어나 동생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자 어둠 속임에도 동생이 침대 앞에 우뚝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켜자(아마 아빠였을 거다) 우리는 동생의 모습과 행동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동생은 만면에 웃음꽃이 핀 얼굴을 하고서 이제는 하얀 뼈가 드러나기 시작한 한쪽 팔의 살코기를 게걸스레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압도적인 광경에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수 초 후에나 아빠가 나와 엄마를 살짝 감싸 안은 채 동생을 향해 말했다.



"마리아, 너 지금 뭐하는 거니? 가만히 있으렴. 아빠가.."



그러자 동생이 정말 미친 사람처럼, 마치 고장 난 인형마냥 얼굴을 격렬하게 흔들며 웃어 젖혔고 곧 덜렁거리는 살코기 한 점이 동생의 입에서 툭 떨어졌다. 동생이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쾌활하고 명료한, 그리고 탁한 음성으로.



"난 마리아가 아니야. 사람 잘못 봤수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온몸이 굳어버려 그저 꼼짝도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고, 그런 우리를 재미있다는 듯이 훑어보던 동생이 다시 덧붙였다.



"자빠지겠네! 니들은 지금 내가 마리아로 보이는 거니?"



여기까지가, 내 동생이 여름방학 중에 결박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일련의 이야기이다. 동생은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했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불행이 오지는 않았나 항상 사방을 살핀 끝에 불행과 눈이 마주쳐졌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강력했다.


동생은 여름방학이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금에도 여전히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다. 종종 음식물을 게워내고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집중 감시를 받으며 종종 악몽을 겪은 후에나 하루를 시작하면서 말이다.


자, 이야기 끝이다. 나? 나는 문제없다. 나는 불행이라는 놈을 다룰 줄 안다. 무엇보다도 나는 '목조 집의 그녀' 이야기를 결코 믿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낸 거니까.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성가시기는 했지만 효과는 내 예상 밖이었다. 덕분에 말이지, 나는 학교에서 같이 노는 친구들이 생겨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 그저 좀 놀래켜서 여름방학만이라도 껌딱지에서 해방된 채 홀로 바깥에서 호사를 좀 누리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나 자유의 몸이 되다니!


그리고 지금 나는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않는다.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가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내 동생은 오래도록 입원해있을 것이다.





-fin-




















후기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 중 하나를 꼽자면 '사람의 마음'을 들 수 있겠다. 특히나 '상대방의 마음'이. 그래서 뻔뻔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잘 사는 거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지도 말거라. 불행은 불안과도 같아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이에게 반드시 찾아간단다."





http://blog.naver.com/medeiason/22115428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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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2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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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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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지난밤이었다. 잠옷 바람을 한 우리 막내 딸아이가 서재(나 홀로 그렇게 부르는 골방)로 종종 달려와 그림책 한 권을 쑥 내밀곤 물었다. 그 그림책은 '헨젤과 그레텔'이었는데 아마 제 엄마가 월마트에서 사줬나 보다.



"아빠, 마녀가 진짜 있는 거야?"


"..뭐라고 했니?"


"마녀. 이렇게 코가 기-다랗고 손톱이 뾰족해."



딸아이가 펼친 페이지에는 흉측한 형상의 마녀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너 그것도 몰랐냐? 우리 앞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마녀야. 그 할멈, 지난번 니 뒷다리 보면서 군침 좀 흘리더라. 넌 이제 다 살았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놈이 딸아이에게 이죽거렸다.



"저리 가!"



딸아이가 아들놈 쪽을 향해 팔을 허공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자, 그만. 너희 둘 그렇게 자꾸 싸우고 그러면.. 진짜 마녀가 나타나서 잡아간다!"



내가 딸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사방으로 흔들어대자 딸아이는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연신 내뱉었다. 한편, 아들놈은 그저 멀뚱히 서서 입꼬리만 씰룩이고 있었다. 고개도 같이 삐딱하게 돌려 젖히고는 말이다. 도대체 저런 표정과 제스쳐를 아이들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아빠, 세상에 마녀가 어딨어요."



아들놈이 내게 점잖이 핀잔을 주었다. 맙소사, 마치 세상 다 살아본 사내의 눈빛이로군.



"얘야, 마녀는 진짜 있을지도 모른단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말이지. 그러니까 어서 양치하고 엄마한테 굿나잇 인사하렴. 마녀는 잠들어있는 아이에겐 관심이 없거든."


"하지만 아빠, 정말 마녀가 있다면 이미 유튜브에 올라왔을걸요?"



도대체가, 인터넷이 애들한테 도움되는 꼴을 못 봤다니까.



"그래? 덕분에 새로운 걸 알게 됐구나. 마녀는 카메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자, 어서 양치하러 가렴."



나는 두 아이를 돌려보내곤 다시금 모니터 속 문서창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얘들아, 마녀는 존재한단다.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에는 말이지."



 



그렇다. 마녀는 존재한다. 어딘가에그래, 마녀는 존재한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그리고 생각보다 젊고 평범한 모습으로. 어쩌면 당신도 살면서 한 번쯤 마주쳤을지 모른다.


이건 오래된 이야기이다. 1991년 당시의 이야기이니까. 만약 딸아이가 마녀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았다면 더 오래오래 잊고 지냈을 거다. 그러고 싶었고 말이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 중에서 형제자매의 전 애인 만큼 잊고 사는 관계가 또 있을까? 이건 오래된 이야기인 동시에 내 누이의 전 남친이었던 새미토퍼 체이스의 이야기이다.


먼저 새미에 대해 좀 말해보겠다. 엄밀히 말해 새미는 썩 어울리고 싶은 부류의 남자는 아니었다. 술, 담배, 메리앤제인이나 약어로 된 알약은 물론이고 심지어 농지거리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남자였으니까. 그는 살면서 군것질 서리 한 번 안 해봤을 텐데, 이 모든 건 아마 그의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일 거다. '새미, 아가. 도둑질은 나쁜 거란다. 술, 담배도 하지 마렴. 쟤들이랑 놀지 말고. 엄마 말 듣지 않으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없단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새미는 그런 남자였다. 너무도 착실해서 감히 놀릴 마음조차 들지 않는. 그런데도 여자들은 그를 썩 좋아하곤 했다. '그는 샌님이라서가 아니라 삶에 진지한 거야.'라나? 세상에 마상에, 가끔 보면 정말 여자들은 이해하기가 힘들다니까.


어쨌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야기 자체는 제법 짧다.


그, 그러니까 새미가 내 누이와 진지한 만남을(오, 아무렴. 새미인데) 이어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새미는 한 음악 회사의 아티스트 매니저 겸 일종의 음악 프로듀서였다. 그즈음 새미는 평소 동경하던 음악 장르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완전히. 새미가 빠져있던 건 바로 '고대 이집트 음악'이었다. 아마 고대 이집트 음악이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유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보다 정확히는 그저 그 장르에 꽂혀버린 것일 테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도 이 고대 이집트 음악은 철저하게 비주류였다. 하여, 새미는 해당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백방으로.


그 과정에서 새미는 한 여인과 접촉하게 된다. 여인 쪽에서 먼저 어떻게 알고서 연락을 취해왔는데 분명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고 연락해온 건 아닐 거다. 그녀는 자신을 고대 이집트 음악 전문가로 소개했다. 곧 저녁 식사 약속을 잡은 새미는 그녀가 거주하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녀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티셔츠와 재킷, 진 차림에다 아무리 봐도 대학생 정도로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곳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 동안 둘은 고대 이집트 음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시종 심도 있는 고견을 내놓았다. 그녀의 고대 이집트 음악에 대한 조예는 새미 이상이었고 이에 새미는 그녀와 진부한 표현 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서 새미는 그녀에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는데(아주 조심스럽게), 시종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는 그 질문에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선언하듯 대답했다.



"제 직업은 마녀랍니다, 체이스 씨."



직업이 마녀라.. 정말이지, 세무서 직원이 좋아할 만한 대답 아닌가? 허나 새미는 새미인지라 그러한 대답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조소를 보내지 않았다. '마녀'를 단어 그대로의 마녀가 아닌 일종의 삶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 반, 그리고 상대의 말에 섣불리 비아냥으로 화답하는 건 그의 인생 철학에 위배된다는 게 반이라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새미는 그녀에게 조소를 보냈어야 했다. 그건, 일종의 테스트였으니까.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선 직후 그녀는 대놓고 새미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왔다. 문지방에서 몇 발자국이나 떨어졌을까. 그녀가 새미의 팔짱을 부드럽게 끼고선 말했다.



"체이스 씨, 저희 집에서 한잔하면서 더 이야기해요."



이럴 경우 새미는 상당히 단호한 편이다. 새미는 즉시 팔짱을 푸르곤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럴 수 없겠노라고 대응했다. 그때였다. 시종 어른스럽고 고고한 태도로 일관했던 그녀가 갑자기 인도 한복판에서 새미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핏대 서린 얼굴로 새미를 힐난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계속해서 호의를 보내와 놓곤 갑자기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새미는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인생에서 대부분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곤 하는 법이다. 그녀는 끝내 화를 풀지 않고서 뒤돌아 가버렸다. 마지막으로 새미에게 거칠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새미토퍼 체이스, 넌 나를 모욕했어. 망신을 주었다고. 두고 봐. 네게 저주를 내릴 테다!"



아무리 매사에 진지한 새미일지라도 그녀의 '저주'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 순간 민망함에 화가 났던 것이라고만 여겼다. 처음 며칠간은 말이다. 며칠 후, 새미의 꿈에 나타난 탁한 쇳소리가 말했다.



"사악한 눈의 딸이 너를 찾아갈 거야. 어린 그녀, 지금의 그녀, 그리고 미래의 그녀가."



그 주부터였다. 체이스의 꿈에 웬 흐릿하고 검은 형체가 나타난 게. 꿈임에도 그 형체로부터 설명 못 할 두려움을 느낀 새미는 매번 집을 뛰쳐나오곤 했다. 허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코너를 도는 순간 어째서인지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 있었고 몇 번이나 도망치다가 절규하며 꿈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그리고 마침내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형체가 드러낸 모습은 소녀였다. 소녀는 손에 쥔 칼을 앙칼지게도 흔들어대며 새미를 노려봤다. 소녀는 단지 멀찍이서 칼을 흔들어댈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새미에겐 충분한 고통이었다. 며칠간 새미를 괴롭히던 형체는 이번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그녀 자신의 모습으로.


또 며칠간 시달리는 날이 이어지고 이번엔 중년의 여인으로 나타난 형체가 새미의 손톱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꼼꼼하게 빼먹지 않고서. 물론, 잠에서 깬 새미의 손톱들은 모두 멀쩡했다. 다만 환장하겠는 건 꿈속에서 하나하나 뜯어먹힐 때마다 절로 비명을 자아냈던 그 아픔들이 꿈을 깬 후에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온전히 붙어있는 손톱들, 그 자리로 계속해서 욱신거리는 고통들. 더 무서운 거? 매번 꿈에서 손톱들을 모두 뜯어먹은 여인이 눈을 까뒤집은 채 새미의 가슴팍을 더듬으며 말한다는 거다.





"심장이 어느 쪽이지? 이쪽이지? 아닌가? 괜찮아, 두 군데 다 파보면 되니까."



여기까지가, 나와 누이가 새미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어찌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지 새미는 눈에 띄게 빠진 머리와 깊은 골짜기로 박힌 눈, 내 누이만큼 가늘어진 손목을 한 채 하소연했다. 이따금 입술 가장자리로 끈적한 침을 새어가며.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딱히 도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는 대학에서도 배운 적이 없으니까.


며칠 후, 누이는 새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지역 경찰에 신고했다. 왜냐하면 그가 누이의 전화에다 평소 같지 않은 음성을 남긴 이래 연락이 되지 않았거든.



"이제 나는 이대로 죽을지도 몰라. 너무나 두려워. 그래도! 그래도! 절대로 그 개년이 날 이기게 두지는 않을 거야!"



꽤나 오래전 일인지라 새미가 정확히 개년이라고 했는지는(맞는다면 아마 태어나서 처음 한 욕일 거다) 모르겠다만 어쨌든 충분히 흥분하고 있던 건 확실했다. 한편 새미네 집을 찾아간 경관은 소득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아무리 현관문을 두드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다음 날 나와 누이는 직접 새미네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지역 경관 둘과 함께 새미네 집을 찾아갔다. 집은 전날과 달리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경관은 우리에게 문밖에 있을 것을 지시한 뒤 권총을 꺼내 들고선 거실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누이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새미의 이름을 외쳤다. 나는 그런 누이를 말리려고 뛰어들어갔다가 깨달았다. 현관문에서부터 집 사방으로 소금이 흩뿌려져 있다는 걸. 또, 욕실 문이 잠긴 채로 닫혀있다는 걸.



"경관님! 여기 욕실 문이 잠겨 있어요! 와보세요!"


"새미! 새미, 거기 있어?"


"물러나세요. 체이스 씨, 안에 계십니까? 체이스 씨, 계시면 대답하세요."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자 경관 둘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거실에 비치된 싸구려 2단짜리 장식장에서 얼굴만 한 크기의 파라오 석상을 가져온 누이가 그걸로 욕실 문손잡이를 냅다 후려갈기기 시작했고

나와 경관 둘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손잡이가 맥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실에서 나는 평생 못 잊을 장면을 보게 된다. 아마, 나 외에 셋도 마찬가지리라.


욕탕 안에는 새미가 누워있었다. 새미는 잠옷 차림으로 빈 욕탕 안에 누워있었고 머리카락은 두피가 온전히 드러날 정도로 다 빠져 있었다. 새미는 참으로 얌전하게도 가지런히 누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그 옛날의 파라오상 같았다.


우리 넷은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새미의 몸은 마치 방금 샤워를 끝낸 양 깨끗해 마지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엔 눈물마냥 죽음이 그렁하게 걸려있었다. 허나 우리는 놀랄 정신도 슬퍼할 정신도 없었다. 파라오상과 같은 모습으로 욕탕에 안장된 새미, 집 안과 마찬가지로 온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소금, 욕탕 주변으로 마치 바리케이드마냥 펼쳐진 양초떼, 그 안으로 조심스레 정렬된 가지각색의 십자가상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오컬트 관련 서적(펼쳐진 페이지는 모두 '저주'에 관한 것들이었다)들. 이와 같은 기괴한 하모니가 전달하는 이질적 공포감에 꼼짝없이 전염되어버린 것이다. 궁극적인 공포 앞에선 그 무엇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마치 묵시록적인 예술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 앞에서 잠시간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 묵시록적 예술작품. 한낮의 인간세계로 재림한 사탄과 종말, 바로 그걸 캔버스 소재로 한. 한편 사방으로 보이는 소금, 양초떼, 십자가상들, 오컬트 관련 서적들이 인간 새미가 마지막까지 얼마나 처절하게 대항했는가를 짐작게 했다.


그러나.. 새미는 패배했다. 정확히 무엇과 그리 사투를 벌였는지 감히 짐작이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새미는 떠났다는 걸. 보름 후, 나와 누이는 신문을 통해 새미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지난달, 마녀로부터 표적이 되었다며 두려워하던 남자가 자신의 자택 욕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여자친구에 의하면 남자의 이름은 사무엘 체이스(35)로, 자신을 마녀라고 밝힌 신원 미상의 한 여성으로부터 애정 표시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4월 18일, 체이스 씨의 여자친구로부터 신고를 받은 경찰은 노스 킹 카운티 북부 152번가 1300 블록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킹 카운티 경찰에 의하면 당시 현장에선 범죄, 폭력, 강도와 관련한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조사 결과 현장 주변으로 소금, 양초, 십자가상이 발견되었다.


한편, 킹 카운티 검시관 리치 가너는 체이스 씨의 몸에서 그 어떠한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인에 대해선 급성 심근염이라 결론 내렸다.


- 1991년 5월 4일 자 <시애틀 타임즈>



새미의 사인은 급성 심근염이었다. 하나 말해주자면 말했듯 새미는 생전 술, 담배, 약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비타민을 챙겨 먹었고 가족친지 중 심장 병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본인 역시 생전 심장과 관련한 질환을 앓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새미는 사방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선 욕탕 안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무언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잠긴 욕실로 침입한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 아마, 흔적이란 게 남을 수 없었던 존재였겠지. 그리고 그 무언가로 인해 새미의 심장이 갑작스레 멈추고 말았다. 그 무언가를 보고 너무도 놀라서인지, 아니면 그 무언가가 직접적으로 심장을 멈추게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자기, 안 잘 거야? 뭐 한다고 그렇게 오래 있어?"


"아.. 여보. 애들은 다 잠들었어?"


"진즉에."


"마무리하고 금방 갈게."


"그래, 하고 와."



나는, 내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한번 짚고는 뒤돌아 나가는 아내에게 나도 모르게 물었다.



"여보?"


"응?"


"..혹시, 살면서 마녀 본 적 있어?"



아내는 난데없는 질문에도 일말의 당황한 표정 없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는 곧 대답했다.



"자기, 내가 바로 그 마녀야."



오히려 내가 잠시간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내는 머리를 푸는 동시에 장난스레 엉덩이를 양옆으로 흔들며

한껏 꾸며낸 목소리로 말했다.



"잊었어, 자기? 내가 밤마다 못된 마녀가 된다는 걸?"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내보이고는 예전 내가 청혼했을 때 지었던 그 미소를 띤 여인네에게 금방 가겠노라고 조아렸다. 그렇게 엉덩이를 과장스레 씰룩대며 돌아나가는 그녀를 끝까지 지켜본 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fin-




















후기


해당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 속 <시애틀 타임즈>는 있는 그대로 옮긴 것이라 보면 된다.


실제 모델인 크리스토퍼 케이스는 공포에 잠식된 나날을 보낸 끝에 숨이 멎고야 말았다.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저마다 품에 안고 사는 것이다. 사실 그 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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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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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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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창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살아남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도망친 것이다. 내 품에 싸인 이 '물건'을 맡아야 하니까. 나는 이 '물건'을 맡으라는 명을 하달받았다. 그 명을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탈출로를 선점 받았다. 그러니 조금은 내 비겁함을 변호해야겠다. 나는 명에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을 맡은 다음은, 그다음엔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같이 평생을 명에 따랐던 군인에게 있어

은퇴란 그런 거다. 계획된 것이든, 계획되지 않았던 것이든 간에. 앞으론 군복 대신 셔츠 쪼가리 하나만 걸칠 것이다. (어차피 군복도 모두 처분한 지 오래다) 그리곤 이 따뜻한 곳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겠지.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어쨌건, 그렇게라도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간이 끝까지 사는 거다.


히틀러 씨(그분은 항시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바랐다)가 이 '물건'을 처음 접한 건 빈에 거주하며 미술에 몸담고 있던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그것은, 1912년 합스부르크 가의 보물을 전시하던 박물관에서였다. 처음 히틀러 씨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그게 2시간 전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 평소 조용하고 수줍음 많았던 히틀러 씨는 이야기 내내 핏발에 광기를 띠고 있었다. 히틀러 씨는 마치 다른 세상을 엿보고 있는 양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선 그날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온 유럽이 기독교인 만큼 나 또한 가톨릭교도였네. 그래서 처음 그 '창'에 어떤 신성함 같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실제로 본 순간 모든 게 날아가 버렸네. 그때 내가 느낀 건 신성함이 결코 아니었어. 곧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비명 지르는 게 느껴졌지. 때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잖나. 그리곤.. 이건 농담이 아닐세. 그 '창'이 내게 말을 건네왔어.


'아디, 아디. 널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옛날, 네가 태어나기도 전 네가 날 손에 넣었을 무렵부터. 아디, 내게로 오렴.'"



그 뒤, 히틀러 씨는 1차 세계 대전 참전 후로부터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계와 대중의 총아가 되었다. 그렇게, 방랑하던 미술가는 1934년 독일의 총통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 씨와 '창'과의 인연(?)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자 비밀스러운 심복이었던(그리고 친구였던) 나는

그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 임무를 일임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임무의 첫 수행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창'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창'은 여러 주인의 손을 탔던 것 같다. 아리마태아의 요셉 자손들이 차례로 보관해오다 오랜 세월 예루살렘에 묻혀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이 찾아낸 이래로.


그렇게 로마 황제들의 손에 번갈아 들어갔던 '창'은 그들을 패권의 길로 인도했다. 허나 손을 벗어난 '창'은

그들을 곧바로 패망의 길로 밀어뜨렸다. 이후 십자군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창'은

원정 승리로써 그에 보답한다.


그 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창'은 그들에게 유럽 제일의 패권을 가져다주었다. 천하에 위세를 떨치던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빛나는 승전보를 올리나 끝내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창을 가로채는 데엔 실패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600년 가깝도록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배하며 1914년 세계 대전을 선포한다.


그리고 1938년. 히틀러 씨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병합한다. 동시에 히틀러 씨는 친위대 앞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물들을 압수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물론, 그전에 미리 비밀명령을 하달받은 나로 인해 '창'은 아무도 모르게 가짜로 대체된다. 뉘른베르크의 교회로 옮겨진 게 바로 그 가짜였다.


마침내 히틀러 씨는 '창'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열망했었던 그 '창'을. 지금에 와 보면 가난한 미술가가 독일의 총통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을 합병한 게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1939년. 히틀러 씨는 폴란드 침공을 전개했고 곧 두 번째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창'을 손에 넣은 히틀러 씨는 곧 전 세계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마침내 이곳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내가 아무도 모르게 친위대 중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안전하게 탈출로를 선점 받았던 것은 히틀러 씨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씨는 확신했다. '창'이 수중에 있는 한 운명은 다시금 자신의 편에 서리라고. 하여, 첩보를 입수하고선 전설의 '창'을 손에 넣으려 호시탐탐 침을 흘려대는 개떼(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에 대비해 내가 움직인 것이다.





머저리 놈들. 가짜를 두고서 서로 물어뜯기나 하라지. 말했듯, 히틀러 씨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창'만 있다면야 언젠간 전황이 바뀔 거라고. 그러나 쑥밭으로 둘러싸인 벙커 안에서 히틀러 씨는 마침내 낙담하며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창'의 보관 임무에 실패한 거라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히틀러 씨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낯선 땅에 홀로 남겨졌다. 말했듯, 이 빌어 처먹을 '창'과 함께.


나는 이제 안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직감하고 있다. 때론 직감이 가장 우수한 이론인 법이다. '창'은 신성한 피가 닿은 성유물이 아니었다. '창'은 패권으로 인도하는 제왕의 유물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창'은 기다렸다. 로마 제국 시절 발견된 이래 황제들의 손을 거치며 그들을 부추겼다. 그들을 움직였다.


'창'은 그들론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차례로 그들을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허무한 몰락을 맞이했고 '창'은 십자군 원정을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로 도착했다. (십자군 역시 끝내 버림받으며 비참한 끝을 맞이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대로 된 대상자를 찾은 것이다.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세계 대전이 끝나자 '창'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버렸다. 지난 '그들'이 그러했듯 합스부르크 왕가는 몰락했고 '창'은 히틀러 씨를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이제는 안다. '창'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제 안다. '창'은 피를 원한다. 우리 인간의 피를. 더 많은 우리 인간의 피를. '창'에는 그 옛날 두 번째 인간을 유혹했던 사탄이 깃들여 있는 거다. 사탄은 광야에서 나사렛 사람에게 세 가지 유혹을 거절당하곤 잠시간 자취를 감췄다. 사탄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건 '그날'이었다. 사탄은 스스로를 '창' 속에 구속한 것이다. 인간의 피를 부르기 위해. 나사렛 사람을 평등과 사랑을 전파한 개혁가가 아닌, 오로지 신의 아들로만 만들고자. 그러기 위해 '장치'를 자처했다.


'창'이 마침내 두 번째 인간이 탄생했던 곳을 찔렀다. 사탄은 스스로를 구속시키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에 성공한 거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이 신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두고서 신의 이름을 빌린 자들에 의해 쏟아진 헤아릴 수 없는 피들이 아마 땅속을 스며들어 저 아래 지옥에까지 닿았을 것이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창'은 끝없이 피를 갈구하며 대상자를 찾아왔다. '창'은, 사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창'이 더는 인간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오, 하늘에 계신 분이시여. 이 사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땅에 가라앉히든, 물에 가라앉히든, 가라앉은 건 언제고 떠오르는 법이 아닌가. 나는 대상자들이 사탄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최소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러도록 할 것이다. 사탄을 항시 품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오래지 않아.. 그래, 머지않아서. 대상자들이 다시금 사탄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개 무리는 늑대를 결코 지나치지 않는 법이니까. 그때까지 우리 인간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탄이 오래도록 지금의 피에 만족하길. 그래서 가능한 한 늦게 대상자를 불러들이길.



 



"meos tuosque, huc ades"





-fin-


















후기


대표적인 성유물 '운명의 창'을 두고서 실로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 종교 소재만큼 영감을 자극하는 게 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색채를 입히면 제 아무리 덜떨어진 수준의 창작물이라도 일견 봐줄만해지는 법 아닌가.


어쨌건, 나 역시 성(聖)을 향한 관음 욕구를 기꺼이 소비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이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의 역할이 종래 다른 창작물들과 다른 노선을 띠고 있는 것에 기꺼워하는 편이다. 그건, 성(聖)스러움을 확립코자 쌍스러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그것을 이야기 속 운명의 창이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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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생각했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11. 10.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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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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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은 생각했다



 



도르르


도르르


도르르르


오늘도 실타래는 풀려 간다.


역사라는 이름의 실타래가.


다음 실타래를 위하여.





그건 1914년 여름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정해 놓은 것처럼, 그저 순서가 되었기에 찾아온 것처럼, 그렇게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젊은이인 시몬도 전장에 발을 딛게 되었다. 과거의, 또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1918년 가을, 프랑스 최북단에 위치한 노르 주. 이곳의 한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해당 전투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본인의 마지막 세계 대전을 치르는 셈이었다. 시몬은 바로 이 전장 한복판에 있었다.


허나, 마지막 전장이라고 위안 삼기엔 일렀다. 시몬이 속한 소대는 부대와 고립된 채 적군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내내 그 망할 놈의 기관총으로 참호 밖으로 내미는 머리통을 쏴 재끼고 있었다. 당연히, 그러한 머리통은 모두 시몬의 전우 것이고 말이다.


아직 머리통이 달려 있는 것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시몬은 이미 한참 전부터 죽음의 내음을 맡고 있었다. 그 내음은 땅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포도밭 향 따윈 진즉에 사라진 이곳 토양, 절망과 손을 맞잡고 춤추던 전우들, 그 전우들을 영양분 삼는 구더기 떼, 세상의 끝과 마주한 채 곳곳에서 꺼뜨리는 비릿한 한숨들. 그러한 것들이 한데 묶인 향이 계속해서 시몬의 콧속을 찔러 대며 유혹을 가해 오고 있었다. '포기'라는 유혹을.


하지만 시몬은 그 유혹과 결코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용감하기 때문에? 아니, 그렇지 않다. 새 떼에게 쪼인 눈알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목이 덜렁덜렁한 시체에서 새어 나온 배설물들의 악취가 공포라는 것을 전염시키는 와중에 용기라니? 그러한 상황을 두고서 용기 운운하는 것들은 필경 지붕 밑에서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그 상스러운 주둥이를 흔들어 대는 치들뿐이다.


시몬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건 바로 무섭기 때문이었다. 시몬 옆의 전우들, 그 전우들의 동태 눈에서 하나 같이 새어 나오는 죽음의 예언. 그게 매 순간 시몬을 두려움에 젖게 하며 포기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 내몰린 시몬은 참호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고막을 찌를 듯한 소리들이 공기를 가르고 시야를 흩트리는 동안에도 시몬은 어쩐지 턱 끝까지 다다른 찬 내음만을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찬 내음에만 집중하고선 달린 끝에 시야로 기관총을 붙들고 서 있는 적군이 들어왔다. 시몬의 시야는 전에 없을 만큼 선명했다. 하얗게 질린 채 한쪽 입이 살짝 뒤틀려선 기관총에다 자신의 운명을 떠넘긴 적군의 모습, 그자의 치켜진 눈썹 위로 난 주름살 개수마저 가늠될 정도였다.


시몬은 품에 쥐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 전방으로 내던졌다. 마치 여적 그것을 위해 살아왔던 것처럼, 그러라고 신이 세상에 내보낸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신속하고 절묘한 투척이었다. 이어 시몬은 적군 진지 내 좁다란 통로에서 달려드는 적군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검을 내질렀다. 아무런 철학도 없는 본능적인 행위였기에 그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시몬 뒤로 광기에 붙들린 눈을 한 전우들이 같은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몬은 살아남았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적군의 단말마가 시몬에게 고향에 돌아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고 있었다. 곧이어 시몬이 활로를 연 덕택에 합류한 본대가 적군에게 응징을 가했다. 한편, 시몬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전우들을 대신하여 잔당 색출 작업에 참여했다. 본대의 배려를 받아 후방에 남아서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시몬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온 것은. 그 남자는 뼈대만 흉물스레 남은 벽담에 한 팔을 기댄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시쳇더미 속에서 죽음을 위장한 채 화를 피했던 것인지 얼굴과 온몸에 핏물 어린 진흙덩이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남자는 적군이었다. 시몬과 비슷한 나잇대의.


잠시 후,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시몬과 눈이 마주쳤다. 시몬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어 사격 자세를 취했고 이에 남자는 심장이라도 떨군 듯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몬은 남자의 눈에서 익숙한 것을 보았다. 죽음에서 빠져나갈 희망 따윈 모두 내팽개친, 그 익숙한 눈빛을. 그렇다. 남자는 죽음을 각오한 게 아니라 희망을 포기한 것이었다.


너무도 뜻밖의,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부닥친 시몬은 그 남자처럼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그저 총부리만을 겨눌 뿐이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재빨리 사방을 확인해 보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군 한 명은 이미 저 멀찍이서 소피를 보고 있었다. 시몬은 다시 총구로 고개를 돌려 남자를 조준했다.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그런 절망감 어린 눈으로.


영겁과 같은 찰나의 그 순간, 시몬의 머릿속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다.



"이봐, 전쟁영웅 씨. 뭘 망설이시나? 쏴, 쏘라고! 뭐야? 왜 그러고 선 거야? 사람 처음 쏴 봐? 잠깐, 지금 사람 처음 쏴 보냐는 농담 제법 괜찮았지?"



전장에 몸을 비비며 이미 씻을 수 없는 피를 온몸에 끼얹은 시몬이지만 그래도 버리지 말아야 할 신념이 있었다. 부상당한 적군과 항복하는 적군을 사살하지 말자는 것 말이다.



"아아, 휴머니티! 이 친구야, 항상 모든 문제의 대다수는 그거 때문에 일어난다고. 전쟁이 다 끝난 거 같지? 네가 보낸 저놈이 언젠가는 네 어미, 네 누이, 그리고 네 아내를 겁탈할 거다. 아니, 어쩌면 이미 네 친척이나 이웃 중 하나를 겁탈했을는지 모르지. 모르는 거야. 요컨대, 저놈은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그럴 거라는 거다. 이봐봐, 너는 자기만 아는 그런 이기적인 놈이었나? 주변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치 않는, 그런 놈팡이였나?"



시몬에겐 무저항의 적군을 사살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건, 불가피하게 살육의 지옥터에 내던져진

처지에 있어 그래도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위안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얼씨구! 이 친구야, 그건 비겁한 자기기만일 뿐이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고작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싶다는 어리광에 불과한 거야. 너의 그 신념은 말이지, 저 위의 대리자를 참칭하는 자들로부터 한마디 위로받으면 모두 해소될 것에 불과한 거라고. 네 그 비열함이 나를 악마의 형상으로 만든 건 알지? 어떤 선택을 하든 '악마의 말을 듣지 않았어.', '악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라고 도망가려고 말이야."



시몬에겐 신념이 있었다.



"대단하시군.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난 사람을 죽였지만 신념을 지켰어.'라고 자위할려고? 그런 저열한 위로에 기댄 채 살아갈 건가? 여보, 친구. 이건 기회라고. 저놈을 쏘고서 다시 태어나게. 그럼 너는 네 가족이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마무리를 지은 게 되는 거지. 그 전에 네가 쏘아 죽였던 적군들에서처럼. 그러니 당겨, 방아쇠를 당겨! 너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 되라고! 저놈을 쏘고 완전한 승리를 취해! 명심해,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하면 넌 그저 살인자가 될 뿐이야! 하지만 승리자가 된다면 영웅이 되는 거다! 스스로를 떳떳하게 여기며 평생을 승리자로 살아야 할 거 아냐! 쏴! 쏘라고!"



쏠 것인가, 보낼 것인가. 곧 저기서 아무 고민도 없이 소피를 보고 있는 아군이 돌아오면 그 아군에 의해 남자는 사살되고 말 것이다. 저 아군은 같은 고향 출신의 전우가 죽은 사실을 자신의 모든 행위에 정의를 부여하는 데에 쓰고 있었다. 그러니 남자를 포착하는 순간 자신의 철학을 완성코자 필경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러므로 시몬은 남자의 운명을 남의 손에 떠넘겨 훗날 후회하는 대신 죽일지 살릴지 직접 결정키로 했다.



"싯팔! 난 인간이라고!"



외마디 내뱉음과 함께 시몬은 총부리를 내리고서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시몬의 심중을 알아차리고선 절도있는 본새로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곤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시몬은, 남자의 뒷모습을 쫓으며 중얼거렸다. 악마야, 입 다물어.


전쟁이 끝나고 시몬은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영웅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남자 역시 전쟁이 끝나고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국가로부터 훈장은 수여받지 못했지만 삶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좋은 거 하나를 얻으면 좋은 거 하나를 잃는 거.


세월이 흘러 1925년 11월 4일.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는 이날 한쪽 발을 저는 남자와 만났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둘은 서로에게 매료됨과 동시에 인정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 이날을 기점으로 그 남자가 한쪽 발을 저는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역사의 실타래는 본래보다 빠르게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시몬이 살려주었던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만나게 되는 한쪽 발을 저는 남자가 역사의 기점이었던 것이다. 한쪽 발을 저는 이 남자의 이름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





도르르르르





-fin-




















후기


이 이야기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영웅이었던 영국군 헨리 텐디의 일화를 그 모델로 하고 있다.


1918년 9월 28일, 프랑스 노르 주 마르코잉 마을. 영국군 소대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 채 기관총 견제를 받는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국군 병사였던 헨리 텐디가 기관총 진지를 일순 무너뜨려 아군에게 퇴로를 확보하는가 하면 이후 소수의 아군과 포박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총검술로 앞장서 독일군을 쓰러뜨리기도 한다.


한편, 이후 상황이 역전되어 영국군이 독일군 잔당을 소탕할 시 헨리 텐디는 도망 중이던 한 독일군 병사와 마주한다. 여기서 헨리 텐디는 '부상당했거나 항복하는 적군은 사살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에 따라 그 독일군 병사를 그대로 도망가도록 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히틀러는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과의 회동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그날 헨리 텐디는 나를 죽이기 한없이 가까운 곳에 있었소.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독일을 볼 수 없겠구나 생각했소. 하지만 신의 섭리는 영국군들이 내게 겨누던 사악한 총부리로부터 나를 구해내 주었소."


최근의 전문가들은 역사적 사료를 들어 히틀러의 이러한 언급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당시 영국군의 전쟁영웅이었던 헨리 텐디가 문제의 전투에서 도망치고 있던 독일군 병사 하나를 신념에 따라 보내 주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서 자신의 존재 당위성과 신화 구성을 위한 일종의 선전으로 그같은 창작을 했다고 본다. 헨리 텐디는 이에 대해 1939년 당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쩌면 내가 놓아 주었던 독일군 병사가 히틀러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그 독일군 병사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삶에 있어 사람에게 보다 중요한 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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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려주어선 안 된다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8. 3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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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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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려주어선 안 된다




여기 흔하디흔한 관용어구가 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 이 관용어구가 흔하디흔한 이유는 실로 간단하다. 누구나 저마다 한 번씩은 경험한 거니까. 그리고 내게 있어 '1981년 2월'은 그러한 관용어구에 가장 부합하는 기억이다.



"이봐요, 애리조나 총각. 폼 나는데?"







어색한 새 슈트 차림(맙소사, 졸업 무도회에 나가는 꼴이군)에다 팔에 롱코트를 얹은 채 현관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제니가 너스레를 떨었다.



"로라는?"



쑥스러움에 잠시 쓸데없이 안경을 고쳐 쓰던 나는 막 걸음마를 뗀 딸아이의 방문 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아직 자. 어젯밤에 미리 키스 받았으니까 하루만 참아. 빠뜨린 거 없지? 컨퍼런스 끝나면 전화하고."


"당신도 같이 가면 좋은데."


"그러게 말이야, 워싱턴 D.C.라니! 노인네(편모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기분이 좋을 때면 자기 엄마를 노인네라고 불렀다) 생일 따윈 내팽개치고 가버릴까?"



제니, 내 아내 제니. 내 입으로 당당하게 올릴만한 얘기는 아니다만 그간 우리의 결혼생활은 결코 물질적으로 풍족했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주된 이유는 단연코 남편인 나였다. (젠장, 어느 집안이나 그렇지) 내가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일마다 고등학교에서 언어학 시간강사 일을, 평일 밤과 주말에는 원고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러한 원고는 금발 여인네들이 유방을 드러내놓은 사진들 뒷부분에 이른바 구색 맞추기 식으로 실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내게 원고료를 지불해주는 곳은 성인을 대상으로(보다 정확히는, 끝도 없이 차도를 타다 나타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읽을거리'를 갈망하는 트럭 운전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사들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이래 나를 친아들처럼 돌봐주었던 마샤 고모는 그런 잡지들을 볼 때마다 '찌찌 사진책'이라며 금방이라도 침을 뱉을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내가 쓰는 글들까지도 그렇고 그런 내용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늘상 미스터리 내지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한 글을 썼고(그게 내가 제일 잘 하는 거였으니까), 그러한 내용의 원고를 기꺼이 실어주는 곳은 찌찌 사진책을 내는 잡지사들뿐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결혼생활은 내내 풍족할 기회가 없었다. 처음 아내가 중고차 판매장(근방에서 가장 큰 곳이었다)에서 회계업무를 보았을 때만 해도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깨끗한 곳에서 외식도 하며 나름 호사를 누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로라가 생긴 이래 아내는 더 가까운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야 했고 꿈을 버리지 못한 나는 여전히 시간강사를 전전하면서 우리는 비버리 힐빌리즈 속 크램펫 부부 꼴이 되어버렸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정말 상황이 좋지 않을 때에는(안 좋은 상황 중에서도 더 안 좋은 상황은 늘 있는 법이다) 밤마다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숨이 턱 끝을 밀어내느라 밤잠을 못 이루는 그 기분을 몇이나 알려는가? (아니, 의외로 많을지도 모르겠군) 당시 나는 생각했다. 뉘른베르크 놈들도 결국엔 주택담보대출금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아니, 이건 진짜다. '그깟 유대인들!' 라고 옹호한 적도 있다. 불안감이 사람의 신념을 움직이는 것이다.


차라리 매일이 최악이었으면 진즉에 꿈을 버리고서 좀 더 나은 생활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이 문제였다. 이 '가끔씩'이라는 게 바로 우리 인생을 좀 먹는 거다. 가끔씩 내셔널 인콰이어러 같은 곳에서 원고료로 수백 달러짜리 수표를 보내오면 옆집에 로라를 맡기고선 아내와 함께 제법 낭만적인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그럴 때면 두툼하게 남은 현금을 몇 번씩이나 흘끗거리며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세상 사람의 반 이상이 나보다도 어렵게 사는데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 나를 구한 건 마샤 고모였다. 아니, 정확히는 마샤 고모가 우리 가족을 구했다.





재작년 이맘때쯤, 결국 고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쩔 수 없었다. 뭐든 지나친 건 안 좋은 것이고 고모는 지나치게 지나쳤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기 나이보다도 많은 금연 약속에 또다시 실패했던 날, 부끄러움 바깥으로 뻔뻔한 표정을 무장한 고모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던 게.



"그래, 이번에도야. 미안하구나. 하지만 얘야, 인생이란 즐겁진 못하더라도 괴로워서는 안 되는 거란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더 있겠니? 그저 죽을 때까지 괴롭지는 않았으면 할 뿐이란다."



고모의 유품을 정리하러 뉴멕시코주 코로나의 저택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사용 안 한 지 족히 2-30년은 될 별채 창고에서였다. 창고에는 내가 어릴 때 처음으로 탔던 자전거서부터 시작해 말 그대로 내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었다. 딱히 고모가 감상적인 연유로 그러한 게 아니라서 물건들은 방치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꼴들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두 번째 세계 대전에게 남편을 잃고선 평생 억척같이 살아왔던 우리 마샤 여사는 사소한 부분에서 게을렀다)


한참을 별 의미 없이 창고 이곳저곳을 들춰보던 때였다. 오래되어 색까지 변조된 코로나 지역신문 더미들 사이로 인접 지역인 로스웰에서 발간된 지역신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1947년 7월 8일 자 로스웰 데일리 레코드 신문이었다. 해당 신문 1면으론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로스웰 육군비행장이 로스웰 지역 목장에서 비행접시를 포획



신문의 내용은 고모가 평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빌려 놀랄 노자였다. 정리하자면, 로스웰 지역에서 목장 관리를 해오던 농부가 비행접시 잔해를 발견해 보안관에게 신고했고 곧 근처 폭격부대 정보과에서 잔해를 회수해 상급사령부로 이관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내 깊은 곳 어딘가에는 존재하리라 믿었던 작가본능이 발작적으로 꿈틀거림을 느꼈다. 그렇게 이 오래된 사건을 몇 개월에 걸쳐 발로 뛰며 조사한 끝에 당시 현장에서 비행접시 회수를 담당했던 정보장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정보장교가 해준 이야기는 내가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날 그는 장교회관에서 점심을 먹던 중 정보과 책임자를 찾는 지역보안관의 전화를 받는다. 보안관은 지역주민이 비행접시 잔해를 발견했노라고 신고해왔다며 정보장교인 그에게 신고자를 만나볼 것을 요청했다. 신고자와 면담을 가진 그는 흥미가 동한 동시에 이게 그저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라고 여겨 부대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부대장 또한 이를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CIC 요원을 붙여주고는 현장방문을 지시했다. 당시는 한창 냉전 중이었으므로 혹시 소련의 정찰기가 불시착한 걸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현장에는 300야드에 걸쳐 손바닥만 한 잔해 수백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잔해들은 모두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것들이었으며 대부분 금속으로 보이는 파편이었다. 이러한 잔해들은 신기하게도 불로 태우거나 해머로 내리쳐도 물리적 손상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또, 직사각형 기둥 모양을 한 잔해에는 마치 중국어처럼 보이는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한편 회수작업을 마친 그가 지시에 따라 잔해들을 상급사령부로 이관하는 자리에서, 사령부 공군 지휘관이 자신에게 입단속을 시키고는 모여있던 기자들에게 엉뚱한 기상 관측 기구의 잔해를 보여주며 비행접시가 아니었다는 회견을 열었다.





이 정보장교의 증언에 이어 나는 사건 당시 로스웰 주변 막달레나 마을에서 잠시 돌았던 소문도 캐치할 수 있었다. 마을의 한 토목기사(그는 정부의 토양 보존 사업 토목기사였다)가 생전 자신의 아내에게 귀띔해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정보장교가 비행접시 잔해를 회수하기 며칠 전, 그 토목기사는 업무차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가 멀리서 대형 금속 물체에 반사되는 빛을 목격한다. 이에 그는 밤사이 비행기가 추락했다고 여겨 빛의 발원지인 사막지대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한 곳에서 그가 본 것은 날개 달린 비행기가 아니었다. 추락해있던 물체는 30피트가량의 금속성 원반이었다. 이 금속성 원반은 무언가 폭발이 있었는지 마치 더러운 스테인리스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원반 가까이로 다가가자 그 주변으로 시체 몇 구가 눈에 들어왔다. 시체들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민머리에다 작은 두 눈은 기묘하리만큼 서로 떨어져 있었다. 또, 시신들은 모두 그 신체에 비해 다소 큰 머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흰색 계열의 일체형 의복을 착용 중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구경하던 중 멀리서 한 군 장교가 운전병 딸린 군용트럭을 타고 왔으며 트럭에서 내린 군인들이 곧 현장을 접수했다. 이어 그 군 장교가 다가와 자신의 신상을 상세히 파악한 뒤 현장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는.



"선생, 이 경우 애국자의 의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애국자의 의무는 필요할 경우 나라를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오. 오늘 선생이 본 것을 누구에게도,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지켜보겠소."



다음 해, 나는 내가 얻은 취재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논픽션물을 출간했다. 처음에 반응은 반반이었다. 그때껏 없었던 'UFO 대한 정부의 은폐'라는 주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유치하고 질 낮은 농담일 뿐이라며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응들은 내가 취재했던 정보장교가 실제로 사건 당시 현장 책임자였다는 게 확인되면서 곧 열광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작년 한 해에만 내 책이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고 온갖 라디오쇼에 초청되었다. 또, 내 아내 제니는 이제 맘 편히 종일 로라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주말에는 나와 외출하면서 로라를 옆집이 아니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워싱턴 D. C. 스미스소니언 협회로 향한다. UFO 연구단체들(각각 회원 만 명 이상을 보유한)이 주최하는 UFO 컨퍼런스에 특별 내빈으로 초청받아서 말이다. 커피 얼룩 묻은 테이블보가 덮인 나무탁자(이런 탁자들은 꼭 한쪽이 삐걱거리지)가 즐비한 마을 회관에서가 아니라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협회에서 열리는 정식 컨퍼런스에 초청받은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 표랑 숙박비도 모두 그들이 계산해주고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라디오쇼 출연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에서 워싱턴 D. C.까지는 3,000km나 떨어져 있으니 나는 거의 지구를 80바퀴는 도는 셈이다. 바로 이 모든 게 고모네 별채에 방치되어 있던 신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크램펫 부부에게 유전을!



"자기, 비행기 시간 늦겠다. 빠뜨린 거 없지?"


"어? ..응, 다 확인했어."


"컨퍼런스 끝나고서 우리 엄마 집으로 전화해. 그때쯤이면 도착했을 테니까. 그리고, 내일 저녁 식사모임에 절대 늦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이지."



워싱턴 D. C.에서의 일은 대만족이었다. 컨퍼런스에 모인 이들 모두 이 애리조나 촌놈에게 마음을 빼앗겨선 '선생, 선생' 거리며 어미 새 쫓듯 했으니까. 저녁 만찬도 훌륭했다. 엿 같은 추위만 빼면 그야말로 모든 게 완벽했다.


다음날 점심 무렵 오마하에서의 라디오쇼도 무난하게 마무리 지어졌다. 문제는 쇼가 끝나고 로비에서 짐을 챙기던 때 발생했다. 라디오 방송국 직원이 어떤 남자가 찾는다며 전화기를 건넸다. 의아해하며 전화를 건네받자 처음 듣는 목소리의 남자가 말했다.



"빌 프리드먼 씨, 맞죠?"


"네, 누구시죠?"


"프리드먼 씨, 우리는 당신이 이 주제에 대해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아들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뭐라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는 정부가 UFO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은폐하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는 사람이오.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그룹이며 대중에게 UFO에 대한 정보를 유포하길 원한다오."


"이봐요, 올해 내가 들어본 농담 중에 두 번째로 웃기는 거군요. 첫 번째는 뭔지 아시오? 옆 마을에서 애들한테 떨을 팔아제끼는 인디언 하나가 대통령이 곧 죽을 거라고 나불거린 거요! 무슨 저주가 어쩌구.. 당신, 누구 재밌자고 이런 장난을 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이 폭격부대 정보장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처음엔 사람들이 그랬었소. 하지만 말이오, 때론 진실이란 우스꽝스러운 법 아니겠소? 가끔은 애들 모래 장난 같기도 하고. 당신도 이번에 배웠을 것 아니오."


"뭐요?"


"프리드먼 씨, 당신이 믿든 말든 그건 당신의 선택에 달린 거요. 허나 우리가 선택한 사람은 선생뿐이오. 나머지 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러니 당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 진실이 묻힐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두시오."


"그게 무슨.. 이봐요, 나를 선택했다니? 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은, 우리가 보유한 정보가 반드시 선생에 의해 유포되어야 한다는 말이오."


"도통 무슨 말인지.."


"그건 당신이 작가이기 때문이요. 대중은 누구보다 작가의 말에 귀 기울이지. 그리고 당신은 이미 한 차례 진실을 유포시킨 전적이 있소. 정보장교의 증언 말이오. 그러니 사람들은 당신이 하는 말에 장차 의구심을 품지 않을 것 아니겠소?"


"..좋아요, 이야기를 들어보죠. 당신 누굽니까? 무슨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좋소, 당신을 믿고 말하리다. 우리는 커트랜드 공군기지 사람이오. 정부산하 극비 정보기관 소속이지. 우리는 정부가 취급하는 높은 수준의 UFO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소. 그리고 내가 속한 정보기관 내에는 나처럼 진실을 유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소."


"..알겠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중요한 정보가 있으니 만나서 직접 확인하시오."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날까요?"


"금일 오후 4시 정각, JFK공항 3번 터미널 공중전화 부스 가운데 칸에서 전화가 울릴 거요. 그때 더 자세히 말해주겠소."


"뭐요? 이봐요, 공중전화가 뭐? 아니, 오늘 뉴욕에서 보자고? 커트랜드 공군기지 사람이라면서요? 그거 뉴멕시코 앨버커키에 있는 거잖습니까. 나도 저녁때 그 근방에 일이 있으니 그곳에서 봅시다."


"오후 4시 정각에 울릴 테니 준비하시오."


"뭐? 이봐요! 약속이 있다니까!"


"당신이 받게 될 정보보다 중요한 약속이오?"


"뭐?"


"오후 4시 정각, 3번 터미널 가운데 부스. 잊지 마시오."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는 흥분해선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외쳤다.



"젠장! 장모 생일이란 말이야!"



아내에게 비보를 전해야 하는 남편의 임무만큼 남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아직까지 그것보다 더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여보세요?"


"처제, 나야."


"빌! 어디에요 지금? 연락도 없어서 언니랑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뉴욕이야 지금.."


"뉴욕? 거긴 왜요?"


"처제, 제니 좀 바꿔.."


"빌, 나야. 당신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제니.. 일이 생겼어."


"무슨 일?"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그 남잔 군 관련자인데 나한테 줄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래서 지금 뉴욕 북부에 있는 모텔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미안해, 여보."


"..당신, 괜찮은 거지?"


"그럼,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근데 정말 중요한 거라서.. 정말 미안해.. 장모님한테도 잘 좀 말해줘."


"..언제 오는 거야?"


"오늘 밤 비행기로 최대한 빨리 갈게. 그러니 장모님 집에 있어. 아마 너무 늦지는 않을 거야, 로라는?"


"당신 장모님이랑 잘 놀고 있지."


"미안해. 가서 자세히 얘기해줄게, 알았지? 미안해, 제니."



약속한 시각이 되자 모텔방 문 너머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정직한 걸음걸이, 보폭이 일정한. 빠르고 조용하게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걸쇠 걸린 문을 반쯤 열었더니 그곳엔 야구모자를 눌러 쓴 털 달린 코듀로이 재킷 차림새의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복장도 그렇고 생각보다 젊은 얼굴이었기에 여러모로 내 상상과 다른 모습이었다.



"프리드먼 씨?"


"맞아요.. 들어오세요."



목소리로 보아 내게 전화를 걸었던 남자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품에서 꺼낸 갈색 봉투를 내밀며 초조하게 말했다. 마치, 준비한 대사를 서둘러 읊듯이.



"프리드먼 씨, 당신과 제겐 정확히 29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동안은 이걸 가지고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세요. 하지만 시간이 다 되면 저는 이걸 챙겨서 돌아가야 합니다. 어쨌든 이후에 당신이 이걸로 무얼 하든 당신 자유입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내밀고 있는 사내를 한 번 쳐다보고는 봉투를 받아 안의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입에선 '세상에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정부의 일급 기밀문서였다. 예전에 원고작업을 위해 몇 차례 기밀 해제된 정부 문서를 조사했던 적이 있는데 사내가 건넨 문서는 그 양식으로 보아 위조가 아닌 진짜 정부 문서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내에게 물었다.



"이봐요.. 이 문서들.. 사진 촬영해도 됩니까?"



사내는 가늘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컨퍼런스에서 사용했던 사진기를 꺼내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 안이 너무 어두운 데다 비치되어있던 램프 역시 플래시로는 적합하지 않은 듯해 사내에게 재차 다급히 물었다.






"녹음기 사용해도 됩니까? 그러니까.. 이 문서 내용을 읽는 걸 녹음해도 됩니까?"



사내가 다소 침착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허용됩니다. 그리고 프리드먼 씨, 27분 남았어요."



나는 혹시 컨퍼런스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챙겨왔던 녹음기를 부리나케 꺼내 들었다. 그리곤 구두점 하나하나까지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일급기밀. 분류 및 배포 명령. TS/ORCON. 본 문서에 포함된 정보는 일급기밀과 함께 ORCON으로 분류한다. 본 문서는 브리핑 이후 파기될 것이다. 브리핑 간에는 메모, 촬영, 녹음이 허용되지 않는다.


본 문서에는 미합중국이 조사한 이래 수집된 UFO 및 IAC 정보 16가지가 포함되어.. 오, 맙소사! 본 프로젝트는 본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로 1953년에 설립되었으며 NSC와...


1966년 프로젝트의 명칭이 프로젝트 Gleem에서 프로젝트 Aquarius로 변경되었다. 본 프로젝트는 CIA의 기밀자금으로부터 비세출의 지원을 받는다. 프로젝트 Aquarius의 목적은 UFO/IAC 목격 및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으로부터 과학, 기술, 의학, 그리고 군사정보를 모두 수집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들은 정리되어 미합중국의 우주 프로그램 발전에 사용되어왔다. 세상에!


1947년에 외계에 기원을 둔 우주선이 뉴멕시코 사막에 추락했다. 우주선은 군에 의해 회수되었다. 네 구의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시신은 우주선 잔해 속에서 회수되었다. 이 시신은 인간과 연관성이 없는 생명체로 판명되었다.{첨부 1}. 맙소사.. 외계 우주선이 미합중국에 추락했고 군은 일부가 온전한 상태의 우주선을 회수했다. 이 추락에서 외계에 기원을 둔 외계인 하나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외계인은 남성이었으며 스스로를 EBE라고 칭했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고개를 들곤 사내를 쳐다보았다. 구석에서 초조히 시계를 들여다보던 사내 역시 방 안에 침묵이 돌자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BE는 알 수 없는 질병으로 1952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EBE는 생존해있는 동안 우주 공학, 우주의 기원, 그리고 우주 생물학상의 문제와 관련한 귀중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더 많은 자료는 첨부 2에 기재.


외계인 우주선 회수는 외계인이 우리의 국가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미합중국의 광범위한 조사 프로그램으로 이끌었다. 1947년에 공군은 UFOs와 관련된 사건들을 조사하는 프로그램 신설에 착수했다. 이 프로그램은 각기 다른 세 가지 코드 네임 하에 운영되었다: Grudge, Sign, 그리고 마지막으로 Blue Book. 


공군 프로그램의 본래 미션은 UFOs와 관련된 모든 목격 내지 사건 보고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미합중국의 안보와 관련 있는 어떠한 사항에라도 지장이 있을지 여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몇몇 정보는 우리의 독자적인 우주 공학 및 미래의 우주 프로그램 발전에 이득이 되는 데이터로 평가되었다. 


1953년에 UFOs가 미합중국의 국가안보에 위협을 준다는 믿음을 가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프로젝트 Gleem이 착수되었다. 프로젝트 Gleem은 1966년에 프로젝트 Aquarius로 바뀌었고, UFO 목격 및 사건들에 대한 유사한 보고가 이루어졌다.


우주선은 미합중국 과학자들에 의해 경이적인 기술로 이루어졌다고 고찰되었다. 그러나 우주선의 기기 운용은 우리의 과학자들이 건드리기에는 너무도 복잡했다. 우주선은 일급기밀 지역에 보관되어 여러 해에 걸쳐 우리의 최고 항공우주 과학자들에 의해 분석되었다. 미합중국은 외계인 우주선 회수로부터 다량의 기술상 데이터를 얻었다. 우주선에 대한 상세한 묘사 및 더 많은 정보는 첨부 3에 설명.


공군은 그들의 UFOs 조사를 공식적으로 끝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1966년 NPNN 미팅{첨부 4} 동안에 도출된 것이다. 이는 이중적인 이유에서였다. 먼저 미합중국이 외계인과 교신을 했기 때문이다. 미합중국은 외계인의 지구탐사가 비교적 비공격적이며 비적대적이란 것을 느꼈다. 또한 외계인의 존재가 미합중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음이 확고했다.


NSC는 UFO 목격 및 사건의 조사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채 비밀 유지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 결정 이면의 추론 과정에는 이러한 것이 있었다: 만약 공군이 UFOs 조사를 지속할 경우 결국에는 어떤 불분명하고 보고되지 않은 공군 내지 국방부 내 민간 공무원이 프로젝트 Aquarius 이면의 진실을 입수할 수 있다. 분명히 {운영상의 보안을 이유로} 이것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주목: 외계인은 우리의 핵무기 및 핵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군에서 보고된 많은 목격 및 사건들이 핵무기 기지에 걸쳐 발생했다. 외계인의 관심사는 우리의 핵무기가 미래 지구에 핵전쟁의 위협이 될 수 있는지에만 기인한다. 공군은 외계인의 절도와 파괴로부터 핵무기 보안을 보증할 조치에 착수했다}.


외계인의 우리 태양계 탐사가 평화적 목적에서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외계인의 향후 계획에 우리의 국가 안보 또는 지구의 문명에 위협이 되는 것이 포함되어있지 않다고 확정 날 때까지 우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추적하는 것을 반드시 지속해야 한다. 


외계인의 기술이 미합중국의 기술보다 수 천 년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첨부 6}. 우리 과학자들은 우리의 기술이 외계인과 동등한 레벨로 발전할 때까지는 미합중국이 외계인으로부터 이미 얻었던 다량의 과학정보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추측했다.


프로젝트 BANDO: {PROWORD: RISK} 본래 1949년에 설립되었다. 미션은 살아남은 외계인 생명체 및 회수한 외계인 시신으로부터 의학 정보를 수집하고 감정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는 EBE를 의학적으로 조사하고 미합중국 의학 연구자들에게 진화론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제공했다.


프로젝트 SIGMA: {PROWORD: MIDNIGHT}. 본래 1954년에 프로젝트 Gleem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가 1976년 분리되었다. 미션은 외계인과 교신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는 1959년에 미합중국이 외계인과 원시적인 교신을 이룩하며 긍정적인 성과를 얻었다. 1964년 4월 25일 USAF 정보장교가 사전협의에 따라 뉴멕시코 사막에서 두 명의 외계인을 만났다. 접촉은 3시간가량 지속되었다. 외계인의 언어 기반이 EBE에 의해 주어졌으며 공군 장교가 두 명의 외계인과 간신히 기본적인 정보를 교환했다{첨부 7}. 


프로젝트 SNOWBIRD: {PROWORD: CETUS}. 본래 1972년에 설립되었다. 미션은 회수한 외계 우주선의 시험비행이었다. 프로젝트는 네바다에서 지속되고 있다.


프로젝트 POUNCE: {PROWORD: DIXIE}. 본래 1968년에 설립되었다. 미션은 UFO/IAC의 우주 공학과 관련 있는 모든 정보를 감정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POUNCE는 지속되고 있다.


EBE로부터 입수한 또 다른 정보 역시 민감하고 대중에 공개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특히 약 5,000년 전 외계인의 첫 지구 방문을 추적하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 실린 프로젝트 물병자리 볼륨 9가 그러했다.


EBE는 2,000년 전 지구 거주민의 문명 발전을 돕고자 그들의 선조가 인간 생명체 중에 심어졌었노라고 전했다. 뭣!


이 정보는 모호할 뿐이며 해당 호모사피엔의 정확한 정체 내지 배경정보는 얻지 못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만약 이 정보가 대중에 공개된다면 전 세계에 종교적 패닉을 일으킬 것이다. 하느님 맙소사.."



표지까지 합쳐 총 11장의 문서를 읽어내린 나는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전방에다 시선을 둘 뿐이었다. 주로 뽕 판매로 삶을 연명하는 홈리스들이나 아지트로 사용할법한 싸구려 모텔방 안은 때때로 내리치는 성난 바람을 막아줄 뿐 실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서 빨리 애리조나의 겨울 날씨를 누리고 싶으면서도 나는 등 뒤로 송글하게 맺힌 땀방울들의 간지럽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현관문 오른편 지저분한 벽지 사이로 더 지저분한 얼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문대져 생긴듯한 얼룩은 아마 이 모텔이 들어서고서부터 그 역사를 같이한 듯해 보였다. 아마 몇 년 뒤에도 얼룩은 저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남아있으리라.



"이봐요, 그러니까.. 이런, 내가 그쪽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내는 예상 못 한 질문이라는 듯 몇 초간 눈알을 굴려대고는 말했다.



"..디키."


"디키?"


"네, 돌아가신 할머니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불렀거든요. 내 친구들은 전부 그렇게 불러요."


"그렇군요. 디키, 지금 몇 분이나 남았죠?"


"프리드먼 씨, 이제 10분 조금 넘게 남았어요."


"좋아요. 문서는 이제 됐어요. 녹음도 다 끝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키는 침대 위의 문서들을 반복해서 세어보고는 다시금 갈색 봉투 안으로 추려 넣기 시작했다. 나는 디키가 티셔츠를 걷어 올리곤 그 봉투를 벨트 안쪽 배 부분에다 고정하는 것을 기다린 뒤 말했다.



"디키."


"예? ..네, 프리드먼 씨."


"물어볼 게 있어요."


"젠장, 프리드먼 씨. 나는 아무것도 말해줄 게 없어요. 문서를 보여주고, 다시 가져가고, 그게 끝입니다."


"압니다. 나는 그게 아니라.. 디키, 신을 믿나요?"


"뭐요? ..그래요, 믿어요. 어릴 때 세례도 받은 적 있어요."


"그럼 이 문서를 납득할 수가 있던가요? 이건.. 이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성서에 위배된다?"


"..말하자면요."


"글쎄요, 난 근본주의자가 아니니까. 게다가 특별히 신앙적인 삶을 살았다거나.. 그냥.. 프리드먼 씨, 이건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잖아요. 이건 죄악도 뭐도 아니고 금단의 사과도 아니에요. 그저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아주 오래도록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놀라는 거고. 그냥.. 그뿐인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더 있겠죠. 내 말은.. EBE들이 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그들은 십계명을 어긴 적도 없고 젖소 같은 것도 납치하거나 한 적도 없죠. 그들이 존재한다는 건 신이 그들을 만들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그들은 사탄 같은 존재가 아니고요. 한마디로 그들도 양 떼인 거죠. 같은 양 떼인 거예요, 프리드먼 씨. 우리가 주님께서 무언가 창조할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어요?"



말을 마친 디키는 옷매무시를 한 번 정돈하고는 한 손으로 배 위를 조심스레 감싸고서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디키."


"젠장. 왜요, 프리드먼 씨."


"아직 8분 남았습니다."



디키는 입을 헤 벌린 얼굴로 두 손을 과장스레 펼쳐 보이고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댔다.



"디키, 당신네들은 내가 작가라서 후보로 선택했다고 했죠. 하지만 나는 어쨌든 신입 작가에 불과해요. 이름보다 책 제목이 더 잘 알려진 작가죠. 나는.. 나는 지금까지 학생 애들을 가르치던 시간강사였어요. 그리고.. 제기랄, 나는 언어학과 인문학을 가르쳤다고요! 왜 내가 뽑힌 거죠? 그 정보장교의 증언을 알렸기 때문에? 이봐요, 고작 그 정도 이유로 내게 인류 최대의 비밀을 알려준 거라곤 하지 맙시다."



디키는 내 말이 다 끝난 것인지를 확인하는 양 잠시간 나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첫째는 프리드먼 씨가 작가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 정보장교의 증언을 알렸기 때문이죠."


"이봐요, 디키!"


"그 정보장교의 증언은! 그 증언은, 우리와 EBE 간의 비밀과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에요. 우리가 EBE의 존재를 알게 된 계기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요? 다른 작가들이 UFO이니, 외계인이니 장난질 치고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 당신은 그 정보장교의 증언을 알린 거예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


"프리드먼 씨, 우리가 은폐 중인 비밀들이 언제까지 보안유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상당히 오래? 어쩌면 영원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네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내가 이걸 폭로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얼마나 믿을지도 모르고. 아마 내가 돈맛을 봐서라고 여기겠죠. 그리고 내 폭로로 인해 정부에서는 더욱 단속을 심하게 할 테고 재수 없으면 당신네 소행이 들통나면서 처분이 내려질지도 모르죠. 그럼 이제 아무도 용감히 나서지 않을 거고요."



내 대답에 디키는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남자애들이 으레 터뜨리곤 하는 종류의 웃음소리였기에 나는 그의 연령대를 더욱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프리드먼 씨. 웃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프리드먼 씨, 프리드먼 씨는 우리가 기밀을 유출한 게 들통나면 아무도 모르게 총살당한 뒤 그 시체는 네바다 사막 어딘가에 파묻힐 거라 생각하나요?"


"..보통은 그런 식이겠죠."


"세상에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요. 우리가 무슨 30년대 시카고 마피아인 줄 아세요? 맙소사.. 프리드먼 씨, 마피아들이 왜 밀고자나 배신자들을 처형하는 줄 아세요?"


"그야.. 그들 입장에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거니까.."


"그래요, 가장 용납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처형하는 거죠. 본보기로 말이죠. 하지만 그게 포인트는 아니에요. '왜 처형을 시킬까?'가 포인트죠."


"..무슨 말이죠?"


"그들이 처형을 시키는 건, '생존권'을 박탈시키기 위해서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요? 명예니 체면이니 그런 건 부차적인 거라고요. 마피아들은 목숨을 잃지 않는 한 어디서든 살아갈 수가 있죠. 무슨 짓이든 해서라도. 범법자니까요. 바퀴벌레 같은 거죠. 그래서 살아갈 길을 끊어놓기 위해 처형을 시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그게 '벌'인 거죠. 그들에겐 서로 공생이란 게 없는 거니까요. 쫓아내도 언젠가 조직에 피해를 입힐 거라면 그런 식으로 추방하는 거죠."


"그럼, 당신네들은요?"


"우린 정부 요원들이잖아요."


"그게 무슨 차이가.."


"잠깐, 지금 품위나 교양, 상식 같은 걸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생각해봐요. 우리는 추방을 위해 번거롭게 사람을 죽이거나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쫓아내면 그만이죠. 파직시키면 되는 거예요. 이건 우리의 시스템 덕분이죠. 무슨 말인고 하면, EBE에 대한 접근 권한 시스템은 3단계로 나누어져 있어요. 대통령, 그 밑의 직속 관리원 몇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같이 각 정보기관 부처 내에 은밀하게 존재하는 비밀요원들. 이 EBE에 대한 완전한 접근 권한은 대통령과 직속 관리원들에게만 해당하죠. 우리는 기껏해야 지시에 따라 부분적인 퍼즐 조각들만을 손으로 더듬을 뿐이에요. 우리는 전체 그림을 파악조차 못 하고 있죠.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프리드먼 씨에게 보여준 이 문서들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증거물입니다. 고작 종이 쪼가리 몇 장, 그게 전부죠."



디키는 짧은 숨 고르기 후에 말을 이어갔다.



"자, 그럼 핵심으로 들어가 볼까요? 우리가 얻은 이 문서들을 우리 중 누군가가 나서서 직접 폭로했다고 칩시다. 그 누군가가 암만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며 주장해봤자 사람들은 믿지 않아요. 왜냐, 그 신분은 실제로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직책이니까요. 즉, 공식적으로 우리는 공군기지 소속 군인일 뿐이라는 거죠. 이런 군인이 출처도 불분명한 종이 쪼가리를 흔들어댄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쏟겠어요? 끽해야 라디오 전파 수신기로 가득한 집의 편집증 걸린 음모론자들이나 달려들겠죠. 운 좋아 봐야 시골 케이블 방송사 정도나 관심을 보일 거고요. 반면 폭로한 우리는요? 즉각 어떤 이유로든 불명예제대 처리되겠죠. 빈털터리로 영원히 쫓겨나는 겁니다. 입김이 닿는 모든 곳에서 추방당하는 거예요. 그럼 이제 그때부터는 동네 캐셔일이나 알아봐야겠죠. 프리드먼 씨, 바로 그러다가 집에서도 쫓겨나 트레일러를 전전하게 되는 겁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얻는 게 뭐죠? 진실을 어느 누가 알아준다고요?"



디키는 이번엔 내 얼굴을 잠시 훑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애석하게도 우리 중 처가가 부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모두 직업과 계급이라는 군인의 명예 부분에 있어 타인의 시선에 예민할 수밖에 없고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비록 나는 젋지만..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이제 곧 결혼할 여자도 있어요. 그리고 내 아이도 생기겠죠? 자, 프리드먼 씨. 이게 바로 마피아들의 시스템과 달리 우리 시스템이 갖는 추방이라는 겁니다. 내 삶과 진실 중 중요한 게 뭐라 생각하세요? ..바로 그런 거죠. 애초에 대통령과 그 직속 관리원들은 추방당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을 뽑는 거예요. 그럼 이제 그들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기다려야 할까요? 오, 하지만 그들은 괴물이에요. 애국 괴물들이죠. 그들은 미국, 그리고 더 나아가 지구를 위한 게 비밀을 은폐하는 것이라 믿어요. 사도가 예수를 따르는 것처럼 믿음이 충만하죠. 뭐, 그들의 믿음이 맞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모두가 진실을 알 권리는 있는 거예요. 이건 군 기밀이 아니니까요.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진실인 겁니다. 다만, 우리도 그 시기가 지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한 번에 모든 걸 알게 해선 안 되니까요. 어차피 그게 가능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그러면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게 돼요. 진실의 양이 너무 크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고. 그래서 프리드먼 씨가 선택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작가인 자기를 선택했느냐고 물었죠? 우리가 하려는 일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진실을 폭로하려는 게 아니에요. 뭣보다 우리가 아는 진실도 고작 전체 진실의 어느 정도나 될지도 모르고요. 우리의 목표는 이겁니다. '순차적으로 진실이 드러나면서 결국엔 정부가 모든 진실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프리드먼 씨가 어떤 방법으로 이 문서를 폭로하든 사람들은 믿지 않아요. 그저 '로스웰에서의 정보장교 증언을 폭로했던 작가가 또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에 그칠 뿐이죠.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거예요. 프리드먼 씨는 지금껏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정보장교의 증언은 EBE 비밀의 단초라 할 수 있죠. 그렇죠?"


"그런 셈이겠죠."


"프리드먼 씨, 언젠간 EBE에 대한 비밀도 새어나갈 겁니다. 또, 언젠가는 사람들이 믿어줄 만한 물적증거와 함께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건 시스템상 전체 진실의 아주 사소한 일부분이겠죠. 바로 그때 프리드먼 씨의 과거 폭로가 힘을 발휘하는 겁니다. 우리가 전달한 문서의 내용은 물적 증거는 없어도 상당한 양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어요. 아마 정보요원 중 이만큼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럼 이제 사람들이 EBE의 진실에 대해 진지해졌다고 가정해봅시다. K마트에서 외계인 인형을 사는 심정과는 다르게 말이죠. 모든 사람이 프리드먼 씨가 했었던 폭로에 귀 기울이게 될 거예요. 로스웰에 대해 폭로했던 작가, 그 작가가 이후 터뜨린 EBE의 존재. 그 모든 게 진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럼 이제 여론은 정부를 위협하게 됩니다. 정부가 모든 진실을 쏟아낼 때까지요. 그리고 이러한 여론이야말로 EBE의 완전한 그림을 들춰낼 유일한 수단입니다. 아시겠어요? 프리드먼 씨,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선 안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자 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죠."


"...."


"이제, 우리가 왜 프리드먼 씨를 선택했는지 알겠죠?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한 적 없는 진짜 폭로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디키."


"네."


"내가 만약 이대로 침묵을 지킨다면요? 그게 애국이라고 여긴다면요? EBE는 우리에게 적대적이지가 않다면서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요?"


"프리드먼 씨, 당신은 그러지 않아요."


"어떻게 확신.."


"당신은 작가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열광시켰었으니까. 그러니 당신은 분명 또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 거예요. 당신이 정말 이걸 품 안에 지니고만 있을 거라고요? 얼마나요? 일 년? 이 년? 아뇨, 당신은 그러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을 선택한 겁니다. 사실, 당신 외에는 후보가 될만한 사람도 없어요."


"...."


"하지만 프리드먼 씨, 지금 당신의 손에 들어간 것은 단순히 진실 하나가 아닙니다. 훗날 사람들에게 반드시 진실이 알려져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모르는 거죠. 그리고 그때는 무엇보다 지금 당신이 쥐게 된 진실이 필요하게 될 겁니다. '너희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 것이며 행하는 자가 되어라.'"



나는 멍하니 현관문 오른편 벽지의 얼룩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좀 전보다 얼룩이 진해진 듯했다.



"..이제 정말 가봐야 돼요, 프리드먼 씨."


"디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이 만약 나였다면.."



디키는 등을 돌려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것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췄다.



"자신한테 가장 소중한 것을 우선시하겠죠."



 



밖을 나오자 어느새 하늘은 어둠으로 두터웠고, 찬바람이 이는 '윙윙' 소리 가운데서 홀로 모텔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저, 이 엿 같은 추위만 피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을 뿐이었다.



"젠장, 제니가 단단히 골이 나 있겠군."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만약 당신이 나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 나는 일단 디키의 조언을 따랐다. 최대한 빠른 비행기 편을 잡아타선 장모님 집으로 가 제니와 로라를 힘껏 껴안았다.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서.





-fin-




















후기



이 이야기는 그 악명 높은 'MJ-12' 사건과 그 일련의 과정을 모델로 하고 있다. UFO 및 외계인 사건 역사에서 으뜸으로 꼽는 사건이라면 모두들 로스웰 UFO 사건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MJ-12 사건은 이 로스웰 UFO 사건을 처음으로 '재생산'한 빌 무어(UFO 연구가였던 그는 동료 연구가였던 스탠튼 프리드먼의 도움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서적을 출간했다, 여담으로 공동집필자는 미스터리 업계의 전설로 일컬어지는 찰스 벌리츠였다)가 공모했던 사기극이었다.


아, 물론 로스웰 UFO 사건 역시 각각의 사욕들이 얽히고 뒤엉킨 엉터리 사기극에 불과하시다. 하지만 이미 성전이 되어버린 로스웰 UFO 사건에 대해 이제는 그 진실을 말하기가 영 껄끄러운 상황까지 와버렸다. 그러나 믿음의 양이 곧 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로스웰 UFO 사건은 분명 역사상 가장 유명한 UFO 사건인 동시에 가장 질 나쁜 UFO 사기극이다. 이러한 신성모독에 화가 난다면, 그리고 호기심이 일었다면, 최근 내가 출간한 논픽션물 <세기의 음모론과 그 진실>을 정독하시길 바란다. 하하.


해당 이야기에서 나는 극의 진행을 상당 부분 대화문에 맡겼다. 이 방식을 고루하고 수준 낮은 형식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겠으나 SF&외계인 이야기에 아날로그 방식 말고 무엇이 또 어울리겠는가? 게다가 나는 읽는 이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고, 미약한 재주의 내게 있어 해당 방식이 최선이었다. 뭐, 논외로 대화문 진행 방식이 꼭 수준 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영화보다 더 살벌한 분위기를 체감하게 해주지 않는가.


어쨌건, 외계인 이야기에 환장하는 이라면 분명 이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감상했을 것이다. 나부터가 그러하니까. 그리고 그러한 괴짜들(아주 소수의)이 만족했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들을 위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므로 글의 형식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련다. 클린턴도 말했잖은가. "중요한 건 이야기야, 멍청아!"




http://blog.naver.com/medeiason/221085498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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