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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애나벨: 인형의 주인, 2017

호러 영화 짧평 2017. 8. 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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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개봉했던 영화 "애나벨" 은 제임스 완이 제작한 영화 중 가장 평이 저조한 작품에 속할 겁니다.


물론 재정적으로는 40배를 남겨먹는 희대의 대박이었지만요.


아무튼간에 컨저링 1, 2가 성공을 거두며 아예 컨저링 유니버스를 구축할 생각을 먹은 제임스 완 입장에서는, 애나벨의 실패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기왕 흥행도 대박을 쳤겠다, 프리퀄을 제대로 만들어서 시리즈의 유일한 오점을 덮어보고 싶었겠죠.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이번 영화, 애나벨: 인형의 주인입니다.


애나벨이 컨저링의 프리퀄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 영화는 프리퀄의 프리퀄이라는 독특한 작품인 셈이네요.




감독은 "라이트 아웃" 에서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 냈던 데이비드 샌드버그 감독이 내정되었습니다.


전작이 말아먹을만큼 말아먹어놨으니, 이제 리바운딩만 남은 셈이었죠!


여기저기서 호평이 들려와서 저도 참 기대가 컸는데... 컸는데...


그게, 전작보다는 낫긴한데 말입니다...





컨저링 시리즈의 핵심 요소를 꼽으라면 악마의 빙의와, 그걸 내쫓기 위한 엑소시즘일 것입니다.


본편 시리즈인 컨저링 1, 2에서는 각자 치열하게 악마와 대결하는 워렌 부부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애나벨: 인형의 주인에서는 정작 그 엑소시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수준입니다.


뭔가 흉내를 내긴 하는데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악마 스스로도 자기가 왜 퇴치된건지 잘 모를 겁니다.





일각에서는 이번에 등장하는 악마가 사탄 그 자체가 아니냐는 언급이 있는데...


만약 그렇다고 치면 사탄은 아주 안일하거나 아주 무능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더불어 애나벨이라는 영화 제목과는 달리, 애나벨이 딱히 큰 의미가 있었는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힘을 여기저기 나눠쓰지 말고 한 곳에 집중했더라면 악마가 더 강력해보이고 위압감이 느껴졌을 겁니다.


마치 계란을 두 바구니에 담아뒀는데, 양쪽 계란이 천천히 다 썩어가는 스타일의 분산 투자였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런 느낌입니다.


오히려 메인 악마보다는 다른 악마가 더 시선을 끌기도 하고요.


영화 전체적으로 밀어주는 걸 보면 혹시 이 영화는 내년에 개봉할 더 넌을 위한 기나긴 티저영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보는 내내 겹쳐보였던 영화가 있는데, 작년에 개봉했던 "위자 : 저주의 시작" 이었습니다.


두 영화 모두 빙의에 관해 다루고 있고, 빙의의 방식도 비슷할 뿐더러 프리퀄이라는 점도 동일하죠.


거기에 룰루 윌슨이라는 호러 전문 아역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같습니다.


두 영화 모두 합격점은 넘었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점도 똑같아서 너무 안타깝네요.





하지만 제가 느낀 것과는 달리, 아마 이번에도 제임스 완은 흥행에 성공할 겁니다.


하우스 호러의 창시자이자 마스터인 이 양반은, 결코 손해볼 장사는 벌이지를 않는 사람이니까요.


이미 또다른 스핀오프 더 넌이 내년 개봉을 앞두고 있고, 컨저링 3의 제작도 곧 시작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 시리즈는 한동안 승승장구 할 것 같습니다.


대중에게 소구하는 제임스 완만의 공포 스타일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저랑은 조금 안 맞는 거 같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라이트 아웃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었던 데이비드 샌드버그 감독의 감 자체는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컨저링 유니버스말고 라이트 아웃처럼 새 시나리오를 들고 감독했으면 좋겠네요.


애나벨은 프리퀄에 프리퀄까지 우려먹었으니 이제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워렌 부부의 창고에서 편히 쉬렴, 못생긴 인형아.




제 점수는 6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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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범, 2017

호러 영화 짧평 2017. 8. 1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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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괴담 전문 블로그 "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 에 실화괴담 한 편이 올라옵니다.


http://thering.co.kr/1887


부산 장산에 산다는 미확인 생물체에 관한 이야기였죠.


이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장산범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 생물체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웹툰에도 등장하고,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오기도 했죠.


그리고 올해, 그 장산범을 주제로 한 영화가 개봉합니다.





사실 장산범 이야기는 애시당초 별로 매력적인 공포 소재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제보된 목격담은 하얀 털옷을 입고 있는 사람 같았다는 정도 내용이 끝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의 입을 타면서, 이런저런 설정들이 달라붙기 시작한 거죠.


박지원의 "호질" 에 등장하는 창귀처럼 죽은 이의 목소리를 흉내낸다는 것도 그렇고, 이름도 없던 것이 장산범이라는 이름까지 붙었고요.


결국 이 문제는 영화화 되면서도 발목을 잡는 본질적 문제로 남았습니다.


얼핏 흥미로워보이지만, 제대로 된 기반이 없고 어디서 빌려온 설정들로 이야기를 꾸려가야 하니까요.





영화의 전개는 목소리를 흉내내며 사람들을 꾀어내려드는 알 수 없는 존재의 공포와, 도플갱어가 오리지널의 자리를 빼앗으려드는 체인질링 느낌의 투-트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두 이야기는 서로 전혀 연결되는 느낌이 나지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애시당초 궤가 다른 이야기를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후반부 들어 급격하게 설정이 붙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두 대상이 겹쳐보이지는 않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것 또한 장산범에 대한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다 끌어쓰다보니 고육지책으로 나온 것이었겠죠.





허정 감독은 전작 "숨바꼭질" 에서 흥미로운 설정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에서 다소 헐거운 모습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장산범은 어떻게 보면 "숨바꼭질" 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으로 느껴질만큼 그와 비슷한 단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두어번의 놀래키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지만, 극 전체로 봤을 때는 긴장감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력과 거울이라는 소재를 끌어온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보니 작위적으로 느끼게 되고요.





결국 이런 간극을 메우는 건 배우들의 열연 뿐입니다.


염정아씨는 "장화홍련" 에 이어 공포 영화에 어울리는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박혁권씨도 자기 역할은 충분히 잘해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준혁씨 연기에 무척 감탄했는데, 한국 공포 영화 역사에 이름을 올릴만한 남성 캐릭터가 나온 느낌입니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그저 그랬어도 이준혁씨한테는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네요.






21세기에 자생하는 도시전설이라는 점에서, 장산범 이야기는 많은 흥미와 주목을 끌어왔습니다.


하지만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데 그 위에 열심히 무언가를 쌓는다해도, 그 결과는 자가당착으로 이어질 뿐이겠죠.


그야말로 사상누각.


보는 내낸 서서히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이제는 장산범을 놓아줄 때가 온 것 같네요.




제 점수는 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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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유령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7. 8. 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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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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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유령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부자가 되니 나는 내 신세를 왕과도 바꾸지 않으리.

- 셰익스피어





나는 지금 4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노인네가 달리할 게 옛날이야기 말고 뭐가 있겠는가) 그건 내 이마 위 검버섯들이 있는 곳에 머리카락이라 불리우던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을 무렵의 이야기이다. 그때가 언제인고 허면.. 그래, 제퍼슨당의 먼로가 재선한 해였다. 우리 버지니아의 자랑스러운 아들 제퍼슨과 먼로에게 신의 가호를!


당시 나는 린치버그에서 워싱턴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여행자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은 제퍼슨이 말하곤 하던 곳이었다. '린치버그는 버지니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요, 린치버그 마을에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나니.' 그 무렵 린치버그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담배 교역으로 입방아에 오르던 상업지였다. 하여지건 미국에서 가장 발전 중인 곳이었으니까.


어쨌건, 나는 제퍼슨이 이따금 거닐던 포플러 숲의 근방에서 호텔을 운영하던 자였다. 그리고 실로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내 호텔을 지나쳐갔다.


그 남자가 처음으로 내 호텔에 들린 건 1820년이 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호텔에 머물던 대부분의 사람처럼 그 역시 선금을 내곤 장기투숙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아주 잘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또, 다부지고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있었는데 그럼에도 결코 오만함이 느껴지지 않던 사내였다. 나는 그를 처음 보고 아마 다른 많은 치들처럼 새로이 교역에 뛰어든 개척자이겠거니 생각했다. 그게 전부였다. 사실, 그는 그저 내 호텔을 지나쳐갈 숫자 중 하나에 불과했었으므로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가 명부에 이름을 'Thomas J. Beale'이라고 써넣는 게 아니겠나? 오, 젊은이들. 그땐 말이다, 미들네임을 쓰는 사람의 수가 연방당을 지지하는 놈들만큼도 안되었었다. 나는 대뜸 그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그 가운데 J는 대관절 뭐의 J요?"



그러자 그가 하얀 이들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미소 짓고는 대답했다.



"제퍼슨, 제퍼슨의 J입니다."


"뭐요? 그럼, 토머스 제퍼슨 빌이라는 게요?"



그는 재차 미소 지었고 나는 단박에 그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왜냐고? 이름이 토머스 제퍼슨 빌이라는데 내가 어찌 마음에 들지 않아 하겠는가? 그 역시 내가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우린 제법 잘 맞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는 곧 '모리스 씨, 제가 당신을 클린트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대답했다. '물론이네. 그럼 나는 자네를 토머스 제퍼슨이라고 불러도 될까?'


토머스는 한마디로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매력 있으면서도 결코 티 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호텔 내의 사람들 모두가 토머스를 좋아했다. 특히나, 여자들이.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여인네들이 사람을 더 깊게 들여다볼 줄 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네들은 우리와 달리 사랑엔 배신당해도 사람에게 배신당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토머스가 이따금 풍기는 무언의 눈빛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곤 했던 것 같다.


토머스가 언젠가는 로렌이라는 여성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영국에서 온 여류작가로, 다른 모든 작가가 그러하듯 그럴듯해 보이는 필명 하나를 내세워 자기 자신을 포장하던 치였다. 그래도 이건 인정해야겠다. 풍성하고 맵시 있는 적발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분명 우아하고 인텔리하면서도 자못 세속적이지 않은 여인이었음을. 물론 그녀 역시 여인네였기에 아름다운 것에 아이마냥 열광하곤 했지만, 사실 아름다운 걸 좇는 게 천박한 것만은 아니잖은가.


그녀는 매우 진취적인 여성으로, 미국의 여인네들이 기회를 박탈당한 채 재봉 따위나 배우며 자기 목소리를 피력할 수 없는 풍토를 개탄해 했다. 또, 그녀는 여인네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에게 의지하지 못해 조혼해야만 하는 관습에 분개하기도 했다. 그녀는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드물게 미혼이었는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그 연유를 묻는 남정네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환장하겠군! 잘 들어, 길가다 처음 눈에 보이는 사람과 결혼하는 수준의 무신경함이 내게는 없다고. 난 기꺼이 내 삶을 바치지 못할 치들과는 결코 평생을 함께하지 않을 거야."



그런 그녀가 토머스를 붙들고선 세상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던 때였다. 말미에 그녀는 영국 내 여류작가들이 책을 팔기 위해 여성향의 소설들에만 매진해야 하는 현실과 함께 자신 역시 도리가 없음을 토로했고(그녀는 극렬히 반대하는 출판사를 뒤로 한 채 개척자들에 대한 소설을 구상하고자 이곳을 찾았었다), 그때껏 턱을 괸 채 귀담아듣던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다독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로렌. 하나님은 본디 골치 아픈 일을 나중에 처리하거든요. 철은 뜨거울 때 쳐야 하는 법입니다."



동시에 천상의 미소를 한 토머스가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고, 그 행동이 너무도 천진했던지라 평소 까탈스러울 만큼 교양을 따져대던 그녀 역시 그저 너털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던지 그녀는 그날 군말 없이 토머스의 술값까지 지불했다.


토머스는 기꺼이 모두와 어울렸다. 하지만 실지론 누구와도 영혼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잘 웃어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던 게다. 토머스는, 마치 짙게 깔린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창백한 유령과도 같았다.


토머스가 정확히 무슨 일 때문에 호텔에 머무르는지 나는 몰랐다. 그저 호텔 주변을 거닐며 사람들과 인사하거나 나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고, 이따금 며칠씩 어딘가를 다녀오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러던 3월이었다. 3월 말,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토머스는 쪽지 하나만을 남기고선 홀연히 사라졌다.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쪽지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클린트, 예정보다 일찍 떠나게 됐네요. 서둘러 가야 했던 저를 이해해주시길. 잔금은 제가 당신께 사는 술이라고 생각해줘요. 클린트, 늙은 토머스 제퍼슨이 틀렸어요. 그는 버지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리치몬드이고 그다음이 린치버그라고 했죠.



남자에게 있어 말동무 하나가 사라지는 건 제법.. 유감스러운 일이다. 허나 별수 있겠는가?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내게 주어진 일은 해야하는 법이지. 바울도 그랬잖는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소. 사람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니.'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다시 또 한 해가 흘러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젊은 토머스 제퍼슨이 호텔에 나타났다. 예의 그 사람 홀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이다. 우리는 다시 둘도 없는 말동무가 되었다. 토머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때면 나는 어쩐지 소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나는 토머스에게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하진 않았다. 그건 토머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우리 사이의 그러한 암묵적인 룰이 서로의 관계를 지탱했던 것이다.


토머스는 처음 호텔에 왔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주로 호텔 주변을 거닐며 사람들과 인사하거나 나와 농치기를 하며 시간을 축냈고, 이따금 며칠씩 어딘가를 다녀오곤 할 뿐이었다.


겨울기 가고 봄이 올 무렵이었다. 어느 밤, 토머스가 나를 찾아왔다. 아마 그 전날까지 며칠 동안을 어딘갈 다녀온 뒤였던 거로 기억한다. 토머스는 무언가를 계속 주저하던 끝에 말했다.



"클린트, 저 지금 떠납니다."


"뭐? 이봐, 토머스.."


"클린트, 미안해요. 본래는 어제 호텔로 돌아오지 않고서 그대로 떠나려던 거였어요."


"토머스, 우린 서로 개인사에 대해선 함구했었지. 그렇지만 말이야, 정말 내게 말해줄 게 없나?"



토머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들여다봤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클린트, 내겐 친구가 없어요. 가족도요. 그저, 같이 일하는 동료가 전부죠. 검은 자두도 흰 자두만큼이나 달다지만.. 내가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걸까요?"


"이보게, 토머스. 하나님께서 창세 무렵에 말씀하셨잖은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 비록 그 말이 있고서 아담이 자기 갈비를 내줘야했지만 말일세."



토머스는 내가 과장되게 옆구리를 두드리며 말하자 크게 웃어젖히더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한참 후에야 짐을 챙겨 나왔다.



"클린트, 당신이라면 뱀의 속삭임에 넘어가거나 하지 않겠죠. 이 상자를.. 보관을 부탁할게요. 제게 아주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는 상자예요. 곧 다시 찾으러 올 테니 그때까지만 맡아주세요."







토머스가 내민 상자는 꽤나 전형적인 외형의 금속 상자였다. 가운데에 자물쇠가 달린. 토머스는 그대로 짐을 동여맨 채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곧 상자를 찾으러 온다던 토머스는 대신 그해 여름에 편지 하나를 보내왔다.



친애하는 클린트에게. 클린트, 제가 맡긴 상자에는 저와 동료들 모두의 재산과 관련한 아주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습니다. 만약 아무도 상자를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이 편지의 날짜로부터 10년간 상자를 보관해주세요. 그 10년 동안 저 또는 제게 위임된 자가 상자의 반환을 요구해오지 않을 경우에는 자물쇠를 파괴하고 상자를 열어주었으면 합니다.


내 친구 클린트, 당신에게 항상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나는 기꺼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금고 깊숙이 상자를 보관했다. 토머스의 말대로 그 혹은 그가 위임한 자가 찾아올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10년을 보관했건만, 상자를 찾으러 오는 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상자를 계속해서 보관했다. 글쎄다. 어쩌면 토머스를 기다렸던 건 상자만이 아니었던가 보다.


토마스가 내게 상자를 맡긴 뒤로 23년이 흘러, 나는 호텔을 넘기고서 은퇴를 준비하며 마침내 상자를 열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가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만사가 모두 그런 법이다. 결심하기까지가 어려운 거. 자물쇠를 깨부수고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문서 석 장과 쪽지 하나가 덩그러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쪽지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클린트, 저는 지금 당신에게 제 비밀을 말하고자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커다란 비밀을요.


1819년 3월, 저와 제 동료들은 뉴멕시코 산타페를 따라 버펄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희는 이름 모를 계곡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연찮게 발견한 겁니다. 황금을요.


우리는 준비를 마치고선 이내 채굴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이 지나고서 잠시 채굴을 중단해야 했죠. 그때껏 채굴한 황금들을 보다 안전하도록 비밀장소에 숨길 필요에서였습니다. 그래서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저는 린치버그까지 흘러들어왔던 겁니다. 최초로 클린트 당신과 알게 된 게 바로 이때입니다.


마침내 안전한 장소를 찾은 우리는 다시금 채굴을 재개했고 저는 주기적으로 황금을 비밀장소에다 은닉했습니다. 그렇게 2년 넘게 작업한 결과 우리는 대량의 금과 은들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들 모두 은닉장소에 보관 중이고요. 그리고 저는 지금 재차 동료들에게 합류해 채굴을 지속할 예정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이 상자를 맡긴 이유는 혹여 모를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입니다. 유다는 고작 은화 서른 개에 예수를 넘겼다죠.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것은 분명 그보다 많답니다. 하여 저는 신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 황금과 관련한 문서를 맡기고자 합니다. 그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 바로 클린트 당신이에요.


여기 이 석 장의 문서에는 각각 황금의 내역, 황금을 분배받을 사람, 은닉 장소가 적혀있답니다. 물론, 암호로 말이죠. 이 암호들은 암호 자체만으론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추가로 단서가 있어야만이 해독이 가능해요. 해독에 필요한 각각의 암호 단서는, 불행히도 일이 틀어질 경우에 제가 서신 또는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친구, 토머스가.



암호가 적혀있다던 문서들을 보니 웬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토머스의 말대로 단서가 없으면 애초에 암호를 풀 수가 없도록 만들어진 거였다. 그래서, 뭐? 난 은퇴한 뒷방 노인네였다고! 내게 주어진 건 시간뿐이었다. 곧 나는 그 단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볼 건 하나였다. 토머스는 어느 날 갑자기 감당 못 할 비밀을 얻게 된 젊은이였다. 과연, 그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밝혔을까? 그렇다면, 토머스가 '토머스 제퍼슨 빌'이라는 이름을 꾸며낸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 말은, 왜 하필 토머스 제퍼슨이었느냐는 게다. 혹시, 토머스에게 있어 생전 그 이름은 의미 있고 상징적인 존재였던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친 나는 집에 모셔두던 독립선언문을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그리곤 문서들 속 숫자들을 독립선언문에 이리저리 꿰맞추어 보았다. 유레카! 독립선언문은 나를 세 문서 중 첫 번째 문서의 일부 숫자들로부터 의미심장한 단어들로 인도했다. (언제나 독립선언문은 옳은 법이다) 그 단어는 '금', '은', '채굴장'이었다.


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오랜만의 흥분이었다. 헌데 몇 시간을 해독해도 단어들만 나올 뿐 제대로 된 문장은 나오지가 않았다. 왜일까, 한참을 생각하다 깨달았다. 암호문은 독립선언문 원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음을. 그 뒤로 며칠동안 온갖 독립선언문들을 모은 끝에야 비로소 첫 번째 문서의 암호문을 해독할 수 있었다.




 



동봉 문서 3에 적어놓은 채굴장에다 지면으로부터 6피트 깊이에 이하의 것들을 묻어놓았다.


금 2,921파운드, 은 5,100파운드, 수송상의 안전을 기하고자 은과 교환한 13,000달러 상당의 보석.


상기의 것들은 철 용기에 넣은 뒤 철제 뚜껑으로 봉했다. 채굴장은 비록 엉성한 돌담처럼 보일지라도 용기는 제대로 돌을 쌓아 은폐해 놓았다.



허나 이게 다였다. 첫 번째 문서의 단서가 독립선언문인 건 알아냈으나 두 번째, 세 번째 문서의 경우 감도 안 잡혔다. 게다가 독립선언문이야 성격상 각각의 것들마다 차이가 미미하다손 쳐도, 다른 문서에 단서로 사용되었을 서적들은 그 개체마다 차이가 어마무지할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나는 나머지 암호문을 끝내 포기해야 했다.


그 이후로 나는 20여 년간 이 문서들을 소중히 보관해왔다. 그리고 그간 문서들은 내게 좋은 꿈을 꾸게 해주었다. 이제는 가누기 힘든 몸뚱어릴 안마당 오크나무 의자에다 쑤셔놓고는 눈을 감고서 떠올리는 거다. 날마다 야생을 누비며 짐승과 대치하는 젊음, 어느 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찬란한 황금빛. 서로 노래를 주고받으며 황금을 채굴하는 젊은이들. 그렇게 상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무리로 나도 함께 노래하고 있게 된다. 젊은 시절의 클린트 모리스가 말이다.





-fin-




















후기



이 이야기는 내가 처음으로 쓴 본격적인 창작단편이기에 남다른 애정이 간다. 특히나, 제목인 '창백한 유령'이 나는 아주 마음에 든다. 배경 또한 적잖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사건이 일어나는 법이다.


등장인물 중 가장 신경을 쓴 건 로렌이다. 주인공들이 지나쳐가는 인물이 생기있을수록 언제나 이야기가 사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어쨌건 그렇게 생각한다.


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보물'은 현실에 모델을 두고 있다. 이야기 속 배경과 같은 때에 빌이라는 한 젊은이가 호텔 주인인 로버트 모리스에게 상자를 맡겼던 게 그것으로, 그 안에는 보물에 대한 정보가 담긴 암호문서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현실에서도 끝내 암호문은 일부만이 해독되었을 뿐이다.


빌의 암호문서를 둘러싸고서 치열한 진위공방이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무게추는 회의적인 시선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고. 하지만 여기선 그러한 것들을 소개하지 않겠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오늘 하루는 의자에 기대어 꿈을 꿀 수 있도록.




http://blog.naver.com/medeiason/22106754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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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카테고리에는 네이버 블로그와 피키캐스트에서 "이상한 옴니버스" 로 활동하고 계신 메데아님의 창작 단편 괴담이 게시됩니다.

저와는 미스테리 매거진을 함께 작업한 사이기도 하고, 미스테리에 관해서는 국내에서도 손꼽힐 전문가이십니다.

과연 메데아님이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내주실지, 저도 여러분과 함께 두근거리며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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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호라이즌, 1997

호러 영화 짧평 2017. 6. 13.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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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우주를 향해 항해를 떠났던 이벤트 호라이즌호.


실종되었던 그 우주선이, 홀연히 돌아옵니다.


이벤트 호라이즌의 진실을 찾기 위해 파견된 이들은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목격하게 될까요.



사실 이 영화는 호평과 혹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냉정하게 말했을 때 잘 만든 영화는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 팬들에게 소구할만한 요소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죠.


나온지 20년이 된 지금까지도 호러 팬들 사이에서는 자주 회자되는 작품입니다.


만약 호러 팬이라면, 스페이스 호러 장르의 터를 닦은 명작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설정도 허술한 면이 있을 뿐더러 사실 그렇게 심리적으로 공포가 강한 작품은 아닙니다.


더 잘 만들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군요.


이 작품의 공포 요소는 설정 그 자체에서 오는데, 그 설정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지루한 영화로 바로 바뀌어 버릴수도 있을 겁니다.







이전 세대의 수많은 호러, SF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느껴지는데, 샤이닝이나 에일리언, 더 나아가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까지 그 범주에 들어갈 겁니다.


헬레이저에서 이미지를 빌려온 느낌도 꽤 나는 편이고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PC용 게임 둠이 딱 생각나더라고요.


악마가 더 많이 나왔고 액션씬이 좀 있었으면 더 둠 같았겠죠.



더불어 이벤트 호라이즌이 아직도 기억되는 이유로는 그 독특한 설정에서 기인하는 공포와 더불어, 잔혹하기 짝이 없는 고어 묘사 때문일겁니다.


편집 과정에서 상당량이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밤에 잠 못 이룰만한 비주얼을 여러분에게 선사하거든요.


고어 요소에 약하신 분들은 피하는게 좋을 겁니다.







아마 이 영화는 B급 저예산 영화 출신이었다면 만장일치로 명작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이 영화가 큰 돈 들여 만들었고, 쫄딱 망했다는 점이죠.


하지만 독특한 설정과 우주에서의 고립, 강한 고어 요소로 인해 후대에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고, 직접적으로 이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도 나왔습니다.


PC용 게임으로 3편까지 나온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죠.



호러 팬이라면 한번쯤은 감상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보셔야 할 거 같고요.


제 점수는 7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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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소설, 2012

호러 영화 짧평 2017. 6. 6.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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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주인공은 범죄 관련 논픽션을 쓰기 위해 살인이 일어난 집으로 이사를 옵니다.

집 다락방에서는 살인현장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되고, 이상한 현상도 연이어 발생합니다.

과연 이 집, 그리고 살인사건에는 무슨 비밀이 담겨 있는걸까요?


제임스 완의 성공 이후 수많은 하우스 호러 작품이 나오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B급 장르인 호러에서 한정적 공간만 사용해도 된다는 건 꽤 큰 메리트죠.

이 작품 역시 3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7,700만 달러를 뽑아내며 엄청 남겨먹었습니다.


다만 이런 하우스 호러류의 단점으로는 역시 그 얄팍함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예산 제작을 통해 한탕 벌어먹자는 생각이 가득한 때문인지, 괜찮은 설정을 가져와 놓고도 정작 그걸 풀어내는데 명확한 한계가 보이곤 하거든요.

이 작품, 살인소설 역시 같은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풀어내는데는 무척 지루한 방식을 썼고, 엔딩은 실망스러웠죠.





다만 살인현장을 보여주는 영상은 확실히 오싹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기도 한데, 실제 살인현장을 촬영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합니다.

정작 모든 악의 근원 그 자체는 영 매력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는데 비해, 살인영상들은 진짜로 소름끼치게 잘 만들었어요.

이 작품은 설정과 그걸 뒷받침하는 도구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스토리 풀어나가는 게 그걸 못 따라가서 그렇지.


저예산 영화를 사랑하는 배우, 에단 호크는 주인공으로 출연해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영화 자체의 가치를 끌어올린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워낙에 크게 남겨 먹은 탓에 2편이 나왔습니다.

2편 리뷰도 나올 예정입니다.

제 점수는 6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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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영화 짧평 2017. 5. 3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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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떡먹기라고 생각하며 맹인 노인의 집에 침입한 세 강도.

하지만 그 노인은 예삿 노인이 아닌데...

예고편 처음 나왔을 때부터 기대하며 기다렸던 작품인데, 다행히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행되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 쪼여주는 좋은 영화입니다.

원래 이런 작품에서는 심리를 최대한 긴장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데, 그 중요한 과제를 아주 깔끔하게 잘 수행해 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안할 수가 없네요.


제가 이 호러 영화 짧평을 통해 누누히 말씀드려왔듯, 호러는 비주류 장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예산으로 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래 들어 하우스 호러가 득세하고 있는 것도, 집 하나만 무대로 삼으면 되기 때문에 세트 만드는 비용이 조금밖에 안 들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한정적인 공간에서 수십배에서 수백배의 효과를 뽑아내는, 가장 경제적인 장르라는 이야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맹인 노인의 집 하나에서, 최대한 뽕을 뽑아냈다고 평가하고 싶네요.

지상 2층과 지하층까지, 이 작품은 집 한채에서 빼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빼먹으면서 적재적소에서 환경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사실 재미있는 것은, 일반적인 구도였다면 이 영화는 그냥 액션 영화였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부터 감정이입의 대상이 어느 쪽으로 갈지 잘 유도했고, 그걸 굳혀주는 장면들을 추가하면서 꽤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줬죠.

그게 바로 액션과 스릴러를 구분짓는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더불어 맹인 노인 역을 맡은 스티븐 랭의 호연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과거 아바타에서 메인 악역으로 등장한 적이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맹인 연기를 멋지게 해내면서 극의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줬습니다.

진짜 맹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관객에게 심어주는, 멋진 연기였어요.





사실 이 영화는 예고편만 봐도 대략 어떤 이야기일지 예측이 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너무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행된다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잘 만든 영화고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고 평하고 싶네요.

명색이 호러 영화라면,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예측 가능한, 하지만 그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것을 보여주는 영화.

제 점수는 7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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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영화 짧평 2017. 5. 2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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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도시" 에서 펼쳐지는 쓸쓸한 러브 스토리.

사실 정통 호러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작품입니다.

호러라는 장르 자체는 시작부터 B급이었고, 극단적으로 상업적인 장르인데 반해 이 영화는 예술영화 쪽으로 분류하는게 더 옳을 작품이거든요.

어찌되었건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마음에 들어서 관람했습니다.


전술했다시피 이 영화는 예술영화입니다.

대놓고 사람을 겁주는 장면은 없다고 해도 될 것이고, 미묘한 감정선이 엉성한 줄거리 위에 펼쳐집니다.

그 위에 펼쳐지는 영상미야말로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자 정체성이겠죠.

사실 이런 예술로서의 영화는 제 전공이 아닙니다만, 흑백 스크린 특유의 아름다움만큼은 충분히 즐겼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고전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는 느낌도 받을 수 있었고요.





"악의 도시" 라는 실존하지 않는 곳을 무대로 삼고 있지만, 감독과 배우들의 국적으로 미루어보면 이란을 빗대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억압적인 이슬람 문화와 그 체제 아래 여성의 삶, 페미니즘까지 여러가지 스펙트럼에서 해석이 가능한 영화겠죠 아마.

다만 저는 호러 영화를 취미로 보는 사람이니 거기까지 파고들 생각은 딱히 없습니다.


흑백 영화인만큼 사운드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작품인데, 꽤 만족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호러 영화로서의 기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에는 아주 잘 어울렸죠.





이 영화를 호러 영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찌됐건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차도르를 입고 스케이드보드를 타는 뱀파이어는 이 영화에만 나온다는 거죠.

인간과 뱀파이어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한 소재를 다룬 렛 미 인도 함께 감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독특한 영화 수입에 앞장서는 소지섭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이 영화 국내 배급은 소지섭씨가 직접 나서서 진행했고, 그 덕에 저도 제값을 내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거든요.


제 점수는 6점입니다.

다만 이 점수는 오롯이 호러 영화로서의 점수입니다.

영화 자체를 놓고 논하자면 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고, 그래야 마땅한 작품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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