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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2ch괴담][566th]참수지장

괴담 번역 2015. 6. 4.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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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되어, 외갓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토호쿠 지방에 있는 마을로, 꽤 쇠락한 곳이었다.




집도 드문드문 있을 뿐이고, 마을에 가게라고는 작은 슈퍼 하나와 편의점 하나가 전부였다.


그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전교생을 합쳐도 스무명이 안 됐다.


나하고 동갑은 세명 뿐이었다.




전학을 오고 1년 반 정도 지난 어느날부터, 나는 한 학년 위의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차피 시시한 거였겠지.




나는 그 아이가 너무 싫어서,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문득 나는 참수지장을 떠올렸다.


참수지장이라는 건 막 이사왔을 무렵 외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작은 공원 안쪽 숲에 있는 목이 없는 지장보살 3개.


거기에 절대로 공양물을 바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으셨지만, 나는 학교에서 친구에게 듣고 말았던 것이다.




그 지장보살에게 공양을 하고, 누군가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그 상대를 죽여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참수지장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도시락을 먹는 날.




어머니가 싸주신 주먹밥 2개를 안 먹고 참은 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수지장에게 바치고 소원을 빌었다.


그날 밤, 자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하고 갑옷을 입고 걷는 듯한 소리였다.




[모자라.]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런가.




지장보살은 모두 셋이었지.


주먹밥이 하나 모자랐던건가.


이튿날 아침, 나는 주먹밥을 하나 가지고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도중에 참수지장 앞으로 가니, 어제 바쳤던 주먹밥 2개가 그대로 있었다.


가져온 주먹밥을 공양하려던 순간이었다.


[이 미친 자식이! 뭐하는 짓이냐!] 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눈에 익은 아저씨가 달려오더니, 생각할 틈도 없이 얻어맞았다.


곧이어 나는 아저씨한테 질질 끌려 집으로 왔다.


아저씨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고함을 치며 뭐라 말하고 돌아갔다.




저녁이 되자, 많은 어른들이 집으로 왔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그저 사과만 하고 있었다.


토호쿠 사투리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몰랐지만, 나도 같이 열심히 사과를 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큰일이 난 것 같았다.


그게 며칠이고 이어진 끝에, 우리 집은 마을 전체로부터 따돌림당하게 되었다.


참수지장에게 공양을 한 집은 따돌린다는 게 옛부터 내려오는 규칙이었다고 한다.




우리 집 사람들과는 아무도 대화하려 하지 않았고, 슈퍼든 편의점이든 우리한테는 물건도 팔지 않았다.


어머니는 마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바로 해고당했고 나는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동사무소에 항의하러 갔지만, 거기서도 무시할 뿐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이 마을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도쿄로 이사하자고 했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기에, 이 마을에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괜찮으니 둘이서 도쿄로 가려무나.]


어머니는 남겨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걱정했지만, 여기에서는 어머니도 일할 수 없고, 나도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생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도쿄로 다시 이사했다.


외갓집에는 매일 같이 전화를 하고, 먹을 것이나 옷도 택배로 자주 부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선이 끊긴 것인지 전화가 먹통이 되었다.


마을에 쇼핑하러 나왔을 때 공중전화로 외할머니가 전화를 걸 때를 빼면, 편지만이 유일한 연락수단이 되었다.


시골에 내려갔을 때 전화를 고치자고 제안했지만, 두 분은 이대로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하셨다.




아마 그 외에도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걸 포기했달까,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내 머릿 속에는 언제나 그 마을 일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때 저지른 일을 후회한다던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 발소리와 [모자라.]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기 때문이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저 소리가 들릴 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어느날 택배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외갓집에 보낸 택배 때문이었다.


몇번을 찾아가도 집에 아무도 없어 배달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분 나쁜 예감이 엄습했다.




아니, 반 정도는 아마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다면 전화가 왔을터인데, 그런 것 하나 없이 부재중이라니...


나는 어머니와 곧바로 외갓집에 향했다.




외갓집에 도착한 것은 밤 늦게였다.


외갓집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현관문을 두드려봐도 아무 대답이 없다.




현관은 미닫이 문이라 가볍게 열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한걸음 들여놓은 순간 확신했다.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썩은내가 풍겼다.




어머니는 소리를 죽인채 오열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불을 켠다.


어디일까.




침실일까?


현관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면 침실이다.


침실에 가는 도중, 왼쪽 방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불간이다.


안을 보니 할머니가 떠 있었다.


목을 매달고 있다.




할아버지는 같은 방에서 이불 위에 누운 채 죽어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처럼 울었다.


우선 밖에 나가자고 어머니를 달랬지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경찰을 부르려 했지만 막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이라, 시골에서는 전파가 닿지를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가까운 파출소까지 걸어가 신고했다.


할아버지는 병사, 할머니는 자살인 것 같다고 경찰은 말했다.




병을 앓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 할머니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따로 장례식은 치루지 않기로 하고, 스님을 영안실에 모셔 경을 올리고 화장했다.


집에 돌아가는 날, 사진 같은 걸 챙길 요량으로 외갓집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두 분이 남긴 재산이라고는 집 한 채말고는 없었기에, 어머니는 상속도 하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이 마을에 오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어머니가 집에서 이런저런 처리를 하는 동안, 나는 그리운 길을 걸었다.




등교길이다.


공원에서 그네를 타면서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더 이상 이 마을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갈까?


하지만 그 발소리와 목소리는...




그걸 끊어내야만 이 마을과의 관계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 안에 들어가, 참수지장에게 가져온 주먹밥을 하나 바쳤다.


무엇을 바랄까.




누구를...


바로 생각나는 이름이 없었다.


나는 누구를 죽이고 싶은걸까.




이 마을 사람 전부를 죽여주세요.


그렇게 빌었다.


공원 쪽을 보자 대여섯명의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면식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


아마 저 사람들도 내가 누구인지 금새 알아차렸겠지.


내가 다가가자 눈을 돌리고,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지나쳤다.


그 이후 발소리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이 이야기는 네이버 카페 The Epitaph ; 괴담의 중심(http://cafe.naver.com/theepitaph)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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