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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후, 특기라고 해봐야 눈이 좋은 것 정도였던 내가 다행히 부동산 회사에 취직했다.

부동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민법 공부, 자격증 준비까지 여러모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발을 디딘 사회에서 마음이 꺾일 것 같은 적도 여러번 있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도 해서 여러모로 힘겨운 생활이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이 숨을 쉬고 일을 하고 밥을 먹으면 멋대로 시간은 흘러간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입사한지 3년 남짓 지나있었다.



다만 아무리 일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피로는 일을 하는만큼 쌓이기 마련이다.

정말 가끔 있는 연휴 전날 밤이라도 되며, 이불도 안 덮고 죽은 듯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그렇게 날이 밝은 연휴 첫날 토요일.



아마 5월 중순 즈음이었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에 눈을 뜨니, 이미 10시가 넘어있었다.

집에서 나갈 마음도, 뭘 딱히 할 마음도 들지 않았지만 멍하니 오늘은 뭘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창 밖에서 저 멀리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기다리라니까, A짱, 조금 기다려.]

무척 즐거운 듯한 여자 목소리였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자니,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랑 술래잡기라도 하며 놀고 있는건가 싶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섰다.

아무래도 목소리는 길 오른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우리 집은 대로에서 꺾어들어가는, 30m 정도 되는 짧은 길가에 있다.

지은지 10년 정도 된 2층 아파트.

거실과 방 하나, 부엌.



양 옆에도 맞은편에도 그 옆에도 똑같이 아파트가 있다.

뭐,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골목이다.

햇빛을 받아 때가 낀 게 잘 보이는 창문을 바라보며, 내일은 창문이나 닦을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시야에 아까 그 여자가 들어왔다.



[정말 기다리라니까, 얘.]

나는 그 여자를 평생 잊지 못하겠지.

황록색 가디건에 청바지를 입은 갈색 머리.



시원스레 건강해보이는 얼굴에, 기가 막히게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띄우고 있다.

30대 중반 정도 나이일까.

팔을 약간 아래로 내밀고 종종걸음을 하다가, 멈춰 서서는 역시나 기가 막히게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팔 너머에는 길만 있을 뿐이다.

옆에서 보면 혼자 웃는 얼굴로 소란 떨며 길을 걷는 여자로 보이겠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뒤쫓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름대로 씁쓸한 이야기지만, 그걸 본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어딘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너무 지쳤구나, 하고.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할만큼 자연스러웠다.



미소도,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도.

마치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우연히 아이가 파인더 밖으로 뛰쳐나간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 감각은 눈을 부릅뜨고 다시 바라보고도, 그 여자가 대로를 향해 골목을 벗어나 교통 안전 거울에 비치던 그림자가 사라질 떄까지 이어졌다.



여자가 이상한 것일까, 내가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어떤 것이 정답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것이 정답이더라도 무척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둘 다 이상한 거겠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네는 여자도.

골목을 벗어나 교통 안전 거울에 비치던 그 여자 조금 뒤에, 따라가는 아이 그림자를 분명히 목격한 나도.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고, 제대로 된 마무리고 뭐고 없는데다 별로 무서운 이야기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걸 몇번이고 보게 될때마다 느낀다.

잘 알 수 없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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