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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Trick or Treat!

이상한 옴니버스 창작단편 2018. 12. 15.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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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야기는 창작이므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 본 이야기는 출처 미 언급 및 상업적 용도 사용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사용과 재생산을 장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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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ck or Treat!




"싯팔, 진정하자고!"



문고리를 거칠게 끌어당겨 화장실 밖으로 나온 앤드류 모라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연신 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의 앞머리는 손길이 닿지 못한 땀방울들로 축축이 가라앉아있었다.


우리 모두 사는 동안 깨닫는 사실이 있다. 그건 바로 살면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거다. 앤드류에게 있어 오늘 10월 31일이 그런 날이었다.


앤드류는 열린 문 사이로 잠시 시선을 두고는 한 차례 의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안쪽의 잠금 똑딱이를 누르곤 문을 닫은 뒤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거실 복판의 싸구려 인조가죽 소파에다 몸을 던진 뒤에도 앤드류는 한참을 숨을 몰아쉬었다. 집시풍 카펫 위론 양발을 발작적으로 떨어대면서.



새벽까지 기다리자.. 차분히 그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래, 새벽까지 기다리는 거야. 거리론 달빛만 음흉히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럼 차를 끌고 나가 모든 게 해결되리. 앤드류는 한 손으로 천천히 앞머리를 쓸어 올린 뒤 소파로 한껏 등을 뉘었다. 세상사 모든 게 생각 하나로 답이 나오는 거라 깨닫고 나니 더없이 마음이 든든해졌다. 앤드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맥주캔 하나 정도는 있을 거라는 기대로.


그때였다. 집안 전체로 전형적인 싸구려 차임이 울려 퍼졌다. 앤드류는 거의 점프하듯 몸을 움찔거리고는 천천히 고개만 돌려 현관문 쪽을 쳐다봤다. 다시 차임이 울렸다. 연속해서 몇 번씩이나. 가, 그냥 가라고. 여긴 아무도 없으니까. 앤드류는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알잖은가. 살면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거. 이번엔 차임 대신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집안을 채웠다.



"저희 왔어요!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 여세요!"



앤드류는 온몸이 얼어붙어 버린 듯, 그러나 핏발 선 눈알 두 짝만 멀쩡한 양 현관문 전체를 훑어댈 뿐이었다.



"열라고요! 저희 왔다고요!"



이번엔 거칠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 앤드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잠금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맥없이 열려버린 것이다. 이제 현관문 몸통(군데군데 흰 칠이 벗겨진)이 있던 자리를 두 소녀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소녀라는 표현보다는 꼬마 여자애라는 표현이 더 들어맞겠다. 앤드류의 배꼽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을 신장이었으니까. 게다가 한 소녀는 그만큼도 안 되어 보였다.


두 진저는 구불거리는 컬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어깨 위까지 내려진 머리에 롱한 잿빛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둘의 얼굴은 자매임이 분명함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호박색 홍채마저도 서로가 똑 닮아있었다. DNA란 정말 우습고도 무서운 것이다.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두 소녀가 아직은 제멋대로인 크기의 앞니들을 활짝 드러내며 외쳤다. 외양과 목소리, 그리고 표정마저 누가 봐도 깜찍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었으나 앤드류에겐 상황은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었다. 두 소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얼어있는 앤드류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이어 언니 쪽이 천진한 어조를 그대로 이어 말했다.



"케이 아줌마가 아니잖아? 아저씨 누구예요?"



앤드류의 목에선 처음 갈라진 파열음이 새어 나온 뒤 몇 차례 가다듬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대답이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케이 아줌마의 동생이란다."



언니 쪽이 즉각 '아! 아저씨가 앤드류군요!'라고 반응한 뒤 동생 쪽 귀에 대고 잠시간 속삭였다.



"..나를 알아? 너희는 누구니? 문은 어떻게 연 거고?"



앤드류의 반문에는 조급함과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심히 낯설게 느껴졌다. 언니 쪽이 열쇠고리를 건 손가락을 번쩍 추켜세운 채로 대답했다.



"아줌마가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어요. 자기 동생이 있는데 이름이 앤드류라고. 저희는 아줌마 친구예요. 아줌만 항상 키를 같은 데에다 보관하죠."



예측불허였던 전개에 앤드류는 꼼짝도 않고서 머리만(실은 눈알도 같이) 굴려댈 뿐이었다. 동생 쪽이 앞니를 훤히 드러내곤 처음보단 자그마하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말했다.



"..그래, 사탕. 일단 들어오렴. 현관문 잠그고."


"케이 아줌마는요?"


"..엄마 집에 갔단다. 그러니까.."


"알아요. 아줌마네 엄마가 죽었잖아요. 근데 장례식은 이미 치렀는데."


"그게.."


"아! 유품 정리하러 간 거구나."



말을 마친 언니 쪽은 납득이 간다는 듯 입을 오므리곤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이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현관문과 잠금 걸쇠를 닫았다.



"그래서 사탕은요, 아저씨?"


"..잠깐만 기다리렴."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하면서 앤드류는 화장실 문을 한 번 쳐다봤다. 문과 잠금 걸쇠는 닫힌 상태 그대로였다. 앤드류는 최대한 굼뜬 동작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케이와 친하단다. 거기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앤드류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생각들이 돌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결론은 정해진 상태였다.



같이 처리해야 해.



앤드류는 싱크대 주변으로 자리하고 있던 사탕 바구니(케이가 색색의 포장지로 된 캔디류, 초코바들을 정성스레 채워둔)를 하단 선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저씨, 사탕 못 찾았나요?"



소리도 없이 언제 왔는지 언니 쪽이 새초롬히 눈을 치켜뜨고는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어.. 사탕이 없는.."


"말도 안 돼! 케이 아줌마가 우리 걸 준비 안 했을 리가 없어요! 우리가 이 동네에서 유일한 친구라고요!"


"저기.. 얘야.."


"내 이름은 루시에요."



언니 쪽이 자기 스웨터 가슴팍에 수 놓아진 철자를 가리키며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어 거실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동생 쪽을 가리키곤 '쟤는 루나예요'라고 말하자 그걸 또 들었는지 동생 쪽이 한 손을 치켜들어 보였다.


앤드류의 눈에 그제야 루시와 루나의 차림새가 자세히 들어왔다. 두터운 조직감의 롱슬리브 원피스, 그리고 가슴팍엔 색실로 이름이 새겨있었다. 제 엄마가 손으로 직접 짠 것임이 분명했는데 앤드류로선 대관절 무슨 코스프레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루시'와 '루나'라는 캐릭터가 어디에 나오는지도 말이다. 그런 앤드류를 단박에 알아차렸는지 루시가 말했다.



"이건 엄밀히 말해 할로윈 복장은 아니에요. 그래도 일종의 코스프레인 셈이죠. 재미있죠? 그러니까, 차림새 하나로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게요."


"그렇구나.. 그래, 루시야.. 사탕은 없는데 대신 코코아는 어떻니?"


"코코아랑, 또 딴 건 없어요?"



상단의 선반 안을 헤집으며 앤드류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집안에 잡아두고서 기회를 엿봐야 한다고. 그러려면 이 애들 입맛에 맞을만한 게 필요했다. 하지만 앤드류의 시야에 들어오는 간식이라곤 비스킷 한 팩뿐이었다. 앤드류는 팩째로 쥐어 들어선 루시 앞에 보이고는 조심스레 '이거 괜찮겠니?'라고 물었다. 루시는 처음 현관문을 박차고 왔을 때의 그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젠장! 로터스! 우리 이거 좋아해요. 다른 애들은 냄새가 어쩌고 하지만. 아주 잘했어요, 앤드류 아저씨."



루시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앤드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코코아는 미지근하게 부탁해요. 저희는 뜨거운 걸 못 먹거든요.'라고 말했다. 앤드류는 루나가 앉아있는 소파로 향하는 루시의 뒷모습을 쫓으며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벌었군. 집에 잡아두는 데에도 성공했고. 하지만 쟤들 부모가 찾아 나설 때까지 시간이 넉넉한 게 아니야. 싯팔.. 무리해서라도 서둘러서 이것들을 전부 싣고 떠나야 하나? 아니지, 쟤들 부모가 여기 온 걸 알 텐데.. 그냥 사탕 줘서 보냈어야 했나? ..아니야. 어찌 됐든 나를 본 걸 얘기할 테니.



불빛 아래 피루엣을 도는 우유 잔을 멍하니 응시하는 앤드류의 눈꼬리들로 눈물이 맺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마치 운명이라는 놈이 심술궂게 자신을 계속해서 벼랑으로 모는 것 같다고 앤드류는 생각했다. 이쪽 벼랑을 피해 가면 이번엔 저쪽 벼랑으로.. 그런 식으로 말이다. 전자레인지에 두 번째 우유 잔을 넣으면서 앤드류는 싱크대 서랍에서 식칼을 집었다. 가장 큰 크기의 식칼이었다. 앤드류는 칼을 허리춤에 조심스레 꽂고는 두터운 플란넬 셔츠로 가렸다.


로터스 팩과 코코아 잔 둘을 실은 우든 쟁반을 들고 앤드류가 나타나자 루시와 루나는 함박미소를 흘리며 발작적인 박수를 만들었다. 둘은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쟁반으로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로터스를 집고선 연신 코코아에 적셔댔다.



"..천천히 먹거라."



앤드류는 그런 둘 앞에 서서 한 손으로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겁박해? 그러기엔 너무 맹랑해 보이고.. 게다가 그래 봐야 뒤로 미루는 것밖엔 안 되니.. 오, 주여. 결국은 이 자리에서 할 수밖에..



결심을 다진 앤드류가 허리춤의 플란넬 셔츠를 걷는 순간, 루시가 별안간 꺅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닦을 것 좀요! 루나가 코코아 잔을 엎었어요!"



앤드류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걷어 올려진 허리춤의 셔츠를 다시 내리고선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가져온 키친타올을 길게 한 번 끊어 묵묵히 탁묵히 탁자를 닦았다. 루시가 말했다.



"루나, 화장실 가서 손 씻자."


"잠깐만, 얘들아! 화장실은 안 돼!"



앤드류는 기겁해선 거의 소리 지르듯 외쳤다.



"왜요, 아저씨? 루나 손이 끈적끈적하다고요."



앤드류의 외침에 깜짝 놀랐던 루시가 다소 심통이 난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때였다. 루시와 앤드류가 서로 눈을 맞추고 있는 그 사이로 쿵 하는 소리가 들어왔다. 몇 번씩이나. 셋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인 화장실 쪽을 바라봤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가 멈추더니 이번엔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바짝 엎드린 자세의 케이였다. 케이가 양손과 양발을 교차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두 눈은 치켜 올라가 홍채가 겨우 보이는 정도였고 혓바닥은 길게 늘어뜨려져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루시가 침묵을 깨고선 말했다. 아주아주 냉소적인 어조로.



"오, 앤드류 아저씨. 케이 아줌마를 어떻게 한 거야."



케이가 고개를 들어 루시와 루나, 그리고 앤드류를 쳐다봤다. 고개가 들려지자 목 전체로 푸르딩딩한 멍 자국이 자리하고 있는 게 나타났다. 또 늘어뜨려진 혓바닥으론 연신 침전물이 흐르고 있었다. 케이의 목 안에서 쇳덩이를 긁어내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앤드류우우우!"



케이가 양발과 양손을 푸드덕거리며 스프링이 튕겨 나가듯 전진했다. 고개가 좌우로 꿈틀거려지며 기는 게 꼭 거대한 지네를 보는 듯했다. 앤드류는 놀라 목구멍 밖으론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칼을 빼 들었다. 케이와 앤드류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앤드류가 칼을 쥔 손을 치켜든 순간, 케이가 거의 점프하듯 달려들어선 앤드류의 한쪽 발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그렇게 둘이 뒤엉켜 넘어지는 와중 앤드류는 케이의 목덜미로 정확하게 칼을 꽂아 넣었다.



"으아아악! 시잇팔!"



허나 비명이 터져 나온 곳은 앤드류의 목구멍이었다. 입을 쩍하고 벌린 케이가 그대로 앤드류의 오른 어깻죽지를 물은 것이다. 목덜미로 칼이 꽂혔음에도 케이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처음 화장실 문밖으로 나올 때의 그 한기 서린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또 치켜 올라간 눈가론 여전히 홍채만 겨우 보이고 있었다.


앤드류는 자신의 어깻죽지를 물고 있는 케이의 얼굴을 밀쳐내고, 때리고, 잡고 흔들어 젖혀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더 기가 차는 건 칼이 꽂혔음에도(족히 한 뼘은!) 어깻죽지로 전해지는 치악력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거다. 게다가 케이의 목덜미론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저리 가라고, 이.. 빌어먹을 년아!"



이제 앤드류에게 남은 건 악을 질러대는 것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 앤드류는 충실히 그 수단을 이행했다. 물론, 모두의 인생사에서 그렇듯 이 수단은 별반 효과가 없었지만. 


남은 수단까지 전부 동원했던 앤드류는 이제 그저 자신의 어깻죽지로 입을 박아넣은 케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어찌나 세게 무는지 케이의 이가 앤드류가 꽂은 칼보다도 더 깊이 살 속으로 박힌 듯했다. 그럼에도 케이는 멈추지 않았다. 앤드류의 청각으론 플라스틱 조각이 깨지는 듯한 불쾌한 파열음이, 그리고 시야론 케이의 이들이 더는 못 버티고서 하나둘씩 짜부라지는 게 들어왔다.


앤드류의 눈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케이처럼 홍채들이 눈 위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 순간 앤드류는 자신의 머리맡으로 루시와 루나가 우뚝 서 있음을 깨달았다. 앤드류의 목구멍에서 희망과 절실함에 찬 음성이 쥐어짜여 나왔다.



"얘들아.. 칼.. 그걸 빼서.. 아저씨한테 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시가 칼자루를 양손으로 잡고선 몇 차례 앞뒤로 흔들더니 쑥하고 칼을 빼 들었다. 앤드류의 희망에 겨운 눈망울을 응시하며 루시가 말했다.



"정말이지 앤드류 아저씨, 케이 아줌마를 어떻게 한 거야."



루시는 루나 손에 칼을 쥐여주고는 앤드류의 머리맡 바로 위로 가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곤 양손으로 앤드류의 머리채를 야무지게 쥐어 잡아선 그 고개가 들쳐지게 힘껏 자신 쪽으로 당겼다. 이어 영문을 몰라 바삐 돌아가는 앤드류의 시야로 루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양손으로 칼을 치켜든 루나의 모습이.


'기다려'였을까? 아니면 '왜 그러는 거야?'였을까? 어쨌든 앤드류의 입에서 채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루나는 치켜진 목을 향해 그대로 칼을 꽂아 넣었디. 앤드류의 목에서 잠시 수프가 끓어 차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곧 그 소리마저 멎어버렸다. 두 소녀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마치 서로 끌어안고 있는 듯한 오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리론 해가 완전히 저물고 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요란한 브레이크 음과 함께 차에서 내린 로버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뒤 그 위를 다른 한 손에 들려있던 보안관 모자로 조심스레 덮었다. 현관문 앞으로 마중 나와 있던 부보안관 모자를 쓴 남자가 그런 로버트를 반겼다.



"로버트, 빨리 왔군요."


"그래, 아들놈이랑 마누라를 길바닥에 버려두고선 혼자 차를 몰고 왔거든. 엄청난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캐스퍼를 본 적 있어?"


"집에 들어가면 사모님께 살해되겠군요."


"맞아. 그러니까 내가 내일 안 나오면 제1 용의자로 내 마누라를 올려놓으면 돼."



둘은 안마당으로 아무렇게나 쳐진 노란 테이프를 지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로버트를 본 그의 부하들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부하 중 하나는 핸디용 카메라로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촬영하고 있었다. 로버트와 부보안관은 문 열린 화장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런, 케이.. 불쌍하게도.."


"목졸림 당해 질식사한 것 같아요. 거실로 가죠."



거실 복판으론 눈이 까뒤집혀진 앤드류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목 정중앙으론 칼이 똑바르게 꽂혀있었고 주변으로 넓게 얼룩진 검붉은 피가 마치 꽃잎처럼 앤드류를 감싸고 있었다.



"현장만 잘 보존했다가 시경이랑 과학수사 애들한테 인계하면 돼요."


"이놈이 케이 남동생인가? 그 약쟁이 놈?"


"예, 맞아요. 얼마 전 케이 씨네 어머님 장례식이 있었더라고요."


"잠깐만, 내가 맞혀보지. 자기 앞으론 상속된 게 하나도 없는 걸 알고서 푼돈이라도 옭아내려고 찾아왔다가 말다툼이 붙었고.. 그다음은.. 이런 거겠구먼."


"아마 그런 거겠죠, 콜롬보 씨. 식료품점에 담배 사러 가던 노인네 하나가 집안에서 남자가 소리 질러 대는 거랑 뒤엉키는 소리가 나니까 신고했어요. 이 동네 사람들 모두 케이 씨가 혼자 사는 걸 아니까요."


"..그럼 역시 이 약쟁이 놈이 화장실로 도망가던 케이를 쫓아가선 목 졸라 죽이고는, 그리곤 자포자기하는 식으로 자살한 건가? 그런데 이렇게 자기 목에다 칼 꽂고 자살하는 게 가능한가?"


"약쟁이 놈이 뭔들 못하겠어요. 집안은 밀실에다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고요. 케이 씨도 목 졸림 외엔 외상이 없는 데다 약쟁이 놈 역시 칼에 의한 자상 말고는 없어요. 자포자기로 그랬는지 약에 취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스테레오 타입 사건이죠."


"허긴. 오늘의 토픽에도 못 실릴 일이지."



대화가 멎은 뒤에도 잠시간 앤드류를 내려다보던 로버트는 이번엔 소파 앞에서 가만히 빛내고 있는 호박색 홍채 두 쌍과 눈을 마주쳤다. 



"이 애들은 뭐야?"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죠."


"여기 집 애들이야?"



부보안관이 한 차례 콧김과 함께 '그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로버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호박색 홍채들과 눈을 맞춘 채로 작게 읊조렸다.



"젠장.. 얘들아, 나한테 뭐 말해줄 게 없겠니?"



로버트의 말이 들리는지 아닌지, 각각 '루시'와 '루나'라는 이름이 새겨진 스웨터 재질의 옷을 입고 있는 자그마한 오렌지 태비 한 쌍이 탁자 위로 놓인 코코아와 로터스를 바라보며 연신 혀를 날름거렸다.








-fin-




















후기


단순한 루트와 아날로그식 연출을 뽐내는 그 옛날 공포 단편들을 이제는 사람들이 별반 반기질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제법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이야기들엔 어쩐지 고풍스러운 기품(하지만 억지스럽진 않은)이 있다고 느껴져서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엔 꼭 고양이가 등장한다. 그래서 나도 언젠간 그런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었다. 비록 나는 요크셔파이지만.


예전 창작단편인 '귀신 들린 집', '새벽녘 나를 찾아온 그대여'와 이번 단편이 바로 그런 부류겠다.



https://blog.naver.com/medeiason/221418779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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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리조트에서 1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무렵 이야기다.


부지 안에는 넓은 산책로가 있고, 수영장이나 체육관도 있었다.


밤중에는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투숙객이나 불법침임자가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지.




실제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사장이 함구를 잘 한 덕에 공공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빠짐없이 돌아보면 2시간은 걸리는 부지를, 사원이나 알바생, 야간 담당 경비원이 2인 1조가 되어 교대로 돌아보는 게 일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 부지 안에 나타나는 고기라고 불리는 괴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처음 만나면 딱 한번만 몸이 아프고, 그 외에 특별히 해 끼치는 건 없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다른 곳에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근로계약서를 썼다.


고기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에게도 알려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이틀째 되는 날, 빠르게도 고기가 나타났다.


선배와 산책길을 순찰하고 있는데, 회중전등을 비춘 곳에 갑작스레 나타났다.


선배는 [아, 고기다. 도망쳐.] 라고 말하더니, 나를 끌고 길을 벗어났다.




고기는 유치원생 정도 키에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살색 그대로, 엄청 땅딸막한 꼴을 하고 있었다.


머리와 목, 몸통의 경계가 애매한데다, 피부가 덜렁덜렁하게 늘어나 있어, 눈도 코도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입 같은 건 보였지만, 사람으로 치면 배가 있을 곳 쯤에 있어서, 보기만 해도 이상했다.


손발은 확실히 달려 있었지만, 너무 짧아서 팔꿈치와 무릎의 구별이 가질 않았다.


그런 모습으로 아장아장 천천히 걷고 있었다.




우리들의 존재는 알아차린 듯, 스쳐 지나가면 언뜻 쳐다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대로 지나갔다.


이상하리만치 달콤한 냄새가 났다.




선배는 [저거야, 저게 고기야. 너는 내일부터 드러눕겠구나.] 라며, 웃으며 말했다.


날이 밝자 선배는 곧바로 주임에게 연락을 넣었다.


나는 사흘간 일을 빼고 휴가를 얻었다.




아침, 집에 돌아오자 낮부터 심한 발열과 설사가 일어나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드러누웠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냉정해진 뒤 내가 제일 두려웠던 건, 무슨 미확인 바이러스라도 감염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는 예정대로 1년간 계속했지만, 고기를 본 것은 그때 한번 뿐이었다.


그 리조트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들 당연한 듯 여기는 분위기였지만, 내게는 무척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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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5ch괴담][930th]자동문

괴담 번역 2018. 12. 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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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느 기계 메이커 공장에서 일하던 무렵 이야기다.


그 공장 심야 순찰을 하는 경비원들 사이에서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곤 했다.


늦은 밤, X공장 복도를 흰 그림자만 있는 존재가 배회한다는 소문이었다.




X공장 옆에는 커다란 공장이 한 동 더 있고, 공장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통로의 자동문이 고장인지, 주변에 사람이 없는데도 멋대로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어느 밤, 나는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한밤 중 공장에 홀로 남아 기계 정비를 하고 있었다.




정비하던 기계는 정기적으로 물을 넣어줄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양동이에 물을 퍼서 끌차로 운반하고 있었다.


마침 딱 그 고장난 자동문을 통과하기 얼마 전, 통로에 놓여져 있던 짐과 끌차가 부딪히는 바람에 물이 조금 쏟아지고 말았다.


통로를 물바다로 만들어 놓고 그냥 가버리면 다음날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기계 정비를 마친 뒤, 물을 닦을 걸레를 가지고 자동문 앞으로 돌아왔다.


문앞에 도착한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양동이의 물이 쏟아져 생긴 웅덩이에서 시작해, 자동문 쪽으로 이어지는 젖은 발자국이 보였다.




X공장에서는 안전을 위해 작업원은 모두 작업용 안전화를 신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발자국은 안전화 바닥의 미끄럼 방지용으로 붙어 있는 고무 모양이 아니라, 슬리퍼처럼, 마치 평평한 면으로 된 것 같은 모습의 자국이었다.


그 뿐 아니라, 공장에 남아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다는 걸 진작에 확인했던 터였다.


공장 안 역시 작업장 외에는 불이 꺼져 있었고, 경비원이 순찰을 돌 시간도 아니었다.


옆 공장도 아까 내가 물을 뜨러 갔을 때 문을 잠궜고, 열쇠는 내 주머니 안에 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어 머뭇머뭇거리며 옆 공장 상황을 살피러 가봤지만, 문은 잠겨 있고, 누가 안에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안도한 나는, 자동문 앞으로 돌아가 웅덩이를 닦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웅덩이 수면에, 흰 그림자 같은 게 문 쪽으로 스쳐지나가는 모습이 비쳤다.




깜짝 놀라 일어나서 주변을 확인했지만, 주변에는 딱히 별다를 게 없었다.


수면에 비친 것 같은 하얀 것도 마땅히 보이질 않았고.


기분 탓인가 생각하며, 다시 물을 닦으려 하던 순간, 등 뒤에서 자동문이 갑자기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문 앞에는 당연히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문 앞에는 평평한 바닥으로 찍힌 발자국이 이어져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 내가 아까 옆 공장을 보러 갈 때도 저런 발자국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살려봐도, 웅덩이에서 자동문 쪽으로 발자국이 점점이 이어져 있었을 뿐, 문 앞에는 없었을 터였다.


그쯤 되자, 전에 경비원들에게 들었던 소문이 떠올라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웅덩이를 닦아내고, 공장에서 도망치듯 퇴근했다.




돌아가기 직전, 공장의 불을 끌 무렵, 자동문 쪽을 슬쩍 보니 문은 아직도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후에는 특히 이상한 일은 없었다.


공장에서 사고가 있었다거나 과거에 사람이 죽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들은 게 없고.




다만 그 자동문은 몇번이고 수리업자가 와서 문을 고쳤지만, 아직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들른 편의점에서, 혹은 직장이나 병원에서, 사람도 없는데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다.


대개 그런 경우 센서의 오작동이라고 설명이 되겠지.




하지만 문에 붙어 있는 적외선 센서가 이상한 게 아니라,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문 앞에 서 있는 건 아닐까.


센서는 그걸 인식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을,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안 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언제나 거기에 있어서, 우리 곁을 떡하니 배회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아직도 그 문은 가끔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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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괴담][5ch괴담][929th]독 넣은 점쟁이

괴담 번역 2018. 12. 3.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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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JR 엣⚫⚫지마역이라는 한산한 역에서, 주변 대학교와 상고 학생들 사이에서 퍼졌던 유명한 소문이있다.


최근에는 아파트 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옛날에는 역에 서는 열차도 적었다.


그 탓에 주변 사람들도 근처 몬⚫⚫쵸역을 이용하는 게 더 편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아침저녁 출퇴근길에는 그럭저럭 사람이 들었지만, 한낮에는 홈이 거의 비어 있었다.


거기서 독 넣은 점쟁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 것이다.


낮에 아무도 없는 홈에서 혼자 열차를 기다리고 있으면, 검은 베레모에 검은색 록밴드 셔츠를 입은 중년남자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슬쩍 다가와, 작게 포장된 봉투 하나를 넘겨준단다.


남자는 [안에는 독이 든 과자가 들어있어. 누구 싫은 녀석이 있으면 먹여버리라고.] 라고 말한 뒤, 달려가 버린다고 한다.


봉투를 열어보면, 가게에서 파는 작은 과자랑 메모지가 하나 들어있다.




그 메모지에는 기분 나쁘게도 받은 사람의 생년월일과 혈액형이 써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간단한 그 날의 운세도.


실제로 독 넣은 점쟁이와 만나봤다는 동생 친구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생년월일과 혈액형은 실제 그 녀석 것과 딱 들어맞았다고 한다.




뭔가 뒷조사라도 하고 건네줄 대상을 정하는걸까?


당연히 과자를 직접 먹어봤다는 사람도, 누구에게 받아서 먹어봤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기에, 큰일이 나지는 않은 거 같다.


그냥 도시전설이라면 별 상관 없겠지만, 이 남자 이야기는 역이 개업하고 얼마 뒤 소문이 퍼져나간 때부터 시작됐다.




벌써 25년은 족히 됐는데, 전해 들려오는 용모가 전혀 변하질 않는다.


최근에는 아예 귀신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는 등, 지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만나더라도 상대를 안하면 별 피해 입을 것도 없겠지만, 어찌됐든 뭔가 묘하게 악의로 가득 차 있달까, 기분 나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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